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천옥은 그 냉랭함 앞에서 숨도 쉬지 못했다.“앞으로 날 찾아오지 마요. 난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우리 관계도 인정하고 싶지 않고요.”“...”공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수년간 찾아 헤맨 아이한테서 이런 말을 들으니,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량천옥은 그동안 자기 딸을 찾은 순간을 떠올렸다.그 세월을 어떻게 되돌려줄지, 어떻게 사랑을 줄지 말이다.하지만 그 딸이 본인 곁에 있을 줄은, 게다가 본인이 이미 그 딸을 상처입혔을 줄은 전혀 몰랐다.량천옥은 자기 딸을 죽일 뻔했고, 자기 손녀의 목숨도 앗아갈 뻔했다.“날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나 때문에 너를 상처입히지 마.”“당신 때문에 나를 상처 입힌다고요? 당신 때문에?”고은지의 말투가 차가워졌다.량천옥을 비웃는 듯한 말투가 섞였다.그 말에 량천옥은 죄책감보다 더한 고통을 느꼈다.정말 너무 아팠다.“명심해요. 앞으로 절대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고은지는 일어서서 떠나려고 했다.량천옥과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량천옥은 떠나려는 고은지를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고은지가 량천옥의 곁을 지나갈 때, 량천옥은 고은지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내가 미안해. 그렇게 할게. 그러면 나태현과의 거래를 그만둬.”“...”“나 때문이 아니라면 그만둬!”량천옥은 이 거래가 고은지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잘 알고 있었다.량천옥과 나씨 가문의 원한은 결국 나태현이 알아냈다.나태현은 량천옥을 쉽게 놔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고은지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고은지는 나태현의 아이를 낳은 사람이니까 말이다.나씨 가문 사람이 얼마나 매정한 사람인지 량천옥은 잘 알았다.량천옥의 요구에 고은지는 차가운 표정으로 량천옥의 손을 뿌리쳤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해요?”“난 그럴 자격이 없지만 아이를 위해 생각해 봐. 나태현은 희주가 네 딸인 걸 알면서도 이 거래를 진행했어. 얼마나 무서운 놈이야!”량천옥은 무서운 것도 없었고 두려워하
량천옥은 원래 고은지가 나태현을 떠나 행복하게 살았으면 했다.고은지가 무슨 대가를 원하든지 다 내어줄 생각이었다.하지만 량천옥은 그럴 수가 없었다.나태현은 지신혜와 약혼했다. 그리고 량천옥에게 복수한 후 고은지를 함정에 빠뜨릴 것이다.그것이 나씨 가문의 복수 방식이다.고은지가 나태현의 지옥 같은 복수에 동참하게 된 것이 아이 때문이라면...량천옥은 두 눈을 감고 차갑게 얘기했다.“그 아이를 찾아내.”“네!”정록담이 대답했다.무조건 찾아야 한다.원래는 나태현의 딸이니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아이는 고은지의 약점과도 같았다.“그리고 지씨 가문 사람들도 지켜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지씨 가문을 언급하는 량천옥의 말투는 아주 차가웠다.장씨 가문과 나씨 가문은 강성에서 라이벌 관계로 유명했다.그리고 앞뒤가 다르기로 유명한 가문은 바로 지씨 가문과 진씨 가문이었다. 그런데 나씨 가문이 지씨 가문과 결혼을 할 줄은 몰랐다.지씨 가문에서 고은지와 나태현의 관계를 안다면 고은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정록담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 순간 량천옥은 고은지를 전면적으로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지가 나태현의 곁에 있는 것도 고희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다른 것에 대해서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한 시간 후.량천옥은 천락 그룹에 도착했다.원래 어제 나태현을 만나기로 했지만 고은지를 먼저 만나고 싶어서 나태현을 만나지 않았다.고은지가 나태현의 곁에 있는 원인이 궁금했다.하지만 고은지는 량천옥이 모든 대가를 내놓아도 나태현과의 거래를 취소하지 않으려 한다.나태현을 찾으러 가는 량천옥은 고은지 앞에서의 량천옥과 사뭇 달랐다.량천옥의 삶은 이미 피폐하지만 량천옥에게서는 차갑고 올곧은 힘이 느껴졌다.나태현 앞에 걸어온 량천옥이 차갑게 물었다.“아이, 어디에 보낸 거야.”물론 정록담을 시켜 알아보게 했지만 나태현에게 슬쩍 물어보는 것이었다.나태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량천
