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았어?”“네! 지금 비산 온천에 있습니다.”“...”비산 온천이라니.나태웅은 대략 10분 전에 알아봐 달라고 전화를 했었다.하지만 생각보다 결과가 빨리 나왔다.진이훈의 효율이 낮아진 것일까?“방해하는 세력은 없었어?”나태웅이 차갑게 물었다.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멈칫하더니 의아해하면서 대답했다.“없었습니다. 아주 순조로웠습니다.”순조로웠다라...‘그래...’나태웅은 그제야 알아차리고 차갑게 웃었다.‘진이훈, 대가리가 많이 컸네.’전화를 끊은 나태웅은 바로 운전해서 비산 방향으로 향해 갔다.하지만 시동을 걸자마자 전화기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지금은 시내로 돌아오는 길입니다.”“거기서 묵는 게 아니고?”“네.”돌아오는 정보까지 손쉽게 입수하다니. 진이훈이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 게 맞았다.안지영과 장선명이 밖에서 밤을 보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들은 나태웅은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그래, 알았어.”전화를 끊었다. 나태웅의 마음은 아까보다 훨씬 가벼워진 것 같았다.하지만 진이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진이훈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대표님.”“너는 내일 처리하지.”말을 마친 후 진이훈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너머의 진이훈은 나태웅의 말투를 듣고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설마 다 알게 된 걸까?’그 말인즉슨, 진이훈 외에 다른 사람에게 조사를 맡겼다는 것이다.왜 안지영의 행적에 대해 이토록 집착하는 것인지, 진이훈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진이훈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면, 나태웅은 바로 두 사람이 어디에 간 것인지 몰라서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나태웅은 안지영을 새벽 열두 시까지 기다렸다.장선명과 안지영이 같은 차에서 내리는 걸 본 나태웅의 눈빛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안지영은 오늘 하루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하지만 장선명과 함께 비산에 가서 온천욕을 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이렇게 떠나왔으니 육범수 씨가 기분 상했겠어요.”안지영이 말
장선명은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봤지만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처음이었다.나태웅처럼 뻔뻔한 사람은 전혀 만나본 적이 없었다.“제가 처리할게요.”안지영이 장선명의 팔을 두드리면서 위로했다.오렌지빛 불빛 아래서, 안지영은 마치 가장 위험한 맹수를 길들인 부드러운 여자애처럼 보였다.나태웅은 그 모습을 보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나태웅은 저도 모르게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다.장선명은 안지영의 다독임에 감정을 추스르고 안지영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10분 줄게.”“그래요.”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장선명은 맹수처럼 나태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나태웅은 그 눈빛에 물러서지 않았다.장선명은 코웃음을 쳤다.“흥, 버러지 같은 녀석.”“...”“...”장선명이 버러지 같은 녀석으로 나태웅을 표현한다면, 안지영은 10점 만점에 12점을 주고 싶을 정도였다.“먼저 들어가요.”안지영이 부드럽게 얘기했다.그 태도는 나태웅을 대할 때와 180도로 달랐다.장선명이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서 기다릴게. 침대에서.”“당장 들어가요!”장선명은 여유롭게 얘기했다. 안지영은 그런 장선명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나태웅은 찌르면 터지는 복어 같았다. 하지만 장선명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나태웅은 적지 않게 화가 나 있을 것이다.나태웅이 뭐라고 하기 전에, 장선명은 이미 안으로 들어갔다.어느새 안지영과 나태웅만 남았다. 나태웅은 안지영의 눈에서 깊은 증오심을 읽어냈다.“두 사람, 잤어?”나태웅은 이를 꽉 깨물고 물었다.안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나태웅이 덧붙였다.“너 지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야?”안지영은 고개를 돌려 나태웅을 쳐다보았다.장선명을 대하던 부드러운 태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안지영은 나태웅에게로 다가가더니 나태웅의 뺨을 후려쳤다.온 힘을 다해서, 손바닥이 얼얼해질 정도로 말이다.나태웅의 얼굴은 한쪽으로 꺾여졌다.그 순간 세상이 고요해지는 것만 같았다.안지영이 분에 겨워 입을 열었다.“나태웅, 당신은 쓰레
