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찬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그저 잠시 해외로 연수를 다녀온 것뿐인데 그사이에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질 줄 말이다.외국에 있을 때, 남설아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다는 소식을 들고 그는 정말 한동안 술에 절어 살았다.애초에 혼자만의 짝사랑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왠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지금은 그 이야기를 이어갈 때가 아니었다.“일단은 쉬어. 지금 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있어. 며칠 푹 쉬고 컨디션이 좀 나아지면 나 찾아와. 그때 내가 직접 회사로 데려가서 입사 절차 밟게 해줄게.”강연찬은 가볍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손길은 따뜻했고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남설아는 그 모습에 가슴 깊숙이 작은 불씨 하나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희망이라는 불씨 말이다.하지만 그 불씨는 금세 사그라졌다.‘나에게 그런 걸 꿈꿀 자격이 있을까?’그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 남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돌아서서 낡은 집으로 들어가며 남설아는 스스로를 다독였다.소파에 앉아 한숨을 내쉬며 문득 생각했다.애초에 자신은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배서준과도 같은 세계에서 살아온 적 없었고 강연찬과는 더더욱 아니었다.우연한 계기로 배서준과 결혼하고 배나은을 낳았지만 결국 모든 걸 잃었다.이제 모든 게 끝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혼자가 되었다는 것이었다.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다.남설아는 손을 뻗어 고쳐 붙인 사진을 꺼냈다.그러고는 부모님의 영정 옆에 조심스럽게 배나은의 사진을 놓았다.사진 속 나은이는 여전히 밝게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를 짓는 작은 생명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었다.조금이라도 쉬려 했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이 시간에 누가 찾아올 리 없는데.’남설아는 짜증 섞인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리고 곧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마주했다.서유라였다.그녀는 허락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서유라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남설아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고 가까이 다가섰다.“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나랑 비교해? 도대체 네가 뭐라고!”“나랑 서준이는 천생연분이야. 그쪽은 그냥 침대에 기어오른 천한 년일 뿐이야. 그쪽이 낳은 딸도 마찬가지고!”더는 참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 참을 필요조차 없었다.남설아는 온몸의 힘을 담아 서유라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어서 머리카락을 거칠게 틀어쥐고 그녀의 머리를 배나은의 사진 앞에 힘껏 박아버렸다.“아악! 남설아, 감히 날 때려?”“놔! 당장 놔!”서유라는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남설아는 그녀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감정을 품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엄마가 분노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서유라는 끝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남설아는 머리채를 세차게 잡아당긴 채 서유라의 무릎을 걷어찼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뒷목을 단단히 눌러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았다.뭐든 말할 수 있지만 나은이만큼은 절대 입에 올려선 안 된다.“미쳤어? 미친년!”서유라는 세 번이나 이마를 바닥에 세게 부딪친 끝에야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그대로 되갚아주려 했지만 남설아가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내가 떠났다고 해서 네가 배서준의 아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과연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몰랐나 본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을 어떻게 정리했는지 알아? 배건 그룹의 51% 지분이 아직도 내 거라는 걸 알고는 있니?”이건 결혼 당시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남긴 보장이었다. 남설아는 배서준을 사랑했기에 한 번도 이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관계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원래라면 배씨 가문의 재산 따위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은이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서유라는 배서준을 믿고 남의 아이 앞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었다.참을 수 없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이 파렴치한 남녀는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악랄했다.한 명은 위기에
