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 앞, 나무들은 크고 정원은 탁 트여 있었다. 바람이 불자 양옆의 나뭇잎이 살랑살랑 흔들렸다.양지원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양석진을 불러 세웠다.양창수는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차에 타라고 신호를 보냈다.양석진은 차 옆에 서서 뒤돌아 양지원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야?”“시계를 두고 가셨어요.”양지원은 들고 있던 시계를 내밀었다.달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졌고 그들은 가까이 서 있었다.양석진이 손을 내밀자 양지원은 자연스럽게 시계의 잠금을 풀어 양석진의 손목에 채워주었다.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다. 양지원이 손을 놓고 양석진도 손을 내렸다.서로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들어가.”양석진이 말했다.“네.”양지원은 한 발 물러서서 양석진이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는 차에 탔고 양지원은 문을 닫아주었다. 마지막 순간, 망설이던 양지원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오빠, 조심히 가세요.”...저택 안에서는 두 사람이 사라지자 안시연과 연정훈도 조용해졌다.“우리도 집으로 돌아갈까?”연정훈이 먼저 물었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연정훈과 함께 가는 것 외에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양석진의 집에 더 머물 수는 없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이 동의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마침 돌아오는 길에 양지원과 마주쳤다.양지원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연정훈을 한 번 쳐다보며 물었다.“이제 가려고?”“네. 더 이상 신세지지 않겠습니다.”“위층에 있는 약은 챙겨가.”양지원이 무심히 말했다.안시연은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양지원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오늘 밤 양지원에게 큰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하지만 양지원은 다른 말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대신 차분하게 한마디만 던졌다.“혁수가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으니 며칠 동안 혁수를 자극하지 마. 다 나으면 네가 혁수에게 아무런 기회도 없다는 걸 알려줘.” 안시연은 침묵했다.“...”안시연은 잠
안방의 욕실은 매우 넓었고 다섯 여섯 명은 거뜬히 들어갈 만한 큰 욕조가 있었다. 욕실 한쪽에는 사면이 유리로 둘러싸인 샤워실이 자리하고 있었다.안시연은 평소 이 넓은 공간을 잘 사용하지 않았고 늘 작은 샤워실만 이용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몸이 지쳐 욕조에 몸을 담그기로 했다.그때 연정훈이 당당하게 욕실로 들어와 자신의 물건을 벗어두고 안시연의 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벨트의 금속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들리자 안시연은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다행히 연정훈은 샤워실로 들어갔다.안시연은 긴 한숨을 내쉬며 겨우 안도의 숨을 돌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정훈이 다시 샤워실에서 나와 욕조로 들어왔다.?안시연은 당황했지만 미처 반대편으로 몸을 옮기기도 전에 연정훈은 벌써 안시연 곁으로 다가와 팔을 뻗어 안시연을 감싸 안았다.연정훈은 한쪽 다리를 굽히고 안시연은 다리를 벌려 연정훈의 다리 위에 앉게 했다. 연정훈은 안시연을 안고 마치 안시연의 등받이가 되어 주는 듯했다.이 자세는 안시연에게 낯설고 부끄러웠다. 안시연은 몸을 움츠리며 욕조 밖으로 나가려 했다.연정훈은 단호하게 안시연을 제지하며 팔을 거두지 않았다.연정훈은 옆에 있던 바디워시를 짜서 안시연의 등에 부드럽게 발라주기 시작했다.“몸이 조금 나아졌다고 이렇게 목욕하다니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여기서 기절이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괜찮아졌어요.”“강한 척하지 마. 정말 기절이라도 했으면, 한밤중에 의사를 불러야 했을지도 몰라.”“...”연정훈은 안시연의 등을 씻어주며 능숙하고도 부드러운 손길로 안시연을 돌보았다.안시연의 몸은 이미 연정훈의 손길에 익숙해져 있었고 연정훈에게 쉽게 이끌렸다.따뜻한 물이 안시연의 몸을 감싸며 전율이 일었다.안시연의 허리는 힘이 풀리고 안시연도 모르게 연정훈의 무릎 위에 엎드렸다. 안시연의 분홍빛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끝을 무의식적으로 핥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미세한 몸짓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안시
