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고은지는 오랜만에 푹 잤다.이튿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나태현의 모습은 없었고 고은영이 찾아왔다.‘어젯밤 그거 꿈이었나? 그래. 꿈이겠지. 나 대표님처럼 귀한 분이 여기 왜 오겠어? 게다가 물까지 먹여줬다는 게 말이 돼?’생각만 해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은영이 말했다.“아침에 주방에 부탁해서 만든 죽이야. 조금이라도 먹어. 응?”골수에 관한 일은 나태현이 해결하고 있기에 고은영은 고은지를 보살피는 것 말고는 신경 쓸 게 없었다.고은지가 말했다.“요즘 보살펴주는 사람 있으니까 너도 푹 쉬어. 이 병 급해봤자 소용이 없는 거 알잖아.”지난번에 고은영이 타이른 후로 고은지는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고 전처럼 그렇게 짜증을 내지 않았다.전에는 언제 퇴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하면 무척 괴로워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딸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녀의 말에 고은영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드디어 생각이 바뀌었어?”“네 말이 맞아. 믿을 만한 사람 아니야.”고은지가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고희주의 친아버지가 량천옥, 그리고 조보은 같은 사람이라면 고희주에게는 악몽이 될 것이다. 고희주의 미래를 누구에게도 맡겨선 안 되었다.고은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고은지에게 말할지 말지 망설였다. 고은지에게 고희주의 친아버지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지금 나태현의 태도만 생각하면 아무래도 알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배준우도 잠시는 고은지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그녀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말하지 않기로 했다.“그렇게 생각해서 다행이야. 그러니까 꼭 나아야 해. 알았지?”병마의 최대의 적이 살려는 의지라고 했다.“희주 공부 잘하고 있어?”고은지가 물었다. 지금 몸 상태라면 흥분해서는 안 되고 평정심을 유지해야 했다. 그리고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는 운명에 달렸다. 그전까지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었다. 고희주 옆에 하루라도 더 있기 위해서.그런데 고희주의 얘기가 나오자
하룻밤 심사숙고한 끝에 량천옥은 현실에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배항준은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나태현이 움직일 때마다 량천옥은 그 대가를 감당하지 못했다.“기증할게. 기증할 테니까 윤이 건드리지 마.”량천옥이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어젯밤에 소파에서 잠이 든 량일은 량천옥이 울부짖는 소리에 놀라서 깨고 말았다. 티테이블 위에 못 보던 박스가 하나 더 생긴 걸 보고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바로 깨달았다.‘우리 윤이...’“고맙습니다. 그럼 지금 모시러 갈까요?”“아니야. 병원은 내가 알아서 갈게. 그전에 우리 윤이 좀 볼 수 있을까?”량천옥이 고통스러워하며 말했다.‘어르신 어쩜 이렇게 매정해? 어떻게 친아들까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지? 김다정 이 여우 같은 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량천옥이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배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배윤은 수술이 끝나면 보낼게요. 그전에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러면...”나태현이 뒷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협박이 섞인 말투에 량천옥은 너무도 화가 나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가만두지 않아. 으악!”지금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봤자 마음속의 울분만 토해낼 뿐이었다.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족쇄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량일의 얼굴이 핏기라곤 없이 창백했다. 그녀는 소파에 축 늘어진 채 량천옥에게 말했다.“그냥 골수 기증하면 안 돼?”“다 죽여버릴 겁니다. 고은지 절대 가만 안 둬요.”량천옥이 무섭게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고은지를 죽이고 싶었다. 고은지 때문에 나태현이 배윤을 잡아갔고 그녀의 골수도 기증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량천옥은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량일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제발 얼른 병원에 가. 내가 이렇게 빌게.”배항준에게 불만이 많긴 했지만 외손자만큼은 끔찍이도 아꼈다. 박스 안에 담긴 게 배윤의 몸의 일부라는 생각만 하면 량일은 칼로 도려내듯 가
