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남설아는 팔을 감싸 쥐며 굳은 얼굴로 서도현을 노려보았다.“대체 뭐 하는 거야!”서도현은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더욱 이를 갈며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거칠게 따귀를 날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옷깃을 단숨에 잡아 뜯었다.“너 남자가 필요하잖아. 그래서 우리 누나한테서 남자를 빼앗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거잖아? 그러니 오늘 우리가 제대로 상대해 주지!”그리고는 부하들에게 말했다.“얘들아, 다들 준비해. 이분이 바로 유명한 배 대표님의 사모님이야. 이 기회를 놓칠 수 있나!”서도현은 말하며 다시 한번 남설아의 뺨을 때린 뒤 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다.그들의 태도가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닫자 남설아는 겁에 질렸다. 손을 떨며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 했다.하지만 휴대폰을 막 꺼낸 순간, 누군가가 발로 차버려 바닥으로 날아갔다.그녀는 필사적으로 몸을 뻗어 다시 집으려 했지만, 서도현이 그녀의 손과 휴대폰을 신발로 거칠게 짓밟았다.“서도현, 이 미친놈! 당장 날 놔줘! 네가 오늘 함부로 한다면 절대 널 가만 안 둬!”남설아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붉히며 그를 노려보았다.하지만 서도현은 원래부터 양아치였다. 이미 이성을 잃었기에 그녀의 말 따위는 들을 생각도 없었다.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뺨을 때리고 남설아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거칠게 옷을 찢기 시작했다.“안 돼! 싫어!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남설아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소리쳤지만, 곧 여러 대의 따귀를 맞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입도 다른 놈이 벗어 던진 옷가지로 틀어막혀 이제는 비명조차 낼 수 없었다.한쪽에서는 서도현의 몇몇 부하들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며 흥분했다.남설아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가슴 부분의 옷이 서도현 때문에 거칠게 찢겨 나갔고 하얀 피부가 그대로 드러났다.“배 대표님이 왜 그렇게 꽂혀있었는지 알겠다. 확실히 볼만하네?”“하하하, 좋네요! 형님, 빨리 시작하세요. 형님이 시작하셔야 우리도 재밌게
남설아는 정신적으로 극심한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도 신체적으로는 비교적 양호했다. 모두 가벼운 찰과상이었다. 치료를 마친 후 경찰이 바로 찾아왔는데 경찰과 함께 온 사람은 서유라와 배서준이었다.“설아 씨, 모든 게 다 내 잘못이야. 화가 나면 나를 때리든 욕하든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내 동생은 괴롭히지 말아줘. 응? 아직 어린 애야. 앞으로 살아갈 날이 긴데 이번 일로 인생이 끝나 버리면 안 되잖아.”서유라는 말을 하면서 그대로 남설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녀의 다급한 모습에 남설아는 너무도 우스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 서유라는 마치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게 그녀가 자작극인 것처럼 말이다.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비웃음이 나왔다. 남설아가 막 입을 열려던 순간, 머리 위로 싸늘하고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원하는 걸 말해.”고개를 들자 배서준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 남설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는 이번 일조차도 자신의 수작이라고 여기고 있었다.어차피 그의 눈에 남설아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로 비치고 있었다.그의 태도에 남설아는 이제 더 이상 해명할 의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우스웠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배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뭐든 들어줄 거예요?”“그래.”배서준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넌 정말 변한 게 없구나. 어서 말해. 뭘 원해?”그 말투에는 깊은 경멸이 담겨 있었다. 마치 남설아가 지금까지 배씨 가문에서 얼마나 많은 이득을 챙긴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남설아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속에서 차오르는 씁쓸함을 삼켰다. 그리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배건 그룹 전체를 줘요. 그렇게 할 수 있어요?”“헛된 꿈은 그만 꾸지.”배서준은 단번에 잘라 말했다.남설아도 어차피 그가 응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서도현 하나 때문에 그녀와 이런 거래를 할 리가
