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라는 사람이 제대로 못 하면 당연히 욕 좀 먹는 게 맞죠. 천 비서님처럼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욕하는 거야 당연한 권리예요. 솔직히 나도 욕하고 싶다니까요?”남설아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근데 욕만 해서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괜히 말 잘못했다가 자기만 손해니까요.마음 좀 가라앉히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잘 생각해봐요.”“아, 맞다. 아까 보니까 보너스 깎였다고 했죠? 걱정 마요. 그건 내가 챙겨줄게요. 직원이 실망하면 안 되잖아요, 안 그래요?”남설아는 조용히 걸어와 물티슈를 뽑아 들더니 책상 위에 쏟아진 커피 자국을 말끔히 닦아냈다.‘어차피 어디 가든 일하는 건 마찬가지지. 누구 밑에서 일하든.’천기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뭔가 생각에 잠겼다.사무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남설아는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고 그 사실이 오히려 천기준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남설아는 알고 있었다.자신이 기술팀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 보너스는 문제없이 나갔을 거라는 걸.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자신이 기술팀에 있고 서유라는 배서준의 곁에 있다.그러니 배서준이 마음이 있어도 서유라가 어떻게든 막으려 들것이었다.직장인들의 공통된 목표는 결국 ‘돈’이다.보너스가 날아간다면 팀원들의 태도는 순식간에 달라질 수밖에 없다.그렇게 판단한 남설아는 아예 자기 돈을 털어 보너스를 지급했다.“선배님, 이제 막 오셨는데 보너스를 먼저 챙겨주시다니... 진짜 감동이에요!”한원준은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신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다른 직원들 역시 함박웃음을 지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예전보다 더 많은 금액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오늘이 제가 입사 첫날인데 마침 보너스 지급 시기랑 겹쳐서요. 두 가지를 한 번에 축하해야죠. 오늘 저녁, 다 같이 샤브샤브 먹으러 가요! 제가 쏩니다.”남설아가 핸드폰을 흔들며 말했다.“와아아!”기술팀은 다시 한번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남 팀장님 만세!”“남 팀장님, 저희 진짜 사랑합니다!”기술팀은 어느 때보다도
예전이었으면 남설아는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걱정해서 도와주려고 하는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서유라의 비꼬는 말투가 무슨 뜻인지는 남설아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서유라를 신경 쓰지도 않고 곧장 배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서준 씨도 그렇게 생각해요?”“회사에 출근하는 이상 직원으로서 회사 규정을 따라야 해. 특별 대우는 있을 수 없어.”배서준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배서준의 그런 모습을 본 남설아는 코웃음을 치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좋아요. 그렇다면 대표님께서도 솔선수범해 주세요. 내가 알기로는 내가 오기 전부터 이미 기술팀에 보너스를 지급하기로 약속된 상태였어요. 그런데 오늘 결재 서류를 올렸을 때 서준 씨가 거부했죠. 그건 무슨 뜻이죠? 내가 기술팀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현재 업무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요. 그러니 명확한 설명을 해주세요. 이 보너스가 도대체 뭐가 규정에 어긋난다는 거죠?”남설아는 한 마디 한 마디 논리를 펼쳐가며 말했다. 공사 구분해서 업무를 본다고 하니, 그야말로 반가운 소리다. “그런 게 아니야. 서준이는 너무 바빴을 뿐이야. 일부러 지급을 안 한 게 아니라고. 아무리 직원들 마음을 사서 좋은 평판을 얻고 싶다고 해도 이렇게 월권행위를 해서는 안 되지.”서유라는 한숨을 쉬며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배건 그룹을 위해 걱정하는 줄로 오해할 것이다. “나는 내 돈으로 보너스를 지급했어. 이게 회사 규정을 어긴 건가? 나를 문제 삼으려고 온 거라면 먼저 사실부터 정확히 조사하는 게 맞지 않아? 재무팀에 가서 내 지출 증빙과 결재 서류를 확인해 봤어? 아니면 회사 장부에서 돈이 사라지기라도 했나?”남설아는 코웃음을 치며 말하고는 자신의 계좌 이체 명세를 꺼내 보였다. 이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녀를 몰아세웠지만, 그녀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었다.‘본인 돈이라고?’서유라는 그 말을 듣자마자 믿을 수 없다는 듯 남설아를 쳐다봤다.“
