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연과 연정훈은 오후 늦게 경인으로 돌아왔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세운으로 가서 연정훈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뵈어야 했지만 연정훈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자 양시연도 묻지 않았다.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황혼 무렵이었고 양시연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지며 몇 바퀴를 굴렀다.그 모습을 본 여 아주머니는 미소를 머금으며 양시연과 연정훈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연정훈이 집을 비운 밤마다 얼마나 초조해했는지 양시연에게 연신 말했다.양시연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피곤했던 몸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그날 저녁 민씨 가문의 사람들이 집을 방문했다.민씨 가문의 큰아들이 직접 민지연과 민지욱을 데리고 와서 양시연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전했다.양시연은 거실에서 나비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고 과하게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도하게 굴지도 않았다.민씨 가문의 사람들은 한껏 공손한 태도를 보였으며 분명히 앞으로의 협력을 유지하고 싶어 보였다. 그러나 민지연은 고개를 숙인 채 눈썹 사이에 미묘한 불만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양시연은 민지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우스꽝스럽게 느꼈지만 어린 민지욱을 고려해 몇 마디 부드러운 말로 상황을 마무리했다.밤이 되어 양시연은 낮에 있었던 일을 연정훈에게 이야기했다.“당신 할머니께선 아무 반응도 없었나요? 이번 일로 우리가 할머니 친정의 체면을 깎았을 텐데요.”연정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이틀 안에 나랑 정인에 가서 인수인계 준비를 하자.”양시연은 그의 말을 듣고 민씨 가문의 반응만으로 이미 문제의 본질을 간파한 연정훈의 노련함에 새삼 감탄했다.며칠 지나지 않아 세운에서 민수희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게다가 상태가 꽤 심각하다는 말까지 돌았다.이런 상황에서 표세연은 은밀히 양시연에게 조언했다.“할머니 쪽이 어수선한 동안 연정훈이 언제 세운에 가게 될지 모르잖아. 그 전에 합리적으로 연정훈
사무실에서 양시연은 소파 한쪽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부승원의 책상 앞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반우희를 힐끔 쳐다보며 안타깝게 한숨을 내쉬었다.‘불쌍한 우희 씨.’반우희는 아까 그 억지를 부리던 여자 앞에서는 꽤 당당했지만 부승원이 도착하자 마치 목덜미를 붙잡힌 길고양이처럼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지금은 여자가 쫓겨난 뒤 부승원이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아 차갑게 노려보는 중이었다.반면 반우희의 직속 상사인 송민재는 태연히 자신의 자리에서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한가롭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오프라인에서 1600만 원짜리 건담 피규어를 팔았는데 배송 주소를 변호사 사무실로 적었다고? 너 참 대단하다.”부승원이 비꼬듯 말하자 반우희의 고개는 점점 더 숙였고 턱이 거의 가슴에 닿을 지경이었다.그녀는 손을 뒤로 감춘 채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저도 사기를 당할까 봐 겁나서 그랬어요. 주소를 사무실로 적으면 제가 변호사인 걸 보고 상대가 사기 치려는 마음을 접을 거로 생각했어요.”부승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꽤 똑똑했네.”반우희는 침묵했다.“...”‘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까지 재수가 없을 줄 누가 알았겠어.’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반우희를 감싸주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이건 우희 씨를 탓할 일이 아니에요. 상대가 딱 봐도 협박하려고 작정한 거잖아요. 우희 씨도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요.”반우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외쳤다.‘맞아.’그러나 부승원은 냉정하게 반박했다.“반우희가 원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결과는요? 결과가 반우희가 원한다고 바뀌기라도 했습니까?”양시연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협박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부승원이 이렇게 말하자 반우희는 단 1초 만에 고개를 들어 단호히 반박했다.“제가 그 여자에게 가짜를 팔지 않았어요! 그 건담 피규어는 이승우 씨가 승주에게 준 건데 도련님이 가짜를 줄 리 없잖아요.”부승원은 잠시 얼빠진 듯한