“...”미안하다고?뭐 하는 거지? 지금 사과하는 건가?나태웅이 자기 잘못을 사과하는 사람이었나?안지영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안지영이 아는 나태웅은 자기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런 미치광이였다.“미안하다고요?”안지영은 그 단어를 곱씹으면서 웃었다.왜 사과하는 거지?‘미안해’라는 세 글자로 전에 했던 모든 일을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두 사람 사이의 일들은 구두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가볍고 간단한 ‘미안해’라는 세 글자로 덮을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안지영은 나태웅이 드디어 자기 잘못을 깨닫고 사과하는 줄로 알았다.하지만 역시나 기대가 컸다.나태웅이 얘기했다.“오늘 그 꽃은 오해야. 처음에 국화를 보낸 건 내가 아니야.”“...”안지영은 지금 ‘국화’라는 단어도 듣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나태웅은 계속해서 이어갔다.“내 아버지가 보낸 거야.”“...”안지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사과를 하는 이유가 국화 때문이라고? 그 국화도 본인이 보낸 게 아니라 나태범이 보낸 거라고?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안지영은 애써 복잡한 감정을 추스르려고 했다.“아버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꽃집에서 실수했을 뿐이야.”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나태웅은 본인의 잘못은 인정하고 사과하려고 했다.“...”하지만 안지영은 나태웅의 말을 들으면서 귀를 닫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이렇게 와서 해명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수치와 모욕을 안겨준 다음 해명할 정도로?“왜 중요하지 않겠어? 네가 천락 그룹을 장례식장으로 만들었는데.”그러니 나태웅이 생각했을 때 이 오해는 아주 큰 오해라는 것이다.안지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약간 놀랐다.나태웅의 성격이 개차반인 것은 알고 있었고 또한 국화를 보내는 일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하지만 안지영은 이 사건의 자초지종이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하하...
안지영이 들어갔을 때 장선명은 이미 샤워를 끝낸 후였다.짙은 푸른색 잠옷을 입고 있는 장선명에게서는 우아함과 귀티가 흘러넘쳤다.그리고 느슨한 옷깃 사이로는...안지영이 나태웅 때문에 화가 나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눈앞의 미인계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어느새 장선명이 안지영의 앞으로 다가와 안지영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뭘 봐?”안지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얼굴은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그렇게 화가 났으면서도 미인계에 홀랑 넘어간 거야?’안지영은 그런 본인에게 화가 났다.장선명은 부끄러원하는 안지영을 보면서 웃었다.“마음대로 봐. 어차피 네 것이니까.”“그만해요!”“부끄러워?”장선명은 여전히 여유로웠다.장선명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안지영을 지켜보는 게 재밌었다.하늘 그룹의 일인자가, 집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인다니.장선명은 여태껏 많은 여자들을 만나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장선명의 마음을 움직이는 여자는 오직 안지영뿐이었다.안지영은 다른 여자들과는 달랐다. 다른 여자들은 다 목적을 감추면서 장선명에게 접근했지만 안지영은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었다.안지영은 장선명의 도움이 필요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안지영에게 장선명이 필요해서 시작된 관계다.안지영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장선명의 품에 안겨있었다.몸이 맞닿은 부분에서 전기가 통하듯 찌릿찌릿했다.“선, 선명 씨...”안지영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했다.“지영아, 그 사람한테 마음 약해질 거야?”장선명은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안지영이 나태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안지영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아니요!”장선명의 질문에 안지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나태웅에게 마음 약해지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안지영은 머리가 뛰어나게 총명한 것은 아니지만 유일한 장점은 이성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선을 지켜야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안지영은 장선명의 약혼녀다.그리고 나태웅이 왜 자꾸만
