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 앞, 나무들은 크고 정원은 탁 트여 있었다. 바람이 불자 양옆의 나뭇잎이 살랑살랑 흔들렸다.양지원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양석진을 불러 세웠다.양창수는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차에 타라고 신호를 보냈다.양석진은 차 옆에 서서 뒤돌아 양지원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야?”“시계를 두고 가셨어요.”양지원은 들고 있던 시계를 내밀었다.달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졌고 그들은 가까이 서 있었다.양석진이 손을 내밀자 양지원은 자연스럽게 시계의 잠금을 풀어 양석진의 손목에 채워주었다.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다. 양지원이 손을 놓고 양석진도 손을 내렸다.서로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들어가.”양석진이 말했다.“네.”양지원은 한 발 물러서서 양석진이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는 차에 탔고 양지원은 문을 닫아주었다. 마지막 순간, 망설이던 양지원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오빠, 조심히 가세요.”...저택 안에서는 두 사람이 사라지자 안시연과 연정훈도 조용해졌다.“우리도 집으로 돌아갈까?”연정훈이 먼저 물었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연정훈과 함께 가는 것 외에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양석진의 집에 더 머물 수는 없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이 동의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마침 돌아오는 길에 양지원과 마주쳤다.양지원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연정훈을 한 번 쳐다보며 물었다.“이제 가려고?”“네. 더 이상 신세지지 않겠습니다.”“위층에 있는 약은 챙겨가.”양지원이 무심히 말했다.안시연은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양지원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오늘 밤 양지원에게 큰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하지만 양지원은 다른 말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대신 차분하게 한마디만 던졌다.“혁수가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으니 며칠 동안 혁수를 자극하지 마. 다 나으면 네가 혁수에게 아무런 기회도 없다는 걸 알려줘.” 안시연은 침묵했다.“...”안시연은 잠
안방의 욕실은 매우 넓었고 다섯 여섯 명은 거뜬히 들어갈 만한 큰 욕조가 있었다. 욕실 한쪽에는 사면이 유리로 둘러싸인 샤워실이 자리하고 있었다.안시연은 평소 이 넓은 공간을 잘 사용하지 않았고 늘 작은 샤워실만 이용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몸이 지쳐 욕조에 몸을 담그기로 했다.그때 연정훈이 당당하게 욕실로 들어와 자신의 물건을 벗어두고 안시연의 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벨트의 금속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들리자 안시연은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다행히 연정훈은 샤워실로 들어갔다.안시연은 긴 한숨을 내쉬며 겨우 안도의 숨을 돌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정훈이 다시 샤워실에서 나와 욕조로 들어왔다.?안시연은 당황했지만 미처 반대편으로 몸을 옮기기도 전에 연정훈은 벌써 안시연 곁으로 다가와 팔을 뻗어 안시연을 감싸 안았다.연정훈은 한쪽 다리를 굽히고 안시연은 다리를 벌려 연정훈의 다리 위에 앉게 했다. 연정훈은 안시연을 안고 마치 안시연의 등받이가 되어 주는 듯했다.이 자세는 안시연에게 낯설고 부끄러웠다. 안시연은 몸을 움츠리며 욕조 밖으로 나가려 했다.연정훈은 단호하게 안시연을 제지하며 팔을 거두지 않았다.연정훈은 옆에 있던 바디워시를 짜서 안시연의 등에 부드럽게 발라주기 시작했다.“몸이 조금 나아졌다고 이렇게 목욕하다니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여기서 기절이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괜찮아졌어요.”“강한 척하지 마. 정말 기절이라도 했으면, 한밤중에 의사를 불러야 했을지도 몰라.”“...”연정훈은 안시연의 등을 씻어주며 능숙하고도 부드러운 손길로 안시연을 돌보았다.안시연의 몸은 이미 연정훈의 손길에 익숙해져 있었고 연정훈에게 쉽게 이끌렸다.따뜻한 물이 안시연의 몸을 감싸며 전율이 일었다.안시연의 허리는 힘이 풀리고 안시연도 모르게 연정훈의 무릎 위에 엎드렸다. 안시연의 분홍빛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끝을 무의식적으로 핥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미세한 몸짓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안시
