하정준은 단골인 듯했다. 평범한 중년 남성 사장은 두 그릇의 소고기 국수를 내오면서 친근하게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요즘 통 안 보이던데, 많이 바빴나 봐요?”하정준은 그릇에 있는 파를 하나하나 골라내며 말했다.“네. 다른 가게 돈 벌어주느라 바빴어요.”사장은 화를 내지 않고 껄껄 웃으며 송서희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호의적인 눈빛으로 말했다.“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데려오다니. 여자 친구인가 봐요?”하정준은 부정하지 않고 마치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나 아니면 죽고 못 산다고 딱 달라붙었는데 어쩌겠어요.”사장의 약간 놀란 표정 속에서 송서희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눈에 띄지 않는 외진 곳에 있는 가게였지만 맛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진하고 구수한 국물에 쫄깃한 수타면은 정말 일품이었다.따끈한 국물을 마시니 강변의 차가운 바람도 잊는 듯했다.송서희는 먹느라 좀 더워졌는지 코끝이 발그레해졌다. 고개를 드니 하정준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는 국수는 거의 먹지 않고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아 투박한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긴 다리를 네모난 탁자 아래에 넣고 있는 모습이 왠지 불편해 보였다.“맛있어?”송서희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이렇게 숨겨진 가게를 어떻게 알았어요?”“연성이 누구의 구역인지 몰라?”그는 당연하다는 듯 오만하게 말했다.“내가 모르는 곳은 없어.”송서희는 무심코 말했다.“여자 화장실도 잘 알아요?”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이 너무 대담하게 그에게 반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정준은 오른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말이 많네, 다 먹었어?”“다 먹었어요.”송서희는 휴지로 입술을 꼼꼼하게 닦았다. 낮에 바른 립스틱은 이미 지워져 원래의 촉촉하고 붉은 입술이 드러났다.하정준은 그녀를 흘끗 보며 말했다.“다 먹었으면 계산해.”“제가 계산해요?”그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저 예상 못 한 말이었다.심
그날 밤 송서희는 잠을 깊이 이루지 못했다. 꿈은 띄엄띄엄 이어졌고 많은 장면들이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잠에서 깨어나니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았고 커튼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반짝이는 벽지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맑고 고요한 아침이었다.송서희는 자신에게 속하는 침대에 누워 방안을 둘러보았다.심씨 가문에서 10년을 살아온 그녀에게 모든 등의 온도와 모든 타일의 무늬는 마치 혈액에 녹아든 듯 익숙했고 2층의 나선형 계단은 눈을 감고도 오르내릴 수 있었다.여기서 연성고까지는 차로 15분 거리였다. 그녀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웠고 열두 살 때 충동적으로 키우기 시작한 거북이는 지금도 마당 연못에서 한가로이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집’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머릿속에 구체화될 때면 늘 이 집이 떠올랐지만 열여덟 살 이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떠나 있던 5년은 마치 기나긴 둔감화 훈련과도 같았고 귀국한 순간부터 이 집을 떠날 카운트다운은 시작되었다.이젠 나갈 때가 됐다.서수현은 그녀의 계획을 듣고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조용히 응원해줬다.“우리 집에 먼저 와서 살아. 너 어차피 우리 집 열쇠 있잖아. 방 두 개니까, 좋으면 계속 같이 살아도 돼.”송서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걱정 말아요. 난 갈 데 있어요. 송명로 9번지에 집이 있거든요.”약을 먹던 서수현은 사레들려서 콜록콜록 기침했다.“송명로 9번지?”“왜요? 거기 뭐 문제 있어요?”서수현이 너무 놀라니까 송서희는 좀 어리둥절했다. 몇 년 동안 외국에 있었는데, 송명로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문제는 거기 집값이 말도 안 되게 비싸서 나 같은 흙수저는 쳐다도 못 본다는 거지.”서수현은 자기 가슴을 토닥였다.“너는 아직 재벌 아가씨티가 안 나. 가끔 네가 돈 많은 거 까먹는다니까!”“지금 나 놀려요?”송서희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내 40억은 개밥으로 줬나 봐요.”서수현: “왈왈.”“미쳤어. 진짜.”송서희가 웃으며 욕했다. 서수현도 웃으며 다시 물었다.“이 일