고은지는 나태현을 쳐다보면서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나태현은 고개를 들어 고은지와 눈을 마주했다. 그 순간 나태현의 마음속에는 불쾌한 감정이 치솟았다.나태현은 손을 뻗어 미녀의 가는 허리를 감싸며 고은지에게 말했다.“나가서 기다려.”“네.”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돌아섰다.그런 고은지의 뒷모습은 곧고 당당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은지는 매우 침착했다.왜 이렇게 차가운 걸까? 정말 신경 쓰이지 않는 건가? 고은지는 바로 바에서 나와 차에 올랐다.핸드폰이 가방 속에서 진동했다. 화면에는 낯선 번호가 나타났다. 고은지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은지야, 나야.”전화 너머로 량천옥의 목소리가 들렸다.량천옥은 결국 참을 수 없었다.원래는 고은영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고은지가 이미 알게 된 이상 더는 숨기지 않기로 했다.량천옥의 목소리를 들은 고은지의 눈빛은 예리하게 변했다.량천옥은 고은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한번 만나자.”“무슨 얘기를 하려고요?“ 고은지가 냉담하게 물었다.량천옥은 잠시 머뭇거리다 답답한 가슴을 이기지 못하고 말했다.“직접 만나서 해야 할 말이 있어.”량천옥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그래서 몇 번이고 생각을 되새기다 결국 고은지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량천옥은 고은지가 본인을 대하는 것처럼 차갑게 고은지를 대할 수 없었다. 고은지를 보고 싶었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고 싶었다.고은지에게 량천옥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다. 그때 만약 알았다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량천옥은 고은지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여전히 고은지를 아주 사랑한다고, 일부러 고은지를 버린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여태껏 미친 여자처럼 계속해서 고은지를 찾아 헤맸다고 말이다.하지만 아이와 어머니의 인연이라는 것은 아주 가까운 것처럼 보이지만, 한 번 잃으면 다시 찾기 어려운 법이었다.고은
고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량천옥의 전화를 끊어버렸다. 고은영의 입으로 들을 때와 량천옥의 입으로 듣는 건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고은영은 고은지의 말에 일일이 반응해 주었다.하지만 량천옥의 말을 들으며 고은지는 인내심을 잃고 전화를 끊어버리고 말았다.량천옥은 가슴이 아팠다. 전에 봤을 때 고은지는 고은영보다 더욱 온화하고 부드러운 아이였다.그런데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차라리 량천옥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면 무시하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다.깊은 밤, 량천옥은 고통에 몸부림쳤다.퇴원한 량일은 일어나서 물을 마시러 가다가 량천옥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다가왔다.전등을 켜니 량천옥이 새하얗게 질려서 고통스럽게 침대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천옥아.”량일이 걱정스레 다가갔다.량천옥은 온몸이 다 아픈 것만 같았다.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픈 것인지도 잘 몰랐다. 하지만 그런 량천옥을 본 량일은 마음이 조급해졌다.“엄마한테 말해. 어디가 아픈지. 병원에 가자.”“이거 놔요! 저리 가요!”“너...”“가라고요! 보고 싶지 않으니까.”량천옥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소리쳤다.량천옥의 세상은 암흑으로 물들었다. 이런 절망은 처음이었다.량천옥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천옥아!”“당신이 미워요! 밉다고요!”량천옥은 완전히 미쳐버렸다.“...”가슴이 찢어질 듯 외치는 량천옥을 보면서 량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옆에 서 있었다.량천옥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본인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마치 이렇게 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것처럼 말이다.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량천옥은 본인이 고통을 못 느낀다고 생각했다.량일은 그런 량천옥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바로 량천옥의 손목을 잡아서 얘기했다.“너를 다치게 하는 일은 그만 해.”“당신이 미워요. 정말 미워요. 왜 나한테 그런 거예요! 그 애는 내 딸인데!”“...”“그 어린아이를 보면서 마음 약해진 적이 한 번도 없어요?”“...”량천옥은
