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어요. 저희 지금 갈게요.”연정훈이 전화를 끊었지만 양시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똑똑똑.연정훈이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자 양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고 연정훈은 그녀의 살짝 붉어진 얼굴을 보곤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맞은편에 앉았다.“더워?”“아니에요.”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온도 딱 좋아요. 괜찮아요.”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근데 얼굴이 아주 빨개.”“네. 원래 그래요. 난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이래요.”양시연은 태연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했고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듯 말했다.“그런 거였구나.”식탁 위의 분위기는 다시 평온해졌지만 양시연은 연정훈을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양시연은 자신이 그렇게 운이 나쁘지 않을 거로 생각하며 잠꼬대는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응. 분명 모를 거야.’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안심한 양시연은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마자 연정훈이 조용히 손을 뻗어 가림막을 내리고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네가 ‘여보’라고 안 부르는 건 다른 부르고 싶은 호칭이 있어서 그런 거지?”양시연은 당황하며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했다.“???”연정훈은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예를 들면 교수님?”양시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당황했지만 연정훈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오늘 새벽 꿈속에서 몇 번이나 불렀더라.”양시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연정훈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톤도 아주 가볍더라. 듣기엔...별로 정직하지 않았어.”양시연은 푹하고 가슴에 화살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쥐구멍에라도 들어가서 숨어버리고 싶어.’그녀는 얼굴이 점점 붉어지며 연정훈을 바라보았고 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느긋하게 좌석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알았어. 다음엔 여보라고 안 불러도 돼. 교수님이라는 호칭도 나쁘지 않더라.”양시연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양석진의 집에 도착하는 동안 양시연은
양시연과 연정훈은 오후 늦게 경인으로 돌아왔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세운으로 가서 연정훈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뵈어야 했지만 연정훈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자 양시연도 묻지 않았다.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황혼 무렵이었고 양시연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지며 몇 바퀴를 굴렀다.그 모습을 본 여 아주머니는 미소를 머금으며 양시연과 연정훈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연정훈이 집을 비운 밤마다 얼마나 초조해했는지 양시연에게 연신 말했다.양시연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피곤했던 몸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그날 저녁 민씨 가문의 사람들이 집을 방문했다.민씨 가문의 큰아들이 직접 민지연과 민지욱을 데리고 와서 양시연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전했다.양시연은 거실에서 나비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고 과하게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도하게 굴지도 않았다.민씨 가문의 사람들은 한껏 공손한 태도를 보였으며 분명히 앞으로의 협력을 유지하고 싶어 보였다. 그러나 민지연은 고개를 숙인 채 눈썹 사이에 미묘한 불만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양시연은 민지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우스꽝스럽게 느꼈지만 어린 민지욱을 고려해 몇 마디 부드러운 말로 상황을 마무리했다.밤이 되어 양시연은 낮에 있었던 일을 연정훈에게 이야기했다.“당신 할머니께선 아무 반응도 없었나요? 이번 일로 우리가 할머니 친정의 체면을 깎았을 텐데요.”연정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이틀 안에 나랑 정인에 가서 인수인계 준비를 하자.”양시연은 그의 말을 듣고 민씨 가문의 반응만으로 이미 문제의 본질을 간파한 연정훈의 노련함에 새삼 감탄했다.며칠 지나지 않아 세운에서 민수희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게다가 상태가 꽤 심각하다는 말까지 돌았다.이런 상황에서 표세연은 은밀히 양시연에게 조언했다.“할머니 쪽이 어수선한 동안 연정훈이 언제 세운에 가게 될지 모르잖아. 그 전에 합리적으로 연정훈
