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우희는 솔직하게 말했다.“친구 한 명이 돈이 조금 모자란다고 해서 승주랑 상의하고 건담 피규어를 팔았어요.”“의리 있네요.”이승우가 반우희를 칭찬하자 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그 친구가 누구예요?”연정훈이 갑자기 물었고 반우희는 물으면 뭐든 답하는 성격이라 솔직하게 말했다.“장서진이요.”양시연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물었다.“그때 승주 생일 때 너희 집에 왔던 그 남자애 맞죠?”“네. 맞아요.”‘오호라.’양시연은 몰래 연정훈의 허리를 살짝 밀며 눈짓했다.‘정훈 씨, 엄청 예리하네요.’연정훈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고 사실 그는 반우희의 친구가 그 한 명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날 만남에서 그의 관심은 온전히 양시연에게 쏠려 있었지만 장서진과 반우희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이승우는 다시 활기를 되찾은 듯 일부러 말했다.“재산 다 털어서 도와줄 정도면 진짜 친한 친구인가 보네요.”반우희는 가슴을 툭 치며 대답했다.“저랑 장서진은 함께 자랐어요. 장서진의 일이 곧 제 일이죠. 돈이 뭐가 대수겠어요.”“말 잘하네요.”이승우가 박수를 치며 그녀를 응원하듯 말한 후 일부러 부승원을 힐끗 쳐다봤다.‘쯧쯧.’부승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카드를 밀며 조용히 말했다.“끝.”이승우는 눈썹을 치켜세웠고 부승희는 제일 먼저 패배를 인정하며 말했다.“돈 내야지.”조금 떨어진 곳에서 승주가 크게 반우희를 불렀고 반우희는 모두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그쪽으로 뛰어갔다.반우희가 떠나자마자 이승우는 부승원에게 묘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반우희 씨가 너를 피하는 것 같은데?”부승원은 속으로 불쾌함을 느꼈다. 반우희가 자신의 물건까지 팔아가며 돈을 빌려준 상대가 그 남자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자신도 힘든 처지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남의 구세주 노릇을 하는 거지?’이승우의 말을 곱씹으며 부승원은 미간을 찌푸렸다.‘반우희가 나를 피한다고?’곰곰
양시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모연준 씨에게 문제가 있다면 부승원 씨가 이미 알아냈을 텐데 부승희 씨에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있어요?”연정훈은 그녀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손으로 간식을 집어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걸음을 옮기며 그는 차분히 대답했다.“부승희 성격을 알잖아. 부승원이 설령 뭔가 알았다 해도 대놓고 말하진 않았을 거야. 암시 정도로 끝냈겠지. 부승희가 직접 고른 남자가 문제 있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하니까.”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부승희 같은 자존심 강한 사람이면 배신도 못 참지만 자신의 선택이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건 더 못 견딜 것이다.그래도 부승원은 딱 하나뿐인 여동생이니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최대한 할 말을 전했을 것이다.그들은 방에서 나와 위층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 도착한 무도회는 건물 꼭대기에 있었고 유럽풍의 고풍스러운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주변 건물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무도회 중앙에는 춤을 추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양시연은 춤에 자신이 없었지만 연정훈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섰다.연정훈은 격식을 차린 춤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가볍게 감싼 채 부드러운 리듬에 맞춰 움직였고 양시연도 그의 목을 감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정훈 씨와 부승원 씨가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는데 당신 생각엔 부승원 씨가 우희 씨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연정훈은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 쓰기 싫다는 듯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대며 대답했다.“부승원을 누가 알겠어.”“...”“남의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들이 잘살든 못살든 우린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양시연은 그를 흘겨보며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당신과 형제 맺는 사람은 정말 불쌍하네요. 좋은 일은 안 하면서 불난 데 부채질이나 하고 말이에요.”‘장서진 얘기를 괜히 꺼내서 부 변호사를 속상하게 만들고.’연정훈은 당당히 말했다.“나는 부승원이 더 이상 속지 않도록 돕고 싶었어. 정말로.”“당신은 마
이승우와 모연준이 싸울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양시연과 연정훈 역시 그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무도회를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승주는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급히 말했다.“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봤을 때는 이미 싸우고 있었어요. 근데 서로 말은 안 하고 싸우기만 하더라고요. 왜 싸우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승주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싸움이 고조되지 않은 채 욕설도 오가지 않은 것이 못내 답답한 듯했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다 왔어요. 바로 저 앞이에요.”승주는 다급하게 외쳤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팔을 끌며 더 빠르게 움직였다.방 입구 바로 앞의 넓은 홀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몰려 있었다. 대부분 싸움을 말리려는 사람들이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어수선했다.반우희도 홀 한쪽에 있었는데 아마 부승희를 말리려다 부승원에게 밀려난 듯했다. 