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조이현은 능청스럽게 입을 다물며 일부러 미안한 척했다.“양시연 씨, 미안해요. 제가 당신 얘길 한 건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괜찮아요.”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조이현 씨는 건강검진 받으러 오셨나요?”조이현은 뻔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산부인과에 왔어요.”양시연은 일부러 놀란 척 물었다.“임신하셨군요?”“...”양시연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마치 친근하게 묻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둘째인가요?”조이현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양시연은 모르는 척 자연스럽게 이어갔다.“전에 한 번 임신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 딸이었나요? 아니면 아들이었나요?”이 주제는 조이현에게 금기였다. 누군가 이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그녀는 분노로 이성을 잃곤 했고 더구나 그 일이 있던 당시 양시연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이현이 유산의 충격과 분노로 양시연의 외할머니가 입원해 있던 병원까지 찾아가 난동을 부렸었다. 양시연은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 주제를 꺼내 조이현을 노골적으로 자극했다.조이현은 온몸에 긴장이 감돌았고 무심코 눈에 들어온 찻잔을 집으려 했지만 양시연이 먼저 찻잔을 들어 올렸다.두 사람의 눈빛이 교차했고 양시연은 차분하지만 냉랭한 표정을 지었고 조이현의 눈은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조이현 씨 내가 당신과 어떤 원한으로 얽힌 적 있던가요?”양시연이 침착하게 물었다.조이현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더 이상 가식적인 태도를 유지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응수했다.“당신이 나한테 원한이 없다고? 당신 때문에 내 첫 아이가...”조이현이 울컥하며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양시연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조이현 씨의 불행은 당신이 사람을 잘못 본 탓이에요.”양시연이 조이현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당신 같은 사람이 겪는 불행은 모두 당신이 자초한 거라고 봐요.”양시연은 과거를 떠올렸다. 조이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녀를 고위층 남성의 차에 태우려 했던 일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의 행복 앞에서 말하기 어려운 아픔은 더욱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다.지금의 주지혁이 딱 그랬다. 그는 과거에 원하던 명성과 지위를 모두 손에 넣었지만 같은 공간에서 벌어진 두 가지 대조적인 장면이 그의 마음을 휘저었다. 양시연은 환한 미소로 연정훈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조이현이 울부짖으며 따지고 있는 것을 보니 자신이 이룬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 느껴졌고 오히려 혐오감마저 들었다.더 큰 문제는 이 모든 상황이 결국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는 점이었다.주지혁은 자신을 다독이며 체면을 지키려 했고 감정적으로 폭발한 조이현을 간신히 진정시켜 그녀를 데리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연정훈이 양시연을 품에 안고 VIP 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조이현 씨가 또 귀찮게 했어?”양시연은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신경질적으로 굴면서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더라고요. 아직도 내가 주지혁 씨를 신경 쓴다고 생각하는지 와서 시위하러 온 것 같아요.”연정훈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정말 정신 못 차렸네.”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흘겨보며 장난스레 웃었다.“그러니까 말이에요. 우리 연 대표님이 이렇게 완벽한데 조이현 씨 남편이랑은 비교조차 안 되는데요. 대체 그녀는 어디서 그런 자신감을 얻는 걸까요?”연정훈은 그녀의 칭찬에 흡족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밖에서는 좀 겸손해야지. 재물은 밖으로 흘리는 게 아니니까.”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알겠어요.”두 사람은 나란히 VIP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예약된 의사들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고 박사가 검진 항목을 설명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똑똑똑.박사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한 간호사가 서 있었고 그녀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박사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이러다 조이현 씨가 병원 천장이라도 날려버리겠어요.”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연정훈과 눈을 마주쳤다.그러나 둘 사