서유라는 바닥에서 일어나 애처롭게 배서준을 바라보았다.“너도 알잖아, 내게는 친동생이 하나뿐이야. 만약 그 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도 살아갈 수 없을 거야! 서준아, 제발 도와줘. 설아 씨만 용서해 준다면 내가 뭐든지 할게.”말을 하던 서유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배서준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애교를 부렸다.그런 그녀를 보는 배서준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쉰 뒤, 결국 입을 열었다.“방법을 찾아볼게.”그녀에게 불만이 조금씩 싹트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온 사람이기에 본능적으로 그녀를 보호해 주고 싶었다.배서준의 대답을 들은 서유라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애원했다.“안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서준아, 제발 도와줘. 도현이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어. 그 아이는 몸에 무리가 가면 안 돼. 제발 부탁이야!”“알겠어.”배서준은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서유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눈빛에는 애틋함이 서려 있었다.“일단 집에 데려다줄게.”요즘 서유라는 더는 입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시간을 배서준과 함께 보냈다. 하지만 오늘은 배서준이 따로 볼일이 있어 그녀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한편, 강연찬은 멍들고 부어오른 얼굴로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보안팀에 전화를 걸었다.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시계를 벗고 상의 단추 두 개를 풀어 헤친 그는 이를 악문 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안내 데스크에서 배건 그룹의 대표님이 오셨다는 연락이 왔다.강연찬은 차가운 웃음을 띠며 말했다.“올라오라고 해.”잠시 후, 배서준이 거만한 태도로 들어왔다. 싸늘한 눈빛으로 강연찬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저희 집안 문제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집안 문제?”강연찬은 비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누가 당신 가족이에요? 그게 어떻게 집안 문제예요?”그러자 배서준은 조용히 서류를 꺼내 보이며 아리송한
남설아는 배서준의 생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강연찬이 아직 안에 있었기에 경찰서로 갈 수밖에 없었다.경찰서 정문에 도착하자마자 서유라가 미친 사람처럼 달려오더니 남설아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이 악랄한 년! 내 동생을 모함한 것도 모자라 이제 서준이까지 해칠 셈이야? 너 진짜 뻔뻔하구나!”“너 미쳤어?”남설아는 서유라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그대로 그녀의 뺨을 되갚아 치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소리 지르는 거야? 네 동생이 스스로 더러운 짓을 했으니 법의 심판을 받는 거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너, 너 당장 이거 놔!”서유라는 필사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지만, 남설아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남설아는 힘껏 서유라를 밀어내고 콧방귀를 뀌고는 경찰서 안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사모님, 드디어 오셨군요! 대표님께서…”천기준은 남설아를 보자마자 다급히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건넸다.하지만 남설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냉정하게 대답했다.“저는 연찬 오빠 보러 온 거예요. 배서준 씨는 걱정해 줄 사람이 뒤에 있어요.”그 말을 남기고 남설아는 천기준을 지나쳐 단호하게 걸어갔다.때마침 서유라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막 나가려던 천기준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서준이는요? 어디 있어요?”서유라의 다급한 목소리에 천기준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서유라 씨,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닙니다. 당신은 대표님을 풀어줄 자격이 없어요. 정말 대표님을 위한다면 그냥 돌아가세요.”“천기준 씨, 무슨 뜻이에요?”서유라는 눈썹을 찌푸리며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서준이가 지금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군지 기준 씨도 알잖아요? 그리고 남설아 그 여자 꼴 좀 봐요! 그 여자가 도와줄 것 같아요? 설마 서준이를 여기서 내버려 둘 생각이에요?”천기준의 속에서는 수많은 욕이 치밀어 올랐다. 서유라를 보고 있는 그의 눈에서 불이 뿜어나올 것 같았다.지금 배서준이 여기서 못