“서준 씨, 지금 여기서 비서랑 이렇게 쓸데없이 얽매일 시간은 있으면서 정작 보너스 서류는 결재할 시간이 없어요? 이게 대표이사가 할 짓이에요?”남설아는 서유라에게 쏘아붙인 후 다시 배서준에게 시선을 돌렸다.“지금 당장 결재해요. 보너스는 한 푼도 빠짐없이 지급해야 합니다.”“남설아, 그렇게 날 몰아붙일 필요는 없어. 보너스야 별거 아니지만, 계약을 못 따내게 되면 네가 계속 이렇게 날뛸 수 있을지 두고 보겠어.”배서준은 콧방귀를 뀌며 남설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서유라의 손을 잡아끌고는 자리를 떠났다.서유라는 새침하게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가는 내내 훌쩍였다.“서준아,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너까지 난처하게 만들었어. 하지만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 그저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설아 씨가 아직도 우리한테 앙심을 품고 있어. 게다가 저렇게 많은 걸 쥐고 있으니, 너한테 해코지할까 봐 너무 걱정돼.”서유라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눈물을 흘렸고 얼굴엔 깊은 자책과 억울함이 서려 있었다.“남설아가 가진 것들로는 나를 건드리지 못해.”배서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에게는 그것들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결국 배씨 가문의 재산은 배씨 가문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남설아 같은 외부인은 단 한 푼도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이다.그 말을 들은 서유라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남설아가 할아버지에게서 금고 두 개를 상속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질투심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회사 지분은 당장 현금으로 쓸 수 없지만, 금고 안에는 진짜 돈이 있을 것이다.그 생각이 들자, 서유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할아버지의 금고는 원래 네 것이어야 해. 설아 씨가 뻔뻔하게 그걸 차지한 거야. 서준아, 다 내 잘못이야. 나만 없었더라면 설아 씨가 널 이렇게 괴롭히지는 않았을 텐데.”“바보야, 남설아가 뭔데 어떻게 나를 괴롭힌다는 거야?”배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서유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됐어. 걱정하지
휴대폰으로 전송된 사진을 확인한 남설아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이제는 쓰레기만도 못한 저 두 남녀가 어떤 애정 행각을 벌인다 한들, 더 이상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한심한 남자와 저급한 여자, 아주 천생연분이다.비록 이 사진이 지금 당장은 별다른 힘을 가지진 않겠지만 필요한 순간에 적절히 풀어준다면 꽤 괜찮은 동정표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남설아는 사진을 바로 저장해 두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조금 전의 소란 때문에 기술팀 내부 분위기가 어딘가 묘하게 변해 있었다.회사 사람들은 남설아와 배서준이 부부 관계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비록 대부분이 이과 출신이라 사내 소문에 둔감하긴 했지만, 이 정도의 큰 이슈는 귀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오늘, 배서준이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서는 남설아를 몰아세우고 오히려 그 여자 편을 들며 감싸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자기 남편이 이러는 모습을 본다면 누가 됐더라도 속이 상할 것이다.하여 모두 남설아를 위로해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남설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더 집중해서 업무를 보고 있었고 이전보다 더 몰입하는 듯 보였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원준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한참을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팀장님, 괜찮으세요?”“제가 왜요? 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혹시 보너스 때문에 하는 말이면 걱정하지 말아요. 그건 저의 작은 성의일 뿐만 아니라 팀원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에요.”남설아는 미소를 지으며 방금 일어난 일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어차피 망신당한 쪽은 그녀가 아니라 그 두 사람이었다.배서준은 이제 서유라를 위해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회사 규정을 무시하고 회사에 들여놓은 것도 모자라 아예 그녀가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회사 전체가 엉망이 될 것이다.그런 생각이 들자, 남설아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지금 회
그녀는 전혀 거만한 태도가 없었고 전체적으로 매우 소탈했다. 심지어 식사하러 온 가난한 대학생들과도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어? 이런 우연이! 설아도 여기 있었어?”강연찬은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밖에서 걸어 들어왔고 손에는 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히아신스꽃을 들고 있었다.“남 팀장님, 혹시 밥 좀 얻어먹어도 될까요?”장난스럽고도 다정한 그의 모습에 남설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밥은 얻어먹어도 되지만 식기는 혼자서 가지고 와요.”그러면서 히아신스를 자연스럽게 받아서 자신의 옆에 두었다. 