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철이 세나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던 중, 윤구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염수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세나스? 그놈이 뭔데 대단하다고 떠들어대는 거지?”“무례하다! 감히 내 아버지를 모욕하다니!”세나미는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염수천의 말에 분노하며 외쳤다.그러나 염수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뭐 어쩔 건데? 옛날 낭파산 전투 때, 우리 왕께서 너희 설국의 정예 병력 백만을 도륙 내셨지! 그리고 네 아버지 눈 하나를 꿰뚫어버린 일, 기억 못 할 리 없을 텐데? 네 아버지한테 물어봐라. 아직도 그날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는지 말이야.”이 말에 세나미는 한순간 침묵했다.6년 전, 열국 전쟁.그때 세나미는 겨우 14살이었다. 그녀는 광명 신전에서 수련 중이었고,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하지만 그 전투로 인해 설국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고, 그녀의 아버지 세나스는 설국의 백만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가 낭파산에서 전멸당했다.설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으며, 세나스 일생의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다.설국인이라면 누구나 이 일을 알고 있다. 세나미 역시 그 진실을 모를 리 없었다.그러나 이내, 세나미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천하무적이라는 화진의 구주왕이 대단하면 뭐 하냐? 결국엔 죽어버렸잖아!”윤구주가 죽음의 바다에 빠졌다는 소식 이후, 모두가 그가 죽었다고 믿었다.세나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염수천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유기철도 웃음을 터뜨렸다.“뭐가 웃긴 거지?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세나미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화진에서 구주왕은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염수천과 유기철이 그의 죽음을 듣고도 웃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너희 설국의 오랑캐 놈들은 내가 죽었다고 진짜로 믿은 건가?”벼락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세나미의 귀를 때렸다.세나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윤구주를
이 생각에 다다르자, 세나미는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왜? 내가 엄청 늙었어야 했나?”윤구주는 냉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그 말에 붉은 머리칼과 굴곡진 몸매를 가진 세나미는 잠시 얼어붙었다.사실이다.세나미는 윤구주 같은 전설적인 존재는 분명 늙은 괴물 수준의 외모일 거라 생각해왔다.하지만 지금 이렇게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자신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이건...그녀를 한순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네가 살아 있다고 해도 내가 두려워할 것 같아?”“내 스승님은 신전의 제1대사관이셔! 네가 감히 날 붙잡기라도 한다면, 스승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게다가 우리 설국의 수만 전사들이 반드시 너희 화진과 전쟁을 벌일 거라고!”세나미는 단호하게 외쳤다.그러나 윤구주는 그 말을 듣고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전쟁?”“너희 설국 따위가 그럴 용기가 있을 것 같아?”“옛날에 내가 혼자 한 자루 검만 들고 너희 설국 황도를 휘저었던 거 기억 못 하나? 이번에는 네 눈앞에서, 내가 설국을 어떻게 멸망시키는지 직접 보여주겠다!”세나미는 그의 말에 깜짝 놀라 외쳤다.“너, 네가 대체 뭘 하려는 거야?”윤구주는 두 손을 뒤로 짚으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설국이 과거 열국의 치욕을 씻어내고 싶어 하던데... 좋아. 내가 그 기회를 주지.”“지금부터 넌 내 노예가 될 거야!”그 말이 끝나자마자, 윤구주는 손가락으로 복잡한 결계를 그리더니, 세나미의 미간에 손을 댔다. 그 순간, 뜨거운 인장이 세나미의 정신 세계 깊숙한 곳에 새겨졌다.눈앞의 설국 여전사는 미간에 인장이 새겨지면서 온몸이 강하게 떨렸다. 그녀의 모든 정신력이 마치 강제로 묶인 듯 인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마치...그녀의 혼이 완전히 그 인장에 의해 지배당한 듯했다.“너... 너 이 악마,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세나미는 두려움에 휩싸인 채 외쳤다.“그저 네 정신 세계에 생사인을 새긴 것뿐이
