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이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아하니 좋은 일은 아닌게 확실했다.“그... 나 대표님께서 약혼식 관련 업무를 인수인계하라고 하셨습니다.”“...”고은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이지훈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눈은 여전히 담담해 보였다.약혼식을 준비하라고? 누구의 약혼식? 나태현과 지신혜의 약혼식을?고은지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정말 저한테 맡기신 거예요?”이지훈은 그렇게 웃는 고은지가 위험하다고 느꼈다.하지만 항상 부드럽던 고은지가 위험한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위험한 짓을 벌인다면 고은지가 아니라 량천옥이 벌일 것이다.량천옥이 얼마나 막무가내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나태현이 고은지를 이렇게 대하는 걸 알면 량천옥은 더 몇 배로 갚아주려고 할 것이다.그때가 되면 누가 나서도 말릴 수 없다.그 생각에 이지훈은 약간 머리가 아팠다.나태현이 왜 갑자기 이런 실수를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두 사람 사이에 딸이 생길 정도라니.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딸이 생긴 것을 알고 그동안 함께 해주지 못한 시간을 보상해 주기 위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텐데, 나태현은 아이를 치료하러 보낼 수밖에 없었다.아이 엄마인 고은지는 나태현의 곁에 남았지만 좋은 대접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나태현이 다른 여자와 약혼하는 것을 지켜볼 뿐만 아니라 손수 준비까지 해줘야 했다.고은지의 눈을 마주한 이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럼 업무를 인수인계해 주세요. 제가 책임지죠.”“...”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아무리 감정이 없다고 해도 아이의 아빠가 다른 여자랑 약혼하는 건데, 아무 반응도 없다니.이지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만약 원하지 않는다면 제가 나 대표님과 얘기해 보죠.”이지훈은 고은지를 동정했다. 고은지가 지금 어쩔 수없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지를 머리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이지훈은 뭐라
“네.”이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뭐라고 하던?”나태현이 물었다.뭐라고 했냐면...이지훈은 약간 망설이면서 나태현을 바라보았다. 정말 나태현의 속을 읽을 수 없었다.고은지를 늪에 빠뜨리는 게 원하는 게 아닌가?하지만 그런 거 같지도 않고...“고은지 씨가 잘 완성하겠다고 했습니다.”“태도는 어땠지?”나태현이 또 물었다.“...”태도라면 어떤 태도를 말하는 걸까.이런 일을 던져주면서 고은지가 열렬히 축하라도 해줄 줄 알았던 걸까?이지훈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태도도 꽤 좋았습니다.”“좋았다고?”나태현이 시선을 들었다.이지훈을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차가워졌다.이지훈은 그 눈빛에 몸이 떨렸다.‘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태도가 좋지 않으면 좋겠다는 건가? 내가 싸우고 오길 바란 건가?’이지훈은 나태현의 요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네, 태도가 좋았습니다. 다른 말은 없었어요.”나태현의 뜻은 모르겠지만 이지훈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이지훈의 말은 사실이었다. 고은지는 싫다는 말을 한 적도, 싫다는 기색을 내비친 적도 없었다.사무실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먼저 나가봐.”나태현이 이를 꽉 물고 대답했다.이지훈은 그 말투에 섞인 분노를 들어냈다.‘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지?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나태현의 속을 알 수 없는 이지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갈 뿐이었다.사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갑자기 굉음이 들려왔다.화가 난 나태현이 물건을 부수는 소리였다.이지훈은 도통 무슨 일인지 몰라서 머리를 긁적였다.정말 화가 난 건가?남자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왜 화가 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훈은 분명 그가 시키는 대로 했으니 더 할 것이 없었다.고은지는 다른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사무실의 전화가 울렸다. 고은지는 번호도 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올라와.”전화기