자격?자격이라면 나태현과 량천옥 다 비슷했다.량천옥은 나태현 앞에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이번에는 우울증이라는 단어가 나태현의 신경을 긁었다. 나태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백지장이 되었다.“그 아이를 상처입힌 걸 생각하면 우리 둘 다 비슷해.”고희주가 왜 아파트에서 자살하려고 했는가. 우울증에 걸려서 그런 것이다.그런 힘든 환경이, 고희주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나태현은 질식할 듯한 시선으로 량천옥을 바라보았다. 량천옥은 약간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했다.“복수하고 싶으면 나한테 해. 고은지는 건드리지 마. 아이와 은지를 만나게 해줘.”그 말투는 부탁하는 말투였다. 하지만 그 속에는 감출 수 없는 결연함이 있었다.마치 이게 마지막 양보이자 마지막 기회인 듯 말이다.나태현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량천옥이 말을 이었다.“무슨 대가를 원하는지 말만 해. 다 들어줄 테니까.”량천옥은 상응한 대가를 치르고 고은지가 남은 생을 편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나태현도 량천옥이 대가를 치르기를 바라지 않는가.만약 량천옥이 대가를 치르지 않기를 바란다면, 강성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도 량천옥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다.그러니 이건 량천옥의 결정에 걸린 일이다.나태현이 손에 쥐고 있는 건 량천옥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기회이다.그러니 량천옥은 그 기회를 나태현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런 기회 앞에서 나태현은 아무렇지 않아 했다.“대가를 치러서 이 모든 것을 끝내려고 하다니,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요?”나태현이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나태현이 일어나서 량천옥을 바라보면서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이제야 얼마나 두려운가 봐요?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당신이 그녀를 괴롭혔을 때, 그녀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량천옥은 그 말을 듣고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으면 좋겠어?”나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 뿐이었다.
나태현 사무실에서 나온 후, 량천옥은 서류를 들고 오는 고은지와 마주하게 되었다.차갑던 기운은 고은지를 보자마자 누그러졌다.고은지는 량천옥을 보고 약간 의외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의 시선은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것도 잠시, 고은지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그 모습은 마치 두 사람이 전혀 모르는 사이인 것 같았다.량천옥은 숨이 막힐 듯이 가슴이 아팠다.하지만 지금은 무너질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나태현이 고은지를 죽도록 괴롭히겠다고 했지만 량천옥이 마음먹고 막는다면 나태현도 방법이 없다.천락 그룹에서 나와 차에 탄 량천옥은 앞에 있는 정록담에게 얘기했다.“지씨 가문에 똑바로 전해. 고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모두 지씨 가문의 탓으로 돌리겠다고.”지씨 가문에서는 이미 고은지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그러니 지신혜와 나태현의 약혼을 위해 고은지를 처리하려 들지도 모른다.정록담이 고개를 끄덕였다.“네.”량천옥이 이어서 얘기했다.“아이의 일도 어서 빨리 알아봐.”량천옥은 고은지가 계속해서 나태현의 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아무리 량천옥이 타일러도 나태현을 떠나지 않는 건, 아마도 고희주 때문일 것이다.량천옥은 고은지가 망가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그래서 무조건 아이를 찾아서 고은지에게 평온한 일상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은지가 상류층의 더러운 싸움에 엮이지 않았으면 했다.정록담은 량천옥의 뜻을 잘 알았다.“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사람을 풀었습니다. 빠르게 알 수 있을 겁니다.”거기까지 들은 량천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빠르게 변하는 창밖의 모습을 보면서 량천옥이 눈을 감았다.“나씨 가문에 가봐야 할 것 같아.”“거, 거기에 가서 뭘 하시려고요?”량천옥이 나씨 가문에 가겠다는 말을 들은 정록담은 약간 놀았다.량천옥이 나씨 가문에서 겪은 일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량천옥도 불쌍한 사람이었다. 이런 어머니를 만난 것은 량천옥의 최대 불행이었다.얼마나 지났을까.량천옥이 상류층에서 힘들게 움직일 때도 그곳으
량천옥이 예리하게 얘기했다.정록담이 고개를 끄덕였다.량천옥이 다시 나씨 가문에 돌아오게 된 원인이 본인의 딸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리고 그들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게 될 줄도 몰랐다....그 시각.나태현은 고은지를 사무실로 부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담배를 필 뿐이었다.고은지는 차가운 표정으로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얼마 지나 고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무 일 없으면 먼저 나가보겠습니다.”말을 마친 고은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나태현은 차갑게 고은지를 보면서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지금 어디서 살지?”