병원 밖 검은 벤츠 안에서 조이현은 겨우 조금 진정된 상태였다. 얼굴에는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선명했고 침묵만 지키고 있는 주지혁을 조심스레 바라보다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살피기 위해 손을 뻗었다.그러나 주지혁은 이미 극도로 짜증이 난 상태였고 조이현의 손을 툭 쳐내며 짧게 말했다.“나 괜찮아.”조이현은 멍하니 주지혁을 바라보다가 곧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굴을 감싸 쥔 채 무너지듯 오열하며 외쳤다.“나도 어쩔 수 없었어...아이를 또 잃어서 나도 내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었어. 왜 하늘은 날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거야? 왜? 왜 천한 양시연은 아이가 생기는데.”주지혁은 아무 말 없이 차창을 열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그는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손을 창밖으로 뻗었다.얼굴에 스치는 싸늘한 바람 그리고 옆자리에서 멈추지 않는 조이현의 울음소리에 주지혁의 마음은 점점 더 차갑고 무감각해졌다.처음 조이현과 엮였을 때 주지혁이 그녀에게 전혀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이현은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면이 있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다. 그런 부잣집 딸이 자신에게 마음을 준다는 사실에 흔들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그 흔들림은 배신으로 이어졌고 양시연을 희생하며 얻은 미래였다. 마치 하늘이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듯 주지혁의 행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3년 동안 주지혁은 조씨 가문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꾸준히 성장시켰다. 처음에는 그를 하찮게 보던 조이현의 아버지도 점차 그의 존재를 의식하며 경계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그를 회유하려는 태도로 바뀌었다.조이현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도 주지혁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매일 그에게는 고통의 연속일 뿐이었다.그는 밖에서 다른 여자를 두었고 조이현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집안은 싸움의 연속이 되었다. 싸움이 끝나면 마지못해 서로를 붙들고 살아가다가도 다시 다툼이 시작되기를 반
연정훈은 자신도 본인 말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맞아. 네가 해.”양시연은 그를 한 번 쏘아보며 일어나 박사에게 말했다.“검사 준비해 주세요.”“알겠습니다.”조이현이 난리를 피운 후 박사는 빠르게 일 처리를 마무리하고 양시연의 검사를 진행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양시연과 연정훈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연정훈은 차를 마시며 고의로 침착한 모습을 보였고 양시연도 손을 다리 위에 놓고 의식적으로 침착하려 애썼다.그때 연정훈이 갑자기 그녀를 쳐다보며 손을 뻗어 양시연의 손을 잡았고 양시연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쳤다.“너 손바닥에 땀 나.”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비웃었고 연정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한심하네.”양시연은 콧소리로 웃으며 손을 빼고 말했다.“방금까지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사람이 나를 한심하다고 말하다니요.”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입술을 깨물며 양시연의 배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양시연은 뒤로 기댄 채 배를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정훈 씨, 설마 잘못된 거 아니겠죠?”연정훈은 이미 긴장한 상태였고 양시연의 말에 마음이 더욱 초조해졌다.“괜찮아. 잘못된 거면 나중에 또 생길 거야.”연정훈이 먼저 그녀를 위로했고 양시연은 배를 살며시 만지며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사가 다시 돌아왔고 연정훈은 무의식적으로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몸을 바로 세웠다.박사는 그들이 기다리는 걸 알고 바로 말했다.“축하드립니다.”그 말에 양시연과 연정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놓았다.“확인했습니다. 양시연 씨는 이미 임신 중입니다. 현재 상태는 양호합니다.”박사가 덧붙였다.‘세상에.’양시연은 기쁨을 느끼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박사는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연정훈은 손을 뻗었지만 양시연에게 먼저 빼앗겼다.양시연은 보고서를 받아 들고 한참 동안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연정훈의 눈을 마주쳤다.‘믿어요? 내 배 속에 작은 생명이 있