고은지는 이지훈이 자기를 동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대표님이 찾으시는데, 안 들어갈 수가 없네요.”“...”나태현이 고은지를 부른 것이라는 것을 안 이지훈은 나태현이 쓰레기라고 생각했다.이건 선을 넘었다!아무리 불만이 가득하다고 해도 이지훈은 도와줄 수가 없었다.“그러면 조심하세요.”“감사합니다.”말을 마친 고은지는 바로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이지훈은 그런 고은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약간 아팠다.나태현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본인에게 딸이 있었다는 걸 알고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전에는 고은지를 살리려고 애썼던 것 같은데.지금 태도를 보면 고은지를 증오하는 것만 같았다.사무실의 문을 열자마자 고은지의 눈에 들어오는 건 어지러운 바닥이었다.고은지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들어와서 서류를 테이블에 놓았다.“여기 쓰인 대로 하면 되는 거죠? 지씨 가문에서는 다른 요구가 없었나요?”“...”나태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고은지를 쳐다보았다. 사무실의 온도는 수직으로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나태현이 대답하지 않자 고은지는 여유롭게 물었다.“아니면 다른 요구라도 있나요?”나태현과 지신혜의 약혼식을 준비하는데 이렇게 친절하게 요구까지 물어보다니.참으로 대단한 여자다.“고은지, 정말 대단해.”나태현이 입을 열었다.“전에는 네가 이렇게 고집이 세다는 걸 왜 몰랐을까. 너무 고집에 세니까 꼭 꺾어보고 싶잖아.”“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 대표님.”고은지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눈빛 또한 흔들림이 없었다. 나태현은 그런 고은지의 말에 신경이 긁혔다.“꺼져!”고은지와 대화를 나누다가는 심장병으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나태현은 화가 났다.지금 당장 고은지의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었다.이 차가운 모습은 마치 하나의 가면 같았다.고은지를 건드려도 고은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지금도 마찬가지다. 나태현이 꺼지라고 화를 내도 고은지는 무표정으로 서류를
나태현과 고은지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지훈은 나태현이 이렇게 과한 명령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있으니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이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나태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그렇게 하기만 해봐!”“...”그 협박에 이지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이제는 나태현이 화를 내는 게 다 고은지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하지만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다.결국 이지훈은 나태현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이지훈은 나태현의 차가운 눈빛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가서 고은지 씨를 찾아오겠습니다.”말을 마친 이지훈은 얼른 몸을 돌려서 떠났다. 마치 도망가는 듯한 속도였다.고은지가 자리에 앉자마자 전화기가 또 울렸다.하지만 전화를 받기도 전에 이지훈이 뛰어왔다.고은지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차가운 눈으로 이지훈을 바라보았다.이지훈은 약간 겁이 났다.“고은지 씨, 나 대표님이 사무실을 청소하라고 하셨습니다.”사무실 청소라니.고은지는 미간을 찌푸렸다.“청소부는요? 장식인가요?”이지훈은 표정이 굳어버렸다.“그건 아닙니다만, 나 대표님이 지시한 일입니다.”사무실을 그렇게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고은지더러 정리하라니.하지만 천락 그룹에서는 나태현이 일인자이니 모두가 나태현의 말을 따라야 한다.그러니 고은지를 불러 사무실을 청소하게 한 것도 모두 고의적인 이이다.고은지는 더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네.”이지훈이 대답했다.고은지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동정심이 들었다.병원에서 죽어가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이런 이상한 상사를 만났으니...이지훈이 먼저 떠났다.고은지의 핸드폰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고은지는 숨을 돌린 후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고은지입니다.”“은지야, 나야.”전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지는 그 목소리에 몸이 흠칫 굳었다.머릿속도 새하얘졌다.“너...”고은지
