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으로부터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에 연정훈의 몸은 조각상처럼 굳어졌다.아직 정신이 해롱해롱한 양시연은 아무런 생각 없이 혀를 내밀어 그의 손끝을 핥고 또 핥았다. 연정훈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내밀었던 손을 뒤로 감추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침을 삼키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자는 거야?”낮은 소리로 뭐라 중얼거리는 양시연은 잠이 든 것 같지 않았다. 연정훈은 몸을 돌려 누워 뒷모습만 남긴 양시연에게 이불을 살포시 덮어주고 그녀 곁을 지켰다. 몇 분 뒤 드디어 꿈나라로 떠난듯한 평온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침대 옆에 있던 연정훈은 방을 떠나지 않고 소파에 앉아 그녀 곁을 지켰다.얼마나 지났을까 연정훈이 비몽 사몽하게 눈을 떠보니 양시연이 침대에 누운 채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무슨 일이야?”연정훈이 물었다.“정훈 씨.”“응. 무슨 일 있어?”양시연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잠깐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저 배고파요.”“너 방금 토했잖아. 먹을 수 있겠어?”“네. 아까 위를 비워서 그런지 배고파요.”말을 하는 내내 양시연의 눈길은 그가 가져온 도시락에 꽂혀있었다.“찹쌀죽이랑 만두네?”연정훈이 도시락에 들어있는 음식을 하나하나 알려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양시연은 도시락을 바라보며 군침을 꼴깍꼴깍 삼켰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연정훈은 그런 양시연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먹고 싶어?”양시연은 연정훈을 경계하며 대답했다.“다 먹고 나면 또 저랑 결혼하자고 할거예요?”연정훈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쯧. 완전히 취한 건 아니었네.’“나랑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어?”양시연은 눈을 감고 엎드렸다가 연정훈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양시연은 어느 정도 술이 깬 상태라 정신은 맑았지만 생각나는 대로 입을 여는 것이 문제였다.“정훈 씨는 결혼하고 싶지 않으시다면서요. 예전에 독신주의셨잖아요. 평생 결혼하지 않으실거라고 하셨잖아요.”“그건 예전이고.”“정훈 씨, 지금 나이 드셔서 결혼
연정훈은 양시연의 신분을 추측해 보았었다.그는 양혁수와 양지원이 3년 동안이나 떨어져 지낸 사실과 현재 오성호의 처지를 통해 뭔가 눈치채고 있었다.하지만 양시연의 친아버지가 양석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양시연은 아직도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그녀는 연정훈과 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나누려고 몸을 일으켰다.이때 연정훈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마침 얘기를 하려는 양시연의 입을 막았다.갑자기 입 막힘을 당한 양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연정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눈을 깜박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연정훈의 손을 홱 뿌리쳤다.‘정훈 씨 뭐 하는 거야?’연정훈은 잔뜩 성이 난 양시연을 달래려 입을 열었다.“너희 아버지가 양석진 씨라는 걸 절대로 말하면 안 돼. 알았지.”그의 말에 양시연은 어리벙벙해졌다.물론 그녀도 이 일은 비밀이어서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알겠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하고는 잠깐의 고민 뒤에 다시 드러누우려 했다.“말 안 할 거예요.”연정훈을 그녀 허리에 감겨있는 두 팔에 힘들 넣어 드러누우려는 양시연을 일으키고 물었다.“이 일은 또 누가 알고 있어?”“무슨 일 말씀이세요?”양시연이 정색하며 물었다.“...네 아버지가 양석진 씨라는 거 말이야.”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시연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물었다.“정훈 씨가 어떻게 아셨어요?”연정훈은 어이가 없어서 침묵을 지켰다.양시연은 머리카락을 쥐어 잡으며 잔뜩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입술을 핥으며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찾아 가족들에게 비밀이 유출되었다고 보고하려던 참이었다.“괜찮아. 말 안 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마.”“제 핸드폰 어디 있어요?”양시연은 벌써 핸드폰에 주의를 돌렸다.연정훈의 입꼬리가 가볍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베게 옆에 놓인 핸드폰을 발견하고 그녀 손에 직접 쥐여주었다.양시연은 무거운 집을 벗어버린 듯 홀가분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손에 꼭 잡고 드러누웠다.