그때가 되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심도윤 앞에 피어오르던 담배 연기는 바람에 흩어졌고 먹물처럼 짙은 밤하늘이 그의 눈동자에 깊은 먹색으로 펼쳐졌다.“저주하냐? 네 오빠가 그렇게 오래 못 살 것 같아?”“그런 뜻이 아니에요.”심도윤은 해명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심도윤의 목소리에는 바람 소리가 섞여 있는 듯했다.“우리 구아가 다 컸구나. 어릴 때처럼 무슨 일이든 오빠를 찾지도 않고.”송서희의 코끝이 갑자기 시큰해졌다. 억눌렸던 감정이 둑이 무너지듯 눈물샘을 터뜨렸다.그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5년 전에 보내진 그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구아가 아니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콩알만 한 눈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소리 없이 사라졌다.심도윤은 담배를 끄고 손바닥을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송서희는 아름다운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물에 담갔던 비단처럼, 검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다른 사람이 함부로 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성훈이 예전에 심심풀이로 심도윤처럼 그녀의 머리를 만지려 했을 때도 허락하지 않았다.“연구소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면, 뭘 하고 싶어?”심도윤이 물었다.송서희는 목이 메이는 것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말했다.“선배랑 함께 창업할 거예요.”심도윤은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고 말했다.“창업하고 싶으면 너만을 위한 회사를 하나 차려줄까?”송서희는 고개를 저었다.“선배가 진행 중인 액체 수소 무인기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아요. 엔젤의 연구 능력도 뛰어나고 미래 발전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해요. 아주 유망하다고 봐요.”심도윤은 그녀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그럼 상장해서 종 치는 날을 기다리지.”“네.”송서희가 대답했다.그녀는 차 안에서 전화로 인해 중단되었던 말을 떠올리며 머뭇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오빠...”“나가 살고 싶으면 나가 살아.”심도윤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미국은 '돌아간다'라는 표현을 쓰는 곳이 아니죠.”송서희가 말했다.“난 그곳이 싫어요. 외국에서 하던 일은 이미 그만뒀고 이번에 돌아왔으니 다시 가지 않을 거예요.”“누가 그만두라고 했어? 도윤이야 아니면 박혜은이야? 이렇게 큰일을 나와 네 아빠와 상의도 없이 결정했다고?”송서희는 그녀의 불만에도 침착하게 말했다.“내가 결정한 일이에요.”“그들의 허락 없이 너 혼자 결정했다고?”최해경은 심씨 가문의 누군가가 그녀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는 송서희가 심씨 가문과 가까운 게 싫었다. 이 일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나 뒤에서나 얼마나 손가락질을 받았던가. 마치 그녀가 아이 하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에게 맡겨 키우는 것처럼 말이다.“도윤이가 널 연구소에 넣으려고 한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승민과 네 아빠는 오랜 친구인데 도윤이가 네 아빠를 제쳐두고 승민이를 통해 네 일자리를 알아봐 주다니. 이건 우리를 무시하는 거잖아?”송서희가 말했다.“오빠가 두 분 대신 내 일자리 알아봐 준 게 불쾌하면 직접 서원장한테 부탁하던가요.”최해경은 당연히 그런 뜻이 아니었다.송서희는 그걸 알고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안심하세요. 연구소 일은 거절했어요. 근데 좋아할 일도 아니에요. 거절한 이유는 내가 다른 사람이랑 회사 차릴 거라서요.”“오빠랑 아줌마한테 화풀이하지 마세요. 제가 한국에 오고 싶어서 왔고 남고 싶어서 남는 거예요. 나도 이제 성인인데, 내 맘대로 할 수 있잖아요.”최해경의 얼굴이 굳었다.“서희야, 내가 네 친엄마는 아니지만 법적인 엄마잖아. 심씨 가문이 너한테 아무리 잘해 줘도 내가 널 보내버리면 아무도 널 못 도와.”송서희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5년 전, 그녀는 그렇게 해외로 보내졌으니까.“전 아무 데도 안 가요.”송서희는 당당하게 말했다.“전 더 이상 5년 전처럼 반항도 못 하는 미성년자가 아니에요. 절 비행기에 태우고 싶으면, 먼저 절 묶어 놓고 얘기하세요.”최해경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몇 년 외국 생