량천옥이 외쳤다.량천옥은 원래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있었다.“왜 상류층에 들어야만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그동안 배씨 가문에서 잘 살아온 거 같아요?”“...”배씨 가문을 언급하자 량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량일은 량천옥을 배항준에게 보낼 때 량천옥의 남은 생은 편안하게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량일은 이 남자가 바람둥이라는 것을 후에야 깨달았다.아침 드라마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 량천옥에게 일어났다.결국 량일의 판단은 틀린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와서 그 잘못들을 인정해 봐야 변하는 것은 없었다.량일은 가슴이 아팠다.“다 내 잘못이야. 내가 찾아가서 해명할게.”량일이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해명을 떠올린 량천옥은 고은지의 차가운 태도가 떠올랐다.두 사람 사이는 해명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닌 것만 같았다....밤은 길고 고요했다.고은지는 차에 앉아서 나태웅과 나태현이 같이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나태현의 옆에 붙어있던 여자는 나태현 뒤를 따르면서 부끄러운 표정을 보였다.다들 성인이니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차 문이 열리고 나태현은 술에 취한 나태웅을 조수석에 앉혔다.그리고 나태현과 여자는 뒷좌석에 앉았다.“일단 나태웅을 나씨 가문으로 데리고 가.”“네.”고은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시동을 걸었다.나태웅을 나씨 가문에 데려다주고 나태현을 어디에 데려다줄지는 뻔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고은지의 운전 실력은 그리 좋지 못했다.조영수와 결혼하기 전에 면허를 땄지만 그동안 운전할 일이 없었기에 거의 장롱면허였다.그래서 고은지는 아주 느릿느릿하게 운전하고 있었다.바에서 나씨 가문까지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나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은 잠에 들었다. 문 앞 경비가 나태웅을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갔다.나태현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나태웅을 보낸 후 고은지가 물었다.“나 대표님
아까 운전할 때는 느릿느릿하기만 하더니, 지금은 쏜살같이 나태현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나태현은 이유 모를 화를 꾸욱 누르면서 일단 여자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안에서 문을 연 것은 다른 남자였다. 바로 해외에서 금방 돌아온 모정환이었다.여자는 모정환을 보는 순간 표정이 굳어버렸다.“고마워.”여자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모정환은 여자를 방으로 끌어당겼다.“앞으로 나한테 이런 일 시키지 마.”말을 마친 나태현은 여자를 힐긋 쳐다보았다. 모정환은 여자의 가느다란 허리를 한 손에 안고 말했다.“어쩔 수 없어. 고집이 얼마나 센 건지. 날 만나지 않으려고 하잖아.”나태현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할 일을 마친 후 자리를 떠났다.“공산의 프로젝트, 나한테 넘기는 거 잊지 마.”“알겠어.”나태현은 그렇게 당부한 후 자리를 떴다. 뒤에서는 여자와 모정환이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태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유유히 사라졌다.엘리베이터를 탄 나태현은 고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성격이 그 지경이 된 거지?’고은지는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이윽고 담담한 목소리로 질문했다.“콘돔이 필요하신 건가요?”“...”나태현은 짜증이 확 솟구쳤다.‘빌머억을...’짜증이 난 나머지 머리까지 아팠다. 대답하기도 귀찮은 나태현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너머의 고은지는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끊겨버린 전화를 보면서 고은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버렸다....그날 밤, 강성에는 많은 일이 지나갔다.이튿날 고은영은 량천옥의 전화에 깨어났다. 급하게 전화를 받은 고은영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은영아, 나 좀 도와줘.”전화기 너머의 량천옥은 많이 피곤해 보이는 목소리로 얘기했다.아마도 밤새 운 것만 같았다.고은영은 겨우 눈을 뜨고 물었다.“뭘 하려고요?”“은지를 만날 거야.”“...”그 말에 고은영은 정신이 확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보니 배준
전화를 끊은 진윤이 고은영을 보면서 물었다.“지금은 좀 속이 풀렸어?”“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이렇게 한 거예요?”“응.”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영은 약간 감동하긴 했지만 이루어 말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예전 같았으면 고은영의 곁에 무조건적인 자기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일이었다면 도움을 거절할 것이었지만 이번 일에서는 물러설 수 없었다.“지금 해외에서 난리가 났어. 이 시점에 나태현의 집중력을 흩트리는 것도 좋지.”량천옥도 나쁜 사람이긴 하지만 량천옥이 나태현과 싸우고 있는 건 고은지 때문이었다.그러니 지금 진윤이나 배준우가 나태현의 시선을 자꾸만 국내로 돌리게 해서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건 량천옥에게 좋은 일이다.“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진윤이 고은영에게 얘기해 주었다.고은영은 진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나태현은 해외에 있고, 나태웅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그렇다면 이제는 나태범이 움직일 것이다. 