경찰이 남설아의 신분증을 확인한 뒤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런데 당신은 배서준 씨의 아내 아닌가요?”“맞아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혼 절차를 진행 중입니다. 배서준 씨의 일은 제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에요. 경찰관님, 일단 제 선배부터 석방해 주세요. 이런 곳에 온 적도 없는 사람이라 많이 불편할 거예요.”남설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식어버렸다. 특히 배서준을 대할 때는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배서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서유라가 재빨리 달려와 그를 끌어안으며 흐느꼈다.“서준아, 네가 정말 억울한 일을 당했어.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널 빨리 여기서 꺼내줄게. 반드시 널 구해낼 거야.”경찰은 원래 남설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서유라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애절하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자 상황을 단번에 깨달았다.더 이상 묻지도 않고 즉시 서류 작업을 진행했다. 보석금 100만 원을 낸 후, 경찰은 강연찬의 석방을 승인했다.그러면서 앞으로는 싸우지 말고 냉정하게 문제를 해결하라며 간단한 훈계를 덧붙였다.남설아는 가볍게 웃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직계 가족이 아니더라도 벌금만 내면 석방이 가능했다.그러니 배서준이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 자신을 빼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굳이 자신을 경찰서로 부른 건, 단순한 수작일 뿐이었다.자신이 그를 구해준 걸 빌미로 고마움을 강요하려던 속셈일 것이다.하지만 아쉽게도, 남설아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순진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의 술수를 누구보다도 분명히 꿰뚫고 있었다.배서준은 여전히 서유라에게 안겨 있었지, 그의 시선은 오직 남설아에게만 향해 있었다.그녀가 지금 보이는 모든 행동이 단순한 연기일 것이라고 그는 믿고 싶었다.그녀는 자신의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이렇게 행동하는 거다.그녀는 결국 돌아올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남설아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그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정말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청소 아주머니는 더욱 신이 나서 배서준을 향해 비꼬듯 말하며 빈정거렸다.배서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는 걸 보자 그녀는 만족스럽게 걸레를 챙겨 떠났다.오늘 하루 일한 보람이 제대로 느껴졌다.한편, 경찰들도 아주머니의 행동을 보고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그들은 평소 훈련 덕분에 웬만하면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배서준도 이 상황을 더 끌어봤자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그는 서유라의 손을 잡아끌며 빠르게 경찰서를 나섰다.오늘 하루 체면이며 자존심이며 몽땅 바닥에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배서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고 그 분노를 고스란히 서유라에게 쏟아냈다.그녀가 하이힐을 신고 있는지, 뒤따라올 수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오늘 일은 이쯤에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경찰서 문을 나서자마자 기자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카메라와 마이크가 앞다투어 그들을 향해 겨눠졌고 기자들은 경쟁하듯 질문을 쏟아냈다.“배 대표님, 이 아가씨와는 무슨 관계이신가요?”“여기에 온 이유가 뭔가요? 불법적인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최근 배건 그룹에 대한 루머가 사실인가요? 정말로 회사를 공매도하고 심지어 친딸까지 죽음에 몰아넣은 겁니까?”이 기자들은 오랜 경험을 쌓아온 베테랑들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지가 두려운 게 아니라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기사를 써내는 것이었다.그들의 날카로운 질문들은 마치 비수처럼 배서준과 서유라의 거짓된 가면을 단숨에 찢어버렸다.그나마 여유를 유지하던 서유라도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배서준의 등 뒤로 숨고 싶어졌다.하지만 늘 그녀를 감싸주던 배서준이 이번에는 그녀를 밀어냈다.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우린 그냥 친한 친구일 뿐입니다. 이 사람의 동생이 경찰서에 있어서 함께 온 것뿐이에요. 배건 그룹 내부 사정은 말씀드릴
이 기자들은 글 쓰는 실력은 둘째치고 분위기 띄우는 능력만큼은 최고였다. 이미 서유라가 이렇게 완벽한 장면과 논란거리를 제공했으니 그들이 쉽게 놓아줄 리 없었다.모두가 신이 나서 셔터를 미친 듯이 눌러댔다.서유라는 겉으로는 완벽하게 감정을 감췄지만, 양손은 이미 단단히 주먹을 쥔 상태였다.배서준이라는 남자가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건 진작 알았지만, 결혼도 하기 전에 이렇게까지 믿을 수 없는 존재일 줄은 몰랐다. 기자들이 모두 떠나기를 기다린 후, 서유라는 곧장 경찰서로 발걸음을 옮겼다.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서도현을 만났다.“누나, 날 좀 구해줘. 나 이거 다 누나 위해서 그런 거잖아. 누나가 꼭 구해줘야 해. 절대로 날 이대로 두고 가면 안 돼!”