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리의 초라한 함선 3척과 비교하면 화진의 함대는 무려 100척 가까이 되는 전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전함만도 30척이 넘었고 항공모함 1척까지 포함되어 있었다.이 장면은 헨드리 함대 지휘관으로 하여금 깊은 감회에 잠기게 했다. 몇백 년 전만 해도 헨드리 해군은 세계 해양의 패권을 쥔 최강의 함대였지만 세월이 흐르며 쇠퇴하고 말았다. 반면 한때 세계 각국에 괴롭힘당하던 화진은 이제 해상 강국으로 떠오른 것이다.이 한 함대의 전투력만으로도 헨드리 해군 전체를 능가했다.주작은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설명했다.“이건 긴급히 소집된 남해함대일 뿐입니다. 화진에는 이렇게 큰 함대가 다섯 개나 더 있습니다.”헨드리 지휘관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충격에 빠졌다.양국 함대가 합류하자 윤구주는 설윤을 데리고 남해함대의 기함에 올랐다. 이 전함은 현대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완벽한 작품이었다. 솔직히 말해 이 한 척의 전투력만으로도 헨드리 해군 전체와 맞먹을 정도였다.함대 사령관을 비롯한 장군들이 갑판에 정렬해 그들을 환영했다. 백발이 성성한 함대 사령관이 윤구주에게 다가가 경례를 했다.“해군 대장, 남해함대 사령관 명필무, 구주왕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항했습니다.”“경례 끝. 모두 수고했습니다.”정식 경례가 끝나자 명필무는 바로 윤구주를 꽉 껴안았다. “몇 년 전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네 놈 목숨은 질기겠다 싶었지. 문씨 가문이 널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었어!”명필무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윤구주를 이리저리 만져댔다. 윤구주는 상당히 어색한 표정으로 명필무를 바라보았다.다른 이들 눈에도 이 장면이 매우 이상하게 보였다. 이 노인이 혹시 게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윤구주를 따라온 주작 일행은 이게 화진 특유의 어른이 후배를 보살피는 방식임을 알고 있었다. 마치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만난 손자를 어루만지듯이 말이다.명필무는 윤구주의 오랜 지인이었다. 윤구주가 남부 전쟁터에 있을 당시 남부 내륙의 적을 소탕한 후 해군으로 전
잠시 고민한 후, 윤구주는 명필무에게 헨드리 공주를 소개했다.“명 사부님, 이분이 바로 이자벨라 설윤 공주입니다.”윤구주를 놀라게 한 것은 설윤과 명필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다는 점이었다. “명 장군님, 오랜만입니다.” “공주님,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만 해도 아직 성인이 아니셨죠. 그땐 어린아이였는데, 몇 년 사이에 이렇게 자라셨군요.”명필무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마치 오랜 친척을 대하듯 설윤을 위로했다.윤구주는 곧 설명을 듣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몇 년 전 화진 해군이 헨드리 제국의 초청을 받아 새로 건설된 항구를 시찰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설윤은 왕실 구성원 신분으로 헨드리를 대표해 화진 장군들을 맞이했었다.그 만남은 사실 설윤이 훗날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는 자리였다. 당시 설윤은 걱정 하나 없는 어린 소녀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며 많은 일을 겪고 성숙해진 그녀는 더 이상 예전처럼 밝고 천진난만하지 않았다.서로 소개를 마친 후, 명필무는 즉시 얼굴을 굳히고 윤구주의 이름을 정식으로 부르며 말했다.“저하,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합니다.”“서두를 필요 없어요. 먼저 부상당한 전사들을 치료실로 데려가세요. 윌리엄, 너도 먼저 가서 치료부터 받아. 나는 공주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고 올 테니 회의실에서 보자.”윌리엄은 뭔가 말하려 했지만, 윤구주와 명필무는 이미 설윤과 함께 먼저 자리를 떠났다.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헨드리는 이미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명필무는 윤구주의 군령을 받고 함대를 이끌고 이곳에 집결했다. 하지만 동시에 육도진이 이끄는 정무부의 명령도 받았다.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설윤을 보호하라’는 것이었다. 육도진은 보호는 동시에 통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명필무에게 명확히 전달했다. 즉, 색다른 방식으로 헨드리와 협상해서 화진의 이익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윤구주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개입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화진에 이익이 된다면 육도진이 무엇을 하