전체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모연준은 몇몇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었고 이승우 또한 제지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승우의 이마에서 선명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이렇게 심하게 싸운 건가?’양시연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이승우 머리 다친 건 부승희가 때린 거예요.”양시연은 더욱 놀랐다. 그녀는 연정훈을 밀어 싸움을 말리러 가라고 했지만 연정훈은 고개를 저으며 손짓으로 이승우의 반응을 보라고 했다.홀 중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승우는 천천히 손을 들어 이마의 상처를 만졌다. 손바닥에 묻은 피를 확인하더니 그의 얼굴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이승우는 조용히 부승희를 응시했다.부승희는 모연준의 앞에 서 있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이승우가 조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부승희 너 진짜 대단하다. 저놈 때문에 날 죽이려고 하는 거야?”이승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비웃듯 말했다.부승희
좋은 명절 설날 첫날 결국 분위기는 한바탕 소동으로 끝이 났다.이승우는 고집을 부리며 사람들 앞에서 부승희를 강제로 데려갔고 이를 지켜보던 양시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정훈에게 물었다.“이승우 씨가 정말 이상한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니겠죠?”연정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그럴 리 없어.”“그럴 리 없다니요? 이승우 씨가 부승희 씨를 강제로 데려가는 걸 봤잖아요.”“아까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지. 이승우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부승희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려고 하는 거야.”양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진짜야? 가짜야?’양시연은 턱을 괴고 옆에 앉아 눈을 감고 한가롭게 쉬고 있는 부승원을 힐끔 보았다. 연정훈의 말에 신뢰도가 살짝 올라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근데 이승우 씨는 어떻게 모연준 씨가 문제 있다는 걸 알았을까요?”연정훈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답했다.“뻔하잖아. 이승우는 부승희를 마음에 두고 있어서 모연준한테 문제가 없어도 억지로 문제를 만들어낼 놈이야. 게다가 모연준도 딱히 깨끗한 사람은 아니잖아.”양시연은 혀를 차며 말했다.“이 사건 정말 골치 아프네.”...남산 저택 아래의 가로수길에서 롤스로이스가 멈춰 서자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부승희는 곧장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고 이승우는 그녀를 따라갔다.이승우가 부승희의 팔을 붙잡자 그녀는 화를 참지 못하고 돌아서며 그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짝!’소리가 크게 울렸다.이승우는 이미 얼굴에 마른 핏자국과 치료되지 않은 이마의 상처로 섬뜩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방금 맞은 따귀로 인해 그의 잘생긴 얼굴은 더욱 참혹하게 보였다.부승희는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손을 뿌리치고 다시 그의 반대쪽 뺨을 내리쳤다.이승우는 도망치지 않고 그녀의 손길을 그대로 맞았고 부승희가 멈추자 그는 담담하게 물었다.“더 때릴 거야?”‘짝!’부승희는 다시 한 번 세게 이승우의 뺨을 내리쳤고 그 순간 온몸을 부르르 떨며 분노를 토해냈다.“여기
부승희는 점점 멀어져 갔지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여보세요?”부승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너 그 자식이랑 헤어질 거야?”부승희는 당황해서 발신자를 보니 이승우였다.‘헐. 이 멍청이.’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몇 걸음 더 걷자 휴대폰이 다시 울렸지만 이번엔 받지 않았다.휴대폰이 잠잠해졌고 그녀가 십자로 근처에 다다랐을 때 뒤를 돌아보니 이승우의 모습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얼핏 보니 이 재수 없는 놈이 일어나긴 했지만 차 뒷부분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죽으려고 그러나? 피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거야?’부승희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하고 돌아섰고 입구를 지나 몇 걸음 걷자마자 또 전화가 울렸다.부승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그래도 친구 사이인데 내가 죽는 걸 지켜보기만 할 거야?”“네가 죽든 말든 난 이미 너 안 보이는데 죽는 거 지켜볼 일이 없어.”부승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좋아. 부승희. 네가 이겼어.”이승우는 말을 끝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부승희는 전화를 내려다보며 한참 미간을 찌푸렸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몇 걸음 물러나 그가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보기로 했다.바닥에는 한 구의 시체가 있었고 이승우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부승희의 마음이 순간 철렁했지만 곧 깨달았다.‘하. 죽은 척하는 거지?’부승희는 이승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승우는 받지 않았고 그가 이미 기절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그 순간 부승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가슴 깊은 곳에서 미칠 듯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오늘 이승우가 여기서 정말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모두 그가 자초한 일이었고 자신에게서 돈을 뜯어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그러나 두 집안 간의 관계를 떠올리며 그녀는 결국 이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고모, 안녕하세요.”“승희야, 무슨 일이야?”“이승우가 길가에서 기절해서 곧 죽어가고 있어요. 사람 보내서 데려가세요.
