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너, 네 오빠 좋아하지

연성 최고의 귀족 자제들이 오늘 여기 절반이나 모였으니 달향해당 사장은 직접 귀한 레미 마틴 루이 13세 양주 몇 병을 가져왔다.

인자해 보이는 뚱뚱한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귀한 분들이 와주셔서 누추한 곳이 빛이 납니다. 기쁜 날 작은 선물로 술 몇 병을 준비했으니 도윤 도련님, 부디 사양 말고 받아주십시오.”

“와, 사장님 통 크시네.”

송서희는 생각했다.

‘클럽 사장까지 알고 있는데, 세상에서 나만 모르는 건가?'

방 안에서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준 도련님, 깨셨어요?”

송서희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이 방은 그들을 위해 비워둔 곳이라 평소엔 손님을 받지 않는다. 널찍한 방 안쪽 구석은 은은한 조명만 켜져 있어 어두컴컴했기에 송서희는 그쪽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인제야 어두컴컴한 그림자 속에서 소파에 누워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짧은 소파에 긴 다리를 쭉 뻗을 순 없어 다리를 겹쳐 올리고 팔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옆 카펫엔 슬림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무릎 꿇고 앉아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다.

4월 날씨는 전혀 덥지 않았으니 이 부채질은 순전히 나른하고 몽롱한 분위기를 위한 것이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미인이 곁에서 시중을 드는 호사스러움, 누가 감히 하정준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송서희는 생각했다.

‘저 인간은 왜 아무 데서나 자는 거야. 밤에 얼마나 놀았길래 이렇게 피곤해서 시끄러운데도 잘 수 있는 거지?’

하정준은 나른하게 일어나 몸을 일으켜 반쯤 드리워진 휘장을 걷고 나왔다.

1인용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고 하정준은 그 자리에 앉아서 담배를 찾았다.

부채질하던 미인도 따라 나와 그의 옆 팔걸이에 앉았다.

타이트한 슬림 드레스로 완벽한 몸매를 드러내며 그녀는 옆트임 사이로 보이는 늘씬한 다리를 살짝 포개어 앉았다. 그러고는 섹시하고 부드러운 몸을 하정준 쪽으로 기울이더니 붉은색 매니큐어를 칠한 부드럽고 가녀린 손으로 라이터를 쥐고 그에게 불을 붙여주었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미녀는 일반 접대부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혈통의 압박 때문인지 육나나는 그를 두려워하는 듯 정색하며 불렀다.

“정준 오빠.”

안성훈이 하정준에게 물었다.

“사령관님이 그저께 돌아오셨다면서?”

하정준은 눈꼬리를 게슴츠레 뜨며 바라보았는데, 그 각도에서 보니 속눈썹이 아주 길었다.

“그 사람 행방을 왜 물어? 혹시 암살이라도 하려고?”

“아니, 난...”

하정준이 말했다.

“그 사람 목숨을 노린다면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 없어. 내가 널 데려다줄 테니, 그 사람도 네 생각을 알게 된다면 용기가 가상하다고 칭찬할 거야.”

안성훈은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하며 세 손가락을 들어 하늘에 대고 맹세했다.

“천지신명께 맹세코 저는 진짜 그런 대역무도한 마음이 없습니다!”

하정준은 가볍게 비웃으며 담뱃재를 털었다.

“뭘 두려워해, 그냥 총알 한 방 맞는 것뿐인데, 노인네의 사격 실력은 아주 좋으니 고통 없이 보내줄 거야.”

그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 외출할 때 일급 경호원들이 따라붙는 사람이었다. 안성훈은 아무리 배짱이 두둑해도 감히 그 두 글자를 입에 올릴 수 없었다.

하정준은 그런 농담을 할 수 있지만 그는 오늘 밤 돌아가서 잘 때도 한쪽 눈을 뜨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때렸다.

“내가 쓸데없이 주둥이를 나불거렸어!”

육나나는 송서희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며 이야기 주제를 의도적으로 그녀에게로 돌렸다.

“구아는 이렇게 예쁘니 남자들이 많이 따라다니겠지?”

“아니, 따라다니는 남자 같은 건 없어.”

송서희가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예전에 정재훈이 구아를 쫓아다녔다고 하던데? 나중에 도윤 씨가 그 사람한테 사과까지 시켰다던데, 무슨 일이 있었어?”

송서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안성훈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정재훈 그 인간이 어떤 놈인지 몰라? 그건 쫓아다닌 게 아니라 괴롭힌 거지.”

