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만에 보는 설영준은 조금 야윈 듯한 모습이었다.하지만 그윽한 두 눈동자는 여전히 눈부셨고 강렬한 포스가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다.그는 훤칠한 키에 날카로운 눈매를 지녔다.그녀 앞에서 설영준은 자연스럽게 머리를 살짝 숙였다.“할 말이 있어서...”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설영준은 사실 지난번에 송재이가 지민건과 함께 중식당에 있는 모습을 길옆에서 지켜보았었다. 송재이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그때 서로 불쾌하게 헤어진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로 생각했다.설영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는 이미 아이의 유산에 관한 진실을 알고 있다.유산을 겪은 후 그녀 홀로 아이를 잃은 슬픔을 어떻게 마주했을지, 그 힘들었던 나날을 어떻게 견뎌왔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물론 지난번에 그녀를 향한 ‘불신’으로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를 남겼을지도 알고 있다.설영준은 그녀를 스쳐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송재이도 정신을 차리고 얼른 따라 들어왔다.“영준 씨한테 할 얘기 있는데 지금 시간 돼?”엘리베이터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설영준은 손을 들어 사무실이 위치한 층수를 눌렀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이 남자의 안색을 살폈다.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고 딱히 거절하지도 않았다.그렇다면 묵인은 곧 허락이겠지?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혔다.송재이는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아이를 잃은 후 그녀는 이 남자를 단독으로 마주할 때마다 유난히 쉽게 연약해지고 전보다 마음이 자꾸 예민해진다.두 사람은 더 이상 함께할 가능성이 없지만 그녀의 몸과 마음은 왜 이렇게 통제받지 못한 채 이 남자의 강렬한 분위기에 휩쓸리는 걸까?이 남자가 첫사랑이자 처음 잠자리를 가진 남자라서? 또한 그녀를 임신하게 한 남자라서?이런 경험과 느낌은 아마 이번 생에 다른 남자를 만나도 충분히 구별이 가능할 것이다.설영준...이름 석 자가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았다.엘리베이터가 서서히 올라갔다.바로 이때 주변이 갑자기 확 어두워졌다.머리 위의 전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발
송재이는 순간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 설영준이 말한 ‘내 사람’은 그녀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그녀가 임신한 아이를 말하는 건지 말이다.재벌은 늘 그렇듯 아이를 중시했다.결혼 후든 전이든 아이만 남기는 경우가 태반이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의 품에 안겨 작은 소리로 울먹였다.정신을 차린 설영준이 송재이를 더 꼭 끌어안았다.지금 설영준의 마음은 부드럽기 그지없었고 말투도 온화함이 극을 달했다.“저번엔 내가 오해했어. 아무리 화난다 해도 그런 말은 하지 마. 나는 너 그런 말 하는 거 싫어.”설영준은 이렇게 말하며 그녀를 안은 채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둠 속에서 엘리베이터 무전을 찾아 통화 버튼을 여러 번 눌렀다.수리하는 사람들이 오기 전에 송재이는 계속 설영준의 품속에 안겨 있었다.송재이는 울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나를 얕잡아 보면서 방탕하고 음란한 여자라고 생각했잖아.”“아니야.”“아니긴, 맞아...”“...”설영준은 말문이 막혔다.송재이의 울음에서 진실과 거짓은 얼마 정도 될까?심장이 벌렁대는 건 확실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송재이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지나간 화제를 다시 이어갔다.“지민건을 처리하는 건 나도 반대하지 않을게. 근데 은정이 아버지가 전에 지민건의 회사에 투자한 돈이 있거든? 지금 이런 상황에 그 돈이 수포가 되면 어떡하지?”말이 끝나기 바쁘게 엘리베이터 안은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설영준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송재이는 분위기가 딱딱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송재이는 아무 말 없이 설영준이 대답하기를 기다렸다.결국 설영준이 이렇게 말했다.“친구 아버지 이름이 뭐라고?”“유중건.”“알았어.”설영준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 말을 뒤로 설영준은 더는 말이 없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하여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 말하려는데 설영준이 말을 이어갔다.“유 대표님한테 프로젝트 하나 줄게. 지민건 회사에 얼마를 투자한 거야?”“아마