나태범 세대가 싸운다면 젊은 세대들은 감히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고은영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나씨 가문보다 더욱 위태로운 건 우리 언니니까요.”희주가 죽었다.그걸 떠올리면 고은영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고은지는 지금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나씨 가문 사람들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갈라내고 싶었다.진윤은 고은영 눈에 비친 슬픔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아직 희주가 정말 죽었는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않았잖아. 그러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눈으로 본 것도 거짓일 수 있는데, 귀로 들은 것은 오죽하겠냐는 말이었다.진윤은 제삼자로서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을 딱 짚어 말할 수 없었기에 말을 아끼고 있었다.“그 소식이 가짜였으면 좋겠어요.”고은영은 고희주를 불쌍하게 여겼다. 조씨 가문 사람들은 희주가 조영수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
‘아까 왜 돈이 없다는 얘기를 해서는...’진윤은 고은영의 손을 잡고 쇼핑을 계속했다.점심쯤이 되자 진윤은 지친 고은영을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가서 식사했다.테이블 앞에 놓인 갖가지 음식을 보면서 고은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두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많지 않아요?”“안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진윤이 대답했다.진윤은 진정훈이 왜 그때 그렇게 심하게 날뛰었는지 이해가 갔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 가장 먼저 조사한 사람이다.그래서 고은영의 아픔을 알고 그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 온 세상의 좋은 것들을 고은영에게 주려고 한 것이다.그러니 고은영의 몫이 진유경에게로 넘어간 걸 알고 미쳐버린 것이다.지금의 진윤도 마찬가지였다.“이거 먹어.”진윤은 양고기 스테이크를 썰어서 고은영의 그릇에 담아주었다.“고마워요, 오빠도 얼른 먹어요.”“우리 집에 자주 놀러와. 우리 아내가 또 요리를 잘하거든.”“그런데 지금 임신한 거 아니에요? 저까지 가면 민폐죠.”“그래도 요즘 매일 요리하고 있어.”“네?”고은영이 깜짝 놀랐다.“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은영은 임신했을 때 만사가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말린다고 말려지는 사람이 아니잖아. 원하는 건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하긴.게다가 임산부는 입맛이 까다로워서 다른 사람이 한 것을 잘 먹지 못할 때가 많았다.윤설이 본인이 먹고 싶은 걸 직접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쁜 건 아니었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그럼 최대한 덜 힘들게 옆에서 보살펴줘요.”진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그건 나태현이 건 전화였다.“나태현이야.”“계약 해지 때문에 전화한 거겠죠?”고은영이 물었다.아까 차에서 진윤은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나씨 가문과 연관된 프로젝트를 모두 취소하기로 했다. 배준우도 마찬가지였다.그러니 나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진윤이 고개를 끄덕인 후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형, 지금
진호영이 사람들 앞에서 진유경, 김영희와 싸울 줄은 전혀 몰랐다.진유경과 김영희는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기에 속수무책으로 말려들고 있었다.그 시각.진윤은 고은영을 데리고 쇼핑하러 다니고 있었다.김영희와 진유경은 진정훈과 진윤이 장례식 준비도 돕지 않고 서로 재산을 빼앗느라 바쁘다고 했지만 사실 진윤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중이었다.진성택이 진유경에게 남겨준 물건은 많지 않았다. 차라리 진윤이 지금 고은영에게 쓰는 돈이 더욱 많을 것이다.“오빠, 너무 많이 산 거 아니에요?”명품을 너무 많이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기다란 영수증 위의 숫자를 본 고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배준우와 결혼한 후 돈이 모자랐던 적은 없지만 돈을 이렇게 많이 쓴 적도 거의 없었다.진윤은 경호원을 데리고 왔다. 네 명의 경호원 손에는 쇼핑백이 가득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일부는 란완 리조트로 배송시켰다.“괜찮아. 많이 사. 우리 아내 것도 골라줘야지.”진윤이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오빠는 정말 좋은 남자 같아요.”자세히 생각해보니 배준우는 직접 무언가를 사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대부분은 다 다른 사람을 시켜서 란완 리조트로 가져오게 했던 것 같다.