부승원은 냉정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처리할 능력이 없으면 애초에 문제를 만들지 말았어야지. 네가 사기를 당한 건 네 욕심 때문이야. 욕심이 없었다면 애초에 너를 노리지 않았겠지.”반우희는 그의 말에서 도덕적 결함을 느끼고 곧바로 반박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피해자 유죄론 이에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송민재와 양시연을 번갈아 쳐다보며 속으로 외쳤다.‘이거 보세요. 변호사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양시연은 웃음을 꾹 참으려다 결국 터트리고 말았고 송민재도 헛기침하며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하지만 부승원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냉정하게 물었다.“그 건담 피규어의 중고 시세가 얼마인지 알고 있나?”반우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열장에만 있었을 때는...천만 원 정도였어요.”“그래. 그럼 너는 얼마에 팔았지?”“...1600만 원에 팔았어요.”반우희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덧붙였다.“근데 그건 그 고객이 먼저 제안한 금액이에요.”부승원은 조소를 띤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사기꾼이 먼저 제안하지. 네가 제안하길 기다리겠냐?”반우희는 눈이 반짝이며 손등으로 손바닥을 치며 소리쳤다.“이거 보세요. 부 변호사님도 인정했잖아요. 그 고객이 사기꾼이라고요!”부승원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좋아요. 저도 솔직히 살짝 욕심이 났던 건 인정할게요. 하지만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문제는 그 여자가 먼저 사기를 쳤다는 거죠. 그건 명백히 잘못이고 비도덕적이고 무엇보다 불법이에요.”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동의했다.“맞는 말이네요.”송민재는 방울토마토를 하나 더 입에 넣으며 천천히 덧붙였다.“어쨌든 난 우희 씨 편이에요.”반우희는 송민재의 말을 듣고 힘을 얻은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부승원을 바라봤다.속으로는 이렇게 외쳤다.‘보세요. 보통 사람이라면 다 저를 동정한다고요!’그러나 부승
비 오는 날, 검은색 벤틀리 뒷좌석에서.차 안의 어두운 불빛 때문에 남자의 허리춤을 휘감고 있는 여자의 희고 부드러운 다리가 어렴풋이 보였다.간지럽고 야릇한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안시연의 초점 잃은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허리를 튕기면서 눈앞의 사람이 빨리 끝내길 바랐다.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읍!”안시연이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고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남자가 몸짓을 멈추었다.“처음이야?”안시연은 몸을 불태우던 열기가 조금 식은 것 같았다. 잇따라 허전한 기분이 들더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다리를 더 단단히 감아 들었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연정훈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그는 여자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긴장 풀어.”차 안의 온도가 급상승했다.정신은 흐릿했지만 이상하게 감각은 예민했다.안시연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더니 어금니를 깨물고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그녀는 이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지기만 했다.두 달 전, 그녀는 주지혁의 팔짱을 끼고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석했었다. 연정훈은 성진대학교의 우수 졸업자 겸 학부 특임 교수로서 그 동문 모임에 참석했는데 두 사람에게 선남선녀라며 칭찬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주지혁은 바람을 피워 곧 명문 가문 아가씨와 결혼한다.그리고 그녀는 연정훈의 아래에 누워 그가 순결을 앗아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경인시에서의 연씨 가문은 권력이 대단했다.연정훈은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었지만 몇 년 전에 갑자기 교수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정인 그룹을 맡았다.그리고 지금의 그는 경인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사람들 앞에서는 번듯해 보이더니 이런 일을 할 때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안시연을 사정없이 괴롭혔다.안시연은 하마터면 그의 차에서 숨이 멎을 뻔해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일이 끝난 후, 그녀는 옷을 꼭 껴안고는 힘이 풀린 채