고은지가 문고리를 잡은 순간 나태현이 물었다.“이게 우리의 거래에 속하는 내용인가요?”“...”나태현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 사이에 고은지는 이미 사무실을 나가고 없었다.고은지는 고은영의 집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란완 리조트에서 사는 것도 아니다.고희주를 란완 리조트에서 빼앗긴 후, 고은지는 돌아가지 않았다.고은영이 전화를 걸 때마다 고은지는 집을 구했다고 했다.하지만 어디에 구한 것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이지훈이 들어왔다.“어디서 사는지 알아봐.”“네? 누구요?”이지훈은 약간 멍해 있었다. 나태현이 알아보라는 게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이다.하지만 나태현의 눈빛을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알겠습니다. 지금 가서 알아보겠습니다.”역시 고은지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게 확실하다.하지만 이지훈은 나태현이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오랜 시간 함께 했지만 나태현의 속은 읽을 수가 없었다.고희주는 나태현의 딸이고, 고은지는 고희주의 엄마다.그런데 지금은 지신혜와 약혼을 준비하고 있다.“약혼식, 고은지가 책임지게 해.”“네?”이지훈은 나태현의 말을 듣고 그대로 굳어버렸다.지신혜와 나태현의 약혼식을 고은지가 준비하게 하라고? 아무리 나태현을 오랜 시간 모신 이지훈이라고 해도 그 순간만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한
이지훈이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아하니 좋은 일은 아닌게 확실했다.“그... 나 대표님께서 약혼식 관련 업무를 인수인계하라고 하셨습니다.”“...”고은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이지훈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눈은 여전히 담담해 보였다.약혼식을 준비하라고? 누구의 약혼식? 나태현과 지신혜의 약혼식을?고은지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정말 저한테 맡기신 거예요?”이지훈은 그렇게 웃는 고은지가 위험하다고 느꼈다.하지만 항상 부드럽던 고은지가 위험한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위험한 짓을 벌인다면 고은지가 아니라 량천옥이 벌일 것이다.량천옥이 얼마나 막무가내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나태현이 고은지를 이렇게 대하는 걸 알면 량천옥은 더 몇 배로 갚아주려고 할 것이다.그때가 되면 누가 나서도 말릴 수 없다.그 생각에 이지훈은 약간 머리가 아팠다.나태현이 왜 갑자기 이런 실수를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두 사람 사이에 딸이 생길 정도라니.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딸이 생긴 것을 알고 그동안 함께 해주지 못한 시간을 보상해 주기 위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텐데, 나태현은 아이를 치료하러 보낼 수밖에 없었다.아이 엄마인 고은지는 나태현의 곁에 남았지만 좋은 대접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나태현이 다른 여자와 약혼하는 것을 지켜볼 뿐만 아니라 손수 준비까지 해줘야 했다.고은지의 눈을 마주한 이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럼 업무를 인수인계해 주세요. 제가 책임지죠.”“...”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아무리 감정이 없다고 해도 아이의 아빠가 다른 여자랑 약혼하는 건데, 아무 반응도 없다니.이지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만약 원하지 않는다면 제가 나 대표님과 얘기해 보죠.”이지훈은 고은지를 동정했다. 고은지가 지금 어쩔 수없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지를 머리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이지훈은 뭐라
“네.”이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뭐라고 하던?”나태현이 물었다.뭐라고 했냐면...이지훈은 약간 망설이면서 나태현을 바라보았다. 정말 나태현의 속을 읽을 수 없었다.고은지를 늪에 빠뜨리는 게 원하는 게 아닌가?하지만 그런 거 같지도 않고...“고은지 씨가 잘 완성하겠다고 했습니다.”“태도는 어땠지?”나태현이 또 물었다.“...”태도라면 어떤 태도를 말하는 걸까.이런 일을 던져주면서 고은지가 열렬히 축하라도 해줄 줄 알았던 걸까?이지훈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태도도 꽤 좋았습니다.”“좋았다고?”나태현이 시선을 들었다.이지훈을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차가워졌다.이지훈은 그 눈빛에 몸이 떨렸다.‘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태도가 좋지 않으면 좋겠다는 건가? 내가 싸우고 오길 바란 건가?’이지훈은 나태현의 요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네, 태도가 좋았습니다. 다른 말은 없었어요.”나태현의 뜻은 모르겠지만 이지훈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이지훈의 말은 사실이었다. 