하지만 일부러 그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지금 그들은 라이벌 관계에 있는 회사 소속이었고 같은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다들 젊은 기술자들이라 금세 어울려 분위기가 활기를 띠었다.남설아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자, 사양하지 말고 마셔요. 마음껏 먹고 마시자고요. 오늘은 제가 쏩니다.”그때 배서준이 서유라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이 장면을 본 그는 순간 넋이 나갔다.눈앞의 남설아는 생기 넘치고 활기찼다. 그런 모습은 배서준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였다. 분명 자신이 그녀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둘 사이에는 한때 아이도 있었고 오랜 시간 부부로 지내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배서준은 그녀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어쩌면 그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남설아는 그저 착각에 불과했던 것일지도 모른다.“설아 씨도 여기 있었어? 나... 몰랐어.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누나, 사과는 무슨 사과야. 누나랑 무슨 상관인데? 여기에 남설아만 있는 것도 아니고 강연찬도 있잖아?”서도현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배건 그룹이 사업 전환을 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주원 그룹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남설아가 기술팀 전체를 데리고 강연찬과 함께 식사하고 있다니, 대체 무슨 의도란 말인가.배서준의 시선
이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하지만 강연찬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시계를 한 번 흘깃 보더니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남은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다음에 다시 봐요.”그리고는 남설아를 보며 말했다.“설아야, 먼저 갈게. 잘 먹고 좋은 시간 보내.”강연찬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뻗어 배서준을 지나쳐 남설아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다정하고 익숙한 태도였다.둘 사이에 특별한 신체 접촉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 자연스러운 친밀함은 배서준의 주먹을 조용히 움켜쥐게 했다.옆에 서 있던 서유라는 더욱 난감했다. 배서준이 이렇게까지 유치하게 강연찬과 신경전을 벌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예전에 나은이 죽었을 때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저 여자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게 된 건가 말이다.남설아 이 여자는 정말 재앙과도 같은 존재였다. 반드시 사라져버려야 하는 사람이다.그때 서도현이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매형, 지금 뭐 하는 거예요?”“네 누나도 이제 우리 회사 직원이고 너도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며? 미리 동료들하고 친해지는 게 좋잖아. 앉아서 같이 먹자.”배서준은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며 서유라에게 자리를 권했다.서도현은 그 말을 듣자마자 흥분해서 말했다.“매형, 그거 진짜예요? 정말 내가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거예요?”“홍보팀에 자리가 남아 있으니까, 바로 출근하면 돼.”배서준은 무심한 듯 대답했지만, 은근슬쩍 남설아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라도 그녀의 표정에서 미묘한 변화가 있을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남설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홍보팀이든, 마케팅팀이든, 배건 그룹 내부 일이야 그녀와 무관했다.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기술팀이었다. 그 핵심 인재들만 꽉 붙잡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 생각에 남설아는 피식 웃음을 웃으며 말했다.“유라 씨, 정말 축하해. 이제 회사 청소부 자리까지 어머님께 가게 된다면 진짜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겠네.”“설아 씨, 내 동생도 대
“내 말은 우리 부서 직원들이랑만 노래방에 가겠다는 뜻이에요. 서준 씨는 비서랑 예비 처남이나 잘 챙기세요.”남설아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배서준은 원래 이런 분위기를 싫어했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따라오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남설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배서준의 얼굴이 굳어졌다.“무슨 뜻이야?”“내 말 그대로예요. 나는 당신이랑 놀고 싶지 않다고요. 노래방에 가고 싶으면 당신들끼리 가요. 우리는 같이 안 갈 거예요.”남설아는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이건 비단 그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여기 앉아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아무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할 뿐이었다.