안시연은 경찰서에 세 시간의 취조를 받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는데, 이때 주지혁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녀는 어금니를 깨물다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지혁 씨,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요. 굳이 내 인생을 망칠 생각인가요?”그 8억은 분명 그가 그녀에게 직접 전화해 빼내라고 한 것이다.주지혁은 그녀의 분노를 예상했는지 덤덤하게 말했다.“시연 씨,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면 안 되었어요.”“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안 꺼내면 당신이 어떻게 조이현 씨를 안을 수 있겠어요?”안시연이 비꼬며 말했다.주지혁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이 뻔뻔스럽게 말했다.“나 다음 달에 이현이와 약혼해요. 하지만 난 이현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시연 씨, 3년만 기다려요. 3년 뒤면 내가 이혼하고 꼭 시연 씨와 결혼할게요.”안시연은 헛웃음이 나왔다.“그럼 3년 동안 나는 어떡하라고요.”“외국으로 유학 보내줄게요.”뻔뻔스럽네!명문 가문 출신인 조이현과 결혼은 해야겠고, 또 그 돈으로 안시연을 ‘내연녀’로 만들게 하다니, 어떻게 이런 염치없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안시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하지만 난 이미 다른 남자와 잤어요.”주지혁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농담은 하지 마요. 나 화나게 만들면 시연 씨에게 좋을 것 없어요.”안시연이 심호흡하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도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나 찾으러 와요. 내가 시연 씨 외국 보내줄게요.”“꿈 깨요!”주지혁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시연 씨, 만약 내가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시연 씨는 돈의 행방을 모두 찾아내는 것으로 결백을 증명해야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나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8억이면 시연 씨 감옥에서 10년 갇히고도 더 남아요. 시연 씨가 감옥에 들어가면 누가 외할머니를 돌보겠어요?”안시연에게 힘이 남아돌았다면 진작 그에게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내가 정말
안시연은 그제야 연정훈 눈빛의 의미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그녀는 빠르게 거울 앞을 지나 옷을 벗고는 욕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다 씻고 나서야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욕실 안에는 남성 가운 하나밖에 없었다.안시연은 어젯밤 연정훈을 떠올렸는데 그가 여색을 밝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어쩌면 이미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녀는 가운을 입고 문을 열고는 조심스럽게 연정훈을 불러보았다.“연 교수님?”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빠르게 나가 데스크에 전화해 옷을 부탁하려고 했다.침대에 앉아 이제 막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정이슬이 그녀에게 보내준 스크린샷이었다.“시연아, 무슨 일이야? 전민준에게 부탁하러 간 거 아니었어? 왜 싸우게 된 거야? 그 새끼가 단톡방에서 너 꽃뱀이라며 욕하고 있어.”안시연이 단톡방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정말 정이슬의 말대로 전민준은 그녀에게 온갖 욕설과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거짓말에 사람들은 그에게 위로도 건넸다.[걸레 같은 년은 나도 싫어. 그 와중에 보답 없이 부탁하는 것 좀 봐. 퉤!]안시연은 이 보름 동안 불행의 시간을 보냈다.그녀에게 도움을 베푼 사람이 있기는커녕 지금 단톡방에서 또 이런 비난을 받고 있으니, 그녀는 분노가 끓어올랐고, 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 코끝이 찡했다.“옷은 이따가 누가 가져다줄 거야.”맑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안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그제야 연정훈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다는 걸 발견했다.‘뭐야? 왜 소리를 안 내?’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안에 속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연정훈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느긋하게 말했다.“난 대답했는데 당신이 못 들은 거야.”그 말인즉 자기 탓이 아니라는 뜻이었다.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발목에서 고통이 몰려와 그녀는 작은 신음을 뱉고 다시 침대에 주저앉게 되었다.연정훈
안시연이 얼어붙었다.잠깐 생각하고서야 그의 뜻을 알아챘다.어제는 그녀의 첫날밤이었고 연정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니 그의 뜻은 전에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는지 물어보는 것이었다.안시연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는데 그녀는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그녀와 잠자리를 가져본 사람은 연정훈밖에 없었다.주지혁이 바람피우기 전 두 사람의 스킨십은 포옹과 키스에 그쳤고, 잠자리는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그녀는 경험도 없어 이런 얘기가 꺼내질 때마다 어색한 마음이 들곤 했다.연정훈이 또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그녀는 겨우 대답했다.“습관 되지 않아서 결혼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요.”