그리고 고은영은 쇼핑을 좋아하는 편이니 직접 사는 편이 많았다.하지만 진윤은 쇼핑하면서도 자기 아내를 생각한다.진윤이 웃으면서 얘기했다.“배준우도 좋은 남자야. 그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거야.”“그 사람이 전에 얼마나 나빴는지 몰라서 그래요.”진윤이 배준우를 좋은 남자라고 얘기하자 고은영이 입을 비죽거리면서 대답했다.배준우와 결혼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좋은 남자라는 말이 쏙 들어갈 정도였다.그때의 배준우는 정말... 악랄한...고은영은 그때 유산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러다 고은영은 또 나태웅을 떠올렸다.나태웅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나태웅과 배준우가 같이 고은영을 위협했으니까 말이다.고은영은 나태웅이 안지영을
결국 진호영이 다가가서 말했다.“할머니, 지금 이 장소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진윤과 진정훈이 오늘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두 사람이 오지 않은 이유도 명백했다.진성택이 두 사람을 너무 크게 실망시켰기 때문이다.진유경은 진호영이 진윤과 진정훈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면서 더욱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호영 오빠, 진윤 오빠랑 정훈 오빠한테 연락해주면 안 돼요? 적어도 아버지 보내드리는 길은 보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은영이도요... 아버지는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잖아요.”“그만 떠들어.”진유경이 말을 마치자마자 진호영이 싸늘하게 얘기했다.다른 건 몰라도 이 상황에서 고은영의 얘기를 꺼내다니.진호영은 진유경에게서 이례 없는 메스꺼움을 느꼈다.진유경은 진호영의 반응에 멍해졌다.하지만 사람들의 화제는 이미 고은영으로 넘어가 버렸다.다들 고은영을 불효녀라고, 은혜도 모르는 매정한 여자라고 욕했다.진호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진유경을 노려보며 얘기했다.“너 때문에 은영이는 집에 돌아오지도 못했어.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다고? 도대체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거야? 네 눈은 장식이야?”예뻐한 적이 있었나?한 번도 없었다.진성택이 고은영에게 조금이라도 잘해줬다면 고은영이 진씨 가문 문턱을 넘어보지 못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 그게 아니라...”“아버지는 남은 주식을 모두 너한테 남겨줬어. 하지만 친딸인 은영이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 그런데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하셨다고?”진호영이 모든 것을 까밝히자 진유경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호영 오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진유경은 더욱 크게 울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다.진유경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진호영은 진유경의 편이었는데 지금은 왜...‘이게 다 고은영 때문이야! 대체 무슨 수로 꼬드겼기에 오빠들이 다 고은영의 편을 들어주는 거냐고!’“왜 이러냐고? 우리 어머니가 은영이에게 남겨준
이윽고 고은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진호영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고은영이 진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진호영과 고은영은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진호영은 보통 직접 찾아와서 문제를 얘기하는 편이기에 전화를 잘 걸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진호영이 전화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고은영은 잘 알고 있었다.진윤에게 전화하자마자 또 고은영에게 전화하다니.고은영이 전화를 받기도 전에 진윤이 고은영의 전화를 빼앗아갔다.“오빠...”진윤은 바로 전화를 꺼버렸다.“꺼버리면 어떡해요. 혹시 언니가 전화라도 하면...”“걱정하지 마. 네 언니는 너한테 연락하지 않을 거야.”“...”그렇다고 해도 마음대로 핸드폰을 꺼버리는 건 좀...게다가 고은지가 정말 무슨 일이 생겨서 고은영을 찾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진윤은 자연스럽게 고은영의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돌려주지 않았다.“오빠.”“오늘은 나한테 집중해.”그 말투는 아주 강압적이었다.“...”마치 그동안 진윤에게 신경 써주지 않아 삐진 것만 같았다.하지만 고은영도 어쩔 수 없었다.고희주와 고은지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말이다.사실 고은영도 알고 있었다. 고은지는 고은영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고희주의 일 때문에 고은지는 언제든지 화를 낼 수 있었다.“그래요.”“...”“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너한테 뭘 좀 사주려고.”“...”사준다고?고은영은 진윤의 목적을 알 수 없었다.진성택이 죽었다.장례식에 안 가는 건 이해가 되지만 굳이 고은영을 데리고 나와 쇼핑을 하는 목적은 뭘까.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그때 윤설의 전화가 걸려왔다.진윤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정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그런 진윤을 보면서 고은영은 진윤이 참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진윤과 비교하면 나태현은 정신병이 틀림없었다....진성택은 오늘 화장하게 된다.김영희, 진유경과 진호영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진윤과 진정훈은 결국
