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끝낸 거야?”강연찬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남설아를 바라봤다.원래부터 대단한 사람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까지 능숙할 줄은 정말 몰랐다.‘이건 진짜 너무 사기잖아?’“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가져가서 제대로 확인해봐. 문제없으면 돈 줘.”“4000만 원이야. 한 푼이라도 적으면 나 안 받아.”남설아는 무리한 금액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이 정도 보안 문제를 외주로, 전문 업체에 맡겨도 4000만 원은 최소 금액이다.“너 진짜 돈 달라고 하는 거야?”강연찬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설마 정말로 이렇게 당당하게 돈을 요구할 줄은 몰랐다.남설아는 그의 놀란 표정을 보더니 콧방귀를 뀌고 퉁명스럽게 말했다.“내가 왜 돈을 못 받아? 원래 줘야 하는 거잖아?”“알았어, 알았어, 줄게.”“문제없으면 4000만 원, 됐지?”강연찬은 가볍게 웃었다.솔직히 말해서 4000만 원은커녕 뒤에 0이 하나 더 붙어도 아깝지 않았다.게다가 지금처럼 남설아가 이렇게 멀쩡하게 웃고 있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놓였다.“근데 나 오늘 여기 온 이유 하나 더 있어. 서도현 말인데, 배서준이 지금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빼내려고 하거든.”“이미 알아봤는데 네가 합의서 안 써주면 절대 못 나가. 이 일 너는 어떻게 생각해?”강연찬은 다소 난감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남설아를 바라봤다.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혹시나 아직도 배서준에게 미련이 있는 건 아닌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예전 같았으면 남설아는 배서준이 다른 여자를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는 걸 보면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웃기기만 했다.‘서유라, 너 진짜 배서준의 심장 맞구나.’“나한테 부탁하러 오면 당연히 들어줄 거야. 다만, 쉽게는 안 들어줄 거라는 거지.”“오빠 사람들한테도 전해. 안에서 놀고만 있지 말고 그 개 같은 자식 제대로 조져놓으라고!”남설아는 툭 내뱉었다.애초에 서도현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었다.계속 훼방만 놓고 배나은을 괴롭히기까지 했으니 이번에
배서준이 편할 날이 없어야 남설아도 편했다.지금 남설아가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 그를 평생 불편하게 만드는 것뿐이다.시간을 확인한 남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이제 출근해야 해서 더 얘기 못 해. 계좌이체 잊지 마!”깔끔하게 돌아서는 남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연찬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눈빛엔 감탄이 가득했다.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장숙자는 바로 알 수 있었다.이 남자는 진심으로 남설아를 좋아하고 있구나하고 말이다.배서준은 그 어떤 순간에도 이런 눈빛으로 남설아를 바라본 적이 없었으니까.가능하다면 장숙자 역시 바랐다.남설아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기를.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왜냐하면 남설아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한편 남설아는 예전엔 상상도 못 했던 상황에 처해 있었다.‘내가 배건 그룹에 직원으로 출근하게 될 날이 오다니!’눈앞에 우뚝 솟은 배건 그룹 빌딩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예전엔 이곳에 도시락을 들고 배서준을 찾아오곤 했었다.하지만 매번 경비에게 막혔고 그녀가 정성 들여 싸온 도시락은 늘 천기준에게 쓰레기통에 버려졌다.그렇게 정성껏 만든 음식을 배서준은 눈길조차 한 번 주지 않았다.그 시절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 한편이 먹먹하게 아팠다.그러나 이번엔 달랐다.높은 굽의 힐을 신은 남설아는 당당하게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이번엔 그 누구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심지어 천기준이 직접 입구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사모님, 오셨군요. 마케팅팀으로 모시겠습니다.”천기준은 그녀를 보자마자 다급히 다가왔다.그런 천기준의 모습에 남설아는 조금 의아해하며 물었다.“서준 씨가 시켜서 마중 나온 거예요?”“그, 그런 건 아니고요. 대표님께서 사모님 잘 챙기라고 하셔서...”천기준은 민망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남설아는 알 수 있었다.그 말은 그저 포장일 뿐 실제로는 감시하라는 말이라는 걸.꼼꼼하고 치졸한
