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석진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양지원의 뒷머리 한 가닥을 손끝으로 돌리며 말했다.“여전히 예전 스타일리스트가 해?”양지원은 고개를 살짝 돌려 양석진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네. 오랜 친구라 제 취향을 잘 알거든요.”“예쁘네.”양석진이 칭찬했다.양지원은 속으론 기뻤지만, 겉으론 퉁명스레 대꾸했다.“직장 생활 오래 하더니 아부도 할 줄 아네요?”“난 진심이야.”“지난번에 긴 생머리였을 때도 예쁘다고 했잖아요.”“둘 다 예뻐서 모순될 게 없어.”양지원은 귀가 살짝 뜨거워졌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소녀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건 싫어서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그럼 스타일리스트에게 보너스를 줘야겠네요.”양석진은 여전히 양지원의 어깨에 손을 얹고 머리를 끄덕였다.어색해지지 않게 하려고 양지원은 두 손을 양석진의 무릎에 올리며 팔찌를 감상하는 척했다.“이 팔찌 분명 타티나 거예요. 연정훈 그 자식 참 대담하게도 이걸 내게 보냈네요.”양석진은 양지원을 보며 말했다.“마음 약해진 거야?”“말도 안 돼요!”양지원은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팔찌 하나로 우리 시연이랑 결혼하려고 하다니 꿈도 적당히 꿔야죠.”“물건 그냥 받을 거야?”“연정훈이 자초한 거죠!”양석진은 살짝 미소 지었다.조명이 비추는 아래서 양지원은 팔찌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양석진이 그녀의 뒷머리 한 가닥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리던 손길이 자연스럽게 풀려나가며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가 마치 자연스럽게 머리를 정리해 주는 듯했다. 양석진의 손끝이 우연히 두피를 스쳤다.양지원은 작은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찌릿한 감각이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걸 느꼈다.양지원은 흘깃 그를 바라보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양석진은 잠시 손끝을 멈추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자세를 낮추며 살짝 떨리는 숨결이 양지원의 얼굴을 스쳤다.공기 중에 은근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양지원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양지원은 눈동자를 조심스레 움직이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
양지원의 생일 후 양석진은 경인에 이틀 더 머물렀다.양시연은 요즘 양지원의 얼굴에 기쁨과 생기가 가득 찬 것을 눈치챘다.양시연과 양혁수는 자주 눈빛을 교환하며 묵묵히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다.집안 분위기는 매우 좋았고 양시연은 드디어 한 번쯤은 아무 걱정 없이 어린 소녀처럼 지낼 수 있었다. 매일 부모님이 출근길에 데려다주는 것이 어릴 적 친구들이 누리던 부모님의 등하교 모습과 겹쳤다.아쉬운 점이라면 양홍두가 양시연의 맞선을 추진 중이라는 사실이었다.할아버지는 경인에서 적합한 젊은 인재들을 많이 골랐지만, 양석진은 말했다.“세운도 살펴보면 좋죠.”할아버지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단호하게 답했다.“시연이를 세운으로 보내서 지원까지 데려가려는 속셈이겠지.”양석진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할아버지도 세운으로 가시는 게 좋겠네요.”양홍두는 어이없었다.“...”양시연은 맞선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었다. 이제는 결혼을 생각할 나이였고 좋은 사람을 만나는 방법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맞선은 한 번도 순조롭게 진행된 적이 없었다.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그녀에게 호감을 보였더라도 결국엔 ‘양씨 가문' 딸로서의 가치에만 관심을 두고는 양가의 배경만 떠보려는 사람들뿐이었다.그중엔 양시연과 연정훈이 정말로 끝난 것인지 확인하려는 사람까지 있었다.그럴 때마다 양시연의 마음엔 분노가 차올랐다.‘연정훈 씨와 사귀었던 게 무슨 저주라도 된 걸까?’몇 번의 맞선이 어그러지고 난 뒤 양시연의 마음은 점차 식어 갔다.“할아버지, 잠시만이라도 맞선을 쉬고 싶어요.”양홍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맞선은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해야 끈기가 생기는 법이지!”양시연은 어이없었다.“...”옆에서 양혁수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횟수가 늘어나면 실패에 익숙해질 테니 걱정하지 마.”양홍두는 침묵했다.“...”양시연이 옷을 갈아입으러 위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양혁수는 할아버지가 방금 꺼낸 새로운 후보자