고은지는 싫다는 말을 한 적도, 싫다는 기색을 내비친 적도 없었다.사무실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먼저 나가봐.”나태현이 이를 꽉 물고 대답했다.이지훈은 그 말투에 섞인 분노를 들어냈다.‘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지?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나태현의 속을 알 수 없는 이지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갈 뿐이었다.사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갑자기 굉음이 들려왔다.화가 난 나태현이 물건을 부수는 소리였다.이지훈은 도통 무슨 일인지 몰라서 머리를 긁적였다.정말 화가 난 건가?남자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왜 화가 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훈은 분명 그가 시키는 대로 했으니 더 할 것이 없었다.고은지는 다른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사무실의 전화가 울렸다. 고은지는 번호도 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올라와.”전화기
고은지는 이지훈이 자기를 동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대표님이 찾으시는데, 안 들어갈 수가 없네요.”“...”나태현이 고은지를 부른 것이라는 것을 안 이지훈은 나태현이 쓰레기라고 생각했다.이건 선을 넘었다!아무리 불만이 가득하다고 해도 이지훈은 도와줄 수가 없었다.“그러면 조심하세요.”“감사합니다.”말을 마친 고은지는 바로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이지훈은 그런 고은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약간 아팠다.나태현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본인에게 딸이 있었다는 걸 알고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전에는 고은지를 살리려고 애썼던 것 같은데.지금 태도를 보면 고은지를 증오하는 것만 같았다.사무실의 문을 열자마자 고은지의 눈에 들어오는 건 어지러운 바닥이었다.고은지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들어와서 서류를 테이블에 놓았다.“여기 쓰인 대로 하면 되는 거죠? 지씨 가문에서는 다른 요구가 없었나요?”“...”나태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고은지를 쳐다보았다. 사무실의 온도는 수직으로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나태현이 대답하지 않자 고은지는 여유롭게 물었다.“아니면 다른 요구라도 있나요?”나태현과 지신혜의 약혼식을 준비하는데 이렇게 친절하게 요구까지 물어보다니.참으로 대단한 여자다.“고은지, 정말 대단해.”나태현이 입을 열었다.“전에는 네가 이렇게 고집이 세다는 걸 왜 몰랐을까. 너무 고집에 세니까 꼭 꺾어보고 싶잖아.”“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 대표님.”고은지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눈빛 또한 흔들림이 없었다. 나태현은 그런 고은지의 말에 신경이 긁혔다.“꺼져!”고은지와 대화를 나누다가는 심장병으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나태현은 화가 났다.지금 당장 고은지의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었다.이 차가운 모습은 마치 하나의 가면 같았다.고은지를 건드려도 고은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지금도 마찬가지다. 나태현이 꺼지라고 화를 내도 고은지는 무표정으로 서류를
전화를 끊은 진윤이 고은영을 보면서 물었다.“지금은 좀 속이 풀렸어?”“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이렇게 한 거예요?”“응.”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영은 약간 감동하긴 했지만 이루어 말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예전 같았으면 고은영의 곁에 무조건적인 자기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일이었다면 도움을 거절할 것이었지만 이번 일에서는 물러설 수 없었다.“지금 해외에서 난리가 났어. 이 시점에 나태현의 집중력을 흩트리는 것도 좋지.”량천옥도 나쁜 사람이긴 하지만 량천옥이 나태현과 싸우고 있는 건 고은지 때문이었다.그러니 지금 진윤이나 배준우가 나태현의 시선을 자꾸만 국내로 돌리게 해서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건 량천옥에게 좋은 일이다.“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진윤이 고은영에게 얘기해 주었다.고은영은 진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나태현은 해외에 있고, 나태웅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그렇다면 이제는 나태범이 움직일 것이다. 나태범 세대가 싸운다면 젊은 세대들은 감히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고은영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나씨 가문보다 더욱 위태로운 건 우리 언니니까요.”희주가 죽었다.