서도현은 마치 구원의 손길이라도 잡은 듯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본 서유라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은 한층 더 차갑게 변했다.“너 내가 지금 얼마나 큰 곤경에 빠진 줄 알아? 내가 도대체 왜 이런 멍청한 동생을 둬서는, 너는 하는 짓마다 짐만 되잖아. 너 한 게 대체 뭐가 있어? 뭐 하나 제대로 할 줄도 모르고 그냥 쓸데없는 쓰레기나 다름없다고!”서도현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미친 듯한 누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낯설고 두려운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그게 다 누나가 무능해서 그런 거 아냐? 그렇게 오래 붙어 있었으면서도 지금까지 그냥 불륜녀잖아. 누나가 사모님이었다면, 누가 감히 날 경찰서에 가둘 수 있었겠어? 결국 이것도 다 누나가 무능한 탓이잖아!”“미친놈이, 지금 누구한테 불륜녀라고 하는 거야!”서유라는 분노에 못 이겨 탁자를 내리쳤다. 그러나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경찰들에게 제지당해 결국 강제로 끌려 나왔다. 준비했던 말들을 한마디도 못 하고 쫓겨난 것이다.경찰서를 나서자마자 문 앞에 서 있는 천기준이 보였다. 서유라는 감정을 눌러 담고 억울하고 나약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하지만 천기준은 배서준 밑에서
병을 치료하러 병원에 간다지만 실상은 감금이나 다름없었고 배서준이 요즘 그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건 너무나도 분명했다.한편 남설아는 인터뷰 영상을 보자마자 비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화면 속 배서준을 바라보며 그녀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역시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어. 배서준은 서유라를 사랑하지 않고 나도 사랑하지 않아. 그가 사랑하는 건 오직 자기 자신, 그리고 그가 쥐고 있는 핵심적인 이익뿐이었어!’과거엔 모든 게 순조로웠기에 서유라가 최고의 선택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기에 이제 서유라의 자리도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배건 그룹은 지금 안팎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고 그가 회사의 자산을 빼돌린 사실까지 들통나면서 이사회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를 구할 수 있는 건 할아버지가 남긴 지분과 부부 관계뿐이었다.그래서 아무리 역겨워도, 아무리 삼키기 힘든 더러운 상황이라 해도 그는 이걸 견뎌야 했다.남설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강연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괜찮아?”“괜찮아, 그냥 돈 많은 사람들은 역시 유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남설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그래서 배서준이 저렇게 부자인 거지. 저렇게 유연하고 참을성이 좋으니까 말이야. 결국 돈을 벌 사람은 따로 있는 거야.’남설아의 태도에 강연찬이 살짝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설마 다시 배씨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지?”“맞아, 돌아갈 거야. 내가 원하는 걸 얻으려면 배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어.”“선배, 그동안 많이 도와줘서 고마워. 그리고 나 때문에 여러 번 곤란한 상황에 휘말렸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우리 둘 다 아직 배서준을 상대할 힘이 없어. 설령 끝장을 보겠다고 덤벼도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그래서 난 잠시 숨을 죽이고 기회를 기다려야 해. 선배가...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얼마나 뻔뻔한 일인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지금 그녀가 손을 내밀 수 있는
“서유라 씨가 저보고 개래요. 대표님은 말리지도 않고 오히려 저를 때리려고 했어요.”천기준은 말할수록 억울함이 북받쳤다.명문대 출신에 수년간 배서준을 따라 일해 왔건만 돌아오는 건 모욕뿐이라니, 그것도 제대로 된 사과나 공정한 대우조차 받을 수 없다니.‘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일하는 사람도 사람인데, 감정도 있고, 자존심도 있는데!’“뭐요?”남설아는 그 말을 듣고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설마 이런 이유였단 말이야? 진짜로 이 일 때문이었어?’배서준은 지금 서유라한테 완전히 미쳐버린 상태였다.이젠 이성이 마비됐는지 자기 옆에서 가장 오래 함께한 사람을 모욕하는 걸 그냥 두고 보질 않나?진짜 머리에 뭐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아니, 분명 어딘가 고장이 난 게 틀림없었다.“걱정 마요. 이번 일은 내가 기억해둘게요. 언젠가 꼭 되갚아줄 겁니다.”“지금 당장 회사 최근 5년간의 핵심 자료가 필요해요. 구할 수 있어요?”이미 서로 손을 잡기로 한 이상 남설아는 더는 멋쩍게 굴 필요가 없었다.이젠 파트너이니 필요한 건 당연히 요구할 수 있었다.천기준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구할 수 있어요. 시간이 조금 필요하긴 한데 내일 밤까지 드릴게요.”이렇게 말하고 일어선 천기준은 망설이다가 남설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저 이제부터 설아 씨 편이에요. 그 말은 곧 배 대표님을 배신하겠단 뜻이죠. 