그나저나 나태현의 이런 거칠고 간단한 방법이 소용이 있긴 있었다.고은영의 목소리를 들은 량천옥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침대에 누워있던 고은지가 먼저 말했다.“은영아, 먼저 나가 있어.”“언니...”“나가 있으라고.”고은지의 말투가 조금 사나워졌다. 량천옥은 고은영의 경고 섞인 눈빛을 보더니 우쭐거리면서 코웃음을 쳤다.이게 바로 량천옥이었다. 나태현이 반항할 수 없을 정도로 짓누르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떻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짓눌리든 항상 잘난 체했다.고은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고은영은 결국 병실을 나왔다.고은영이 병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사라에게 눈짓했다. 사라는 병실 안을 잘 살피라는 그녀의 뜻을 바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영이 서 의사를 찾으러 간 그때 의사 사무실에서 나태현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나태현을 보고 있자니 고은영은 속이 말이 아니었다. 그가 언니 앞에 나타난 건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었다.고은영도 나씨 가문의 상황을 대충 알고 있었다. 나태범은 배항준과 달랐다.배항준이 그때 여자를 만나면서 향락에 빠진 바람에 배준우는 아주 손쉽게 동영 그룹을 손에 넣었다.그러나 비록 지금 나태현이 천락 그룹을 손에 넣긴 했지만 나태범이 배항준보다 백배는 더 위협적이었다.량천옥이 고은지를 사납게 쳐다보았다.“넌 정말 대단해. 아주 오래오래 살길 바랄게.”고은지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갑자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아까 우리 딸이 어쨌다고요?”조금 전 고은영의 병실로 들어오기 전에 량천옥은 그녀가 딸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마디 했었다. 그리고 곧바로 고은영이 병실로 들어왔다.‘희주 은영이한테 있는데 대체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거지?’아이 얘기를 꺼내자 량천옥이 더욱 살벌하게 웃었다.“고은영을 그렇게 믿어? 근데 안타까워서 어쩌나. 걔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그
‘왜 나 혼자만 지옥에 있어야 하는데? 너희들도 좋은 사람은 아니잖아. 인과응보라고 한다면 다 같이 당해야지.’고은영은 량천옥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잠시 후 량천옥이 그녀의 표정을 즐기면서 일어나던 그때 고은영이 말했다.“거짓말하지 말아요.”“거짓말 아니야. 네 동생한테 물어보면 되잖아.”고은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턱 막혀서 미칠 것만 같았다.량천옥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고은지를 힐끗 보고는 웃으면서 나가버렸다.병실에 고은지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절대 그럴 리가 없어...”고은지는 량천옥의 말을 믿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식물인간? 희주가 왜 식물인간이 돼? 멀쩡하게 학교도 다니고 은영이가 가정교사도 찾아줬다고 했어. 희주는 머리가 총명해서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도 바로 따라갔다고 했는데 식물인간이라니?’고은지는 량천옥이 했던 얘기를 믿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두려움이 자꾸만 그녀를 덮쳤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결국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고희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울리자마자 바로 연결됐다.“고은지 씨?”“접니다. 희주 좀 바꿔주세요.”고은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고희주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점점 꽉 쥐었다.곧이어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희주 지금 수업 중인데 이따가 다시 전화하시겠어요?”“수업 중이에요?”“네. 휴식시간이 금방 끝나서 아마 수업이 끝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수업이 끝난 후에 희주더러 전화하라고 할까요?”“네... 아니, 아니에요. 수업 잘하라고 해요.”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래. 희주 지금 수업 중인데 식물인간이 됐다는 게 말이 돼? 식물인간인 애가 수업을 할 리가 있겠어?’고은지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생각이 자기 위로인 건지 아니면......란완