「애도하라! 애도하라!」화진의 모든 서버는 묵념하며 구주왕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강성시의 한 해변가.비키니를 입고 완벽한 몸매를 드러낸 소채은이 미간을 찌푸리고 핸드폰으로 묵념하는 장면을 쳐다보고 있었다.“갑자기 뭐야?”“벌건 대낮부터 무슨 애도람?”“서버 전체가 묵념하고 애도한다고?”“아, 미치겠네. 어떤 사람이 죽었길래 다들 이렇게 난리인 거지?”핸드폰 화면을 5분동안 뚫어져라 지켜보고나서야 소채은은 헤드 메세지를 클릭했다.빨간색으로 적힌 몇글자가 소채은의 눈에 들어왔다. 대형 사이트의 홈페이지마다 헤드라인으로 걸려 있었다.「구주 군신이 어제 10개 나라에서 온 강자의 연합공세로 죽음의 바다에서 전사했습니다.」「이 전쟁으로 파란 바다가 핏빛으로 물들었고 망망대해에 시체가 떠올랐습니다.」「이 전쟁은 한 사람이 한 군을 이끌고 10개 나라의 백만 군사를 온힘을 다해 격파한 전쟁이었습니다.」각 대형 사이트의 헤드라인을 보며 소채은의 앵두같은 입술이 동그랗게 오무려졌다.‘구주 군신? 할아버지가 자주 말씀하시던 무패의 전설 아니었나? 그런데 전사했다니.’“그래서 서버 전체가 묵념하고 있구나. 이 무패의 전설이 죽은 거였어?”이 “구주 군신”의 사망 소식을 조금 더 검색해보다가 소채은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구주왕은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고 화진의 레전드 히어로가 맞았다.하지만 소채은과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에게 벌어진 시끄러운 일도 아직 다 해결하지 못했다.소채은은 바닷가에 누워 집안 일을 고민했다. 그러자 절세의 미모에 걱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따르릉!”그때 그녀의 전화가 울렸다. 소채은은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친구였다.“여보세요?”전화를 받았다.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친애하는 소채은 아가씨, 도대체 요즘 어디를 싸돌아 다니길래 연락이 안되는 거야?”“란이야, 왜? 나 지금 옛 본가에서 휴가 중인데.”소채은이 음료수를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 남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파도에 휩쓸리면서 그저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착한 소채은은 이 모습을 보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사람을 구하려 했다.다행히 수영을 꽤 잘하는 편이라 소채은은 생사를 알 수 없는 검은 옷 남자를 끌고 바닷가로 힘껏 헤엄쳐 갔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써서야 소채은은 그 남자를 바닷가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소채은은 크게 숨을 내쉬고는 얼른 남자의 생사를 확인했다.맥을 짚어보니 뛰고 있긴 했지만, 너무 미세했다. 그래도 살아있었다.소채은은 다시 고개를 숙여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었고 옷은 이미 바닷물에 푹 절여져 있었다.소채은은 남자를 반듯하게 눕히고 나서야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뚜렷한 이목구비에 잘생긴 얼굴을 가진 절세 미남이 따로 없었다.하지만 아쉽게도 바닷물에 너무 오래 떠 있어서 얼굴이 창백하고 핏기가 없었다.“너무... 잘생겼잖아!”소채은은 남자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심박수가 빨라졌다. 하지만 소채은은 얼빠가 아니었다.심호흡을 하고는 남자에게 심폐소생술을 시전했다. 몇십 번 정도 시전하니 남자의 맥박이 돌아왔다. 남자를 살려낸 것이었다.“와, 드디어 살렸네!”소채은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근데 이 사람 누구지? 왜 바다에 버려진 거지?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이렇게 사람 하나 없는 외진 곳에 버려뒀다가 밀물이라도 들어오면 죽게 놔두는 거나 다름없잖아.”한바탕 고민한 끝에 소채은은 이 생판 모르는 남자를 잠시 옛 본가에 데려가기로 했다.옛 본가에 도착해 소채은은 남자를 자기의 침대에 눕혔다.온몸에 모래가 묻은 소채은은 쓰러진 남자를 보고 먼저 샤워를 한 뒤에 병원에 데려가려 했다.한편, 굽이진 산길에 3대의 벤츠가 달리고 있었다.“채은이 이 계집애 진짜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야?”“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혼자 옛 본가에 휴가를 와?”“채은이 친구가 제때 알려주지 않았으면 이 계집애를 어디서 찾아?”