곧 직원 단체 채팅방은 난리가 났다.[아니 진짜야? 내연녀랑 정실부인이 같이 출근했다고? 그것도 한 명은 부팀장이고 한 명은 그냥 사원이래!][부자들이 논다는 게 원래 화려하단 건 알았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진짜 명분 가지고 서열 따질 생각이면 큰코다친다. 대표님이 누굴 아끼는지가 곧 서열이야. 줄 잘 서라.]남설아는 배서준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고 둘을 바라봤다.그 두 사람의 손이 꼭 맞잡혀 있는 걸 보고 터질 듯한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이런 인사 이동, 이사회에 보고는 했어요? 서준 씨, 사적 감정으로 직책 주는 게 그렇게 당당한 일이야?”남설아는 팔짱을 낀 채로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자기 애인을 배건 그룹에 꽂아 넣겠다고? 웃기고 있네.’“남설아, 넌 지금 배건 그룹의 평사원일 뿐이야. 나한테 감히 대들 자격은 없어. 나는 대표야. 내가 누굴 부팀장으로 임명하든 내 권한이지.”배서준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 눈빛에는 조소와 보복을 성공한 것에 대한 쾌감이 섞여 있었다.남설아가 아직도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고 최근 그녀가 벌인 모든 일도 결국 관심을 끌기 위한 수작이라 생각하고 있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유라를 불러올 걸 그랬네.’“당신이 대표? 나는 최대 주주예요.”“이 사람 입사, 난 반대예요. 이대로 밀어붙이면 내 지분 전부 매각할 거예요.”남설아는 단도직입적으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서유라는 이런 식으로 정면으로 거절당할 줄 몰랐기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녀는 바로 배서준의 소매를 잡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해, 서준아. 설아 씨랑 싸우지 마.”“설아 씨, 내가 미움받고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넌 정말 그냥 성실히 일하고 싶었어, 난...”말을 하던 서유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남설아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진짜 일하고 싶었다면 사원부터 시작했겠지. 처음부터 부팀장? 자기 얼굴이나 한 번 보시지. 자격이
‘전혀 화도 안 내고 난리도 안 친다고? 좋아, 좋아. 이제 정말 진화했네. 점점 속이 더 깊어지고 교활해졌어.’“흥.”배서준이 코웃음을 치고는 서유라의 손을 잡아채듯 휙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남설아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입을 열었다.“최근 5년간 마케팅팀 자료를 좀 보고 싶습니다. 배건 그룹의 기본 업무를 익히고 싶은데 혹시 누가 제공해주실 수 있을까요?”“자료실로 가보세요.”손미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설아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9층에 있어요.”“고마워요.”남설아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주고는 큰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그녀가 나가자마자 사무실 사람들은 곧장 단체 채팅방으로 몰려들었다.[와 대박! 우리 사모님 진짜 짱이다. 몇 마디 말로 바로 쫓아냈네.][대단하긴 뭐가... 쫓겨난 게 아니라 그냥 대표님 옆으로 간 거잖아.][서유라 딱 봐도 여우 같은 스타일이잖아. 뭐가 좋아서들 그래?][남자들 원래 저런 스타일 좋아하잖아.]사람들은 컴퓨터 앞에서 눈빛만 슬쩍 교환하다가 결국 하나둘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쉬었다.세상엔 원래부터 불공평한 일이 많다. 서유라도 뭐 능력이 없진 않았다. 대놓고 뒷문으로 들어왔으니 말이다.‘진짜 뻔뻔하기도 하지!’남설아는 본인의 신분을 이용해 금세 필요한 자료를 손에 넣었고 자리에 앉아 자료 분석을 시작했다.사무실.“대표님, 남설아 씨가 마케팅팀의 최근 5년 치 자료를 다 요청했습니다.”천기준이 불안한 눈빛으로 배서준을 바라봤다.이렇게 나오겠다는 건 제대로 한판 벌이겠다는 뜻이다. 지금 어떻게든 막지 않으면 나중에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걔야 그냥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존재야. 모든 걸 다 줘봤자 뭐 어쩌겠어?”“그 자료들 다 지루하기만 한 거라 시간이나 때우겠지. 오히려 잘 된 거야. 그냥 신경 끄고 직원들한텐 말 많지 말라고 해.”배서준은 콧방귀를 뀌며 눈빛 가득 비웃음을 담았다.천기준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하다가도 결국 모든 말을 삼키고 돌아섰다.“서준아, 이제
“아직 애야. 앞길도 창창하단 말이야. 제발, 부탁이야.”서유라는 울먹이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애원했다.이런 모습은 배서준은 물론이고 심지어 남설아조차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하지만 안타깝게도 남설아는 피해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그날 강연찬이 갑자기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어떤 수모를 겪었을지, 그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유라야, 이제 일어나.”배서준이 다가가 서유라를 일으키려 했지만 서유라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울먹였다.“안 돼, 안 돼. 난 설아 씨한테 빌어야 해. 도현이는 내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야. 그 애가 고통받는 걸 저는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설아 씨, 제발. 