양시연은 집에 도착한 후에도 사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땅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그냥 연기하는 건 아닌 것 같던데요.”남자들끼리라면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고 연정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피를 조금 흘려야 동정을 얻는 법이지.”“됐어요. 부승희 씨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더라고요. 이승우 씨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요.”양시연은 외투를 벗고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했다. 연정훈은 그녀가 배고플까 봐 간식을 준비해 방으로 가져왔다.샤워를 마친 양시연은 소파에 기대어 간식을 맛있게 즐겼다. 중간에 연정훈이 샤워하러 간 틈을 타 그녀는 서재로 가서 영어 소설 두 권을 골라 들었다.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책상 서랍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함께 지낸 시간이 꽤 되었기에 양시연은 연정훈이 평소에 여러 대의 휴대폰을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중요한 전화는 그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휴대폰이 아닌 다른 기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서랍을 열어보려고 했으나 잠겨 있었다.연정훈은 평소 양시연에게 비밀을 두지 않았기에 그녀가 물어보면 암호나 열쇠를 알려주곤 했다.양시연은 전에 그가 알려준 곳에서 열쇠를 찾아 서랍을 열었다.휴대폰을 집어 들었을 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고 발신자를 확인했지만 저장된 이름은 없었다.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양시연이 먼저 말을 건네자 상대방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혹시 사모님이세요?”“네 저예요. 임성원 씨죠?”“맞습니다.”“무슨 일인가요?”“도... 도련님을 찾고 있습니다.”양시연은 순간 의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어떤 일이기에 나에게는 말을 안 하는 거지?’“급한 일인가요? 급하면 저에게 말해도 됩니다.”“아니요 급하지 않습니다. 부인께서 도련님께 나중에 전화하라고 전해주셔도 괜찮습니다.”양시연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연정훈이 이상한 짓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임성원이 무언가 불법적인 일을 돕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정훈이 양시연에게 소현주의 일을 숨긴 이유는 그녀가 현재 임신 중이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시연은 이런 문제를 겪어본 적이 없어 연정훈이 사용하는 어떤 수단에 대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하지만 양시연이 이미 눈치챘으니 더는 숨길 수 없었고 괜히 의심을 사 그녀를 더 괴롭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연정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솔직히 말했다.“소현주가 자살 시도를 했는데 실패해서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고 있어.”양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그쪽에서 왜 당신한테 바로 연락한 거예요?”“내가 계속 소현주의 동향을 주시하라고 했거든. 혹시라도 소현주가 나와서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킬까 봐.”연정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소현주라는 여자가 몇 년 동안 정신병원에 있었던 걸로 갑자기 나아질 리는 없었다.아마 소현주는 양시연과 연정훈을 이미 죽도록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면 소현주 씨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에요?”양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소현주 씨가 계속 이렇게 미친 짓을 하고 가끔 자살 시도를 한다고 해도 당신이 소현주 씨를 평생 책임질 거예요?”연정훈이 무언가 설명하려 했으나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내가 질투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이 소현주 씨 문제에 계속 얽히다 보면 어느 날 소현주 씨가 사고를 치고 누군가가 조사하면 당신이 연결될 가능성도 있잖아요. 그리고 예전에 소현주 씨와 공휘 일도 있고요. 공휘는 당신 어머니 쪽 집안사람이고 소현주 씨가 찍은 영상은 당신조차 속일 만큼 완벽했어요. 그 영상이 증거로 쓰이기라도 하면 어느 날 소현주 씨가 세상에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당신 어머니를 끌어들인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연정훈은 이미 이런 문제들을 오래전부터 고려해 두었었고 만약 오늘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는 벌써 소현주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을 것이다.양시연이 말한 것처럼 소현