여자 도우미들도 고은지의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가여워했다.여자 도우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게 말이에요. 량천옥 그 여자 정말 너무 괘씸해요. 어떻게 모녀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는지.”고은지가 아픈 게 량천옥 때문인 건 아니지만 지금 상태로 고희주의 일을 알게 된다면 정말 버티지 못할 것이다.“사람이 어쩜 이렇게 독할까요? 그때 사모님이 친딸인 줄 알고 자주 왔을 때 참 가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이러니까 불쌍한 사람을 동정할 필요 없다는 거예요.”다른 한 도우미가 말했다.그때 그들은 진심으로 량천옥이 안 됐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가여움 뒤에 이렇게도 무서운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다. 어린아이마저 내버려 두지 않을 정도로 잔인했다.“그 여자 친딸이 사모님이 아니라면 아직 못 찾은 거겠죠?”“글쎄요. 저런 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딸을 찾지 못할 수도 있어요.”“맞아요. 찾는다고 해도 저런 사람이라면 친딸도 거들떠보지 않을걸요?”란완리조트의 사람들은 량천옥이라면 아주 치를 떨었다.전에 고희주가 이곳에서 지낼 때 붙임성도 좋고 말도 잘 들어서 다들 예뻐했다. 그랬던 애가 이 지경이 됐으니 다들 무척이나 속상해했다....병원.나태현과 고은영이 의사 사무실에서 나왔다. 나태현은 고은영을 보면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고마워요.”갑작스러운 말에 고은영은 화들짝 놀랐다. 나태현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고은지의 상태를 생각하여 결국 그냥 삼켜버렸다.원래는 나태현에게 고은지를 끝까지 책임질 건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고은지가 아직 생사의 갈림길에 있어서 책임을 묻는 건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았다.고은영은 다른 말 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수고는요. 수술이 잘되기만을 바랄 뿐이에요.”나태현이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잘될 거예요.”잠깐 얘기를 나눈 후 고은영은 고은지의 병실로 향했다. 그런데 병실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고은지를 다급하게 위로하는 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지 씨, 그
그런데 서 의사가 사무실을 뛰쳐나와 고은지의 병실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는 바로 발걸음을 돌렸다.나태현은 병실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만 같았다.고은영은 놀란 나머지 눈물을 왈칵 쏟았다.“언니, 언니.”‘안 돼. 죽으면 안 돼.’병원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량천옥은 우쭐거리면서 병원에서 나왔다. 비록 아직 배윤을 구하진 못했지만 그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만 해도 기분이 통쾌했다.‘골수 줄 수는 있어. 주긴 주겠는데 절대 편한 꼴은 못 봐.’이게 바로 량천옥이었다. 하찮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아야 했고 반격할 땐 누구보다도 잔인했다....그렇게 한 시간 정도의 응급조치 끝에 고은지는 위험한 고비를 넘겼고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다.의사에게서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들은 순간 고은영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축 늘어진 모습으로 사라에게 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량천옥이...”고은영은 고은지가 그녀를 잡고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희주 일을 언니가 알았어. 결국에는 량천옥이 말해서 알게 됐어. 어떻게 언니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희주가 저렇게 된 게 다 누구 탓인데.’고은영은 차마 고은영에게 이 말을 할 수가 없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병실에서 나왔다.그때 나태현이 통화하는 걸 듣게 되었다.“그래. 량천옥이란 여자야. 너희들한테 맡길게.”“잠깐만요.”나태현이 한창 지시하던 그때 고은영이 재빨리 달려가 말렸다. 나태현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고은영이 그에게 말했다.“저기... 아직은 움직이지 말라고 해요.”나태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량천옥을 건드릴 때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량천옥이 미웠고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 여자를 죽이고 싶었으나 섣불리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었다.나태현은 고은영의 그렁그렁한 두 눈을 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가 전화 상대에게 말했다.“일단 건드리지 말고 기다려.”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나태현의 시선이 고은
