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연인이라는 보장은 없잖아요.”“연인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그 대표는 반우희 씨한테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하니까요.”“그것도 확신할 순 없죠...”“부 대표님이 신경 쓰지 않는다면 왜 반우희 씨에게 몇천만 원 치료비를 대주겠어요?”의사가 비웃으며 대꾸했다.“부 대표님이 봉사자라도 되나?”문밖에 아직 떠나지 못한 그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안 돼. 웃으면 안 돼.’앞에서 부승원은 결제 영수증을 손에 쥔 채 어금니를 꽉 물고 있었고 반우희는 머리를 매만지며 귀 끝이 점점 빨갛게 물들었다.반우희는 부승원을 힐끗 보며 손을 뻗어 결제 영수증을 가져가려 했다.“부 대표님, 제가 계산할게요.”부승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결제 영수증을 다시 거두고 그녀 앞을 지나갔다.“동준이랑 대기실에서 기다려.”“...네.”반우희는 부승원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얼굴을 긁으며 돌아섰는데 양시연과 연정훈의 눈과 마주쳤다.두 사람은 숨죽여 웃음을 참았고 양시연은 의사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의사 선생님 정말...웃기시네요.”연정훈도 미소를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러네요.”반우희는 침묵했다.“...”동준은 계속 고개를 들어 그들을 쳐다보다가 모두가 침묵하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지난번에 희주가 말했어요. 부 삼촌이 누나를 좋아한다고... 음...”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반우희가 급히 동준을 당겨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헛소리하지 마!”동준은 입이 막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음.”양시연과 연정훈은 눈을 마주쳤지만 반우희가 숨기려는 걸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병원을 나오니 밖은 한겨울의 추위가 엄습하고 있었고 그들은 길가의 작은 가게의 군고구마 냄새에 이끌려 동준과 함께 차에서 내려 군고구마를 잔뜩 샀다.연정훈은 양시연을 지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갔고 부승원도 어쩔 수 없이 그들 뒤를 따랐다.그렇
“모연준 씨는 경인에 가족이 있나요?”양시연이 물었다.모연준의 운전기사가 그 사람을 챙겨준다는 건 두 사람이 평범한 친구 사이가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의문을 바로 알아차렸다.그들에게 있어 운전기사와 조수는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며 쉽게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지’ 않았다.더군다나, 모연준은 차갑고 다른 사람을 돕는 성격도 아닌 것 같았다.연정훈이 대답했다.“잘 모르겠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고구마 더 먹을래?”연정훈이 대화 주제를 돌리자 양시연은 조금 이상하게 느꼈지만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집에 돌아가서 먹고 싶으면 내가 구워줄게. 재료도 있고, 오븐도 있으니까.”연정훈이 말했다.“좋아요.”그렇게 대화는 중단되었다.양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부승원은 이 사건을 직접 목격했고 이번 일이 부승희와 관련이 있다면 부승원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차량은 어느새 강남 시티 앞에 도착했다. 여 아주머니는 두 사람이 이렇게 일찍 돌아온 것을 보고 놀라며 집에 들어서자마자 상황을 물었다.양시연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것 같아 바로 말했다.“임신했다고요?”여 아주머니는 놀라서 외쳤고 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평소랑 똑같이 하시면 돼요.”‘어떻게 평소랑 똑같을 수 있어요!’여 아주머니는 자리를 맴돌며 한참 고민하다가 행동으로 옮겼다.축하 편지 작성, 레시피 체크, 임산부 돌보는 방법도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보았다.양지원과 양홍두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연정훈의 부모님에게 숨길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비밀로 하자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양시연은 방 침대에 누워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다행히도 여기저기에서 걸려 온 연락은 모두 연정훈이 받았다.양시연은 핸드폰을 들고 검사 결과를 보면서 여러 가지 정보를 검색했다.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오후 네 시가 되었다.연정훈은 그제야 양시연의 곁에 누웠다. 연정훈은 한 손을 머리 뒤에 대고 천장과 양시연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아직 실감