“하, 공주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지금까지 구주왕께서 누구를 이렇게까지 배려하시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게다가, 우리 화진은 근대에 당신들 같은 강한 제국들에 침략을 당하면서 국토에서 제멋대로 날뛰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강제로 배상금과 영토를 내주어야 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도와주었더라면, 우리가 이런 처지에까지 몰리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대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실 이 정도까지 말한 것도 윤구주 왕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외교 관례라면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습니다. 당신들과 협상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을 위해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다만, 화진이 우리 헨드리를 도와 폭군을 몰아내고 그 배후의 사악한 신을 처리해 준다면, 어떤 조건이든 논의할 수 있습니다!”고심 끝에 설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제야 말이 통하는군요. 공주님, 식사 하시지요. 모두 공주님의 입맛에 맞춰 준비된 음식입니다.”설윤이 동의하자, 정무부 대표는 즉시 주방에 식사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윌리엄은 회의실에서 꼬박 세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화진의 군부와 정무부 대표들이 설윤을 둘러싸고 방으로 들어왔다.“망할!”이 광경을 본 윌리엄은 탁자를 세게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이건 불공평해! 당신들 화진은 우리 헨드리의 공주를 협박해 불평등 조약을 맺게 강요했다! 화진 이 도둑놈 같은 것들! 틈을 타서 약탈하는 강도들이나 다름없다!”웅!윌리엄의 말이 떨어지자, 회의장에 있던 군부와 정무부 대표들의 분노가 일순간에 폭발했다.“강도? 도둑놈? 그건 당신들이나 할 소리 아닌가?”“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범죄한 증거들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윤구주는 앞으로 나서며 위엄을 내뿜었다. 윌리엄을 깔보는 듯한 태도를 한껏 드러냈다.“이... 구주왕! 화진은 우리 헨드리를 이렇게 대하면 안 됩니다! 설윤은 우리 왕실의 공주입니다! 그리고 우리 헨드리는 아직 그렇게까지 약
고개를 드니 마치 신을 뵈는 듯했다.윤구주를 마주한 윌리엄은 진심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다시 한번 신께서 헨드리를 보우하시길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회의에서 논의할 내용은 단 하나뿐이었다. 사신을 멸하는 것.설윤의 삼촌인 디크스는 사신의 앞잡이였기에 당연히 처단 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설윤이 화진과 어떤 협정을 맺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회의가 끝나고 나서야 윌리엄은 겨우 설윤과 단둘이 대화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곧바로 협정의 내용을 물었다.“별거 없어요. 조건은 단 하나였어요. 사신이 처단되기 전까지 모든 행동은 구주왕의 지시에 따른다는 것.”설윤이 조용히 말했다.“그게 전부라고요? 공주님, 말도 안 됩니다. 화진이 지금까지 겪은 굴욕을 이렇게 간단히 넘긴다고요? 만약 우리가 화진의 입장이었다면 절대 그렇게 안 했을 겁니다.”윌리엄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는 헨드리가 과거 화진에 저지른 짓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헨드리의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의 절반은 화진에서 빼앗아 온 것이었다. 그렇기에 화진이 이 복수의 기회를 놓칠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화진 문명은 뿌리가 깊고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왔어요. 그들의 사고방식과 관점은 당신들과 완전히 달라요. 우리 식으로 화진을 이해하려 들면 안 돼요. 하지만 분명한 건 사신의 힘이 아무리 신통하든 우리가 살길은 화진과 연합하고 구주왕에게 기대는 것뿐이에요.”“협정 내용은 언제든 논의할 수 있지만 사신은 절대로 우리와 협상하지 않을 거예요. 헨드리가 화진과 협상하면서 손해를 본다 해도 사신에게 지배당하는 것보단 나아요.”설윤은 차분하게 분석했다.윌리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화진이 아무리 헨드리를 ‘갈취’한다 해도 헨드리를 노예로 삼으려는 아사 사신보다는 훨씬 나았다.그 후 며칠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설윤은 화진 전함에서 일주일을 머문 뒤 마침내 화진의 통보를 받았다.“공주님, 준비해 주십