사실이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맑은 눈을 가진 그녀였기 때문이다.“넌 참 착한 여자야.”연정훈이 덤덤하게 뱉은 말에 안시연은 입술을 꽉 물었다.방금까지 단톡방에서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받은 불공평한 대우까지 떠오르니 그의 말에 그녀는 왠지 모르게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분명 그녀는 잘못한 게 없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녀를 비난하곤 했다.연정훈이 무심하게 말을 뱉고는 약을 다 바른 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안시연이 서둘러 몸을 뒤로 뺐는데 허벅지 사이로 약간의 고통이 전해졌다.어젯밤의 부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연정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리를 모을 때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포착했다.“다리에도 상처가 있어?”그 얘기를 듣자, 안시연은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그녀의 눈가, 그리고 코끝이 빨개졌다.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는데 마치 비바람 속에 피어난 장미꽃 한 송이 같았다.연정훈이 한 발짝 다가서자, 안시연은 몸을 더 뒤로 뺐다.“안시연.”연정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녀는 긴장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뒤에 있는 침대 시트를 꽉 잡았다.연정
안시연은 테이블 위에 누워있었는데 마침 주인을 기다리는 정교한 선물 같았다.연정훈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고는 달콤한 입술을 맛보면서 다른 한 손으로 여자가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을 풀었다.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가는 허리에 달라붙어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사실 아까 병풍을 사이 두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부터 그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탐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때 안시연은 전민준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연정훈은 목덜미를 물어뜯자, 안시연은 온몸에 전율이 퍼지는 것 같았다.점점 거칠어지는 남자의 숨소리와 손길, 그리고 자연스럽게 버클을 푸는 남자를 보며 안시연은 얼굴이 빨개져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어두운 불빛 아래 뭔가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젖은 눈을 크게 뜨고는 빛이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것의 형체를 똑똑히 보려고 했다.연정훈 손에 낀 반지였다.그것도 약지에 끼어 있었다.순간 뜨겁게 달아오르던 안시연의 몸이 차갑게 식어버렸다.대충 세어보니 연정훈도 거의 서른 되는 나이였다.명문 가문의 후계자라면 이 나이에 진작 결혼했을 텐데 말이다.“집중해.”남자는 여자의 귓불을 깨물며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다리를 꽉 잡아 벌리려고 하자 안시연이 갑자기 몸을 뒤로 빼며 남자를 밀어냈다.“안 돼요!”연정훈의 새까만 눈동자는 욕망으로 타올랐다.그는 안시연이 그에게 도움을 부탁할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이 조건을 내세울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그는 여자의 발목을 잡았다. 물론 상처 난 부위를 피해 잡았다.그리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힘으로 제압했다.안시연이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그의 입술을 피했다.연정훈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숨을 헐떡이고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왜 그래?”“결혼하셨잖아요!”안시연이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주지혁이 바람피워서 마음고생한 그녀는 누구보다도 ‘내연녀’라는 존재를 싫어했다. 그래서 절대 다른 사람의 결혼에 끼어들 생
부승원은 냉정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처리할 능력이 없으면 애초에 문제를 만들지 말았어야지. 네가 사기를 당한 건 네 욕심 때문이야. 욕심이 없었다면 애초에 너를 노리지 않았겠지.”반우희는 그의 말에서 도덕적 결함을 느끼고 곧바로 반박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피해자 유죄론 이에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송민재와 양시연을 번갈아 쳐다보며 속으로 외쳤다.‘이거 보세요. 변호사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양시연은 웃음을 꾹 참으려다 결국 터트리고 말았고 송민재도 헛기침하며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하지만 부승원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냉정하게 물었다.“그 건담 피규어의 중고 시세가 얼마인지 알고 있나?”반우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열장에만 있었을 때는...