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설아의 말을 들은 강연찬은 조용히 손을 거두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널 기다릴게.”이것이 배서준과 강연찬의 차이였다. 배서준은 오직 자기 자신만 생각했고 남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연찬은 존중했고 기다려 주었다.그런 그를 바라보며 남설아의 마음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선배, 돌아가. 앞으로의 일은 내가 잘 처리할게요.”“응.”강연찬은 억지로 머물지 않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남설아의 뺨을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남설아는 팔로 스스로를 꼭 감싸 안으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이내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다음 날 아침 배서준이 다시금 히아신스를 들고 찾아와서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늘은 어떤 것 같아?”그의 얼굴에는 한없이 다정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마치 남설아가 그의 세상 전부라도 되는 것처럼.예전 같았으면 남설아는 이런 그의 태도에 마음이 설렜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그의 본모습을 알고 있는 이상 이런 가식적인 모습이 우스울 뿐이었다.늦어버린 사랑과 관심은 하찮기 짝이 없었다. 하물며 그마저도 가짜라면 아무 가치도 없는 법이었다.남설아는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네가 아이를 원하는 거 알아.”“임신하게 해 줄게.”그는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진지한 표정을 지었고 마치 그녀에게 크나큰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그 오만한 모습이 역겨워 견딜 수 없었다!남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이를 악물었다.“난 지금 몸 상태가 안 좋아요. 아이 가질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도 아이 싫어하잖아요. 굳이 억지로 만들 필요 있겠어요?"“남설아, 대체 뭘 바라는 거야?”배서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남설아가 전혀 기쁘지 않다는
배서준이 떠난 후 남설아는 책상 위의 히아신스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울 따름이었다!하지만 남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그녀도 꽤 능숙했기에 그대로 위층으로 올라가 서유라의 방으로 향했다.지금 그녀 주변의 모든 사람은 강연찬이 미리 손을 써 둔 상태였으니 서유라를 만나는 것도 문제없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남설아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앉아 서유라를 비웃듯 바라보았다.“배서준의 운명적 사랑이 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어?”“남설아, 이 천박한 년아! 넌 천하의 개자식이야! 잔인하고 간교한 악녀라고!”서유라는 남설아를 보자마자 치를 떨며 이를 갈았고 욕설도 모자라 그녀를 저주하기까지 했다.예전 같았으면 남설아는 묵묵히 참거나 애써 못 들은 척했을지도 있었다. 하지민 지금은 가만히 당하기만 할 남설아가 아니었기에 그녀는 한 걸음 성큼 다가가 그대로 서유라의 뺨을 후려쳤다.“천박해? 대체 누가 천박한 년인데? 배서준은 가정이 있고 와이프도 자식도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창피한 줄도 모르고 달라붙은 건 너야. 진짜 뻔뻔한 건 너라고!”“잔인하다고? 감히 그런 말이 네 입에서 나와? 네가 뭘 했는지 모를 거라고 생각해? 나은이가 떠난 날 일부러 배서준을 붙잡아 둔 거 다 알아!”남설아는 그 일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분노로 터질 듯했다.서유라는 평소에도 늘 약한 척 가련한 척하며 동정을 샀지만 남설아는 그녀가 겉으로만 착한 척할 뿐 속은 시커먼 위선자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 모든 연약함은 고작해야 거짓된 가면일 뿐이었다.서유라는 눈앞의 남설아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언제나 비굴하게 당하기만 하던 남설아가 이렇게까지 날카로운 칼날을 세울 줄이야.서유라는 분을 참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남설아, 배서준의 마음속엔 오직 나뿐이야. 그런데 네가 감히 나한테 이런 수모를 주겠다고? 좋아, 두고 봐.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내가 직접 배서준에게 이혼하라고 시킬 거야!”“내가 이혼을 두