“아빠, 큰아버지,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소채은은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채은아, 지금 뭐 하는 거야?”“이 남자는 또 누구야?”소청하가 호통을 쳤다.특히 소채은이 샤워 가운을 두른 채 벌거벗은 남자와 침대에 있는 걸 보니 뇌출혈이라도 올 것만 같았다.소채은은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하고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해명하기 시작했다.“아빠, 오해하지 마요. 이 남자 모르는 사람이에요.”“뭐? 모르는 사이라고?”“이 계집애야! 미쳤어? 모르는 사이에 잠자리를 가져?”소청하가 포효하다시피 했다.“아빠 일단 내 말 좀 들어봐요. 진짜 모르는 사람이예요. 그냥...”소채은이 해명하려는데 큰아버지 소천홍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둘째야, 진짜 대단하다.”“딸을 참 훌륭하게 키웠어. 모르는 남자와 잠자리까지 다 들고.”“곧 중해 그룹과 정략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이 계집애 어떻게 처리할지 좀 말해봐.”소청하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눈동자마저 빨개졌다.“망할 계집애, 우리 소씨 가문이 뭘 잘못해서 너 같은 불효녀를 낳은 거야?”“차라리 때려죽이고 말지.”말이 끝나기 바쁘게 소청하는 손을 들어 소채은의 뺨을 때리려 했다.소청하의 손이 소채은의 어여쁜 얼굴에 거의 닿으려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차가운 손이 소청하의 팔목을 움켜잡았고 소채은을 자기 뒤로 숨기기까지 했다.소채은은 순간 멍해졌고 고개를 들어보니 건장하기 그지없는 뒷모습과 등 뒤에 새겨진 용의 머리가 보였다.‘이 남자 깨어난 거야?’소청하는 건장한 체구를 가진 남자에 의해 단번에 손목을 잡혔고 팔이 부러질 것처럼 아파 언성을 높였다.“너... 너... 뭐하자는 거야?”남자는 거기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군주처럼 소청하를 내려다봤다.“놔, 이거 놓으라고!”소청하가 고함을 질렀다.하지만 남자의 손은 마치 무쇠처럼 전혀 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이봐라, 이 새끼 처리해.”소청하의 분노가 끝내는 터지고
소채은은 옷을 갈아입고 멍해서 쓰러진 남자 곁을 지켰다.이 남자는 진짜 잘생겨도 너무 잘생겼다. 게다가 온몸으로 군주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쓰러져 있지만 않으면 남신이 분명했다.“이 사람 도대체 누구지?”“왜 바다에 떠 있었던 거지?”“그리고 왜 간단한 손놀림만으로 소씨 가문 보디가드를 쓰러뜨릴 수 있는 거지?”무수히 많은 의문이 소채은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호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인지 소채은은 이 남자를 더 알아가고 싶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소채은은 침대맡에 누워 잠이 들었다.그때 소채은은 작은 움직임을 느꼈다.비몽사몽인 상태로 눈을 떴다가 이내 “악!”하고 비명을 질렀다.어느새 기절했던 남자가 깨어 있었다.그리고 아주 올곧은 자세로 그녀 앞에 서 있었다.이 광경을 보고 소채은 놀라서 뒷걸음질 쳤고 경계 태세로 물었다.“당... 당신... 뭐하자는 거예요?”남자는 막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멍한 눈빛으로 다시 소채은을 쳐다봤다.“당신은... 누구고... 여긴 어디죠?”매력 있는 목소리였지만 의문으로 가득 찬 말투였다.소채은이 얼른 대답했다.“저는 소채은이라고 해요. 제가 바다에서 당신을 구한 거예요.”“바다요?”남자가 다시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맞아요. 바다에 떠 있었던 거 기억 안 나요?”소채은이 귀띔했다.남자는 바다라는 말을 듣더니 멈칫했다.갑자기 머릿속에 수많은 죽음을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고 셀 수도 없는 시체들이 핏빛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장면이 보였다.매캐한 연기와 군함이 불바다 속에서 망가지고 있었고 많은 사람이 불구덩이에서 목 놓아 부르고 있었다.마지막으로 그는 사방에서 까맣게 몰려오는 강자들이 그를 향해 달려오던 걸 떠올렸다.최후의 최후에 그는 사람들이 그를 향해 “구주왕... 구주왕...”이라고 외쳐대는 걸 들었다.“쿵”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마치 칼로 가르고 침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었다.