천만 원 정도였어요.”“그래. 그럼 너는 얼마에 팔았지?”“...1600만 원에 팔았어요.”반우희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덧붙였다.“근데 그건 그 고객이 먼저 제안한 금액이에요.”부승원은 조소를 띤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사기꾼이 먼저 제안하지. 네가 제안하길 기다리겠냐?”반우희는 눈이 반짝이며 손등으로 손바닥을 치며 소리쳤다.“이거 보세요. 부 변호사님도 인정했잖아요. 그 고객이 사기꾼이라고요!”부승원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좋아요. 저도 솔직히 살짝 욕심이 났던 건 인정할게요. 하지만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문제는 그 여자가 먼저 사기를 쳤다는 거죠. 그건 명백히 잘못이고 비도덕적이고 무엇보다 불법이에요.”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동의했다.“맞는 말이네요.”송민재는 방울토마토를 하나 더 입에 넣으며 천천히 덧붙였다.“어쨌든 난 우희 씨 편이에요.”반우희는 송민재의 말을 듣고 힘을 얻은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부승원을 바라봤다.속으로는 이렇게 외쳤다.‘보세요. 보통 사람이라면 다 저를 동정한다고요!’그러나 부승
사무실에서 양시연은 소파 한쪽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부승원의 책상 앞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반우희를 힐끔 쳐다보며 안타깝게 한숨을 내쉬었다.‘불쌍한 우희 씨.’반우희는 아까 그 억지를 부리던 여자 앞에서는 꽤 당당했지만 부승원이 도착하자 마치 목덜미를 붙잡힌 길고양이처럼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지금은 여자가 쫓겨난 뒤 부승원이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아 차갑게 노려보는 중이었다.반면 반우희의 직속 상사인 송민재는 태연히 자신의 자리에서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한가롭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오프라인에서 1600만 원짜리 건담 피규어를 팔았는데 배송 주소를 변호사 사무실로 적었다고? 너 참 대단하다.”부승원이 비꼬듯 말하자 반우희의 고개는 점점 더 숙였고 턱이 거의 가슴에 닿을 지경이었다.그녀는 손을 뒤로 감춘 채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저도 사기를 당할까 봐 겁나서 그랬어요. 주소를 사무실로 적으면 제가 변호사인 걸 보고 상대가 사기 치려는 마음을 접을 거로 생각했어요.”부승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꽤 똑똑했네.”반우희는 침묵했다.“...”‘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까지 재수가 없을 줄 누가 알았겠어.’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반우희를 감싸주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이건 우희 씨를 탓할 일이 아니에요. 상대가 딱 봐도 협박하려고 작정한 거잖아요. 우희 씨도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요.”반우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외쳤다.‘맞아.’그러나 부승원은 냉정하게 반박했다.“반우희가 원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결과는요? 결과가 반우희가 원한다고 바뀌기라도 했습니까?”양시연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협박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부승원이 이렇게 말하자 반우희는 단 1초 만에 고개를 들어 단호히 반박했다.“제가 그 여자에게 가짜를 팔지 않았어요! 그 건담 피규어는 이승우 씨가 승주에게 준 건데 도련님이 가짜를 줄 리 없잖아요.”부승원은 잠시 얼빠진 듯한
양시연과 연정훈은 오후 늦게 경인으로 돌아왔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세운으로 가서 연정훈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뵈어야 했지만 연정훈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자 양시연도 묻지 않았다.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황혼 무렵이었고 양시연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지며 몇 바퀴를 굴렀다.그 모습을 본 여 아주머니는 미소를 머금으며 양시연과 연정훈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연정훈이 집을 비운 밤마다 얼마나 초조해했는지 양시연에게 연신 말했다.양시연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피곤했던 몸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그날 저녁 민씨 가문의 사람들이 집을 방문했다.민씨 가문의 큰아들이 직접 민지연과 민지욱을 데리고 와서 양시연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전했다.양시연은 거실에서 나비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고 과하게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도하게 굴지도 않았다.민씨 가문의 사람들은 한껏 공손한 태도를 보였으며 분명히 앞으로의 협력을 유지하고 싶어 보였다. 