양시연은 오랜만에 좋은 꿈을 꾸었다. 꿈속의 그녀는 아주 제멋대로였다.부드러운 입술, 녹아내리는 마음.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내가 너랑 결혼하기 전까지 얌전하게 기다려줘.”‘음...뭐지? 머리도 아프고 허리도 좀 시큰시큰한 거 같은데.’양시연이 꿈나라에서 깨어날 때 방은 에어컨 바람 덕분에 아주 시원했고 커튼이 닫혀있어서 저녁처럼 어두컴컴했다.옆에 있는 시계를 보니 이미 열 시가 다되었다.소스라치게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양시연은 세상이 돌아가는 것처럼 어지러웠다.‘망했어.’급히 핸드폰을 열어보니 무음 모드 때문에 미처 받지 못한 부재중 전화 여러 통이 와있었다.양시연은 허탈하게 침대에서 2초 동안 멍해 있다가 전화를 다시 걸려고 했다.이때 손목에 차인 남성용 시계가 눈에 띄었다.‘누구 거지?’파텍필립 블랙 다이얼.순간 여러 가지 화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고 그녀는 시계의 주인을 찾았다. 양시연은 이마를 치며 생각했다.‘정훈 씨 거구나. 어젯밤이 미친 듯이 정보를 캐냈는데 이 시계가 어떻게 내 손에 있는 거지?’양시연은 생각을 그만하고 몸을 단장한 뒤 비서에게 연락했다.다행히도 비서가 양시연의 상황을 눈치채고 해야 할 일을 절차대로 마무리했다.양시연이 회의를 열어 인터참의 일을 알맞게 안배하자마자 연정훈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깼어?”연정훈이 자연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양시연은 잠깐의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제 몇 시에 떠나신 거예요? 떠나실 때 시계를 두고 가셨죠?”연정훈이 대답했다.“두고 간 거 아닌데. 네가 가져간 거야.”“네?”“너 이제부터 술 못 마시면 마시지 마. 그 정도 주량으로 마셨다간 큰일 나. 네가 만난 모든 사람이 좋은 사람일 수는 없잖아.”양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연정훈이 한마디 덧붙였다.“괜찮아. 난 먼저 떠나서 시계만 뺏겼어.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마.”그 말에 양시연은 입을 삐죽거렸다.그녀가 뭐
이 사람들과 며칠 동안 일을 함께 해보니 양시연은 왜 돈과 포르노가 항상 엮여있는지 알 수 있었다.사람들은 흥분한 상태에서 더 심한 정신적인 자극을 받고 싶어한다.극도로 흥분한 상황에서 화끈한 밤을 보낼 수 있다면 마다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아까 금방 양시연은 한우빈이 비서를 품에 안고 휴식실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이는 아주 흔한 일이었다.낮에 사람들 앞에서 화려한 모습을 보이는 엘리트들은 누구나 여자를 곁에 두고 있었다.오히려 부승원처럼 사생활이 깨끗한 남자가 고행승이라고 불리지. 연정훈은 뭐.아.이 사람들 모두 양시연이 연정훈과 그런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는 부승원과 함께 수행하는 행렬에 들지 못했다.의자에 앉아있는 양시연의 등 뒤에는 등불이 찬란했다. 양시연은 커피를 들고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대표님도 자주 저래요?”“무슨 말이야?”양시연은 휴식실 방향으로 턱을 치켜들어 짚었다.‘혹시 대표님도 흥이 나면 여자를 품에 안고 저러나?’연정훈은 시선을 이동하여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이런 말은 모호하게 하지 마, 내가 착각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네가 이상한뜻으로 눈치 주는 줄 알았어.”양시연은 그를 한 번 노려보고는 발을 의자의 페달에 올려놓고 한 바퀴 빙글 돌아 다시 그와 등지고 앉았다. 그녀는 나무 테이블에 엎드린 채 밖에서 달리고 있는 차들을 보며 넋을 놓았다.연정훈은 그녀가 커피를 별로 안 마시는 것을 보고 따뜻한 우유 한 잔으로 바꿔 주려 했다. 하지만 양시연이 잽싸게 커피를 가로채 앞으로 가져왔다.오전에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녀가 남긴 음료를 연정훈이 마셔버려 입이 열 개여도 설명할 수 없었다.연정훈은 한쪽 눈썹을 치켜든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양시연의 뒤에 서서 물었다.“요 며칠 어땠어?”“너무 쩌릿했어요.”요 며칠 돈에 발이 달린 듯 자기 절로 그녀의 주머니로 들어왔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안 올 거예요.”그녀가 말했다.연정훈은 일찍 감지 이를 예상하였다.애초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닥뜨렸다.양시연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연정훈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지금 뭐로 보이시는지 아세요?”“뭔데? ”“여직원들을 괴롭히는 직장 쓰레기.”연정훈은 할말을 잃었다.양시연은 콧방귀를 뀌고 의자를 옮겨서 그를 멀리했다.그녀는 컴퓨터 화면을 가리켜 연정훈에게 데이터를 보여주고는 그의 정보를 캐내면서 이 일을 할지 안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억지로 시키는 일은 좋은 결과를 못 볼 거예요.”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슬쩍 말을 건네면서 추잡한 수단을 썼다간 아무 이득도 얻지 못할 거라고 눈치를 줬다.이에 연정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상관없어. 결과가 어떨지는 그때 가서 보면 되지.”양시연은 침묵을 지켰다.그의 말에 더욱 불안해진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고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했다.