반우희는 연정훈이 양시연을 과잉보호하고 있다는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친근한 미소를 띠며 양시연에게 말했다.“오늘 병원에 올 시간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양시연은 곧바로 대답했다.“갑자기 일이 마무리돼서 바로 왔어요.”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히 답을 주고 이어 물었다.“검사 결과에는 별문제 없죠?”양시연과 연정훈은 잠시 멈칫하며 이 질문을 어떻게 넘길지 고민하고 있을 때 멀리서 부승원이 두 사람을 쓱 훑어보며 말했다.“임신했어요?”양시연과 연정훈은 동시에 침묵했다.‘변호사의 날카로운 직감은 정말 대단하네.'양시연은 그저 웃어넘겼고 반우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반우희의 시선은 양시연의 평평한 배에 머물렀고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양시연은 더는 숨길 필요 없다고 판단해 작은 소리로 말했다.“네. 아직 석 달이 안 됐어요.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반우희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육아 비법에 관해서라면 끝없이 이야기할 자신이 있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알았어요. 첫 3개월 동안은 말하지 않는 게 좋다면서요.”양시연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지었다.“이런 것까지 알고 계시다니 놀랍네요.”반우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가볍게 휘저으며 말했고 이내 양시연에게 육아 이야기를 시작할 듯 잡으려 하던 찰나 부승원의 차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조금 있으면 의사 선생님이 오전 근무를 마칠 시간이야.”반우희는 그제야 중요한 일을 떠올렸다.‘맞네.’반우희는 이마를 한번 치고는 동준을 끌어당기며 양시연에게 말했다.“언니, 우리는 먼저 동준을 데리고 진찰받으러 가야 해요.”양시연은 아직 집에 돌아갈 마음이 없었고 눈앞의 세 사람이 묘하게 흥미로웠다.“우리 같이 가도 될까요?”반우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녀는 한 손으로 동준을 잡고 다른 손으로 양시연의 팔을 끌어 잡으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집에 가서
...방 안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않았고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반우희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분위기를 정리하려고 애썼다.동준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아니에요. 반우희 누나예요.”의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금세 깨닫고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부승원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아빠는 정말 젊어 보이네요.”‘이렇게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있다니.’방 안의 모두가 당황했다.???부승원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양시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고 연정훈은 웃음을 참으려 애쓰다 못해 이마를 짚으며 간신히 표정을 유지했다.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동준은 어른스럽게 한숨을 쉬며 두 손을 펼치며 말했다.“아빠도 아니에요. 부 삼촌이에요!”이번에는 의사가 또 한 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이게 무슨 조합이지?’의사가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또 질문하려던 찰나 안내 직원이 얼른 나서서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용 선생님! 먼저 아이를 진찰해 주세요. 나머지는 나중에 얘기하시죠.”“네. 알겠어요.”양시연은 이 의사에게서 더 웃긴 말들이 나올 것 같아 속으로 기대가 되었다.역시나 의사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진찰하면서도 계속해서 반우희와 부승원을 쳐다보며 무심코 말을 던졌다.“엄마는 평소에 아이에게 운동 좀 시켜야 해요. 아이고 늦게 왔네요. 부모가 돼서 어쩜 이렇게 태만할 수 있죠? 아빠는 저기 가서 서세요. 키를 재볼게요.”...부승원은 처음에는 말이 나오지 않았고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거의 진짜로 가서 키를 잴 뻔했는데 반우희가 부승원을 잡고 다시 한번 설명해 줬다.“부 대표님은 아빠가 아니에요! 동준 아빠는 키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요.”“알았어요.”그런데 또 의사는 금세 말하였다.“자 아빠...”모든 사람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양시연은 웃음을 참느라 괴로워하며