서유라는 배서준의 목에 팔을 감고 조용히 속삭였다.“이게 다 서준이 너를 위해서야. 만약 그 여자가 꼼수를 부려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안 찍으면 어쩌려고?”“서준아, 우리 여기까지 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내가 너를 곤란하게 만드는 건 정말 싫어.”말을 하던 서유라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사실 나도 알아.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떳떳한 건 아니라는 거.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널 떠나고 싶지 않고 떠날 수도 없어.”울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경련까지 일어났다.배서준은 그녀의 상태를 보자마자 긴장하며 발걸음을 재촉해 병원으로 향했다.곧바로 그는 최고의 전문의를 불러 서유라를 진찰하게 했다.“대표님, 서유라 씨의 정서가 최근에 상당히 불안정합니다. 우울증이 재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이미 신체 증상까지 나타나고 있는데 이대로 두면 예전처럼 악화될 겁니다. 서유라 씨가 안정될 수 있도록 대표님께서 방법을 찾아보셔야 합니다.”의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배서준을 바라보았다.그 말을 듣자 배서준의 얼굴빛이 미묘하게 변했다.서유라의 감정이 왜 이렇게 불안정한지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었다.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남설아를 반드시 오게 하라고 지시했다.하지만 이미 이혼한 상태였으니 당연히 남설아가 협조할 리 없었다.비서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 성격 잘 아시잖아요. 안 가시면 또 난리가 날 겁니다.”그렇다. 배서준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오직 자신의 입장만 생각할 뿐 타인의 감정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남설아는 처음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떠오르는 그 계약서가 그녀의 마음을 바꿔놓았다.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요. 그렇게까지 보고 싶다면 가 줘야죠. 다만 나중에 후회만 하지 않으면 좋겠네요.”더 이상 이런 일로 감정이 흔들릴 줄 몰랐지만 직접 눈앞에서 마주하니 예상보다 더 쓰라렸다.여러 명의 전문가들이 서유라 한 사람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그리고 배
남설아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예전엔 부부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제 각자의 길을 가야 할 상황에서 모든 걸 확실하게 정리해야 했다.배서준은 눈앞의 여자가 낯설게만 느껴졌다.예전에는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주워들고 한 장 한 장 살펴보자 그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졌다.“이럴 리가 없어!”“돈에 눈이 멀더니 결국 이런 짓까지 서슴지 않는 거야? 감히 서류를 위조하다니!”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손을 뻗어 남설아의 목을 움켜잡았다.눈빛에는 분노와 위협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남설아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배건 그룹 법무팀의 수준이 어떤지는 서준 씨가 더 잘 알 텐데요?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당신이랑 부부로 지낸 세월이 있으니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생각은 없지만 받아야 할 건 확실히 받아야겠어요.”남설아는 단호하게 그의 손을 쳐냈다.한때는 그가 그렇게도 멋져 보였다.잘생기고 키 크고 능력까지 뛰어난 남자였으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보니 그 모든 겉모습 아래에는 썩어 문드러진 정신이 도사리고 있었다.진절머리가 났다.‘어떻게 이런 인간을 사랑했던 걸까?’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역시 사랑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남설아, 이런 짓을 한다고 내가 다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해?”비웃음을 터트린 배서준은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바닥에 내던졌다.“설령 이 서류가 진짜라고 해도 그게 뭐?”“이 꼴을 하고서 대체 뭘 할 수 있는데? 네가 무슨 수로 날 이기겠다는 거야? 주제도 모르고 지분을 운운하다니, 꿈도 참 크다.”새장 속의 새인, 자신이 가둬둔 여자가 감히 하늘을 날겠다고 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처럼 보였다.경멸하는 듯한 뻔뻔한 태도가 확실했다.그리고 그제야 남설아는 완전히 깨달았다.이 남자의 눈에 자신은 그저 배씨 가문의 온실 속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힘없는