연정훈은 귀찮아서 전화를 받지 않으려 했지만, 양시연이 재촉했다.“그래도 할 일은 해야죠.”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양시연의 이마에 키스하고 양시연을 품에 안고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저예요, 임성원.”연정훈은 잠시 멈칫했고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양시연이 옆에 있었기에 연정훈은 무표정으로 양시연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팔을 천천히 빼고 일어났다.연정훈은 양시연을 옆에 두고 질문했다.“무슨 일이야?”임성원이 말했다.“정신병원 쪽에서 소현주 상태가 좋아졌다고 하네요. 퇴원 조건을 충족했다고 합니다.”그러자 연정훈의 얼굴에 차가운 기색이 스쳤다.“그쪽에서는 어떻게 처리했어?”임성원이 대답했다.“대표님의 지시가 없었기에 원장님이 퇴원 신청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때 양시연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연정훈이 말을 이었다.“좀 생각해 보고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알겠습니다.”연정훈이 급하게 전화를 끊자 양시연은 연정훈이 평소와 다름없지만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무슨 일이에요?”양시연은 궁금해하자 연정훈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그냥 협력 얘기였어.”“아...”양시연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연정훈을 끌어안으며 말했다.“아까 별로 못 먹었잖아요. 아래 내려가서 뭐 좀 먹을래요?”“좋아, 같이 가자.”연정훈은 휴대폰을 두고, 별다른 내색 없이 양시연의 손을 잡고 내려갔다.양시연은 하루 종일 행복했고, 잠들기 전까지 기분 좋게 지냈다.그건 연정훈도 마찬가지였고 소현주에 대한 걱정을 잊고 양시연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그런데 밤이 깊어지고 연정훈은 무서운 악몽을 꾸었다.꿈속에서 양시연은 배를 움켜잡고 차 옆에서 쓰러져 있었고, 소현주는 차 안에서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연정훈은 놀라서 잠에서 깨어났고, 식은땀을 흘리며 양시연이 여전히 품에 안겨 자는 모습을 확인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밤은 고요했고, 연정훈은 오랫동안 양시연을 바라보며 생각을 점차 정리했다.소현주는
양시연은 사탕을 하나 입에 넣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부 대표님이 그렇게 까다로운 분인가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그렇게 까다로운 건 아니에요. 그런데 완벽주의자라 작은 결점도 못 참고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세요.”그때, 사무실 밖에서 경쾌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반우희가 천진난만하게 사무실로 들어왔고 그 모습에 사무실 분위기가 한층 밝아진 것 같았다.양시연은 그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 지었고 비서는 양시연의 눈빛을 읽고 재빨리 문을 열어 반우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우희 씨, 케이크 먹으러 와요.”반우희는 잠시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서가 오늘따라 양 탈을 쓴 늑대처럼 느껴졌다.“빨리 와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비서가 웃으면서 손짓했다.반우희는 별 의심 없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양시연은 이미 케이크를 나누고 있었고, 반우희에게 오늘 하루 어땠는지 다정하게 물었다.반우희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저, 벌써 일주일 동안 실수 한 번도 안 했어요! 팀장님이 이제 거의 완벽하다고 하셨어요!”“정말요? 대단해요!”양시연은 웃으며 반우희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반우희는 기쁜 표정으로 케이크를 한 입 크게 먹으며, 양시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양시연이 비서에게 말했다.“부 대표님네 가사 도우미 빨리 구해야겠네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좋은 가사 도우미 찾기는 정말 어렵죠. 일급 25만 원도 구하기 힘들어요.”반우희는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일급이 얼마라고요?”“25만 원이요.”비서의 말에 반우희는 바로 질문을 이어갔다.“매일 가야 하나요?”“아니요, 주 2회만 가면 돼요.”‘이렇게 좋은 일자리가 있다니!’비서가 별다른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반우희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저 청소 진짜 잘해요! 저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우희 씨가요?”“네네. 저 청소 잘하는데 저 한 번만 시켜주실래요?”양시연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 새해에 부승원
양시연과 연정훈은 함께 정문으로 들어섰다. 넓은 홀 중앙에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양홍두는 그 테이블 한쪽 끝에 서 있었으며, 양지원과 양석진은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었다.양지원은 긴 머리를 묶어 비녀로 고정했고, 연보라색의 전통 한복을 입고 흰색 여우 털을 어깨에 둘렀다. 외관은 평범한 차림이었지만, 양지원이 착용한 붉은 보석 세트는 은근히 세련된 느낌을 더하며, 단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양석진은 진지한 얼굴로 붓을 쥐고 있었고 그 옆에서 양홍두는 먹을 갈고 있었으며 함께 새해맞이 서예를 쓰고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팔을 가볍게 놓았다. 그리고 양지원과 양석진 쪽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몰래 눈빛을 교환했다.연정훈은 양홍두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연정훈을 발견한 양홍두가 붓을 멈추고 물었다.