남설아는 주주였고 대표의 부인이었지만 이들은 그저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다.“설아 씨, 아무리 서준이를 싫어한다고 해도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서유라는 난처한 듯 한숨을 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남자는 바깥에서 체면이 중요한 법이에요. 당신이...”“남자의 체면이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 당신은 왜 그렇게 뻔뻔하게 굴어? 내 남편을 빼앗고 내 아이의 아버지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내 앞에서 훈계질까지 하겠다는 거야? 정말 염치도 없구나. 뻔뻔해서 못 봐주겠어.”남설아는 비웃으며 날카롭게 서유라를 몰아붙였다.“남설아!”배서준이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하지만 남설아는 이제 그런 그의 분노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줄 알았다.그녀는 테이블을 둘러보며 직원들에게 말했다.“끝까지 재밌게 회식을 진행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해요. 다들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제시간에 출근해서 봐요.”이런 불청객들이 끼어든 마당에 계속 자리를 함께해봤자 어차피 분위기만 더 망칠 뿐이었다.괜히 시간 낭비하느니 차라리 일찍 들어가서 쉬는 게 나았다.한원준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오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팀장님. 그리고 대표님도 감사합니다. 팀장님, 내일 뵙겠습니다.”그를 시작으로 하
서유라는 조용히 배서준의 뒤를 따라 걸으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도착하자 그녀는 차에서 내리기 전 조심스럽게 배서준을 올려다보았다.“서준아, 나랑 도현이 정말 회사에 다닐 수 있는 거야?”“내가 너한테 약속한 건 반드시 지켜.”배서준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그는 그렇게 말한 뒤, 차에 올라 그대로 떠났다. 서유라를 바라보던 서도현은 답답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언성을 높였다.“누나, 대체 왜 그래? 배서준이 남설아한테 대하는 태도가 전이랑 완전히 달라진 거 모르겠어? 누나는 불안하지 않아?”“너도 보아낸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마음이 떠난 남자를 누가 무슨 수로 붙잡아. 내가 신이라도 되는 줄 알아?”그녀는 서도현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네가 계속 내 발목을 잡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될 일은 없었어. 안 그래?”그 말에 서도현은 억울함에 목소리를 높였다.“누나가 무능한 건 누나 탓이지, 왜 나한테 뒤집어씌워? 양심도 없냐?”“닥쳐. 지금 우리한테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너도 알잖아. 이렇게 가다간 우린 끝장이라고.”서유라는 차갑게 말을 내뱉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배서준이 인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어. 두 사람 사이에는 한 생명이 가로막고 있거든.”서도현은 그녀의 앞에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그러네. 그럼 내가 사람을 시켜서 남설아를 죽여버릴게. 그럼 불안 요소가 없게 되잖아?”“멍청한 소리 그만해.”서유라는 단호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지금까지 애써 만든 걸 절대 물거품으로 만들진 않을 거니까.”그녀는 그렇게 말한 후, 서도현을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한편, 남설아는 가게를 나온 후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변의 야시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대학교 다닐 때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서 늘 이곳을 맴돌곤 했다. 그녀가 입던 옷도, 생활용품도 전부 여기서 샀었다.지금은 그때보다 돈이 훨씬 많아
“서유라 씨가 저보고 개래요. 대표님은 말리지도 않고 오히려 저를 때리려고 했어요.”천기준은 말할수록 억울함이 북받쳤다.명문대 출신에 수년간 배서준을 따라 일해 왔건만 돌아오는 건 모욕뿐이라니, 그것도 제대로 된 사과나 공정한 대우조차 받을 수 없다니.‘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일하는 사람도 사람인데, 감정도 있고, 자존심도 있는데!’“뭐요?”남설아는 그 말을 듣고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설마 이런 이유였단 말이야? 진짜로 이 일 때문이었어?’배서준은 지금 서유라한테 완전히 미쳐버린 상태였다.이젠 이성이 마비됐는지 자기 옆에서 가장 오래 함께한 사람을 모욕하는 걸 그냥 두고 보질 않나?진짜 머리에 뭐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아니, 분명 어딘가 고장이 난 게 틀림없었다.“걱정 마요. 이번 일은 내가 기억해둘게요. 언젠가 꼭 되갚아줄 겁니다.”“지금 당장 회사 최근 5년간의 핵심 자료가 필요해요. 구할 수 있어요?”이미 서로 손을 잡기로 한 이상 남설아는 더는 멋쩍게 굴 필요가 없었다.이젠 파트너이니 필요한 건 당연히 요구할 수 있었다.천기준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구할 수 있어요. 시간이 조금 필요하긴 한데 내일 밤까지 드릴게요.”이렇게 말하고 일어선 천기준은 망설이다가 남설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저 이제부터 설아 씨 편이에요. 