사무실에서 양시연은 소파 한쪽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부승원의 책상 앞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반우희를 힐끔 쳐다보며 안타깝게 한숨을 내쉬었다.‘불쌍한 우희 씨.’반우희는 아까 그 억지를 부리던 여자 앞에서는 꽤 당당했지만 부승원이 도착하자 마치 목덜미를 붙잡힌 길고양이처럼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지금은 여자가 쫓겨난 뒤 부승원이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아 차갑게 노려보는 중이었다.반면 반우희의 직속 상사인 송민재는 태연히 자신의 자리에서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한가롭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오프라인에서 1600만 원짜리 건담 피규어를 팔았는데 배송 주소를 변호사 사무실로 적었다고? 너 참 대단하다.”부승원이 비꼬듯 말하자 반우희의 고개는 점점 더 숙였고 턱이 거의 가슴에 닿을 지경이었다.그녀는 손을 뒤로 감춘 채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저도 사기를 당할까 봐 겁나서 그랬어요. 주소를 사무실로 적으면 제가 변호사인 걸 보고 상대가 사기 치려는 마음을 접을 거로 생각했어요.”부승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꽤 똑똑했네.”반우희는 침묵했다.“...”‘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까지 재수가 없을 줄 누가 알았겠어.’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반우희를 감싸주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이건 우희 씨를 탓할 일이 아니에요. 상대가 딱 봐도 협박하려고 작정한 거잖아요. 우희 씨도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요.”반우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외쳤다.‘맞아.’그러나 부승원은 냉정하게 반박했다.“반우희가 원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결과는요? 결과가 반우희가 원한다고 바뀌기라도 했습니까?”양시연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협박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부승원이 이렇게 말하자 반우희는 단 1초 만에 고개를 들어 단호히 반박했다.“제가 그 여자에게 가짜를 팔지 않았어요! 그 건담 피규어는 이승우 씨가 승주에게 준 건데 도련님이 가짜를 줄 리 없잖아요.”부승원은 잠시 얼빠진 듯한
부승원은 냉정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처리할 능력이 없으면 애초에 문제를 만들지 말았어야지. 네가 사기를 당한 건 네 욕심 때문이야. 욕심이 없었다면 애초에 너를 노리지 않았겠지.”반우희는 그의 말에서 도덕적 결함을 느끼고 곧바로 반박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피해자 유죄론 이에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송민재와 양시연을 번갈아 쳐다보며 속으로 외쳤다.‘이거 보세요. 변호사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양시연은 웃음을 꾹 참으려다 결국 터트리고 말았고 송민재도 헛기침하며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하지만 부승원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냉정하게 물었다.“그 건담 피규어의 중고 시세가 얼마인지 알고 있나?”반우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열장에만 있었을 때는...천만 원 정도였어요.”“그래. 그럼 너는 얼마에 팔았지?”“...1600만 원에 팔았어요.”반우희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덧붙였다.“근데 그건 그 고객이 먼저 제안한 금액이에요.”부승원은 조소를 띤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사기꾼이 먼저 제안하지. 네가 제안하길 기다리겠냐?”반우희는 눈이 반짝이며 손등으로 손바닥을 치며 소리쳤다.“이거 보세요. 부 변호사님도 인정했잖아요. 그 고객이 사기꾼이라고요!”부승원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좋아요. 저도 솔직히 살짝 욕심이 났던 건 인정할게요. 하지만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문제는 그 여자가 먼저 사기를 쳤다는 거죠. 그건 명백히 잘못이고 비도덕적이고 무엇보다 불법이에요.”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동의했다.“맞는 말이네요.”송민재는 방울토마토를 하나 더 입에 넣으며 천천히 덧붙였다.“어쨌든 난 우희 씨 편이에요.”반우희는 송민재의 말을 듣고 힘을 얻은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부승원을 바라봤다.속으로는 이렇게 외쳤다.‘보세요. 보통 사람이라면 다 저를 동정한다고요!’그러나 부승