안시연은 침대 머리맡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일부러 기다리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괜히 연정훈에게 화가 나서 혼자 눕기로 했다.멀리서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서서히 들려왔다.안시연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긴 한숨을 내쉬고 결국 일어났다.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가 아래층으로 가서 차 두 잔을 따랐다. 연정훈의 서재 앞을 지나칠 때 안시연은 발걸음을 멈추었다.똑똑똑.문을 두드렸다.문이 자동으로 열렸다.연정훈의 서재 앞을 지나칠 때 안시연은 발걸음을 멈추었다.그가 정말로 일하는 모습을 보니 안시연의 마음속 불편함이 조금 줄어들었다. “아직 안 자?”연정훈이 안시연에게 물었다.“목말라서 아래층에 내려가 차를 따랐어요. 영훈 씨 것도 한 잔 가져왔어요.”“고마워.”연정훈은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그곳에 두면 돼.”안시연은 어이없었다.“...”‘정훈 씨는 이중인격인가? 조금 전까지 계속 집착하더니, 이제는 일에만 집중하느라 차가워졌네.’차를 내려놓고 안시연은 곧바로 나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연정훈은 눈을 들어 안시연이 살짝 삐죽 내민 입술을 바라보며 미소를 감추었다.한참 동안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안시연은 뜨거운 차를 손에 들고 연정훈을 여러 번 흘끔거렸다.그가 아무 말도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안시연은 살짝 찡그리며 차를 들고 일어섰다. ‘더는 신경 쓰지 말고 자러 가자.’연정훈은 안시연이 조금 더 머무르거나 자신에게 잠자리에 돌아가겠냐고 물어줄 줄 알았지만, 안시연은 얼굴을 돌리며 연정훈에게 준 차마저 가져가려 했다.연정훈은 급히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몇 걸음 내딛어 안시연을 붙잡아 차를 빼앗았다.안시연은 등을 돌린 채 말투가 좋지 않았다.“일 계속해요. 방해 안 할게요.”“안 할 거야.”연정훈은 안시연을 뒤에서 껴안고 얼굴에 너그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랑 같이 자러 갈게.”안시연의 얼굴이 붉어졌다.“...마음대로 해요. 자든 말든 상관없어요.”
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신뢰와 불안이 교차했다.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연정훈을 믿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관계는 계속 불안하게 이어질 뿐이었다.한 번 더 믿어보자고 안시연은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자신에게도, 연정훈에게도 기회를 주는 것이 서로에게 더 좋은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부드럽게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 연정훈은 안시연을 품에 안고 잠들려 했다.“저 혼자 잘게요.”안시연은 몸을 조용히 뒤로 빼며 말했다.연정훈은 그녀를 강요하지 않고 조용히 손을 덮어 안시연의 손을 감싸며 깍지를 꼈다.연정훈의 따뜻한 숨결이 안시연의 목뒤를 간지럽히며 닿았고 안시연은 살짝 웃으며 머리를 앞으로 돌렸다.그러나 잠시 후, 연정훈은 다시 안시연을 따라왔다.안시연은 괴로워하며 그 순간을 떠올렸다. 욕실에서 연정훈이 자신을 간질였던 기억은 여전히 선명했다.그녀는 연정훈의 몸이 가까워지면서 연정훈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렸다.조용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연정훈의 행동을 기다렸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뒤에서 연정훈의 손길이 다가왔다.연정훈은 잠시 멈췄다. 이내 무엇인가를 가져와 다시 안시연을 끌어안았다.안시연은 뒤를 돌아보지 못한 채, 차가운 감촉이 다리에 느껴졌을 때 긴장감이 스며들었다.안시연은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연정훈은 자신을 하찮게 대하지 않았다.연정훈의 입술이 안시연의 귀를 스칠 때 잠시 애정을 담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곧 괜찮아질 거야.”그러나 안시연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연정훈은 계속 그렇게 말했다.하지만 안시연은 방법이 없었다.부끄러운 마찰감과 연정훈의 가빠진 숨소리는 안시연의 얼굴을 더욱 붉게 만들었다.안시연은 이를 꽉 물며 몸속에서 솟구치는 열기를 억누르려 애썼다.그러나 갑자기 연정훈의 손가락이 안시연의 입술을 가볍게 누르자 안시연은 작은 신음을 내며 당황했다.안시연은 손을 꼭