“내 서예가 어떠냐?”주변 사람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연정훈은 한참 서예를 살펴본 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님, 제 아버지도 서예를 많이 하셨지만, 할아버님의 서예를 보면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할 거예요.”“정말?”“당연하죠.”연정훈은 더 가까이 다가가 세부적인 부분을 하나하나 짚어갔다. 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양홍두를 서예의 대가로 모시는 것 같았다.이에 조금 놀란 양시연이 몰래 양지원에게 물었다.“할아버지 서예가 그렇게 대단해요?”그러자 양지원과 양석진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양지원이 대답했다.“넌 아직도 정훈이 입담을 몰라?”“...”‘아, 역시 그런 거군.’그때, 양홍두가 마른기침하더니 다시 연정훈에게 질문했다.“실은 나도 내 서예가 평범하다는 걸 알고 있네. 그런데 자네 장인어른과는 비교할 수 있겠는가?”“...”양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연정훈에게 쏠렸다.그러나 연정훈은 아무렇지 않게 양석진을 향해 말했다.“아버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양시연은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역시 연정훈은 말을 넘기는 솜씨가 일품이었다.그러자 양석진은 붓을 놓으며 미
식사 자리에서 양시연은 큰소리로 양석진과 양지원의 결혼을 축하했다. 양홍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못해 함께 축하의 말을 했다.“그래도 밖에서는 좀 조심해.”양홍두가 말을 덧붙였다.“조심해 봤자예요. 오빠는 이미 유명 인사이고 난 돈이 많으니까 어떻게든 주목받을 운명이에요. 걱정은 감사해요.”양홍두는 대답이 없었고 양시연과 연정훈은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양석진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웃으며 말했다.“최대한 조용히 지내겠습니다.”양홍두는 듣고 나서 몇 번 헛기침했다.“최대한이라니, 듣기만 해도 엉터리 같군.”다행히 양시연의 임신 소식 덕분에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졌다. 양홍두는 잠시 생각에 잠겼고 이 가문에 곧 아기가 태어날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연정훈은 잠깐 자리를 떠나 폭죽을 챙겨왔다.그 덕에 새해의 분위기가 한층 더 진하게 느껴졌다.양홍두는 술기운이 좀 돌자 갑자기 양지원이 좋아하는 떡을 만들겠다고 했다. 많이 취한 건지 이 야밤에 직접 떡을 만들겠다고 아우성쳤다.갑작스러운 양홍두의 말에 양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알겠어요, 아버지. 그냥 소파에 앉아서 쉬고 계세요. 다른 사람을 시켜서 만들게요.”임신 중인 양시연이 행여나 피곤할까 연정훈은 양시연이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게 했다.사실 떡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 사람은 큰 돌절구에 앉아서 떡을 만들고, 또 한 사람은 큰 나무망치로 그 떡을 쳐야 했다.힘을 쓰는 건 연정훈의 몫이었다.양석진은 시계를 빼고, 팔꿈치를 걷어붙이며 떡 만들기에 몰두했다.예상외로 두 사람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모녀는 양홍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느새 양지원은 양석진 옆에 다가가 양석진의 소매를 조심스럽게 올려줬다. 그 모습이 마치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낸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연정훈은 잠시 멈춰서 그런 모습들을 살펴보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양시연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양홍두와 웃고 있었는데 연정훈에게 시선 한번 주지
양지원과 양석진은 조용히 떡을 만들고 있었다. 위층에서 양시연과 연정훈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래층은 평화롭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아무도 부르지 않고 서로 손발을 맞추며 작업을 이어갔다.양지원은 잠시 휴식을 취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샤워하고 나서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리는데 가슴이 조금씩 떨려왔다.이제 어린 소녀도 아니었지만 결혼 상대가 양석진이라는 것만 생각하면 다시 소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자신의 마음을 모른 척하지 않았고 양석진을 놓치지도 않았다.드디어 양석진과 결혼을 했다.잠시 뒤 양지원은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화장실을 나섰다. 고개를 드니 양석진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샤워를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양지원은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시선을 거두고 스킨 케어를 시작했다.그렇게 순서대로 바르고 있는데 양석진이 어느샌가 양지원의 뒤로 걸어왔다.양지원은 거울 속으로 양석진과 시선을 마주했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그런데 갑자기 오성호랑 이혼하고 세운으로 가서 양석진을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양석진은 내색하지 않고 관저에서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으나 양지원이 모두 거절했었다.하지만 결국 등쌀에 못 이겨 양석진과 저녁을 함께 했다.저녁 식사 자리는 아주 조용했고 양석진은 다정하게 반찬도 집어주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양지원을 위층으로 불렀다.그날 어떻게 방으로 들어가고 방에 들어가서 어떻게 침대 위로 눕혀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양석진이 강하게 몰아붙이던 키스와 단단한 품만이 선명히 떠올랐다.관계가 끝나고 양지원은 허겁지겁 옷을 챙겨입었는데 그러다가 거울 속 양석진의 깊은 시선과 마주하게 되었다.마치 지금의 양석진과 같은 시선이었다.양지원은 몰래 심호흡하며 작은 앰플을 들었다.그러자 뒤에서 양석진이 말했다.“아까 그거 바르는 거 봤어.”“...”양지원은 당황하지도 않고 대답했다.“두 번 발라야 해요.”“그래.”양석진이 고개를 끄덕