양시연은 입꼬리가 살짝 떨렸고 송민재는 빠르게 반응하며 반우희를 끌어당겼다.“알았어요. 우희 씨의 일은 나중에 얘기하고 먼저 양시연 씨와 부 변호사님과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해요.”“네? 그런데 저는...”“그만 말해요.”송민재는 반우희를 끌고 나갔지만 반우희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양시연을 간절히 바라봤다.‘언니, 저를 잊지 마세요.’양시연은 침묵했다.“...”사무실 문이 닫히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부승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부승원은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며 연필을 쓰레기통에 던졌다.“연정훈이 양시연 씨에게 남겨준 팀이 부족해서 나한테 폐품을 구하러 온 거에요?”양시연은 어이없었다.‘저 입은 연정훈보다 더 못됐어.’양시연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방문한 이유를 말했지만 부승원은 대답했다.“능력이 부족해서 그 일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양시연은 잠시 침묵했다.“...”양시연은 이 상황을 예상하고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부 변호사님, 겸손하시네요. 능력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너무 급하게 찾아온 게 문제겠죠. 바쁘신데 시간을 낼 수 없는 것도 이해합니다.”부승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서 선반에서 파일을 꺼내기 시작했다. 양시연은 다시 한번 부승원을 떠보았다.“부 변호사님, 연정훈 씨의 부탁이라 생각하고 한 번만 배려해 주세요.”부승원은 대답했다.“전 협력자를 찾을 때는 상대의 능력과 안목만 봅니다. 누구의 체면도 보지 않죠.”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부 변호사님, 저를 무시하는 건가요? 제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부승원은 얼핏 미소를 보였지만 여전히 무표정했다.“반우희를 눈여겨본 사람이 누구죠? 내가 생각하기엔 당신의 안목이나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고 봅니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응시했다.“반우희를 먼저 눈여겨본 건 부 변호사님 아니었나요?”부승원은 잠시 멈칫하며 이마를 찌푸렸고 양시연은 두 다리를 꼬고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내가 봤을
“양시연 언니, 저 오늘부터 같이 갈 수 있는 건가요?”반우희가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양시연은 부승원의 반응을 떠올리며 눈앞의 작고 귀여운 소녀가 더 마음에 들었다. 양시연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반우희의 볼을 살짝 꼬집었고 반우희는 애교를 부리며 양시연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은 안 돼요.”양시연이 말하자 반우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응?’반우희는 금세 자세를 고치며 애처로운 얼굴로 물었다.“저 안 데려가요?”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너를 이용해 큰 물고기를 낚으려는 거야.’양시연은 반우희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부 변호사님께 이미 얘기했어요. 며칠 뒤에 부 변호사님이 팀을 이끌고 정인에 들어가실 건데 우희 씨도 그 팀에 합류해서 함께 가면 돼요. 이게 가장 적합한 방법이에요.”반우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반짝였다.‘좀 돌아가는 느낌인데 그냥 바로 데려가면 되잖아.’반우희는 계속해서 간절한 표정으로 설득하려 했지만 양시연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길어야 삼사일 내로 우희 씨도 정인에 갈 수 있을 거예요.”“그럼...”“240만이에요.”양시연은 장난스럽게 윙크했고 반우희는 얼굴이 환해지며 손을 흔들었다.“그럼 언니, 조심히 가세요!”“다음에 봐요.”양시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떠났고 뒤에서 반우희는 마치 만화 속 캐릭터처럼 환한 얼굴로 행복을 온몸으로 표현했다.‘너무 좋아!’그런데 고개를 돌리자 반우희는 유리창 너머로 부승원의 냉혹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순간 고개를 푹 숙이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부승원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침묵했다.“...”한편 위층에서 양시연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휴대폰을 꺼내 연정훈에게 해결되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연정훈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그렇게 쉽게?]양시연은 다리를 꼬며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타이핑을 이어갔다.[부승원 씨가 처음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지만 내가 살짝 놀라게 했더니 배우고 싶다고