그걸 떠올리면 고은영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고은지는 지금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나씨 가문 사람들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갈라내고 싶었다.진윤은 고은영 눈에 비친 슬픔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아직 희주가 정말 죽었는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않았잖아. 그러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눈으로 본 것도 거짓일 수 있는데, 귀로 들은 것은 오죽하겠냐는 말이었다.진윤은 제삼자로서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을 딱 짚어 말할 수 없었기에 말을 아끼고 있었다.“그 소식이 가짜였으면 좋겠어요.”고은영은 고희주를 불쌍하게 여겼다. 조씨 가문 사람들은 희주가 조영수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
‘아까 왜 돈이 없다는 얘기를 해서는...’진윤은 고은영의 손을 잡고 쇼핑을 계속했다.점심쯤이 되자 진윤은 지친 고은영을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가서 식사했다.테이블 앞에 놓인 갖가지 음식을 보면서 고은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두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많지 않아요?”“안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진윤이 대답했다.진윤은 진정훈이 왜 그때 그렇게 심하게 날뛰었는지 이해가 갔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 가장 먼저 조사한 사람이다.그래서 고은영의 아픔을 알고 그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 온 세상의 좋은 것들을 고은영에게 주려고 한 것이다.그러니 고은영의 몫이 진유경에게로 넘어간 걸 알고 미쳐버린 것이다.지금의 진윤도 마찬가지였다.“이거 먹어.”진윤은 양고기 스테이크를 썰어서 고은영의 그릇에 담아주었다.“고마워요, 오빠도 얼른 먹어요.”“우리 집에 자주 놀러와. 우리 아내가 또 요리를 잘하거든.”“그런데 지금 임신한 거 아니에요? 저까지 가면 민폐죠.”“그래도 요즘 매일 요리하고 있어.”“네?”고은영이 깜짝 놀랐다.“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은영은 임신했을 때 만사가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말린다고 말려지는 사람이 아니잖아. 원하는 건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하긴.게다가 임산부는 입맛이 까다로워서 다른 사람이 한 것을 잘 먹지 못할 때가 많았다.윤설이 본인이 먹고 싶은 걸 직접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쁜 건 아니었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그럼 최대한 덜 힘들게 옆에서 보살펴줘요.”진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그건 나태현이 건 전화였다.“나태현이야.”“계약 해지 때문에 전화한 거겠죠?”고은영이 물었다.아까 차에서 진윤은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나씨 가문과 연관된 프로젝트를 모두 취소하기로 했다. 배준우도 마찬가지였다.그러니 나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진윤이 고개를 끄덕인 후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형, 지금
진호영이 사람들 앞에서 진유경, 김영희와 싸울 줄은 전혀 몰랐다.진유경과 김영희는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기에 속수무책으로 말려들고 있었다.그 시각.진윤은 고은영을 데리고 쇼핑하러 다니고 있었다.김영희와 진유경은 진정훈과 진윤이 장례식 준비도 돕지 않고 서로 재산을 빼앗느라 바쁘다고 했지만 사실 진윤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중이었다.진성택이 진유경에게 남겨준 물건은 많지 않았다. 차라리 진윤이 지금 고은영에게 쓰는 돈이 더욱 많을 것이다.“오빠, 너무 많이 산 거 아니에요?”명품을 너무 많이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기다란 영수증 위의 숫자를 본 고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배준우와 결혼한 후 돈이 모자랐던 적은 없지만 돈을 이렇게 많이 쓴 적도 거의 없었다.진윤은 경호원을 데리고 왔다. 네 명의 경호원 손에는 쇼핑백이 가득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일부는 란완 리조트로 배송시켰다.“괜찮아. 많이 사. 우리 아내 것도 골라줘야지.”진윤이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오빠는 정말 좋은 남자 같아요.”자세히 생각해보니 배준우는 직접 무언가를 사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대부분은 다 다른 사람을 시켜서 란완 리조트로 가져오게 했던 것 같다.그리고 고은영은 쇼핑을 좋아하는 편이니 직접 사는 편이 많았다.하지만 진윤은 쇼핑하면서도 자기 아내를 생각한다.진윤이 웃으면서 얘기했다.“배준우도 좋은 남자야. 그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거야.”“그 사람이 전에 얼마나 나빴는지 몰라서 그래요.”진윤이 배준우를 좋은 남자라고 얘기하자 고은영이 입을 비죽거리면서 대답했다.배준우와 결혼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좋은 남자라는 말이 쏙 들어갈 정도였다.그때의 배준우는 정말... 악랄한...고은영은 그때 유산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러다 고은영은 또 나태웅을 떠올렸다.나태웅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나태웅과 배준우가 같이 고은영을 위협했으니까 말이다.고은영은 나태웅이 안지영을