헬리콥터가 헨드리를 향해 날아갔다.헬기 안에서 설윤은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두 손은 내내 옷 안에 감춰진 채 드러내지 않았다.그 모습은 물론 현모의 눈에도 들어왔다. 그는 설윤이 옷 속에 숨겨둔 단검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붙잡히지 않으려는 나름의 대비책인 것도 알고 있었다.설윤의 이런 조치는 현모가 보기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만 아는 체는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걸로 안심이 된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다.세 시간 후 헬리콥터는 마침내 케일 공작의 영지에 도착했다. 기체는 곧장 공작령의 고성 위에 착륙했다.이 고성은 지어진 지 오백 년이 넘은 유서 깊은 건물이다. 현대에 들어선 뒤로는 케일 공작의 와인 저장고로 쓰이며 대외로는 개방되지 않았다.고성 안팎은 삼엄한 경비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나의 중대 규모에 달하는 특수부대가 성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 사이엔 현대식 복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푸른 갑옷을 입은 전사들까지 섞여 있었다.이 낯선 분위기에 설윤의 긴장은 극에 달했다.몸을 떨며 헬리콥터에서 내려선 그녀는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걸었다. 상황이 조금이라도 이상해지면 언제든 단검을 꺼내 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러다 고성의 정원에 앉아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윤구주를 발견한 순간, 설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모든 경계심을 내려놓고, 그에게 달려갔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응? 오기 전에 미리 말해뒀잖아. 현모, 올 때 일부러 겁줬지?”윤구주는 현무를 노려보며 말했다.“억울합니다, 왕이시여. 아시다시피 사대 전신 중에서 제가 제일 온화하고 상냥합니다.”현무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윤구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온화하고 상냥하다니...“걱정하지 마세요, 공주님. 그동안 내가 미리 앞길을 정리하면서 많은 위협을 제거해 놓았어요. 케일 성 내에 숨어 있던 아사 신족도 전부 소탕했으니 이제 이곳은 안전합니다.”윤구주는 미소 지으며 설윤을 안심시켰다. 그렇게 말하면서 직접
고성의 로비에는 훨씬 더 냉엄한 기운을 내뿜는 존재들이 서 있었다.그들의 갑옷은 외부 경비병들보다 더 화려했다. 갑옷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문양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고 열댓 개가 넘는 고대의 장신구들이 달려 있었다.설윤은 수련자들의 경지를 구분하는 방법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했고 이런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직접 마주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저 이들은 신전의 간부들이며, 갑옷 위 장신구는 서양의 훈장 같은 것이라 짐작했을 뿐이었다.넓은 로비 안에 수많은 사람 중에 설윤이 아는 얼굴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다만 구석에서 차를 끓이고 있던 회색 로브를 입은 노인이 어딘가 낯익게 느껴졌다.“구주왕께서 도착하셨다!”현모의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지자, 서 있던 신령들이 동시에 몸을 떨었다. 대부분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어떤 이는 아예 현모를 향해 대놓고 눈을 흘겼다.그 모습을 본 윤구주는 비꼬듯 말했다.“현모, 저들이 눈이 먼 것도 아닌데 말이야. 내가 온 거야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슬슬 짜증이 날 만 하겠네.”꿀꺽.모든 신령이 침을 삼켰다.마치 누군가를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말이었다.그들이 현무에게는 불만을 드러내고 대거리할 수 있었던 것도 최소한 싸움 한판쯤은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윤구주는 달랐다. 그의 앞에서 감히 무례를 범하는 것은 곧 스스로 무덤을 파는 셈이었다.모두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바깥의 경비병들과는 달리 이들은 단정한 단일 무릎 꿇기 자세를 취했다. 이것은 그들이 경비병들보다는 지위가 높다는 것을 나타냈다.이는 신령들의 체면을 어느 정도 보장하기 위해서 그들이 화진 대표와 협의하여 결정한 예식이었다.윤구주는 아무 말 없이 설윤을 이끌고 정좌에 앉았다.그는 온몸을 가죽 소파에 널브러뜨리듯 기댄 채 편하게 앉았다. 설윤은 한 귀퉁이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설윤, 오늘의 주인공은 당신이에요. 저 사람들 눈치 볼 필요 없어요.”“앞으로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공주님을 위해