“하...”소채은은 한숨을 내쉬고는 윤구주를 힐끔 올려다봤다.“됐어요. 너무 잘생겨서 제가 끝까지 선심 쓸게요.”“어찌 됐든 간에 시내로 돌아가면 병원에는 데려가 줄게요. 치료받을 수 있게 노력해 볼게요.”“그래서 회복되면 내 가족에게 잘 설명해 줬으면 좋겠어요.”소채은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지금부터 시내로 돌아갈 짐을 쌀 거예요. 먼저 여기서 티비 좀 보고 있어요. 아무 데도 가면 안 돼요. 알겠죠? 내 물건에도 손대지 말고요.”소채은은 낯선 남자에게 이렇게 당부하고는 윤구주에게 티비를 켜주었다.윤구주는 멍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티브이로 돌렸다.마침 티브이에서 죽음의 바다에서 일어난 10개국 간의 전쟁을 방송하고 있었다. 화면속을 가득 채운 전함에서는 까만 연기가 솟아올랐고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전투기가 날고 있었다.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뚫고 화진의 군사들이 10개국의 침략자들과 싸우는 장면이 윤구주의 눈에 들어왔다.이 화면이 윤구주의 머릿속에 박히면서 또 “쿵”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러면서 수많은 기억이 그의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갔다.구주왕, 그는 윤구주였다. 화진에서 종횡무진하는 9주 군신 윤구주.10개국 간의 전쟁은 서른 살도 안 되는 그가 최강의 경지에 접어들면서 다른 나라들이 벌인 침략 전쟁이었다.10개국에서 무서워하는 저승사자, 그들에게 난 벗어날 수 없는 악몽 같은 존재다.윤구주를 죽이기 위해 10개국에서 100여 명의 최강 고수를 파견했고 10개국을 지키는 열세 명의 신급 강자들이 오로지 윤구주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그는 혼자서 한 개 군을 이끌고 10개국의 백만 대군을 맞섰고 결국 일곱 명의 신급 강자를 무찔렀다.허나 결국 여자 하나 때문에 패전하고 말았다. 그 여자는 바로 선우아름, 윤구주가 제일 사랑했던 여자였다.윤구주가 제일 사랑했던 여자는 대전이 끝날 무렵 윤구주에게 세상에서 제일 독하다는 기린 화독을 내렸고 그 화독이 심장을 공략한 바람에 윤구주는 10개
몇 분 뒤, 소채은이 짐 정리를 마치고 방에서 걸어 나왔다.기억 상실인 척하는 윤구주는 자연스럽게 목석처럼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저기, 기억 잃으신 분, 이제 갑시다.”소채은은 이렇게 말하더니 윤구주를 쳐다보지도 않고 짐가방을 들고는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다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만 아니었으면 집안의 오해를 사는 일도 없었을 텐데. 이제 집에 가서 뭐라고 설명해요?”소채은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짐가방을 끌고 밖에 세워둔 하얀색 미니 쿠퍼로 향했다.짐가방을 트렁크에 실은 후 소채은이 말했다.“타요.”기억을 잃은 척 연기 중인 윤구주는 “네”라는 간단한 대답과 함께 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차 안은 핑크로 장식했고 향기로웠다.앉자마자 소채은이 말했다.“아주 복받은 사람이네. 이 차에 한 번도 남자를 태워본 적이 없는데.”윤구주는 속으로 웃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시내로 갑시다.”소채은은 차에 시동을 걸었고 집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소채은은 운전하면서 노래를 들었다.옆에 앉은 윤구주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몸 안의 기운을 움직여 온몸에 난 상처를 천천히 치유하고 있었다.소채은은 드문드문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를 돌아봤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진한 눈썹과 맑은 눈동자, 어쩜 콧대도 높았다.‘기억을 잃지만 않았어도 진짜 남신이 따로 없는데. 이런 남자가 내 남친이면 진짜 괜찮겠다.’남자 친구는 무슨, 가족의 도구로서 곧 중해 그룹의 바람둥이와 결혼을 앞둔 마당에 자기의 행복을 선택할 자유는 없었다.소채은은 씁쓸하게 웃더니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차는 계속 앞으로 내달렸다.여기서 강성시까지 가려면 적어도 5시간은 걸렸다. 고속도로에 다 와 가는데 “쿵”하는 소리와 함께 차 앞쪽 엔진에서 큰 소음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차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뭐야? 어떻게 된 거지?”소채은은 깜짝 놀라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내려서 검사했다.보닛을 열자 까만 연기가 엔진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소채은은