서유라는 배서준과 결혼하면 그야말로 평생 안락한 삶이 보장될 줄 알았다.하지만 이렇게 중간에 뜻밖의 변수가 등장할 줄이야!‘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서유라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처음부터 배건 그룹이 배서준 손에 없는 줄 알았다면 그를 유혹할 게 아니라 남설아를 꼬셨을 것이었다.‘그토록 애써 손에 넣은 결과가 고작 빈 껍데기라니.’배서준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유라야, 지금 기분은 어때?”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눈빛 속엔 질문이 섞여 있었다.서유라는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늘 그래왔듯 빠르게 감정을 정리하고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서준아, 난 괜찮아. 제발... 제발 더 이상 설아 씨랑 싸우지 마.”“설아 씨는 항상 말한 건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잖아. 네가 날 위해 너무 많은 걸 잃게 될까 봐 걱정돼.”그 말이 떨어지자 배서준의 표정이 한순간에 부드러워졌다.바로 이거였다.그는 여자가 자신의 말에 따르고 의존하는 걸 좋아했다.그가 원하는 건 강한 여자가 아니라 순종적인 여자였다.배서준은 곧장 서유라를 품에 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그깟 주식 몇 개 있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회사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지금까지 빨래하고 밥하는 것밖에 할 줄 몰랐던 여자가 회사에서 뭘 할 수 있겠어?”그에게 남설아는 집안일을 해주는 기계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이제 와서 무슨 능력이 있다고 주식 운운하는지 우스울 뿐이었다.이상한 점을 느껴왔기에 배서준은 오래전부터 대비책을 세워두고 있었다.그 말에 서유라는 안심하며 더욱 그의 품에 매달렸다.“서준아, 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그냥 이렇게 너랑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바보야, 우린 이미 함께 있잖아.”배서준은 만족스러운 듯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병원을 나선 남설아의 눈빛은 전보다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그냥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그렇게 한다면 나은이의 죽음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배서준이 이미
남설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서류를 받아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강연찬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걸 어떻게 알고 있었어?”“나 원래 이쪽 일 했잖아. 이런 정보 찾는 건 어렵지 않아.”강연찬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며 외식용 도시락을 열었다.이렇게 뻔뻔하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남설아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이제는 제법 성숙하고 듬직해졌지만 여전히 어딘가 어린애 같은 면이 남아 있었다.“하늘이 무너져도 밥은 먹어야지. 일단 먹자. 먹고 나서 천천히 이야기하자.”그는 젓가락을 내밀며 웃었다.이 며칠 동안 강연찬은 늘 남설아 곁을 지켰다. 그의 배려는 마치 스며드는 이슬처럼 조용하고 은은했지만 남설아는 그 섬세한 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가 건네는 젓가락을 바라보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들을 보며, 남설아의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예전엔 자신이 집에서 배서준을 기다리고 그를 챙기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배서준은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밥을 먹었는지 신경 쓴 적이 있었던가?사랑과 무관심은 확연히 드러나는 법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심지어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못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고마워.”남설아는 살짝 미소를 짓고 젓가락을 받아들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한 입 먹자마자 그녀는 이 음식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코끝이 살짝 시큰해지며 조용히 물었다.“이거... 학교 식당 밥이야?”“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억하네?”강연찬이 웃으며 말했다.“역시 넌 똑똑해.”남설아는 어이가 없어 웃으며 솔직히 말했다.“이렇게 맛없는 걸 어떻게 잊어?”학교 식당 음식이 원래 맛있을 리 없었고 그들이 다녔던 대학은 특히나 더 심했다. 솔직히 말해 그땐 하루에도 몇 번씩 불평했었다.하지만 지금 이렇게 다시 먹어보니 음식 맛은 그대로인데 정작 변한 건 그녀 자신이었다.어느새 그 시절이 그리워지고 심지어 이 맛마저 익숙하고 애틋하게 느껴졌다.그러나 몇 입을 더 먹던 남설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음식을 뱉고