내 동생만 용서해준다면, 합의서만 써준다면... 뭐든지 할게. 진짜 뭐든지.”서유라는 필사적으로 남설아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그 모습은 얼핏 보면 굴욕적이고 낮아 보이지만 실은 도덕적 우위에 서서 남설아를 압박하는 행동에 불과했다.예전 같았으면 남설아는 당장 마음이 흔들려 수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우습기만 했다.남설아는 아무 미련 없이 그녀의 손에서 치맛자락을 확 빼내고는 돌아서 소파에 앉아 두 팔을 끼고 무표정한 얼굴로 아직 바닥에 무릎 꿇은 서유라를 내려다봤다.“유라 씨 동생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우리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와서 대뜸 합의서 써달라며 빌기만 하네? 날 사람으로 안 보나 봐?”“맞아. 다 도현이 잘못이야. 근데 그 애 아직 어리고 술에 취해서 충동적으로 그랬던 거야. 제발, 설아 씨. 도현이 나오면 꼭 무릎 꿇고 사과하게 할게...”서유라는 무릎 꿇은 채 눈물을 흘리며 절절하게 애원했다.“남설아! 너무하는 거 아니야?”배서준이 벌떡 일어나 서유라 앞에 서며 그녀를 부축했고 남설아를 향해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부부라고 하기엔 살벌한 분위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원수인 줄 알 정도였다.하지만 그의 분노는 이제 더는 남설아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참을 이유도 없었다.남설아는 있는 힘껏 배서준의 뺨을 후려쳤다.그러고는 그의 넥타이를 세차게 끌어당기며 이를 악문 채 노려봤다.“지금부터 나은이 얘기하지 마요. 그 이름 입에 올리지도 마요. 당신 자격 없어요. 언급할 자격조차 없다고요!”그 싸대기 한 방에 남설아의 절규까지 더해지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특히 서유라는 남설아가 미쳤다고 생각했는지 믿기지 않는 얼굴로 얼떨떨해했다.아무리 화가 나도 감히 배서준을 때릴 줄이야, 이건 진짜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서유라는 울음도 멈추고 속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이래서야 자기 동생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서유라, 나가.”배서준의 두 눈에는 분노가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그는 이를 악물고 명령을 내렸다.당황한 서유라는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서, 서준아...”“나가라고 했지!”배서준은 힘껏 팔을 뿌리쳤고 중심을 잃은 서유라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배서준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예전 같았으면 그는 단 한 번도 서유라에게 큰소리도, 상처도 주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오직 남설아만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서유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일어나 울먹였다.“두 사람 부부잖아. 제발, 싸우지 마. 나는 뭐든 괜찮아. 진짜로, 그러니까... 제발 그만 싸워.”“설아 씨, 미안해. 정말 미안해.”서유라는 눈물을 훔치며 비틀비틀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염치도 없고 순수한 사람은 아니지만 연기 하나는 확실히 최고였다.울고 빌고 보여줄 수 있는 건 전부 보여주는 스타일이었다.서유라가 나가자 방 안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배서준은 남설아의 손을 양쪽에서 꽉 잡고 세차게 끌어올리더니 그대로 책상에 밀쳐 눌렀다.“남설아, 네가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게 나잖아? 그래, 줄게. 네 맘대로 가져.”그 말과 함께 숨이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에서 수
지금 이 순간 배서준이 무릎 꿇고 사과를 한다고 해도 남설아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배나은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후회하고 싶어도, 보상하고 싶어도, 그럴 기회조차 다시는 주어지지 않는다.배나은은 돌아오지 않는다.그 아이, 그녀의 배나은은 영원히 떠났다.그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아이만 생각하면 남설아의 심장은 천 갈래로 찢기는 듯 고통스러웠다.남설아는 온 힘을 다해 배서준을 밀쳐내고 깊게 숨을 들이쉰 뒤 차갑게 입을 열었다.“서준 씨, 당신이랑 나는 이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겉으로만 부부로 남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 그게 싫으면 이혼하고요. 두 가지 중 하나예요. 어떤 길을 택할지는 당신도 잘 알겠죠?”“당신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 결국 서유라 씨 그 동생 때문이잖아요. 쓸모없는 죄책감으로 날 묶지 말고 차라리 조건을 가지고 이야기해요. 어때요?”남설아는 천천히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그대로 그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그런 뒤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그를 내려다봤다.