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와 모연준이 싸울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양시연과 연정훈 역시 그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무도회를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승주는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급히 말했다.“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봤을 때는 이미 싸우고 있었어요. 근데 서로 말은 안 하고 싸우기만 하더라고요. 왜 싸우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승주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싸움이 고조되지 않은 채 욕설도 오가지 않은 것이 못내 답답한 듯했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다 왔어요. 바로 저 앞이에요.”승주는 다급하게 외쳤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팔을 끌며 더 빠르게 움직였다.방 입구 바로 앞의 넓은 홀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몰려 있었다. 대부분 싸움을 말리려는 사람들이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어수선했다.반우희도 홀 한쪽에 있었는데 아마 부승희를 말리려다 부승원에게 밀려난 듯했다. 전체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모연준은 몇몇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었고 이승우 또한 제지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승우의 이마에서 선명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이렇게 심하게 싸운 건가?’양시연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이승우 머리 다친 건 부승희가 때린 거예요.”양시연은 더욱 놀랐다. 그녀는 연정훈을 밀어 싸움을 말리러 가라고 했지만 연정훈은 고개를 저으며 손짓으로 이승우의 반응을 보라고 했다.홀 중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승우는 천천히 손을 들어 이마의 상처를 만졌다. 손바닥에 묻은 피를 확인하더니 그의 얼굴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이승우는 조용히 부승희를 응시했다.부승희는 모연준의 앞에 서 있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이승우가 조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부승희 너 진짜 대단하다. 저놈 때문에 날 죽이려고 하는 거야?”이승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비웃듯 말했다.부승희
좋은 명절 설날 첫날 결국 분위기는 한바탕 소동으로 끝이 났다.이승우는 고집을 부리며 사람들 앞에서 부승희를 강제로 데려갔고 이를 지켜보던 양시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정훈에게 물었다.“이승우 씨가 정말 이상한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니겠죠?”연정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그럴 리 없어.”“그럴 리 없다니요? 이승우 씨가 부승희 씨를 강제로 데려가는 걸 봤잖아요.”“아까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지. 이승우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부승희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려고 하는 거야.”양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진짜야? 가짜야?’양시연은 턱을 괴고 옆에 앉아 눈을 감고 한가롭게 쉬고 있는 부승원을 힐끔 보았다. 연정훈의 말에 신뢰도가 살짝 올라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근데 이승우 씨는 어떻게 모연준 씨가 문제 있다는 걸 알았을까요?”연정훈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답했다.“뻔하잖아. 이승우는 부승희를 마음에 두고 있어서 모연준한테 문제가 없어도 억지로 문제를 만들어낼 놈이야. 게다가 모연준도 딱히 깨끗한 사람은 아니잖아.”양시연은 혀를 차며 말했다.“이 사건 정말 골치 아프네.”...남산 저택 아래의 가로수길에서 롤스로이스가 멈춰 서자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부승희는 곧장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고 이승우는 그녀를 따라갔다.이승우가 부승희의 팔을 붙잡자 그녀는 화를 참지 못하고 돌아서며 그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짝!’소리가 크게 울렸다.이승우는 이미 얼굴에 마른 핏자국과 치료되지 않은 이마의 상처로 섬뜩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방금 맞은 따귀로 인해 그의 잘생긴 얼굴은 더욱 참혹하게 보였다.부승희는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손을 뿌리치고 다시 그의 반대쪽 뺨을 내리쳤다.이승우는 도망치지 않고 그녀의 손길을 그대로 맞았고 부승희가 멈추자 그는 담담하게 물었다.“더 때릴 거야?”‘짝!’부승희는 다시 한 번 세게 이승우의 뺨을 내리쳤고 그 순간 온몸을 부르르 떨며 분노를 토해냈다.“여기
부승희는 점점 멀어져 갔지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여보세요?”부승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너 그 자식이랑 헤어질 거야?”부승희는 당황해서 발신자를 보니 이승우였다.‘헐. 이 멍청이.’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몇 걸음 더 걷자 휴대폰이 다시 울렸지만 이번엔 받지 않았다.휴대폰이 잠잠해졌고 그녀가 십자로 근처에 다다랐을 때 뒤를 돌아보니 이승우의 모습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얼핏 보니 이 재수 없는 놈이 일어나긴 했지만 차 뒷부분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죽으려고 그러나? 피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거야?’부승희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하고 돌아섰고 입구를 지나 몇 걸음 걷자마자 또 전화가 울렸다.부승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그래도 친구 사이인데 내가 죽는 걸 지켜보기만 할 거야?”“네가 죽든 말든 난 이미 너 안 보이는데 죽는 거 지켜볼 일이 없어.”부승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좋아. 부승희. 네가 이겼어.”이승우는 말을 끝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부승희는 전화를 내려다보며 한참 미간을 찌푸렸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몇 걸음 물러나 그가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보기로 했다.바닥에는 한 구의 시체가 있었고 이승우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부승희의 마음이 순간 철렁했지만 곧 깨달았다.‘하. 죽은 척하는 거지?’부승희는 이승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승우는 받지 않았고 그가 이미 기절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그 순간 부승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가슴 깊은 곳에서 미칠 듯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오늘 이승우가 여기서 정말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모두 그가 자초한 일이었고 자신에게서 돈을 뜯어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그러나 두 집안 간의 관계를 떠올리며 그녀는 결국 이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고모, 안녕하세요.”“승희야, 무슨 일이야?”“이승우가 길가에서 기절해서 곧 죽어가고 있어요. 사람 보내서 데려가세요.