사무실의 문을 열자 아까보다 더욱 난장판이 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지훈은 고은지의 뒤에 서서 얘기했다.“대표님은 방금 나가셨습니다. 청소부를 부를까요?”“괜찮습니다.”고은지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이윽고 사무실에 들어가 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이지훈은 그런 고은지의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태현의 곁을 오랜 시간 지킨 만큼, 이지훈은 나태현을 잘 알고 있었다. 이지훈이 아는 나태현은 선을 지키는 사람이었다.고은지가 고희주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학교에서의 일만 보면 알 수 있다.그런데 지금 나태현이 고희주를 빼돌렸으니 고은지는 나태현이 하라는 일을 그대로 할 수밖에 없다.“아...”이지훈이 생각에 빠져있을 때, 고은지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유리 조각에 손을 베인 것 같았다.이지훈은 바로 달려가서 물었다.“무슨 일이죠? 다쳤어요?”고은지는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약을 가져오라고 할게요.”말을 마친 이지훈은 사무실에서 나가 구급상자를 찾으러 갔다.이지훈이 떠나자마자 사무실에는 불청객이 들이닥쳤다.바로 지신혜였다.고은지가 나태현 사무실 소파에 앉아 휴지를 뽑고 있는 것을 본 지신혜가 차갑게 물었다.“뭐 하는 거야?”피를 닦던 고은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윽고 고개를 돌리지 지신혜가 차가운 눈으로 고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지씨 가문은 강성에서 유명한 가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씨 가문 사람들은 항상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지신혜가 다가가서 물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물었잖아.”고은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간을 찌푸린 채 손가락을 보았다.지신혜도 고은지의 시선을 따라 손가락을 감싼 휴지에서 피가 스며 나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 모습에 지신혜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비웃었다.“하, 정말 천박한 수단이네. 그 정도로 돈이 필요해?”지신혜는 눈앞의 사람이 고은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그저 이 여자가 젊은 비서들처럼 젊
하지만 지신혜의 힘은 너무 셌다.지신혜가 힘을 더 주자 상처가 더욱 깊어졌다.“그래서, 그 옆자리를 노려보겠다는 거야? 네까짓 게?”나태현은 핸드폰을 챙기지 않아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윽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지훈도 약을 들고 돌아왔다.나태현의 뒤에 서 있던 이지훈은 그 장면을 보고 깜짝 놀라서 얼른 다가갔다.“지신혜 씨, 오셨군요.”이지훈이 입을 열자 팽팽했던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졌다.지신혜는 사무실 입구 쪽에 서 있는 나태현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발을 치워버렸다.“태현 씨, 왔어요? 아까 어디 갔던 거예요.”말투도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고은지를 대하던 태도와는 180도 달랐다.나태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지신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닥에서 일어서는 고은지를 쳐다보았다.손의 상처는 아주 심해서 피가 카펫에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이지훈이 얼른 고은지의 곁으로 왔다.“얼른 지혈부터 해요.”고은지는 차가운 표정으로 지신혜를 쳐다보았다.그리고 또 나태현을 바라보았다.나태현은 지신혜를 향해 부드럽게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올 거면 온다고 먼저 얘기라도 하지. 저 여자가 널 괴롭힌 거야?”“상사의 약혼녀를 향한 존중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말투도 차갑고요.”지신혜가 억울한 듯 얘기했다.지신혜는 아버지가 데려오는 사생아들이 본인을 깔보거나 존중하지 않을 때마다 화를 잔뜩 냈었다.그래서 지신혜는 위아래가 없는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했다.이 여자는 지신혜가 나태현의 약혼녀인 것을 알면서도 그런 태도로 지신혜를 대했으니, 이런 벌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그 말을 들은 나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런 사람은 혼을 내야지.”그 말을 들은 이지훈과 고은지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이지훈은 붕대와 소독약을 찾아서 고은지에게 건네주었다. 고은지는 고맙다고 하면서 약을 받았다.고은지가 사무실을 나가려고 할 때, 나태현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사과해.”“.