그러나 민지연은 고개를 숙인 채 눈썹 사이에 미묘한 불만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양시연은 민지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우스꽝스럽게 느꼈지만 어린 민지욱을 고려해 몇 마디 부드러운 말로 상황을 마무리했다.밤이 되어 양시연은 낮에 있었던 일을 연정훈에게 이야기했다.“당신 할머니께선 아무 반응도 없었나요? 이번 일로 우리가 할머니 친정의 체면을 깎았을 텐데요.”연정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이틀 안에 나랑 정인에 가서 인수인계 준비를 하자.”양시연은 그의 말을 듣고 민씨 가문의 반응만으로 이미 문제의 본질을 간파한 연정훈의 노련함에 새삼 감탄했다.며칠 지나지 않아 세운에서 민수희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게다가 상태가 꽤 심각하다는 말까지 돌았다.이런 상황에서 표세연은 은밀히 양시연에게 조언했다.“할머니 쪽이 어수선한 동안 연정훈이 언제 세운에 가게 될지 모르잖아. 그 전에 합리적으로 연정훈
“알았어요. 저희 지금 갈게요.”연정훈이 전화를 끊었지만 양시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똑똑똑.연정훈이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자 양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고 연정훈은 그녀의 살짝 붉어진 얼굴을 보곤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맞은편에 앉았다.“더워?”“아니에요.”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온도 딱 좋아요. 괜찮아요.”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근데 얼굴이 아주 빨개.”“네. 원래 그래요. 난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이래요.”양시연은 태연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했고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듯 말했다.“그런 거였구나.”식탁 위의 분위기는 다시 평온해졌지만 양시연은 연정훈을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양시연은 자신이 그렇게 운이 나쁘지 않을 거로 생각하며 잠꼬대는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응. 분명 모를 거야.’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안심한 양시연은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마자 연정훈이 조용히 손을 뻗어 가림막을 내리고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네가 ‘여보’라고 안 부르는 건 다른 부르고 싶은 호칭이 있어서 그런 거지?”양시연은 당황하며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했다.“???”연정훈은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예를 들면 교수님?”양시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당황했지만 연정훈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오늘 새벽 꿈속에서 몇 번이나 불렀더라.”양시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연정훈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톤도 아주 가볍더라. 듣기엔...별로 정직하지 않았어.”양시연은 푹하고 가슴에 화살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쥐구멍에라도 들어가서 숨어버리고 싶어.’그녀는 얼굴이 점점 붉어지며 연정훈을 바라보았고 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느긋하게 좌석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알았어. 다음엔 여보라고 안 불러도 돼. 교수님이라는 호칭도 나쁘지 않더라.”양시연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양석진의 집에 도착하는 동안 양시연은
“정훈 씨, 정말로 염치없는 거 알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입을 손으로 막고 가까이 다가가며 눈을 크게 뜨고 말했지만 연정훈은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양시연에게 입이 막힌 채로 눈에 웃음기를 담았다.양시연은 가볍게 혀를 차면서 다른 손으로 연정훈의 귀를 잡아당겼다.“나이 많은 엉큼한 아저씨.”연정훈은 눈을 감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양시연을 껴안으며 말했다.“자꾸 나이 많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 마.”“당신 나이 많고 늙었잖아요. 완전 늙었어요.”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그는 깊게 숨을 내쉬며 몸을 한 번 뒤집어 양시연을 아래로 눌렀다.“한 번만 더 말해봐.”양시연은 즉시 기가 죽어 연정훈의 어깨를 떠받치며 작게 외쳤다.“허리 아프다니까요! 이렇게 심하게 움직이지 마세요.”그리고는 발로 그를 한 번 툭 찼다.“이 정도로는 당신이 원하는 아들이나 딸을 가질 수 없을 거예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잠시 생각하던 그는 나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했고 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돌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기운을 조금 회복한 양시연은 연정훈의 목을 팔로 감아 걸치고 명령하듯 말했다.“나 샤워 좀 시켜줘요.”연정훈은 기꺼이 수고할 마음이 가득했고 양시연이 허리가 아프다고 했기에 그녀를 들어 올리는 동작도 한결 부드러웠다.욕실로 들어가자 양시연은 물속에 몸을 담갔고 따뜻한 물에 몸이 풀리자 그녀의 생각은 사방으로 흩어졌다.사실 결혼했으니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늦어질수록 몸의 회복이 더디니 차라리 빨리 낳는 게 나을 거로 생각했다.하나만 낳는다면 왕자님도 좋고 공주님도 좋겠지만 둘을 낳으려면 양시연이 고생해야 한다.‘정말 고민이네. 진짜 인간의 진화가 더 발전했으면 좋겠는데 바로바로 낳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연정훈은 먼저 욕조 옆에서 가운을 걸쳐 입고 있었고 양시연은 그의 허리를 살짝 찌르며 물었다.“정훈 씨는 아들이 좋나요? 아니면 딸이 좋나요?”“둘 다 좋지.”양시연은 몸을 일으키