안시연은 침대 머리맡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일부러 기다리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괜히 연정훈에게 화가 나서 혼자 눕기로 했다.멀리서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서서히 들려왔다.안시연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긴 한숨을 내쉬고 결국 일어났다.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가 아래층으로 가서 차 두 잔을 따랐다. 연정훈의 서재 앞을 지나칠 때 안시연은 발걸음을 멈추었다.똑똑똑.문을 두드렸다.문이 자동으로 열렸다.연정훈의 서재 앞을 지나칠 때 안시연은 발걸음을 멈추었다.그가 정말로 일하는 모습을 보니 안시연의 마음속 불편함이 조금 줄어들었다. “아직 안 자?”연정훈이 안시연에게 물었다.“목말라서 아래층에 내려가 차를 따랐어요. 영훈 씨 것도 한 잔 가져왔어요.”“고마워.”연정훈은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그곳에 두면 돼.”안시연은 어이없었다.“...”‘정훈 씨는 이중인격인가? 조금 전까지 계속 집착하더니, 이제는 일에만 집중하느라 차가워졌네.’차를 내려놓고 안시연은 곧바로 나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연정훈은 눈을 들어 안시연이 살짝 삐죽 내민 입술을 바라보며 미소를 감추었다.한참 동안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안시연은 뜨거운 차를 손에 들고 연정훈을 여러 번 흘끔거렸다.그가 아무 말도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안시연은 살짝 찡그리며 차를 들고 일어섰다. ‘더는 신경 쓰지 말고 자러 가자.’연정훈은 안시연이 조금 더 머무르거나 자신에게 잠자리에 돌아가겠냐고 물어줄 줄 알았지만, 안시연은 얼굴을 돌리며 연정훈에게 준 차마저 가져가려 했다.연정훈은 급히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몇 걸음 내딛어 안시연을 붙잡아 차를 빼앗았다.안시연은 등을 돌린 채 말투가 좋지 않았다.“일 계속해요. 방해 안 할게요.”“안 할 거야.”연정훈은 안시연을 뒤에서 껴안고 얼굴에 너그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랑 같이 자러 갈게.”안시연의 얼굴이 붉어졌다.“...마음대로 해요. 자든 말든 상관없어요.”
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신뢰와 불안이 교차했다.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연정훈을 믿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관계는 계속 불안하게 이어질 뿐이었다.한 번 더 믿어보자고 안시연은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자신에게도, 연정훈에게도 기회를 주는 것이 서로에게 더 좋은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부드럽게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 연정훈은 안시연을 품에 안고 잠들려 했다.“저 혼자 잘게요.”안시연은 몸을 조용히 뒤로 빼며 말했다.연정훈은 그녀를 강요하지 않고 조용히 손을 덮어 안시연의 손을 감싸며 깍지를 꼈다.연정훈의 따뜻한 숨결이 안시연의 목뒤를 간지럽히며 닿았고 안시연은 살짝 웃으며 머리를 앞으로 돌렸다.그러나 잠시 후, 연정훈은 다시 안시연을 따라왔다.안시연은 괴로워하며 그 순간을 떠올렸다. 욕실에서 연정훈이 자신을 간질였던 기억은 여전히 선명했다.그녀는 연정훈의 몸이 가까워지면서 연정훈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렸다.조용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연정훈의 행동을 기다렸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뒤에서 연정훈의 손길이 다가왔다.연정훈은 잠시 멈췄다. 이내 무엇인가를 가져와 다시 안시연을 끌어안았다.안시연은 뒤를 돌아보지 못한 채, 차가운 감촉이 다리에 느껴졌을 때 긴장감이 스며들었다.안시연은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연정훈은 자신을 하찮게 대하지 않았다.연정훈의 입술이 안시연의 귀를 스칠 때 잠시 애정을 담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곧 괜찮아질 거야.”그러나 안시연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연정훈은 계속 그렇게 말했다.하지만 안시연은 방법이 없었다.부끄러운 마찰감과 연정훈의 가빠진 숨소리는 안시연의 얼굴을 더욱 붉게 만들었다.안시연은 이를 꽉 물며 몸속에서 솟구치는 열기를 억누르려 애썼다.그러나 갑자기 연정훈의 손가락이 안시연의 입술을 가볍게 누르자 안시연은 작은 신음을 내며 당황했다.안시연은 손을 꼭
양씨 가문에서.깊은 밤, 양지원은 본가의 거실에 들어갔고 소파에 앉아 있는 양민아와 마주쳤다.모녀는 눈이 한 번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서로 깨닫게 되었다. “아직 안 잤어?”양민아는 여전히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양민아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엄마는 내가 맘 편히 잘 수 있을 거로 생각하세요?”양민아는 정면으로 바라보며 의문을 가득 담은 눈빛을 보냈다.양지원은 침착하게 외투를 벗고 반문했다.“왜 잘 수 없지?”“...”“연정훈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도 연정훈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잖아. 너에게는 단지 이상적인 협력 대상을 잃는 것뿐인데 그 정도로 밤을 지새워야 해?”양민아의 얼굴은 창백해졌다.양민아는 이를 악물며 눈에 눈물이 고였다.