‘꿈이야. 꿈이었어.’양시연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악몽 속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연정훈도 그녀의 움직임에 깨지 않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연정훈의 평온한 얼굴이 보였고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곧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그녀를 온몸으로 오싹하게 만들었다.‘아니다.’소현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는 것을 양시연도 알고 있었고 연정훈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그 폭탄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녀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자살... 소현주 씨가 정말 자살했다면 지난 몇 년 동안 소현주 씨가 그런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을까? 그런데 이번에 임성원이 굳이 연정훈 씨에게 보고했고 심지어 병원을 옮긴다는 말을 강조했어.’양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고 벽에 걸린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한참이 지난 후 옆에서 움직임이 느껴졌고 연정훈이 깨어난 것이었다.연정훈은 반쯤 감긴 눈으로 양시연의 등을 바라보며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하며 몸을 일으켜 그녀를 감쌌다.“무슨 일이야?”양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얼굴을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은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힌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휴지를 꺼내려 했지만 그가 돌아서기 전에 양시연의 입에서 먼저 질문이 나왔다.“소현주 씨가 자살한 거예요?”연정훈은 잠시 멈칫했고 양시연은 눈을 감으면서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이불을 꽉 움켜잡고 말을 이었다.“소현주 씨가 전에 이런 일을 한 적이 없었어요? 3년 동안 정말 얌전히 있었단 말이에요? 왜 하필 오늘 임성원 씨가 갑자기 전화한 거죠?”연정훈은 얼굴에 평정을 유지한 채 양시연의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시연아,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마.”“나를 속이고 있잖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손을 치우며 단호하게 말했다.“임성원 씨는 당신이 지시한 일을 처리한 거죠? 맞아요? 다만 임성원 씨가 일이 망쳐서 오늘 당신에게 보고하러 전화를 한 거죠.”‘아니. 그뿐만이
부승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네가 나설 필요 있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부르다니 당연히 내가 직접 그들을 혼내줘야지.”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먼저 이승우의 집으로 가자고 지시했다.이승우는 온몸이 엉망이었고 더러워서 자꾸 의자에 기대는 것도 불편해하며 집까지 몸이 경직되어 갔다.두 사람은 같은 층에 살고 있었고 부승희도 이승우의 집에 함께 들어갔다.이승우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부승희가 전화를 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삼촌, 일 처리가 너무 미흡해요. 저 사람들 분명히 범죄 조직과 연관이 있어요. 잡을 생각은 없으신가요?”그는 부승희 앞에 다가가서 수건을 던지고 그녀에게 전화를 넘기라고 신호를 보냈다.부승희는 귀찮아했지만 기꺼이 전화를 넘겨주었고 막 전화를 건네려던 찰나 부승희는 이승우가 잠옷 바지만 입고 상반신을 벗고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았다.부승희는 그를 두 번 보고는 소파로 옮겨갔다.이승우는 전화를 한 뒤 몇 마디를 주고받고 전화를 끊고 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그들을 좀 혼내줘요. 너무 과하게 하진 말고.”“과하게 하지 말라니. 그 사람들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불렀어.”부승희가 끼어들었다.이승우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말했다.“알아서 하세요. 하지만 선을 지켜야 합니다.”그리고 전화를 끊었다.부승희는 소파에 기대면서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정말 어이없어.’부승희는 경인에서 제멋대로 하지는 못했고 이런 일을 당해본 적은 없었다. 원주에서 사기를 당하고 이제는 전주에서 몇 명의 깡패 같은 택시 기사들까지 쫓아왔다.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저 사람들이 확실히 범죄 조직과 연관된 것 같아. 아니면 어떻게 감히 우리한테 이런 일을 벌였겠어?”그녀는 자신과 이승우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말했다.“그들 뒤에는 누군가 있을지도 몰라.”이승우는 부승희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하며 그녀 옆에 앉아서 머리를 닦으며 말했다.“그들도 우리가 누구인지 잘 모