이때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양지원이 그녀더러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자고 재촉했다.양시연은 잠깐 하던 생각을 멈추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연정훈은 더는 그녀를 막지 않고 물건을 챙겨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그의 시선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양시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잠시 후 양씨 가문 저택에 도착한 그녀는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은은한 달빛이 쏟아져 양시연을 감싸고 있었다. 엄청 피곤하고 머리가 여전히 무거웠지만 최근 며칠의 경험을 생각하면 피가 끓어오르는 듯싶었다.집에 들어서니 양지원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고 그녀를 마주한 이는 양혁수였다.영혁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은 양혁수가 준비한 음식이 차려져 있는 정원 앞의 작은 정자로 발걸음을 옮겼다.양시연은 조용히 식사하기 시작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누워 열기를 식혔다. 긴소매 긴바지의 실크 잠옷을 입고 누운 그의 모습은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최근에 왜 연정훈이랑 가깝게 지내는 거야?”양혁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양시연은 그를 힐끗 보고 잠깐의 고민 후에 대답했다.“대표님이 선물 계약
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양혁수는 양시연을 불러 멈춰 세웠지만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샤워하러 가봐.”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덤덤한 톤으로 말했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을 쳤다. “예, 형님!”양혁수는 침묵을 지켰다.덩굴로 뒤덮인 복도를 지나가는 양시연의 얼굴에 미소가 점점 사그라졌다.그녀는 계단을 올라가며 머릿속에서 그해에 있었던 일을 빠르게 뒤집어 보았다.출생의 비밀에 대한 일은 양지원이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녀에게 말해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도 알게 되었다.양혁수와 양지원과의 모자 관계가 그리도 좋았는데, 갑작스럽게 자기가 어머니의 결혼을 파기한 여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심한 타격에 그는 혼자 에든베타로 떠났다.그때 양지원은 밤을 새워가며 마음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했고, 몇 번이나 양혁수를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결국은 양시연이 에든베타의 중세 마을에서 양혁수를 발견했다.그녀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양지원 대신 양혁수를 집으로 데려가고 그에게 너는 여전히 양혁수라며 나는 아무것도 뺏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빨리 가, 귀찮게 하지 말고.”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양혁수는 그렇게 말했다.양시연은 당연히 그곳을 떠나지 않고 고생스럽게 양혁수를 설득했다.가뜩이나 침울했던 양혁수는 양시연의 행동을 가장 악의적인 마음으로 추측했다.“넌 연기하러 여기까지 왔냐?”“그러면 넌 너 자신을 악역에 대입하지 않을 수 없냐?”“......”처음 며칠 동안 양혁수는 그녀와 말을 섞지 않고 투명인간 취급을 하며 무시하는 방법으로 그녀를 쫓아내려고 했다.하지만 그녀는 쉽게 포기하고 떠나려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를 ‘감화’시키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슨 면목으로 양지원을 만나야 할지 모르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갑자기 엄마가 생겼고 또 그녀를 너무나 잘 대해주니 조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양시연이 양혁수에게 이 말을 해주자 그는 그녀를 조
방으로 돌아간 양시연은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다.흥분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온을 되찾자 피로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양시연이 지식인을 클릭해 들어가 보니 EAN이 한 차례 변론을 끝마쳤다.마침 할 일이 없어 한가했던 양시연은 요 며칠 동안의 경험에 분석을 더해 사이트에 올렸다.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그중 EAN이 있었다.이 사람들은 모두 눈치가 빨라서 조그마한 실마리로도 많은 일을 귀신같이 추측해낼 수 있었기에 양시연은 내용을 여러 번 고친 뒤 다시 올렸다.이때 EAN이 댓글을 남겼다.“아주 좋아요.”드디어 EAN에게서 칭찬을 받은 양시연은 득의양양했다.곧이어 두 번째 댓글이 도착했다.“수준을 봐서는 그쪽이 쓴 것 같지 않아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어 할말을 잃었다.‘존나 빡치네. 어쩜 정훈 씨처럼 입이 모질지. 능력 있는 분들은 다 이래?’그녀가 아무런 답장을 하지 않자 얼마 뒤 EAN이 두 번째 댓글을 지우고 그녀에게 '좋아요'를 눌러줬다.“...”‘뭐 정훈 씨보다는 낫네. 어떤 말을 해서 안 될지는 잘 아니까.’