“엄마, 왜 제가 정훈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양지원은 평온한 눈빛으로 양민아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평가하는 동시에 대답이었다.양민아는 마음이 불편해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제가 정훈 씨를 얼마나 사랑하든 상관없이 엄마는 외부 사람이 아니라 제 편이 되어 주어야 해요.”여기까지 왔으니 분명히 말해야 했다.게다가 양지원은 양민아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었다.양지원은 하이힐을 벗고 일인용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기대며, 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았다.“나는 외부 사람과 함께 너를 다치게 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어.”“안시연은 엄마가 데려간 거잖아요.”“어떻게 아는데 안시연이 내가 데려간 거라고?”양지원은 반문했다.양민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나를 미행한 거야? 아니면 안시연을?”“...연 할머니가 저에게 말해줬어요.”양민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그럼 너는 오늘 밤 연정훈이 생일 잔치에 강제로 끌려갔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양민아는 말문이 막혔다.미행을 인정하든 연정훈이 강제로 끌려갔다는 것을 인정하든, 어느 쪽도 양지원이 좋아하는 행동이 아니었다.양민아는 두 손을 움켜잡고 깊은숨을 들이쉬며 양지원의
양민아의 성격 결함에 대해 양지원은 잘 알고 있었다.처음 양민아를 집으로 데려온 것은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양민아의 부모는 생전에 우연히 양석진을 구한 적이 있었다.양지원은 아이가 아직 어리니 시간을 들이면 잘 가르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현실은 양지원의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다른 것들은 괜찮았지만, 양민아의 가장 심각한 결함은 탐욕이 많다는 것이었다.양민아가 야망을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이 항상 정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양민아는 능력이 있었고 회사를 통해 경험을 쌓게 했지만, 프로젝트를 잘 해내는 것보다 권력과 이익을 차지하려고 애썼다.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팀의 이익을 해치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다. 이미 양씨 아가씨인 양민아는 양씨 가문의 지원을 받으며 어느 산업에 들어가도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었다. 시간을 들이면 큰 인물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양민아는 그럴 수 없었고 언제나 지름길을 택하기를 원했다. 양씨 아가씨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연 부인도 되고 싶었다.이번에는 직접 양홍두에게 연락을 해버렸고 이는 양지원의 한계를 건드렸다.양지원은 결심하고 말했다.“너의 몫은 네가 애쓰지 않아도 줄 것이야. 너와 혁수는 내 자식이니까. 설령 양씨 가문을 반으로 나누지 못해도 너의 몫은 있을거야.”양민아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마음이 불안해졌다.“엄마...”양지원은 계속 말했다.“한강은행이 경인에 분점을 열 예정이야. 내가 너를 추천할게. 2년 후, 네가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면 난 한강은행의 지분을 모두 너에게 넘길 거야.” 양민아는 멍해졌다.자신이 잘못 들었을까 의심했지만, 곧 현실을 깨닫고 내심 흥분했다. 동시에 아까 양지원에게 한 말을 후회하기 시작했다.“엄마, 정말이에요?”"양지원은 양민아의 눈 속에서 숨길 수 없는 탐욕이 보였고 실망감이 더욱 깊어졌다.양지원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양민아는 감동에 눈물이 글썽이며 즉시 사
오후 두 시.안시연은 베개에 엎드려 잠시 쉬고 있었다. 시야가 맑아지자 베개 위에 떨어진 남자의 머리카락 하나를 발견했다.입술을 살짝 깨문 채, 손가락에 머리카락을 감아올렸다.연정훈은 안시연보다 먼저 일어나 이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저택 안은 여전히 고요해 마치 그들 둘만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안시연은 부엌에 먹을 것이 있을지 의아했다.그러던 중,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은 이불을 몸에 단단히 감싼 채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하며 따뜻한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연정훈은 아직도 잠옷 차림이었지만,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오늘 아침엔 안경까지 쓴 연정훈은 온화하고 우아한 느낌을 더 풍겼다. 연정훈은 아침 식사를 손에 들고 문으로 들어섰고 햇살이 연정훈의 옆을 스쳐 가며 잘생긴 얼굴을 더욱 뚜렷하고 현실감 넘치게 했다.안시연은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다, 나른한 모습에 입을 열었다.“내려오지 말고 침대에서 먹어.”안시연은 잠시 의아해했다.