부승희가 말했다.“결정적인 순간에 잠재력을 좀 발휘할 수는 없겠어?”이승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1대4 싸움에서 잠재력을 발휘하는 거냐?”‘마치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처럼 상대를 한 번에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부승희는 손을 휘휘 저으며 여전히 숨을 몰아쉬었다.“어쨌든 넌 정말 한심하다.”“내가 그런 잠재력이 있어도 쓰지 않아. 상대를 다치게 하면 그 책임은 누가 져?”부승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나한테 책임 떠넘기지 마. 난 절대 도와주지 않을 거야.”“그럴 줄 알았다. 네 양심 없는 걸 알고 있었다고.”“나...”부승희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갑자기 위층 창문에서 소리가 나며 집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뒷마당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부승희와 이승우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둘은 계단 밑으로 몸을 숨겼고 마침 그곳은 위층에서 내려다볼 수 없는 사각지대였다. 집주인은 창문을 열고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중얼거리며 창문을 닫았다.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부승희는 이승우를 툭툭 찔렀다.“이제 나가야 하는데 네가 부른 사람들은 도착했어?”이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문 쪽으로 다가갔고 천천히 걸쇠를 풀기 시작했다.그런데 이 자물쇠가 녹이 슬어서 문을 닫을 땐 잘 닫히지만 열 때는 오히려 더 힘들었다.부승희는 살금살금 다가가 까치발을 들고 살폈다.“할 수 있어?”“조금만 기다려.”부승희는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으로는 그를 타박하며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이승우는 힘을 주어 걸쇠를 당길 준비를 하며 그녀에게 떨어지라고 손짓했고 부승희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그녀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이승우는 힘을 주어 걸쇠를 당겼다.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난 뒤에야 걸쇠가 풀렸지만 문이 약간 걸려 있었고 이승우는 그제야 이 집 사람들이 왜 마당 문을 닫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이미 소리가 난 이상 그는 아예 힘을
부승희는 이승우에게 이끌려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왜 그래? 가게는 저쪽인데.”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뒤쪽에서 건장한 남자 몇 명이 거칠게 뛰어오더니 그중 한 명이 소리쳤다.“바로 저 두 명이 돼지 사육사예요. 아마 우리를 신고한 게 저들일 겁니다. 빨리 막으세요.”부승희는 순간 얼어붙었다.‘돼지 사육사? 내가? 난 유명한 축산 기업가인데.’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돌아 그들에게 해명하려 했지만 이승우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당겼고 어쩔 수 없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처음 이 골목에 들어설 때도 길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손에 이끌려 뛰는 사이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속에서 술이 요동치며 흔들려 더욱 한마디 하고 싶어졌다.겨우 끝에 다다랐을 때 다행히도 쫓아오는 사람들이 이쪽까지 미리 막지는 않았다.이승우는 방향 감각이 뛰어나 빠르게 판단한 뒤 왼쪽을 선택했다.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져 부승희는 여러 번 그에게 무언가를 물었지만 정신없이 뛰는 사이 그의 대답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달리고 또 달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이대로라면 토할 것만 같았다.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머릿속에 7~8년 전 북미에서 보냈던 휴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때도 그랬다.무료한 하루를 보내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밖에 나가려 했지만 동행한 사람 중 누구도 선뜻 따라나서지 않았다. 결국 이승우만 그녀에게 끌려 억지로 함께 나왔다.그날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고 그는 케이크를 사러 갔다. 그런데 부승희가 상점에서 나오자마자 거리 한쪽에서 폭동이 일어났다.사람들이 무서운 기세로 몰려왔고 그녀는 남쪽으로 향해야 했다.그녀는 이승우가 있는 앞쪽에는 안전한 것을 떠올렸고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점점 커지는 총소리와 몰려오는 인파에 좁은 거리에서 압사당할 수도 있는 위험도 있었다.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렸다. 떨리는 손으로 받았지만 이승우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소음 속에서 간신히