문 앞에 서서 안에서 들려오는 서유라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남설아는 온몸이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배서준도 똑같이 당해봐야 마땅했다.자신의 병실로 돌아오자 네 명의 스타일리스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모두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고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사모님, 저는 인성훈입니다. 오늘 스타일링을 맡게 되었습니다.”“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드레스와 액세서리입니다. 마음에 드시는 걸로 고르시면 됩니다.”인성훈이 뒤에 준비된 물품들을 가리켰는데 모두 최고급 명품 브랜드의 제품이었고 보석들은 국보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값비싼 것들이었다.그것들을 바라보며 남설아는 이번 기자회견과 저녁 연회가 꽤 중요한 행사라는 걸 직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배서준이 이렇게까지 공을 들일 리가 없었다.그는 철저한 사업가라 이익이 보장될 때만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가장 비싼 걸로 할게요.”이미 차려진 밥상이라면 기꺼이 누릴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 배서준을 어떻게 할 수는 없어도 엿 정도는 먹일 수 있으니까.인성훈은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전까지 남설아는 언제나 소극적이었고 선택하는 것도 최대한 보수적이며 저렴한 것들이었다. 그 때문에 스타일리스트들 사이에서도 그녀가 촌스럽고 격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 종종 오갔다. 배서준의 와이프로서의 품격이 부족하다는 수군거림까지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고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렬했다.그런 변화가 반갑기라도 하듯 인성훈은 망설이지 않고 강렬한 붉은색 드레스를 꺼냈다.이 드레스는 착용자의 몸매를 완벽하게 드러내는 디자인이었다. 노출이 상당한 편이었으며 특히 등이 거의 전부 드러나는 과감한 스타일이었다. 입어보지 않았는데도 남설아는 이 드레스가 얼마나 대담한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녀는 앞으로 나아가 드레스를 바라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
가볍게 화장을 마치자 더욱 완벽하고 세련된 얼굴이 드러났다. 인성훈은 자신의 작품을 보며 몹시 흡족해했다.그들은 분명 뛰어난 실력을 가진 스타일리스트였지만 그래도 타고난 외모가 좋은 사람을 손보는 게 더 즐거웠다. 없는 걸 창조하는 것보다 있는 걸 살리는 게 훨씬 쉬웠고 효과도 확실했으니까.마치 화장을 안 한 듯하면서도 완벽한 변화를 주는 것, 그게 바로 최고의 경지였다.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던 남설아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녀는 원래는 이렇게 눈에 띄는 색감을 좋아했었는데 배서준과 함께한 후부터 그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점점 자신의 색을 지워나갔다. 그가 저속하다고 평가한 후 무의식적으로 그의 눈치를 보며 칙칙한 색의 옷들만 골라 입게 됐다. 이제 와 돌아보니 그때는 자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이거 아주 마음에 드네요, 계산은 배서준한테 하라고 하세요.”남설아는 당당하게 말했다.이 정도 돈은 배서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 이상의 가치를 돌려줄 터였고 배서준이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으니까.거울 속 자신을 다시금 찬찬히 바라보던 남설아는 문득 자신이 상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배건 그룹.배서준은 곧바로 도착한 4억의 명세서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뭐야 이게?”“사모님께서 오늘 저녁 파티에 입을 드레스와 주얼리입니다.”천기준이 담담하게 보고했다.그는 오랫동안 배서준을 보좌해 왔지만 사모님이 이렇게 큰돈을 쓴 건 처음이었다.하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급의 사모님들은 매달 이 정도는 기본으로 지출하고 있었다.남설아가 배서준의 와이프로 살면서 감정적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배서준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불쾌하게 중얼거렸다.“이제 돈 쓰는 재미라도 붙인 건가?”솔직히 그녀가 이 정도를 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지금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면 자기한테도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기에 결국 마지못해 결제 서명을 했다.‘그래
“그래요? 이게 바로 방금 국제 슈퍼모델이 런웨이에서 입은 신상인데 뭐가 가볍다는 거죠?”“정말 고지식하다니까요.”남설아는 대놓고 눈을 굴리며 그의 가스라이팅을 단칼에 거절하고 한 마디로 맞받아쳤다.이건 정말 전례 없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배서준이 뭐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 했고 그는 온갖 방식으로 남설아를 깎아내렸지만 그녀는 감히 반박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스스로를 의심하며 자신이 정말 잘못한 게 아닌지 반성하곤 했다.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남설아는 더 이상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 그저 사람이 잘못됐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아까 스타일리스트들조차 예쁘다고 감탄했는데 유독 이 남자만 혼자 시커먼 얼굴을 하고 불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정말이지 감도 없고 분위기나 망치는 수준이었다.배서준도 자신이 단 두 마디 던졌을 뿐인데 이렇게나 많은 말을 되돌려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그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남설아, 이게 네 새로운 수법이야? 