진동준의 가슴은 거칠게 오르내렸고 복어처럼 부풀어 오른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그때 그는 대머리 한 명을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하 대표님, 당신 회사의 범 본부장이 직접 대진 그룹과의 협력을 약속했어요. 그런데 내게서 온갖 이득을 챙기고는 약속을 어겼거든요. 하씨 가문의 세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 겁니까!”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하씨 가문에 누명을 씌우자 범세용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진동준을 밀치며 호통쳤다.“뭔 소리예요! 생각하고 말해요!”하정준은 주변 시선은 신경도 안 쓰고 오른손을 주머니에서 꺼내 진동준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범세용의 매끈한 머리를 훑었다.“네가 쟤 처리해. 아니면 내가 널 처리한다.”“걱정 마십시오. 이 일은 제가 깨끗하게 처리하겠습니다!”범세용은 연신 다짐하며 진동준을 끌고 갔다.“우리끼리 해결해요. 대표님 앞에서 뭐 하는 짓입니까!”권하영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마 기다리다 지친 모양이었다.송서희가 말했다.“정준 오빠, 저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그의 앞을 지나 계단으로 향했다.하정준은 그녀가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그렇게 나랑 자고 싶어?”“어디...”수화기 너머 권하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끊겼고 이어서 마치 야유회라도 온 듯한 “오오오오”하는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권하영이 스피커폰을 켠 것이다.하정준도 들었는지 물었다.“원숭이랑 통화하는 거야?”송서희는 잠깐 멍해졌다가 10초도 안 되는 통화를 황급히 끊고는 하정준의 뒤에 서 있는 남자들을 의식적으로 쳐다보았다.그들은 재빨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천장을 보거나 바닥을 보거나 허공을 응시하며 ‘나는 귀머거리입니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쓴 팻말이라도 머리에 걸고 싶은 심정이었다.“아니요...”그녀는 드물게 당황하며 말했다.“오빠한테 그런 욕심 부린 적 없어요.”“그럼 방
박혜은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육나나에게서 송서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표정이 곤란해졌다.“어쩌다 이렇게 안 좋은 우연이...”어디에서든 옷이 겹치는 건 어색한 일인데, 하물며 오늘 같은 자리에서는 더욱 그랬다.잠시 후 두 사람이 마주치면 분위기가 더 미묘해질 것이다.심도윤도 이럴 줄은 몰랐는지 잠시 멈칫하더니 송서희를 달랬다.“괜찮아. 나나는 속 좁은 아이가 아니야.”“아무리 마음이 넓은 여자라도 옷이 겹치는 걸 신경 안 쓸 수 없어. 오늘이 무슨 날인데.”박혜은은 걱정에 미간을 찌푸렸다.“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나나를 난처하게 만들면 부모님 보시기에도 좋지 않고 나나의 부모님 마음도 불편해지실 거야.”심도윤은 단추를 풀고 자신의 양복 재킷을 송서희에게 건넸다.“일단 이거 입어.”박혜은의 미간은 더욱 좁아졌다.“딱 봐도 네 옷이라는 게 티가 나잖아.”심도윤이 다시 말하려는 순간, 송서희가 일어섰다.오늘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첫 상견례 자리에서 육나나를 서운하게 할 수는 없었다.그러니 자리를 피해야 하는 것은 그녀였다.“옷 갈아입고 올게요.”다행히 이런 식당의 룸은 문이 두 개였다. 그래서 그녀는 육 씨 일가가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작은 옆문으로 나갔다.그녀는 매니저에게 급하게 입을 옷이 있는지 물었지만 식당에 그런 옷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장 가까운 여성 의류 매장 위치를 묻고는 식당 밖으로 뛰어나갔다. 새 옷을 사서 갈아입을 생각이었다.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문턱을 넘어 모퉁이를 도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하정준은 그녀의 팔을 잡아주었고 덕분에 그녀는 그의 몸에 부딪히지 않았다. 송서희는 반걸음 뒤로 물러나 균형을 잡았다. 그는 손을 놓고 나른하게 늘어진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확 덮치려고.”하지만 송서희는 오늘 그와 실랑이를 벌일 시간이 없었다.“정준 오빠, 미안해요. 지금 급해서...”하정준의 뒤에 있는 차를 보자 송서희는 더 이상 격식
이날 연회의 마지막에 박혜은은 육나나에게 아주 귀중한 보석 세트를 첫 만남 선물로 주었다.물방울 모양의 에메랄드 보석이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박혀 눈부시게 빛났고 어울리는 반지와 귀걸이도 있었는데, 각각 수십억 원의 가치가 있었다. 이 보석 세트를 송서희는 그녀와 심정원의 결혼사진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녀가 결혼식 때 착용했던 것이었다.“이건 내가 도윤이 아빠랑 결혼할 때 도윤이 할머니께서 주신 선물인데, 이제 드디어 너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되었구나.”가보를 정식으로 약혼도 하기 전에 육나나에게 선물하는 것을 보면 박혜은이 이 예비 며느리를 얼마나 인정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육 씨 일가족은 과연 매우 기뻐했고 육나나는 감격하여 바로 일어나 박혜은의 목을 껴안고 애교를 부렸다.“흐엉, 어머님, 저를 너무 예뻐해 주시는 거 아니에요? 제가 지금 바로 어머니라고 부르면 너무 염치없어 보일까요?”박혜은은 너무 기뻐서 입이 귀에 걸렸다.김예진은 웃으면서 나무랐다.“얘,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몰라?”“뭐가 부끄러워요?