‘망했어.’반우희는 송민재의 말이 점점 더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시연은 충분히 반우희 데리고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결정권을 부승원에게 넘겨버린 상황이 의아했다. 결국 양시연이 부승원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 보였다.“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반우희가 초조하게 물었다. 송민재는 살짝 기침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기다려야죠. 부 변호사 쪽에서 곧 팀 명단을 보내줄 겁니다. 만약 그 명단에 우희 씨 이름이 없다면 그때 가서 부 변호사에게 직접 부탁하세요.”반우희는 그 말을 듣고 맥이 빠졌다.‘부승원의 성격에 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통할 리가 없잖아.’하지만 마지막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그녀는 부승원의 사무실 쪽을 몰래 훔쳐보며 첫 번째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그 시각 부승원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비서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부승원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무슨 일이야?”비서는 두 가지 중요한 업무를 간단히 보고한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반우희 씨 문제는 우리 쪽 인원을 배정해서 처리해도 괜찮을까요?”그제야 부승원이 고개를 들었고 비서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미소를 띠고 덧붙였다.“게다가 만약 우리가 부주의하게 처리해서 사기 사건 같은 문제라도 연루되면 업계에서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잖아요.”부승원은 비서의 말을 듣고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보통이라면 이런 침묵에 비서가 당황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비서는 이미 부승원이 반우희에게 특혜를 준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일의 뒷수습도 자신이 처리했기 때문이다.잠시 후 부승원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 또 같은 실수가 발생하면 그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할 거야.”“알겠습니다.”비서는 예상했던 반응이라 놀라지 않았고 부승원의 얼굴을 살짝 살피며 조용히 물러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부승원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다른 일이라도 있습니까?”부승원은 잠시 생각에
아직 침실로 가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이미 서재의 소파에서 웃음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양시연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 넘기며 가쁜 숨을 고르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정훈 씨, 정말 너무해요. 나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잔뜩 남아 있다고요.”연정훈은 양시연 옆에 비스듬히 누워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미소 띤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머리 끈을 들어 건네주었다.양시연은 대충 머리를 묶으며 연정훈의 손에서 머리 끈을 받아 든 후 퉁명스럽게 말했다.“저 목말라요. 가서 물 떠와요.”연정훈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양시연의 뒤로 손을 뻗어 묶은 머리를 살짝 당겼다. 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그의 팔을 몇 번 때렸다.연정훈은 소파에서 내려와 가까운 곳에서 물을 가져와 양시연에게 먼저 건넸다. 양시연은 시원하게 마신 뒤 소파에 누워서 연정훈은 다시 물을 따라와 그녀 맞은편에 앉아 마시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옆으로 누워 그에게 물었다.“정훈 씨, 할머니 건강은 좀 어때요?”“별로 좋지 않아.”“네?”양시연은 당황했다. 그녀는 연정훈의 태도를 보고 적어도 할머니가 당분간은 괜찮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연정훈은 말했다.“나이가 많으셔서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일이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서 할머니에 대한 큰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서도 연정훈은 단지 교양과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에서 손자 역할을 간신히 다하는 것 같았다.그렇게 생각한 양시연은 느긋하게 고개를 들고 그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응?’양시연은 속으로 의문을 가지고 눈을 가늘게 떴다.방금 연정훈과 장난을 치느라 어깨를 덮은 진한 색 잠옷 상의 단추가 풀려 쇄골이 살짝 보였고 양시연이 앉은 위치에서 유리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그의 뛰어난 턱선이 잘 보였다.‘잘생기긴 했지만...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지?’양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맞은편에서 연정훈은 영문도 모른 채 정색하며 무언가 중요한 얘기를 꺼내려 했다.“잠깐.