양씨 가문에서.깊은 밤, 양지원은 본가의 거실에 들어갔고 소파에 앉아 있는 양민아와 마주쳤다.모녀는 눈이 한 번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서로 깨닫게 되었다. “아직 안 잤어?”양민아는 여전히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양민아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엄마는 내가 맘 편히 잘 수 있을 거로 생각하세요?”양민아는 정면으로 바라보며 의문을 가득 담은 눈빛을 보냈다.양지원은 침착하게 외투를 벗고 반문했다.“왜 잘 수 없지?”“...”“연정훈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도 연정훈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잖아. 너에게는 단지 이상적인 협력 대상을 잃는 것뿐인데 그 정도로 밤을 지새워야 해?”양민아의 얼굴은 창백해졌다.양민아는 이를 악물며 눈에 눈물이 고였다.“엄마, 왜 제가 정훈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양지원은 평온한 눈빛으로 양민아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평가하는 동시에 대답이었다.양민아는 마음이 불편해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제가 정훈 씨를 얼마나 사랑하든 상관없이 엄마는 외부 사람이 아니라 제 편이 되어 주어야 해요.”여기까지 왔으니 분명히 말해야 했다.게다가 양지원은 양민아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었다.양지원은 하이힐을 벗고 일인용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기대며, 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았다.“나는 외부 사람과 함께 너를 다치게 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어.”“안시연은 엄마가 데려간 거잖아요.”“어떻게 아는데 안시연이 내가 데려간 거라고?”양지원은 반문했다.양민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나를 미행한 거야? 아니면 안시연을?”“...연 할머니가 저에게 말해줬어요.”양민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그럼 너는 오늘 밤 연정훈이 생일 잔치에 강제로 끌려갔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양민아는 말문이 막혔다.미행을 인정하든 연정훈이 강제로 끌려갔다는 것을 인정하든, 어느 쪽도 양지원이 좋아하는 행동이 아니었다.양민아는 두 손을 움켜잡고 깊은숨을 들이쉬며 양지원의
양민아의 성격 결함에 대해 양지원은 잘 알고 있었다.처음 양민아를 집으로 데려온 것은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양민아의 부모는 생전에 우연히 양석진을 구한 적이 있었다.양지원은 아이가 아직 어리니 시간을 들이면 잘 가르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현실은 양지원의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다른 것들은 괜찮았지만, 양민아의 가장 심각한 결함은 탐욕이 많다는 것이었다.양민아가 야망을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이 항상 정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양민아는 능력이 있었고 회사를 통해 경험을 쌓게 했지만, 프로젝트를 잘 해내는 것보다 권력과 이익을 차지하려고 애썼다.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팀의 이익을 해치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다. 이미 양씨 아가씨인 양민아는 양씨 가문의 지원을 받으며 어느 산업에 들어가도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었다. 시간을 들이면 큰 인물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양민아는 그럴 수 없었고 언제나 지름길을 택하기를 원했다. 양씨 아가씨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연 부인도 되고 싶었다.이번에는 직접 양홍두에게 연락을 해버렸고 이는 양지원의 한계를 건드렸다.양지원은 결심하고 말했다.“너의 몫은 네가 애쓰지 않아도 줄 것이야. 너와 혁수는 내 자식이니까. 설령 양씨 가문을 반으로 나누지 못해도 너의 몫은 있을거야.”양민아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마음이 불안해졌다.“엄마...”양지원은 계속 말했다.“한강은행이 경인에 분점을 열 예정이야. 내가 너를 추천할게. 2년 후, 네가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면 난 한강은행의 지분을 모두 너에게 넘길 거야.” 양민아는 멍해졌다.자신이 잘못 들었을까 의심했지만, 곧 현실을 깨닫고 내심 흥분했다. 동시에 아까 양지원에게 한 말을 후회하기 시작했다.“엄마, 정말이에요?”"양지원은 양민아의 눈 속에서 숨길 수 없는 탐욕이 보였고 실망감이 더욱 깊어졌다.양지원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양민아는 감동에 눈물이 글썽이며 즉시 사