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육나나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목에 있던 목걸이를 빼며 말했다.“이 목걸이 너무 예뻐요. 도윤 씨, 나 좀 채워줘요.”심도윤은 목걸이를 받아 그녀에게 걸어주었다.육나나의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 빛났고 눈은 별처럼 반짝였다. 그녀의 모습에 어른들은 모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송서희는 테이블 맞은편에서 마치 무대 아래 앉아 자신과는 다른 세상 이야기인 듯 행복한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박혜은과 김예진은 목걸이가 참 잘 어울린다며 칭찬을 쏟아냈다. 이때 육나나가 송서희에게도 일부러 물었다.“구아야, 예뻐?”송서희: “예뻐.”육나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예쁘다고 하니 정말 예쁜가 보네.”연적 앞에서 행복을 과시하는 게 더 짜릿할지도 모른다.‘안 예쁘다고 할 걸 그랬나.’송서희는 속으로 생각했다.김예진은 두 사람이 다정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너희 둘 정말 잘 맞는구나.”“우
하정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느긋하게 케이크를 음미하고 있었다. 송서희는 그를 쳐다보며 그의 개를 좀 어떻게 해 보라고 말했다.“얘가 나를 핥았어요.”하정준은 눈도 들지 않고 말했다.“배고픈가 보지.”‘? 배고프면 사료를 먹어야지.’송서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는 다시 조금씩 옆으로 몸을 움직여 개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았고 손은 당연히 개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두었다. 그러면서 오늘 긴 바지를 입고 오길 잘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집에... 사료 없어요?”자기 배만 채우고 개밥은 안 챙겨서 개가 사람을 핥을 정도로 배가 고픈 거 아닌가.“없어.”“그럼 평소에 얘는 뭘 먹고 살아요?”하정준은 케이크를 반쯤 먹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송서희를 흘끗 보며 말했다. “고기.”짓궂은 하정준이 또 자신을 놀리는 건 알지만 송서희는 정말 무서웠다.당장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저 갈게요.”하정준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가죽 소파에 기대앉아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송서희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좌우를 살피며 곤경에 빠졌다.왼쪽에는 하정준이, 오른쪽에는 개가 앉아 있었기에 여기서 나가려면 사람이나 개 앞을 지나가야만 했다.그녀는 하정준과 개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다... 소파 뒤로 넘어갈까? 아니면 탁자를 밟고 날아볼까...아니다. 너무 없어 보였다.“정준 오빠, 얘 좀 비켜 달라고 해주세요.”송서희가 말했다.“길이 막혔잖아요.”하정준은 나 몰라라 하며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네가 직접 말해 봐.”“...”송서희는 위풍당당한 도베르만을 보며 정중하게 말을 걸어 보았다“너 좀 비켜줄래?”개가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개는 그 자리에 엎드렸다.송서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하정준 쪽으로 걸어갔다.적어도 하정준은 물지는 않을 테니까.소파와 탁자 사이의 거리는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 충분했지만, 하정준이 다리를 쭉 뻗고 있어서 거의 통로 전
송중섭이 혈관이 막혀 수술했다는 소식은 송서희가 맨 나중에야 알았다.심씨 집안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가 박혜은과 심도윤의 아버지 심정원의 대화에서 비로소 그 사실을 들은 것이다.“너 몰랐니?”박혜은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송서희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아무도 제게 알려 주지 않아서요.”“아니, 네 어머니는 어떻게 이렇게 큰 일을 너한테 안 전하니...”박혜은이 사람을 불러 영양제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할아버지께서 아직 병원에 계시니까 지금 당장 가서 인사라도 드려 봐.”“가고 싶지 않아요.”송서희는 생선 살을 발라 먹으며 무심히 대답했다.“제가 가면 좋아지기라도 하나요.”“그래도 친할아버지잖아. 심장 수술까지 받으셨는데, 손녀가 한 번도 안 보러 갔다고 소문나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아.”박혜은은 그런 꼴이 싫어서라도 그녀를 권유했다.‘불효면 어때.’송서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얘가 정말...”박혜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괜히 사람들이 우리가 너를 삐뚤어지게 키웠다고 떠들 거 아니니.”송서희는 마지못해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섰다.