기분이 나빴던 것은 뒤로하고 양시연은 EAN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EAN은 훨씬 부드러워진 말투로 그녀의 모든 질문에 답장을 해주었다.두 사람은 오랫동안 문자를 오고 받으며 어느새 친구가 다 되었다.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양시연은 일시 중지 버튼을 누르고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양지원이 서 있었다.“엄마, 무슨 일이세요?”양지원은 마실 것이 담긴 컵을 건네주고 어깨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물었다.“정훈이한테 선물 계약에 대해 배우고 있다며?”“맞아요. 그냥 좀 지루해서 재미로 하는 거예요.”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는 연정훈이 교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양창수 씨 말로는 네가 요즘 C150을 모집하고 있다며.”그 말에 양시연은 마음속으로 양창수 아저씨가 대단하다 감탄하고 있었다.‘와 창수 아저씨 진짜 대단하다. 뭐든 다 아시네.’양지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너
“천우성은 삼촌을 통해서 C150을 마련하려는 속셈이야.”양혁수의 말에 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었다.양석진은 그 일에 손을 쓸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 일은 양석진의 작업 범위가 아니었고 양석진이 대형 민영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생각은 연정훈과 같았기에 일성 그룹이 그동안 해온 짓거리는 그의 미움을 샀다.양시연은 온 새벽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아침 일찍 일어나 금속시장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시장의 큰 변화에 소스라치게 놀라 선택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아침 일찍 깨난 양시연은 거울 앞에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하느님께서 미쳤나 봐. 이렇게 중요한일을 나 같은 초보한테 맡기다니 세계가 멸망할 날이 머지않았어.’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결단의 시간이 점점 가까워졌다.어르신들이 말씀을 나누는 틈을 타 양시연은 밖으로 나가 연정훈에게 전화를 쳤다.전화가 통한 순간 연정훈이 전화를 받았다.“천우성씨 지금 너희 집에 있어?”“네.”양시연은 꽃으로 단장된 화랑 아래를 지나며 땅에 떨어진 꽃들을 발로 짓밟고 있었다.그녀가 한창 고민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연정훈은 침착하게 양시연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제가 이 일을 맡으면 정훈 씨가 절 도와주실 건가요?”“꼭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양시연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다시 들이쉬며 물었다.“저에게 함정을 파고 있는 게 아니죠? 정훈 씨, 제가 먼저 말씀드리는 건데요. 만약 그 물건으로 절 협박하셔도 전 정훈 씨랑 결혼 안 할 거예요.”연정훈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양시연은 의자에 앉아 나팔꽃을 주워들더니 꽃줄기를 잡고 두 손가락으로 돌리며 꽃향기를 맡았다.“아직은 모르겠어요. 근데 협박으로 결혼하려는 사람은 저에겐 나쁜 사람이에요.”연정훈은 아무런 변명도 할수 없었다.잠깐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입을 열었다.“가서 그일 네가 맡아서 해결하겠다고 말해. 내가 꼭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양시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고 양시연은 뒷좌석에 몸을 기대어 창밖의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을지 생각했다.조수석에 앉은 반우희가 부승원에게 전화를 걸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지금 어디 있는지 맞혀봐요.”승주는 질색하며 대꾸했다.“정말 오글거리네요.”양시연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반우희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감추고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부승원과 대화를 이어갔다.양시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확인하자 몇 분 전 연정훈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는 가장 먼저 그녀의 안부를 물었고 함께 좋은 소식도 전해왔다.양시연은 배를 가만히 쓸어내리며 잔잔한 만족감을 느꼈다.“오늘 밤은 야근하지 말아요...”앞좌석에서 반우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양시연은 장난삼아 그녀를 놀리려 했다. 그러나 그때 차가 무언가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두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지만 강한 충격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운전자는 급히 핸들을 틀었고 단순한 차선 변경이 아니라 차량이 갑자기 속력을 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무슨 일이에요?!”