오후 두 시.안시연은 베개에 엎드려 잠시 쉬고 있었다. 시야가 맑아지자 베개 위에 떨어진 남자의 머리카락 하나를 발견했다.입술을 살짝 깨문 채, 손가락에 머리카락을 감아올렸다.연정훈은 안시연보다 먼저 일어나 이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저택 안은 여전히 고요해 마치 그들 둘만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안시연은 부엌에 먹을 것이 있을지 의아했다.그러던 중,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은 이불을 몸에 단단히 감싼 채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하며 따뜻한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연정훈은 아직도 잠옷 차림이었지만,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오늘 아침엔 안경까지 쓴 연정훈은 온화하고 우아한 느낌을 더 풍겼다. 연정훈은 아침 식사를 손에 들고 문으로 들어섰고 햇살이 연정훈의 옆을 스쳐 가며 잘생긴 얼굴을 더욱 뚜렷하고 현실감 넘치게 했다.안시연은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다, 나른한 모습에 입을 열었다.“내려오지 말고 침대에서 먹어.”안시연은 잠시 의아해했다.연정훈은 항상 깔끔하고 규칙적인 사람이었기에 연정훈의 침대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막 거절하려는 순간, 연정훈은 이미 접시를 들고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그는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입가심부터 해.”안시연은 그를 한 번 올려다보고 조용히 두 손을 뻗어 컵을 받았다.물을 입에 머금고 헹구며 문득 소설 속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남자가 당신을 사랑할 때는 정말 음식을 떠먹여 주고 손톱까지 잘라주지만, 사랑하지 않을 때는 원칙과 규칙만을 내세운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 치며 말했다.“빨리 안 먹을 거야? 배 안 고파?”안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에 네가 말했던 원칙들 생각 중이야.’그러나 겉으로는 얌전하게 대답했다.“배고파.”연정훈은 그녀 뒤에 앉으며 미트 스파게티를 내밀었다.“천천히 먹어.”안시연은 그 말을 듣고 스파게티를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최대한 조심스럽게 먹으려 했지만, 두 번이나 소스
연정훈이 고의로 언급한 후에야 안시연은 어젯밤 그들의 관계가 다시 정의되었음을 떠올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좋아한다고 했다.안시연도 동의했고 연정훈이 과거의 불성실함을 용서했다.그래서 지금 그들은...연인인 걸까?아침에 그의 품에서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것이 아직 어리둥절했지만, 지금은 그 관계가 구체화되고 있었다.예전 일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였다.안시연은 눈을 떨구고 연정훈의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어느 게 나아?”연정훈이 다시 물었다.안시연은 서둘러 두 셔츠를 살펴보고 가까이 있는 것을 집어 들었다.“이게 나아?”“네...”“어떤 점이?”안시연은 침묵했다.“...”다시 셔츠를 살펴보며 차이점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런 차이도 찾지 못했다.“핏이 좀 더 좋은 것 같아요.”안시연은 진지하게 대답하며 구체적인 칭찬을 덧붙였다.그 말에 연정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안경 너머 눈동자에 미소가 번졌다.그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조용히 안시연을 지켜보았다.안시연은 그제야 셔츠 두 개를 집어 들고 연정훈을 다시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똑같은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아래로 시선을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안시연은 연정훈에게 들킨 듯 긴장하며 스스로 답답함을 느꼈다. 연정훈이 두 번만 쳐다봐도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안시연은 옷을 연정훈에게 던지고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연정훈은 그런 안시연을 서두르지 않고 물었다.“몸은 어디 불편한 데 없어?”너무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안시연은 반응이 늦었고 연정훈을 올려다보았다.막 입을 열려던 찰나 아침에 연정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시선이 마주치자 안시연은 연정훈의 눈 속에 장난기가 가득 차 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낀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두 사람 사이에 있던 아침의 일들과 그때 느꼈던 욕망이 떠오르며 안시연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그녀는 연정훈을 째려보며 말했다.말을 마치자마자 재빨리 연정훈의 품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