배서준은 꿈에도 몰랐다.이 여자가 어느 날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 앞에서 조건을 내걸고 협상을 벌이게 될 줄은 말이다.지금의 이 위치 변화가 그를 숨 막히게 했다.하지만 문제는 지금 상황에선 반박할 힘조차 없다는 것이었다.그녀가 쥐고 있는 지분 51%가 배서준의 허리를 꺾어버릴 만큼 강력했다.“조건 말해봐.”배서준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최대한 체면을 지키려 애썼다.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 보여서일까 남설아는 피식 웃음이 터졌고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요즘 회사가 신기술 프로젝트 밀어붙이고 있죠? 그거 내가 맡을게요.”“네가?”배서준은 비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봤다.“집에서 애나 보고 빨래나 하던 주부 주제에 신기술이 뭔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하지만 남설아는 준비 없이 협상장에 들어올 사람이 아니었다.조용히 가방에서 USB 하나를 꺼내더니 그의 품에 툭 던졌다.“이건 내가 대학 졸업할 때 만든 프로그램이에요. 전
“짝!”남설아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대로 서유라의 뺨을 후려쳤다.이어 머리채를 꽉 움켜쥐고 세차게 뒤로 잡아당기더니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입술을 톡 건드리며 낮고 날카롭게 말했다.“다시는 내 딸 얘기 한 마디라도 꺼내면 네 입 여기다 꿰매버릴 거야. 알겠어?”“네가 감히?”서유라는 코웃음을 치며 도발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서유라의 머릿속엔 아직도 남설아가 그저 순하고 무능한 가정주부일 뿐이었다.지금 이 상황에서도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처지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걸 보고 남설아는 갑자기 서유라와 말다툼을 벌이는 것 자체가 스스로 품격을 낮추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여 그녀는 힘껏 서유라를 옆으로 걷어차고는 싸늘하게 비웃었다.“기어들어가서 내 남편한테 고자질이라도 해봐. 과연 나랑 이혼하자고 할까?”예전의 남설아라면 ‘이혼’이라는 말만 들어도 두려워 벌벌 떨었을 것이다.배나은에게 상처 주기 싫어서였다.하지만 이제 배나은은 없으니 무서울 것도, 잃을 것도 없었다.정작 이혼을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바로 배서준이었다.“남설아! 두고 봐. 가만 안 둬!”서유라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 말은 남설아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이젠 그녀에게 서유라의 말은 그냥 소음일 뿐이었다.대표 사무실에서 나온 남설아는 곧장 강연찬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시간 돼? 나 오빠 좀 보고 싶어. 응, 우리 회사 앞으로 와줄래?”전화를 끊은 강연찬은 회의 중인 기술팀을 둘러보더니 헛기침을 한 번 했다.“난 급한 일 있어서 먼저 나갈게요. 다들 계속 회의해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진영을 한번 보고 말했다.“잘 들으면서 메모해.”“어디 가는데요?”서진영은 의아한 얼굴로 강연찬을 바라봤다.‘지금 연훈 그룹이랑 기술 회의 중인데 이 중요한 와중에 나간다고? 대표님 도대체 언제쯤 좀 정상적으로 일을 할까?’강연찬은 대답도 없이 웃으며 성큼성큼 회의실을 빠져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배건 그룹 건물 앞에 도착한 강
“서유라 씨가 저보고 개래요. 대표님은 말리지도 않고 오히려 저를 때리려고 했어요.”천기준은 말할수록 억울함이 북받쳤다.명문대 출신에 수년간 배서준을 따라 일해 왔건만 돌아오는 건 모욕뿐이라니, 그것도 제대로 된 사과나 공정한 대우조차 받을 수 없다니.‘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일하는 사람도 사람인데, 감정도 있고, 자존심도 있는데!’“뭐요?”남설아는 그 말을 듣고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설마 이런 이유였단 말이야? 진짜로 이 일 때문이었어?’배서준은 지금 서유라한테 완전히 미쳐버린 상태였다.이젠 이성이 마비됐는지 자기 옆에서 가장 오래 함께한 사람을 모욕하는 걸 그냥 두고 보질 않나?진짜 머리에 뭐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아니, 분명 어딘가 고장이 난 게 틀림없었다.“걱정 마요. 이번 일은 내가 기억해둘게요. 언젠가 꼭 되갚아줄 겁니다.”“지금 당장 회사 최근 5년간의 핵심 자료가 필요해요. 구할 수 있어요?”이미 서로 손을 잡기로 한 이상 남설아는 더는 멋쩍게 굴 필요가 없었다.이젠 파트너이니 필요한 건 당연히 요구할 수 있었다.천기준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구할 수 있어요. 시간이 조금 필요하긴 한데 내일 밤까지 드릴게요.”이렇게 말하고 일어선 천기준은 망설이다가 남설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저 이제부터 설아 씨 편이에요. 그 말은 곧 배 대표님을 배신하겠단 뜻이죠. 모두가 배신자를 어떻게 보는지 저도 잘 알아요. 그리고 설아 씨도 목적 달성하면 절 옆에 두지 않을 거란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전 돈이 필요해요. 멀리 떠나서 새 인생 시작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요.”사실 남설아는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더 좋았다.뒤에서 어정쩡하게 기회만 노리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았다.결국 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200억. 일 끝나면 200억 줄게요. 멀리 떠나서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예요.”“감사합니다, 남 대표님!”천기준은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솔직히 처음엔 남설아 성격상 많아야 몇억을