문 앞까지 따라 나와 배웅하던 이미숙은 몹시 걱정스러워하며 당부했다.“가서 어르신을 뵈면 말이라도 곱게 해서 잘 보여야 해요. 좀만 애교 있게, 듣기 좋게...”송서희는 이미 기대를 접었다는 투로 중얼거렸다.“말을 아무리 이쁘게 해봤자 뭐 하겠어요. 아예 날 싫어하는걸.”이미숙은 문간에 서서 그녀가 차에 오르는 걸 지켜보다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착한 아가씨인데, 왜들 이렇게 안 예뻐해 줄까...’귀국한 지 한 달이 넘도록, 송서희는 송중섭을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송중섭은 그녀를 손녀로 대해 준 적이 없었다.따라서 그녀도 송중섭에게 특별히 빚진 느낌 같은 건 없었다. 둘 사이 정이라고는 차라리 생판 남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아니, 적어도 낯선 사람은 그녀를 증오하지는 않을 것이다.병문안 오는 것도 그냥 체면 차리기 위한 것뿐이었다.병원
송서희는 그를 못 본 척하고 싶었다. 딱 돌아서서 가 버리면 좋으련만 주변 사람들 눈이 너무 날카로웠다.특히 한 직원은 하정준을 보자마자 싹싹하게 달려가 아부하기 시작했다.“하정준 대표님, 엔젤 소프트를 높이 평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님께서 저희를 눈여겨 봐주신 덕분에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어요. 대표님은 엔젤 소프트의 은인이십니다. 저희 모두 한없이 존경하고 있어요!”하정준은 묘한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그를 보며 대답했다.“그래요? 근데 날 별로 안 존경하는 사람도 있던데.”한 직원은 거짓말스럽게 손사래를 쳤다.“그럴 리가요! 저희 송 대표님은 대표님 얘기만 나오면 항상 뜨거운 눈물을 글썽이신다니까요!”‘...말 좀 적당히 꾸며 내지.’송서희가 속으로 헛기침을 삼키는 사이, 그 직원은 슬쩍 눈짓까지 보냈다. 어서 맞장구치라는 뜻이다.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하 대표님이 주신 도움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지 않고 셔츠의 세 번째 단추만 뚫어져라 쳐다봤다.그런데도 하정준은 그런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다.“그럼 이 단추라도 떼어서 줄까? 둘이 따로 얘기 좀 해 보지 그래?”송서희는 가까스로 핑계를 댔다.“죄송해요. 오늘 아침에 잠을 잘못 자서 목이 뻐근하네요.”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키득거리는 어조로 받았다.“방금 고개 돌리는 거 보니까 난데없이 유연하던데?”“...”송서희는 최대한 예의를 차리는 척하면서도 냉정하게 말했다.“대표님께서는 무척 바쁘시고 한 번 입만 열면 수천만씩 왔다 갔다 하는 분이니까... 저희가 시간을 뺏을 순 없죠. 다들 가시죠.”그러곤 바로 돌아서서 가 버렸다. 시종일관 표정도 굳어 있었다.그의 뒤에 줄지어 서 있던 임원들은 물론 그녀의 직원들까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송 대표님 제정신이에요? 감히 하 대표님께 그딴 태도를...!”“당신들은 몰라요!”권하영은 내막도 모르면서 옹호하고 나섰다.“우리
의사가 약품 상자를 들고 급히 침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사 한 대를 준비해 송서희에게 놓았다.“무슨 약을 썼는지 확실하지 않아서 완전한 해독은 불가능해요. 다만 증상을 완화해 줄 수 있고, 대략 15분쯤 지나면 효과가 나타날 겁니다. 약간 불편할 순 있지만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예요.”의사는 약상자를 챙기며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침대 위 여자를 힐끔거리며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확실했다.하정준은 이미 다시 반대편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몹시 산만하면서도 흥미가 없어 보였다.“무슨 말을 해야 하고 뭘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아서 잘 판단해요.”느긋하게 던진 한마디였지만, 의사는 목덜미에 칼이 닿아 있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일은 반의반 글자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겁니다.”그렇게 대답하자, 하정준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의사는 서둘러 방을 나가며 문까지 조심스레 닫았다.송서희의 검은 머리카락이 하얀 이불 위로 펼쳐져 부드럽고 매끄러운 흑색 비단처럼 있었다. 아직도 눈빛이 조금 흐릿하고 피부엔 홍조가 채 가시지 않았다.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다가, 송서희는 소파 쪽 남자를 돌아봤다.하정준은 줄곧 그녀를 보고 있었다. 두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담배를 씹듯 물고 있다가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왜, 뭘 그렇게 봐?”송서희는 스스로 그에게 매달렸던 일을 떠올리면 부끄러움과 분노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심지어 돈을 줄 테니 자자고까지 했으니 생각만 해도 민망하고 치욕적이었다.“...의사를 불렀으면 저한테 미리 말해 주지 그랬어요?”하정준은 게으른 목소리로 대꾸했다.“네가 안 물었잖아.”맞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먼저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하정준은 분위기를 타서 그녀를 놀려 먹기만 했다.어쨌든 그녀는 그에게 도움을 받았고, 의사까지 불러 준 마당에 뭐라 따질 구실도 없었다. 되려 고맙다고 해야