모두가 배신자를 어떻게 보는지 저도 잘 알아요. 그리고 설아 씨도 목적 달성하면 절 옆에 두지 않을 거란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전 돈이 필요해요. 멀리 떠나서 새 인생 시작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요.”사실 남설아는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더 좋았다.뒤에서 어정쩡하게 기회만 노리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았다.결국 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200억. 일 끝나면 200억 줄게요. 멀리 떠나서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예요.”“감사합니다, 남 대표님!”천기준은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솔직히 처음엔 남설아 성격상 많아야 몇억을
바보도 아닌데 서유라가 천기준의 말에 담긴 냉소와 비아냥을 못 알아챌 리 없었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천 비서님은 그냥 서준이 옆에 붙어 다니는 개일 뿐이잖아요! 근데 감히 나한테 이빨을 드러내요? 일하기 싫어진 모양이죠?”그러자 천기준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무표정하게 대꾸했다.“죄송합니다, 서유라 씨. 저는 배 대표님의 개가 아니라 비서거든요. 개가 좋으시면 대표님께 새로 한 마리 사달라고 하시죠.”서유라는 천기준이 이렇게까지 대들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라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뺨을 올려쳤다.하지만 천기준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번에 붙잡고 차갑게 말했다.“서유라 씨, 선은 지키시죠.”그 순간 병실에 들어선 배서준이 이 장면을 보자마자 성큼 다가와 천기준을 가로막았다.그러고는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대표님, 서유라 씨가 제 뺨을 때리려 했습니다.”천기준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고 곧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덧붙였다.“전 단지 제 몸을 방어했을 뿐입니다. 공격할 생각은 없었습니다.”서유라는 억울함과 분노에 눈이 뒤집힌 채로 배서준에게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서준아, 난 진짜 때리려던 게 아니었어... 하지만 저 사람이 계속 날 모욕했어.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왜 모두가 나한테 이래?”천기준은 이런 ‘울고 떼쓰고 매달리는’ 전형적인 서유라의 방식에 익숙했기에 담담하게 받아치듯 말했다.“병원 CCTV는 음성까지 녹음됩니다. 정말 억울하시다면 언제든지 확인하시면 됩니다.”이 말에 서유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배서준 품에 안긴 채 흐느끼는 것 외엔 더 할 말이 없었다.배서준도 바보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깊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한 명은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여자, 한 명은 오랜 시간 곁을 지켜온 비서.두 사람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배서준은 천기준의 이마를 살짝 손가락으로
“비켜!”배서준은 고함을 내질렀고 눈빛은 이미 싸늘하게 돌아서 있었다.하지만 간병인 안경희는 배서준이 누군지도 몰랐기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이봐요, 전 제 환자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요. 나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아주머니, 괜찮아요. 나가 계세요. 이 사람 제 남편이에요.”‘남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 남설아의 말투에선 명백한 비웃음이 묻어났다.그 말을 들은 안경희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남설아를 돌보며 봐왔던 남자는 언제나 강연찬이었고 이 무서운 얼굴의 남자가 남편이었다는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이렇게 험악하게 구는 남편이라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걱정스러운 얼굴로 남설아에게 물었다.“정말 경찰 안 불러도 괜찮아요?”“괜찮아요, 나가 계세요.”남설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안경희의 손등을 살며시 눌렀다. 진정시키려는 듯한 동작이었다.안경희는 코웃음을 치고 배서준을 노려보았다.“나 문 앞에 서 있을 거니까 손끝 하나라도 대 봐요, 바로 신고할 테니까! 멀쩡하게 생겨선 아내 때리는 놈이라니, 에잇!”그러고는 어깨로 배서준을 밀치며 씩씩하게 병실 밖으로 나갔다.안경희에게 호되게 당한 배서준의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그런 모습을 보며 남설아는 참지 못하고 속으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배서준 같은 사람한테 저런 대접은 평생 처음일 게 분명했다.“서준 씨, 지금 당신 꼴 좀 봐요. 진짜 미친 사람 같아요.”남설아는 몸을 조금 옆으로 틀어 가능한 한 그와 거리를 뒀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딱 하나만 묻겠어. 송우민이랑 아는 사이야?”배서준은 이를 악물고 남설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표정 하나하나를 다 읽어내려는 듯 의심과 긴장이 얽혀 있는 눈빛이었다.결혼 후 이렇게까지 그녀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선 안에서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남설아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역겨움을 느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모르는