이렇게 해서 내 관심이라도 끌어보겠다고? 헛꿈 꾸지 마.”“대체 누가 꿈을 꾸는 건지 모르겠네요. 갈 거예요 말 거예요?”남설아는 완전히 인내심이 바닥났다.오늘 화장이 너무 잘 돼서 이미지 망가질까 봐 참는 거지, 아니었으면 지금 당장 배서준의 대가리에 하이힐을 내리꽂았을 것이었다.‘보는 눈 하고는? 안과나 좀 가보시지? 대표라는 사람이 병 보일 돈은 없는 거야?’돈은 그렇게 많으면서 병원 갈 생각은 안 하나?속으로 배서준을 온갖 욕설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후 그녀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그대로 지나쳤다.‘지금 여기 기자들도 없는데 쇼를 할 필요가 없잖아?’솔직히 남설아는 이제 배서준이 그냥 싫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혐오로 변해버렸다!이 남자와 닿기만 해도 역겨울 지경이었지만 배건 그룹의 핵심 자료를 손에 넣고 원래 자기 것이었던 걸 되찾기 전까지는 참아야 했다!남설아는 배서준 따위를 마음에서 지워버리기만 하면 인생이 이렇게도 평온할 수 있다
이게 바로 남설아가 원하던 결과였다. 서유라가 이제 와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설아와 배나은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게 만들었으니 이제는 그 고통을 똑같이 돌려받을 차례였다. 이제는 서유라가 밤잠 한 번 제대로 못 이루는 게 어떤 기분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다!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남설아는 여유롭고 품위 있는 태도로 대응했다. 그 덕분에 그녀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한층 더 올라갔다. 이 기회를 틈타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공식적으로 밝혔고 자신이 단순히 배서준의 와이프가 아니라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라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남설아에게 이번 일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녀는 온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더 이상 배서준의 와이프 따위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행사장은 그녀의 주도 아래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배서준은 그런 그녀를 곁에서 지켜보며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남설아가 그저 슈퍼에서 채소와 과일 가격이나 따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이토록 능숙하게 상황을 이끌어가는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어쩐지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서준은 지금의 남설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전의 그녀는 자아도 개성도 없었고 아이와 남편만을 위해 존재하는 그야말로 영혼 없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배나은이 떠난 후 그녀는 마치 껍질을 깨고 나온 듯 눈부시게 변해버렸는데 그 모습이 너무 낯설고 또 너무도 빛났다.배서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보호하며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함께 차에 올랐다.차가 한참을 달린 후에야 남설아는 배서준이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하며 즉시 손을 빼냈다.“대표님, 이 뉴스가 곧 인터넷을 도배하겠네요. 당신 애인이 보고 질투하는 거 아니에요?”“만약 그녀가 질투라도 해서 난리를 치면 난 두 번 다시 도와줄 생각 없어요.”그녀는 차 안에서 자세를 바꿔 의도적으로 그와 거리를 벌렸다.남
카메라 앞에서 남설아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 사적인 문제를 들킨 당혹스러움 따위는 전혀 없어 보였고 마치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 듯했다.원래 배서준은 이렇게 분별 있고 프로페셔널한 태도의 남설아를 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생기 없는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부터 어딘가 불쾌한 감정이 피어올랐다.예전엔 그녀가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쏟는 게 가장 싫었는데 이제는 아예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어졌다.“사모님, 서유라 씨와 대표님의 관계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서유라 씨는 서유라 씨일 뿐이지만 저는 사모님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서준 씨는 제 곁에 있죠. 이보다 더 명확한 답이 있을까요?”남설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배서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기자들 앞에서 열 손가락을 깍지 끼고 커다란 제스처로 결혼반지를 과시했다.사실 그녀의 반지는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렸기에 지금 손에 낀 건 그냥 온라인 쇼핑몰에서 산 저가형 짝퉁일 뿐이었고 그야말로 한 푼의 가치도 없는 물건이었다.