결국 진호영이 다가가서 말했다.“할머니, 지금 이 장소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진윤과 진정훈이 오늘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두 사람이 오지 않은 이유도 명백했다.진성택이 두 사람을 너무 크게 실망시켰기 때문이다.진유경은 진호영이 진윤과 진정훈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면서 더욱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호영 오빠, 진윤 오빠랑 정훈 오빠한테 연락해주면 안 돼요? 적어도 아버지 보내드리는 길은 보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은영이도요... 아버지는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잖아요.”“그만 떠들어.”진유경이 말을 마치자마자 진호영이 싸늘하게 얘기했다.다른 건 몰라도 이 상황에서 고은영의 얘기를 꺼내다니.진호영은 진유경에게서 이례 없는 메스꺼움을 느꼈다.진유경은 진호영의 반응에 멍해졌다.하지만 사람들의 화제는 이미 고은영으로 넘어가 버렸다.다들 고은영을 불효녀라고, 은혜도 모르는 매정한 여자라고 욕했다.진호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진유경을 노려보며 얘기했다.“너 때문에 은영이는 집에 돌아오지도 못했어.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다고? 도대체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거야? 네 눈은 장식이야?”예뻐한 적이 있었나?한 번도 없었다.진성택이 고은영에게 조금이라도 잘해줬다면 고은영이 진씨 가문 문턱을 넘어보지 못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 그게 아니라...”“아버지는 남은 주식을 모두 너한테 남겨줬어. 하지만 친딸인 은영이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 그런데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하셨다고?”진호영이 모든 것을 까밝히자 진유경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호영 오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진유경은 더욱 크게 울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다.진유경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진호영은 진유경의 편이었는데 지금은 왜...‘이게 다 고은영 때문이야! 대체 무슨 수로 꼬드겼기에 오빠들이 다 고은영의 편을 들어주는 거냐고!’“왜 이러냐고? 우리 어머니가 은영이에게 남겨준
이윽고 고은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진호영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고은영이 진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진호영과 고은영은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진호영은 보통 직접 찾아와서 문제를 얘기하는 편이기에 전화를 잘 걸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진호영이 전화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고은영은 잘 알고 있었다.진윤에게 전화하자마자 또 고은영에게 전화하다니.고은영이 전화를 받기도 전에 진윤이 고은영의 전화를 빼앗아갔다.“오빠...”진윤은 바로 전화를 꺼버렸다.“꺼버리면 어떡해요. 혹시 언니가 전화라도 하면...”“걱정하지 마. 네 언니는 너한테 연락하지 않을 거야.”“...”그렇다고 해도 마음대로 핸드폰을 꺼버리는 건 좀...게다가 고은지가 정말 무슨 일이 생겨서 고은영을 찾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진윤은 자연스럽게 고은영의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돌려주지 않았다.“오빠.”“오늘은 나한테 집중해.”그 말투는 아주 강압적이었다.“...”마치 그동안 진윤에게 신경 써주지 않아 삐진 것만 같았다.하지만 고은영도 어쩔 수 없었다.고희주와 고은지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말이다.사실 고은영도 알고 있었다. 고은지는 고은영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고희주의 일 때문에 고은지는 언제든지 화를 낼 수 있었다.“그래요.”“...”“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너한테 뭘 좀 사주려고.”“...”사준다고?고은영은 진윤의 목적을 알 수 없었다.진성택이 죽었다.장례식에 안 가는 건 이해가 되지만 굳이 고은영을 데리고 나와 쇼핑을 하는 목적은 뭘까.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그때 윤설의 전화가 걸려왔다.진윤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정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그런 진윤을 보면서 고은영은 진윤이 참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진윤과 비교하면 나태현은 정신병이 틀림없었다....진성택은 오늘 화장하게 된다.김영희, 진유경과 진호영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진윤과 진정훈은 결국