전주에 양육을 하러 온 부승희와 이승우는 고향을 떠난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은 성격상 여린 타입도 아니었고 가정에서 애교 많은 사람도 아니어서 반년이 넘도록 집에서는 전화 외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남녀 관계를 떠나 같은 지역 출신들이 만나면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일이지만 더구나 둘은 함께 자라난 사이였고 큰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부승희는 가끔 전주에서 돼지를 키우는 일이 돈을 벌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자 어린 시절처럼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날들을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이승우가 이곳에 온 이유가 일시적인 취미인지 아니면 평범한 일상을 진지하게 살아갈 결심을 했는지 궁금해졌다.지켜본 결과 부승희보다 이승우가 더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돼지를 양육하는 테스트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항상 감독을 맡았고 판매를 시작한 지 반년 만에 이미 해외와의 거래를 성사했다.부승희는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가끔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배여진이 보낸 메시지를 꺼내어 다시 읽으며 마음을 다잡고 평온하게 잠을 청했다.그녀는 조용히 있었고 이승우도 더 조용했다. 더 이상 그는 그들의 관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7월 초에 해외 대표가 협상을 위해 찾아왔고 그들의 첫 번째 대형 거래는 그 자리에서 즉시 성사되었다.부승희는 손을 휘둘러 팀 전체를 초대해 저녁을 준비했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일행은 급히 흩어졌다.이승우는 마치 집안일을 하는 사람처럼 술을 적게 마시고 부승희와 함께 길을 걸으며 술이 깰 때까지 대화를 이어갔다.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는 그녀를 지켜보며 뒤따라갔다. 부승희는 앞에서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나의 돼지들 사랑해.”이승우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낮게 웃었다.“정말 그렇게 좋아?”부승희는 돌아서며 이승우를 마주 보며 걸어갔다.“이 거래가 성사되었으니 우리가 예전에 계획했던 3년 계획이 조기에 달성된 거야!”그녀는 눈을 감고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전주에서 돌아온 후 배여진은 조용히 떠났다.이승우의 말에 따르면 아마 이혼하러 돌아간 듯했고 선기현이 직접 와서 그녀를 데려갔다고 했다.“직접 데리러 왔다면 그래도 아직 감정이 남아 있는 거 아니야?”부승희가 말했다.이승우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건 감정이 남아서가 아니라 당장 이혼하고 싶어 안달이 난 거지.”‘쓰레기 같은 남자.’부승희는 거칠게 욕을 퍼붓고는 고개를 홱 돌려 물었다.“야 너랑 선기현 씨 친하잖아. 근데 너한테 밥 안 사줬어?”“사줬지. 며칠 전에 도착해서 저녁에 술 한잔하자고 했어.”“근데 왜 안 갔어?”“나는 흠집 있는 친구 안 사귀어. 깨끗하게 살아야 하니까.”부승희는 어이없었다.“...”‘멍청이.’배여진과 선기현을 보고 있자니 마치 이승우와 부승희의 반면교사 같아서 이승우는 괜히 불안해졌다.그 골칫거리들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놓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두 건물에서 키우던 돼지들이 비정상적으로 집단 폐사했다. 게다가 다른 두 곳에서는 식품회사가 찾아와 협력을 논의하면서 일이 급증했다. 두 사람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한 명은 반바지 차림으로 회의실에서 협상하고 다른 한 명은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돼지 수의사들과 함께 치료에 매달렸다.여름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날씨는 더욱 후덥지근해졌다.부승희는 돼지 전염병 문제를 해결한 후 사무실에서 이승우와 협력 건을 논의했다.그녀는 파초심 두 개를 가져와 하나를 이승우에게 건넸다.이건 열대 지역에서 가져온 거였는데 돼지들에게 먹일 수는 있지만 돼지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승희는 두어 번 먹어보니 수분이 많아서 그런지 꽤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이승우는 한입 베어 물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쓰레기통에 던졌다.“돼지도 안 먹는 걸 왜 먹어?”이승우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부승희는 찌꺼기를 뱉으며 말했다.“나중에 남편을 고를 때 ‘파초심을 좋아할 것'이라는 조건을 꼭 추가해야겠다.”이승우가 움찔했다.