배서준은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는데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의 눈빛도 어느새 부드러워졌고 남설아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은근한 온기와 묘한 감탄이 서려 있었다.애초에 사람들은 이 해명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하지만 이 장면이 생방송으로 송출되자 배서준의 눈빛을 따로 편집한 짧은 영상들이 각종 SNS를 뒤덮었다.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이를 활용해 2차 콘텐츠를 만들어냈고 이윽고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그 결과 전 국민이 배서준의 가짜 정체성과 가식적인 다정함에 현혹되어 버렸다. 일부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어떤 이들은 심지어 부러워하며 감싸기까지 했다.온라인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홍보팀에서 올린 피드백을 확인한 천기준은 이번 이미지 세탁이 꽤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직감했다. 배건 그룹이 직면한 명예 실추 위기도 일단락된
원래는 긴급한 일이었지만 배서준은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다지 급해 보이지 않았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남설아를 힐끗 바라봤다. 그녀가 왜 갑자기 더 이상 자기에게 휘둘리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 시선을 느낀 남설아도 똑같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결국 손을 휘휘 내저었다.“살펴 가세요. 배웅은 못하겠네요.”“올 때까지 기다려.”배서준은 단호하게 말을 던지고는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남설아는 코웃음을 치며 옆에 서 있던 천기준에게 시선을 돌렸다.“뭘 멍하니 서 있어요? 당장 차 준비해요. 우리 늦으면 안 돼요.”“하지만 사모님, 대표님이 기다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천기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언제부터 사모님이 이렇게 자기주장이 강했지?’남설아는 그런 천기준의 반응이 우습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그쪽 대표님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요? 돌아올 것 같아요?”이런 일이 처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동안 약속의 대상이 배나은이었을 뿐.하지만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었다. 처음엔 나은이가 순진하게 기다리곤 했지만 몇 번을 겪고 나니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그러나 어린이들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했기에 남설아는 나은이가 매번 기다림과 실망에 지쳐 나중에는 울지도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연이 생각이 들자 남설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그녀는 단숨에 치맛자락을 손으로 쥐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천기준은 방금 전까지 온화하던 사모님이 한순간에 날카로워진 이유를 몰랐지만 일단 급히 따라붙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모님이 택시를 타고 행사장에 가게 둘 순 없었다.그럼 사람들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행사장 입구에 도착한 남설아는 핸드폰을 조용히 집어넣고 곧장 미소를 띠며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순간 천기준은 절망했다.‘대체 누가 기자들을 부른 거야?!’‘방금까지만 해도 대표님과 사모님이 금슬 좋은 부부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한 사람만 덩그러니 등장하다니. 이건 대놓고
“서유라 씨가 저보고 개래요. 대표님은 말리지도 않고 오히려 저를 때리려고 했어요.”천기준은 말할수록 억울함이 북받쳤다.명문대 출신에 수년간 배서준을 따라 일해 왔건만 돌아오는 건 모욕뿐이라니, 그것도 제대로 된 사과나 공정한 대우조차 받을 수 없다니.‘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일하는 사람도 사람인데, 감정도 있고, 자존심도 있는데!’“뭐요?”남설아는 그 말을 듣고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설마 이런 이유였단 말이야? 진짜로 이 일 때문이었어?’배서준은 지금 서유라한테 완전히 미쳐버린 상태였다.이젠 이성이 마비됐는지 자기 옆에서 가장 오래 함께한 사람을 모욕하는 걸 그냥 두고 보질 않나?진짜 머리에 뭐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아니, 분명 어딘가 고장이 난 게 틀림없었다.“걱정 마요. 이번 일은 내가 기억해둘게요. 언젠가 꼭 되갚아줄 겁니다.”“지금 당장 회사 최근 5년간의 핵심 자료가 필요해요. 구할 수 있어요?”이미 서로 손을 잡기로 한 이상 남설아는 더는 멋쩍게 굴 필요가 없었다.이젠 파트너이니 필요한 건 당연히 요구할 수 있었다.천기준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구할 수 있어요. 시간이 조금 필요하긴 한데 내일 밤까지 드릴게요.”이렇게 말하고 일어선 천기준은 망설이다가 남설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저 이제부터 설아 씨 편이에요. 그 말은 곧 배 대표님을 배신하겠단 뜻이죠. 