설윤의 반응은 윤구주 예상대로였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오는 길 동안 긴장했던 이유였다. “무릎 꿇고 있는 자들은 일어나거라. 아무 자리에나 앉아서 우리 화진의 최고급 차나 마시도록 해. 너는 설윤 공주가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으니 계속 무릎 꿇고 있어.” 윤구주의 말이 떨어지자 홀에 있던 모든 신명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은 뒤 하나같이 비웃는 눈빛으로 그 노인을 쳐다보았다. 타인의 불행을 구경하는 것은 너무 재미있었다. 노인은 공포에 질려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몇 번 조아리자 이마에 상처가 났고 바닥에는 온통 피였다. “윤구주 씨, 이 사람은...” “알고 있어요. 케일 공작이죠. 헨드리 왕실의 적수로 헨드리 제국 안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 했으며 헨드리 제국에서는 지금 당신의 삼촌 디크스와 같은 악당이고요.” 윤구주가 설명했다. 설윤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 공작은 헨드리의 배신자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헨드리 제국 안에 자신의 영지를 만들고 케일 상단으로 제국의 상업을 독점했다. 심지어 그 영지 안에 군대까지 세웠다. 특히 몇 년 전, 케일 공작은 왕실 후계자인 설윤을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다행히 왕실 정보부가 미리 알아채어 계획을 저지할 수 있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하지만 왜 이 자가 헨드리 제국에서 그렇게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처벌받지 않았는지 알아요?” 윤구주는 웃으며 물었다. “왕실의 뒤에 더 큰 세력이 있다고 했어요. 이제야 알겠어요. 그 뒤에도 신명이 있었네요.” 설윤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그 뒤에는 확실히 신명이 있어요. 좋게 말하면 헨드리에서의 빙신전 이익 대변인이고 나쁘게 말하면 빙신전의 하수인이죠. 헨드리 제국이 어쩔 수 없었던 건 당연해요.” 윤구주가 말했다. 케일 공작은 더욱 공포에 떨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이미 구주왕에게 항복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윤구주는 그의 목숨줄을 쥐고 있었다. 그를 죽이는 건 개미 죽이듯이 쉬운 일이었다. “
“설윤 공주, 당신도 알다시피 대국 간의 전쟁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어요. 오직 이익만 있을 뿐이에요. 곤륜 구역과 우리 화진은 적대한 지 천 년이 넘었어요. 하지만 지금의 저도 빙신전과 협력하고 있지 않나요?” 설윤이 마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자 윤구주가 말을 건넸다. 이 말을 들은 케일 공작은 즉시 모든 재산, 군대, 영지를 설윤에게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목숨만은 살려주고 공을 세워 죄를 갚게 해 달라고 빌었다. 설윤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케일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충실한 노예로 변신했다. 그는 서둘러 설윤을 상석에 모셔다 앉혔다. “구주왕, 영원한 친구는 없다는 그 말에 또 다른 의미가 있군요.” 바로 그때, 옆방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빙신전의 신명들은 일제히 일어나 옆방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사람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신명들이 이렇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니 설윤도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윤구주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차를 마셨다. 현모는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 남자가 화려한 옷을 입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천지를 짓밟을 듯했고 차가운 눈빛은 모두를 내려다보며 경멸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끝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왕관을 쓴 그의 위엄 있는 자세와 강렬한 기운은 왕실 출신인 설윤도 깊은 열등감을 느끼게 했다. 윤구주가 없었다면 그녀도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홀을 둘러보았다.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모든 사람을 짓눌렀다. 마치 무릎을 꿇지 않으면 신의 위엄을 모독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윤구주의 휘하 군신인 현모조차 숨이 막힐 정도로 압박을 느꼈다. 불쾌했지만 이 자가 정말 강력하다는 건 인정해야 했다. 그가 천상의 신군처럼 모든 이를 내려다보며 압박감을 주던 그때, 윤구주가 짜증 난 듯 말했다. “적당히 해
“충성을 맹세해. 우리 화진의 투명장과 마찬가지다. 비록 너희 맹세가 별 의미는 없지만 형식적인 절차는 거쳐야 해.” 윤구주는 손을 저었다. 윤구주의 말에 성기사는 번역기를 꺼내며 말했다. “저희는 이자벨라 설윤 공주님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하지만 구주왕 폐하도 약속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아사 신족을 완전히 섬멸할 때까지 최전선에서 싸워주세요.” 윤구주는 이미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 자신이 없으면 이들은 감히 아사 신족과 맞서지도 못할 것이다. 화진을 대표하는 자신이 등장했기에 그들에게 저항할 용기를 준 것이다. “몇 번을 말해야 해? 너희가 없어도 나는 아사 신족을 섬멸할 거야! 한 마디로 만약 너희가 앞으로 화진을 적대한다면 나는 하나씩 처단할 거야!” 