양시연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연정훈을 쳐다봤다.연정훈의 시선은 자연스레 양시연의 얼굴로 향했다.잠시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양시연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연정훈에게 손을 뻗어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빨리 안아줘요.”연정훈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휠체어에서 양시연을 안아 올렸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목에 팔을 걸고 로맨틱하게 꾸며진 식탁을 보며 연정훈에게 뽀뽀했다.“언제 이렇게 꾸밀 생각을 다 했어요? 너무 예뻐요.”“누가 어젯밤 아들만 보고 있을 때 꿈에서 계획한 거야.”양시연은 뾰로통해진 연정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양시연이 식탁 앞에 자리를 잡자 연정훈이 준비한 요리를 하나씩 설명했다. 그리고 그때 나비와 영준이가 고개를 뿅 하고 내밀었다.‘어머!’양시연은 알파카 두 녀석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녹는 기분이 들었다.“너희 둘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아까부터 있었는데 네가 못 본 거야.”양시연은 턱을 괴고 연정훈을 향해 말했다.“정훈 씨만 보느라 알파카가 눈에 들어오겠어요?”그 말에 연정훈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양시연도 기분이 한껏 좋아졌고 연정훈이 건네 온 스테이크를 한입 먹으며 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심으로 리액션을 했다.‘너무 맛있어요.’양시연은 연정훈에게 뽀뽀로 답사하려 했다.그런데 스테이크를 먹게 좋게 썰어주고 이제 비빔밥을 비비던 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기분이 나빠서 뽀뽀 서비스는 거절할 거야.”양시연은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왜 자꾸 아들한테 질투하고 그래요?”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논리정연하게 말했다.“아들이 눈에서 멀어지면 불안해하고 그렇게 끔찍하게 아끼다가, 이제 커서 아내라도 찾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건 완전 손해잖아.”그 말에 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아내 생기면 난 아예 뒷전일까요?”“그건 모르지.”“그러니까 정훈 씨 말 안 믿을래요.”“나도 아들 노릇 해봐서 아는데 적어도 너보단 잘 알지 않
퇴원 후 본인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의견에는 다들 반박할 수가 없었다.양홍두와 연호민은 불만이 있었지만 결국 팔짱을 척 끼고 고개를 돌렸다.양지원과 양석진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표세연이 가장 활짝 미소를 지었다. 표세연은 두 사람이 양씨 저택으로 갈지도 모른다며 반포기 상태였는데 강남 시티로 간다는 말에 기분이 퍽 좋아졌다. 양씨 저택보다는 강남 시티가 드나들기 더 편했기 때문이었다.‘좋았어.’양시연은 병실 침대에 누워서 지내다가 몸에 곰팡이라도 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쯤에 드디어 병원을 떠나 꿈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집 안으로 들어오며 양시연은 집안 공기를 실컷 들이마시었다.태양은 벌써 안방에 안전하게 이송했고 연정훈은 양시연은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했다.본인 침대에 누운 양시연은 몸을 돌려 까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작은 손으로 양시연의 손가락을 겨우 쥐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졌다.“태양아, 여기가 우리 집이야. 기분이 어때?”“아빠가 너에게 엄청 푹신한 침대로 준비해 줬어.”양시연의 말을 알아듣는지는 몰라도 태양은 양시연의 손가락을 꼭 움켜쥔 채로 발을 버둥거렸다.양시연은 그 순간 이 세상 모든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아기가 뭘 해도 귀엽고, 착하고, 천재처럼 느껴졌다.그래서 고개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 짧게 뽀뽀했다.그때, 연정훈이 밖에서 양시연의 짐을 옮기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양시연은 아이에게 정신이 팔려 연정훈이 몇 번이고 질문을 해도 듣지 못했고 참다못한 연정훈이 불만을 담아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그러자 양시연이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봤다.연정훈은 잔뜩 삐져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양시연은 그제야 연정훈의 기분을 눈치채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많이 힘들죠? 자, 여기로 와서 좀 쉬어요.”“...”‘내가 여기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연정훈은 말없이 몸을 돌려 물을 따랐고, 물을 반 컵이나 비우고 다시 짐을 옮겼다.묵묵히 일하