나태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자 량천옥이 다급하게 받았다.“골수 기증하겠다고 했잖아. 왜 또 내 아들 건드린 건데?”량천옥이 히스테릭하게 울부짖었다. 나태현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내가 왜 그랬을까요?”“난 걔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 너무한 거 아니야?”“아무 짓도 안 하긴 했죠. 그런데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잖아요.”나태현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가 끊긴 순간 량천옥은 맥이 풀리면서 휴대전화를 뚝 떨어뜨렸다.그러고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소리를 질렀다.“으악!”‘왜. 대체 왜 이 사람들은 그 두 자매만 신경 쓰는 거냐고! 말 좀 몇 마디 했다고 바로 복수해? 고은지가 나태현한테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었어? 중요하면 또 어쩔 건데? 나태범이 두 사람을 허락할 것 같아?’나중에 나태범이 고은지를 알게 되면 무조건 처리할 거란 생각에 량천옥은 마음이 조금 나아진 듯했다.통화 내용을 들은 량일은 량천옥이 병원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대충 알게 되었다. 량일이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좀 얌전히 있으면 안 돼? 윤이 지금 그 사람들 손에 있어. 그러니까 제발 더는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마.”연속 두 번이나 제발이라고 얘기한 것만 봐도 량일이 지금 얼마나 마음 아파하는지 알 수 있었다.량천옥은 어릴 적부터 매사에 승부욕이 강했다.그때는 적어도 손해를 보지 않아서 이런 성격이 좋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하도 손해를 봐서 이젠 볼 손해도 남지 않았다.고개를 숙여야 할 땐 숙여야 하는데 더는 이대로 나아가선 안 되었다. 그리고 량천옥만 손해를 보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이젠 주변 사람까지 피해를 봤다. 특히 배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량일은 배윤 생각만 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량천옥이 숨을 헐떡이면서 량일을 쳐다보았다.“그럼 그 사람들한테 계속 당하기만 하라는 말이에요?”“배씨 가문이 없으면 강성에서 괴롭힘당할 수밖에 없
량천옥은 항상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나태현을 협박하려고 했다.그런데 그녀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나태현이 평소에 겸손하고 조용한 사람이라고 해서 강성에서 발언권이 없는 게 아니었고 또 진짜로 침묵하는 게 아니었다.“여사님 옆으로 보내줄 겁니다. 만약 여사님이 계속 이런 태도로 일관한다면 조금씩 옆으로 보내줄게요.”나태현의 목소리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협박이 담겨있었다. 량천옥의 협박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맞섰다.‘감히 날 협박해? 꿈도 야무지네.’그의 협박에 량천옥은 온몸이 점점 굳어지는 것 같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량일도 간담이 서늘해졌다.량천옥이 화를 내면서 뭐라 소리를 지르려던 그때 량일이 재빨리 다가가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병원.량천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나태현은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이지훈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대표님.”“무슨 일이야?”이지훈이 말했다.“고은지 씨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요. 서 의사가 그러는데 일주일 동안은 수술할 수 없답니다.”조금 호전됐던 상태가 량천옥 때문에 다시 악화되고 말았다. 이젠 수술을 할 만한 상태조차 아니었다.나태현의 두 눈이 싸늘해졌다.“배윤더러 량천옥한테 전화하라고 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가르쳐주고.”“네.”이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량천옥이 또 다른 생각을 하기 전에 그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것이었다.량천옥은 정말 끈질긴 여자였다. 이런 상황이 돼서도 반격하다니......고은영은 아직도 의식을 되찾지 못한 고은지를 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불안감에 빠졌다.진정훈이 병원에 도착했다. 고은지가 수술받으러 들어간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나태현에게 이렇게 말했다.“량천옥 같은 여자를 상대하려면 쉽고 거칠게 해야지.”량천옥은 마음이 악랄하고 나쁜 짓을 일삼았다. 이럴 때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그녀는 상대가 진짜로 겁먹은 줄로 알 것이다.진정훈은 해외에 있었던 동안에 늘 이