양시연은 랜덤 방식으로 소개팅에 참여했다. 다음 날이 토요일이라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자리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편에서 정장을 입은 남자가 걸어왔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양시연은 순간 멈칫했다.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입술을 약간 떨며 말했다.“부, 부 변호사님?”부승원은 당황한 듯 침묵했다.‘세상이 드디어 제정신을 놓은 건가.’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확인하고자 했다.“저기...혹시 소개팅하러 오신 건가요?”부승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도 집안의 압박으로 나왔기에 상대가 누군지 몰랐을 거라 짐작하며 단호하게 부인했다.“아니요.”그는 아무런 주저 없이 부인했다.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깜짝 놀랐네요.”부승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곧 연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맞선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너 갈래?]연정훈은 회의를 마치고 메시지를 확인한 후 부승원이 보낸 사진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양 할아버지의 주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연정훈은 의자에 기대어 사진을 양시연에게 전송하며 문자를 보냈다.[남산 저택으로 와. 점심 사줄게.]“양시연은 사진을 보고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이럴 수가. 소개팅 대상이 부승원 씨라니.’양시연은 연정훈에게 답장을 보냈다.[괜찮아요. 점심은 약속이 있어요.]연정훈이 답장했다.[공과 사를 똑똑히 구분해. 너와 중요한 얘기가 있어.][...인터참의 후속 문제는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않나요?]연정훈은 다시 답장을 보냈다.[상회 일에 대해 네가 알아야 할 점이 있어.]그는 주소를 보냈다. 남산 저택의 한옥이었다.양시연은 최근 경기도 상회와 접촉 중이었다. 양지원의 소개로 들어갔지만, 많은 보살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은 양시연을 후배 취급하며 그녀에게는 별다른 발언권이 없었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계산을 마친 후 약속 장소로 향하기로 결심했다.오후의 날씨는 더웠고 한옥의 창문은 모두 열려 있었
“정훈 씨, 가끔 말하는 게 사람을 정말 화나게 하는 거 알아요?”양시연이 갑자기 물었다.연정훈은 의아해했다.양시연은 턱을 괴고 말했다.“정훈 씨는 언제나 사람을 턱 끝으로 내리깔면서 보는 것 같아요. 모든 게 당신 손안에 있다는 듯이 말이죠.”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턱을 만져보더니 조금 내렸다. 그러나 편하지 않아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몇 초 사이에 연정훈은 머릿속에서 여러 자세를 떠올렸지만, 자세를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도 턱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해졌다.양시연은 연정훈이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하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흘깃 보며 찡그렸다.그는 어려서부터 예의범절을 중시했고 항상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다는 말을 들어왔지 예절 문제로 지적받은 적은 없었다.잠시 생각한 연정훈은 말했다.“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일단 내 의견은 보류할게.”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그의 엉뚱함에 방심한 양시연은 경계를 조금 늦추고 물었다.“이제 본론 말해줄 거죠?”연정훈은 방금까지의 혼란을 잠시 접고 자신감을 되찾았다.“상회에서 고전 중이야?”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양시연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그 사람들 정말 까다로워요.”“당연히 까다롭지. 그들은 목숨 걸고 살아남은 사람들이야. 네가 양씨라고 해서 다들 널 공주처럼 대할 거로 생각하면 안 돼.”양시연은 말했다.“공주가 되려는 건 아니에요. 다만 하녀처럼 되고 싶지도 않아요.”“지금 너는 아직 인터참 프로젝트 하나만 맡아봤잖아. 하녀처럼 대우받는 것도 네가 양씨라서 그런 거야.”양시연은 입술을 삐죽였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작은 반응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한 번에 성공하고 싶은 거야?”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솔직하게 말했다.“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요즘 상회 사람들과 접하면서 느낀 건 이 바닥에서 서열 문화가 너무 심각하게 있어요.”연정훈은 금방 이해했다.그녀는 하녀가 되는 게 두려운 게 아
“제게 인맥을 넓혀주려는 거예요?”“응.”양시연이 말했다.“우리 엄마도 사람들 소개해 줄 수 있어요.”연정훈은 대답했다.“둘 다 양씨라면 결국 나 혼자 싸우는 셈이지.”“그럼 양 씨랑 연씨인 정훈 씨와 같이 있으면요?”연정훈은 말했다.“그러면 일도 두 배로 잘 풀릴 수도 있지.”양시연은 어이없었다.“...”‘뭐. 그럴싸하긴 하네.’“정훈 씨, 그 사람들에게 저를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면서 저한테 함부로 하진 않을거죠?”계단을 오르며 양시연은 살짝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한 번 쳐다보았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은 가벼운 한숨을 쉬며 물었다.“네가 보기엔 내가 어떻게 소개하는 게 나을까?”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의 팔짱을 끌어안았다.