양시연과 연정훈이 너무 시끄럽게 군 건지 태양은 살짝 칭얼거렸고 연정훈의 품에 안겨 병실 안을 빙빙 돌고 나니 다시 얌전해졌다.양시연은 부자를 보며 점차 얼굴을 굳힌 채로 현재 상황에 관해 물었다.연정훈은 최대한 간략해 중점만 골라서 양시연에게 전했다.그리고 양민아라는 이름을 들은 양시연은 너무 화가 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양민아는 정말 뽑아도 뽑아도 자라나는 잡초처럼 끝이 없이 매달리고 들러붙었다.“우리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예쁘게 키워줬는데요. 얌전히 있었으면 우리 엄마가 절대 그 사람 섭섭하게 하지 않게 해줬을 거예요!”그해 양지원은 양민아 부모님과의 오랜 정을 보아 양민아의 목숨을 살려줬었다.그런데 양민아는 고마운 줄도 모르고 되려 복수를 하려 했다.“그런 사람한테 감정 낭비할 필요 없어. 이젠 정말 죽은 사람이 될 테니까.”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또 골치 아픈 문제가 떠올랐다.“양민아는 도망을 갔고 찾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탁승호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살려주고 싶어?”연정훈의 질문에 양시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죽어 마땅하지만 여 아주머니의 손자라 여 아주머니가 마음 아파할 가봐 걱정이에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뭘 걱정하는지 잘 알았다.“도심 한복판에서 폭발 사고가 생겼어. 인명 피해는 없어도 사람들의 이목이 많이 집중된 사고야. 우리가 봐준다고 해도 높은 형벌을 피하지 못할 거야.”‘법대로 하려는 건가?’양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꿀이 떨어지는 시선으로 태양을 바라보는 연정훈을 보며 점차 의문이 들었다.‘나도 탁승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인데 정훈 씨는...’양시연은 입술을 매만지다가 하려던 말을 삼켰다.태양이 태어나고 모든 사랑을 태양에게 쏟느라 다른 사람한테는 남겨줄 여유가 없었다.아이한테로 관심이 돌려지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에게 말했다.“태양이가 아빠를 참 많이 좋아해요. 아빠 품에만 안겨 있으면 보채지도 않는 걸 봐요.”연정훈은 다시 아이를 안고 양시연의 옆으
큰비가 지나고 다시 해가 밝았다. 여름 햇볕이 쏟아지자 방안은 찜통이 되었다.조재민은 오전 내내 쉬다가 오후에 집 밖으로 나섰다.‘아직 판 끝난 거 아니야.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그러한 생각을 하며 조재민은 달리는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그런데 그때, 차량이 갑자기 급정거했다.몸은 크게 앞으로 쏠리다가 안전벨트에 의해 다시 돌아왔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갑자기 낯선 차량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조재민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연정훈이 미치지 않고서 이렇게 밝은 대낮에 움직일 리가 없었다.그러나 누군가 강제로 차량 문을 열고 조재민을 밖으로 끌어냈다. 조재민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입가에 가져다 댄 물수건에 의해 조재민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다른 한편 병원에서.임성원이 직접 연정훈을 찾아왔고 연정훈은 아들을 품에 안은 채로 양시연의 옆 방으로 향했다. 금방 분유를 먹은 아이가 잠을 자지 않고 칭얼거리고 있어 잠든 양시연이 깰까 옆방으로 온 것이었다.임성원의 보고를 듣고 연정훈은 표정 변화 없이 쌀쌀맞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해. 숨통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그 말에 임성원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양민아를 찾지 못했으니 연정훈은 남은 사람을 굴릴 만큼 굴리겠다는 의미였다. 사람을 아직 채 모으지 못했는데 벌써 죽일 수는 없었다.“일주일 내로 양민아 찾아내.”연정훈은 굳은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임성원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지만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연정훈은 감정 기복이 큰 사람이 아니었으나 누군가를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러니 양민아는 멀지 않아 곧 죽게 될 것이다.임성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섰다.연정훈은 아이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았다. 커튼을 내렸지만 병실 안으로 따뜻한 햇살이 비쳤다.부자는 체격 차이가 컸으며 연정훈의 품에 안긴 아이가 새끼 고양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작았다.연정훈은 이 아이가 양시연이 목숨을 걸고 낳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너무 마음이