숨을 깊게 내쉰 나태현이 얘기했다.“량천옥이 나씨 가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 지금...”“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배준우가 나태현의 말을 끊었다.그때 나씨 가문 내부는 부글부글 끓었었다. 게다가 량천옥을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다.나태현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갔고 나태현의 어머니도 그 시기에 돌아갔다.그 모든 모순의 시작은 량천옥이었다.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씨 가문은 여전히 량천옥과 원한이 있었다.다들 그저 그 원함을 꾹 참고 있었는데 고은지가 나타났다.량천옥의 딸이면서 나태현의 딸 엄마인 고은지 때문에 나씨 가문과 량천옥의 전쟁이 다시금 시작되었다.“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요.”우정과 사랑 중에서 배준우는 당연히 사랑이었다.게다가 이번 일에는 나씨 가문에서 숨기는 것이 너무 많았다.또 나태현이 회사의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보니 프로젝트가 위험했다.나태현은 화가 나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 소리를 들은 배준우는 핸드폰을 소파에 툭 던졌다....다른 한편.고은영과 진윤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진윤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나씨 가문과 엮인 프로젝트를 모두 엎어버리라고 명령했다.옆에 있는 고은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걱정했다. 진윤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고은영이 진윤의 손을 잡았다.“오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나씨 가문이 밉긴 하지만 진윤의 일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진윤이 계약을 많이 해지할수록 진윤에게 영향이 더 클 테니까 말이다.진윤은 본인을 걱정해주는 고은영을 보면서 마음이 누그러졌다.부드러운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진윤이 얘기했다.“다 필요 없는 것들이야. 나태현은 지금 당장 귀국해야 해.”그 말을 들은 고은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머릿속에는 병원에 있는 고은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은지는 나태현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눈치채고 얘기했다.“지금 나태현과 량천옥이 해외에서 서로 죽이고 난리가 났어. 만
화가 난 나태범을 보면서 집사는 안절부절못했다.“지금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생각하던 집사가 말을 이었다.“게다가 진씨 가문 쪽도 걱정해야 합니다.”“진씨 가문? 거기는 왜.”나태현과 량천옥이 싸우는 것만으로도 나태범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이러다가는 정말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게다가 배씨 가문에서 계약까지 해지했지...이러다가는 그룹이 파산될지도 몰랐다.“배준우 씨 아내가 진윤 씨와 진정훈 씨의 친여동생입니다. 그러니 이 세 사람 다 그 고은지 씨의 동생을 위해 움직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나태범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저 진씨 가문에서 친딸을 찾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성택이 친딸보다 양딸을 더욱 아낀다는 것까지 말이다.배준우가 고은영과 결혼할 때 강성의 사람들은 배준우가 많이 아깝다고 생각했다.일반적인 신분으로는 배준우의 옆에 설 수 없으니까 말이다.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은영이 진짜 진씨 가문의 친딸이었다.나태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이튿날 아침.고은영이 아침을 다 먹자마자 진윤이 도착했다.그리고 조카를 위한 선물도 가득 가져왔다.고용인들이 진윤이 가져온 물건을 보관해주었다.약간 붉어진 고은영의 눈가를 보면서, 진윤이 배준우한테 물었다.“어젯밤 계속 운 거예요?”배준우도 머리가 약간 아팠다.“제대로 자지 못했어요.”진윤이 다가가서 고은영을 마주 보더니 고은영이 입고 있는 귀여운 잠옷으로 눈을 돌렸다.배준우는 정말 딸을 키우는 것처럼 고은영을 보호해주는 것만 같았다.고은영은 원래도 키가 작은 편이어서 배준우와 함께 있을 때면 아주 작아보였다.“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 하자.”“정말 나가야 해요?”고은영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고은영은 병원에 가서 고은지를 보고 싶었다.고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진작 알아차렸다는 듯이 얘기했다.“병원 쪽에는 내가 사람들을 깔아놨어. 무슨 일 없을 거야. 가자.”진윤의 말을 들은