이제 아무도 말이 없었다. 구주왕은 정말 순수한 사람이었다. 오직 자신의 나라만을 생각하는 순수하고 단일한 목표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무적이었다. 기사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설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전하,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신을 보호할 것입니다. 이미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설윤은 여전히 충격 속에 빠져 있었다. 행복이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용기와 결심을 보여줘요. 이틀 후, 헨드리 의회에서 디크스를 몰아내고 당신의 권력을 되찾아야 해요!” 윤구주의 목소리는 설윤에게 확신을 주었다. “아니요! 저는 헨드리 국민의 존엄을 지킬 거예요! 신이라도 우리를 노예로 만들 순 없어요!” 설윤의 눈빛은 확고해졌다. 윤구주가 이 모든 준비를 한 이유는 그녀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이틀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의회가 열리는 날, 빙신전과 황혼 기사회의 수련자들은 헨드리 왕도에 잠입해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케일 공작은 전날 기자회견을 열어 설윤에게 충성할 것을 선언하고 디크스의 즉위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영향으로 헨드리 국내외 군대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왕도
“황혼 기사회는 어떤 국가나 세력을 위해 봉사하지 않아요. 그들의 존재 목적은 단 하나, 종말의 전쟁을 대비하는 거예요. 평소에는 수련자처럼 생활하죠. 황혼 기사회는 유럽 대륙에서 유일한 정통 수련자 집단이에요.” 윤구주가 설명했다. 설윤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럽이 가장 위험한 순간에만 그들이 나타난다니!’ 이건 진정한 기사 정신이었다. 설윤은 그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설윤 공주, 오해예요. 그들은 하나의 구원 단체예요. 그들의 고행은 모두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죠. 이자벨라 설윤 당신이 바로 유럽의 구세주예요. 헨드리는 유럽의 강국으로 아직 완전히 침식되지 않은 마지막 국가죠. 헨드리마저 함락되면 유럽 전체가 제신전의 노예가 될 거예요.” 설윤은 깜짝 놀랐다. ‘내가 구세주라고? 그럴 리가!’ “전하, 황혼 기사회 초대 성기사는 예언을 남겼습니다. 종말의 악마 불길이 유럽 대륙을 태울 때 헨드리의 진주가 구세주가 되어 국민을 구할 것이라고요.” 성기사는 말하며 초대 성기사가 남긴 예언서를 꺼냈다. 설윤은 대충 훑어보았다. 예언 속에는 구세주의 출현만 언급했고 헨드리 출신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동방의 신비로운 별이 떠오를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윤구주는 동방에서 왔다. 구세주는 화진의 구주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혹시 착각하신 거 아닌가요? 구주왕이 진짜 구세주일 텐데요!” 설윤이 윤구주를 바라보자 기사들은 어색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하, 제가 맞다고 하면 맞는 거예요. 이건 서양의 문명이잖아요. 동방에서 온 제가 구세주가 되면 당신들 문명은 끝나는 거 아니에요? 구세주는 당신이어야만 해요.” 윤구주는 거리낌 없이 웃으며 말했다. 설윤은 깨달았다. 예언은 사실이었다. 윤구주가 진짜 구세주다. 하지만 문명의 입장을 고려해 구세주를 서양인으로 바꾼 것이다. “구주왕, 당신은 정말 명예를 전혀 개의치 않나요? 이런 영광을 저에게 양보하다니...” 설윤은 동방에서 온 이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
“대협이요?” 윤구주는 웃었다. 그렇게 불린 건 처음이었다. “대협은 별로예요. 화진에서 대협은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던데요. 차라리 곤륜 구역이 지어준 ‘살신'이라는 별명이 더 마음에 들어요.” 윤구주는 농담처럼 말했다. “아, 방금 기사 얘기했죠?” 윤구주는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성 밖을 바라보았다. 설윤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윤구주가 장난을 걸자 그녀도 장난스럽게 말했다. “진짜 제가 꿈꾸던 기사가 저를 구하러 올까요?” 설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먼 곳에서 우렁찬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헨드리 고전풍의 가야금 소리가 흘렀고 수많은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완벽하게 무장한 기사들이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헨드리의 오래된 군기를 들고 있었다. 설윤은 그 깃발을 알아보았다. “성전 기사단의 깃발이에요! 몰타 기사단과 튜튼 기사단도 있어요!” 이들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세 기사단이었다. 설윤은 그 외에도 산티아고 기사단 같은 덜 유명한 기사단도 보았다. 기사들은 갑옷을 입고 기사단별로 정연한 대열을 이루어 성안으로 들어왔다. 성안에만 천 명 가까운 기사가 들어왔다. 밖에는 더 많은 기사와 종자들이 모여 있었다. 