“설아가 서도현이 한 짓이라고 했지. 너랑은 무슨 상관이야? 네 동생은 원래 하는 일 없이 빈둥대던 애였잖아. 엇나간 짓 좀 했다고 이상할 것도 없지.”배서준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옆에 있던 서유라는 그 말만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젠 자신이 배서준 마음속에서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걸.예전이라면 자신과 관련된 일에 이성이니 판단이니 그런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언제나 감정대로 움직였던 사람인데 지금은 이렇게까지 차분하다고? 이제는 날 신경도 안 쓰는구나.’“서준아, 설마... 날 사랑하지 않게 된 거야?”서유라는 억울함에 목소리가 떨렸고 눈물이 뚝 떨어졌다.“나도 내가 요즘 어떤지 알아. 진짜 미안해. 그런데도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너무 사랑해서 그래. 너 없이는 안 돼. 진짜 난 너 없으면 안 돼.”말을 하면서 그녀는 조수석에 몸을 웅크렸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그런 서유라의 모습에 한순간 마음이 약해진 배서준은 말투도 한결 누그러졌다.“너한테 화내려는 건 아니었어. 그리고 너 떠날 생각도 없어. 걱정하지 마.”“정말... 정말 믿어도 돼? 정말 날 떠나지 않을 거야?”서유라는 눈가가 촉촉히 젖은 채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그 눈을 마주한 순간, 배서준은 다시 마음이 무너져 내려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연하지, 바보야. 내가 어떻게 널 떠나.”어릴 때부터 줄곧 함께해온 사이였고 수십 년 동안 마음속에 그녀를 품어온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끊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둘은 말없이 차를 타고 해변가 별장까지 도착했다.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서유라는 비명을 지르더니 바로 배서준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배서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장에 매달린 서도현을 바라봤다. 피범벅이 된 몸을 본 순간,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당장 내려!”그의 명령에 별장 안의 도우미가 덜덜 떨며 서도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사람이 바닥에 닿는 순간, 서유라는 비로소 그게 자기
고통이 클수록 남설아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배서준은 병실을 나서자마자 서유라의 팔을 거칠게 붙잡더니 그대로 그녀를 끌고 자신의 차까지 갔다. 그러고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서도현한테 전화해.”“서준아?”서유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배서준을 바라봤다.“너 정말 설아 씨 말 믿는 거야? 진짜 도현이가 그랬다고 생각해?”“전화하라고.”배서준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한번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번엔 협의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었다.서유라는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억울함에 눈가가 벌겋게 물들었지만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들고 서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서도현은 손이 묶인 채 허공에 매달려 모진 매질을 당하고 있었다.“아아아아악!!”비명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간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이어졌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때 울려 퍼진 핸드폰 벨소리는 그에게 마치 천상의 소리처럼 들렸다.“형님! 형님! 저 돈 있어요! 전화 좀 받게 해주세요, 제발요!”서도현은 연신 울먹이며 애원했다. 이제는 정말 더는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전기태는 매질하느라 저린 손을 털며 짜증스럽게 말했다.“남자라는 놈이 여자나 패고 다니더니 이제 와선 우리한테 사정이나 하고 있어? 퉤! 네 그 몇 푼 더러운 돈 누가 신경이나 쓴대?”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힘껏 채찍을 내리쳤다.이제 진짜로 더 못 견딜 것 같았던 서도현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형님, 진짜 돈 있어요! 제발요! 제 몸에 260억짜리 수표 있어요! 다 드릴게요, 살려만 주세요. 제발요!”그 말에 전기태는 순간 멍해졌다.‘이런 놈이 260억짜리 수표를 들고 있었다고?’전기태는 곧장 그의 몸을 샅샅이 뒤졌고 정말로 그 수표를 꺼냈다. 한참을 확인한 뒤, 그는 곧바로 자기 부하에게 넘겼다.“야, 내가 널 완전 우습게 봤구나. 너 좀 있네?”“보아하니 그 여자한테서 꽤 많이도 뜯어냈구먼. 진짜 찌질함의 끝판왕이네.