이튿날 아침, 비바람이 멈추고 햇살이 비춰왔다.악몽에서 벗어난 양혁수는 그제야 어제 충동으로 벌인 일이 떠올랐고 왠지 이제는 후회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반항하는 걸 포기한 듯한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이 떠보듯 말을 걸었고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난 걸 확인한 뒤에는 다시 악동으로 변했다.변여름은 아침 댓바람부터 서양식 브런치를 먹겠다고 난리였다.변여름에게 오냐오냐 귀여움을 받던 양혁수는 오랜만에 무언가를 부탁하는 변여름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그동안 변여름의 차려준 음식을 실컷 먹었으니 자신도 한 끼 정도는 기꺼이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서양식 브런치야 식재료를 구우면 그만이었다.그렇게 첫째 날 아침을 무사히 마치고, 이튿날 아침이 되자 변여름은 어제 먹은 브런치가 너무 맛있었다고 또 졸랐다.‘그래, 뭐. 맛있다는 데 해줘야지.’그러나 세 번째 아침엔 변여름이 스파게티가 먹고 싶다고 난도를 높여 버렸다.‘음... 그것도 뭐 얼마든지 할 수 있지.’점심이 되자 변여름은 스테이크와 소갈비찜을 먹고 싶다고 졸랐다.양혁수는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말없이 스테이크를 구웠고 그 옆에 여유롭게 풍경을 바라보는 변여름을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어쭈, 지금 복수하는 건가?’‘평생 밥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나한테만 요리해 주겠다더니. 순 거짓말쟁이야.’‘어쩌면 밥은 물론, 언젠간 뜨개질도 해달라고 할지도 몰라.’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자리에서 폴짝 뛰어내려 양혁수의 등 뒤를 꼭 껴안았다.양혁수는 제 허리를 감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한 소리 하려 했지만, 스테이크 기름이 튀어나오려 하자 먼저 변여름의 손을 제 손으로 덮어버렸다.변여름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불이 너무 세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잘하면 네가 하지 그래?”그러자 변여름은 쏙 빠져나와 등 뒤로 숨었고 양혁수의 등에 얼굴을 비볐다.“싫어요.”“난 오빠가 해준 요리가 먹고 싶단 말이에요. 맛이 엉망이어도
잠을 잘 때에는 변여름도 얌전한 편이었다. 양혁수에게 찰싹 들러붙긴 해도 기껏해야 팔이나 안고 잘 뿐이었다.가끔 양혁수가 밀어내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며시 팔베개할 때도 있었다.변여름은 양혁수에게서 향기로운 향이 난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변여름에게서 끈적한 허니 향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향기에 본인도 취해 버려 정신이 이상하게 된 것 같았다.낮에 하염없이 에든베타를 돌아다녔던 건 양시연에 대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양혁수는 이렇게 외로울 때면 혼자 잠드는 게 너무 싫었고, 오늘 밤 변여름이 옆에 있어 너무 다행이라 느껴졌다.새벽에 잠시 잠에서 깼을 때 제 팔을 베고 자는 변여름이 보였고, 어깨가 너무 시큰거렸지만, 양혁수는 손목을 돌려 살짝 스트레칭만 할 뿐 팔을 빼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불을 당겨 변여름에게 잘 덮어줬다.그때, 창밖에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변여름이 깜짝 놀라 깨버렸다.변여름은 무의식적으로 양혁수의 품을 파고들었고 양혁수는 자연스레 등을 토닥였다.“괜찮아. 그냥 바람일 뿐이야.”변여름은 용기를 내어 창밖을 바라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안심할 수 있었다.그러다가 눈을 비비며 이미 잠에서 깬 양혁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오빠 빨리 자요...”양혁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귓가에는 색색거리는 호흡 소리가 들려오고 창밖에는 거센 바람 소리에 이어 굵은 빗방울이 창가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바람에 커튼이 흩날리고 나무 그림자까지 방안에 비춰오자 양혁수는 심기가 거슬렸다.그래서 침대 헤드등을 끄고 눈을 감았다.어둠 속에서 갑자기 양혁수는 음침한 무덤 앞에 섰다.짙은 안개에 얼굴을 가린 한 여자가 몇 번이고 양혁수의 이름을 불렀다.“혁수야, 혁수야!”“내가 네 엄마잖아. 혁수야!”피를 쏟으며 쓰러지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양혁수는 온통 피로 뒤덮인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이게 원망인지 슬픔인지 공포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오빠?”“혁수 오빠!”그때, 변여름