“꼭 연인이라는 보장은 없잖아요.”“연인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그 대표는 반우희 씨한테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하니까요.”“그것도 확신할 순 없죠...”“부 대표님이 신경 쓰지 않는다면 왜 반우희 씨에게 몇천만 원 치료비를 대주겠어요?”의사가 비웃으며 대꾸했다.“부 대표님이 봉사자라도 되나?”문밖에 아직 떠나지 못한 그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안 돼. 웃으면 안 돼.’앞에서 부승원은 결제 영수증을 손에 쥔 채 어금니를 꽉 물고 있었고 반우희는 머리를 매만지며 귀 끝이 점점 빨갛게 물들었다.반우희는 부승원을 힐끗 보며 손을 뻗어 결제 영수증을 가져가려 했다.“부 대표님, 제가 계산할게요.”부승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결제 영수증을 다시 거두고 그녀 앞을 지나갔다.“동준이랑 대기실에서 기다려.”“...네.”반우희는 부승원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얼굴을 긁으며 돌아섰는데 양시연과 연정훈의 눈과 마주쳤다.두 사람은 숨죽여 웃음을 참았고 양시연은 의사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의사 선생님 정말...웃기시네요.”연정훈도 미소를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러네요.”반우희는 침묵했다.“...”동준은 계속 고개를 들어 그들을 쳐다보다가 모두가 침묵하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지난번에 희주가 말했어요. 부 삼촌이 누나를 좋아한다고... 음...”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반우희가 급히 동준을 당겨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헛소리하지 마!”동준은 입이 막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음.”양시연과 연정훈은 눈을 마주쳤지만 반우희가 숨기려는 걸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병원을 나오니 밖은 한겨울의 추위가 엄습하고 있었고 그들은 길가의 작은 가게의 군고구마 냄새에 이끌려 동준과 함께 차에서 내려 군고구마를 잔뜩 샀다.연정훈은 양시연을 지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갔고 부승원도 어쩔 수 없이 그들 뒤를 따랐다.그렇
“모연준 씨는 경인에 가족이 있나요?”양시연이 물었다.모연준의 운전기사가 그 사람을 챙겨준다는 건 두 사람이 평범한 친구 사이가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의문을 바로 알아차렸다.그들에게 있어 운전기사와 조수는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며 쉽게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지’ 않았다.더군다나, 모연준은 차갑고 다른 사람을 돕는 성격도 아닌 것 같았다.연정훈이 대답했다.“잘 모르겠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고구마 더 먹을래?”연정훈이 대화 주제를 돌리자 양시연은 조금 이상하게 느꼈지만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집에 돌아가서 먹고 싶으면 내가 구워줄게. 재료도 있고, 오븐도 있으니까.”연정훈이 말했다.“좋아요.”그렇게 대화는 중단되었다.양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부승원은 이 사건을 직접 목격했고 이번 일이 부승희와 관련이 있다면 부승원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차량은 어느새 강남 시티 앞에 도착했다. 여 아주머니는 두 사람이 이렇게 일찍 돌아온 것을 보고 놀라며 집에 들어서자마자 상황을 물었다.양시연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것 같아 바로 말했다.“임신했다고요?”여 아주머니는 놀라서 외쳤고 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평소랑 똑같이 하시면 돼요.”‘어떻게 평소랑 똑같을 수 있어요!’여 아주머니는 자리를 맴돌며 한참 고민하다가 행동으로 옮겼다.축하 편지 작성, 레시피 체크, 임산부 돌보는 방법도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보았다.양지원과 양홍두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연정훈의 부모님에게 숨길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비밀로 하자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양시연은 방 침대에 누워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다행히도 여기저기에서 걸려 온 연락은 모두 연정훈이 받았다.양시연은 핸드폰을 들고 검사 결과를 보면서 여러 가지 정보를 검색했다.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오후 네 시가 되었다.연정훈은 그제야 양시연의 곁에 누웠다. 연정훈은 한 손을 머리 뒤에 대고 천장과 양시연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아직 실감
‘한 통은 우연일 수 있지만 두 통 세 통은 뭐지?'양시연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한 채로 연정훈과 소현주의 다른 이메일들을 열었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그중 절반이 그녀가 익숙한 주제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숨을 참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빠르게 N.S와의 통신을 열어 하나씩 비교하기 시작했고 주제부터 내용까지 높은 중복도를 발견했다.‘뭐지?’양시연은 화면 앞에서 멍하니 멈춰 서 있었는데 갑자기 시선이 N.S라는 두 글자에 떨어졌다.옛날에 양민아가 소현주의 영어 이름은 Nancy라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Nancy.Su! 내가 예전에 통신한 사람은 소현주 씨였다는 말인가?’‘이건 말도 안 돼. 너무 황당하잖아.’양시연은 정신을 차리고는 계속해서 과거에 보냈던 첫 번째 이메일과 연정훈과 소현주가 주고받은 첫 번째 이메일을 찾아봤다. 모두 일치했다.‘온라인 연애? 하. 헛소리.’양시연은 충격을 받았고 곧 분노로 바뀌었다.결국 소현주는 그녀와 연정훈 사이에서 말을 전하는 역할이었고 연정훈과 소현주의 인연은 그녀가 맺어준 셈이었다.양시연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고 일어섰다가 책상 앞에서 걸어 다녔다.