그는 정말 몰랐다. 미리 알았더라면 절대 남설아를 남겨두고 혼자 고생하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남설아는 휴지를 집어 들어 눈물을 닦은 뒤 목이 메인 채로 말했다.“오빠는 우리 나은이가 얼마나 좋은 아이인지 몰라서 그래. 나은이는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선물이야. 잘못한 건 나야. 내가 아이의 시간을 지체시켰고 내가 아이를 힘들게 만들었어. 우리 나은이는 죽기 직전까지도 내 손을 꼭 잡고 있었어.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를 걱정했어!”“배서준, 그 개자식...!”“나은이가 아팠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방치했어! 충분히 일찍 병을 치료할 수도 있었는데 그냥 눈앞에서 아이가 죽어가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고!”“그런 놈이 무슨 아빠야? 인간 자격조차 없는 놈이라고!”남설아의 눈빛에는 깊은 원망이 서려 있었다.어릴 때부터 사랑과 미움을 분명히 하는 성격이었고 배서준과 몇 년을 함께하며 모나지 않게 변했어도 타고난 강단은 그대로였다.“그럼 가만두지 마.”강연찬이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도와줄게.”그가 이번에 돌아온 건 남설아 때문이었다.그러니 더 이상 그녀가 상처받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내가 알기로... 배서준은 그동안 배건 그룹을 정성껏 운영해 온 것 같지만 사실 바깥에 세 개의 자회사를 세워서 몰래 자산을 빼돌리고 있어.”“보아하니 오래전부터 어르신의 유언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다만 내색하지 않았을 뿐. 너와 이혼하지 않은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거야.”강연찬은 이미 모든 조사를 마친 상태였기에 배서준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는 남설아에게 서류 한 장을 건넸다.“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배건 그룹의 초기 주주야. 명단과 개인 정보가 정리돼 있으니 잘 봐둬. 네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생각해 둬야 해. 한 달 뒤에 열릴 중간 주주총회에는 모든 사람이 참석할 테니까.”말해야 할 것은 다 말했다.이제 구체적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는 남설아에게 달려 있었다.“오빠...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고 있는 거야?”“배건 그룹,
‘그래, 맞아.’배서준을 만나기 전 남설아는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이었다.배서준의 아내로 살아가는 무능한 배씨 가문 사모님이 아니라 말이다.하지만 배서준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단 한 번도 제대로 바라봐주지 않았다.배서준의 눈에 남설아는 그저 배씨 가문의 덕을 보고 사는 한심한 존재일 뿐이었다.그러나 여자의 능력을 얕보는 것만큼 큰 실수는 없다.남설아는 강연찬이 말하는 자신의 과거를 듣자 마치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여전히 자신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묘하게 가슴이 찡했다.“선배, 정말 고마워. 아직도 내가 빛나던 시절을 기억해 줘서.”본인조차도 거의 잊고 있던 것들을 누군가는 이렇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넌 언제나 잘 해왔어. 그리고 네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다시 빛날 수 있어.”“설아야, 난 널 믿어.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뜨겁고도 깊은 눈빛으로 강연찬은 남설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아이의 엄마가 된 이상, 이런 눈빛과 이런 목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남설아는 손을 천천히 빼더니 미안하다는 듯 강연찬을 바라봤다.마음속은 이미 커다란 파도가 치고 있었지만 지금은 감정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지금의 남설아는 너무 많은 것들을 감당해야 했다.그녀의 그런 태도에 강연찬은 살짝 실망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그래서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그녀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으니 말이다.“그럼... 이거 다 치울 거야?”강연찬이 테이블 위의 음식 포장 용기들을 가리키며 물었다.솔직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곁에 있어봤자 소용없는 것처럼, 이렇게 맛없는 음식은 왜 굳이 먹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남설아는 말없이 음식들을 한 손에 들더니 단번에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그리고 강연찬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내가 화끈하게 샤부샤부 한 끼 살게.”이건 남설아의 다짐이자 태도였다.배서준이 그렇게 무정하고 이기적이라면 그녀 또한