숨을 깊게 내쉰 나태현이 얘기했다.“량천옥이 나씨 가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 지금...”“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배준우가 나태현의 말을 끊었다.그때 나씨 가문 내부는 부글부글 끓었었다. 게다가 량천옥을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다.나태현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갔고 나태현의 어머니도 그 시기에 돌아갔다.그 모든 모순의 시작은 량천옥이었다.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씨 가문은 여전히 량천옥과 원한이 있었다.다들 그저 그 원함을 꾹 참고 있었는데 고은지가 나타났다.량천옥의 딸이면서 나태현의 딸 엄마인 고은지 때문에 나씨 가문과 량천옥의 전쟁이 다시금 시작되었다.“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요.”우정과 사랑 중에서 배준우는 당연히 사랑이었다.게다가 이번 일에는 나씨 가문에서 숨기는 것이 너무 많았다.또 나태현이 회사의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보니 프로젝트가 위험했다.나태현은 화가 나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 소리를 들은 배준우는 핸드폰을 소파에 툭 던졌다....다른 한편.고은영과 진윤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진윤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나씨 가문과 엮인 프로젝트를 모두 엎어버리라고 명령했다.옆에 있는 고은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걱정했다. 진윤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고은영이 진윤의 손을 잡았다.“오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나씨 가문이 밉긴 하지만 진윤의 일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진윤이 계약을 많이 해지할수록 진윤에게 영향이 더 클 테니까 말이다.진윤은 본인을 걱정해주는 고은영을 보면서 마음이 누그러졌다.부드러운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진윤이 얘기했다.“다 필요 없는 것들이야. 나태현은 지금 당장 귀국해야 해.”그 말을 들은 고은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머릿속에는 병원에 있는 고은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은지는 나태현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눈치채고 얘기했다.“지금 나태현과 량천옥이 해외에서 서로 죽이고 난리가 났어. 만
화가 난 나태범을 보면서 집사는 안절부절못했다.“지금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생각하던 집사가 말을 이었다.“게다가 진씨 가문 쪽도 걱정해야 합니다.”“진씨 가문? 거기는 왜.”나태현과 량천옥이 싸우는 것만으로도 나태범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이러다가는 정말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게다가 배씨 가문에서 계약까지 해지했지...이러다가는 그룹이 파산될지도 몰랐다.“배준우 씨 아내가 진윤 씨와 진정훈 씨의 친여동생입니다. 그러니 이 세 사람 다 그 고은지 씨의 동생을 위해 움직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나태범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저 진씨 가문에서 친딸을 찾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성택이 친딸보다 양딸을 더욱 아낀다는 것까지 말이다.배준우가 고은영과 결혼할 때 강성의 사람들은 배준우가 많이 아깝다고 생각했다.일반적인 신분으로는 배준우의 옆에 설 수 없으니까 말이다.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은영이 진짜 진씨 가문의 친딸이었다.나태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이튿날 아침.고은영이 아침을 다 먹자마자 진윤이 도착했다.그리고 조카를 위한 선물도 가득 가져왔다.고용인들이 진윤이 가져온 물건을 보관해주었다.약간 붉어진 고은영의 눈가를 보면서, 진윤이 배준우한테 물었다.“어젯밤 계속 운 거예요?”배준우도 머리가 약간 아팠다.“제대로 자지 못했어요.”진윤이 다가가서 고은영을 마주 보더니 고은영이 입고 있는 귀여운 잠옷으로 눈을 돌렸다.배준우는 정말 딸을 키우는 것처럼 고은영을 보호해주는 것만 같았다.고은영은 원래도 키가 작은 편이어서 배준우와 함께 있을 때면 아주 작아보였다.“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 하자.”“정말 나가야 해요?”고은영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고은영은 병원에 가서 고은지를 보고 싶었다.고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진작 알아차렸다는 듯이 얘기했다.“병원 쪽에는 내가 사람들을 깔아놨어. 무슨 일 없을 거야. 가자.”진윤의 말을 들은