고은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뒤로 숨기고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가서 처리하면 됩니다.”“아까 피를 얼마나 흘린 건지 알아요?”이지훈이 진지하게 얘기했다.고은지는 손이 아픈지도 몰랐다.그저 심장이 몹시 아픈 것만 같았다.유리가 손바닥을 파고들던 고통이 심장에서 느껴지고 있었다.결국 이지훈은 고은지를 데리고 내려갔다.이지훈의 생각이 맞았다. 고은지의 상처는 아주 심했다. 이지훈이 고은지의 손바닥을 보려고 손을 폈을 때, 고은지는 아파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겨우 손을 다 펴자, 상처 안에 작은 유리 조각들이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 이지훈 같은 남자도 그 상처를 보고 놀라서 몸이 약간 굳을 정도였다.이지훈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병원에 가서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상처 안에 박힌 유리 조각들을 다 빼내야죠.”얼마나 많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괜찮아요.”“...”이지훈이 뭐라 하기도 전에 고은지는 주먹을 폈다. 아까는 아파서 바들바들 떨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것만 같았다.이윽고 고은지는 손톱으로 그 유리 조각들을 빼냈다.전문가가 아닌 데다, 아무렇게 처리하고 있으니 상처가 더더욱 커지고 깊어졌다.피도 더욱 많이 났다.“이건...”이지훈은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하지만 고은지는 무표정으로 구급상자에서 솜을 꺼내 피를 대충 닦았다.“이러면 안 돼요. 유리 조각이 안에 있으면 어떡합니까.”이지훈이 물었다.이번 일은 지신혜가 선을 넘은 것이다. 천락 그룹에 찾아와 고은지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말이다.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으면서 이러는 것을 보니 결혼하게 되면 얼마나 심해질지 몰랐다.이지훈은 속으로 화를 내면서 생각했다.고은지는 손가락으로 상처를 꾹 눌렀다.멎었던 피가 또 흘러내렸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이지훈이 놀라서 고은지의 손목을 잡아챘다.본인이 어떻게 병원에서 퇴원한 것인지 잊은 건가? 이 피가 얼마나 소중한 건지 잊은 건가?“만져봤는데, 안에 남은 유리 조각은 없어요.”
나태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이지훈을 쳐다보았다.이지훈은 그 눈빛을 마주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차가운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꾹 참고 이어서 얘기했다.“고은지 씨는 그래도 대표님 아이의 엄마입니다.”고은지는 량천옥의 딸이기는 하나 그건 고은지가 선택한 일이 아니다.니테현이 고은지를 싫어한다고 해도, 고희주를 싫어한다고 해도 이런 과분한 짓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그래서 마음 아파?”나태현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이지훈은 그 생각에 온몸이 굳어버렸다.“그 누구라도 고은지 씨의 모습을 보면 동정심이 생길 겁니다.”이지훈의 말이 맞았다.천락 그룹에서는 고은지를 우습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고은지와 고희주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은지가 조영수와 결혼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했을 때, 고은지를 우습게 보던 사람들이 있었다.하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가 나태현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아무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이지훈의 말이 맞았다.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은지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할 것이다.나태현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동정한다고? 하하하... 고은지가 동정이 필요한 사람인가?”고은지는 량천옥의 딸이다.량천옥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그런 량천옥의 딸이 동정을 얻고 산다니. 웃기지도 않은 소리다.이지훈은 비꼬는 듯한 나태현의 말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나태현은 고은지가 량천옥의 딸이라는 사실을 싫어했다.만약 고은지가 량천옥의 딸이 아니었다면 나태현은 고희주를 빼앗아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고은지 씨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량천옥 씨의 사랑을 받아온 것도 아닌데 지금은 량천옥 씨 때문에 복수의 대상이 되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됩니다.”이지훈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모든 것을 얘기했다.량천옥은 나쁜 여자다. 강성에서도 유명한 나쁜 여자다.죄는 량천옥이 짓고 벌은 고은지가 갚는다.이건 누가 봐도 불공평한 일이었다.“모든 일이 공평할 수는 없지만 고