“남설아, 나 정말 너랑 싸우기 싫어. 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그냥 솔직히 말해.”배서준은 피곤한 듯 미간을 주물렀다. 지금 회사는 전환의 중요한 시점에 있었고 하필이면 집안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앞뒤가 다 막혀 있는 상황에 그는 정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그런 배서준의 지친 모습을 바라보다가 남설아는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담담하게 말했다.“서준 씨, 나 당신이랑 이혼하고 싶어요. 공평하게, 내가 받아야 할 건 전부 다 받는 조건으로요.”“뭐라고?”배서준은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해봤다. 심지어 다시 아이를 가지는 것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바라던 게 결국 돈 챙겨서 떠나는 거였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그 순간 지금껏 참고 있던 인내심과 온화함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배서준은 성큼성큼 다가가 남설아의 목을 움켜잡았다.“이렇게까지 이혼을 서두르는 이유가 내 재산 나눠 가져서 결국 강씨 가문 그놈 도와주려는 거였어? 나쁜년... 대체 두 사람 언제부터 붙어먹은 거야!”분노로 가득 찬 남자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오자 남설아는 비웃음을 터뜨리며 냉소적으로 말했다.“결혼을 우습게 여긴 쪽은 당신이잖아요. 그런데도 이제 와서 나한테 뒤집어씌우겠다고요?”“남설아,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배서준의 손이 점점 더 힘을 주기 시작했다.숨이 막히기 시작하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남설아는 몸부림치다 상처가 당겨지는 고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그 눈물이 배서준의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분명 차가운 물방울인데 배서준은 마치 데인 듯한 느낌이 들어 손을 홱 빼버렸다.그는 천천히 몸을 세우고 눈물에 엉망이 된 여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복잡했다.오랜 세월 부부로 지내면서 온갖 모습을 봤다.교활하고 눈치 빠르고 요령 있게 사람을 다루는 모습들을 말이다.그가 제일 싫어하던 모습들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이렇게 무너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왜인지 모르게 남설아의 눈물이 똑 떨어질 때마다 마음 한구
남설아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그 모습이 어찌나 억울하고 안쓰러운지 배서준의 마음이 한순간 흔들렸다.서유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이제 대놓고 유혹하는 작전까지 쓰네?’배서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지는 걸 보자 서유라의 머릿속엔 경고등이 켜졌다.“서준아, 도현이는 절대 그런 짓 안 했어. 남 팀장이 거짓말하는 거야. 이건 명백한 명예훼손이라고!”“맞아, 맞아, 다 내 잘못이야. 유라 씨 말이 다 맞지.”남설아는 병아리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동의했다.그 말투, 그 표정에 또다시 화가 치밀어오른 서유라는 씩씩대며 성큼 다가와 이를 악물고 말했다.“설아 씨가 서준이 때문에 예전부터 나 싫어한 거 알아. 근데 날 싫어하면 날 미워하면 되지, 왜 하필 우리 동생이야? 걔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고! 설아 씨가 그렇게 대할 이유 없어!”“내가 걔한테 뭘 했다고 그래? 내가 때렸어? 욕이라도 했어?”남설아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리고 갈비뼈 쪽을 손으로 짚으며 배서준을 바라봤다.“당신은 당신 와이프한테 다른 여자가 소리 지르고 삿대질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 세상에 이런 남편이 또 있을까?”그가 ‘남편’이라는 신분으로 자기를 구속하려는 거라면 자신도 그대로 받아치면 되는 일이었다.‘남편’이라는 자리를 원한다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함께 감당해야 하는 게 아닐까?“유라야, 진정해. 나 혼자 얘기 좀 할게. 잠깐 나가 있어.”배서준은 서유라의 팔을 살짝 잡아끌며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서유라는 여전히 미련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결국 이를 갈며 남설아를 날카롭게 노려보고는 병실을 나섰다.서유라가 나가고 나자 병실엔 남설아와 배서준, 단둘만 남았다. 공기는 잠시 얼어붙은 듯 무거웠다.“치료비는 회사 보험으로 처리하면 돼.”배서준이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비록 법적으로는 부부고 아이도 있지만 이 둘은 서로를 잘 모른다. 대화도, 감정도, 공통의 언어도 거의 없었다.그 말을 들은 남설