연정훈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그때 양시연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연정훈 오빠? 이렇게 부르면 괜찮겠죠?”연정훈은 침묵했다.“...”그는 입꼬리를 떨면서 이를 악물었다.종업원이 이미 다가왔다. 연정훈은 손목을 뽑으며 차갑게 말했다.“양 아가씨, 가시죠.”‘이 호칭도 괜찮다. 합리적이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라갔다.연정훈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양지원이 양시연을 데리고 사람들을 만나면 양시연은 한 사람씩 인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연정훈이 양시연을 데리고 가면 강압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양시연이 입을 열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비즈니스 관계를 벗어난 것 같았다.물론 새로운 문제도 생겼다. 사람들은 그녀를 연정훈의 부속품처럼 취급하게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오후부터 밤까지 계속 미팅이 진행되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데리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 대부분은 유명한 상품 업계를 이끄는 인물들이었다.이 사람들이 주로 논의하는 주제는 최근 화서시에서 있었던 큰 사건 즉 화서시와 해외 합자 기업 회신테크가 어떻게 노산 시티의 거대 기업인 일성 그룹을 위기에 처했는지에 관
“오후에 얘기를 끝내고 곧 헤어졌어.”양시연이 담담하게 말했다.양혁수는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연정훈 씨와 공적인 얘기를 할 일이 있어?”양시연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어차피 나랑 연정훈 씨는 공적인 얘기밖에 할 게 없으니까.”“...”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옆에 있던 연정훈도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후 양혁수가 조용히 말했다.“밖에서 조심하고 내일 일 끝나면 바로 집에 와서 자.”“알았어.”이 짧은 대화는 겉으로 보면 평범한 남매 사이의 대화처럼 들렸다.전화를 끊고 난 뒤 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일성 그룹의 일이 바로 정훈 씨가 말했던 기회인가요?”연정훈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본 채 대답했다.“맞아.”양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일성 그룹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형 기업으로 C150 시장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최근 C150의 가격이 급등하던 시점에서 일성은 가격이 정점에 도달했다고 판단해 재고를 매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 달리 국제적 사건으로 인해 가격은 더더욱 상승했고 일성은 손실을 보았지만, 매수 청산을 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문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고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회신테크는 이 기회를 노리고 가격을 더 끌어올리며 일성을 압박하기 시작했다.“지금 상황을 보면 회신테크는 처음부터 일성을 겨냥한 거예요. 일성이 재고 부족으로 대응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가격을 계속 끌어올려 일성을 완전히 무너뜨릴 준비를 한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계산을 해본 뒤 다소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만약 천 회장이 기한 내에 C150을 충분히 납품하지 못하면 일성의 손실은 몇백조 원을 넘어설 거예요.”수년간 업계를 주름잡았던 거대 기업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정인도 중공업 회사인데 혹시...”“없어.”연정훈의 단호한 대답에 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
“정훈 씨, 저를 데리고 선물 계약을 할 거예요?”“응.”양시연은 머리를 말리며 말했다.“전에 잠깐 해본 적은 있어요. 그런데 심오하게는 하지 않았어요.”“얼마 벌었어?”“못 벌었어요. 그냥 시뮬레이션 시스템에서 해본 거라서요.”“그럼 실전 경험은 없다는 얘기네.”“...”‘응.’연정훈은 살짝 오른 술기운에 얼굴이 붉어진 채 옷깃을 풀며 소파에 몸을 편히 기대었다.조명 아래서 그의 팔목에 찬 검은 파텍 필립 시계가 연정훈의 차분하고 깊은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연정훈은 목젖을 한 번 넘기며 양시연 쪽을 조용히 두 번 바라봤다.“머리 말리고 우리 얘기 좀 하자.”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서둘러 머리를 말리고 드라이어를 내려놓으며 문득 물었다.“혼자 왔어요?”연정훈이 말했다.“기사님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이야기 다 끝나면 바로 갈 거야.”그는 양시연을 째려보면서 말했다.“걱정 마. 여기서 밤새울 생각은 없어.”“...”둘은 마주 앉았고 그사이에 포근한 카펫이 놓여 있었다.이제 양시연은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지식을 쌓아 더 이상 듣기만 하는 청취자가 아니었다.