하지만 진윤이 내일 고은영을 데리고 나가는 것의 목적을 떠올리면 고은영은 어쩔 수 없었다.“당연한 거 아닌가요?”진윤이 당당하게 얘기한 후 전화를 끊었다.배준우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더니 고은영을 쳐다보았다.“이미 다 들었지?”“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진성택은 사망했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장례식에 올 것인지 안 올 것인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하지만 진윤은 장례식에 가지 말고 나가서 쇼핑하자고 했다.그것도 웃으면서 말이다.“넌 어떻게 하고 싶어?”“안 가도 돼요?”고은영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웃으면서 쇼핑해야 한다니. 고은영에게 있어서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배준우도 짐작하고 있었다.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배준우가 얘기했다.“아마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쇼핑이 최종 목적이 아닐 거야.”“위로하는 거예요?”진윤은 배준우더러 고은영을 잘 위로해주라고 했다.“위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네 큰형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하는 말이야. 단순하게 쇼핑하는 게 목적일 리 없어.”배준우가 확신하면서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배준우는 허락하는 고은영을 보면서 한숨을 돌렸다.그리고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다 지나갈 거야.”“나씨 가문 쪽은...”거기까지 말한 고은영은 고개를 들고 배준우를 쳐다보았다.고희주의 일로 마음 아팠지만 배준우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배준우는 고은영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고은영에게 짧게 키스한 배준우가 이어서 얘기했다.“나씨 가문과 협업하는 프로젝트 두 개가 있었는데 이미 계약을 해지했어.”“주주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고은영이 걱정하면서 물었다.“그 두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서 다들 발을 빼는 분위기야. 아마도 량천옥 씨가 한 일 같은데.”그래서 배준우도 큰 문제 없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지나간 일에 대해 배준우는 뭐라고 할 수 없
진정훈이 전화를 건 것은 진정훈에게도 계획이 있어서였다.“진유경을 조심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진유경에게 남긴 주식이 있는데 꼭 되찾아올 겁니다.”진유경이라...진정훈은 진유경이 왜 계속 고은영을 끌어내리려는지 깨달았다.그건 바로 진유경이 아직 자기 위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니 이제라도 제대로 알게 해줘야 했다.배준우는 진정훈의 말을 알아듣고 얘기했다.“네. 알겠습니다.”“장례식은 와도 되고 안 와도 괜찮다고 전해줘요.”“네.”진정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은영의 뜻을 존중해주었다.하지만 장례식에 고은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 뻔했다.“장례식은 언제입니까.”“이틀 뒤입니다.”“알겠습니다.”이틀 뒤라니. 생각보다 장례를 서두르는 모습에 배준우는 약간 의아했다.진정훈은 그저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그래서 그동안 배준우가 고은영을 잘 지켜줄 수 있도록 전화를 건 것이다....진정훈과의 통화를 마치고 배준우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데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이번에는 진정훈이 아닌 진윤이 걸어온 전화였다.배준우는 고은영을 안고 소파에 앉았다. 영원히 고은영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처럼 고은영을 꼭 안고 있었다.“여보세요.”배준우는 진윤을 존경하는 편이었다.진윤은 정말 가문의 도움 없이 지금 그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다.“은영이는요? 연락이 안 돼서.”“기분이 안 좋아요. 무슨 일이죠?”“왜 기분이 안 좋은 거죠?”“고은지 씨한테 일이 좀 생겨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요.”고은지의 상황을 전해 들은 진윤은 머리가 아팠다.지금 고은영에게는 모든 일이 설상가상이었다.“내일 오전 아홉 시에 내가 데리러 간다고 전해줘요.”“내일이요?”“네.”진윤이 대답했다.배준우는 진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진윤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씨 가문이 얼마나 엉망인지 광고할 셈이었다.진윤이 진성택의 장례식에도 나서지 않고 친여동생인 고은영을 데리고 밖에서 돌아다닌다면...“어디로 갈 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