전화를 끊은 진윤이 고은영을 보면서 물었다.“지금은 좀 속이 풀렸어?”“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이렇게 한 거예요?”“응.”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영은 약간 감동하긴 했지만 이루어 말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예전 같았으면 고은영의 곁에 무조건적인 자기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일이었다면 도움을 거절할 것이었지만 이번 일에서는 물러설 수 없었다.“지금 해외에서 난리가 났어. 이 시점에 나태현의 집중력을 흩트리는 것도 좋지.”량천옥도 나쁜 사람이긴 하지만 량천옥이 나태현과 싸우고 있는 건 고은지 때문이었다.그러니 지금 진윤이나 배준우가 나태현의 시선을 자꾸만 국내로 돌리게 해서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건 량천옥에게 좋은 일이다.“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진윤이 고은영에게 얘기해 주었다.고은영은 진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나태현은 해외에 있고, 나태웅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그렇다면 이제는 나태범이 움직일 것이다. 나태범 세대가 싸운다면 젊은 세대들은 감히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고은영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나씨 가문보다 더욱 위태로운 건 우리 언니니까요.”희주가 죽었다.그걸 떠올리면 고은영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고은지는 지금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나씨 가문 사람들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갈라내고 싶었다.진윤은 고은영 눈에 비친 슬픔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아직 희주가 정말 죽었는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않았잖아. 그러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눈으로 본 것도 거짓일 수 있는데, 귀로 들은 것은 오죽하겠냐는 말이었다.진윤은 제삼자로서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을 딱 짚어 말할 수 없었기에 말을 아끼고 있었다.“그 소식이 가짜였으면 좋겠어요.”고은영은 고희주를 불쌍하게 여겼다. 조씨 가문 사람들은 희주가 조영수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
‘아까 왜 돈이 없다는 얘기를 해서는...’진윤은 고은영의 손을 잡고 쇼핑을 계속했다.점심쯤이 되자 진윤은 지친 고은영을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가서 식사했다.테이블 앞에 놓인 갖가지 음식을 보면서 고은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두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많지 않아요?”“안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진윤이 대답했다.진윤은 진정훈이 왜 그때 그렇게 심하게 날뛰었는지 이해가 갔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 가장 먼저 조사한 사람이다.그래서 고은영의 아픔을 알고 그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 온 세상의 좋은 것들을 고은영에게 주려고 한 것이다.그러니 고은영의 몫이 진유경에게로 넘어간 걸 알고 미쳐버린 것이다.지금의 진윤도 마찬가지였다.“이거 먹어.”진윤은 양고기 스테이크를 썰어서 고은영의 그릇에 담아주었다.“고마워요, 오빠도 얼른 먹어요.”“우리 집에 자주 놀러와. 우리 아내가 또 요리를 잘하거든.”“그런데 지금 임신한 거 아니에요? 저까지 가면 민폐죠.”“그래도 요즘 매일 요리하고 있어.”“네?”고은영이 깜짝 놀랐다.“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은영은 임신했을 때 만사가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말린다고 말려지는 사람이 아니잖아. 원하는 건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하긴.게다가 임산부는 입맛이 까다로워서 다른 사람이 한 것을 잘 먹지 못할 때가 많았다.윤설이 본인이 먹고 싶은 걸 직접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쁜 건 아니었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그럼 최대한 덜 힘들게 옆에서 보살펴줘요.”진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그건 나태현이 건 전화였다.“나태현이야.”“계약 해지 때문에 전화한 거겠죠?”고은영이 물었다.아까 차에서 진윤은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나씨 가문과 연관된 프로젝트를 모두 취소하기로 했다. 배준우도 마찬가지였다.그러니 나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진윤이 고개를 끄덕인 후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형, 지금