숨을 헐떡이던 송재이가 고개를 들더니 설영준이 한 말을 곱씹어봤다.설영준은 송재이가 알아듣지 못했음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침대에서 뭐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힘들다고 앵앵거리잖아.”설영준은 이렇게 말하며 송재이의 손을 놓고는 성큼성큼 테이블로 향했다.송재이는 그제야 설영준이 잠자리에서 보여준 그녀의 표현을 못마땅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쳇, 그래도 3년이라는 시간을 견딘 거 보면 영준 씨도 이런 타입 좋아한다는 거야.”송재이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설영준이 이를 듣고는 고개를 들더니 차갑게 웃었다.“맞아. 내가 원래 병약한 거 좋아해.”병약하다는 말에 송재이는 원래 발끈해야 맞았다.하지만 그 뒤로 따라오는 ‘좋아한다’는 말에 송재이는 마음이 간질거렸다.송재이는 입술을 앙다물더니 반박하려 했지만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설영준은 매번 그랬다.약 올리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여러 감정이 뒤섞여 화가 나도 쏟아낼 수가 없었다.송재이는 아직 사무실 입구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혼자 씩씩대는 모습이 어딘가 풋풋하면서도 귀여웠다.설영준은 난감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송재이가 답답했다. 그런 송재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설영준이 끝내 입을 열었다.“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설마 일부러 그런 거야?”“...”송재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크게 뜨고는 이렇게 물었다.“뭐가?”“저번에 내가 너 오해해서 미안해하고 있는 거 알고 있었잖아. 그리고 아까 같은 돌발 상황에서 약하게 나오면 어떤 요구든 내가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거 알고 그런 거 아니야?”안 그래도 설영준은 송재이에게 미안했고 보상해 주고 싶었기에 눈에 훤히 보여도 그냥 넘어갔다.평소에 설영준에게 좋게 좋게 말해도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송재이는 하필 그런 돌발 상황에서 말했다. 이에 설영준은 송재이가 얕은 수로 그를 이용하려 든다는 느낌이 들었다.감히 누가 천하의 설영준에게 얕은수를 쓸 수 있
송재이는 그 여자를 ‘약혼녀’라고 불렀지만 설영준은 반박하지 않았다.지민건을 화력이 주현아에게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생각에 송재이는 너무 서운했다.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아직도 그 여자와 결혼하려는 거지?특별히 편애하는 게 아니라면...송재이는 갈수록 설영준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솔직히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까 유중건의 일로 이미 그를 한번 이용했고 이를 들키기까지 했다. 역시 설영준은 너무 총명했고 그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그러니 송재이는 더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분위기가 딱딱해졌다.송재이의 기분은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었다.얼마나 골똘히 생각했는지 설영준이 그녀 앞으로 다가서는 것도 몰랐다.송재이가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고 있는데 시야에 광이 나는 까만 구두가 들어왔다.송재이가 멈칫하는데 설영준은 이미 송재이의 턱을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큰 키와 특유의 아우라가 압도적이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의 몸에서 나는 옅은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든 채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 했다.하지만 설영준이 한발 빨리 앞으로 걸어오더니 두 팔로 송재이의 허리를 휘감았다.설영준은 자기도 모르게 송재이의 반듯한 아랫배를 힐끔 쳐다봤다.그 배 속에 설영준의 아이가 있었지만 끝내 잃어버리고 말았다.이런 느낌에 설영준은 마음이 복잡해졌다.“영준 씨...”“저번에 사무실에서 무슨 일 있었던지 기억나?”설영준이 낮은 소리로 귀띔하며 진지하게 말했다.“나는 사업하는 사람이야. 원하는 걸 들어줬으니 너도 보답은 해야지 않겠어?”송재이는 멈칫하더니 그제야 설영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저번에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정말 너무 수치스러웠다.마음속으로는 틀렸다는 걸 아는데 몸은 그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송재이는 그 광경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심사하듯 그녀를 바라보는 설영준의 눈빛에도 송재이는 전혀 두려움이 없었고 오히려 굳건하고 매서운 눈