바보도 아닌데 서유라가 천기준의 말에 담긴 냉소와 비아냥을 못 알아챌 리 없었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천 비서님은 그냥 서준이 옆에 붙어 다니는 개일 뿐이잖아요! 근데 감히 나한테 이빨을 드러내요? 일하기 싫어진 모양이죠?”그러자 천기준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무표정하게 대꾸했다.“죄송합니다, 서유라 씨. 저는 배 대표님의 개가 아니라 비서거든요. 개가 좋으시면 대표님께 새로 한 마리 사달라고 하시죠.”서유라는 천기준이 이렇게까지 대들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라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뺨을 올려쳤다.하지만 천기준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번에 붙잡고 차갑게 말했다.“서유라 씨, 선은 지키시죠.”그 순간 병실에 들어선 배서준이 이 장면을 보자마자 성큼 다가와 천기준을 가로막았다.그러고는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대표님, 서유라 씨가 제 뺨을 때리려 했습니다.”천기준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고 곧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덧붙였다.“전 단지 제 몸을 방어했을 뿐입니다. 공격할 생각은 없었습니다.”서유라는 억울함과 분노에 눈이 뒤집힌 채로 배서준에게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서준아, 난 진짜 때리려던 게 아니었어... 하지만 저 사람이 계속 날 모욕했어.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왜 모두가 나한테 이래?”천기준은 이런 ‘울고 떼쓰고 매달리는’ 전형적인 서유라의 방식에 익숙했기에 담담하게 받아치듯 말했다.“병원 CCTV는 음성까지 녹음됩니다. 정말 억울하시다면 언제든지 확인하시면 됩니다.”이 말에 서유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배서준 품에 안긴 채 흐느끼는 것 외엔 더 할 말이 없었다.배서준도 바보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깊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한 명은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여자, 한 명은 오랜 시간 곁을 지켜온 비서.두 사람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배서준은 천기준의 이마를 살짝 손가락으로
“비켜!”배서준은 고함을 내질렀고 눈빛은 이미 싸늘하게 돌아서 있었다.하지만 간병인 안경희는 배서준이 누군지도 몰랐기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이봐요, 전 제 환자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요. 나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아주머니, 괜찮아요. 나가 계세요. 이 사람 제 남편이에요.”‘남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 남설아의 말투에선 명백한 비웃음이 묻어났다.그 말을 들은 안경희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남설아를 돌보며 봐왔던 남자는 언제나 강연찬이었고 이 무서운 얼굴의 남자가 남편이었다는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이렇게 험악하게 구는 남편이라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걱정스러운 얼굴로 남설아에게 물었다.“정말 경찰 안 불러도 괜찮아요?”“괜찮아요, 나가 계세요.”남설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안경희의 손등을 살며시 눌렀다. 진정시키려는 듯한 동작이었다.안경희는 코웃음을 치고 배서준을 노려보았다.“나 문 앞에 서 있을 거니까 손끝 하나라도 대 봐요, 바로 신고할 테니까! 멀쩡하게 생겨선 아내 때리는 놈이라니, 에잇!”그러고는 어깨로 배서준을 밀치며 씩씩하게 병실 밖으로 나갔다.안경희에게 호되게 당한 배서준의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그런 모습을 보며 남설아는 참지 못하고 속으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배서준 같은 사람한테 저런 대접은 평생 처음일 게 분명했다.“서준 씨, 지금 당신 꼴 좀 봐요. 진짜 미친 사람 같아요.”남설아는 몸을 조금 옆으로 틀어 가능한 한 그와 거리를 뒀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딱 하나만 묻겠어. 송우민이랑 아는 사이야?”배서준은 이를 악물고 남설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표정 하나하나를 다 읽어내려는 듯 의심과 긴장이 얽혀 있는 눈빛이었다.결혼 후 이렇게까지 그녀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선 안에서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남설아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역겨움을 느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모르는