이 생각에 다다르자, 세나미는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왜? 내가 엄청 늙었어야 했나?”윤구주는 냉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그 말에 붉은 머리칼과 굴곡진 몸매를 가진 세나미는 잠시 얼어붙었다.사실이다.세나미는 윤구주 같은 전설적인 존재는 분명 늙은 괴물 수준의 외모일 거라 생각해왔다.하지만 지금 이렇게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자신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이건...그녀를 한순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네가 살아 있다고 해도 내가 두려워할 것 같아?”“내 스승님은 신전의 제1대사관이셔! 네가 감히 날 붙잡기라도 한다면, 스승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게다가 우리 설국의 수만 전사들이 반드시 너희 화진과 전쟁을 벌일 거라고!”세나미는 단호하게 외쳤다.그러나 윤구주는 그 말을 듣고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전쟁?”“너희 설국 따위가 그럴 용기가 있을 것 같아?”“옛날에 내가 혼자 한 자루 검만 들고 너희 설국 황도를 휘저었던 거 기억 못 하나? 이번에는 네 눈앞에서, 내가 설국을 어떻게 멸망시키는지 직접 보여주겠다!”세나미는 그의 말에 깜짝 놀라 외쳤다.“너, 네가 대체 뭘 하려는 거야?”윤구주는 두 손을 뒤로 짚으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설국이 과거 열국의 치욕을 씻어내고 싶어 하던데... 좋아. 내가 그 기회를 주지.”“지금부터 넌 내 노예가 될 거야!”그 말이 끝나자마자, 윤구주는 손가락으로 복잡한 결계를 그리더니, 세나미의 미간에 손을 댔다. 그 순간, 뜨거운 인장이 세나미의 정신 세계 깊숙한 곳에 새겨졌다.눈앞의 설국 여전사는 미간에 인장이 새겨지면서 온몸이 강하게 떨렸다. 그녀의 모든 정신력이 마치 강제로 묶인 듯 인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마치...그녀의 혼이 완전히 그 인장에 의해 지배당한 듯했다.“너... 너 이 악마,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세나미는 두려움에 휩싸인 채 외쳤다.“그저 네 정신 세계에 생사인을 새긴 것뿐이
유기철이 세나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던 중, 윤구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염수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세나스? 그놈이 뭔데 대단하다고 떠들어대는 거지?”“무례하다! 감히 내 아버지를 모욕하다니!”세나미는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염수천의 말에 분노하며 외쳤다.그러나 염수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뭐 어쩔 건데? 옛날 낭파산 전투 때, 우리 왕께서 너희 설국의 정예 병력 백만을 도륙 내셨지! 그리고 네 아버지 눈 하나를 꿰뚫어버린 일, 기억 못 할 리 없을 텐데? 네 아버지한테 물어봐라. 아직도 그날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는지 말이야.”이 말에 세나미는 한순간 침묵했다.6년 전, 열국 전쟁.그때 세나미는 겨우 14살이었다. 그녀는 광명 신전에서 수련 중이었고,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하지만 그 전투로 인해 설국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고, 그녀의 아버지 세나스는 설국의 백만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가 낭파산에서 전멸당했다.설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으며, 세나스 일생의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다.설국인이라면 누구나 이 일을 알고 있다. 세나미 역시 그 진실을 모를 리 없었다.그러나 이내, 세나미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천하무적이라는 화진의 구주왕이 대단하면 뭐 하냐? 결국엔 죽어버렸잖아!”윤구주가 죽음의 바다에 빠졌다는 소식 이후, 모두가 그가 죽었다고 믿었다.세나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염수천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유기철도 웃음을 터뜨렸다.“뭐가 웃긴 거지?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세나미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화진에서 구주왕은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염수천과 유기철이 그의 죽음을 듣고도 웃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너희 설국의 오랑캐 놈들은 내가 죽었다고 진짜로 믿은 건가?”벼락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세나미의 귀를 때렸다.세나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윤구주를