이런 꼴로 병원에 실려 가면 내일 당장 연성 전체에 소문이 쫙 퍼질 게 뻔했다. 피해자라고 한들 결국 망신당하고 웃음거리가 되는 건 송서희 자신이다.심도윤은 육나나와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다. 이 난리통이 크게 퍼지면 육나나 쪽 집안에서 불만을 품을지도 몰랐다. 거기에 송씨 가문도 그녀 때문에 체면에 스크래치가 났다고 생각하면, 비행기에 태워서 해외로 보내버릴지도 몰랐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송서희는 침대가 놓인 자리 옆에 멍하니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목덜미 쪽 피부는 이미 열기로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반면 하정준은 팔걸이에 팔을 올린 채 담배를 끼고 완전히 남 일인 듯 여유롭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송서희는 지금 자기 처지가 뭘 뜻하는지 잘 알았다. 만약 이 자리에 정재훈이 있었다면 과일칼부터 들이밀며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하정준이지 않은가.‘도저히 무리인가... 아니, 잘 생각하면... 안 될 것도 없을지도...’머릿속에서 천사와 악마가 시끄럽게 싸웠다.눈에 띄게 병원에 옮겨져 떠들썩해지는 것보단 차라리 하정준과 잠자리를 갖는 편이 훨씬 단순해 보였다.그는 애초부터 풍류를 즐기는 타입이라, 여러 여자를 만나면서도 좀처럼 속을 보이지 않는다고들 한다. 살짝 건드려도 지조 운운하며 거절할 확률은 낮아 보였다.‘어차피 난 자존심 구길 대로 구겼고 별소리 다 들어봤는데 뭐...’길게 고민한 끝에, 송서희는 침대보를 꽉 쥐고 고개를 들어 소파 위의 남자를 바라봤다.“정준 오빠, 저... 좀 도와주실래요?”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송서희는 몰랐다.볼이 약간 붉어지고 맑은 눈동자엔 촉촉한 물기가 맺혀 있었다. 쉽게 더럽혀서는 안 될 청초함과 약에 의해 뒤섞인 아찔한 욕망이 교차하며 남자에게 이런 부탁을 보내고 있었다. 그 자체로 위험한 유혹이었다.하정준은 관자놀이를 가볍게 짚고 은은한 주황빛 조명 아래서 눈매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를 흩뜨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어떻게 도와줄까?”어차피 방법은 뻔했다
하정준이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짧은 동작은 어떠한 말보다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송서희는 알 수 없는 수치심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시선을 피하며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에서 나갔다.잠시 후, 아이들과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던 그녀는 뒤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 소리에 뒤돌아봤다. 그곳에는 하정준이 서 있었다. 순간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그는 새하얀 왕자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다리가 아주 길어 보였다. 허리를 졸라매는 디자인 탓에 탄탄하고 매끈한 몸 선이 한층 더 부각됐다. 게다가 어깨도 넓고 반듯했다. 그가 걸어 들어오자마자 여자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다들 먼저 달려가려고 난리였다.안지아는 그 순간 자기가 좋아하는 주디고 뭐고 다 잊은 듯 호기롭게 외쳤다.“제 왕자님이 돼 줘요.”그러나 하정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파에 턱하고 앉았다.“꿈도 참 크네.”한편, 억지로 반쯤 쭈그려 앉아 있던 난쟁이 분장 친구들은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차별이 심한 거냐.”안성훈 역시 기분이 언짢았다.“진짜 희한하네. 아까는 그렇게 부탁해도 거절하더니 갑자기 알아서 입고 나온 거야?”이번 생일파티에는 안지아의 절친들과 같은 반 친구들, 그리고 각 가문의 아이들까지 잔뜩 몰려들어 마치 놀이공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시끌벅적했다. 아이들은 금방 다른 데 관심을 돌리는 법이라 케이크가 들어오자 우르르 달려갔다.송서희도 그 틈에 겨우 조용해졌다. 그녀는 소파 쪽으로 가서 하정준과는 되도록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녀는 샴페인 한 잔과 작은 케이크를 곁들여 먹었다. 문득 하정준이 있는 쪽을 힐끗 보다가 그의 시선과 부딪쳤다.그는 턱에 손을 괴고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 대체 얼마나 전부터 그녀를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송서희는 먼저 말을 걸었다.“뭘 봐요.”하정준의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돌았다. 말투엔 장난스러움과 은근히 드러내는 가벼움이 섞여 있었다.“공주를 보고 있지.”송서희는 조롱받는 느낌이었다