“설아가 서도현이 한 짓이라고 했지. 너랑은 무슨 상관이야? 네 동생은 원래 하는 일 없이 빈둥대던 애였잖아. 엇나간 짓 좀 했다고 이상할 것도 없지.”배서준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옆에 있던 서유라는 그 말만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젠 자신이 배서준 마음속에서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걸.예전이라면 자신과 관련된 일에 이성이니 판단이니 그런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언제나 감정대로 움직였던 사람인데 지금은 이렇게까지 차분하다고? 이제는 날 신경도 안 쓰는구나.’“서준아, 설마... 날 사랑하지 않게 된 거야?”서유라는 억울함에 목소리가 떨렸고 눈물이 뚝 떨어졌다.“나도 내가 요즘 어떤지 알아. 진짜 미안해. 그런데도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너무 사랑해서 그래. 너 없이는 안 돼. 진짜 난 너 없으면 안 돼.”말을 하면서 그녀는 조수석에 몸을 웅크렸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그런 서유라의 모습에 한순간 마음이 약해진 배서준은 말투도 한결 누그러졌다.“너한테 화내려는 건 아니었어. 그리고 너 떠날 생각도 없어. 걱정하지 마.”“정말... 정말 믿어도 돼? 정말 날 떠나지 않을 거야?”서유라는 눈가가 촉촉히 젖은 채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그 눈을 마주한 순간, 배서준은 다시 마음이 무너져 내려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연하지, 바보야. 내가 어떻게 널 떠나.”어릴 때부터 줄곧 함께해온 사이였고 수십 년 동안 마음속에 그녀를 품어온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끊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둘은 말없이 차를 타고 해변가 별장까지 도착했다.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서유라는 비명을 지르더니 바로 배서준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배서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장에 매달린 서도현을 바라봤다. 피범벅이 된 몸을 본 순간,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당장 내려!”그의 명령에 별장 안의 도우미가 덜덜 떨며 서도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사람이 바닥에 닿는 순간, 서유라는 비로소 그게 자기
고통이 클수록 남설아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배서준은 병실을 나서자마자 서유라의 팔을 거칠게 붙잡더니 그대로 그녀를 끌고 자신의 차까지 갔다. 그러고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서도현한테 전화해.”“서준아?”서유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배서준을 바라봤다.“너 정말 설아 씨 말 믿는 거야? 진짜 도현이가 그랬다고 생각해?”“전화하라고.”배서준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한번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번엔 협의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었다.서유라는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억울함에 눈가가 벌겋게 물들었지만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들고 서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서도현은 손이 묶인 채 허공에 매달려 모진 매질을 당하고 있었다.“아아아아악!!”비명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간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이어졌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때 울려 퍼진 핸드폰 벨소리는 그에게 마치 천상의 소리처럼 들렸다.“형님! 형님! 저 돈 있어요! 전화 좀 받게 해주세요, 제발요!”서도현은 연신 울먹이며 애원했다. 이제는 정말 더는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전기태는 매질하느라 저린 손을 털며 짜증스럽게 말했다.“남자라는 놈이 여자나 패고 다니더니 이제 와선 우리한테 사정이나 하고 있어? 퉤! 네 그 몇 푼 더러운 돈 누가 신경이나 쓴대?”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힘껏 채찍을 내리쳤다.이제 진짜로 더 못 견딜 것 같았던 서도현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형님, 진짜 돈 있어요! 제발요! 제 몸에 260억짜리 수표 있어요! 다 드릴게요, 살려만 주세요. 제발요!”그 말에 전기태는 순간 멍해졌다.‘이런 놈이 260억짜리 수표를 들고 있었다고?’전기태는 곧장 그의 몸을 샅샅이 뒤졌고 정말로 그 수표를 꺼냈다. 한참을 확인한 뒤, 그는 곧바로 자기 부하에게 넘겼다.“야, 내가 널 완전 우습게 봤구나. 너 좀 있네?”“보아하니 그 여자한테서 꽤 많이도 뜯어냈구먼. 진짜 찌질함의 끝판왕이네.