두 여자가 마치 맹수처럼 서로 얽혀 싸우고 있었다. 안지영은 화가 나서 말했다. “내가 네 얼굴을 찢어버려야지! 도대체 누가 너더러 감히 나한테 와서 이러라고 했어!” 그녀가 나태웅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요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데 그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귀찮게 다가온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하주원은 기가 막힌 듯 대답했다. “너 같은 년, 너는 양심도 없잖아! 나는 경고하는 거야, 내 사촌한테 가까이 가지 마! 그 사람는 네가 손댈 사람이 아니야!” “그럼 네가 사람을 멀리 데려가던지! 그 병을 나한테 옮기지 말고!” “너 같은 년은 정말로!” “너야말로, 너희 가족 전부가 다 미쳤어!” 안지영은 거침없이 맞받아쳤다. 하주원은 하늘 그룹의 계승자가 이렇게 무례하고 난폭한 여자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원래 안지영에게 경고만 하려 했고 안지영이 어떻게든 체면을 차리고 자신에게 이제부터는 나태웅과 연락하지 않겠다며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지영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회사에서 이렇게 자신과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모습에 그녀는 당황했다. “아, 너 그만 놔!” 하주원은 머리가 당겨져서 아팠다. 안지영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너 방금 나 때리겠다고 하지 않았어? 때려 봐! 나 때려봐!” 하주원은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았고 비서도 말없이 이 광경을 보고는 급히 사람들을 데려와서 둘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한편, 그녀는 급히 안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 안열은 여전히 병원에 있었다. 병실 안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이상하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진이훈은 나태웅을 한번 보고 다시 안열을 바라보았다. 그는 안열이 이곳에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며 더 놀라운 건 그녀가 보스에게 손을 대었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나태웅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안열을 마치 찢어버릴 듯이 차갑고 위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막 손을 댄 안열은 점차 차
한편, 하늘 그룹에서는 안지영이 진이훈을 차단한 후 더 이상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안지영의 세계는 조금 조용해졌다. 그런데 회의실에서 나오자 비서부의 작은 비서가 다가왔다. “안 대표님, 접대실에 하주원 씨라는 분이 오셨습니다.” “하주원?” “네.”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게 누구지?” 머릿속에서 그녀와 관련된 사람을 검색했지만 그 이름은 낯설었다. 그녀는 그 사람을 전혀 알지 못했다. 비서가 말했다. “나 회장님의 여동생의 딸입니다.” “나태웅의 사촌?” “네, 맞습니다.” ‘이런!’ 그제야 그녀는 고은영이 왜 배준우와 함께 있을 때 그렇게 힘들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문제는 언제나 따라왔다. 안지영은 머리가 아팠지만 어쩔 수 없이 접대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금발의 긴 파마머리로 화려하게 꾸민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지나치게 짙은 화장과 화려한 옷차림으로 본래의 단아함을 가리고 풍만한 매력을 풍기며 섹시한 기운을 뽐냈다. 특히 짧은 청바지와 상의가 안지영의 머릿속에 두 글자를 떠오르게 했다. ‘불량소녀!’ 안지영은 쉽게 다른 사람의 외모나 스타일을 평가하지 않지만 그 순간 하주원의 화려한 화장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특히 그린 아이섀도와 은색이 박힌 네일이 그녀에게서 여유보다는 떠도는 느낌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하주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안지영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당신이 안지영 씨?” 하주원은 적대적인 어조로 물었다. 안지영은 그녀가 왜 왔는지 감을 잡았다.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저를 찾으러 오셨으면서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나요?” 하주원은 여전히 적대적이었고 대화는 금세 불쾌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에 이미 공기 속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하주원은 커피를 내려놓고 일어나서 안지영에게 다가갔다.