그 말은 곧 배 대표님을 배신하겠단 뜻이죠. 모두가 배신자를 어떻게 보는지 저도 잘 알아요. 그리고 설아 씨도 목적 달성하면 절 옆에 두지 않을 거란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전 돈이 필요해요. 멀리 떠나서 새 인생 시작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요.”사실 남설아는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더 좋았다.뒤에서 어정쩡하게 기회만 노리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았다.결국 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200억. 일 끝나면 200억 줄게요. 멀리 떠나서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예요.”“감사합니다, 남 대표님!”천기준은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솔직히 처음엔 남설아 성격상 많아야 몇억을
바보도 아닌데 서유라가 천기준의 말에 담긴 냉소와 비아냥을 못 알아챌 리 없었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천 비서님은 그냥 서준이 옆에 붙어 다니는 개일 뿐이잖아요! 근데 감히 나한테 이빨을 드러내요? 일하기 싫어진 모양이죠?”그러자 천기준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무표정하게 대꾸했다.“죄송합니다, 서유라 씨. 저는 배 대표님의 개가 아니라 비서거든요. 개가 좋으시면 대표님께 새로 한 마리 사달라고 하시죠.”서유라는 천기준이 이렇게까지 대들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라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뺨을 올려쳤다.하지만 천기준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번에 붙잡고 차갑게 말했다.“서유라 씨, 선은 지키시죠.”그 순간 병실에 들어선 배서준이 이 장면을 보자마자 성큼 다가와 천기준을 가로막았다.그러고는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대표님, 서유라 씨가 제 뺨을 때리려 했습니다.”천기준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고 곧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덧붙였다.“전 단지 제 몸을 방어했을 뿐입니다. 공격할 생각은 없었습니다.”서유라는 억울함과 분노에 눈이 뒤집힌 채로 배서준에게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서준아, 난 진짜 때리려던 게 아니었어... 하지만 저 사람이 계속 날 모욕했어.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왜 모두가 나한테 이래?”천기준은 이런 ‘울고 떼쓰고 매달리는’ 전형적인 서유라의 방식에 익숙했기에 담담하게 받아치듯 말했다.“병원 CCTV는 음성까지 녹음됩니다. 정말 억울하시다면 언제든지 확인하시면 됩니다.”이 말에 서유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배서준 품에 안긴 채 흐느끼는 것 외엔 더 할 말이 없었다.배서준도 바보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깊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한 명은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여자, 한 명은 오랜 시간 곁을 지켜온 비서.두 사람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배서준은 천기준의 이마를 살짝 손가락으로
“비켜!”배서준은 고함을 내질렀고 눈빛은 이미 싸늘하게 돌아서 있었다.하지만 간병인 안경희는 배서준이 누군지도 몰랐기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이봐요, 전 제 환자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요. 나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아주머니, 괜찮아요. 나가 계세요. 이 사람 제 남편이에요.”‘남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 남설아의 말투에선 명백한 비웃음이 묻어났다.그 말을 들은 안경희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남설아를 돌보며 봐왔던 남자는 언제나 강연찬이었고 이 무서운 얼굴의 남자가 남편이었다는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이렇게 험악하게 구는 남편이라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걱정스러운 얼굴로 남설아에게 물었다.“정말 경찰 안 불러도 괜찮아요?”“괜찮아요, 나가 계세요.”남설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안경희의 손등을 살며시 눌렀다. 진정시키려는 듯한 동작이었다.안경희는 코웃음을 치고 배서준을 노려보았다.“나 문 앞에 서 있을 거니까 손끝 하나라도 대 봐요, 바로 신고할 테니까! 멀쩡하게 생겨선 아내 때리는 놈이라니, 에잇!”그러고는 어깨로 배서준을 밀치며 씩씩하게 병실 밖으로 나갔다.안경희에게 호되게 당한 배서준의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그런 모습을 보며 남설아는 참지 못하고 속으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배서준 같은 사람한테 저런 대접은 평생 처음일 게 분명했다.“서준 씨, 지금 당신 꼴 좀 봐요. 진짜 미친 사람 같아요.”남설아는 몸을 조금 옆으로 틀어 가능한 한 그와 거리를 뒀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딱 하나만 묻겠어. 송우민이랑 아는 사이야?”배서준은 이를 악물고 남설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표정 하나하나를 다 읽어내려는 듯 의심과 긴장이 얽혀 있는 눈빛이었다.결혼 후 이렇게까지 그녀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선 안에서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남설아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역겨움을 느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모르는