“남설아, 나 정말 너랑 싸우기 싫어. 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그냥 솔직히 말해.”배서준은 피곤한 듯 미간을 주물렀다. 지금 회사는 전환의 중요한 시점에 있었고 하필이면 집안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앞뒤가 다 막혀 있는 상황에 그는 정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그런 배서준의 지친 모습을 바라보다가 남설아는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담담하게 말했다.“서준 씨, 나 당신이랑 이혼하고 싶어요. 공평하게, 내가 받아야 할 건 전부 다 받는 조건으로요.”“뭐라고?”배서준은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해봤다. 심지어 다시 아이를 가지는 것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바라던 게 결국 돈 챙겨서 떠나는 거였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그 순간 지금껏 참고 있던 인내심과 온화함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배서준은 성큼성큼 다가가 남설아의 목을 움켜잡았다.“이렇게까지 이혼을 서두르는 이유가 내 재산 나눠 가져서 결국 강씨 가문 그놈 도와주려는 거였어? 나쁜년... 대체 두 사람 언제부터 붙어먹은 거야!”분노로 가득 찬 남자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오자 남설아는 비웃음을 터뜨리며 냉소적으로 말했다.“결혼을 우습게 여긴 쪽은 당신이잖아요. 그런데도 이제 와서 나한테 뒤집어씌우겠다고요?”“남설아,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배서준의 손이 점점 더 힘을 주기 시작했다.숨이 막히기 시작하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남설아는 몸부림치다 상처가 당겨지는 고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그 눈물이 배서준의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분명 차가운 물방울인데 배서준은 마치 데인 듯한 느낌이 들어 손을 홱 빼버렸다.그는 천천히 몸을 세우고 눈물에 엉망이 된 여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복잡했다.오랜 세월 부부로 지내면서 온갖 모습을 봤다.교활하고 눈치 빠르고 요령 있게 사람을 다루는 모습들을 말이다.그가 제일 싫어하던 모습들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이렇게 무너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왜인지 모르게 남설아의 눈물이 똑 떨어질 때마다 마음 한구
남설아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그 모습이 어찌나 억울하고 안쓰러운지 배서준의 마음이 한순간 흔들렸다.서유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이제 대놓고 유혹하는 작전까지 쓰네?’배서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지는 걸 보자 서유라의 머릿속엔 경고등이 켜졌다.“서준아, 도현이는 절대 그런 짓 안 했어. 남 팀장이 거짓말하는 거야. 이건 명백한 명예훼손이라고!”“맞아, 맞아, 다 내 잘못이야. 유라 씨 말이 다 맞지.”남설아는 병아리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동의했다.그 말투, 그 표정에 또다시 화가 치밀어오른 서유라는 씩씩대며 성큼 다가와 이를 악물고 말했다.“설아 씨가 서준이 때문에 예전부터 나 싫어한 거 알아. 근데 날 싫어하면 날 미워하면 되지, 왜 하필 우리 동생이야? 걔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고! 설아 씨가 그렇게 대할 이유 없어!”“내가 걔한테 뭘 했다고 그래? 내가 때렸어? 욕이라도 했어?”남설아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리고 갈비뼈 쪽을 손으로 짚으며 배서준을 바라봤다.“당신은 당신 와이프한테 다른 여자가 소리 지르고 삿대질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 세상에 이런 남편이 또 있을까?”그가 ‘남편’이라는 신분으로 자기를 구속하려는 거라면 자신도 그대로 받아치면 되는 일이었다.‘남편’이라는 자리를 원한다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함께 감당해야 하는 게 아닐까?“유라야, 진정해. 나 혼자 얘기 좀 할게. 잠깐 나가 있어.”배서준은 서유라의 팔을 살짝 잡아끌며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서유라는 여전히 미련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결국 이를 갈며 남설아를 날카롭게 노려보고는 병실을 나섰다.서유라가 나가고 나자 병실엔 남설아와 배서준, 단둘만 남았다. 공기는 잠시 얼어붙은 듯 무거웠다.“치료비는 회사 보험으로 처리하면 돼.”배서준이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비록 법적으로는 부부고 아이도 있지만 이 둘은 서로를 잘 모른다. 대화도, 감정도, 공통의 언어도 거의 없었다.그 말을 들은 남설