“안지영 씨가 오면 분명히 대표님을 때릴 거예요!” ‘때린다’는 말을 진이훈은 아주 세게 강조했다. 나태웅은 다시 침묵했다. 진이훈은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더욱 마음이 아팠다. 보스가 정말 아픈 거였다. 병이 심각해 보였고 이런 상태로 가면 안지영까지 미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자신이 아파서 안지영 씨까지 미치게 만들려고 하는 걸까?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한다고?’ 진이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나태웅이 정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아리 박사님이 이미 왔어요. 큰 도련님께서 의사와 협력해서 치료를 받으라고 하셨어요.” 나태웅은 그 말을 듣고 차가운 눈빛으로 진이훈을 노려보았다. 진이훈은 그 눈빛에 조금 겁을 먹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맞을 위험을 감수하며 말했다. “몸이 중요하잖아요. 그렇죠?” 진이훈도 답답했다. 나태웅 옆에서 열심히 일만 했을 뿐인데 결국 나태웅과 함께 병원에서 그의 병수발을 들고 있다니. 나태웅은 차갑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꺼져!” 그는 마음속으로 더 괴로워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태웅이 얼굴이 더 안 좋아 보이는 걸 보며 진이훈은 다시 물었다. “그럼 안지영 씨가 여전히 안 오면 어떻게 하죠?” “그럼 유골함을 열어 그녀에게 보여주면 돼.” ‘유골함을 열다니! 안지영 씨에게 유골함을 보여준다고?’ 나태웅이 그런 말을 하자 진이훈은 급히 인터넷에서 유골함을 열어본 사진을 찾았다. 그가 캠퍼스를 떠나 처음 일했을 때는 열정이 넘쳤지만 지금은 이런 유치한 일을 해야 하다니. 안지영을 빨리 오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는 서둘러 그 사진을 안지영에게 보냈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낼 수 없다고 떴을 때 그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 안지영 씨가 저를 차단했어요. 이제 귀찮아서 오지 않을 거예요.” 진이훈은 힘없이 말했다. 나태웅은 책을 넘기던 손이 잠시 멈췄고 그의 눈빛에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
안열은 처음엔 초조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지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안지영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태웅이 말하길 제가 아침에 음식을 가져가지 않으면 화장 증명서를 받게 될 거라던데 지금 아침 시간이 겨우 한 시간 정도 지났잖아요?” ‘한 시간 만에 죽었다고? 화장 증명서까지 나왔다고?’ 안지영은 결국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 ‘이 나태웅, 진짜 못돼 먹었네. 이런 상황에서도 날 도덕적으로 옭아매려고 하다니.’ 안지영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열은 뒤늦게 납득하며 말했다. “맞아요! 그럼 결국 장난친 거잖아요?” “화장 증명서가 그렇게 빨리 나올 리가 없어요.” “설령 진짜 죽었다고 해도 병원에서 절차를 다 마쳐야 화장터로 갈 수 있잖아요.” 안지영은 얼굴이 굳었다. 조금 전까지 충격에 휩싸여 허둥대던 그녀는 이제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지금 바로 나태웅을 정말 죽여버려도 돼요?” 안열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나태웅 이 자식, 미친 거 아니에요?” 안지영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이미 정신과 의사도 예약했어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태웅이 진심으로 죽으려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지영은 안열의 손목을 잡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근데 아까 왜 그렇게 초조해했죠?”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 ‘그걸 내가 잘못 볼 리가 있냐고?’ 아까 안열이 보였던 반응은 분명 초조함이었다. 안열은 더 이상 안지영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나태웅을 찾아가 따질 생각뿐이었다. 안열은 안지영의 손목을 뿌리치며 말했다. “회의하러 가세요.” “그럼 안열 씨는요?” “저는 마음을 좀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해요!” 안지영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마음을 진정시킨다니,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그러나 지금 나태웅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이미 너무 지쳤다. 회의실로 올라간 안지영은 이제 겨우
‘진짜 너무 악랄해.’ 진이훈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우리 보스가 안지영 씨에게 얼마나 진심인데 그 마음을 완전히 짓밟아버렸어.’ 그는 나태웅의 손을 꼭 붙잡으며 혹시라도 그가 창문에서 뛰어내릴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이훈의 끝없는 잔소리에 나태웅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결국 그는 손을 확 뿌리쳤다. 그러나 진이훈은 더 꽉 붙들며 간절하게 말했다. “우린 안지영 씨 생각하지 말자고요, 네?” 심지어 말 끝에 ‘말 잘 들어요’같은 말을 덧붙이고 싶을 정도였다. 나태웅의 눈빛이 점점 더 위험해지더니 낮게 물었다. “우리?” ‘뭐지?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지?’ 잠시 멍해 있다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요! 우리가 아니라 대표님이 안지영 씨를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진이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에게 받은 상처가 얼마나 깊으면 말조차도 안지영 씨와 관련되면 불편한 거야?’ “손 놔.” 진이훈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으며 강하게 말했다. “안지영 씨는 별로예요. 