“설아가 서도현이 한 짓이라고 했지. 너랑은 무슨 상관이야? 네 동생은 원래 하는 일 없이 빈둥대던 애였잖아. 엇나간 짓 좀 했다고 이상할 것도 없지.”배서준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옆에 있던 서유라는 그 말만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젠 자신이 배서준 마음속에서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걸.예전이라면 자신과 관련된 일에 이성이니 판단이니 그런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언제나 감정대로 움직였던 사람인데 지금은 이렇게까지 차분하다고? 이제는 날 신경도 안 쓰는구나.’“서준아, 설마... 날 사랑하지 않게 된 거야?”서유라는 억울함에 목소리가 떨렸고 눈물이 뚝 떨어졌다.“나도 내가 요즘 어떤지 알아. 진짜 미안해. 그런데도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너무 사랑해서 그래. 너 없이는 안 돼. 진짜 난 너 없으면 안 돼.”말을 하면서 그녀는 조수석에 몸을 웅크렸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그런 서유라의 모습에 한순간 마음이 약해진 배서준은 말투도 한결 누그러졌다.“너한테 화내려는 건 아니었어. 그리고 너 떠날 생각도 없어. 걱정하지 마.”“정말... 정말 믿어도 돼? 정말 날 떠나지 않을 거야?”서유라는 눈가가 촉촉히 젖은 채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그 눈을 마주한 순간, 배서준은 다시 마음이 무너져 내려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연하지, 바보야. 내가 어떻게 널 떠나.”어릴 때부터 줄곧 함께해온 사이였고 수십 년 동안 마음속에 그녀를 품어온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끊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둘은 말없이 차를 타고 해변가 별장까지 도착했다.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서유라는 비명을 지르더니 바로 배서준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배서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장에 매달린 서도현을 바라봤다. 피범벅이 된 몸을 본 순간,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당장 내려!”그의 명령에 별장 안의 도우미가 덜덜 떨며 서도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사람이 바닥에 닿는 순간, 서유라는 비로소 그게 자기
고통이 클수록 남설아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배서준은 병실을 나서자마자 서유라의 팔을 거칠게 붙잡더니 그대로 그녀를 끌고 자신의 차까지 갔다. 그러고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서도현한테 전화해.”“서준아?”서유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배서준을 바라봤다.“너 정말 설아 씨 말 믿는 거야? 진짜 도현이가 그랬다고 생각해?”“전화하라고.”배서준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한번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번엔 협의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었다.서유라는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억울함에 눈가가 벌겋게 물들었지만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들고 서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서도현은 손이 묶인 채 허공에 매달려 모진 매질을 당하고 있었다.“아아아아악!!”비명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간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이어졌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때 울려 퍼진 핸드폰 벨소리는 그에게 마치 천상의 소리처럼 들렸다.“형님! 형님! 저 돈 있어요! 전화 좀 받게 해주세요, 제발요!”서도현은 연신 울먹이며 애원했다. 이제는 정말 더는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전기태는 매질하느라 저린 손을 털며 짜증스럽게 말했다.“남자라는 놈이 여자나 패고 다니더니 이제 와선 우리한테 사정이나 하고 있어? 퉤! 네 그 몇 푼 더러운 돈 누가 신경이나 쓴대?”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힘껏 채찍을 내리쳤다.이제 진짜로 더 못 견딜 것 같았던 서도현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형님, 진짜 돈 있어요! 제발요! 제 몸에 260억짜리 수표 있어요! 다 드릴게요, 살려만 주세요. 제발요!”그 말에 전기태는 순간 멍해졌다.‘이런 놈이 260억짜리 수표를 들고 있었다고?’전기태는 곧장 그의 몸을 샅샅이 뒤졌고 정말로 그 수표를 꺼냈다. 한참을 확인한 뒤, 그는 곧바로 자기 부하에게 넘겼다.“야, 내가 널 완전 우습게 봤구나. 너 좀 있네?”“보아하니 그 여자한테서 꽤 많이도 뜯어냈구먼. 진짜 찌질함의 끝판왕이네.