양시연은 집에 도착한 후에도 사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땅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그냥 연기하는 건 아닌 것 같던데요.”남자들끼리라면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고 연정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피를 조금 흘려야 동정을 얻는 법이지.”“됐어요. 부승희 씨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더라고요. 이승우 씨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요.”양시연은 외투를 벗고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했다. 연정훈은 그녀가 배고플까 봐 간식을 준비해 방으로 가져왔다.샤워를 마친 양시연은 소파에 기대어 간식을 맛있게 즐겼다. 중간에 연정훈이 샤워하러 간 틈을 타 그녀는 서재로 가서 영어 소설 두 권을 골라 들었다.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책상 서랍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함께 지낸 시간이 꽤 되었기에 양시연은 연정훈이 평소에 여러 대의 휴대폰을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중요한 전화는 그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휴대폰이 아닌 다른 기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서랍을 열어보려고 했으나 잠겨 있었다.연정훈은 평소 양시연에게 비밀을 두지 않았기에 그녀가 물어보면 암호나 열쇠를 알려주곤 했다.양시연은 전에 그가 알려준 곳에서 열쇠를 찾아 서랍을 열었다.휴대폰을 집어 들었을 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고 발신자를 확인했지만 저장된 이름은 없었다.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양시연이 먼저 말을 건네자 상대방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혹시 사모님이세요?”“네 저예요. 임성원 씨죠?”“맞습니다.”“무슨 일인가요?”“도... 도련님을 찾고 있습니다.”양시연은 순간 의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어떤 일이기에 나에게는 말을 안 하는 거지?’“급한 일인가요? 급하면 저에게 말해도 됩니다.”“아니요 급하지 않습니다. 부인께서 도련님께 나중에 전화하라고 전해주셔도 괜찮습니다.”양시연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연정훈이 이상한 짓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임성원이 무언가 불법적인 일을 돕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정훈이 양시연에게 소현주의 일을 숨긴 이유는 그녀가 현재 임신 중이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시연은 이런 문제를 겪어본 적이 없어 연정훈이 사용하는 어떤 수단에 대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하지만 양시연이 이미 눈치챘으니 더는 숨길 수 없었고 괜히 의심을 사 그녀를 더 괴롭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연정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솔직히 말했다.“소현주가 자살 시도를 했는데 실패해서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고 있어.”양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그쪽에서 왜 당신한테 바로 연락한 거예요?”“내가 계속 소현주의 동향을 주시하라고 했거든. 혹시라도 소현주가 나와서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킬까 봐.”연정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소현주라는 여자가 몇 년 동안 정신병원에 있었던 걸로 갑자기 나아질 리는 없었다.아마 소현주는 양시연과 연정훈을 이미 죽도록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면 소현주 씨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에요?”양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소현주 씨가 계속 이렇게 미친 짓을 하고 가끔 자살 시도를 한다고 해도 당신이 소현주 씨를 평생 책임질 거예요?”연정훈이 무언가 설명하려 했으나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내가 질투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이 소현주 씨 문제에 계속 얽히다 보면 어느 날 소현주 씨가 사고를 치고 누군가가 조사하면 당신이 연결될 가능성도 있잖아요. 그리고 예전에 소현주 씨와 공휘 일도 있고요. 공휘는 당신 어머니 쪽 집안사람이고 소현주 씨가 찍은 영상은 당신조차 속일 만큼 완벽했어요. 그 영상이 증거로 쓰이기라도 하면 어느 날 소현주 씨가 세상에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당신 어머니를 끌어들인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연정훈은 이미 이런 문제들을 오래전부터 고려해 두었었고 만약 오늘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는 벌써 소현주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을 것이다.양시연이 말한 것처럼 소현
‘꿈이야. 꿈이었어.’양시연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악몽 속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연정훈도 그녀의 움직임에 깨지 않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연정훈의 평온한 얼굴이 보였고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곧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그녀를 온몸으로 오싹하게 만들었다.‘아니다.’소현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는 것을 양시연도 알고 있었고 연정훈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그 폭탄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녀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자살... 소현주 씨가 정말 자살했다면 지난 몇 년 동안 소현주 씨가 그런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을까? 그런데 이번에 임성원이 굳이 연정훈 씨에게 보고했고 심지어 병원을 옮긴다는 말을 강조했어.’양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고 벽에 걸린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한참이 지난 후 옆에서 움직임이 느껴졌고 연정훈이 깨어난 것이었다.연정훈은 반쯤 감긴 눈으로 양시연의 등을 바라보며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하며 몸을 일으켜 그녀를 감쌌다.“무슨 일이야?”