탁호연은 눈앞의 탁승호를 찬찬히 살폈다.비록 멀쩡한 옷차림이었으나 금방 갈아입힌 흔적이 있었고 드러난 얼굴이나 다른 부위에는 상처가 가득했다.친동생이었으니 탁승호의 멍청함을 탓하다가도 마음이 아파졌다.“대체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벌인 거야?”탁호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탁승호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착하고 바르던 탁승호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이건 누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상관하지 말고 돌아가.”탁호연은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어? 우리 가문 모든 사람이 양씨 가문에서 먹고 사는데 네가 그런 일을 벌인다면 우리 가족 모두가 망한다는 생각 안 해봤어?”탁승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할머니 때문에 널 보러 온 거야. 그러니까 제발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알고 있는 거 모두 말해! 다행히 아가씨 모자가 멀쩡하니 넌 잘하면 살 수 있을 거야!”양시연 모자가 평안하다는 말에 탁승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해 미안하네.”“멍청한 놈!”탁호연은 화가 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양민아가 시킨 거지? 맞지?”탁승호는 대답이 없었다.“대체 왜? 전에 양씨 가문에서 지낼 때 양민아가 너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준 적 있어?”“누나는 몰라!”탁승호는 탁호연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더 이상 삶의 미련이 없다는 듯 천장의 불빛을 직시하며 말했다.“모두가 날 무시해도 그 사람은 달랐다고.”“우리 사이엔 아이가 있어. 이번에 복수만 제대로 해주면 다른 곳으로 이주해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탁호연은 너무 화가 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너 정말 제정신이니? 그 사람이 뭘 잘못 먹었다고 네 아이를 낳아줘?”그 말에 탁승호의 얼굴이 굳어졌다.“거봐, 누나도 날 무시하잖아.”“...”‘이렇게 멍청한 일만 골라서 하는데 누가 널 인정하겠어?’친동생만 아니었다면 탁호연은 바로 등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을 살리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려 노력했다.그
반우희는 세 동생과 함께 병실을 찾았다. 승주의 목에는 아직도 붕대가 감겨 있었고 일부러 다리를 절뚝거리는 모습이 꽤 우스꽝스러웠다.네 명이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병실안의 모든 사람이 시선을 돌렸다.양석진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번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으니 다들 감격해했다.표세연은 직접 의자를 당겨와 양시연의 옆자리에 두며 네 명 더러 편히 앉게 했다.양석진은 지금껏 보배처럼 안고 있던 아이를 반우희에게 넘겨줬다.반우희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며 말했다.“세상에...”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너무 작고 소중해요.”반우희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아이의 향기를 맡았고 또 고개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정말 아기 향이 느껴지는데요!”그 말에 사람들은 웃음이 터졌다.반우희의 뒤에 서 있던 부승원도 사차원다운 반우희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승주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아이를 보며 말했다.“아기 정말 대단해요.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태어났잖아요.”그러자 동준이 바로 말을 이었다.“당연하지. 머리카락 몇 올 없으니까.”“...”양시연은 웃음이 터져버렸고 상처가 땅겨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예민하게 발견한 연정훈이 허리를 숙여 양시연에게 물었다.“아파?”양시연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너무 웃다가 상처가 땅겨서 그래요.”반우희는 바로 고개를 돌려 동준이를 교육했다.“말 함부로 하지마. 금방 태어난 아기는 머리카락이 적어도 곧 자랄 거야.”동준은 발꿈치를 쳐들고 반우희처럼 킁킁거렸다.“정말 아기 향이네요.”“...”아이의 천진난만함에 분위기는 한층 더 화기애애해졌다.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양시연이 반우희를 향해 말했다.“우리 아기가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태어날 수 있었던 건 모두 우희 씨랑 승주 덕분이에요.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좋은 이모를 알아봤어요.”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가슴팍을 툭툭 내리치며 말했다.“이모 대단하지?”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또 승