하지만 연정훈의 이론과 실전 경험은 여전히 그녀의 한 발 앞에 있었다. 조금이라도 심오한 대화로 넘어가면 양시연은 온전히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지식이 너무 빨리 쏟아져 나오자 양시연의 술기운은 조금 가라앉았다. 양시연은 자주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뒤로 넘겼다.어쩌면 양시연은 지적 매력에 끌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고지식한 남성에게 자연스러운 호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연정훈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갈 때 양시연은 그의 매력에 빠져들며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한참 후.“아츄.”갑자기 양시연이 갑자기 크게 재채기했다.연정훈은 말을 멈추고 그녀를 찬찬히 쳐다보며 물었다.“몸이 안 좋아?”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눈을 비볐다.“괜찮아요...”그러나 연정훈은 양시연의 풀린 눈과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는 단호하게 말했다.“피곤하면 자
손끝으로부터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에 연정훈의 몸은 조각상처럼 굳어졌다.아직 정신이 해롱해롱한 양시연은 아무런 생각 없이 혀를 내밀어 그의 손끝을 핥고 또 핥았다. 연정훈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내밀었던 손을 뒤로 감추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침을 삼키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자는 거야?”낮은 소리로 뭐라 중얼거리는 양시연은 잠이 든 것 같지 않았다. 연정훈은 몸을 돌려 누워 뒷모습만 남긴 양시연에게 이불을 살포시 덮어주고 그녀 곁을 지켰다. 몇 분 뒤 드디어 꿈나라로 떠난듯한 평온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침대 옆에 있던 연정훈은 방을 떠나지 않고 소파에 앉아 그녀 곁을 지켰다.얼마나 지났을까 연정훈이 비몽 사몽하게 눈을 떠보니 양시연이 침대에 누운 채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무슨 일이야?”연정훈이 물었다.“정훈 씨.”“응. 무슨 일 있어?”양시연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잠깐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저 배고파요.”“너 방금 토했잖아. 먹을 수 있겠어?”“네. 아까 위를 비워서 그런지 배고파요.”말을 하는 내내 양시연의 눈길은 그가 가져온 도시락에 꽂혀있었다.“찹쌀죽이랑 만두네?”연정훈이 도시락에 들어있는 음식을 하나하나 알려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양시연은 도시락을 바라보며 군침을 꼴깍꼴깍 삼켰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연정훈은 그런 양시연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먹고 싶어?”양시연은 연정훈을 경계하며 대답했다.“다 먹고 나면 또 저랑 결혼하자고 할거예요?”연정훈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쯧. 완전히 취한 건 아니었네.’“나랑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어?”양시연은 눈을 감고 엎드렸다가 연정훈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양시연은 어느 정도 술이 깬 상태라 정신은 맑았지만 생각나는 대로 입을 여는 것이 문제였다.“정훈 씨는 결혼하고 싶지 않으시다면서요. 예전에 독신주의셨잖아요. 평생 결혼하지 않으실거라고 하셨잖아요.”“그건 예전이고.”“정훈 씨, 지금 나이 드셔서 결혼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고 양시연은 뒷좌석에 몸을 기대어 창밖의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을지 생각했다.조수석에 앉은 반우희가 부승원에게 전화를 걸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지금 어디 있는지 맞혀봐요.”승주는 질색하며 대꾸했다.“정말 오글거리네요.”양시연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반우희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감추고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부승원과 대화를 이어갔다.양시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확인하자 몇 분 전 연정훈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는 가장 먼저 그녀의 안부를 물었고 함께 좋은 소식도 전해왔다.양시연은 배를 가만히 쓸어내리며 잔잔한 만족감을 느꼈다.“오늘 밤은 야근하지 말아요...”앞좌석에서 반우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양시연은 장난삼아 그녀를 놀리려 했다. 그러나 그때 차가 무언가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두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지만 강한 충격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운전자는 급히 핸들을 틀었고 단순한 차선 변경이 아니라 차량이 갑자기 속력을 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무슨 일이에요?!”