모두가 배신자를 어떻게 보는지 저도 잘 알아요. 그리고 설아 씨도 목적 달성하면 절 옆에 두지 않을 거란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전 돈이 필요해요. 멀리 떠나서 새 인생 시작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요.”사실 남설아는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더 좋았다.뒤에서 어정쩡하게 기회만 노리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았다.결국 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200억. 일 끝나면 200억 줄게요. 멀리 떠나서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예요.”“감사합니다, 남 대표님!”천기준은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솔직히 처음엔 남설아 성격상 많아야 몇억을
바보도 아닌데 서유라가 천기준의 말에 담긴 냉소와 비아냥을 못 알아챌 리 없었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천 비서님은 그냥 서준이 옆에 붙어 다니는 개일 뿐이잖아요! 근데 감히 나한테 이빨을 드러내요? 일하기 싫어진 모양이죠?”그러자 천기준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무표정하게 대꾸했다.“죄송합니다, 서유라 씨. 저는 배 대표님의 개가 아니라 비서거든요. 개가 좋으시면 대표님께 새로 한 마리 사달라고 하시죠.”서유라는 천기준이 이렇게까지 대들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라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뺨을 올려쳤다.하지만 천기준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번에 붙잡고 차갑게 말했다.“서유라 씨, 선은 지키시죠.”그 순간 병실에 들어선 배서준이 이 장면을 보자마자 성큼 다가와 천기준을 가로막았다.그러고는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대표님, 서유라 씨가 제 뺨을 때리려 했습니다.”천기준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고 곧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덧붙였다.“전 단지 제 몸을 방어했을 뿐입니다. 공격할 생각은 없었습니다.”서유라는 억울함과 분노에 눈이 뒤집힌 채로 배서준에게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서준아, 난 진짜 때리려던 게 아니었어... 하지만 저 사람이 계속 날 모욕했어.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왜 모두가 나한테 이래?”천기준은 이런 ‘울고 떼쓰고 매달리는’ 전형적인 서유라의 방식에 익숙했기에 담담하게 받아치듯 말했다.“병원 CCTV는 음성까지 녹음됩니다. 정말 억울하시다면 언제든지 확인하시면 됩니다.”이 말에 서유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배서준 품에 안긴 채 흐느끼는 것 외엔 더 할 말이 없었다.배서준도 바보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깊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한 명은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여자, 한 명은 오랜 시간 곁을 지켜온 비서.두 사람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배서준은 천기준의 이마를 살짝 손가락으로
“비켜!”배서준은 고함을 내질렀고 눈빛은 이미 싸늘하게 돌아서 있었다.하지만 간병인 안경희는 배서준이 누군지도 몰랐기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이봐요, 전 제 환자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요. 나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아주머니, 괜찮아요. 나가 계세요. 이 사람 제 남편이에요.”‘남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 남설아의 말투에선 명백한 비웃음이 묻어났다.그 말을 들은 안경희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남설아를 돌보며 봐왔던 남자는 언제나 강연찬이었고 이 무서운 얼굴의 남자가 남편이었다는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이렇게 험악하게 구는 남편이라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걱정스러운 얼굴로 남설아에게 물었다.“정말 경찰 안 불러도 괜찮아요?”“괜찮아요, 나가 계세요.”남설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안경희의 손등을 살며시 눌렀다. 진정시키려는 듯한 동작이었다.안경희는 코웃음을 치고 배서준을 노려보았다.“나 문 앞에 서 있을 거니까 손끝 하나라도 대 봐요, 바로 신고할 테니까! 멀쩡하게 생겨선 아내 때리는 놈이라니, 에잇!”그러고는 어깨로 배서준을 밀치며 씩씩하게 병실 밖으로 나갔다.안경희에게 호되게 당한 배서준의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그런 모습을 보며 남설아는 참지 못하고 속으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배서준 같은 사람한테 저런 대접은 평생 처음일 게 분명했다.“서준 씨, 지금 당신 꼴 좀 봐요. 진짜 미친 사람 같아요.”남설아는 몸을 조금 옆으로 틀어 가능한 한 그와 거리를 뒀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딱 하나만 묻겠어. 송우민이랑 아는 사이야?”배서준은 이를 악물고 남설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표정 하나하나를 다 읽어내려는 듯 의심과 긴장이 얽혀 있는 눈빛이었다.결혼 후 이렇게까지 그녀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선 안에서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남설아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역겨움을 느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모르는