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우연인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현주가 양시연의 메일을 통해 연정훈에게 답장을 보냈고 연정훈과 대화를 나눈 후 연애를 하고 다시 한 바퀴 돌아서 결국 연정훈과 다시 만났다.‘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고.’양시연은 말라붙은 입술을 핥으며 다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남은 이메일들을 하나씩 열어봤고 한 통씩 읽을 때마다 답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나니 점심시간이 지나버렸고 휴게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채 본능적으로 화면을 닫았다.연정훈은 잠을 자고 나서 훨씬 상쾌해 보였다.양시연은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그녀는 소현주와의 ‘온라인 연애’에 질투를 느꼈지만 결국 그와 통신한 건 바로 자
연정훈이 말했다.“인생이 단지 첫 만남 같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소현주의 이미지는 나중에 무너졌어. 처음 편지를 주고받았던 정 때문에 계속 신경을 썼던 것 같아. 게다가 처음엔 소현주의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었잖아.”양시연은 냉소적으로 말했다.“그러면 결국 정말 온라인 연애를 한 거네요.”연정훈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런 변질된 일로 질투하지 마. 당신이 찝찝하지 않아도 내가 더 찝찝해.”연정훈이 말했다.“내가 질투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요?”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어쨌든 너는 절대 잘못이 없어.”그는 마치 부드러운 솜처럼 아무리 세게 때려도 무슨 소용인가 싶을 만큼 무력하게 반응했다.양시연은 아무리 화가 나도 결국 그에게 화풀이하고 싶지 않았다.사건은 임성원에게 맡기고 두 사람은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은 연정훈이 양시연의 마음을 달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아침이 되자 양시연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고 거울 속 부은 눈을 보며 어제 그렇게 감정에 휩쓸린 걸 후회했다.연정훈은 그녀에게 더 쉬라고 했지만 양시연은 일이 없으면 오히려 마음이 더 답답할 것 같다며 출근하기로 했다.아침에 연정훈은 양시연을 정인으로 데려다주었고 점심시간이 되자 다시 그녀를 보러 왔다.양시연은 연정훈이 바쁜 걸 알기에 말했다.“나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니 하루에 몇 번씩 오지 않아도 돼요.”연정훈은 부드럽게 말했다.“내가 와서 네가 괜찮은 걸 확인해야 오후에 마음 편히 일할 수 있어.”양시연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옆에 앉았다.함께 점심을 먹은 뒤 양시연은 연정훈을 휴게실로 데려가 잠시 눈을 붙이게 했다.연정훈이 잠든 모습을 바라보던 양시연은 잠이 오지 않아 허리를 매만지며 사무실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일에 몰두하면 잡생각이 사라질 줄 알았지만 고요가 찾아오자 다시 사소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맞은편 건물을 멍하니 바라보던 양시연은 문득 연정훈이 예전에 자신에게 이
방 안 분위기가 차츰 진정되었고 양시연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눈을 감고 심신을 안정시키고 있었다.연정훈은 그녀 곁을 지키며 조용히 물었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양시연은 눈을 뜨며 옅은 창백함이 감도는 얼굴로 말했다.“배가 두 번 정도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팠어요. 아기한테 영향이 간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양시연은 자신의 상태를 숨기지 않았고 연정훈은 지금 그녀의 상태를 우선시했다. 집에 손님들이 있었지만 망설임 없이 의사를 불렀다.의사가 도착하자 부승희와 몇몇 손님들도 양시연의 상태를 확인하러 왔다.다행히도 의사는 금방 진찰을 마쳤고 임신부의 정서적 동요로 인해 불편함이 생긴 것이며 아기에게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다.이 말을 들은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늦게 나타난 반우희는 세 아이를 데리고 양시연을 찾아왔다.희주는 맨 뒤에 서서 망설였지만 양시연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그 사진들은 합성된 거야. 언니가 이미 확인했으니까 걱정하지 마.”그 말을 듣고 나서야 희주는 안도하며 어른인 척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내가 뭐랬어요? 형부는 드라마 속 나쁜 남편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아요.”그러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언니한테 보여주지 말 걸 그랬어요.”양시연은 그들이 비록 어리지만 분명히 고민한 끝에 그녀와 더 가까운 관계인 자신이 속지 않을까 걱정되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생각했다.그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진 양시연은 희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의사의 말로 모두가 안심했지만 양시연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손님들은 차례로 자리를 떠났다.저택은 다시 고요해졌고 가정부들은 조용히 집 안을 정리했다.밤이 되자 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정훈이 음식을 들고 와 몇 입이라도 먹으라며 권했지만 양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직 마음이 상해서 먹고 싶지 않아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앉히고 침대 헤드에 기대도록 했다.“좋은 엄마가 되고 싶