“고마워요, 그런데 제가 여러분한테 맡긴 업무는 어떻게 됐나요?”남설아는 한원준이 건넨 꽃다발을 안고는 자신이 지시했던 업무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본 직원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렸다.남설아가 이제 막 퇴원한 상황인데도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업무라니, 정말 예상 밖이었다.사람들은 마치 보물 자랑하듯 자신이 맡은 작업 결과물을 하나씩 꺼내서 남설아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모두 기술 쪽에 능한 사람들이라 약간의 실수는 있었지만, 전반적인 방향은 잘 잡혀 있었다. 남설아는 모두의 자료를 꼼꼼히 확인한 후 자리에 앉아 직접 계산과 검토에 들어갔다.한편, 배서준은 온몸에 먼지를 묻힌 채 분노에 찬 얼굴로 기술팀에 들어섰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본 광경은 전 직원이 조용히 집중해서 일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남설아도 예외는 아니었다.자신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상태인데 모두가 일에 몰두하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만 부적절하게 튀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민망해졌다.배서준의 얼굴이 굳은 걸 본 한원준과 몇몇 남직원들은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설아가 막 퇴원한 만큼 또다시 일이 생길까 봐 무의식적으로 보호하려는 반응이었다.자신이 월급을 주는 사람들이 전부 남설아 편에 선 걸 실감한 배서준은 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폭발할 수도 없었다.결국 그는 코웃음을 치며 남설아를 매섭게 노려본 뒤, 말없이 돌아서서 나갔다.그 과정 내내 남설아는 한 번도 고개를 들어 그를 보지 않았다. 화가 나서 들어오는 것도 차가운 반응도 전부 무시했다. 왜냐하면 남설아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서준이 아무리 사적인 감정으로 날뛰더라도 적어도 회사 업무에는 선을 넘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배서준이 떠난 뒤,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남설아에게 다가와 속삭였다.“팀장님, 진짜 대단하신 것 같아요. 대표님처럼 기세 강한 사람 앞에서 표정 하나 안 바뀌다니요.”“익숙해지면 괜찮아. 근데
남설아의 깔끔하고 단호한 행동을 본 천기준은 거의 감탄을 금치 못했다.지금 남설아가 이렇게까지 성장했다는 사실이 정말 믿기지 않았다.그는 남설아가 그냥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일 줄로 알았지만, 그녀는 되려 정면으로 반격하는 행동을 보였다.놀란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천기준과 눈이 마주치자 남설아는 살짝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제 정당한 권리는 지켜도 되는 거죠?”“그럼요, 당연하죠. 당연히 지켜야죠.”천기준은 바로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제야 남설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먼저 가요. 회사에 일도 있고 저 사람들 기다릴 필요 없어요.”“그런데 우리 차는 한 대뿐이잖아요?”“저 사람들은 택시 타고 오겠죠.”남설아는 운전석 문을 열고 앉으면서 천기준을 힐끔 바라봤다.“천 비서님도 택시 타실래요? 택시비는 회사에서 안 나올 텐데요?”천기준은 바보가 아니었다. 굳이 눈앞에 있는 차를 두고 택시를 탈 이유도 없고 더군다나 운전석도 자신이 아닌 남설아가 차지하고 있는데 굳이 말썽 피울 이유도 없었다.그는 바로 조수석 문을 열고 조심스레 탔다.“팀장님, 운전은 하실 줄 아시죠?”천기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운전면허 따고 나서 두세 번 정도 해봤어요.”남설아는 웃으며 대답했고 곧바로 시동을 걸고 차를 도로 위로 내달렸다.배서준과 서유라는 막 서류를 마치고 나와서 딱 차가 떠나는 순간을 보게 되었다. 눈앞 주차장이 텅 비어 있는 걸 확인한 두 사람의 얼굴은 동시에 어두워졌다. 서유라는 배서준의 소매를 잡고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준아, 설아 씨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내가 전화해서 차 부를게.”배서준은 냉랭한 얼굴로 회사 다른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두 사람은 차가 도착할 때까지 무려 30분 넘게 바람맞으며 서 있어야 했다.배서준은 어릴 적부터 이런 굴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오늘 자신을 이렇게까지 창피하게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남설아였다. 예전엔 언제나 자신 눈치만 보던 그 여자가 이제는 완전히 달
서유라는 원래 눈빛으로 기선 제압하려던 중이었지만 남설아가 이렇게 단순하고 거칠게 자기를 대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얼굴빛이 확 변했고 배서준이 나오는 걸 곁눈질로 보자마자 바로 태도를 바꿔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설아 씨, 내가 좀 멀미가 심해서 앞자리에 앉은 건데 너무 화내지 마.”“운전하면 되잖아? 그것도 앞자리니까.”남설아는 팔짱을 낀 채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서유라를 바라봤다.“그건...”서유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남설아를 바라봤다. 이 여자의 논리가 이렇게 치밀하고 말 한마디로 사람을 말문이 막히게 만들 줄은 정말 몰랐다.“서준 씨는 오늘 아주 바쁘잖아. 유라 씨는 원래 눈치 빠르지 않았어? 