거실에서 안성훈은 여전히 하정준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너 말이야. 저 멍청이가 서희 괴롭히는 거 봤으면 바로 가서 도와줘야지. 선원 둘 불러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결국 배 안에 있는 사람 전부가 다 알게 됐잖아. 서희 성격 여려서 얼마나 신경 쓰이겠어.”“네 머리는 장식이냐.”차금종이 한마디 했다.“정재훈이 하정준이랑 원한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 그 자식이 정준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르는 거야? 정준이하고 조금이라도 연관된 건 뭐든지 뺏으려 드는 애야. 원래 서희한테 흥미를 가져봐야 길어야 삼사일 정도였을 텐데, 정준이 보호하는 걸 알면 그때부터 끝까지 쫓아다닐 거라고. 약 먹이고 납치라도 해서 손에 넣으려 들 거야.”“그건 그렇네.”안성훈이 빈정거리듯 말했다.“정재훈 이놈이 평생 사랑하는 건 우리 정준이밖에 없지.”하정준은 느긋하게 눈길을 굴렸다.“저기 내려가서 정재훈이랑 같이 있고 싶으면 말해. 너희 둘 쌍쌍이 날아가게 해줄게.”“아쉽게도 정재훈은 나한테 전혀 관심이 없어.”안성훈은 고소하다는 듯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그리고 너, 앞으로 서희한테서 좀 떨어져 있어. 안 그러면 그 짐승 같은 놈이 또 서희를 물고 늘어질 거야.”하정준은 별다른 반응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태도였고, 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트럼프 카드 한 장을 쥔 채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그날 해 질 무렵 요트가 항구에 닿았다. 구름은 노을에 물들어 분홍빛 오렌지색으로 점차 물들었고 바다는 내내 푸른 빛을 잃지 않았다.육나나는 심도윤의 차에 올랐다. 심도윤은 조수석 문을 닫고 돌아서 그녀를 바라봤다.아직 말도 하기 전에 송서희가 먼저 눈치를 챘다.“나나를 태워줘요. 저는 성훈 오빠 차로 갈게요.”심도윤은 그녀에게 당부했다.“집에 가거든 푹 쉬고 열 안 내리면 약 챙겨 먹어.”송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봤다.한편, 하정준의 코니세그는 길가에 세워져 있었고 안성훈의 차는 그
정오가 가까워지도록 잠을 자고 난 송서희는 스스로 체온을 쟀다. 열은 조금 내렸지만 여전히 몸이 허약했고 힘이 하나도 없었다.휴대폰에는 많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서수현은 부러움과 질투 섞인 농담을 보내며 자신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 달라고 했다.송서희는 서수현을 안심시키려는 듯 메시지를 보냈다.“나중에 건강해지면 저랑 같이 와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 한 잔 마시고 창가로 가서 서수현에게 보낼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그때 아래 갑판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갑판에서는 심도윤과 정재훈이 서로 마주 보며 대치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 얼어붙었고 신발을 신을 틈도 없이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전날 밤 정재훈이 송서희를 건드린 사건이 선원들 사이에서 소문처럼 흘러 결국 심도윤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심도윤이 정재훈을 찾았을 때 그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하고 누군가 배에 데려온 모델을 끌어안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심도윤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엮이고 싶지 않으면 나가요.”모델은 곧장 일어나 도망쳤다.“왜 이렇게 성질부려요.”정재훈이 비웃었다.“설마 저한테 따지려고 온 거예요? 저는 그냥 도윤 씨 동생이랑 장난 좀 친 거예요.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서희도 멀쩡하고요.”“구아는 당신 장난감이 아니에요.”심도윤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전에도 경고했을 텐데, 다시는 구아를 건드리지 마요.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정재훈은 태연히 술잔을 비우며 자리에서 일어나 심도윤과 마주 섰다.“여자는 그냥 재미로 노는 거 아니에요? 제가 안 놀아도 다른 누군가가 놀겠죠. 어릴 땐 몰라도 이제 성인이 됐는데 이렇게까지 감싸는 이유가 뭐예요? 설마 직접 데리고 놀려고요?”심도윤은 점잖은 품격을 가진 신사였고, 정재훈은 전형적인 약자를 괴롭히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었다.심도윤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 꽂혔을 때, 그는 미소를 거둘 틈도 없이 그대로