국경 수비대원들이 물러나자, 감옥 안에 갇혀 있던 세나미의 불타는 시선이 윤구주를 향했다.“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 이 악마!”“날 풀어줘! 어서 날 풀어달란 말이야!”“네가 진짜 대단하다면, 차라리 날 죽여! 왜 이렇게 감금해 두고 있는 거지?”세나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구주는 차가운 코웃음을 내뱉으며 단숨에 강력한 현기를 뿜어내 그녀의 몸과 목을 단단히 속박했다.이 순간, 설국의 여전사로 명성을 떨치던 그녀는 마치 종이 인형처럼 무력해졌다. 윤구주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그녀를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널 죽이는 게 어려울 것 같아?”순간 세나미는 숨이 막혀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해 갔다. 죽기 일보 직전, 윤구주가 속박을 거두며 그녀를 놓아주었다.쿵!세나미는 바닥에 쓰러지며 기침을 쏟아냈다.“죽을 줄도 모르고, 너 따위가 우리 왕 앞에서 함부로 지껄여?”염수천이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한편, 세나미는 오랜 시간 기침을 하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윤구주와 염수천, 그리고 유기철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넌 대체 누구지? 왜 우리 설국을 적으로 돌리는 거야?”염수천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네 주제에 우리 왕의 이름을 물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유기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염 장군 말이 백번 맞다. 너희 설국 놈들은 우리 화진의 국경을 침범하고 백성들을 괴롭혀 왔다. 당연히 죽어 마땅하지!”유기철과 염수천의 말에 세나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누군지나 알고 날 죽이려는 거야? 설마 설국과 전쟁을 벌일 각오를 한 건가?”그녀의 말에 염수천이 비웃으며 말했다.“그래? 네가 누구인지 한번 들어보자. 겁 좀 먹게 해봐.”세나미는 당당히 가슴을 펴고 외쳤다.“내 이름은 세나미다! 내 아버지는 설국의 군신 세나스지!”그녀의 이름이 떨어지자 염수천은 시큰둥하게 반응했지만, 유기철의 표정은 한순간 굳어졌다.“세나미? 설마 네가 그 설
염수천이 거침없이 외쳤다.이에 윤구주는 담담히 말했다.“내가 이미 말했지 않은가? 그까짓 야만국 하나에 그리 호들갑을 떨 필요 없다고. 그렇지 않으면 이 소문이 퍼져 다른 구국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나?”염수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럼, 왕께서는 어떤 뜻을 갖고 계십니까?”윤구주는 당당히 일어서서 창밖 설국의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6년 전, 나 홀로 한 자루 검만 들고 설국 황도를 베어버린 적이 있다. 6년 후, 또 한 번 그렇게 한다 해도 문제없겠지.”윤구주의 이 패기 넘치는 말을 들은 염수천은 감탄하며 외쳤다.“무적이십니다! 왕께서는 천하무적이십니다!”이후 윤구주와 염수천은 황도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 특히 문씨 세가와 제자백가에 관해 나누기 시작했다.지난번 윤구주는 노룡산에서 제자백가의 수많은 절정 강자들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그 사건 이후로 문씨 세가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이번 설국 문제만 아니었다면 윤구주는 반드시 서울로 돌아가 문씨 세가를 샅샅이 뒤졌을 것이다.윤구주가 염수천, 유기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국경 수비대원이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보고합니다, 군왕! 감금 중이던 설국 여자가 깨어났습니다! 게다가 우리 국경 수비대원 한 명을 다치게 했습니다!”“지금은 감시실에서 큰소리로 욕설을 퍼붓고 있습니다!”이 말을 들은 윤구주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반면, 성질 급한 염수천은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대담한 야만족이군! 붙잡힌 주제에 우리 화진 군인을 다치게 하다니, 당장 처형시켜라! 흑기 금위군, 명령을 듣거라! 지금 즉시 총살하라!”염수천이 성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윤구주가 차분히 제지했다.“총살은 필요 없다.”윤구주의 만류에 염수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왕께서는 왜 그 설국 여자를 살려두려 하십니까?”윤구주는 문득 떠올랐다. 이전에 그 여자가 아무 죄 없는 목동들을 풀어주던 모습을. 그는 천천히 말했다.“그 여자가 설국 사람이긴 하지만 심성은 꽤 선하더군.
거대한 북극 늑대가 윤구주를 향해 무릎을 꿇다니.윤구주는 신인 걸까?그렇게 국경수비대 병사 두 명이 북극 늑대를 데리고 왼쪽에 있는 빈집으로 향했다.그들이 몇 미터 걸어가자 윤구주가 갑자기 말했다.“잠깐!”“저하, 무슨 분부 있으십니까?”국경수비대 병사 두 명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서 물었다.윤구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공에 대고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북극 늑대 위에 기절해 있던 여자가 떠 올랐다.‘응?’“설국 여자?”주변 사람들은 윤구주가 설국 여자를 데리고 온 걸 보고 전부 당황했다. 그녀가 누군지, 윤구주가 무엇 때문에 그녀를 잡아 온 건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염수천도 마찬가지였다.