양시연과 연정훈은 오랫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앞뒤로 위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며 속으로 추측을 시작했다.“싸운 걸까요?”거실의 분위기는 점점 냉랭해졌다.그 옆에서 세 명의 어린아이도 조용하게 있었다. 동준은 아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순수한 눈빛을 띠고 있었지만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승주와 희주는 상황을 감지한 듯 말수가 줄고 표정이 어두워졌다.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사람들은 각자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으며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조용히 자기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위층에서 양시연과 연정훈은 비록 서로 소리 내어 다투지는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양시연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사진을 보낸 사람이 마치 과거에 양민아가 연정훈에게 자신과 양혁수의 에든베타 영상을 보낸 것처럼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적이라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전 연인의 친밀한 사진을 보고 차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무엇보다도 그녀는 소현주를 극도로 싫어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신경 쓰는 부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소현주와 아무 일도 없었어. 내가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거짓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양시연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를 등진 채 말없이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고 감정이 격해져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은 이전에는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소현주가 연정훈과 친밀했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위산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결국 양시연은 급히 일어나 욕실로 향했고 연정훈은 그녀를 따라갔다.그녀가 토하는 모습을 보며 연정훈의 마음은 무너지는 듯 아팠고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는 사진의
양시연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뭔데?”희주는 양시연의 손을 잡고 작은 방으로 이끌었고 잠시 고민한 후 침대 위에서 한 묶음의 엽서를 꺼냈다.희주는 잠시 말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어 양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승주 오빠가 언니가 아기를 가진 상태라 화내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언니가 모르면 더 속상해할까 봐 저희끼리 의논했거든요...”말을 끝낸 희주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고 양시연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깊이 고민하지 않고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대체 뭔데 그래?”희주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손에 든 것을 양시연에게 내밀었고 양시연은 별 의심 없이 그것을 받고 훑어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얼굴빛이 변했다.그것은 엽서가 아니라 사진 묶음이었고 사진 속 장면들을 본 순간 양시연의 손이 떨리고 몸이 굳어졌다.희주는 양시연의 표정을 살피며 상황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고 두 손을 어찌할 바 모르며 만지작거렸다.“언니 이 사진...저희 몇 장만 봤어요. 함부로 다 보지는 않았어요.”양시연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감정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녀는 희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알았어. 희주, 고마워.”희주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으로 양시연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혹시... 오해일 수도 있어요. 아 맞아요.”그러더니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승주 오빠가 그러는데 이 사진들이 조작된 걸 수도 있대요.”양시연은 살짝 미소 지으며 희주의 어깨를 다독였다.“알겠어. 먼저 가서 놀아.”희주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천천히 방을 나갔다.문이 닫히자 양시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고 의자에 앉아 허리를 살짝 짚은 뒤 사진들을 한 장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첫 번째 사진에는 연정훈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고 소현주는 핸드폰을 들고 그의 볼에 입을 맞추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었다.이 사진 한 장만으로도 희주 같은 어린아이조차 불륜을 떠올릴 법했으니 양시연이 불쾌함을 느낀 것도 충