진호영이 사람들 앞에서 진유경, 김영희와 싸울 줄은 전혀 몰랐다.진유경과 김영희는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기에 속수무책으로 말려들고 있었다.그 시각.진윤은 고은영을 데리고 쇼핑하러 다니고 있었다.김영희와 진유경은 진정훈과 진윤이 장례식 준비도 돕지 않고 서로 재산을 빼앗느라 바쁘다고 했지만 사실 진윤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중이었다.진성택이 진유경에게 남겨준 물건은 많지 않았다. 차라리 진윤이 지금 고은영에게 쓰는 돈이 더욱 많을 것이다.“오빠, 너무 많이 산 거 아니에요?”명품을 너무 많이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기다란 영수증 위의 숫자를 본 고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배준우와 결혼한 후 돈이 모자랐던 적은 없지만 돈을 이렇게 많이 쓴 적도 거의 없었다.진윤은 경호원을 데리고 왔다. 네 명의 경호원 손에는 쇼핑백이 가득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일부는 란완 리조트로 배송시켰다.“괜찮아. 많이 사. 우리 아내 것도 골라줘야지.”진윤이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오빠는 정말 좋은 남자 같아요.”자세히 생각해보니 배준우는 직접 무언가를 사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대부분은 다 다른 사람을 시켜서 란완 리조트로 가져오게 했던 것 같다.그리고 고은영은 쇼핑을 좋아하는 편이니 직접 사는 편이 많았다.하지만 진윤은 쇼핑하면서도 자기 아내를 생각한다.진윤이 웃으면서 얘기했다.“배준우도 좋은 남자야. 그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거야.”“그 사람이 전에 얼마나 나빴는지 몰라서 그래요.”진윤이 배준우를 좋은 남자라고 얘기하자 고은영이 입을 비죽거리면서 대답했다.배준우와 결혼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좋은 남자라는 말이 쏙 들어갈 정도였다.그때의 배준우는 정말... 악랄한...고은영은 그때 유산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러다 고은영은 또 나태웅을 떠올렸다.나태웅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나태웅과 배준우가 같이 고은영을 위협했으니까 말이다.고은영은 나태웅이 안지영을
결국 진호영이 다가가서 말했다.“할머니, 지금 이 장소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진윤과 진정훈이 오늘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두 사람이 오지 않은 이유도 명백했다.진성택이 두 사람을 너무 크게 실망시켰기 때문이다.진유경은 진호영이 진윤과 진정훈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면서 더욱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호영 오빠, 진윤 오빠랑 정훈 오빠한테 연락해주면 안 돼요? 적어도 아버지 보내드리는 길은 보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은영이도요... 아버지는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잖아요.”“그만 떠들어.”진유경이 말을 마치자마자 진호영이 싸늘하게 얘기했다.다른 건 몰라도 이 상황에서 고은영의 얘기를 꺼내다니.진호영은 진유경에게서 이례 없는 메스꺼움을 느꼈다.진유경은 진호영의 반응에 멍해졌다.하지만 사람들의 화제는 이미 고은영으로 넘어가 버렸다.다들 고은영을 불효녀라고, 은혜도 모르는 매정한 여자라고 욕했다.진호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진유경을 노려보며 얘기했다.“너 때문에 은영이는 집에 돌아오지도 못했어.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다고? 도대체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거야? 네 눈은 장식이야?”예뻐한 적이 있었나?한 번도 없었다.진성택이 고은영에게 조금이라도 잘해줬다면 고은영이 진씨 가문 문턱을 넘어보지 못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 그게 아니라...”“아버지는 남은 주식을 모두 너한테 남겨줬어. 하지만 친딸인 은영이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 그런데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하셨다고?”진호영이 모든 것을 까밝히자 진유경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호영 오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진유경은 더욱 크게 울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다.진유경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진호영은 진유경의 편이었는데 지금은 왜...‘이게 다 고은영 때문이야! 대체 무슨 수로 꼬드겼기에 오빠들이 다 고은영의 편을 들어주는 거냐고!’“왜 이러냐고? 우리 어머니가 은영이에게 남겨준
이윽고 고은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진호영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고은영이 진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진호영과 고은영은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진호영은 보통 직접 찾아와서 문제를 얘기하는 편이기에 전화를 잘 걸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진호영이 전화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고은영은 잘 알고 있었다.진윤에게 전화하자마자 또 고은영에게 전화하다니.고은영이 전화를 받기도 전에 진윤이 고은영의 전화를 빼앗아갔다.“오빠...”진윤은 바로 전화를 꺼버렸다.“꺼버리면 어떡해요. 혹시 언니가 전화라도 하면...”“걱정하지 마. 네 언니는 너한테 연락하지 않을 거야.”“...”그렇다고 해도 마음대로 핸드폰을 꺼버리는 건 좀...게다가 고은지가 정말 무슨 일이 생겨서 고은영을 찾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진윤은 자연스럽게 고은영의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돌려주지 않았다.“오빠.”“오늘은 나한테 집중해.”그 말투는 아주 강압적이었다.“...”마치 그동안 진윤에게 신경 써주지 않아 삐진 것만 같았다.하지만 고은영도 어쩔 수 없었다.고희주와 고은지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말이다.