설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맨 앞의 열세 명의 기사가 말에서 내려 윤구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 안팎의 기사들도 모두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했다. 금색 갑옷을 입은 기사는 어눌한 화진어로 윤구주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윤구주를 ‘존경하는 화진의 왕’이라 부르며 ‘전하’라는 호칭을 썼다. 서양에서 군주는 ‘전하'로 불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구주의 ‘구주왕'은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 화진의 왕 중에서도 최고의 지위였다. 물론 윤구주는 이런 세세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윤구주에게 인사한 후, 열세 명의 기사는 설윤 앞으로 다가갔다. 신들의 위압감을 이미 경험해 본 설윤은 이 기사들에게서도 동등한 강도의 기세를 느꼈다. 다만 분위기가 달
설윤은 자신의 출생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겼다. ‘어울리지 않아...’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정말 마음이 아팠다.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 슬픔에 잠긴 사람은 사실 윤구주였다. 그의 감정에 자신이 휩쓸린 것이었다. “구주왕, 화진의 인황이자 수호신인 이런 신화 같은 인물도 평범한 사람처럼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을까?” 설윤은 윤구주가 사해 사건에서 자신을 배신한 애인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떠올렸다. “그 여자의 이름은 문아름이었지. 화진에서 아름은 절세미인을 뜻하는 말이야. 윌리엄이 전에 이야기한 적 있어. 그 여자는 화진의 전설적인 인물로 스스로를 여자 제갈이라 칭했지만 윌리엄은 독한 수단을 쓰는 독사 같은 여자라고 했어...” 갑자기 한 차례 차가운 기운이 밀려오며 살벌한 함성이 들려왔다. 설윤은 깜짝 놀라 넘어졌다. 윤구주는 명상 중에 설윤의 중얼거림을 듣고 특히 ‘문아름'이라는 이름에 마음이 흔들려 살기를 발산한 것이었다. 넘어진 설윤은 두려움에 떨었다. 지금의 윤구주는 너무 무서웠다. 역시 곤륜 구역이 붙인 ‘살신'이라는 별명에 걸맞았다. 이건 어떤 방법으로도 가라앉힐 수 없는 증오의 기운이었다. 세상을 불태워도 그의 분노를 잠재우기 어려울 것 같았다. “흠, 한밤중에 여기서 왜 제 수련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거죠? 수행 중인 수련자에게 방해는 금물이에요.” 윤구주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만 해도 천지를 불태울 듯한 살기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감춰져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무서웠다. “휴, 됐어요. 제가 마음이 흔들린 탓이죠. 애초에 지금 이 시간에 수련하는 게 아니었어요.” 윤구주는 직접 설윤을 일으켜 정원의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옆자리에 마주 앉아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설윤은 계속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냉철한 남자가 정말로 깊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니.’ “구주왕, 우리 동서양의 사고방식은 달라요. 서양인은 간단해요.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하지만 당신은 그 여자
빙신전의 수련자들은 의아해했다. ‘이렇게 간단하다고? 아사 신전과 헨드리에 주둔한 다른 신전들을 상대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설윤을 보호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왜? 임무가 쉽다고 생각해? 인간 공주의 신분을 과소평가하지 마. 설윤 공주는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해. 왕실이 일찍이 설윤 공주를 후계자로 선전했기 때문에 그 신분은 이미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어. 게다가 아사 신전은 헨드리를 통제하려는 거지 헨드리를 전쟁의 불길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게 아냐. 그들은 헨드리의 재정 대권을 장악하려는 거야. 국왕의 자리는 오직 설윤이나 디크스만이 차지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왕실, 심지어 국체를 바꾸는 건 헨드리를 혼란에 빠뜨릴 거야. 그래서 아사 신족은 이번에 직접 나서 설윤을 제거하려 할 거야.” 윤구주가 핵심을 명확하게 말하자 빙신전의 신들도 깨달았다. “살신 전하, 안심하세요! 제가 직접 헨드리의 공주를 보호하겠습니다. 아사 신전의 신왕 오딘이 직접 온다 해도 제가 그와 싸워 결판을 내보겠습니다!” 빙신전 전주가 나서며 말했다. ‘전하'라는 호칭에 윤구주와 설윤 모두 당황했다. 설윤은 신계의 세력들은 잘 모르지만 화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전에 화진 국주가 조서를 내려 군사와 정치의 모든 권한을 윤구주에게 넘겼다. 얼마 전 화진에서는 새로운 공고를 내렸는데 구주왕이 새로운 화진의 인황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윤구주는 화진의 차기 국주가 될 것이며 심지어 황제로 등극할 가능성도 있었다. 윤구주는 이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화진의 백 년 부흥 대계가 중대한 국면에 접어든 지금, 인황이 등장해 민심을 모아 국운을 끌어 올려야만 화진을 부흥시킬 수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의회는 3일 후에 열리니까 3일간 휴식해. 우리의 목표는 헨드리 왕도다!” 모든 인원이 준비하러 떠났다. 설윤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3일 후면 결전