윤구주는 기절한 세나미를 잡더니 손을 폈고, 쿵 소리와 함께 세나미의 몸이 바닥에 세게 던져졌다.“이 설국 여자도 가두도록 해!”윤구주는 덤덤히 말한 뒤 세나미를 뒤로 하고 몸을 돌려 병영 안쪽으로 향했다.병사들은 비록 세나미가 누군지 알지 못했지만 황급히 윤구주의 명령에 따랐다.널따란 지휘실 안.윤구주가 안으로 들어간 뒤 염수천은 서둘러 그의 곁에 섰다.흑기 금위군 병사들은 모두 꼿꼿이 양쪽으로 서 있었다.운이 좋지 않았던 유기철은 여전히 두 팔에 수갑이 채워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서 한쪽에 서 있었다.“쟤는 왜 저래?”윤구주는 유기철의 손에 수갑이 채워진 걸 보고 참지 못하고 물었다.염수천은 유기철을 노려보면서 말했다.“저하, 유기철은 국경 지역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벌을 주고 있습니다.”“됐어. 국경 지역 일은 유기철만의 잘못은 아니니까. 이 일은 문씨 일가의 탓이야.”윤구주는 구주군을 해산시킨 장본인이 문아름이라는 걸 알았다.이곳에 힘없는 병사들 2,000명을 남겨서 국경 지역을 지키게 한 것도 문아름이었다.그러니 유기철이 국경 지역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은 전부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염수천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돌려 유기철을 향해 매섭게 말했다.“운 좋은 줄 알아. 저하께서
한때 구주군의 10대 장수였던 사람들은 모두 만만치 않았다.염수천이 바로 그중 한 명이었다.그들의 무자비함은 모두 윤구주를 보고 배운 것이었다.그들은 다짜고짜 다른 나라를 침공할 수 있는 그런 인물들이었다.염수천은 흑기 금위군을 이끌고 설국으로 향하려고 했다.흑기 금위군이 준비를 마치고 출발하려고 할 때, 갑자기 우레 같은 소리가 병영에 울려 퍼졌다.“그럴 필요 없어. 나 돌아왔어.”그 말을 들은 순간 염수천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그 목소리는 누가 봐도 윤구주의 목소리였다.“저하, 돌아오셨군요!”염수천은 흥분해서 병영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리고 그의 뒤에 있던 흑기 금위군과 다무, 묶인 유기철까지 전부 들뜬 얼굴로 뛰쳐나갔다.거대한 체구의 흰색 북극 늑대가 눈보라를 뚫고 풀이 잔뜩 죽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북극 늑대 위에는 윤구주가 올라타 있었고 그의 뒤에는 정신을 잃은, 아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자가 있었다.“세상에나! 저렇게 큰 북극 늑대라니.”“저것좀 봐. 북극 늑대를 타고 있는 게 우리 저하야!”국경수비대 병사들과 흑기 금위군은 윤구주가 북극 늑대를 타고 눈보라를 헤치며 돌아온 순간, 다들 깜짝 놀랐다.염수천은 거대한 북극 늑대를 타고 돌아온 윤구주를 본 순간 빠르게 앞으로 향했다.“염수천, 저하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그의 뒤에 있던 흑기 금위군도 일제히 윤구주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윤구주는 염수천 등 사람들이 온 걸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너희는 여기 왜 왔어?”“저하, 전 국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저하를 돕기 위해 5만 금위군을 데리고 왔습니다.”염수천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국주님?”윤구주는 다시 한번 눈살을 찌푸렸다.“그렇습니다! 국주님께서는 벌레만도 못한 설국은 저하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저하께서 스스로 결정을 내리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 설국을 평정하여 우리 화진의 속국으로 만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그렇게 국경수비대 지휘관 유기철은 지휘실로 끌려갔다.커다란 지휘실 안.안팎으로 염수천의 흑기 금위군이 쫙 깔렸다.황성을 지키는 3대 금위군 중 하나인 흑기 금위군 병사들은 모두 최소 대무사 급이었고 어떤 이들은 무대 대가 경지였다.통령인 염수천은 절정 삼중천 실력으로 민규현과 막상막하였다.지휘실 안쪽에는 염수천이 차가운 얼굴로 앉아 있었고 유기철은 마치 범죄자처럼 두 손과 발이 묶여 있었다.다무와 국경수비대 병사들은 다들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유기철, 네 죄를 알아?”염수천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염수천은 과거 구주군 10대 장수 중 한 명이었기에 살기도 강했고 또 난폭하기로 유명했다.질문을 받은 유기철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네... 알고 있습니다.”“안다면 죽어야지! 여봐라, 이 자식을 끌고 가서 죽여!”염수천이 말했다.‘뭐?’염수천이 유기철을 죽이려고 하자 국경수비대 병사들은 전부 당황했다. 다무도 마찬가지였다.“염수천 장군님,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저하를 뵙게 해주십시오!”유기철이 갑자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염수천은 싸늘한 눈빛으로 유기철을 노려보았다.“구주군이면서 이토록 쓸모없는 놈이 감히 무슨 낯짝으로 저하를 뵙는다는 거야?”“전... 전...”부끄러움을 느낀 유기철은 두 눈이 빨개졌다.그가 평생 가장 숭배하던 우상은 바로 윤구주였다.그런데 윤구주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겨우 그와 하루밖에 함께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죽어야 한다니 억울했다.“장군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전 그동안 줄곧 저하께서 돌아오시기만을 바랐습니다. 드디어 어렵게 저하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뵙게 해주세요... 저하를 뵙는다면 지금 당장 죽으라고 해도 저는 기꺼이 죽을 겁니다.”유기철은 눈이 벌게진 채 염순천을 향해 애원했다.염수천은 정말로 유기철을 죽일 생각인 걸까?당연히 아니다. 그는 그저 화가 났을 뿐이다.당당한 화진 국경수비대의 지휘관이 설