사실 고은영도 알고 있었다. 고은지는 고은영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고희주의 일 때문에 고은지는 언제든지 화를 낼 수 있었다.“그래요.”“...”“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너한테 뭘 좀 사주려고.”“...”사준다고?고은영은 진윤의 목적을 알 수 없었다.진성택이 죽었다.장례식에 안 가는 건 이해가 되지만 굳이 고은영을 데리고 나와 쇼핑을 하는 목적은 뭘까.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그때 윤설의 전화가 걸려왔다.진윤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정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그런 진윤을 보면서 고은영은 진윤이 참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진윤과 비교하면 나태현은 정신병이 틀림없었다....진성택은 오늘 화장하게 된다.김영희, 진유경과 진호영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진윤과 진정훈은 결국
숨을 깊게 내쉰 나태현이 얘기했다.“량천옥이 나씨 가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 지금...”“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배준우가 나태현의 말을 끊었다.그때 나씨 가문 내부는 부글부글 끓었었다. 게다가 량천옥을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다.나태현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갔고 나태현의 어머니도 그 시기에 돌아갔다.그 모든 모순의 시작은 량천옥이었다.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씨 가문은 여전히 량천옥과 원한이 있었다.다들 그저 그 원함을 꾹 참고 있었는데 고은지가 나타났다.량천옥의 딸이면서 나태현의 딸 엄마인 고은지 때문에 나씨 가문과 량천옥의 전쟁이 다시금 시작되었다.“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요.”우정과 사랑 중에서 배준우는 당연히 사랑이었다.게다가 이번 일에는 나씨 가문에서 숨기는 것이 너무 많았다.또 나태현이 회사의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보니 프로젝트가 위험했다.나태현은 화가 나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 소리를 들은 배준우는 핸드폰을 소파에 툭 던졌다....다른 한편.고은영과 진윤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진윤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나씨 가문과 엮인 프로젝트를 모두 엎어버리라고 명령했다.옆에 있는 고은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걱정했다. 진윤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고은영이 진윤의 손을 잡았다.“오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나씨 가문이 밉긴 하지만 진윤의 일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진윤이 계약을 많이 해지할수록 진윤에게 영향이 더 클 테니까 말이다.진윤은 본인을 걱정해주는 고은영을 보면서 마음이 누그러졌다.부드러운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진윤이 얘기했다.“다 필요 없는 것들이야. 나태현은 지금 당장 귀국해야 해.”그 말을 들은 고은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머릿속에는 병원에 있는 고은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은지는 나태현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눈치채고 얘기했다.“지금 나태현과 량천옥이 해외에서 서로 죽이고 난리가 났어. 만
화가 난 나태범을 보면서 집사는 안절부절못했다.“지금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생각하던 집사가 말을 이었다.“게다가 진씨 가문 쪽도 걱정해야 합니다.”“진씨 가문? 거기는 왜.”나태현과 량천옥이 싸우는 것만으로도 나태범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이러다가는 정말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게다가 배씨 가문에서 계약까지 해지했지...이러다가는 그룹이 파산될지도 몰랐다.“배준우 씨 아내가 진윤 씨와 진정훈 씨의 친여동생입니다. 그러니 이 세 사람 다 그 고은지 씨의 동생을 위해 움직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나태범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저 진씨 가문에서 친딸을 찾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성택이 친딸보다 양딸을 더욱 아낀다는 것까지 말이다.배준우가 고은영과 결혼할 때 강성의 사람들은 배준우가 많이 아깝다고 생각했다.일반적인 신분으로는 배준우의 옆에 설 수 없으니까 말이다.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은영이 진짜 진씨 가문의 친딸이었다.나태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이튿날 아침.고은영이 아침을 다 먹자마자 진윤이 도착했다.그리고 조카를 위한 선물도 가득 가져왔다.고용인들이 진윤이 가져온 물건을 보관해주었다.약간 붉어진 고은영의 눈가를 보면서, 진윤이 배준우한테 물었다.“어젯밤 계속 운 거예요?”배준우도 머리가 약간 아팠다.“제대로 자지 못했어요.”진윤이 다가가서 고은영을 마주 보더니 고은영이 입고 있는 귀여운 잠옷으로 눈을 돌렸다.배준우는 정말 딸을 키우는 것처럼 고은영을 보호해주는 것만 같았다.고은영은 원래도 키가 작은 편이어서 배준우와 함께 있을 때면 아주 작아보였다.“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 하자.”“정말 나가야 해요?”고은영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고은영은 병원에 가서 고은지를 보고 싶었다.고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진작 알아차렸다는 듯이 얘기했다.“병원 쪽에는 내가 사람들을 깔아놨어. 무슨 일 없을 거야. 가자.”진윤의 말을 들은