“지원아,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양석진은 양지원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우리 둘 사이는 네가 한 걸음만 다가와 주면 돼.”나머지는 양석진이 알아서 하면 되었다.양지원은 목이 메어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양석진의 품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양석진은 죄책감을 느끼는 양지원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렇게 좋은 날 과거에 잠겨 시간을 허비하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그래서 낮은 목소리로 양지원의 관심사를 돌렸고 고개를 숙여 양지원의 입술에 키스했다.이젠 양지원도 분위기에 몸을 맡겼다.양지원은 양석진의 목에 손을 걸고 키스에 응했다.방의 온도는 점점 뜨거워지고 양석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양지원을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음...”다른 한편 반우희는 창가에서 아래층 커플이 키스하는 걸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그리고 손에 쥔 걸레를 내려 두고 아래층에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갔다.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니 먹을 쏟은 것 같은 밤하늘에 달빛이 참 아름다웠다.모든 사람이 마음껏 사랑을 하고 있는데 오직 본인만이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반우희는 한숨을 내쉬었으나 오늘 받은 일급으로 동생들에게 야식을 시켜줄 생각을 하니 다시 힘이 나는 것 같았다.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반우희는 부승원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사실 오피스텔로 치기에는 평수가 커 별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청소를 마치고 반우희는 기사한테 전화를 걸었고 기사는 아직 식사 중이라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그래서 반우희는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그러다가 우연히 부승원 집에 남아 있는 고가의 간식이 눈에 들어왔고 이 많은 걸 버리는 건 아쉬운 일이니 차라리 본인이 먹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차라리 나한테 버리면 완전 고맙지.’그때 승주가 반우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샤부샤부 준비 다 끝났으니까 빨리 와요.”“알겠어!”반우희는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뜨거운 샤부샤부와 동생 세 명과 함께 맞는 새해라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
양지원이 집에 있는 탓에 양혁수는 변여름에게 더 조심스러워졌다.화서시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맞출 만큼 가까워졌지만 집으로 돌아온 순간 그는 그녀의 손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다.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그는 가장 먼저 양지원에게 밥그릇을 건넸다.변여름은 젓가락을 가만히 깨물며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렸다.식탁에 앉은 양혁수는 입을 다물거나 아니면 양지원이 눈빛으로 놀려대지 않도록 일부러 업무 이야기를 꺼냈다.양지원은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가 일부러 찾아온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하나는 오성호 문제로 힘들어할 아들이 걱정돼서였고 다른 하나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가 어디까지 진전됐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였다.오랜 세월 동안 양혁수는 한강시에 홀로 있었고 양지원은 그런 아들이 안쓰럽기만 했다. 수없이 많은 여자를 소개해 줬지만 단 한 번도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았다.양시연은 그녀에게 소중한 딸이었고 양혁수 역시 다르지 않았다.만약 연정훈이 없었다면 두 아이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인연이 아닌 하늘의 장난일 뿐이었다.그러던 중 나타난 변여름은 친한 가문의 딸일 뿐만 아니라 양혁수를 진심으로 아꼈다. 그녀는 기뻤지만 양혁수가 또다시 그 기회를 흘려보낼까 걱정스러웠다.두 사람 사이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혁수야.”“네?”양혁수가 고개를 들었다.“게살 좀 발라줘.”순간 그는 어리둥절했다.‘갑자기?’예전에는 이런 사소한 부탁들을 곧잘 들어주곤 했지만 마지막으로 게살을 발라준 게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집에서 식사할 때면 새우나 게 같은 음식은 늘 손질된 상태로 나왔는데 오늘따라 이상했다.양혁수가 양지원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고 하는 수 없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씻고 도구를 들었다.변여름은 그가 이런 일을 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능숙했고 그의 손끝에서 게 껍데기는 깔끔