“설아가 서도현이 한 짓이라고 했지. 너랑은 무슨 상관이야? 네 동생은 원래 하는 일 없이 빈둥대던 애였잖아. 엇나간 짓 좀 했다고 이상할 것도 없지.”배서준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옆에 있던 서유라는 그 말만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젠 자신이 배서준 마음속에서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걸.예전이라면 자신과 관련된 일에 이성이니 판단이니 그런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언제나 감정대로 움직였던 사람인데 지금은 이렇게까지 차분하다고? 이제는 날 신경도 안 쓰는구나.’“서준아, 설마... 날 사랑하지 않게 된 거야?”서유라는 억울함에 목소리가 떨렸고 눈물이 뚝 떨어졌다.“나도 내가 요즘 어떤지 알아. 진짜 미안해. 그런데도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너무 사랑해서 그래. 너 없이는 안 돼. 진짜 난 너 없으면 안 돼.”말을 하면서 그녀는 조수석에 몸을 웅크렸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그런 서유라의 모습에 한순간 마음이 약해진 배서준은 말투도 한결 누그러졌다.“너한테 화내려는 건 아니었어. 그리고 너 떠날 생각도 없어. 걱정하지 마.”“정말... 정말 믿어도 돼? 정말 날 떠나지 않을 거야?”서유라는 눈가가 촉촉히 젖은 채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그 눈을 마주한 순간, 배서준은 다시 마음이 무너져 내려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연하지, 바보야. 내가 어떻게 널 떠나.”어릴 때부터 줄곧 함께해온 사이였고 수십 년 동안 마음속에 그녀를 품어온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끊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둘은 말없이 차를 타고 해변가 별장까지 도착했다.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서유라는 비명을 지르더니 바로 배서준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배서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장에 매달린 서도현을 바라봤다. 피범벅이 된 몸을 본 순간,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당장 내려!”그의 명령에 별장 안의 도우미가 덜덜 떨며 서도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사람이 바닥에 닿는 순간, 서유라는 비로소 그게 자기
고통이 클수록 남설아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배서준은 병실을 나서자마자 서유라의 팔을 거칠게 붙잡더니 그대로 그녀를 끌고 자신의 차까지 갔다. 그러고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서도현한테 전화해.”“서준아?”서유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배서준을 바라봤다.“너 정말 설아 씨 말 믿는 거야? 진짜 도현이가 그랬다고 생각해?”“전화하라고.”배서준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한번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번엔 협의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었다.서유라는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억울함에 눈가가 벌겋게 물들었지만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들고 서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서도현은 손이 묶인 채 허공에 매달려 모진 매질을 당하고 있었다.“아아아아악!!”비명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간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이어졌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때 울려 퍼진 핸드폰 벨소리는 그에게 마치 천상의 소리처럼 들렸다.“형님! 형님! 저 돈 있어요! 전화 좀 받게 해주세요, 제발요!”서도현은 연신 울먹이며 애원했다. 이제는 정말 더는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전기태는 매질하느라 저린 손을 털며 짜증스럽게 말했다.“남자라는 놈이 여자나 패고 다니더니 이제 와선 우리한테 사정이나 하고 있어? 퉤! 네 그 몇 푼 더러운 돈 누가 신경이나 쓴대?”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힘껏 채찍을 내리쳤다.이제 진짜로 더 못 견딜 것 같았던 서도현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형님, 진짜 돈 있어요! 제발요! 제 몸에 260억짜리 수표 있어요! 다 드릴게요, 살려만 주세요. 제발요!”그 말에 전기태는 순간 멍해졌다.‘이런 놈이 260억짜리 수표를 들고 있었다고?’전기태는 곧장 그의 몸을 샅샅이 뒤졌고 정말로 그 수표를 꺼냈다. 한참을 확인한 뒤, 그는 곧바로 자기 부하에게 넘겼다.“야, 내가 널 완전 우습게 봤구나. 너 좀 있네?”“보아하니 그 여자한테서 꽤 많이도 뜯어냈구먼. 진짜 찌질함의 끝판왕이네.