두 사람이 소파 위로 함께 쓰러지듯 누울 때도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양혁수의 무게가 실리자, 변여름은 작게 신음을 뱉었다.그 소리에 양혁수는 잠시 멈칫했고 변여름은 목을 꽉 껴안고 다시 키스를 이어갔다.양혁수는 키스 도중에 눈을 떴고 마침 눈을 깜빡거리는 변여름과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은 끈적하게 이어졌고 양혁수는 점점 변여름에게 이끌렸다.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그러니 지금 양혁수의 행동을 별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너무 추운 에든베타에서 변여름의 품 안이 너무 따뜻해 떨어질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변여름을 품에 안고 있으면 양혁수는 마음이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양혁수는 잠시 이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변여름의 호흡에 맞췄다.사랑에 서툰 부분에 있어 두 사람은 닮은 점이 있었다.변여름은 용기와 재능이 있었지만, 그동안 양혁수가 협조하지 않은 탓에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그때 윗입술을 스치더니 입술 끝이 가볍게 빨렸다. 짜릿한 전율이 머리끝까지 번지자 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다리도 무의식적으로 들렸지만 양혁수의 다리에 눌려 다시 꼼짝 못 하고 그의 품 안에 갇혔다.그렇게 알 수 없는 열기가 어느새 온몸으로 번져갔다.변여름은 양혁수를 꼭 껴안고 싶다가도, 온몸이 힘이 빠져 그저 그의 품으로 가만히 안겨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어 양혁수가 몸을 낮추고, 변여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더 깊고 부드럽게 키스를 이어갔다.호흡마저 뺏겨버렸지만 변여름은 점점 긴장을 풀 수 있었고 무조건적으로 양혁수를 믿었다.서툴던 키스는 점점 익숙하고 완벽해졌다.양혁수는 처음으로 키스만으로도 이렇게 황홀한 기분이 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래서 자세를 바꿔 더 깊게 변여름에게 다가갔고 쿵쿵거리는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또다시 호흡을 맞췄다.처음엔 행동이 생각보다 앞섰다. 그러나 이젠 상황 판단이 되었어도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양혁수는 그렇게 밀어내던 변여름에게 키스를 쏟아붓다
처음 하는 뽀뽀도 아니었고 양혁수도 이젠 깜짝 놀라지는 않았다. 단지 헛웃음을 내뱉고 시선으로 무언가의 경고를 날릴 뿐이었다.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오빠, 정말 향기로운 냄새가 났단 말이에요.”“...”‘그게 중요해?’양혁수가 혼을 내려고 자세를 고쳐 앉자, 변여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요. 제가 정신이 나갔나 봐요. 변태라는 거 인정할게요.”그러자 양혁수는 화를 내기는커녕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꼬맹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글쎄요.”그리고 소파에 편히 기대앉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도 오빠 앞에서만 이래요. 정말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오빠만 보면 달라붙고 싶은 걸 어떡해요.”“그러는 오빤, 내가 다가오면 어떤 기분이에요?”막아서는 사람이 없자 변여름은 점점 겁 없이 질문을 이어갔고 양혁수는 며칠 전 밤이 떠올라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별생각 없어.”“정말요?”“그래.”퉁명스러워 보이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피식 웃더니 제 스마트 워치를 벗어 양혁수의 손목에 채우려 했다.“뭐 하는 거야?”“뽀뽀 한 번만 더 하고 오빠 심박수 체크해보면 안 돼요?”양혁수는 바로 손을 빼냈으나 변여름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체구로 보았을 때 변여름은 당연히 양혁수의 상대가 아니었고, 계속 매달리는 변여름에 양혁수는 양손을 꽉 잡아 포획해 버렸다.“자꾸 까불래?”손목이 잡혔지만, 변여름은 손가락을 살살 움직여 양혁수를 간지럽혔다.양혁수는 새우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고 변여름은 웃음이 터졌다. 양혁수가 자신을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변여름은 점점 더 과하게 움직여 양혁수의 몸을 가로 탔다.참다못한 양혁수는 아예 변여름의 손을 잡아 벽으로 가두었다.“그만해.”양혁수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간지러움에 숨이 찬 것도 있었지만 자꾸 기어오르는 변여름에 속수무책이라 그런 것도 있는 것