하지만 진윤이 내일 고은영을 데리고 나가는 것의 목적을 떠올리면 고은영은 어쩔 수 없었다.“당연한 거 아닌가요?”진윤이 당당하게 얘기한 후 전화를 끊었다.배준우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더니 고은영을 쳐다보았다.“이미 다 들었지?”“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진성택은 사망했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장례식에 올 것인지 안 올 것인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하지만 진윤은 장례식에 가지 말고 나가서 쇼핑하자고 했다.그것도 웃으면서 말이다.“넌 어떻게 하고 싶어?”“안 가도 돼요?”고은영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웃으면서 쇼핑해야 한다니. 고은영에게 있어서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배준우도 짐작하고 있었다.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배준우가 얘기했다.“아마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쇼핑이 최종 목적이 아닐 거야.”“위로하는 거예요?”진윤은 배준우더러 고은영을 잘 위로해주라고 했다.“위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네 큰형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하는 말이야. 단순하게 쇼핑하는 게 목적일 리 없어.”배준우가 확신하면서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배준우는 허락하는 고은영을 보면서 한숨을 돌렸다.그리고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다 지나갈 거야.”“나씨 가문 쪽은...”거기까지 말한 고은영은 고개를 들고 배준우를 쳐다보았다.고희주의 일로 마음 아팠지만 배준우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배준우는 고은영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고은영에게 짧게 키스한 배준우가 이어서 얘기했다.“나씨 가문과 협업하는 프로젝트 두 개가 있었는데 이미 계약을 해지했어.”“주주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고은영이 걱정하면서 물었다.“그 두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서 다들 발을 빼는 분위기야. 아마도 량천옥 씨가 한 일 같은데.”그래서 배준우도 큰 문제 없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지나간 일에 대해 배준우는 뭐라고 할 수 없
진정훈이 전화를 건 것은 진정훈에게도 계획이 있어서였다.“진유경을 조심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진유경에게 남긴 주식이 있는데 꼭 되찾아올 겁니다.”진유경이라...진정훈은 진유경이 왜 계속 고은영을 끌어내리려는지 깨달았다.그건 바로 진유경이 아직 자기 위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니 이제라도 제대로 알게 해줘야 했다.배준우는 진정훈의 말을 알아듣고 얘기했다.“네. 알겠습니다.”“장례식은 와도 되고 안 와도 괜찮다고 전해줘요.”“네.”진정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은영의 뜻을 존중해주었다.하지만 장례식에 고은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 뻔했다.“장례식은 언제입니까.”“이틀 뒤입니다.”“알겠습니다.”이틀 뒤라니. 생각보다 장례를 서두르는 모습에 배준우는 약간 의아했다.진정훈은 그저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그래서 그동안 배준우가 고은영을 잘 지켜줄 수 있도록 전화를 건 것이다....진정훈과의 통화를 마치고 배준우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데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이번에는 진정훈이 아닌 진윤이 걸어온 전화였다.배준우는 고은영을 안고 소파에 앉았다. 영원히 고은영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처럼 고은영을 꼭 안고 있었다.“여보세요.”배준우는 진윤을 존경하는 편이었다.진윤은 정말 가문의 도움 없이 지금 그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다.“은영이는요? 연락이 안 돼서.”“기분이 안 좋아요. 무슨 일이죠?”“왜 기분이 안 좋은 거죠?”“고은지 씨한테 일이 좀 생겨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요.”고은지의 상황을 전해 들은 진윤은 머리가 아팠다.지금 고은영에게는 모든 일이 설상가상이었다.“내일 오전 아홉 시에 내가 데리러 간다고 전해줘요.”“내일이요?”“네.”진윤이 대답했다.배준우는 진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진윤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씨 가문이 얼마나 엉망인지 광고할 셈이었다.진윤이 진성택의 장례식에도 나서지 않고 친여동생인 고은영을 데리고 밖에서 돌아다닌다면...“어디로 갈 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