“남설아, 나 정말 너랑 싸우기 싫어. 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그냥 솔직히 말해.”배서준은 피곤한 듯 미간을 주물렀다. 지금 회사는 전환의 중요한 시점에 있었고 하필이면 집안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앞뒤가 다 막혀 있는 상황에 그는 정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그런 배서준의 지친 모습을 바라보다가 남설아는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담담하게 말했다.“서준 씨, 나 당신이랑 이혼하고 싶어요. 공평하게, 내가 받아야 할 건 전부 다 받는 조건으로요.”“뭐라고?”배서준은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해봤다. 심지어 다시 아이를 가지는 것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바라던 게 결국 돈 챙겨서 떠나는 거였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그 순간 지금껏 참고 있던 인내심과 온화함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배서준은 성큼성큼 다가가 남설아의 목을 움켜잡았다.“이렇게까지 이혼을 서두르는 이유가 내 재산 나눠 가져서 결국 강씨 가문 그놈 도와주려는 거였어? 나쁜년... 대체 두 사람 언제부터 붙어먹은 거야!”분노로 가득 찬 남자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오자 남설아는 비웃음을 터뜨리며 냉소적으로 말했다.“결혼을 우습게 여긴 쪽은 당신이잖아요. 그런데도 이제 와서 나한테 뒤집어씌우겠다고요?”“남설아,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배서준의 손이 점점 더 힘을 주기 시작했다.숨이 막히기 시작하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남설아는 몸부림치다 상처가 당겨지는 고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그 눈물이 배서준의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분명 차가운 물방울인데 배서준은 마치 데인 듯한 느낌이 들어 손을 홱 빼버렸다.그는 천천히 몸을 세우고 눈물에 엉망이 된 여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복잡했다.오랜 세월 부부로 지내면서 온갖 모습을 봤다.교활하고 눈치 빠르고 요령 있게 사람을 다루는 모습들을 말이다.그가 제일 싫어하던 모습들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이렇게 무너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왜인지 모르게 남설아의 눈물이 똑 떨어질 때마다 마음 한구
남설아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그 모습이 어찌나 억울하고 안쓰러운지 배서준의 마음이 한순간 흔들렸다.서유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이제 대놓고 유혹하는 작전까지 쓰네?’배서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지는 걸 보자 서유라의 머릿속엔 경고등이 켜졌다.“서준아, 도현이는 절대 그런 짓 안 했어. 남 팀장이 거짓말하는 거야. 이건 명백한 명예훼손이라고!”“맞아, 맞아, 다 내 잘못이야. 유라 씨 말이 다 맞지.”남설아는 병아리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동의했다.그 말투, 그 표정에 또다시 화가 치밀어오른 서유라는 씩씩대며 성큼 다가와 이를 악물고 말했다.“설아 씨가 서준이 때문에 예전부터 나 싫어한 거 알아. 근데 날 싫어하면 날 미워하면 되지, 왜 하필 우리 동생이야? 걔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고! 설아 씨가 그렇게 대할 이유 없어!”“내가 걔한테 뭘 했다고 그래? 내가 때렸어? 욕이라도 했어?”남설아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리고 갈비뼈 쪽을 손으로 짚으며 배서준을 바라봤다.“당신은 당신 와이프한테 다른 여자가 소리 지르고 삿대질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 세상에 이런 남편이 또 있을까?”그가 ‘남편’이라는 신분으로 자기를 구속하려는 거라면 자신도 그대로 받아치면 되는 일이었다.‘남편’이라는 자리를 원한다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함께 감당해야 하는 게 아닐까?“유라야, 진정해. 나 혼자 얘기 좀 할게. 잠깐 나가 있어.”배서준은 서유라의 팔을 살짝 잡아끌며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서유라는 여전히 미련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결국 이를 갈며 남설아를 날카롭게 노려보고는 병실을 나섰다.서유라가 나가고 나자 병실엔 남설아와 배서준, 단둘만 남았다. 공기는 잠시 얼어붙은 듯 무거웠다.“치료비는 회사 보험으로 처리하면 돼.”배서준이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비록 법적으로는 부부고 아이도 있지만 이 둘은 서로를 잘 모른다. 대화도, 감정도, 공통의 언어도 거의 없었다.그 말을 들은 남설