점심 무렵까지 놀다 보니 사람들도 지쳐 절반 정도의 손님들은 객실로 가서 휴식을 취했고 여전히 에너지를 발산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은 반우희 집안의 세 아이뿐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 옆에 기대앉아 몇몇 임원들과 함께 업계 대기업들의 권력 교체 뒤에 숨겨진 작전들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 그녀는 입이 심심해졌다. 그녀는 술 창고에 여 아주머니가 만든 과일 원액이 생각나 직접 가지러 가기로 했고 연정훈은 그녀가 걱정되어 동행하기로 했다.“겨우 몇 걸음밖에 안 되잖아요.”양시연이 말하자 연정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내가 집에 있을 땐 나랑 같이 가. 내가 집에 없을 땐 혼자 수영장이나 술 창고에 가지 마.”양시연은 현재 배가 커져 있어 혹시라도 넘어지면 큰일이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그렇게까지 조심해야 할 필요 없어요...”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뒷문에 도착했고 연정훈이 문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양시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상대를 확인한 후 여 아주머니의 손자인 탁승호라는 걸 알고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승호 오빠.”탁승호는 양씨 가문 사람이라 연정훈도 그를 예우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의 배경은 깨끗했다.“방금 창고에 신선한 식자재를 채워 넣고 오는 길에 뒷마당에서 몇몇 아이들이 우체통을 열려고 애쓰는 걸 봤어요. 그래서 열쇠를 찾아주려고 했어요.”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그 우체통은 녹슬었을 텐데 아직 열릴 수나 있을까요?”“괜찮아요. 안 열리면 자물쇠를 교체하고 조금만 다듬으면 보기에도 좋을 거예요.”“네. 수고하세요.”탁승호는 서른 정도로 보이는 투박한 남자로 성격도 순박해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금세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연정훈과 양시연에게 길을 내어주고 두 사람이 지나가자 조용히 거실로 들어갔고 매우 얌전하게 있었다.양시연은 별다른 생각 없이 연정훈과 함께 술 창고로 내려갔다.그녀는 과일 원액을 금세
부승희는 양시연에게서 옷을 빌려 입고 나오던 중 마침 부승원과 반우희를 마주쳤다.‘반우희 씨는 피부가 정말 하얗고 통통하네.’부승희는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순간 참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부승원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반우희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반우희 씨, 가슴이 진짜 풍만하시네요.”반우희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당황한 듯 가슴을 감쌌다.‘이 여자 변태인가?’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들어 부승원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쳤다. 그러더니 반우희를 옆으로 끌어당겨 속삭이듯 물었다.“우리 오빠가 만져본 적 있어요?”반우희는 당황했다!반우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승희를 바라봤다.‘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 거야?’부승원은 반우희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부승희가 불쾌한 말을 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얼굴을 굳히며 객실 문을 열었다.“일단 들어가서 샤워하고 옷부터 갈아입어.”반우희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부승희의 손에서 재빨리 벗어나 방으로 들어갔고 방 밖에서는 남매가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부승희는 두 손을 뒤로 모으며 부승원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부승원도 수영을 한 듯 드물게 정장을 벗고 수영복만 입은 모습이었다.반우희는 친오빠마저 그냥 두지 않으며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오빠 가만히 서 있지 말고 들어가. 절호의 기회잖아.”부승원은 침묵했다.“...”이승우는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아까 이승우랑 같이 있었냐?”‘쳇.’수비가 되지 않자 공격으로 돌리는 것은 정말 규칙을 지키지 않는 치사한 수법이었다.부승희는 콧방귀를 끼고 대답 없이 자리를 떠났고 부승원은 그런 그녀를 보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방으로 들어갔다.방 안에는 반우희가 샤워를 마친 후인지 그녀의 옷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 모습은 전혀 여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부승원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들었지만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잠시 후 반우희가 목욕