게다가 지금은 장선명 씨와 이미 사귄다는 소문도 있잖아요. 그런 여자를 정말 원하시겠어요?” “내가 손 놓으라고 했지.” 나태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힘을 주어 손을 뿌리쳤다. 그의 눈빛은 마치 진이훈을 잡아먹을 듯이 날카로웠다. 진이훈은 나태웅의 그 눈빛에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다. 나태웅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한번 안지영을 헐뜯어봐.” ‘이제 안지영 씨에 대해 나쁜 말도 못 하게 해?’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말 이 여자한테 얼마나 깊이 빠진 거야... 병이 이렇게 심한데도 안지영 씨를 지키려 하다니.’ 한편, 안지영은 진이훈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한 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곧바로 메시지 창에서 영상 통화를 걸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계속 시도했지만 나태웅 쪽에서 받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숨이 가빠지며 제대로 숨도 못 쉴 지경이 되었다. 옆에서 지켜
안지영이 여전히 나태웅을 미친놈, 변태라고 욕하는 걸 보며 장선명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고 물었다. “그럼 돈을 나태웅에게 주면 이 일은 끝나는 거예요?” 안지영은 병아리가 모이를 쪼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아마도요?” 만약 이걸로도 끝나지 않는다면 정말 나태웅의 머리를 깨서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였다. 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이건 제가 처리할게요.” “뭘 하려고요?” 안지영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흥분한 상태였지만 장선명이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말하자 즉시 조용해졌다. ‘선명 씨가 처리한다고? 항상 유흥가를 드나들던 사람이 무슨 방법으로 처리하려는 거지?’ 그녀는 이 순간 깨달았다. 장선명과 나태웅은 원래 완전히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이 둘이 얽히게 되었고 나태웅은 정신적으로 예민하고 집요한 수법을 쓰는 반면 장선명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왠지 모르게 건달 같은 느낌이 있었다. ‘건달 대 신경질적인 사람? 이 조합은 대체 어떤 장면을 만들어낼까?’ 그녀가 걱정하는 것도 모른 채 장선명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뭘 어떻게 하겠어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그게 가장 좋은 거죠.” ‘아니, 뭐야 이 사람...’ 다음 날 아침. 나태웅은 병원에서 안지영이 만두와 인절미를 들고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고 대신 그의 은행 계좌에는 무려 600억이 입금되었다. 하지만 돈을 보낸 계좌는 안지영이 아니라 장선명의 것이었다. 이 돈을 확인한 나태웅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했다. 그 순간, 아침 식사를 들고 들어오던 진이훈이 그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나 대표님, 진정하세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만 하시면 돼요!” 원래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는데 진이훈의 그 말에 더 화가 치밀었다. 이를 악물고 물었다. “안지영은 안 왔나?” “네, 안 왔어요. 왜요? 안지영 씨가 오늘 온다고 했나
‘손자가 한심하다고 할아버지가 나서서 사람까지 뺏으려 한다고? 이게 과연 체면이 서는 행동인가?’ 이 생각에 장선명은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 안지영이 들어왔을 때 그는 마침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장선명은 전화기 너머로 말했다. “네, 나태범 쪽에서 지영이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때가 되면 할아버지가 나서 주셔야 해요!” 평소에 절대 어른들을 끌어들이지 않던 장선명은 배준우의 말을 듣고는 즉각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장선명의 할아버지는 안지영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으므로 이 말을 듣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나씨 가문 둘째 녀석이 정말로 지영이 때문에 자살 소동을 벌였단 말이냐?” “그럼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먼저 지영이와 연애를 시작했거든요.” “야, 이놈아. 네가 언제 이렇게 도덕 따지는 놈이었냐?” 심지어 먼저 사귀었다고 설명까지 덧붙이다니. 그의 할아버지조차 손자의 변명이 웃길 따름이었다. “아무튼요. 상황을 미리 알려드렸으니 종대 아저씨에게 나씨 가문 쪽 상황을 살펴보라고 해 주세요.” “알겠다!” 한편, 옆에서 이 전화를 듣고 있던 안지영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대충 상황을 이해한 그녀는 황당함을 느꼈다. 결국 나태범이 나태웅 때문에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이 가족 제정신인가? 나태웅이 나를 협박했던 것도 모자라 이제 할아버지까지 협박에 나선다고? 힘으로 어린 사람을 억누르겠다는 건가? 내가 보호받을 아버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잠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만약 안진섭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이 상황에서도 안지영을 지켜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안열이 말했듯 그녀의 아버지는 너무 착하고 온화했으니까. 장선명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리자 안지영이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가가 물었다. “언제 왔어요? 다 들은 거예요?” 안지영은 화난 얼굴로 말했다.