반우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양시연은 충격에 숨이 턱 막혔고 안전벨트에 강하게 되감기면서 배에 묵직한 압박감이 몰려왔다.운전석에서 운전사가 다급하게 외쳤다.“차가 이상해졌어요. 갑자기 통제가 안 되면서 옆 차와 부딪쳤습니다!”“그...그러면 빨리 멈춰야죠.”승주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양시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고통을 참았다.“맞아요. 얼른 갓길에 세우세요!”“멈출 수 없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운전사의 한마디에 차 안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고 양시연을 포함한 모두의 손발이 차갑게 굳었다.승주와 반우희는 창백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꽉 움켜쥔 채 마치 목소리를 잃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양시연은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휴대전화를 꺼냈다.연정훈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동시에 반우희에
큰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고 연씨 가문의 본가에서 표세연이 전화를 받았다.“좋아. 알았어.”양시연은 2층에 서서 표세연의 기쁜 목소리를 들으며 대충 짐작했지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표세연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괜찮아. 연정훈의 아버지가 다 해결했어.”‘아이고.’“맞아. 오늘 양석진 씨께서 모습을 보이셨대.”표세연이 덧붙였다.양시연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었음을 실감했다.그녀는 연정훈을 보고 싶었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보니 아마도 후속 처리할 일이 남아 있는 듯했다.집에서 기다릴까 했지만 마침 반우희가 세 아이를 데리고 가려 하자 그녀도 차라리 반우희를 태우고 연정훈을 데리러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너무 서두르지 마. 연정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표세연이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양시연은 신경 쓰지 않고 배를 살짝 받치며 계단을 내려갔다.“마침 답답했는데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요.”“알았어. 네가 답답해할 줄 알았어.”표세연은 결국 운전사를 불러 그들을 밖으로 데려가 바람을 쐬게 했다.주차장에서는 세 아이가 여러 차를 구경하고 있었고 반우희가 좋아하는 마이바흐는 승주도 탐을 내는 차였다.“아니면 우리 이 차를 타고 나갈까요?”양시연이 제안했다.“그래도 돼요?”반우희와 승주가 동시에 묻자 양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아싸.”탁승호는 없었고 표세연이 정해준 운전사는 오랫동안 일해온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안전을 위해 희주와 동준은 다른 차에 태웠다.반우희는 마이바흐의 조수석에 앉았고 승주는 양시연과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나도 이제 출세했네요. 마이바흐를 타보다니.”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운전사에게 차를 출발하라고 지시했다.출발!...단 15분만에 양원 그룹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누구도 그 전화의 내용을 직접 듣진 못했지만 위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결과는
“괜찮아요. 반우희 씨는 그냥 한 번 올라가서 볼 거예요. 탁승호 씨는 차 시동 켜고 조수석에 앉아요. 우희 씨가 잠깐이나마 만족할 수 있도록 해줘요."양시연이 웃으면서 말했다.탁승호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네.”반우희는 기분 좋게 차에 올라탔고 양시연은 차 밖에서 앉아 있었으며 실내는 시원하게 느껴졌다.탁승호는 계속해서 옆에서 지켜보았고 반우희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그의 눈빛이 다소 불친절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마음대로 만지지 않았다.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양시연은 웃으면서 물었다.“마음에 들어요?”“네. 마음에 들어요.”“사법시험 끝나면 부승원 씨에게 차 한 대 사달라고 해요.”반우희는 진지하게 한숨을 쉬었다.“시연 언니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물어보길래 차 한 대 선물해 줄 생각인 줄 알았어요.”양시연이 일어나서 반우희 코를 살짝 쥐었다.“욕심쟁이네요.”반우희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그때 또 한 번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렸고 반우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이제 곧 폭우가 올 것 같아요.”“그럴 것 같네요.”...양원 그룹 회의실에서 6시가 다 되어가지만 사람들은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회의라지만 사실 중요한 사항은 이미 끝났고 남은 건 윗사람들의 연설뿐이었다.회의는 이 회장이 직접 참석했고 그의 말 속에는 일부 얌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5분 전 누군가가 또다시 창고에서 발생한 사고를 언급했다.“지금까지 사망자 가족은 아직 보상안을 받지 못했습니다.”이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책임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데 보상안이 나올 수 있나요?”“우리는 어쨌든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누군가 말했다.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죠. 사람들의 입이 무섭죠.”정 회장은 표원정의 의견을 지지했고 그는 이미 조재민과 얽히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이 회장과 연정훈과 대립 중이었다.이 회장은 그를 한 번 쳐다본 후 웃을 듯한 표정으