양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얼굴을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은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힌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휴지를 꺼내려 했지만 그가 돌아서기 전에 양시연의 입에서 먼저 질문이 나왔다.“소현주 씨가 자살한 거예요?”연정훈은 잠시 멈칫했고 양시연은 눈을 감으면서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이불을 꽉 움켜잡고 말을 이었다.“소현주 씨가 전에 이런 일을 한 적이 없었어요? 3년 동안 정말 얌전히 있었단 말이에요? 왜 하필 오늘 임성원 씨가 갑자기 전화한 거죠?”연정훈은 얼굴에 평정을 유지한 채 양시연의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시연아,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마.”“나를 속이고 있잖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손을 치우며 단호하게 말했다.“임성원 씨는 당신이 지시한 일을 처리한 거죠? 맞아요? 다만 임성원 씨가 일이 망쳐서 오늘 당신에게 보고하러 전화를 한 거죠.”‘아니. 그뿐만이
새벽 3시에 양시연은 연정훈의 긴 설명을 듣고 나서야 겨우 다시 눕기로 했지만 등을 돌린 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연정훈은 뒤에서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려 했다. 양시연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양시연도 일을 모두 연정훈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소현주를 처리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연정훈이 양시연에게 그 일을 말하지 않은 것도 임신 중인 그녀가 너무 걱정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었다.그가 양원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이후로 양시연은 연정훈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 세운에 다녀온 이후 연정훈의 삼촌과 관련된 위험한 일들을 알게 된 뒤부터 그녀는 그가 처한 자리의 위험성을 직접적으로 체감했다.연정훈이 이미 양원에서 안정된 위치를 잡았다면 괜찮았겠지만 그는 이제 막 첫발을 뗀 상태였다. 양시연은 그가 한 걸음이라도 잘못 디딜까, 걱정이 앞섰다.“더 이상 생각하지 마. 이번 일은 큰일이 아니야.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일은 훨씬 많아. 소현주 일로 겁먹으면 나중에 더 큰 일이 생겼을 때는 내가 너한테 말하기 더 힘들어질 것 같아.”‘큰일이 아니야.’연정훈의 말을 들은 양시연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연정훈은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그에게 어떤 일은 정말 손가락을 까딱해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사소한 문제였다.하지만 양시연은 아직 그런 여유가 없었고 그렇게 담담하지도 못했다.양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무심하게 말했다.“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나한테 말하지 마요. 정훈 씨 혼자 다 감당해요.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혼자서 잘살아 봐요.”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뒤통수에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숨기려던 게 아니야. 그냥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지금 내게 어떤 일도 작은 일일 뿐이고 네가 무사히 아이를 낳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야.”양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정훈은 자신이 양시연의 약점을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출근할 때 너무 무리하지 마. 힘들면 집에 와서 쉬어.”연정훈은 옷을 갈아입으며 양시연에게 당부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의 생필품을 캐리어에 하나씩 차곡차곡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캐리어를 닫으며 마치 자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보여주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말했다.“정훈 씨도 무리하지 마세요. 밖에서 조심하세요."연정훈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양시연을 힐끗 바라봤고 그녀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눈을 살짝 흘겼다.“시간 끌지 말고 빨리 가세요.”재촉하는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출발 직전 그는 양시연을 살짝 끌어당겨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소현주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임성원에게 확인했는데 일을 아주 깔끔히 처리했대.”그 말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양시연의 얼굴이 조금 풀리며 한층 부드러워지더니 연정훈에게 물었다.“병원을 신고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요? 어떻게 그렇게 딱 맞춰 소현주 씨의 사고를 발견하고 병원까지 옮길 수 있었죠?”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결국 알아낼 수 있을 거야.”그 말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의미였고 천천히 파악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른다. 너무 서두르면 상대방이 계획적으로 만든 함정에 걸릴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양시연은 그 모든 상황이 단순한 우연일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대비책이 준비된 상태라면 차분히 대응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소현주 씨 상태는 어때요?”“사람은 깨어났는데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완전히 정신을 놓은 건가요?”“지금은 그런 상태야. 병원 의사들이 그렇게 진단했어.”연정훈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에휴. 이제 당분간 이 골칫거리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네. 골치 아프게 되었어.’아이까지 가진 몸으로 남편의 전 여자친구 문제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양시연은 불만이 가득했다. 생각할수록 답답해지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몰라요. 난 신경 안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