여기서 시간 낭비하고 있을 틈이 있나? 멀미 심하면 유라 씨가 운전해. 난 내가 앉아야 할 자리에 앉아야겠어.”남설아는 더 이상 서유라의 연기에 관심 없다는 듯 소독 물티슈를 꺼내 조수석 시트를 꼼꼼하게 닦고는 툭 하고 자리에 앉았다.그 행동을 본 서유라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배서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준아, 나 그냥 택시 타고 갈게.”“타, 같이 가.”배서준은 뒷좌석 문을 열며 서유라를 향해 한마디만 했다.그제야 서유라는 오늘 조수석은 포기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불만은 가득했지만, 이 자리에서 억지 부리면 더 손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를 악물고 조용히 뒷자리에 올라탔다.배서준도 뒷자리에 타면서 조용히 서유라의 손을 잡아주었고 그때 천기준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그는 아무 말 없이 순순히 운전석 문을 열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차를 몰고 부동산 계약 장소로 향했다.서유라는 처음엔 자신이 완전히 밀렸다고 생각했지만, 배서준이 자기 손을 꼭 잡은 걸 보고 곧 깨달았다. 이 사람은 이미 계획을 해두었다.그러자 그녀는 곧 연약한 척 배서준 어깨에 기대며 부드럽게 말했다.“서준아, 나 좀 어지러워.”역겹기 짝이 없었다.남설아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저렇게 가증스러운 여자가 뭐가 좋은지 이해가
배서준이 제일 싫어하는 건 남설아가 다른 남자에게 웃는 거였다. 그것도 하필이면 강연찬이라니 더 화가 났다.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강연찬 앞에서 남설아의 허리를 확 감싸 안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순간 방 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하지만 강연찬의 눈에는 배서준의 행동이 유치하게만 보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 방해하지 않을게.”“거기 서요. 앞으로 내 아내 앞에서 얼쩡대지 마요.”배서준은 남설아의 허리를 감싼 채 강연찬을 향해 경고했다.“아내? 배 대표님이 말 안 했으면 몰랐겠네요. 설아가 그쪽 아내였어요?”강연찬은 인내심을 가지고 멈춰 섰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그대로 웃어버렸다. 그리고는 가볍게 말했다.“설아가 병원에 입원한 일주일 동안 난 매일 찾아왔고 직접 요리도 해줬어요. 배 대표님은요? 얼굴 한 번 안 비췄잖아요. 그런데 감히 설아가 그쪽 아내라고요?”“당신!”배서준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본능적으로 남설아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이런 상황에서도 배서준은 꿋꿋하게 말했다.“그건 우리 부부 사이 문제에요. 그쪽이 참견할 일 아니죠.”“두 사람 부부 문제는 나랑 상관없죠. 하지만 내 후배 문제는 내가 그냥 넘길 수 없어요. 배 대표님, 착각하지 마요. 내가 신경 쓰는 건 그쪽이 아니에요. 정말 우습네요.”그 말을 남기고 강연찬은 돌아섰다. 그 뒷모습은 마치 전투에서 이긴 장군처럼 당당했다.남설아는 그런 강연찬의 유치한 승리감에 실소를 터뜨렸다.‘아니, 이 사람 대학교 때보다 더 애 같아졌네?’“남설아, 넌 정말 아내로서 해야 할 도리를 모르는구나. 넌 내 배서준의 아내고 배건 그룹 사모님이라고. 다른 남자랑 이렇게 당당하게 다니다니, 배씨 가문 체면은 생각 안 해?”그는 남설아를 거칠게 밀어내고 따지듯 말했다. 하지만 남설아는 그런 질문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서준 씨는 서유라 허리 휘감고 세상 다 돌아다
서유라는 화가 나서 컵을 몇 개나 집어 던졌다. 그런 누나의 모습에 서도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별것도 아닌 천한 년이잖아. 매형 돈은 곧 누나 돈인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걔한테 넘겨주다니? 누나, 내가 나서서 그 여자 제대로 혼쭐내줄까?”서유라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서도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제발 신중하게 해. 괜히 설쳐서 또 손해 보는 일 없게. 알겠지?”“걱정하지 마. 그냥 여자 하나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지.”서도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난번 교도소에 갔다 온 것도 결국 그 여자 때문이라는 생각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번엔 진짜 예전 일까지 싸잡아서 복수해주겠다고 이를 갈았다.그렇게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그동안 남설아는 병원에서 아주 얌전히 요양 생활했다. 몸도 많이 회복돼서 살도 약간 올랐다.강연찬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꽃다발을 들고 남설아가 퇴원할 때 병원에 찾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는 마침 남설아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을 때였다. 하얀 등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위에는 선명하고 끔찍한 상처 자국이 있었다. 