부승희는 떠날 때 마음속에 분노를 가득 품고 떠났으며 정확히 말하자면 이승우와 사귀지 않았지만 그와 모호한 관계를 여러 번 이어왔다.부승희는 속으로 둘이 결국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여겼다.결국 이승우는 진정한 사랑이라 여긴 다른 여자를 만났고 그녀는 해외로 떠날 때 마음속으로 이승우에게 저주를 퍼부었다.돌아와서는 모연준과 함께하며 학업과 커리어도 성공적으로 마쳤고 그로 인해 이승우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우에 대한 미움은 여전히 부승희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처음에는 모든 환상이 유지될 수 있었지만 이승우가 모연준을 대신해 싸워주던 그날 밤 사실 그가 부승희를 위해 싸운 것이었음에도 그녀는 마음 깊이 숨겨왔던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그녀는 이승우가 대체 누구길래 얼굴도 두껍게 나서서 자신을 대신해 싸운다고 하는지 의문스러웠다.이승우가 부승희를 대신해 싸운 것은 결국 그녀에게 창피함을 안겨준 셈이었고 마치 자신이 이승우보다 못한 사람을 찾았다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부승희는 이승우의 머리를 때린 후 단호하게 말을 끊어버렸다. 그저 이승우가 알아서 멀리 떨어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며 두 가문 간의 인연을 생각해 어느 정도 체면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랐다.‘그런데 하하.’그때 이승우는 웃으며 부승희의 허리를 감싸 안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부승희 나는 다른 것을 바라는 게 아니야. 내가 너를 도와서 상황을 풀어줄게. 돈을 벌어서라도 이렇게 쌀쌀맞게 굴지 말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잖아.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우정이라도 남아 있잖아. 네가 예전에 나와 사귀지 못해서 마음에 담고 있다면 마음이 너무 좁은 거 아니야?”“마음이 좁다고? 감히 이런 말투로 나를 말하다니. 내가 이승우에게 용기를 준 건가?’“어때?”이승우는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내가 너의 부하가 되어줄 기회를 줄래? 네가 어디를 지시하면 내가
이승우는 다리를 뻗어 부승희를 부드럽게 끌어올려 무릎 위에 앉혔고 그 일련의 동작은 마치 미리 설정된 것처럼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이루어졌다.심지어 부승희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리려는 동작까지 예상한 듯 그는 가볍게 그녀의 손을 잡아 등 뒤로 제압했다.‘이런.’부승희는 속으로 짧게 욕을 내뱉었지만 체면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로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이승우를 응시했다.“이거 무슨 뜻이지?”“실수였어.”이승우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여 부승희의 다리를 살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부승희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이승우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허리가 아프네. 좀 주물러 줄래?”그 말을 하며 그녀는 이승우의 무릎 위에서 일부러 몸을 살짝 비틀었고 이승우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내가 정말로 주물러줘도 화 안 낼 거야?”“화날 리가 있겠어? 네가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걸 아는데.”이승우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억누르려 애썼다.‘이승우가 좋은 마음으로?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부승희는 허리가 아프다고만 했을 뿐 정확히 어디가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승우도 따지지 않고 그녀의 손을 풀어주며 따뜻한 손바닥으로 천천히 허리를 주물렀다.그는 부승희의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잡담을 나누는 이 순간을 만끽했다.만약 부승희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승우의 목덜미를 살짝 꼬집지 않았다면 그 순간은 더 완벽했을 것이다.부승희의 손톱은 정교하게 네일 아트를 한 상태였고 살짝만 꼬집었을 뿐인데도 이승우는 목덜미에 뻐근한 고통을 느꼈다.참다못해 깊은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피해내던 이승우를 보며 부승희는 만족스러운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기분 좋지?”이승우는 어금니를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좋아.”‘정말 한심하군.’부승희는 이승우를 흘겨보았다. 그의 손이 허리 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뜨거운 온기가 점점 더 신경 쓰였다.참다못한 부승희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손을 들자마자 또다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