가톨릭을 언급하자 설윤은 눈이 번쩍 뜨였다. 설윤이 무슨 질문을 하려는지 알아챈 현모가 미리 답했다. “당신들이 믿는 가톨릭은 몇백 년 전에 이미 다른 신전 세력에게 멸망했습니다. 아직 일부 신들이 남아 있지만 이미 삼류 수준으로 전락했죠.” 설윤의 신앙이 무너졌다. 교회의 교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였다. ‘신도 죽을 수 있다고?’ “현재 곤륜 구역의 주요 세력은 삼도, 육전, 십이각입니다. 삼도는 고신도, 무도, 검도입니다. 육전은 수신전, 빙신전, 희랍 신전, 아사 신전, 화신전, 그리고 극락 신전입니다. 십이각은 자주 바뀌니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이것이 신계의 세력 구분입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천지의 기운을 흡수하는 수련자들일 뿐 그렇게 신비로운 존재도 아니고 신화적인 색채는 그저 세상을 속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죠.” 현모가 설명했다. 설윤의 세계관이 무너졌다. 정보가 너무 많아서 당장 소화진기 어려웠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바로 정신이 나갔을 것이다. 설윤도 한참 후에야 겨우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럼 지금 우리 헨드리를 침략하려는 건 아사 신전이군요!” 설윤은 침착하게 말했다. “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현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현모는 설윤에게 헨드리에 자리 잡은 신전이 아사 신전만이 아니라 빙신전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다만 지금은 윤구주에게 항복한 상태였다. 설윤은 헨드리의 배후 세력이 이렇게 복잡할 줄 몰랐다. 그래서 제국 안에 이렇게 많은 신교 신앙이 존재했던 거였다. “설윤 공주, 공주님 혼자서는 힘이 부족해요. 헨드리 왕실도 거의 남아 있는 게 없고 의회와 각급 장교들도 대부분 잠식당한 상태예요. 그래서 빙신전의 힘을 빌려야만 반격할 수 있어요.” 윤구주가 말했다. 윤구주가 빙신전 전주를 바라보자 윤구주의 뜻을 알아차린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300석의 의회 의원 중 빙신전이 50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약 2개 여단이 빙신전의 지휘를 받고 있고 케일 휘하의 병력을 합치면 총 5개
“설윤 공주, 이 7일 동안 제가 한 일이 많아요. 케일 영지 내의 아사 신족을 소탕한 건 부수적인 거고 중요한 건 빙신전을 설득했다는 거예요. 이제 그들은 기꺼이 제 밑에서 일할 거예요. 다만 공을 세워 죄를 갚은 뒤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빌더군요.” 윤구주가 설윤에게 말했다. 설윤은 어리둥절했다. 빙신전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라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뒤에 있던 현모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왕, 정말 말재주가 좋으시네요. 사실은 왕이 곤륜 구역까지 쳐들어가 숨어 있던 빙신전 전주를 잡아서 피떡으로 만들고 항복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 부하들에게 보여줬잖아요. 그제야 그들이 현실을 깨닫고 항복한 거라고요!” 현모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까는 현모가 참지 못했는데 이제는 빙신전 사람들이 참지 못했다. 이미 충분히 치욕적인데 현모가 또다시 그 치욕을 들춰냈다. “그만! 난 살신 윤구주에게 항복한 거야.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지? 당시 윤구주도 인정했던 일이야!” 그 남자는 분노와 굴욕에 차 말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윤구주도 동의한 사실이다. 빙신전은 오직 윤구주에게만 항복하겠다고 했다. 차라리 그의 개가 되더라도 화진에 항복하지 않겠다고 했다. 화진에 항복하면 적어도 체면은 유지할 수 있지만 그들은 오직 윤구주에게만 굴복하길 원했다. 윤구주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기꺼이 받아들였다. 어찌 됐든 윤구주에게는 별 차이가 없었다. 아무튼 아까 허세를 부리던 자가 바로 빙신전의 전주였다. 경지는 극 신급 절정 후기로 황자에 거의 근접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윤구주에게 항복하는 게 굴욕이라고만 볼 수도 없었다. 사실 빙신전의 최강자는 빙황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빙황은 빙신전을 거의 장악한 상태였고 빙신전 전주는 원래 빙황을 피해 숨어 있었다. 그런데 강력한 빙황이 윤구주에게 살해당했고 곤륜 구역의 다른 신전들은 기회를 틈타 빙황의 세력을 전멸시켰다. 빙신전까지 밀어붙이려는 순간, 윤구주가 곤륜 구역에 쳐들어와 숨어 있던