“세상에, 전투기가 왜 저렇게 많이 왔지?”“지휘관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늘 위 헬리콥터들을 본 국경수비대 병사들은 모두 넋이 나갔다.지휘관인 유기철 또한 눈이 휘둥그레져서 헬리콥터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대단한 분이 오셨나 봐. 어서 모든 병사에게 나와서 대열을 맞추어 맞이하라고 해!”“네!”곧이어 국경수비대 병사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서 줄을 섰다.하늘에 있는 헬리콥터들은 전부 화진의 헬리콥터들이었고 대충 봐도 백여 대는 될 것 같았다.거대한 프로펠러가 요란하게 돌아가면서 천천히 평원에 착륙하기 시작했다.잠시 뒤, 백여 대쯤 되는 헬리콥터들이 하나둘 착륙했다.그리고 곧 검은색 갑옷을 입은, 기세가 남다른 병사들이 허리춤에 검은색 검을 차고 헬리콥터에서 일제히 내려왔다.그들이 갑옷을 입고 나타나자 유기철은 당황했다.“세상에, 저 사람들은 우리 서울 황성의 흑기 금위군들인데!”유기철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뭐라고?’“흑기 금위군이요?”옆에 있던 병사도 외쳤다.“그래! 황성 3대 금위군은 흑기, 홍기, 황기 금위군으로 이루어져 있지. 3대 금위군은 우리 국주님을 보호하는 가장 강한 금위군이야!”“세상에, 우리 황성 금위군이 왜 국경 지역으로 온 걸까요?”다들 놀라워하는 사이 천여 명 가까이 되는 흑기 금위군이 질서정연하게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선두에 선 사람은 우람한 몸집에 차가운 표정을 가진 남자였다.남자는 얼굴이 넓은 편이었고 온몸에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그가 바로 황성 금위군 통령 염수천이었다.금위군 통령 염수천은 홀로 10만 금위군을 장악하고 있으며 3군 통령이라고 불렸다.그가 바로 과거 윤구주의 10대 장수 중 한 명이었다.유기철은 구주군 제6군단에 있을 때 이미 염수천을 알고 있었다.이 순간, 염수천이 멀리서 걸어오는 걸 본 유기철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염수천 장군님! 염수천 장군님이 오시다니! 구주군 제6군단의 유기철 염수천 장군님께 인사드립니다.”유기철은 멀리서 염수천
흑여산맥, 화진 병영.다무는 윤구주에게 임명받아 진정한 구주군의 멤버가 된 뒤로는 자긍심을 느꼈다.비록 그는 나이도 많고 다리도 불편했지만 다시금 화진의 군복을 입게 되자 70을 앞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풍당당했다.주변에 있던 국경수비대 병사들은 이미 모두 윤구주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그들은 흥분되기도 하고 또 두렵기도 했다.한때 화진의 왕이었던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흥분되었고, 군법을 엄격히 지키지 않은 나태한 태도 때문에 벌을 받게 될까 봐 두려웠다.“아저씨, 혹시 우리 구주왕이랑 아주 친한 사이인가요?”이때 국경수비대 병사 몇 명이 다무의 곁으로 다가갔다.다무는 그 말을 듣더니 자랑스럽게 말했다.“당연하지. 우리 저하는 이 늙은이를 구해준 적이 있다고!”“정말 대단하시네요! 아저씨, 만약 저하께서 저희를 벌하겠다고 하시면 꼭 저희 대신 말 좀 해주세요!”국경수비대 병사 몇 명이 다무에게 말했다.다무는 웃으며 대꾸했다.“걱정하지 마! 법을 잘 준수하며 우리 화진의 국경을 지킨다면 저하께서는 절대 너희를 벌하지 않을 테니까!”“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목숨 걸고 화진의 영토를 지킬 거예요!”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군용차량 한 대가 그들 쪽으로 달려왔다.군용차량이 멈춰서자 군복을 입은 유기철이 차에서 내렸다.“지휘관님께서 돌아오셨어!”“지휘관님을 뵙습니다.”근처에 있던 병사들은 유기철을 보더니 곧바로 경례를 했다.유기철은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저하께서 잡으라고 했던 놈들은 전부 잡은 거야?”“지휘관님, 전부 잡았습니다. 그들 모두 지금 구금실에 구금되어 있습니다.”“좋아! 빌어먹을 배신자들, 저하께서 돌아오시면 그놈들 목을 전부 베어버려야지!”다무는 이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지휘관님, 저하는요?”다무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바로 윤구주였다.유기철과 윤구주는 함께 떠났는데 유기철만 돌아왔기에 다무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유기철은 웃는 얼굴로 설국 방향을 바라보며 자랑스럽게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