양시연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양혁수는 그녀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마음 한구석이 살짝 쓰렸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하다니 다행이었다.“이제 곧 출산인데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어. 요즘 같은 때는 한 발짝 덜 움직이는 게 안전한 법이야.”양혁수가 걱정스레 말했다.“어쩜 정훈 씨랑 하는 말이 똑같아?”“연정훈 씨랑 나를 비교하지 마. 난 그 사람이랑 상종도 안 해.”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화 너머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변여름이야?”“응. 변백호가 볼일 있어서 왔는데 변여름도 같이 따라왔어. 한강시에 한 번도 안 와봤다길래 데리고 놀러 왔지.”“잘됐네.”“혹시 처리할 일 있으면 말해. 너희가 직접 움직이기 어려운 건 내가 대신 해줄게.”전화를 끊기 전 양혁수가 덧붙였고 양시연은 그의 배려가 고마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저녁 무렵 반우희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세 아이를 데리고 복숭아를 따러 갔다가 양시연에게도 좀 가져다주고 싶다고 했다.마침 무료하던 참이라 양시연은 주소를 알려주며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아이들이 도착하자 집안 분위기가 한층 활기차졌다.표세연은 특히 동준이가 작은 몸집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마치 만화 캐릭터 같다며 귀여워했다.양시연과 반우희는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반우희는 대게를 한입 베어 물며 무심히 말했다.“요즘 다들 너무 바쁜 것 같아요. 벌써 이틀이나 부승원 씨 얼굴을 못 봤네요.”“내가 없으니 많이 힘들겠죠.”양시연이 말하자 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게 아니라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바쁘진 않았는데 요즘은 뭔가 이상해요.”양시연은 부승원이 왜 바쁜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반우희를 달래며 더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오늘 부승원 씨의 생일이에요. 이따가 그
이전에는 민수희가 있었기 때문에 표세연은 민씨 가문의 기생충 같은 사람들을 참을 수 있었지만 민수희가 떠나고 나서는 이제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게다가 요즘 마음도 편치 않아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은 참이었다.그때 민지연이 버릇없이 덜컹거리며 들어오는 것을 본 표세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뺨을 한 대 때렸다.‘팍!’양시연은 위층에 있었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동 소리를 듣고 급히 문을 열였다. 그곳에서는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방미선은 아마도 체면이 상했는지 표세연에게 기어이 몇 마디 반박하며 말했다.“혹시 갱년기 아니야?”“갱년기? 너야말로 갱년기야!”“나는 곧 손자를 볼 거야. 갱년기는 이미 다 지나갔다고.”민지연과 방미선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표세연은 화가 나서 말이 거칠어졌다.“앞으로 너희는 이 집에 다시 발 들이지 마. 어머님도 돌아가셨고 이제 이 집엔 민씨는 없어. 정인은 이미 내 며느리와 함께 성을 바꿔서 양씨가 되었어. 만약 돈을 원하고 손자 행세를 하려면 양씨 가문에 가서 해.”“사모님.”가정부들은 놀라서 표세연에게 말을 그만하라고 했지만 표세연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덧붙였다.“내가 하나만 말해줄게. 우리 사부인 성격이 나보다 더 안 좋아. 가서 손자 행세하고 싶으면 절이라도 소리 크게 내서 해.”방미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당장이라도 화병이 날 듯했고 얼굴이 붉어진 채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고 욕을 하려 했지만 자신이 남의 집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이빨을 꽉 깨물며 참았다. 그런 다음 표세연에게 정신과 약을 먹으라고 권한 후 떨리는 손으로 민지연을 끌고 나갔다.가정부 중 한 명은 원래 표세연을 말리려 했지만 방미선의 말을 듣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저희 사모님은 건강하세요. 오히려 당신이나 민지연 씨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표세연은 한바탕 화풀이를 끝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