피부 대부분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나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강연찬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얼굴 끝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하지만 남설아는 등을 돌린 상태였고 보여준 건 단지 뒷모습뿐이라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휘저으며 담담히 말했다.“다 입었어요. 돌아보세요.”비록 등 한쪽을 본 것뿐인데도 강연찬은 자꾸 괜한 상상을 하게 됐다.하얀 등이 눈앞에 아른거리다 남설아의 얼굴과 겹치니 마음속의 작은 불씨가 더 활활 타올랐다.강연찬은 어색하게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다.“퇴원 축하해.”“고마워요, 오빠. 근데 오늘 월요일이라 바쁠 텐데 어떻게 시간 냈어요?”남설아는 꽃을 받아들며 고개를 살짝 기울여 강연찬을 궁금하다는 듯 바라봤다.강연찬은 앞으로 성큼 다가와 USB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연훈 그룹에서 우리한테 요구한 기술자료야. 우
배서준은 자신이 남설아에게 결정타를 날렸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위협은 남설아 눈에는 그저 웃기는 소리일 뿐이었다.심지어 남설아는 가끔 배서준의 사고방식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건지 궁금했다.예전에는 자신이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진짜 연애에 눈먼 건 배서준 쪽 같았다.인제 와서 이 모든 일이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라고 생각한다니, 정말 뻔뻔함도 이런 뻔뻔함이 없다.남설아는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고 바로 자리에 누워 병실에서 평온한 요양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한편 차 안에서는 서유라가 조심스럽게 배서준을 바라보며 작게 물었다.“서준아, 우리 이제 어떻게 해?”“그깟 돈 좀 주면 어때.”배서준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배건 그룹은 어쨌든 수천억을 움직이는 대기업이고 고작 260억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부부 사이였기에 돈이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넘어가는 것과 다름없었다.오히려 본가가 진짜로 정리돼 버린다면 그 피해는 자신들이 입게 되고 그 순간 상류사회 전체의 웃음거리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서유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어떻게 배서준이 남설아에게 260억이나 그냥 줄 수가 있지? 대체 뭔 자격으로 그런 걸 받아?’그녀는 그동안 배서준 옆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뒷말과 차별을 감내했는데 그렇게 받은 돈을 다 합쳐도 260억의 10분의 1도 안 됐다.그녀는 처음으로 느꼈다. 배서준의 사랑이라는 건 결국 허상일 뿐이었다.배서준은 그런 서유라의 눈빛 속 못마땅한 감정을 알아채고는 안쓰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기분 풀어. 너 바닷가 별장 좋아했잖아. 월요일에 명의 이전할 때 그 별장 네 이름으로 해줄게, 어때?”예전 같았으면 별장을 받는다는 건 큰 선물이었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260억이라는 금액을 본 이상, 별장은 그냥 구걸하는 사람에게 던져주는 적선 같았다.그래도 서유라는 놀란 척을 하며 환하게 웃고 배서준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역시 서준이 너뿐
배서준은 제일 먼저 바닥에 무릎 꿇은 서유라를 일으켜 세우고는 곧장 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나랑 맞서겠다는 거야?”“우린 그저 비즈니스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거예요. 난 당신이 정한 방식에 맞춰서 하고 있을 뿐인데 그마저도 안 되는 거예요?”남설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치 아무 잘못도 없는 듯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배서준 씨, 우리 사이에서 가장 어이없는 얘기가 감정이란 거 서준 씨도 알잖아요.”“남설아, 내가 나은이의 유골을 파내서 갈아버릴 수도 있다고 하면 믿겠어?”배서준은 갑자기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남설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가장 아꼈던 게 그 못된 계집아이이니 한번 해보자는 의미였다.남설아는 이미 이 남자의 냉혹함을 충분히 겪어봤다.지금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걸로 끝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나은이 살아있을 때도 제대로 신경 쓰지 않았잖아요. 죽은 지금은 더더욱 그렇죠. 내가 왜 당신 말을 못 믿겠어요? 유골을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사람이 죽으면 그냥 죽은 거죠. 누가 그런 걸 신경 써요?”남설아는 웃기 시작했다. 크게 웃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정말 웃기네요. 나은이가 아플 때 1억을 달라고 부탁했을 때는 한 푼도 안 주더니 인제 와서 아이의 유골을 들먹이며 260억을 아끼려 들다니요. 서준 씨 같은 사람 눈에는 도대체 뭐가 값지고 뭐가 쓸모없는 건데요?”“너!”배서준은 눈에 핏발이 서며 이성을 잃었고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들어 남설아의 목을 움켜잡았다. 완전히 마지막 인내심마저 무너진 듯 그는 남설아의 목을 세게 조이며 감출 수 없는 살의를 드러냈다.“네가 그 유언장 하나 들고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아?”“그래도 서준 씨처럼 사람 목 조르는 것보단 낫죠.”남설아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며 비웃었다. 예전엔 자신이 너무 착하고 순해서 이런 사람에게 눌려 살았던 거였다.하지만 이제 나은이도 이 세