저녁 10시.부승희는 농장에서 자리를 찾아 뜨끈한 만둣국을 한 입 크게 넣었다.멀지 않은 곳에 운전기사가 차를 버리고 허겁지겁 도망가는 게 보였다. 어두운 가로등 불빛 아래 홀로 도망 다니는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이승우는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며 전화를 돌렸다.“오빠, 적당히 해. 너무 과하게 하지 말고.”부승희의 말에 이승우는 그 앞으로 걸어와 만둣국을 슬쩍 바라봤다.“더 있어?”“아니. 태오 씨가 마지막 하나 남은 만둣국 사준 거야.”정태오는 농장 경비원이었는데 스무살은 막 넘긴 순수한 청년이었다.부승희는 국물을 들이켜며 뿌듯해했다.이승우는 부승희가 대체 어느 부분에서 뿌듯해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만둣국을 먹게 돼서 뿌듯한 건가?이승우는 부승희의 앞으로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나 두 개만 줄래?”“싫어. 나 먹을 것도 부족하단 말이야.”이승우는 말이 없었다. 그저 그 옆에 놓인 숟가락으로 만두 하나를 훔쳐 입에 넣었다.“오빠!”“나 경찰에 신고했어.”이승우는 부승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부승희는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왜?”“그 사람들이 이 야심한 밤에 무리 지어 다니며 바가지를 씌우는 행위가 합법은 아니잖아.”이승우는 어느새 만두를 두 개째로 입에 넣었다.부승희는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무사히 돌아왔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자들끼리 하산하다가 저 무리를 만났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니 이승우가 세 번째로 만두를 훔치려 했다.부승희는 모기를 때리듯 이승우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깜짝 놀란 이승우가 고개를 번쩍 들고 말다툼이라도 하려는데 황규식이 이승우를 향해 걸어왔다.이승우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고 창피한 줄도 몰랐다.“무슨 일이에요?”황규식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견인된 차량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급하게 차량을 구해뒀는데 오늘 밤 떠나실 겁니까? 아니면 하룻밤 묵을 겁니까?”“아니에요. 내일
부승희는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그런데 이승우가 대신 외투를 고쳐 덮어주며 다시 제 어깨에 눕혔다.“좀 더 눈 붙여. 도착하면 깨워줄게.”부승희는 정말 피곤했기에 군소리 없이 다시 머리를 기댔고 제 어깨에 올라온 이승우의 손을 휙 내쳤다.“잠시만 눈 좀 붙일게.”부승희는 다시 눈을 감기 전에 저 사람을 혼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이승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안심해.”“응...”차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창가의 풍경은 빠르게 바뀌었다.고르게 들려오는 부승희의 숨소리에 이승우는 제 어깨를 고정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이렇게 부승희가 제 어깨에 기대 잠을 자던 게 언제 적 일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이승우는 여유를 만끽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런데 고개를 드니 기사 남몰래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는 게 보였다.이승우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더 경계심을 높여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냈다.기사는 껌을 꺼내 이승우에게 권했다.“저는 괜찮습니다.”기사는 덤덤하게 껌을 다시 내려놓았고 이따금 말을 걸었다.부승희는 말소리가 거슬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 이승우가 말했다.“기사님, 제 여자 친구가 잠이 들어서요.”‘그러니까 좀 조용히 해.’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이승우는 겨우 표정을 풀었으나 허리에 따끔 하고 고통이 느껴졌다.“쓰읍.”이승우가 아픈 곳을 살살 매만지는데 부승희가 나른해진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지금 또 어디에서 개수작을 부리는 거야.”그러자 이승우는 마른기침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잠든 거 아니었어?”“...”[지금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번만큼만 넘어가 줘.]마지막 한 마디는 이승우가 타자해서 부승희에게 보여줬다.부승희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다시 두 눈을 감으며 말했다.“나 다시 잔다.”“그래그래. 푹 자.”차량은 계속 달려 농장으로 향했고 이승우는 직원에게 문자를 보내 여러 사람을 불러 농장 입구에서 대기하라고 했다.바가지 씌우는 것도 모자라 부승희를 힐끔거리는