“남설아, 나 정말 너랑 싸우기 싫어. 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그냥 솔직히 말해.”배서준은 피곤한 듯 미간을 주물렀다. 지금 회사는 전환의 중요한 시점에 있었고 하필이면 집안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앞뒤가 다 막혀 있는 상황에 그는 정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그런 배서준의 지친 모습을 바라보다가 남설아는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담담하게 말했다.“서준 씨, 나 당신이랑 이혼하고 싶어요. 공평하게, 내가 받아야 할 건 전부 다 받는 조건으로요.”“뭐라고?”배서준은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해봤다. 심지어 다시 아이를 가지는 것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바라던 게 결국 돈 챙겨서 떠나는 거였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그 순간 지금껏 참고 있던 인내심과 온화함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배서준은 성큼성큼 다가가 남설아의 목을 움켜잡았다.“이렇게까지 이혼을 서두르는 이유가 내 재산 나눠 가져서 결국 강씨 가문 그놈 도와주려는 거였어? 나쁜년... 대체 두 사람 언제부터 붙어먹은 거야!”분노로 가득 찬 남자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오자 남설아는 비웃음을 터뜨리며 냉소적으로 말했다.“결혼을 우습게 여긴 쪽은 당신이잖아요. 그런데도 이제 와서 나한테 뒤집어씌우겠다고요?”“남설아,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배서준의 손이 점점 더 힘을 주기 시작했다.숨이 막히기 시작하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남설아는 몸부림치다 상처가 당겨지는 고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그 눈물이 배서준의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분명 차가운 물방울인데 배서준은 마치 데인 듯한 느낌이 들어 손을 홱 빼버렸다.그는 천천히 몸을 세우고 눈물에 엉망이 된 여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복잡했다.오랜 세월 부부로 지내면서 온갖 모습을 봤다.교활하고 눈치 빠르고 요령 있게 사람을 다루는 모습들을 말이다.그가 제일 싫어하던 모습들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이렇게 무너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왜인지 모르게 남설아의 눈물이 똑 떨어질 때마다 마음 한구
남설아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그 모습이 어찌나 억울하고 안쓰러운지 배서준의 마음이 한순간 흔들렸다.서유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이제 대놓고 유혹하는 작전까지 쓰네?’배서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지는 걸 보자 서유라의 머릿속엔 경고등이 켜졌다.“서준아, 도현이는 절대 그런 짓 안 했어. 남 팀장이 거짓말하는 거야. 이건 명백한 명예훼손이라고!”“맞아, 맞아, 다 내 잘못이야. 유라 씨 말이 다 맞지.”남설아는 병아리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동의했다.그 말투, 그 표정에 또다시 화가 치밀어오른 서유라는 씩씩대며 성큼 다가와 이를 악물고 말했다.“설아 씨가 서준이 때문에 예전부터 나 싫어한 거 알아. 근데 날 싫어하면 날 미워하면 되지, 왜 하필 우리 동생이야? 걔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고! 설아 씨가 그렇게 대할 이유 없어!”“내가 걔한테 뭘 했다고 그래? 내가 때렸어? 욕이라도 했어?”남설아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리고 갈비뼈 쪽을 손으로 짚으며 배서준을 바라봤다.“당신은 당신 와이프한테 다른 여자가 소리 지르고 삿대질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 세상에 이런 남편이 또 있을까?”그가 ‘남편’이라는 신분으로 자기를 구속하려는 거라면 자신도 그대로 받아치면 되는 일이었다.‘남편’이라는 자리를 원한다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함께 감당해야 하는 게 아닐까?“유라야, 진정해. 나 혼자 얘기 좀 할게. 잠깐 나가 있어.”배서준은 서유라의 팔을 살짝 잡아끌며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서유라는 여전히 미련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결국 이를 갈며 남설아를 날카롭게 노려보고는 병실을 나섰다.서유라가 나가고 나자 병실엔 남설아와 배서준, 단둘만 남았다. 공기는 잠시 얼어붙은 듯 무거웠다.“치료비는 회사 보험으로 처리하면 돼.”배서준이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비록 법적으로는 부부고 아이도 있지만 이 둘은 서로를 잘 모른다. 대화도, 감정도, 공통의 언어도 거의 없었다.그 말을 들은 남설