노크가 두어 번 들렸다. 이미 쉬고 있던 의사가 급히 불려 나와 송서희의 금속에 베인 상처를 빠르게 치료하고 약을 발라줬다.상처가 조금 깊어 의사는 파상풍 주사를 놓고 덧붙였다.“상처가 감염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아물기 전까지 물에 닿으면 안 됩니다.”송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따랐다.치료를 마친 의사는 송서희와 하정준을 번갈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 일을 심도윤 도련님께 알려야 할까요?”그는 이 상황이 하정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송서희는 물에 젖은 몸을 수건으로 감싼 채였고 발에는 다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뭔가 수상쩍었다.의사는 양쪽 모두를 건드리기 어려웠다. 말을 하면 하정준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웠고, 말을 하지 않으면 내일 심도윤이 알게 되었을 때 책임을 묻지 않을까 걱정되었다.하정준은 무심하게 말했다.“알아서 해요.”예전 같았으면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송서희는 가장 먼저 심도윤을 찾아가 서운한 마음을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심도윤에게 짐이 되는 게 아닐까 스스로 의문을 품고 있었다.심도윤은 약혼자와 함께 바다에 나왔다. 하지만 그 좋은 분위기가 그녀로 인해 깨질 가능성이 있었다. 심도윤은 이 일을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했고, 만약 이로 인해 정씨 가문과의 관계가 틀어진다면 모두 그녀의 책임으로 돌려질 상황이었다.‘내가 없으면 모든 게 쉬워질 텐데.’송서희는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내일 얘기할게요.”그녀는 육나나가 정말로 심도윤의 방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문을 두드려 방해할 수도 없었다.스위트룸은 같은 층에 있었다. 치료실에서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송서희와 하정준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따라 앞뒤로 걸었다.방 앞에 도착한 송서희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 하정준에게 말했다.“정준 오빠, 아까 했던 말은 신경 쓰지 마요. 제가 괜히 오빠한테 화를 냈던 것 같아요. 그동안 무심코 오빠를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는데, 정말 미안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방음 처리된 소재 덕분에 선실은 완벽한 고요에 싸여 있었다. 스위트룸은 호텔보다도 훨씬 더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송서희는 침대 옆에 앉아 잠시 고민하다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졌다.5월 초의 바다는 여전히 쌀쌀했지만 수영장의 물은 의외로 따뜻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몸은 마치 유연한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였다.몇 번이고 왕복으로 헤엄쳤다. 지쳐서 멈출 때쯤, 그녀는 물 위에 떠올라 짙푸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가라앉혔다. 물속으로 깊숙이 내려가자 세상의 모든 소리가 차단된 듯했다. 그리고 부력은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지탱하며 보호해 주는 듯했다.심도윤은 그녀에게 있어 바로 이런 물과 같은 존재였다.만약 그날 그녀가 길가에서 울고 있을 때 심도윤이 멈추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됐을까? 그녀는 나쁜 사람에게 납치되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선량한 사람을 만났을까?만약 심도윤이 그녀를 송씨 가문에서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곳에서 혼자 방치되어 왜곡된 병적인 인격으로 변했을까? 아니면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그 빈집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오늘 밤은 달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고 안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숨이 한계에 달하자, 송서희는 물 위로 몸을 솟구쳐 얼굴의 물기를 닦아냈다. 텅 비어 있던 수영장 가장자리에는 낯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정재훈의 번들거리는 눈빛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이 밤중에 수영하러 나왔어? 혼자 외로워서 잠이 안 와?”송서희는 순간적으로 흥미를 잃었다. 그녀는 다른 쪽으로 헤엄쳐 사다리를 잡고 물 밖으로 나왔다.그녀가 수영을 나온 것은 단지 하정준과의 싸움 때문에 기분이 너무 안 좋아져서 즉흥적으로 결심한 것이었다. 게다가 수영복도 갈아입지 않았다.검은 드레스가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채였다. 그녀가 허리를 굽혀 수건을 집으려는 순간, 정재훈은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며 그녀를 주시했다.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