연정훈은 항상 깔끔하고 규칙적인 사람이었기에 연정훈의 침대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막 거절하려는 순간, 연정훈은 이미 접시를 들고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그는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입가심부터 해.”안시연은 그를 한 번 올려다보고 조용히 두 손을 뻗어 컵을 받았다.물을 입에 머금고 헹구며 문득 소설 속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남자가 당신을 사랑할 때는 정말 음식을 떠먹여 주고 손톱까지 잘라주지만, 사랑하지 않을 때는 원칙과 규칙만을 내세운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 치며 말했다.“빨리 안 먹을 거야? 배 안 고파?”안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에 네가 말했던 원칙들 생각 중이야.’그러나 겉으로는 얌전하게 대답했다.“배고파.”연정훈은 그녀 뒤에 앉으며 미트 스파게티를 내밀었다.“천천히 먹어.”안시연은 그 말을 듣고 스파게티를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최대한 조심스럽게 먹으려 했지만, 두 번이나 소스
연정훈이 고의로 언급한 후에야 안시연은 어젯밤 그들의 관계가 다시 정의되었음을 떠올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좋아한다고 했다.안시연도 동의했고 연정훈이 과거의 불성실함을 용서했다.그래서 지금 그들은...연인인 걸까?아침에 그의 품에서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것이 아직 어리둥절했지만, 지금은 그 관계가 구체화되고 있었다.예전 일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였다.안시연은 눈을 떨구고 연정훈의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어느 게 나아?”연정훈이 다시 물었다.안시연은 서둘러 두 셔츠를 살펴보고 가까이 있는 것을 집어 들었다.“이게 나아?”“네...”“어떤 점이?”안시연은 침묵했다.“...”다시 셔츠를 살펴보며 차이점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런 차이도 찾지 못했다.“핏이 좀 더 좋은 것 같아요.”안시연은 진지하게 대답하며 구체적인 칭찬을 덧붙였다.그 말에 연정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안경 너머 눈동자에 미소가 번졌다.그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조용히 안시연을 지켜보았다.안시연은 그제야 셔츠 두 개를 집어 들고 연정훈을 다시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똑같은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아래로 시선을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안시연은 연정훈에게 들킨 듯 긴장하며 스스로 답답함을 느꼈다. 연정훈이 두 번만 쳐다봐도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안시연은 옷을 연정훈에게 던지고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연정훈은 그런 안시연을 서두르지 않고 물었다.“몸은 어디 불편한 데 없어?”너무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안시연은 반응이 늦었고 연정훈을 올려다보았다.막 입을 열려던 찰나 아침에 연정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시선이 마주치자 안시연은 연정훈의 눈 속에 장난기가 가득 차 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낀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두 사람 사이에 있던 아침의 일들과 그때 느꼈던 욕망이 떠오르며 안시연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그녀는 연정훈을 째려보며 말했다.말을 마치자마자 재빨리 연정훈의 품에서 벗어나
고원석, 허윤미의 결혼 20주년 파티에 초대합니다.초대받은 사람: 양석진, 양지원.초대장에 적힌 글씨를 제대로 확인한 양지원은 고개를 들어 침대까지 걸어온 양석진을 바라보았다. 링거는 어느새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두 사람 결혼한 지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어요?”“꽤 됐어.”양석진이 양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나이가 몇인지는 잊은 거야?”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고원석과 허윤미는 양지원의 친구 중에서도 몇 안 되게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였다.부부는 한 사람은 사업으로 잘 나가고 한 사람은 교단에 서 있는 일을 했다. 아이도 둘씩이나 낳고 그동안 안 좋은 소식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초대장을 내려놓은 양지원은 한참이나 침묵했다.어느새 양석진은 직접 링거 바늘을 뽑았고 어느새 양지원의 옆자리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양석진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초대장을 건네받은 양석진도 기분이 참 묘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오랜 세월 양석진은 고원석을 따로 만나지 않았는데 너무 행복한 두 사람을 보면 부러워 배가 아플까 만나지 못했다.