배준우는 조용히 장선명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그가 한 말은 생생하게 상황을 묘사했지만 어딘가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나태범이 화가 나서 이 일에 개입한다면 장선명은 진짜 골치 아픈 문제를 떠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장선명이 더 기막힌 소리를 했다. “진짜 그렇게 된다면 나도 우리 집 어른을 불러야지!” 마치 누구네 집에만 어른이 있는 건 아니라는 태도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얼굴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장선명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저도 할아버지를 부르죠.” 나태웅이 할아버지를 부르면 자기는 할아버지를 불러 대결 구도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었다. 배준우는 고개를 감싸 쥐며 말했다. “너 아직도 이 상황이 충분히 복잡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장선명의 할아버지가 어떤 인물인지 배준우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도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면 이 일은 완전히 우스갯소리가 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그런 소동은 나태웅이 자살 소동을 벌였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큰 파장을 일으킬 게 뻔했다. “그쪽이 먼저 일을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 나랑 지영이는 곧 결혼할 사이인데요.”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배준우는 다시금 이 일이 얼마나 촉박한 상황인지 깨달았다. 장선명과 안지영의 결혼식 날짜는 얼마 남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태웅 쪽 상황을 보면 그 결혼식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미 그는 이 일로 정신적 문제가 생겼고 만약 결혼식을 본다면 그의 상태는 더 나빠질 게 뻔했다. 배준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결국 조심스럽게 말했다. “결혼식 날짜를 조금만 미룰 수는 없겠니?” 장선명은 바로 반발하며 말했다. “왜 미뤄야 하죠? 형님, 설마...” “나태웅은 지금 심리 치료를 받고 있어. 네가 결혼하는 걸 보면 어떤 일이 생길 것 같니?” 장선명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형님, 성인군자라도 되려는 거예요?” “뭐라고?” 배준우의 얼굴이 단번에 검게 변했다. “아니
스스로 병이 있다는 걸 깨달아야 의사를 대면할 때 거부 반응이 덜하다. 배준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 너도 참...” 원래는 나태웅에게 몇 마디 더 하려 했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건 고은영의 얼굴이었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한동안 나태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라고는 했지만 실상은 나태웅을 안심시키려는 배준우의 독백에 가까웠다. 나태웅은 무기력해 보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건 정말 모든 걸 체념한 것인지 아니면 병이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배준우는 병원을 떠났다. 병원에서 나온 배준우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먼저 장선명을 찾아갔다. 장선명은 배준우가 근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걸 보고 놀라며 말했다. “형, 웬일이에요? 근무를 빼먹다니!” 배준우가 얼마나 일에 철저한지 강성은 물론이고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근무 시간 중에는 그 누구도 그를 밖으로 불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근무 중임에도 장선명을 찾아온 것이다. 배준우는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말이 많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왔어.” 장선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업 관련된 일이에요?” 중요한 일이라면 사업 관련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배준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나태웅 때문이야. 너 알고 있어? 걔 죽을 뻔했어.” 이 말에 장선명은 얼굴을 찌푸렸다. “형도 소문을 믿는 거예요?” 사실 나태웅의 손목 부상은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태웅도 자신의 부상이 안지영 때문이라고 직접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강성에서는 이 일이 마치 사랑에 상처받아 생긴 일이라는 소문으로 부풀려졌다. 그리고 그 소문은 이제 배준우의 입에서 더 과장된 형태로 나왔다. 죽을 뻔했다는 말은 거의 나태웅이 안지영과 장선명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의미로 들렸다. 장선명은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 “형이 이런 일까지 신경 쓰다니 정말 뜻밖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