윤화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세상에서 제일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듯 소리 내 비웃었다.“아버지가 있다는 걸 기억하긴 하네.”“됐어요. 지금 당장 집 문제부터 처리하러 갈게요.”배서준은 더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사방이 불바다란 말이 자기 인생을 이렇게 정확하게 설명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흐느끼고 있는 서유라를 바라보며 죄책감과 무력감에 잠겼다.“괜찮아?”“괜찮아. 사실 어머님 말씀도 틀린 건 없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했어. 서준아, 나 진짜 설아 씨한테 널 돌려주고 싶어. 근데 어떡해, 난 정말 그게 안 돼. 널 사랑해. 너 없으면 안 돼. 정말 너 없이 살아야 한다면 난 죽을지도 몰라.”서유라는 절박하게 배서준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그 눈빛 속엔 거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과 의존이 가득했다.그리고 배서준이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이런 병적인 의존과 소유욕이었다. 이런 감정만이 자신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해줬기 때문이다.그는 서유라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넌 날 절대 잃지 않아, 바보야.”“서준아, 나 무서워.”서유라는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애교를 부렸다.그녀도 사실 마음속으로 꽤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설마 남설아가 진짜 저렇게까지 뒤집을 줄은 몰랐다. 가문 전체를 본가에서 내쫓다니, 생각보다 너무 대담했다.배서준은 곧 서유라를 데리고 남설아의 병실로 향했다.강연찬은 회사에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병실 안에는 남설아 혼자였다. 그녀는 배서준이 찾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유라까지 같이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보아하니 유라 씨한테는 정말 정이 깊으신가 봐요. 이런 상황까지 와서도 굳이 함께 오다니요?”남설아는 손을 꼭 잡은 채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서준 씨, 애초에 나를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나랑 결혼했어요? 내가 아이를 가졌을 때 왜 지우라고 말하지 않았죠? 결혼하기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어머님, 진정하세요.”서유라는 윤화진의 허리를 단단히 안으며 가까스로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넌 비켜!”윤화진은 서유라를 거칠게 밀쳐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네가 우리 아들 유혹한 그 요망한 년이란 거 모를 줄 알아? 우리 집안 꼴이 지금 뭐가 됐는지 봐! 인제 와서 착한 척은 집어치워. 염치도 없구나!”“이게 웬 난리예요?”배서준이 성큼성큼 걸어와 모두 사이에 몸을 막아섰다. 모자를 쓴 중년 사내는 옷깃을 정리하며 배서준을 매섭게 바라봤다.“당신이 배건 그룹의 대표죠? 이름 있는 사람이라더니, 가족은 왜 이렇게 교양이 없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타인의 부동산을 불법 점유 중이라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일주일 안에 이 집에서 나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법적으로 대응하겠습니다.”‘뭐라고?’배서준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여긴 배씨 가문의 본가였다.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 집에서 자라왔다. 그런데 무단 점유라니.“경찰이 오해한 거 같은데요? 여긴 우리 집입니다.”배서준은 눈썹을 세게 찌푸리며 이게 누가 장난을 친 건지 의심했다. 하지만 경찰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증거를 꺼내 들었다.“부동산 등기부입니다. 이 집의 정식 소유주는 남설아 씨로 등록돼 있어요. 이 정도면 이해가 되셨겠죠?”그제야 배서준은 문득 생각났다.할아버지 유언장에서 이 집은 이미 남설아에게 넘긴 상태였다. 하지만 그동안 남설아는 한 번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은 거야?’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러니까 지금 남설아가 경찰에 신고했다는 겁니까?”“그렇습니다. 일주일 안에 반드시 퇴거하십시오.”경찰은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돈 많은 사람이라고 고상할 줄 알았는데, 다 거기서 거기네. 아주 막무가내야.’“서준아, 설아 씨가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너무 심한 거 아니야?”“배서준! 이게 네가 그렇게 감싸던 아내야? 지금 이 상황 어떻게 할 건데?”서유라와 윤화진은 거의 동시에 외쳤다.서유라의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