“며칠 뒤가 식인데 바쁘지 않으면 같이 참석하자.”양석진의 말에 양지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년필의 먹이 다 떨어진 걸 보며 직접 먹을 챙겨주었다.양석진은 원래 말수가 적었고 양지원마저 조용하자 방안은 적막이 맴돌았다. 양석진은 말없이 냉장고로 걸어가 딸기를 꺼내 씻었다.양지원은 이런 양석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여 목이 메었다.초대장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결혼 20주년에도 파티를 하면 이제 환갑에는 얼마나 크게 한 상 차리려고 그런대요?”“...”“정말 너무 과시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이 겸손해야지.”양지원이 계속 투덜거렸다.양석진은 씻은 딸기를 양지원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양지원은 딸기를 먹으며 자꾸 양석진을 힐끗거렸다.“오빠는 두 사람 부러워요?”양석진이 잠시 멈칫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그냥 그래.”양지원은 입을
“오빠, 내가 다른 건 도와줄 거 없어요?”농담 섞인 양지원의 목소리가 양석진의 등 뒤로 들려오고 옅은 숨소리가 귀에 걸렸다.양석진은 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다.자신의 아픈 틈을 타 목숨을 노리는 게 틀림없었다.양석진은 심호흡하고 고개를 숙여 양지원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양지원의 손을 잡았다.양석진이 살짝 힘을 주자 양지원은 휙 하고 양석진의 앞에 서게 되었다.하이힐을 신고 있던 양지원은 휘청대다가 변기 위로 풀썩 앉아버렸다.고개를 든 양지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양석진이 그 앞을 가려 일어서지 못하게 막았다.그렇게 전세가 역전되었다.양지원은 심장이 쿵쿵 뛰었고 평온하지만 의미심장한 그 눈빛을 보며 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 항복 자세를 취했다.시선이 다시 마주치고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양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다가 살며시 양석진의 바지춤을 확인하고 얼굴을 붉혔다.양석진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이 입술에 닿고 또 온몸을 훑어내렸다.양석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당장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양지원은 후회가 되었다. 이어 두 눈을 깜빡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양석진의 시선은 다시 아래로 향하고 한 손으로 양지원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병에 걸려 창백해진 안색이었으나 대체 어디에서 솟아난 힘인지 양지원은 그 손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래서 몸의 힘을 풀고 양석진의 손 위로 손을 겹쳤다.“뭐 하는 거예요?”“네 생각에는?”양지원은 바짝 긴장되었다.“...”“네가 나한테 물었잖아. 다른 건 도울 게 없냐고.”양석진이 물끄러미 양지원을 바라봤다.‘다른 건...’양지원도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생각이 되고 얼굴은 점점 뜨거워졌다. 그래서 괜히 소리를 높이며 양석진의 복부를 슬쩍 밀었다.“양석진!”기세가 기울어질 때마다 양지원은 양석진을 성까지 붙여 불렀다.양석진은 양지
양석진은 아직 링거가 남아 있었고 양지원은 작은 테이블을 찾아 침대에 내려두고 음식을 하나하나 옮겼다.“의사가 뭐래요?”양지원은 음식을 짚어주며 물었다.“평범한 감기이지 뭐.”“그런데 이렇게 오래 가는 거예요?”“나이를 먹어서 그래.”걱정이 많아 보이는 양지원을 보며 양석진은 농담하듯 말했다.“양창수가 뭐라고 했는데?”“나 때문에 화병 난 거라고 하던데요?”양석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가능성도 있지. 내일 의사가 오면 혹시 화병 때문은 아닌지 다시 검진해 보라고 할게.”“...”양석진이 아픈 걸 보아 양지원은 말없이 양석진을 보살폈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군밤을 까기 시작했다.양석진은 음식을 딱히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었으나 그중에서 군밤을 제일 좋아했다.오래전 양석진이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던 시절, 가장 맛있던 음식이 바로 길거리 음식점 할아버지가 주던 군밤이라고 했다.“밥 먹고 까.”양석진의 말에도 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군밤을 예쁘게 까서 앞접시에 내려놓았다.“난 배불렀어요. 이따가 또 먹으면 돼요.”양지원은 이미 밥 한 그릇을 비웠기에 양석진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양지원은 배가 고프면 얼마든지 밥을 챙겨 먹을 수 있었다.방안은 다시 정적이 맴돌고 양석진이 마지막 한술까지 비우자 양지원이 직접 테이블을 치웠다.늘 보살핌을 받던 양지원이 누군가를 보살피려다 보니 어딘가 조금 어설펐다.모든 걸 마치고 양지원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런데 양석진은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창수 씨 부를까요?”“아니야. 혼자 갈 수 있어.”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석진을 부축해 침대에서 내려오게 하고 링거를 들고 화장실로 가 걸어주었다.그러나 이 모든 걸 마친 뒤에도 양지원은 화장실에서 버티고 나가지 않았다.“...”양석진은 양지원을 향해 다시 말을 반복했다.“나 혼자 할 수 있어.”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양지원은 양석진의 잠옷