“설윤 공주, 당신도 알다시피 대국 간의 전쟁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어요. 오직 이익만 있을 뿐이에요. 곤륜 구역과 우리 화진은 적대한 지 천 년이 넘었어요. 하지만 지금의 저도 빙신전과 협력하고 있지 않나요?” 설윤이 마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자 윤구주가 말을 건넸다. 이 말을 들은 케일 공작은 즉시 모든 재산, 군대, 영지를 설윤에게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목숨만은 살려주고 공을 세워 죄를 갚게 해 달라고 빌었다. 설윤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케일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충실한 노예로 변신했다. 그는 서둘러 설윤을 상석에 모셔다 앉혔다. “구주왕, 영원한 친구는 없다는 그 말에 또 다른 의미가 있군요.” 바로 그때, 옆방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빙신전의 신명들은 일제히 일어나 옆방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사람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신명들이 이렇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니 설윤도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윤구주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차를 마셨다. 현모는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 남자가 화려한 옷을 입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천지를 짓밟을 듯했고 차가운 눈빛은 모두를 내려다보며 경멸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끝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왕관을 쓴 그의 위엄 있는 자세와 강렬한 기운은 왕실 출신인 설윤도 깊은 열등감을 느끼게 했다. 윤구주가 없었다면 그녀도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홀을 둘러보았다.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모든 사람을 짓눌렀다. 마치 무릎을 꿇지 않으면 신의 위엄을 모독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윤구주의 휘하 군신인 현모조차 숨이 막힐 정도로 압박을 느꼈다. 불쾌했지만 이 자가 정말 강력하다는 건 인정해야 했다. 그가 천상의 신군처럼 모든 이를 내려다보며 압박감을 주던 그때, 윤구주가 짜증 난 듯 말했다. “적당히 해
설윤의 반응은 윤구주 예상대로였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오는 길 동안 긴장했던 이유였다. “무릎 꿇고 있는 자들은 일어나거라. 아무 자리에나 앉아서 우리 화진의 최고급 차나 마시도록 해. 너는 설윤 공주가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으니 계속 무릎 꿇고 있어.” 윤구주의 말이 떨어지자 홀에 있던 모든 신명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은 뒤 하나같이 비웃는 눈빛으로 그 노인을 쳐다보았다. 타인의 불행을 구경하는 것은 너무 재미있었다. 노인은 공포에 질려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몇 번 조아리자 이마에 상처가 났고 바닥에는 온통 피였다. “윤구주 씨, 이 사람은...” “알고 있어요. 케일 공작이죠. 헨드리 왕실의 적수로 헨드리 제국 안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 했으며 헨드리 제국에서는 지금 당신의 삼촌 디크스와 같은 악당이고요.” 윤구주가 설명했다. 설윤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 공작은 헨드리의 배신자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헨드리 제국 안에 자신의 영지를 만들고 케일 상단으로 제국의 상업을 독점했다. 심지어 그 영지 안에 군대까지 세웠다. 특히 몇 년 전, 케일 공작은 왕실 후계자인 설윤을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다행히 왕실 정보부가 미리 알아채어 계획을 저지할 수 있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하지만 왜 이 자가 헨드리 제국에서 그렇게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처벌받지 않았는지 알아요?” 윤구주는 웃으며 물었다. “왕실의 뒤에 더 큰 세력이 있다고 했어요. 이제야 알겠어요. 그 뒤에도 신명이 있었네요.” 설윤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그 뒤에는 확실히 신명이 있어요. 좋게 말하면 헨드리에서의 빙신전 이익 대변인이고 나쁘게 말하면 빙신전의 하수인이죠. 헨드리 제국이 어쩔 수 없었던 건 당연해요.” 윤구주가 말했다. 케일 공작은 더욱 공포에 떨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이미 구주왕에게 항복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윤구주는 그의 목숨줄을 쥐고 있었다. 그를 죽이는 건 개미 죽이듯이 쉬운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