배서준은 콧방귀를 뀌며 자기 정체부터 내세웠다. 아무리 봐도 이 상황에서 화낼 자격은 자신 쪽이 더 있다는 태도였다.그런 그의 모습에 강연찬은 더 말해봤자 시간 낭비라는 걸 직감했고 입꼬리만 살짝 비웃듯 올리며 말했다.“자기 위치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더 이상 자리만 차지하고 일도 안 하는 짓은 하지 마세요.”“강연찬 씨. 남의 가정 사이에 끼어들어 놓고 그렇게 떳떳합니까? 우리 집안 어른들이 알면 그쪽은 끝이에요.”배서준은 비웃듯 말하며 경고를 날렸다.“배건 그룹 대표란 인간이 고작 하는 짓이 어른한테 일러바치는 거라고요? 진짜 웃기네요. 유치하게.”강연찬은 한마디 남기고 남설아를 한 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병실을 나갔다.남설아는 조용히 앉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러 번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몸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눈을 들자마자 마주친 건 배서준의 날선 눈빛이었다.“내가 몇 번을 말했어? 넌 내 아내야. 배씨 가문 사모님이라고! 남자들이랑 밖에서 얽히지 말라고 했잖아! 창피하게 굴지 마!”“너랑 강연찬, 두 사람 도대체 무슨 사이야?”배서준은 이를 꽉 물고 남설아를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덮쳐 물어뜯을 기세였다.“맞아, 남 팀장.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아침부터 사람 기죽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설마 남편인 서준이를 이 정도로 무시할 줄은 몰랐네.”서유라까지 거들고 나섰는데 말끝엔 마치 남설아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통증도 심한 데다 두 사람의 짜증 나는 공세까지 들으니 남설아의 얼굴빛이 더 창백해졌다.그녀는 갈비뼈 부근을 감싸 쥐고 차분하지만 날이 선 눈빛으로 배서준을 바라봤다.“어젯밤에 왜 안 왔어요? 나 한참 기다렸다고요. 거기서 진짜 죽을 뻔했고요. 그건 알고 있어요?”“난...”배서준은 본능적으로 변명을 꺼내려 했지만 곧 그녀의 말뜻을 눈치채고는 찌푸린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소리야?”“당신이 준 주소로 가서 문을 열었더니 거기엔 서
송우민은 강연찬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자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는 늘 신사적인 인상만 남아 있었는데 이런 야성적인 기운은 처음 느껴졌다.하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은 송우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강연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걱정 마. 난 남의 아내한테 관심 없어.”배건 그룹 며느리가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사람이다.강연찬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선배 왔구나. 밥은?”병실에서 남설아는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눈만 감으면 온몸이 욱신거리고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유일한 위안은 강연찬의 도시락이었다.그녀의 먹을 것만 밝히는 모습에 강연찬은 부드럽게 웃으며 도시락을 테이블에 놓았다.“넌 참, 오직 먹을 생각뿐이지? 다 네가 좋아하는 거로 해왔어. 옥수수 수프도 끓였고.”“선배는 진짜 너무 좋아! 나 선배 사랑해!”“나중에 돈 많이 벌면 선배 내가 책임질게.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매일 밥만 해줘. 그럼 돼.”남설아는 신난 얼굴로 젓가락을 집어 들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그런 천진한 모습에 잠시 말을 망설이던 강연찬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송우민, 그 사람 너 보러 온 거야? 두 사람... 친한 거야?”“친하진 않아. 전에 나 납치했던 사람이야. 나중엔 살기 위해 서로 손잡은 거고.”남설아는 담담하게 말하고 나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근데 왜 다들 그 사람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꺼리더라? 그냥 애 같기만 하구만.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주변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를 모두 두려워하는 게 느껴졌다.그 말에 강연찬은 조급해졌다.“너 제발 그 사람 얼굴만 보고 착한 척하는 거에 속지 마. 겉보기엔 순둥이처럼 생겼지만 속은 냉혈한이야. 완전 미친놈이라고!”“미친놈이든 바보든 날 도와주면 내 친구야.”남설아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한 눈빛으로 강연찬을 바라봤다.“그 사람은 내 목숨 구해준 은인이야. 그 사람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