양석진이 제대로 자리에 앉고 양지원이 탕약을 건넸다.양석진이 한꺼번에 탕약을 들이켜자 양지원은 저도 모르게 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양석진이 다 마시기 전에 양창수를 시켜 물을 따르게 했다.양창수는 물을 따르고 양지원의 등 뒤로 가만히 서 있었다.양지원은 물을 건네받고 또 양석진을 도와 물을 마시게 했다.양지원이 진지한 얼굴로 물을 들이켜는 걸 바라보던 양창수는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러나 마침 양석진에게 딱 들키고 말았다.양창수는 바로 고개를 돌려 마른기침했다.양석진이 물까지 모두 들이켰고 양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랍에는 사탕이 있었고 양지원은 빠르게 우유 맛으로 골라 양석진의 입에 넣었다.그러자 어느새 방안은 조용해졌다.양창수는 여전히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다.양석진은 입에 사탕을 문 채로 이렇게 말했다.“아예 의자를 찾아와 앉아서 구경하는 게 어때?”“...”‘아가씨 오니 난 이제 찬밥 신세라는 거지?’‘치사해서 안 봐.’양창수는 떠나기 전 양지원에게 저녁 식사를 할 위치를 알려주었다.양지원은 바른 자세로 앉아 대답했다.“알겠어요.”양창수가 떠나고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양석진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아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켰다.다시 눈을 뜨니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양지원이 보여 미소가 번졌다.“비행기에서 저녁 먹은 거야?”“네. 먹었어요.”양지원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로 말했다.“기분이 좋으니 기내식도 너무 맛있게 느껴져서 2인분이나 먹었는걸요.”양석진이 미소를 지었다.“메뉴가 뭐였는데?”“너무 많아서 어떻게 일일이 기억해요!”그러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꼬르륵...양지원은 빠르게 복부에 힘을 주어 소리를 멈추게 했다.고개를 돌리니 양석진이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양지원은 이를 꽉 깨물었고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정말 도움이 하나도 안되네!’양석진은 고개를 틀어 감히 양지원의 앞에서 웃지 못했다.정말 웃음을 터뜨
양지원이 안으로 들어서자 아직 링거를 손에 꽂은 채로 잠이 든 양석진이 보였다.양지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고개를 휙 돌려 양창수를 바라봤다.“...”양창수는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의원님이 아픈 건 아가씨 때문이 더 커요. 아무 말도 없이 떠나고 연락도 받지 않으니까 홧김에 약도 제대로 드시지 않았단 말이에요.”그리고 주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오후에 달인 약을 벌써 세 번이나 데웠는데, 한 모금도 드시지 않았어요.”“그냥 꾸역꾸역 먹게 할 수는 없었어요?”양창수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세상에! 아가씨, 저 위에 누운 사람이 제 친형인 줄 아세요?”“...”양창수가 놀리듯 말했다.“정말 제 친형이라고 해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아가씨가 아닌 제 말을 들을 것 같아요?”“꾸역꾸역 먹게 하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죠.”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양석진을 힐끗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약을 다시 내와요.”“네!”양창수는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양지원은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다시 빠른 걸음으로 양창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잠깐만요.”양창수가 고개를 돌리자 양지원이 물었다.“저 사람 저녁은 먹었어요?”“아직 드시지 않았어요.”양지원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오빠가 밥을 안 먹는다고 손 놓고 있었던 거예요?”양창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불가능하다는 시늉을 했다.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녁부터 준비해 줘요!”양창수는 미소를 지은 채로 서둘러 움직였다.‘무료하던 일상이 드디어 생기가 돌겠네.’양지원은 조심스레 방으로 돌아갔으나 문을 열고 보니 양석진이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그리고 양지원을 알아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지원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가까이에 앉은 양지원을 확인하고 양석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입을 여니 잔뜩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 왔어?”양지원은 대