사실 양혁수는 변여름이 허예나와 어떻게 친해졌는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차 안에서 심심했던 그는 무심코 몇 마디 물었고 변여름은 처음에는 대답하려 했지만 그의 질문이 계속되자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오빠 혹시 허예나 같은 스타일 좋아해요?”“어떤 스타일?”“착하고 여성스러운 스타일.”양혁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턱을 잡아 조심스럽게 얼굴을 돌렸다.변여름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여름이보다 더 착하고 여성스러운 사람이 있어?”변여름은 순간 멍해졌다.자신이 착하거나 여성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양혁수는 그녀를 ‘우리 여름이’라 불렀다. 그 순간 얼굴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양혁수는 그녀의 반응을 즐기듯 느긋하게 시트에 기대어 웃음을 터뜨렸다.변여름이 얼굴을 숙여 식어가는 열기를 숨기자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질투쟁이.”그는 혀를 찼다.“내가 허예나랑 같이 지낸 적도 없는데 걔가 착하고 여성스럽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착하긴...너랑 붙어 다니며 사기나 치고 말 몇 마디로 사람 현혹해서 네 돈까지 빼갔잖아.”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아니에요. 허예나 씨는 사람을 말로 속이거나 현혹하지 않아요. 언제나 진실만 말해요.”허예나는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했다.양혁수는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기분 좋게 집에 도착한 그는 마치 익숙한 일인 양 가정부 앞에서 자연스럽게 변여름의 손을 잡고 문을 열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앞쪽에서 일부러 낸 듯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양혁수가 시선을 돌리자, 장난기 어린 양지원의 눈빛이 그와 마주쳤다.‘!’양지원은 그들의 손을 흘긋 본 뒤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돌아왔구나?”양혁수는 다소 불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거기 일은 다 끝났어요.”“
‘어. 신발 끈 풀렸네.’변여름은 빨대를 문 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발 끈을 묶어주는 양혁수를 바라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양혁수가 한쪽 신발 끈을 묶고 일어서려 하자 변여름은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고 다른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이쪽도 풀렸어요.”양혁수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신발 끈 한 번 묶어줬을 뿐인데 이젠 완전히 맛 들였나? 나 부려 먹는 재미라도 붙였나 보지?’그는 다른 쪽 신발 끈도 풀어 더 단단히 묶어주었다.그가 일어서자 변여름은 곧바로 그에게 레몬티를 건네며 말했다.“오빠, 날씨 추워요. 오빠도 좀 마셔요.”양혁수는 빨대를 살짝 물고 한 모금 마신 뒤 차에 기대어 담담히 말했다.“너희 집에 전화했어. 설날에 안 간다고.”변여름은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양혁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말을 이었다.“어차피 너희 집은 설날 크게 챙기지도 않잖아. 굳이 왔다 갔다 할 필요 없어.”그는 늘 핵심을 돌려 말했고 변여름은 그런 식으로 시간을 끄는 걸 싫어했다.그녀는 조용히 차에서 내려 그의 앞에 섰다.서로의 눈이 마주쳤고 양혁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왜?”변여름은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오빠, 나를 한강시에 데려가 줄 거예요?”양혁수는 웃음을 참듯 입술을 다물고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봤다.“나와 같이 한강시에 가서 설 보내고 싶어?”“...”변여름은 드물게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오래도록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끝내 표정을 풀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손을 들어 그녀의 두 볼을 잡고 좌우로 살짝 흔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한강시에 안 데려가면 널 여기 두고 가야 하잖아. 근데 너 성격이 얼마나 불같은데. 또 한강시까지 쫓아와서 날 잡아먹을지도 몰라.”변여름은 예전에도 세 번 미래에 대해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첫 번째는 그가 진실을 알기 전날 그녀가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고 두 번째는 그가 멕하든을 떠나던 날 비행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