반우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양시연은 충격에 숨이 턱 막혔고 안전벨트에 강하게 되감기면서 배에 묵직한 압박감이 몰려왔다.운전석에서 운전사가 다급하게 외쳤다.“차가 이상해졌어요. 갑자기 통제가 안 되면서 옆 차와 부딪쳤습니다!”“그...그러면 빨리 멈춰야죠.”승주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양시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고통을 참았다.“맞아요. 얼른 갓길에 세우세요!”“멈출 수 없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운전사의 한마디에 차 안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고 양시연을 포함한 모두의 손발이 차갑게 굳었다.승주와 반우희는 창백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꽉 움켜쥔 채 마치 목소리를 잃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양시연은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휴대전화를 꺼냈다.연정훈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동시에 반우희에
큰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고 연씨 가문의 본가에서 표세연이 전화를 받았다.“좋아. 알았어.”양시연은 2층에 서서 표세연의 기쁜 목소리를 들으며 대충 짐작했지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표세연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괜찮아. 연정훈의 아버지가 다 해결했어.”‘아이고.’“맞아. 오늘 양석진 씨께서 모습을 보이셨대.”표세연이 덧붙였다.양시연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었음을 실감했다.그녀는 연정훈을 보고 싶었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보니 아마도 후속 처리할 일이 남아 있는 듯했다.집에서 기다릴까 했지만 마침 반우희가 세 아이를 데리고 가려 하자 그녀도 차라리 반우희를 태우고 연정훈을 데리러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너무 서두르지 마. 연정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표세연이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양시연은 신경 쓰지 않고 배를 살짝 받치며 계단을 내려갔다.“마침 답답했는데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요.”“알았어. 네가 답답해할 줄 알았어.”표세연은 결국 운전사를 불러 그들을 밖으로 데려가 바람을 쐬게 했다.주차장에서는 세 아이가 여러 차를 구경하고 있었고 반우희가 좋아하는 마이바흐는 승주도 탐을 내는 차였다.“아니면 우리 이 차를 타고 나갈까요?”양시연이 제안했다.“그래도 돼요?”반우희와 승주가 동시에 묻자 양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아싸.”탁승호는 없었고 표세연이 정해준 운전사는 오랫동안 일해온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안전을 위해 희주와 동준은 다른 차에 태웠다.반우희는 마이바흐의 조수석에 앉았고 승주는 양시연과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나도 이제 출세했네요. 마이바흐를 타보다니.”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운전사에게 차를 출발하라고 지시했다.출발!...단 15분만에 양원 그룹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누구도 그 전화의 내용을 직접 듣진 못했지만 위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결과는
“괜찮아요. 반우희 씨는 그냥 한 번 올라가서 볼 거예요. 탁승호 씨는 차 시동 켜고 조수석에 앉아요. 우희 씨가 잠깐이나마 만족할 수 있도록 해줘요."양시연이 웃으면서 말했다.탁승호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네.”반우희는 기분 좋게 차에 올라탔고 양시연은 차 밖에서 앉아 있었으며 실내는 시원하게 느껴졌다.탁승호는 계속해서 옆에서 지켜보았고 반우희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그의 눈빛이 다소 불친절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마음대로 만지지 않았다.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양시연은 웃으면서 물었다.“마음에 들어요?”“네. 마음에 들어요.”“사법시험 끝나면 부승원 씨에게 차 한 대 사달라고 해요.”반우희는 진지하게 한숨을 쉬었다.“시연 언니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물어보길래 차 한 대 선물해 줄 생각인 줄 알았어요.”양시연이 일어나서 반우희 코를 살짝 쥐었다.“욕심쟁이네요.”반우희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그때 또 한 번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렸고 반우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이제 곧 폭우가 올 것 같아요.”“그럴 것 같네요.”...양원 그룹 회의실에서 6시가 다 되어가지만 사람들은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회의라지만 사실 중요한 사항은 이미 끝났고 남은 건 윗사람들의 연설뿐이었다.회의는 이 회장이 직접 참석했고 그의 말 속에는 일부 얌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5분 전 누군가가 또다시 창고에서 발생한 사고를 언급했다.“지금까지 사망자 가족은 아직 보상안을 받지 못했습니다.”이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책임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데 보상안이 나올 수 있나요?”“우리는 어쨌든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누군가 말했다.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죠. 사람들의 입이 무섭죠.”정 회장은 표원정의 의견을 지지했고 그는 이미 조재민과 얽히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이 회장과 연정훈과 대립 중이었다.이 회장은 그를 한 번 쳐다본 후 웃을 듯한 표정으