양혁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돌아가지 않아도 난 엄마 아들이잖아요.”양지원이 침묵했다.사실 예전부터 양혁수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 좋아했었다. 그때의 양지원은 오히려 걱정이 없었으나 그 일 이후로 양혁수가 행여나 멀어질까 걱정이 많아졌다.“이제 시연이 결혼도 하고 정훈이랑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놓아줘. 나랑 다시 돌아가면 좋은 아이로 소개해 줄게.”양혁수는 할 말이 없었다.“이제 헤어질 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아픈 구석 좀 그만 찔러요.”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돌아가지 않는 건 시연이 때문이 아니에요.”“그럼 나 때문에 그래? 내가 네 친 엄마가 아니라서 이제 같이 지내고 싶지 않은 거야?”“...”양혁수는 목이 따끔거려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고개를 드니 양지원의 눈시울도 붉어진 게 보였다. 마음이 약해진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다가가 직접 눈가의 눈물을 닦아줬다.“왜 그래요? 울지 마요. 내가 엄마 싫다고 한 적도 없잖아요.”예전의 양지원은 이런 눈물로 매달리는 행위가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꾸 눈물이 많아졌다.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살짝 돌려 눈물을 닦더니 투덜대기 시작했다.“너처럼 배은망덕한 녀석이 제일 싫어.”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몇 달만 지내다가 돌아갈게요. 나더러 한강시 본부를 맡으라고 했었잖아요.”“정말?”“왜 그런 거로 거짓말하겠어요.”양지원은 바로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당분간 여기에서 푹 쉬어.”그때 양지원의 핸드폰이 진동했고 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화하러 떠났다.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손을 들어 손 틈 사이로 햇빛을 바라보고 있는 양혁수는 모든 게 원상 복귀가 되었지만 왠지 심장 한편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튿날 아침, 양시연은 멕하든을 떠났다.양석진의 건강 문제에 그들은 세운시로 향했다.양시연은 예전에 두 번 정도 세운시를 찾은 적이 있었다.
“저렇게 지독한 사람이 뭐가 좋다고 그래?”식사를 마치고 양혁수는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에 기대 양시연에게 말을 건넸다.양시연은 새로 산 캐리어를 확인하다가 그 말에 입꼬리를 올린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뭐가 지독하다고 그래? 아주 예의 바르구먼. 뭐.”양혁수가 표정을 찌푸렸다.“어휴. 말을 말자. 너처럼 눈먼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짝이지.”양시연은 미소만 지을 뿐 반박하지 않았다.양혁수가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 얘기를 꺼낸다는 건 어느 정도 받아드렸다는 걸 의미했다. 이제 앞으로 사이가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양시연이 캐리어를 내려 두고 물었다.“정말 경인에서 같이 지내지 않을 거야?”“안 돌아가. 경인이 뭐가 좋다고?”양혁수는 여전히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경인은 한강시나 여기보다도 못해.”양시연은 대답이 없었다.양시연은 경인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양시연이 좋아하고 아끼는 모든 게 경인에 있었다.하지만 양혁수에게 있어...아무 걱정 없이 지냈던 곳이 바로 한강시였다.“멕하든은 날씨도 좋고 살기 좋은 곳이야. 백호도 널 좋아하고 잘만 하면 혁수 넌 변씨 가문에 장가가서 편하게 살지도 모르겠네.”양시연의 농담에 양혁수가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말 마. 백호가 자꾸 날 잡고 놔주지 않아서 행여나 정말 날 좋아하나 무섭단 말이야.”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양혁수가 다시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밝은 불빛 아래에 서 있던 양시연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눈에 담았다.“그럼 이렇게 하는 거로 하자. 넌 우리 여사님이랑 같이 귀국해. 그리고 저 눈꼴 사나운 녀석도 빨리 데리고 가버려.”양시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걱정하지 마.”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양시연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손을 휘휘 저었다.“우린 다음에 또 보자.”“응.”그 말을 뒤로 하고 양혁수는 양지원을 찾아갔고 양시연은 캐리어를 끌고 연정훈에게로 갔