양시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제안을 반대했다.하지만 연정훈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부드럽지만 강렬하게 입술을 맞추며 설득했고 양시연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거짓말하지 마세요. 호텔에 없을 리가 없잖아요...”“이 방은 내가 출장 때마다 묵는 곳이야. 항상 나를 위해 준비된 방이지. 여길 여자를 데려온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그런 건 있을 리가 없잖아.”양시연은 그의 말에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고 머뭇거리는 사이 연정훈은 그녀를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잡아 단숨에 그녀를 제압했다.“아!”양시연의 몸은 활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었다가 곧 힘없이 풀어지며 축 늘어졌다. 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그의 어깨를 몇 번 주먹으로 두드렸지만 결국 연정훈의 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이렇게 살짝 취한 모습을 몹시 좋아했다. 두 볼은 발그레하게 물들었고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미세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도도하고 맑았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촉촉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입술로 바뀌는 모습이 연정훈의 눈을 사로잡았다.그는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지만 마치 만취한 사람처럼 끝도 없이 양시연을 갈망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방 안의 공기는 뜨거움으로 가득 찼으며 양시연은 다리가 후들거렸고 연정훈의 팔을 붙잡으며 숨이 찬 목소리로 날카롭게 외쳤다.연정훈은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으며 입술을 맞췄고 숨이 막힐 듯한 순간 자신의 모든 감정을 양시연에게 쏟아부었다.양시연은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강렬한 감각에 그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냈지만 연정훈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 양시연은 울먹이며 간신히 말했다.“그만...그만해요. 약...약 먹어야 해요.”연정훈은 양시연의 귓불을 가볍게 깨물며 얼굴을 가까이 댄 채 땀이 번진 둘 사이를 달래듯 속삭였다.“약 안 먹어도 상관없어. 누가 너 보고 약 먹으라고 했어?”“임신하면 어떡하려고요...”양시연의 말을 들은 연정훈은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임신하
양시연은 의자에 기대어 연정훈의 입맞춤에 눌려 있다가 잠시 후 온몸에서 힘이 빠져 연정훈의 어깨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낮고 떨리는 신음은 연정훈을 자극해 그녀를 더욱 애틋하고도 강렬하게 끌어당겼다.양시연의 두 다리는 자연스럽게 벌어졌고 연정훈의 긴 다리가 가까이 밀려 들어왔다.치마 사이로 전해지는 그의 손바닥에서 따뜻한 온기가 퍼지자 양시연의 몸은 무의식적으로 긴장하며 연정훈의 품에 더 깊이 파고들고 싶어졌다.고조된 감정 속에서 양시연은 연정훈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손가락을 머리카락 속으로 깊게 묻었다. 그러나 연정훈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려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문득 천장을 바라보며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정훈 씨...멈춰요.”갑작스러운 저항에 연정훈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이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러는데?”“이 차 안에서는 안 돼요. 이건 아빠 쪽에서 보낸 차라서 혹시라도 기록이 남아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곤란해요.”양시연의 단호한 목소리에 연정훈은 이내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괜찮아. 우리가 이 차를 타는 데 문제가 있었다면 보내지 않았겠지.”“그래도 싫어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움직임을 막으며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싸안고 연정훈의 입술에 가볍게 여러 번 입 맞추며 설득했다.“호텔로 가요. 아니면 아빠 댁으로 갑시다. 차에서는 하지 말아요.”만약 이 일로 양석진의 체면에 금이라도 간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의도를 이해했고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으며 양시연의 허리를 감싸안아 뒷좌석에서 그녀를 살며시 세우며 말했다.“그럼 호텔로 가자.”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만족스러운 듯 연정훈의 목에 가볍게 입 맞추며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정훈 씨 말을 따를게요.”양석진의 집으로 가는 건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 작은 집의 방음이 얼마나 허술할지 알 수 없었고