배서준은 콧방귀를 뀌며 자기 정체부터 내세웠다. 아무리 봐도 이 상황에서 화낼 자격은 자신 쪽이 더 있다는 태도였다.그런 그의 모습에 강연찬은 더 말해봤자 시간 낭비라는 걸 직감했고 입꼬리만 살짝 비웃듯 올리며 말했다.“자기 위치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더 이상 자리만 차지하고 일도 안 하는 짓은 하지 마세요.”“강연찬 씨. 남의 가정 사이에 끼어들어 놓고 그렇게 떳떳합니까? 우리 집안 어른들이 알면 그쪽은 끝이에요.”배서준은 비웃듯 말하며 경고를 날렸다.“배건 그룹 대표란 인간이 고작 하는 짓이 어른한테 일러바치는 거라고요? 진짜 웃기네요. 유치하게.”강연찬은 한마디 남기고 남설아를 한 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병실을 나갔다.남설아는 조용히 앉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러 번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몸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눈을 들자마자 마주친 건 배서준의 날선 눈빛이었다.“내가 몇 번을 말했어? 넌 내 아내야. 배씨 가문 사모님이라고! 남자들이랑 밖에서 얽히지 말라고 했잖아! 창피하게 굴지 마!”“너랑 강연찬, 두 사람 도대체 무슨 사이야?”배서준은 이를 꽉 물고 남설아를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덮쳐 물어뜯을 기세였다.“맞아, 남 팀장.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아침부터 사람 기죽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설마 남편인 서준이를 이 정도로 무시할 줄은 몰랐네.”서유라까지 거들고 나섰는데 말끝엔 마치 남설아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통증도 심한 데다 두 사람의 짜증 나는 공세까지 들으니 남설아의 얼굴빛이 더 창백해졌다.그녀는 갈비뼈 부근을 감싸 쥐고 차분하지만 날이 선 눈빛으로 배서준을 바라봤다.“어젯밤에 왜 안 왔어요? 나 한참 기다렸다고요. 거기서 진짜 죽을 뻔했고요. 그건 알고 있어요?”“난...”배서준은 본능적으로 변명을 꺼내려 했지만 곧 그녀의 말뜻을 눈치채고는 찌푸린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소리야?”“당신이 준 주소로 가서 문을 열었더니 거기엔 서
송우민은 강연찬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자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는 늘 신사적인 인상만 남아 있었는데 이런 야성적인 기운은 처음 느껴졌다.하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은 송우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강연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걱정 마. 난 남의 아내한테 관심 없어.”배건 그룹 며느리가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사람이다.강연찬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선배 왔구나. 밥은?”병실에서 남설아는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눈만 감으면 온몸이 욱신거리고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유일한 위안은 강연찬의 도시락이었다.그녀의 먹을 것만 밝히는 모습에 강연찬은 부드럽게 웃으며 도시락을 테이블에 놓았다.“넌 참, 오직 먹을 생각뿐이지? 다 네가 좋아하는 거로 해왔어. 옥수수 수프도 끓였고.”“선배는 진짜 너무 좋아! 나 선배 사랑해!”“나중에 돈 많이 벌면 선배 내가 책임질게.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매일 밥만 해줘. 그럼 돼.”남설아는 신난 얼굴로 젓가락을 집어 들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그런 천진한 모습에 잠시 말을 망설이던 강연찬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송우민, 그 사람 너 보러 온 거야? 두 사람... 친한 거야?”“친하진 않아. 전에 나 납치했던 사람이야. 나중엔 살기 위해 서로 손잡은 거고.”남설아는 담담하게 말하고 나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근데 왜 다들 그 사람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꺼리더라? 그냥 애 같기만 하구만.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주변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를 모두 두려워하는 게 느껴졌다.그 말에 강연찬은 조급해졌다.“너 제발 그 사람 얼굴만 보고 착한 척하는 거에 속지 마. 겉보기엔 순둥이처럼 생겼지만 속은 냉혈한이야. 완전 미친놈이라고!”“미친놈이든 바보든 날 도와주면 내 친구야.”남설아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한 눈빛으로 강연찬을 바라봤다.“그 사람은 내 목숨 구해준 은인이야. 그 사람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