배서준은 콧방귀를 뀌며 자기 정체부터 내세웠다. 아무리 봐도 이 상황에서 화낼 자격은 자신 쪽이 더 있다는 태도였다.그런 그의 모습에 강연찬은 더 말해봤자 시간 낭비라는 걸 직감했고 입꼬리만 살짝 비웃듯 올리며 말했다.“자기 위치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더 이상 자리만 차지하고 일도 안 하는 짓은 하지 마세요.”“강연찬 씨. 남의 가정 사이에 끼어들어 놓고 그렇게 떳떳합니까? 우리 집안 어른들이 알면 그쪽은 끝이에요.”배서준은 비웃듯 말하며 경고를 날렸다.“배건 그룹 대표란 인간이 고작 하는 짓이 어른한테 일러바치는 거라고요? 진짜 웃기네요. 유치하게.”강연찬은 한마디 남기고 남설아를 한 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병실을 나갔다.남설아는 조용히 앉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러 번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몸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눈을 들자마자 마주친 건 배서준의 날선 눈빛이었다.“내가 몇 번을 말했어? 넌 내 아내야. 배씨 가문 사모님이라고! 남자들이랑 밖에서 얽히지 말라고 했잖아! 창피하게 굴지 마!”“너랑 강연찬, 두 사람 도대체 무슨 사이야?”배서준은 이를 꽉 물고 남설아를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덮쳐 물어뜯을 기세였다.“맞아, 남 팀장.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아침부터 사람 기죽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설마 남편인 서준이를 이 정도로 무시할 줄은 몰랐네.”서유라까지 거들고 나섰는데 말끝엔 마치 남설아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통증도 심한 데다 두 사람의 짜증 나는 공세까지 들으니 남설아의 얼굴빛이 더 창백해졌다.그녀는 갈비뼈 부근을 감싸 쥐고 차분하지만 날이 선 눈빛으로 배서준을 바라봤다.“어젯밤에 왜 안 왔어요? 나 한참 기다렸다고요. 거기서 진짜 죽을 뻔했고요. 그건 알고 있어요?”“난...”배서준은 본능적으로 변명을 꺼내려 했지만 곧 그녀의 말뜻을 눈치채고는 찌푸린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소리야?”“당신이 준 주소로 가서 문을 열었더니 거기엔 서
송우민은 강연찬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자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는 늘 신사적인 인상만 남아 있었는데 이런 야성적인 기운은 처음 느껴졌다.하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은 송우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강연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걱정 마. 난 남의 아내한테 관심 없어.”배건 그룹 며느리가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사람이다.강연찬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선배 왔구나. 밥은?”병실에서 남설아는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눈만 감으면 온몸이 욱신거리고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유일한 위안은 강연찬의 도시락이었다.그녀의 먹을 것만 밝히는 모습에 강연찬은 부드럽게 웃으며 도시락을 테이블에 놓았다.“넌 참, 오직 먹을 생각뿐이지? 다 네가 좋아하는 거로 해왔어. 옥수수 수프도 끓였고.”“선배는 진짜 너무 좋아! 나 선배 사랑해!”“나중에 돈 많이 벌면 선배 내가 책임질게.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매일 밥만 해줘. 그럼 돼.”남설아는 신난 얼굴로 젓가락을 집어 들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그런 천진한 모습에 잠시 말을 망설이던 강연찬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송우민, 그 사람 너 보러 온 거야? 두 사람... 친한 거야?”“친하진 않아. 전에 나 납치했던 사람이야. 나중엔 살기 위해 서로 손잡은 거고.”남설아는 담담하게 말하고 나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근데 왜 다들 그 사람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꺼리더라? 그냥 애 같기만 하구만.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주변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를 모두 두려워하는 게 느껴졌다.그 말에 강연찬은 조급해졌다.“너 제발 그 사람 얼굴만 보고 착한 척하는 거에 속지 마. 겉보기엔 순둥이처럼 생겼지만 속은 냉혈한이야. 완전 미친놈이라고!”“미친놈이든 바보든 날 도와주면 내 친구야.”남설아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한 눈빛으로 강연찬을 바라봤다.“그 사람은 내 목숨 구해준 은인이야. 그 사람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