배서준은 콧방귀를 뀌며 자기 정체부터 내세웠다. 아무리 봐도 이 상황에서 화낼 자격은 자신 쪽이 더 있다는 태도였다.그런 그의 모습에 강연찬은 더 말해봤자 시간 낭비라는 걸 직감했고 입꼬리만 살짝 비웃듯 올리며 말했다.“자기 위치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더 이상 자리만 차지하고 일도 안 하는 짓은 하지 마세요.”“강연찬 씨. 남의 가정 사이에 끼어들어 놓고 그렇게 떳떳합니까? 우리 집안 어른들이 알면 그쪽은 끝이에요.”배서준은 비웃듯 말하며 경고를 날렸다.“배건 그룹 대표란 인간이 고작 하는 짓이 어른한테 일러바치는 거라고요? 진짜 웃기네요. 유치하게.”강연찬은 한마디 남기고 남설아를 한 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병실을 나갔다.남설아는 조용히 앉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러 번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몸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눈을 들자마자 마주친 건 배서준의 날선 눈빛이었다.“내가 몇 번을 말했어? 넌 내 아내야. 배씨 가문 사모님이라고! 남자들이랑 밖에서 얽히지 말라고 했잖아! 창피하게 굴지 마!”“너랑 강연찬, 두 사람 도대체 무슨 사이야?”배서준은 이를 꽉 물고 남설아를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덮쳐 물어뜯을 기세였다.“맞아, 남 팀장.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아침부터 사람 기죽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설마 남편인 서준이를 이 정도로 무시할 줄은 몰랐네.”서유라까지 거들고 나섰는데 말끝엔 마치 남설아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통증도 심한 데다 두 사람의 짜증 나는 공세까지 들으니 남설아의 얼굴빛이 더 창백해졌다.그녀는 갈비뼈 부근을 감싸 쥐고 차분하지만 날이 선 눈빛으로 배서준을 바라봤다.“어젯밤에 왜 안 왔어요? 나 한참 기다렸다고요. 거기서 진짜 죽을 뻔했고요. 그건 알고 있어요?”“난...”배서준은 본능적으로 변명을 꺼내려 했지만 곧 그녀의 말뜻을 눈치채고는 찌푸린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소리야?”“당신이 준 주소로 가서 문을 열었더니 거기엔 서
송우민은 강연찬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자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는 늘 신사적인 인상만 남아 있었는데 이런 야성적인 기운은 처음 느껴졌다.하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은 송우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강연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걱정 마. 난 남의 아내한테 관심 없어.”배건 그룹 며느리가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사람이다.강연찬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선배 왔구나. 밥은?”병실에서 남설아는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눈만 감으면 온몸이 욱신거리고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유일한 위안은 강연찬의 도시락이었다.그녀의 먹을 것만 밝히는 모습에 강연찬은 부드럽게 웃으며 도시락을 테이블에 놓았다.“넌 참, 오직 먹을 생각뿐이지? 다 네가 좋아하는 거로 해왔어. 옥수수 수프도 끓였고.”“선배는 진짜 너무 좋아! 나 선배 사랑해!”“나중에 돈 많이 벌면 선배 내가 책임질게.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매일 밥만 해줘. 그럼 돼.”남설아는 신난 얼굴로 젓가락을 집어 들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그런 천진한 모습에 잠시 말을 망설이던 강연찬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송우민, 그 사람 너 보러 온 거야? 두 사람... 친한 거야?”“친하진 않아. 전에 나 납치했던 사람이야. 나중엔 살기 위해 서로 손잡은 거고.”남설아는 담담하게 말하고 나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근데 왜 다들 그 사람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꺼리더라? 그냥 애 같기만 하구만.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주변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를 모두 두려워하는 게 느껴졌다.그 말에 강연찬은 조급해졌다.“너 제발 그 사람 얼굴만 보고 착한 척하는 거에 속지 마. 겉보기엔 순둥이처럼 생겼지만 속은 냉혈한이야. 완전 미친놈이라고!”“미친놈이든 바보든 날 도와주면 내 친구야.”남설아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한 눈빛으로 강연찬을 바라봤다.“그 사람은 내 목숨 구해준 은인이야. 그 사람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