10시를 넘기자 병실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춰왔다.양시연은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정훈도 눈을 떴다.“더 쉬어야 하지 않겠어요?”고작 몇 시간 눈 붙인 거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그러나 연정훈은 세수를 마치고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양시연에게 다가가 이마에 키스했다.“오후에 시간 봐서 또 눈 붙일게. 아버님도 오셨는데 일단 얼굴 뵙는 게 좋겠어.”양시연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지만 연정훈의 말을 듣고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리고 연정훈을 마음 아파하며 이렇게 말했다.“일단 좀 쉬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 시켜서 음식 주문해요. 정훈 씨도 밥 챙겨 먹고 아버님도 드셔야죠.”그 말에 연정훈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어머님이 지금껏 아버님을 굶겼을까 봐?”“정훈 씨 부모님은 생각도 안 해요?”그러자 연정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표세연은 아마도 손자에 정신이 팔려 연재혁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그래. 아들 노릇이나 하지 뭐.’“잠시 나갔다 올 테니 얌전히 기다려.”“그래요...”비록 병원에서 지냈지만 연정훈이 있어 병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따뜻한 햇살이 느껴져 어제의 악몽 같은 시간은 차츰 잊혀갔다.어젠 정말 악몽 같은 하루였고 오늘은 이제 잠에서 깰 시간이었다.병실을 비웠다가 다시 찾은 연정훈은 양석진과 양지원, 그리고 표세연이 함께 있는 걸 발견했다. 아이는 양석진의 품에 안겨 있었고 연재혁은 보이지 않았다.부모님을 보고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조금 버거워 보였다.“움직이지 말고 편하게 누워 있어. 필요한 게 있으면 우리가 해줄게.”그 모습에 표세연이 서둘러 다가가 말했다.양시연은 기운이 없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평소 무표정이던 양석진도 오늘만큼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막 태어난 손자를 안고 있는 모습이 아주 조심스러웠다.“자, 시연이한테 보여줘야죠.”양지원이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그
반우희는 얼굴이 뜨거워져 몰래 손등으로 열기를 식혔다. 그리고 부승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반짝거렸다.“오늘따라 변호사님이 다르게 보여요.”“뭐가 다른데?”“칭찬을 너무...”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솔직하게 하셔서 말이에요!”“...”부승원은 과거와는 달리 부드러운 얼굴로 반우희를 빤히 바라봤다.“우리 변호사는 증거 없이 허튼 말 하지 않아.”‘헤헤.’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부승원의 품에서 나오지 않았다.“전에는 왜 그렇게 칭찬을 아꼈어요?”“네가 거만해질까 봐.”“그럼 오늘엔 걱정 안 돼요?”부승원은 잠시 뜸을 들이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있는 순간에도 부승원은 반우희의 연락이 끊기던 공포가 불시에 찾아왔고, 반우희가 불길이 가득한 차량에 있었다는 생각만으로 심장이 철렁했다.부승원은 폭탄이 터지는 순간을 직접 목격했고 불길이 한순간에 반우희를 집어삼키는 걸 봤었다.하마터면 소중한 사람을 잃을 뻔했다는 생각에 부승원은 다시 반우희에게 깐깐하게 대할 수 없었다.그리고 전에는 반우희가 마냥 어린 친구로 보여 더 빨리 성장하라고 채찍질을 한 것이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반우희는 이미 성숙하고 용감한 사람이라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양시연을 구하던 반우희는 양시연이 뭘 걱정하는지 눈치채고 가장 빠르게 상황을 안정시켰다.양시연을 구한 뒤 언제 또 폭발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기사를 포기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키우다시피 한 동생 승주와 함께 불길에 달려들었다.“변호사님.”부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우희는 부승원의 볼을 콕콕 찔렀다.그러자 부승원은 반우희에게 이렇게 말했다.“앞으론 마음대로 거만해도 돼.”“네?”“거만하게 사는 게 뭐 흠도 아니잖아. 적어도 넌 독립적이고 강한 사람이라는 의미니까.”반우희는 이게 꿈속은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평소의 부승원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말이었다.하지만... 부승원의 이런 변화에 반우희는 너무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