연정훈은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변여름은 눈을 깜빡이다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띵.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양시연은 기분이 퍽 좋아졌다.양지원이 미리 사람을 시켜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여름이 가져온 음식까지 큰 한 상을 차렸다.양지원은 가장자리에 여유롭게 앉아 양시연 무리를 향해 손을 저었다.연정훈과 양시연이 자리를 찾아 앉고 변여름과 양혁수는 그 맞은 편에 앉았다.양지원이 잔을 들고 말했다.“자 다들 맛있게 먹어요.”이어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연정훈은 침착하게 잔을 들었으나 양혁수는 요란하게 양시연과 변여름과 시선을 마주하고 활짝 웃으며 잔을 부딪쳤고 양지원의 잔에도 건배했다.드디어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포크와 나이프의 소리만 이따금 들려오는 이 식사 자리는 아주 화기애애했다.양지원이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이 회복되면 여기에 남을 생각이니?”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왜요? 나만 버리고 먼저 국내로 돌아갈 생각이세요?”양지원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얘 좀 봐. 내가 여기에 머문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어? 이만하면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걸?”“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엄마가 귀국하려다가 다시 돌아온 진짜 이유를 말해볼까요?”“...”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혀를 쯧 하고 찼다.“무슨 이유가 따로 있겠어? 널 사랑하고 아끼니까 다시 돌아온 거지.”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양혁수는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양혁수는 큼지막한 고기를 입에 넣다가 맞은 편의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다.그런데 연정훈이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그러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양혁수는 아예 인상을 찌푸렸다.“무슨 의미예요? 내가 정말 영영 깨어나지 않길 바랐던 것 아니죠?”연정훈이 질문을 이어갔다.“어젯밤 잠은 잘 잤어?”다른 사람들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싸움이라면 양시연도 이제 연정훈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뻔뻔한거로는 연정훈을 당해내지 못했다.결국 양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밥만 입에 넣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주변 산책길을 같이 걸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데리고 양혁수를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다. 연정훈이 양혁수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하지만 양혁수도 연정훈을 예쁘게 볼 리가 없었다.게다가 양혁수가 연정훈을 못마땅해하는 건 양시연의 문제를 떠나 태어나길 두 사람은 상극인 것 같았다.다시 집으로 돌아온 양시연은 연정훈과 대화를 하다가 누군가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걸 발견했다. 이 집에 나타날 사람은 양혁수를 제외하고 또 없었고 양혁수의 옆에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한 여자도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변여름이었다.“시연 언니.”변여름이 먼저 양시연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정훈의 손을 살짝 꼬집었다. 그건 연정훈더러 말조심하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로 걸어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양혁수는 두 사람의 등장에 잠시 침묵했다.그러다가 등받이 몸을 편히 기대며 양혁수를 비꼬기 시작했다.“뭐예요? 나랑 도망이라도 갈까 봐 지키러 왔어요?”“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두 사람은 만나기만 해도 스파크가 튀었다.변여름은 연정훈의 공격적인 태도에 아이스크림까지 내려두고 연정훈을 살폈다.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양시연이 한발 빠르게 나섰다.“이제 점심시간이 곧 되는데 여름이는 점심 먹었어?”“아직 안 먹었어요.”양시연이 서둘러 변여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그럼 그러지 말고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서 엄마한테 같이 밥 먹자고 전해.”양혁수는 입맛을 다시며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했다.“외부인이 있어서 밥이 넘어갈지 모르겠네.”연정훈도 지지 않았다.“마침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밥 먹는 게 내키지 않아서.”“...”‘다들 정말 유치하긴.’변여름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