이미 오래전 옛날 일이었다. 그 정재훈은 업계에서 유명한 망나니로 정씨 가문의 권세를 믿고 못된 짓을 일삼았는데 중학교 때부터 여자들을 갖고 놀았다고 한다.

하정준의 악함과는 달랐다. 하정준은 위험한 남자였지만 정재훈은 뼛속까지 썩은 놈이었다.

그 당시 송서희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고, 어린 소녀였는데 몇 번 만난 자리에서 정재훈은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심도윤은 즉시 정씨 가문으로 찾아가 따졌고 정씨 가문의 어르신은 창피를 무릅쓰고 손자를 끌고 와 송서희에게 사과시켰다.

그 후 정재훈은 감히 송서희의 근처에도 얼씬하지 못했다.

“오빠가 많이 보호해줬네.”

육나나가 말했다.

심도윤은 송서희를 정말 많이 보호했고 성인이 되기 전에는 제대로 된 남자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등학교 3학년을 졸업하자마자 열여덟 번째 생일도 지나기 전에 해외로 유학을 보내졌다. 해외에 있는 몇 년 동안 서수현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교 활동을 거부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해 언급하면 다들 그녀를 차갑다고 했다. 그러니 어떻게 남자친구가 있겠는가?

이 이야기를 듣자 안성훈은 지난번 일이 생각나서 고개를 돌려 심도윤에게 말했다.

“서희가 해외에서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는 거 알아? 집에 예쁜 배추를 누가 몰래 훔쳐 먹었는지도 모르고 있었지?”

심도윤은 맞은편에 앉아 송서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연애했어?”

“네.”

안성훈이 심도윤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송서희는 그의 표정을 살피지 않고 대답했다.

심도윤은 담배를 쥔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성훈은 매우 감개무량 해하며 말했다.

“어렸을 땐 얼마나 착했는데. 맨날 오빠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오빠, 오빠~' 하면서 애교 부렸었잖아.”

사방으로 흩어지는 푸른 안개가 주변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심도윤은 술잔을 들고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유리잔 입구를 톡톡 두드렸다.

“겉보기만 착했지. 고집불통이야.”

“그래도 내 여동생만큼 고집 세겠어? 당시 네가 여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걸 보고 부러워서 엄마한테 여동생을 졸랐는데, 결국 골칫덩이만 얻었지.”

“정말요?”

육나나가 물었다.

“구아는 어렸을 때 그렇게 귀여웠어요?”

이 말에 안성훈은 신이 나서 말했다.

“네가 얘 어렸을 때를 못 봐서 그래. 뽀얗고 통통한 볼에 커다란 눈망울, 울기라도 하면 사람 마음을 다 녹였지. 그러니까 도윤이가 유독 얘한테만 마음이 약해져서 집으로 데려왔지. 금종이었다면 엉엉 울어도 차도 안 세워줬을걸. 오히려 밟고 지나가지 않은 게 다행이지.”

“야, 나 좀 끌어들이지 마.”

차금종이 말했다.

그러자 안성훈이 말을 이었다.

“내 여동생이 커서 남자를 갖고 놀면, 그놈을 산 채로 껍질을 벗겨서 조각조각 썰어 간장에 찍어 개밥으로 줄 거야.”

“성훈 도련님은 너무 이중잣대 아닌가요?”

하정준의 옆에 앉은 미녀가 웃으며 말했다. 목소리가 부드럽고 듣기 좋았다.

“남자들은 여자 갖고 놀아도 되고, 여자는 남자 갖고 놀면 안 되나요?”

“애리 너는 물론 갖고 놀 수 있지. 하지만 여동생은 달라.”

안성훈은 이 문제에 대해 심도윤만이 자신과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윤에게 물어봐. 그놈 죽이고 싶지 않은지.”

심도윤은 담뱃재를 털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너는 사령관님에게 가서 총알이나 얻어맞는 게 좋겠다.”

육나나는 심도윤과 송서희를 번갈아 보며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성훈: “젠장, 다들 나만 갖고 그래.”

그러면서 송서희에게 말했다.

“서희야, 우리 둘이서 이야기 좀 하자.”

송서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화장실은 매우 조용했다. 송서희는 흐르는 물에 건성으로 손가락을 문지르다가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거울에 육나나가 들어오는 모습이 비쳤다.

육나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 혹시 싫어해?”

송서희는 되물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건데?”

“그냥 느낌이 그래.”

“괜한 생각 말아.”

송서희는 금도금 수도꼭지를 잠그고 천천히 손을 닦았다.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밝고 시원시원하니 누가 널 싫어하겠어.”

그녀가 화장실을 나서려는데 육나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기, 너 오빠 좋아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