달 말, 콘서트 당일.설영준 외에도 경주시의 정계, 비즈니스계의 거물들이 도착했다.송재이가 백스테이지에서 준비하는데 서유리가 귓속말로 속삭였다.“아까 몰래 백스테이지를 한번 봤는데, 이야, 정말 대단하던데요? 설 대표님 지금 갑자기 혜성처럼 내려온 서진 그룹 전무랑 얘기 나누고 있더라고요?”“그 사람은 누군데요?”송재이는 이런 소식에 빠삭하지 못한 편이었다.“서진 그룹 후계자잖아요. 투자회사 중에서도 유명한 재벌 2세.”서유리는 뭔가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렸다.“근데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외국에서 엄청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다녔다고 하던데.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꼭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린대요.”“재이 씨처럼 예쁘게 생긴 여자는 조심해야 해요. 저런 사람한테 찍히지 않게.”서유리가 조심스럽게 귀띔했다.송재이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무대에 오르기전 송재이는 화장실로 향했다.백스테이지 대기실엔 다 화장실이 있었다.문 앞까지 갔는데 연지수가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큰 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수석이 된 후로 연지수는 데시벨이 전보다 훨씬 높아졌고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송재이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드레스 자락을 들고 바깥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복도를 건너는데 까만 슈트를 입은 키 큰 남자와 스쳐 지나갔다.그 남자는 고개를 돌려 송재이를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봤다.송재이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남자는 고개를 다시 돌렸고 성큼성큼 관중석으로 향했다.그러더니 옆에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쉬고 있는 서도재에게 이렇게 말했다.“전무님, 아까 어떤 여자와 마주쳤는데 곧 무대에 오를 사람인 것 같았어요. 근데 오케스트라 수석인 지수 씨보다 훨씬 예쁘게 생겼더라고요...”“난 지수만 있으면 돼.”서도재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오케스트라 화보에서 수석 피아니스트인 연지수는 센터에 서 있었다. 그 얼굴은 그렇게 서도재의 머릿속에 각인한 듯 떠나지 않았다.서도재
공연이 끝나고 송재이는 얼른 백스테이지로 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바깥에서 소동이 들렸다.문을 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연지수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중에 보디가드도 보였다. 조금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시끄러워졌다.송재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서 가서 보려는데 트렌치코트를 입은 중년 여자가 연지수의 팔목을 낚아챘다.연지수가 당황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 중년 여자가 바로 귀싸대기를 날렸다.“빌어먹을 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순간 그저 옆에서 싸움을 말리던 보디가드들이 잽싸게 앞으로 나서서 중년 여자를 제압했다.연지수는 얼얼한 볼을 감싸고는 신고하겠다고 이리저리 고아댔다.송재이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직원을 불러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했다.직원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지켜보며 신비로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말도 마요. 다 연지수 씨가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전에 설영준 씨와 춤을 추는 사진이 인터넷에 퍼졌잖아요. 그러면서 계속 스캔들이 났었거든요. 근데 설 대표님은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알면서 세컨드 노릇을 한 거라는 소린데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가정주부들이 듣고 화가 난 거죠…”주부들은 원래도 이런 일에 잘 반응하는 타입이었기에 순간 도덕의 화신이 되어 뜻이 맞는 다른 주부들과 함께 ‘세컨드를 타도하자’는 명목하에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었다.송재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하려는데 멀지 않은 곳에 선 설영준이 보였다.설영준은 연지수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맞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 표정 없이 자기와 관계없다는 듯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보디가드와 경찰들이 그 주부들을 연행해 갔다.연지수는 지금 꼴이 매우 처참했다.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머리가 다 뜯겼고 옷도 다 찢겼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오늘은 원래 연지수에게 최고의 날이어야 했다.연지수는 얼떨결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가 설영준을 발견했다. 순간 연지수는 쥐구멍에라