양시연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양혁수는 그녀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마음 한구석이 살짝 쓰렸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하다니 다행이었다.“이제 곧 출산인데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어. 요즘 같은 때는 한 발짝 덜 움직이는 게 안전한 법이야.”양혁수가 걱정스레 말했다.“어쩜 정훈 씨랑 하는 말이 똑같아?”“연정훈 씨랑 나를 비교하지 마. 난 그 사람이랑 상종도 안 해.”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화 너머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변여름이야?”“응. 변백호가 볼일 있어서 왔는데 변여름도 같이 따라왔어. 한강시에 한 번도 안 와봤다길래 데리고 놀러 왔지.”“잘됐네.”“혹시 처리할 일 있으면 말해. 너희가 직접 움직이기 어려운 건 내가 대신 해줄게.”전화를 끊기 전 양혁수가 덧붙였고 양시연은 그의 배려가 고마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저녁 무렵 반우희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세 아이를 데리고 복숭아를 따러 갔다가 양시연에게도 좀 가져다주고 싶다고 했다.마침 무료하던 참이라 양시연은 주소를 알려주며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아이들이 도착하자 집안 분위기가 한층 활기차졌다.표세연은 특히 동준이가 작은 몸집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마치 만화 캐릭터 같다며 귀여워했다.양시연과 반우희는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반우희는 대게를 한입 베어 물며 무심히 말했다.“요즘 다들 너무 바쁜 것 같아요. 벌써 이틀이나 부승원 씨 얼굴을 못 봤네요.”“내가 없으니 많이 힘들겠죠.”양시연이 말하자 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게 아니라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바쁘진 않았는데 요즘은 뭔가 이상해요.”양시연은 부승원이 왜 바쁜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반우희를 달래며 더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오늘 부승원 씨의 생일이에요. 이따가 그
이전에는 민수희가 있었기 때문에 표세연은 민씨 가문의 기생충 같은 사람들을 참을 수 있었지만 민수희가 떠나고 나서는 이제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게다가 요즘 마음도 편치 않아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은 참이었다.그때 민지연이 버릇없이 덜컹거리며 들어오는 것을 본 표세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뺨을 한 대 때렸다.‘팍!’양시연은 위층에 있었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동 소리를 듣고 급히 문을 열였다. 그곳에서는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방미선은 아마도 체면이 상했는지 표세연에게 기어이 몇 마디 반박하며 말했다.“혹시 갱년기 아니야?”“갱년기? 너야말로 갱년기야!”“나는 곧 손자를 볼 거야. 갱년기는 이미 다 지나갔다고.”민지연과 방미선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표세연은 화가 나서 말이 거칠어졌다.“앞으로 너희는 이 집에 다시 발 들이지 마. 어머님도 돌아가셨고 이제 이 집엔 민씨는 없어. 정인은 이미 내 며느리와 함께 성을 바꿔서 양씨가 되었어. 만약 돈을 원하고 손자 행세를 하려면 양씨 가문에 가서 해.”“사모님.”가정부들은 놀라서 표세연에게 말을 그만하라고 했지만 표세연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덧붙였다.“내가 하나만 말해줄게. 우리 사부인 성격이 나보다 더 안 좋아. 가서 손자 행세하고 싶으면 절이라도 소리 크게 내서 해.”방미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당장이라도 화병이 날 듯했고 얼굴이 붉어진 채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고 욕을 하려 했지만 자신이 남의 집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이빨을 꽉 깨물며 참았다. 그런 다음 표세연에게 정신과 약을 먹으라고 권한 후 떨리는 손으로 민지연을 끌고 나갔다.가정부 중 한 명은 원래 표세연을 말리려 했지만 방미선의 말을 듣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저희 사모님은 건강하세요. 오히려 당신이나 민지연 씨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표세연은 한바탕 화풀이를 끝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