문밖에 서 있던 양시연은 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안쪽 상황을 염탐했다.1시간 전부터 연정훈은 양시연이 다리에서 주워 온 딸이라고 놀려대고 있었다.“아버님은 널 만날 여유가 없어.”양시연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체면을 구길 수 없어 아니라고 반박했다.“그럴 리가 없어요. 엄마랑 얘기가 끝나면 날 만날 거예요.”그러나 두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양시연을 찾지 않았다.부모님의 사랑에 양시연은 동떨어진 존재인 모양이었다.“시간이 많이 늦어 이미 쉬고 계신 게 분명해요.”양시연은 여전히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고 연정훈은 미소만 지을 뿐 굳이 들추지 않았다.연정훈이 노트북을 닫으며 물었다.“우리 산책이나 할래?”“지금요?”“그래.”양시연은 조금 고민에 빠졌다.“너무 늦었잖아요. 그리고 여기 마음대로 외출할 수 있어요?”“시도나 해보자. 안되면 아버님이 구하러 와주시겠지. 그 참에 얼굴도 뵈고 나쁘지 않잖아.”“...”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 밤이었고 양시연은 드라이브나 할까 생각했다.그래서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양창수는 예상이라도 한 건지 차키를 탁자 위로 올려 두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연정훈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늦은 시간이다 보니 인파가 많지 않았다.연정훈은 어느 레스토랑을 예약해 음식을 주문했다.넓은 공간에 두 사람만 남겨지고 옆에는 분주히 움직이는 셰프가 있었다. 사방은 어둡고 오직 두 사람의 테이블 위로 빛이 비치고 있었다.요리는 아직 세팅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와인 한잔에 얘기를 나눴다.셰프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연정훈은 빠르게 양시연을 품에 안고 키스를 했다.양시연은 부끄러운 마음에 와인병으로 시야를 조금이나마 가렸다.입술이 맞닿고 호흡이 가빠질 때쯤 연정훈은 양시연을 놓아주었고 양시연은 무기력하게 품에 안겼다.연정훈은 몸을 돌려 또 양시연의 쇄골에 키스했다.“우리 내일 경인으로 돌아갈까?”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고원석, 허윤미의 결혼 20주년 파티에 초대합니다.초대받은 사람: 양석진, 양지원.초대장에 적힌 글씨를 제대로 확인한 양지원은 고개를 들어 침대까지 걸어온 양석진을 바라보았다. 링거는 어느새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두 사람 결혼한 지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어요?”“꽤 됐어.”양석진이 양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나이가 몇인지는 잊은 거야?”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고원석과 허윤미는 양지원의 친구 중에서도 몇 안 되게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였다.부부는 한 사람은 사업으로 잘 나가고 한 사람은 교단에 서 있는 일을 했다. 아이도 둘씩이나 낳고 그동안 안 좋은 소식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초대장을 내려놓은 양지원은 한참이나 침묵했다.어느새 양석진은 직접 링거 바늘을 뽑았고 어느새 양지원의 옆자리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양석진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초대장을 건네받은 양석진도 기분이 참 묘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오랜 세월 양석진은 고원석을 따로 만나지 않았는데 너무 행복한 두 사람을 보면 부러워 배가 아플까 만나지 못했다.“며칠 뒤가 식인데 바쁘지 않으면 같이 참석하자.”양석진의 말에 양지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년필의 먹이 다 떨어진 걸 보며 직접 먹을 챙겨주었다.양석진은 원래 말수가 적었고 양지원마저 조용하자 방안은 적막이 맴돌았다. 양석진은 말없이 냉장고로 걸어가 딸기를 꺼내 씻었다.양지원은 이런 양석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여 목이 메었다.초대장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결혼 20주년에도 파티를 하면 이제 환갑에는 얼마나 크게 한 상 차리려고 그런대요?”“...”“정말 너무 과시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이 겸손해야지.”양지원이 계속 투덜거렸다.양석진은 씻은 딸기를 양지원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양지원은 딸기를 먹으며 자꾸 양석진을 힐끗거렸다.“오빠는 두 사람 부러워요?”양석진이 잠시 멈칫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그냥 그래.”양지원은 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