하지만 진윤이 내일 고은영을 데리고 나가는 것의 목적을 떠올리면 고은영은 어쩔 수 없었다.“당연한 거 아닌가요?”진윤이 당당하게 얘기한 후 전화를 끊었다.배준우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더니 고은영을 쳐다보았다.“이미 다 들었지?”“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진성택은 사망했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장례식에 올 것인지 안 올 것인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하지만 진윤은 장례식에 가지 말고 나가서 쇼핑하자고 했다.그것도 웃으면서 말이다.“넌 어떻게 하고 싶어?”“안 가도 돼요?”고은영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웃으면서 쇼핑해야 한다니. 고은영에게 있어서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배준우도 짐작하고 있었다.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배준우가 얘기했다.“아마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쇼핑이 최종 목적이 아닐 거야.”“위로하는 거예요?”진윤은 배준우더러 고은영을 잘 위로해주라고 했다.“위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네 큰형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하는 말이야. 단순하게 쇼핑하는 게 목적일 리 없어.”배준우가 확신하면서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배준우는 허락하는 고은영을 보면서 한숨을 돌렸다.그리고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다 지나갈 거야.”“나씨 가문 쪽은...”거기까지 말한 고은영은 고개를 들고 배준우를 쳐다보았다.고희주의 일로 마음 아팠지만 배준우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배준우는 고은영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고은영에게 짧게 키스한 배준우가 이어서 얘기했다.“나씨 가문과 협업하는 프로젝트 두 개가 있었는데 이미 계약을 해지했어.”“주주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고은영이 걱정하면서 물었다.“그 두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서 다들 발을 빼는 분위기야. 아마도 량천옥 씨가 한 일 같은데.”그래서 배준우도 큰 문제 없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지나간 일에 대해 배준우는 뭐라고 할 수 없
진정훈이 전화를 건 것은 진정훈에게도 계획이 있어서였다.“진유경을 조심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진유경에게 남긴 주식이 있는데 꼭 되찾아올 겁니다.”진유경이라...진정훈은 진유경이 왜 계속 고은영을 끌어내리려는지 깨달았다.그건 바로 진유경이 아직 자기 위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니 이제라도 제대로 알게 해줘야 했다.배준우는 진정훈의 말을 알아듣고 얘기했다.“네. 알겠습니다.”“장례식은 와도 되고 안 와도 괜찮다고 전해줘요.”“네.”진정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은영의 뜻을 존중해주었다.하지만 장례식에 고은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 뻔했다.“장례식은 언제입니까.”“이틀 뒤입니다.”“알겠습니다.”이틀 뒤라니. 생각보다 장례를 서두르는 모습에 배준우는 약간 의아했다.진정훈은 그저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그래서 그동안 배준우가 고은영을 잘 지켜줄 수 있도록 전화를 건 것이다....진정훈과의 통화를 마치고 배준우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데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이번에는 진정훈이 아닌 진윤이 걸어온 전화였다.배준우는 고은영을 안고 소파에 앉았다. 영원히 고은영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처럼 고은영을 꼭 안고 있었다.“여보세요.”배준우는 진윤을 존경하는 편이었다.진윤은 정말 가문의 도움 없이 지금 그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다.“은영이는요? 연락이 안 돼서.”“기분이 안 좋아요. 무슨 일이죠?”“왜 기분이 안 좋은 거죠?”“고은지 씨한테 일이 좀 생겨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요.”고은지의 상황을 전해 들은 진윤은 머리가 아팠다.지금 고은영에게는 모든 일이 설상가상이었다.“내일 오전 아홉 시에 내가 데리러 간다고 전해줘요.”“내일이요?”“네.”진윤이 대답했다.배준우는 진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진윤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씨 가문이 얼마나 엉망인지 광고할 셈이었다.진윤이 진성택의 장례식에도 나서지 않고 친여동생인 고은영을 데리고 밖에서 돌아다닌다면...“어디로 갈 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