원래는 원만하게 끝낼 수 있었던 공연이 연지수가 백스테이지에서 일으킨 소동 때문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하지만 이 오점은 ‘연지수’만의 오점이었다.오케스트라의 다른 사람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그래서 그런지 회식 분위기도 매우 좋았다.이번 공연은 연지수가 수석으로서 펼치는 첫 번째 공연이었다.아무리 아까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해도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빠질 연지수가 아니었다.연지수도 설영준이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룸으로 와서 술을 두 잔 마시더니 다시 매혹적이고 어여쁜 연지수로 돌아갔다.연지수는 설영준의 옆에 앉아 술잔을 들며 교태를 부렸다.“영준 씨 마음은 마치 6월의 날씨처럼 예측 불가에요. 오늘 내가 그 미친 아줌마들한테 그렇게 당하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옆에 가만히 서 있었잖아요. 나 정말 너무 서운했어요.”말투가 오버스러웠지만 모두 진심이었다.연지수가 고개를 들어 설영준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어두운 조명에 설영준의 예쁘고 깊은 눈동자가 보였다.눈빛은 덤덤해 보였지만 그 뒤로 격렬한 파도를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쉽게 보아낼 수 없는 설영준의 매력이 연지수를 자꾸만 빠지게 했다. 밤에 잠을 설칠 만큼 연지수는 설영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연지수는 설영준이 끓어넘치는 그 남성 호르몬으로 자기를 정복하기를 바랐다.하지만 연지수와 단둘이 있다 해도 설영준은 아무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연지수는 아직 타이밍이 무르익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계속 이렇게 썸을 타면 언젠간 불타오를 날이 올 거라고 말이다.아무리 도도해봤자 결국 넘어오게 되어 있다고 여겼다.하지만 지금은 전혀 확신이 서지 않았다.연지수는 여자의 촉이 발동했다.설영준은 그녀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사꾼일 뿐이다. 천천히 그녀를 옭아매면서 어떻게 그녀를 이용해 가치를 창출할 것인지 머리를 굴리고 있다.전에 했던 행동도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릴 수 있는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
설영준은 송재이에게로 걸어갔다.쫑파티.참석한 사람들 모두 살짝 취기가 올라온 상태였다.어두운 불빛 아래 사람들의 표정이 어딘가 가식적이면서도 아리송했다.송재이는 이런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아니면 연지수가 설영준의 가슴에 엎드려 있는 장면을 두 눈으로 봐서 그런 것 같았다.두 사람의 눈빛과 스킨십이 송재이를 자극했다.송재이는 멘탈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속히 말해서 쿠크다스였다. 이런 상황에는 도망가는 것이 송재이와 제일 잘 어울렸다.송재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그렇게 밖으로 나가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있는 자리에서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다른 여자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없는 자리라면…그녀와 설영준은 도대체 무슨 사이일까? 설영준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일까? 송재이는 질투할 자격도 없었다.너무 울고 싶었다.그때 누군가 송재이의 손목을 낚아챘고 그 힘에 못 이겨 송재이는 뒤로 끌려갔다.송재이는 고개를 들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앞에 서 있는 설영준을 바라봤다. 정말 미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가는 남자였다.“설영준 씨.”송재이는 이를 악물고 이렇게 말했다.“이거 놔.”아까 술을 조금 마셔서 그런지 설영준은 약간 어지러웠다.고개를 들고 그렁그렁해서 씩씩대는 송재이의 모습에 설영준은 정말 당장이라도 그녀를 잡아먹고 싶은 생각이었다.“오늘은 나랑 가자.”설영준이 이렇게 다독이며 송재이의 귓가에 속삭였다.송재이가 실눈을 뜨고는 생각했다.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면 정말 찔렀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설영준 씨, 자꾸 이렇게 힘으로 제압하려 들면 나 그냥 어디 가서 확 죽어버리는 수가 있어요.”이 말을 하는 송재이는 정말 고대에 순결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여자 같았다.그저 하룻밤 같이 지내면서 정상적인 남녀라면 다하는 일을 할 뿐인데 죽을 필요까지 있을까?여자가 밀당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설영준도 알아챌 수 있었다.순간 설영준은 송재이 앞에서 얍삽한 변태가 된 듯한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