“두 분 택시 잡으려는 거죠?”가장 앞장선 남자가 물었다. 그러나 평범한 택시 기사 같지 않은 거들먹거리는 말투였다.이승우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따로 부른 차가 있으니 괜찮습니다.”그 말에 기사는 바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여긴 그런 평범한 차량이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말했다.“우리도 엄연히 택시 운전하는 사람인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우리 차에 타도 다 똑같아요.”그때 부승희의 핸드폰이 울렸고 콜택시 운전기사가 걸어온 전화였다.“손님, 차량이 안으로 진입이 불가능해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는데 차라리 다른 차량 잡는 게 어때요?”부승희는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이젠 하다 하다 택시 운전기사들도 독점이라는 걸 하는 모양이었다.그들은 두 사람이 콜택시를 기다리며 초조해하는 걸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이승우는 아무나 전화를 걸어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그러나 기사의 더러운 시선이 자꾸 부승희에게로 향하는 걸 보며 생각을 바꿨다.이 야심한 시간에 본인 혼자였다면 몰라도 지금은 부승희가 옆에 있었다.저 사람들은 말이 좋아 운전기사였지 독점 운영하는 걸 보아 어쩌면 깡패 일까지 겸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승우는 먼저 상황을 안정시키고 안전하게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라 생각되었다. “그쪽 차에 타면 바로 떠날 수 있어요?”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두 사람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다.“손님, 우린 미터기로 계산 안 해요. 인수로 계산하지.”“네, 상관없어요. 얼마면 되는데요?”“어디로 가세요?”이승우는 주소를 말했다.“한 사람 오만원.”‘세상에 말도 안 돼.’목적지에서 가백산까지의 거리는 콜택시로 고작 만원이 되지 않는 거리였다.비록 두 사람에게 있어 오만원과 만원은 큰 차이가 없었지만 바가지 씌우는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부승희는 몰래 이승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고 이승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부승희의 손을 꼭 잡아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가백산은 낮다면 낮고, 높다면 높은 해발이었다.이승우도 평소 등산을 자주 하는 편이었으나 부승희와의 등산은 학창 시절 수학여행 뒤로는 처음이었다.그해 여름은 아주 더웠고 부승희는 등산하기 싫어 차량에서 버티고 있었다.이승우는 차 안으로 들어가 부승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승희야.”그러나 부승희는 못 들은 척 외면했다.“산에서 보는 일출이 그렇게 예쁘다는데?”여전히 대답이 없었다.이승우는 주변을 뒤적이다가 얇은 잡지를 돌돌 말아 부승희의 귓가에 대고 살살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부승희는 결국 고개를 들어 이승우와 시선을 마주했다.부승희는 이승우를 빤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고 잡지를 휙 던졌다.“그때의 넌 작은 산도 등산하기 싫어했잖아.”이승우의 말에 부승희도 자연스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차 안에서 귓가에 바람을 불던 이승우와 따듯하던 바람이 온몸을 간질거리게 했다.고개를 숙이고 있던 부승희는 이승우가 정말 자신의 귓가로 다가온 줄 알고 심장이 쿵쾅거렸으나 눈을 뜨니 돌돌 만 잡지가 보였고 순식간에 실망이 찾아왔었다.부승희는 이런 이승우가 참 미웠다.하지만 결국 부승희는 이승우와 함께 등산하게 되었다. 등산하는 내내 수많은 친구가 이승우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해 부승희는 또 한 번 화를 내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승우는 어쩔 수 없이 또 부승희를 달래주었고 부승희를 달래주기 힘든 여왕 같다며 별명까지 지어주었다. 부승희는 서운했다. 하고 싶지 않은 등산도 이승우랑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따라 나왔는데 또 많은 사람이 달라붙었으니. 그러나 이승우는 귀찮은 내색도 없이 친구들의 요청에 응했다.하지만 이제 이승우의 옆엔 오직 부승희 뿐이었다.산을 타고 올라가니 작은 절이 보였고 이승우는 밖에서 짧게 기도를 할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부승희는 이승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뭐해? 안으로 들어와서 향 피워야지.”‘여기까지 와서 안하고 가는 게 어디 있어.’이승우는 사실 무신론자였으나 부처님 앞에서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