양혁수는 지금껏 변여름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변여름은 얼마든지 자신의 제가 했던 말을 뒤엎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럼, 네 말대로면 시연이도 현실이 상상보다 더 좋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그러자 변여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오빠, 계속 그러면 나 정말 질투할지도 몰라요.”“술 마셔 자제력이 떨어진 오빠를 질투에 눈먼 내가 뭐 어떻게 하려면 어쩌려고 그래요?”“...”변여름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느새 우울함이 반으로 줄었다.그리고 변여름이 뜨개질 거리를 찾아 다시 양혁수의 옆자리에 얌전히 앉았다.하얀 피부는 투명할 정도였고 가까운 거리에 양혁수는 변여름의 긴 속눈썹까지 보였다.“부모님이 연락이 온 거야?”양혁수의 질문에 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빨리 집으로 돌아오라 재촉하진 않으셔?”“아니요. 그것보다 오빠 어디까지 꼬셨는지 궁금해하시던데요.”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가족들한테 날 좋아하는 사실은 언제 밝힌 거야?”“성인이 되는 날 에요.”그리고 변여름을 한 마디 덧붙였다.“오빠네 나라 법에 따른 성인이던 해에요.”“...”‘뜬금없는 곳에서 꼼꼼하긴.’“몇 해 동안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더니 그동안 부모님 사업 돕고 있었어?”변여름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5년 동안 아빠를 위해 일하면 앞으로 가문 사업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을 받았거든요.”“그럼 넌 앞으로 뭘 하고 싶은데?”“의학이요.”변여름은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양혁수는 나쁘지 않은 계획이라 생각했다. 변여름처럼 똑똑한 사람이 의사가 된다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그때, 변여름이 스웨터를 내려두고 말했다.“낮에 교수님이 연락을 하셔서 언제 한강시에 돌아올지 물었어요.”사실, 양혁수는 예전에 변여름한테 지도교수한테 연락하겠다고 겁을 줬지만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변여름이 그걸 은근히 떠보는 말투로 흘리자 양혁수는 못 들은 척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콩깍지?양혁수의 추억 속 에든베타는 분명히 따듯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밖을 돌아다니며 느낀 건 에든베타는 사실 흐린 날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술잔을 내려놓은 양혁수가 변여름에게 물었다.“빙 둘러 말하더니 지금 나한테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은 사실 내가 꾸며낸 허상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양혁수는 무표정이었고 기쁨도 슬픔도 읽히지 않았다.이에 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다.“추억은 아름다운 거죠. 근데 그게 왜 허상이겠어요?”“다른 사람 눈에 별로 일 순 있어도 오빠한테 아름다운 거면 아름다운 추억인 거예요.”양혁수는 말없이 변여름을 바라봤고 변여름은 더 차분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난 한 여자의 가장 예쁜 순간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마음속에 제일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건 원치 않아요.”“내가 에든베타의 쓸쓸함을 봤다고 해서 과거의 그 사람이 별로가 되어버리는 건 아니야.”“당연하죠.”변여름이 미소를 지었다.“요즘 시연 언니 만나봤어요?”“뭐, 나이가 든 시연이가 과거와 달라졌을 것 같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건 있어요. 시연 언니는 오빠와 4분의 1이 넘는 인생을 같이했고 오빠의 인생에서도 시연 언니는 이미 중요한 사람이 되었겠죠. 그러니 달라진 외모는 오빠한테 큰 타격이 없을 거예요.”양혁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 마신 컵을 돌려줬다.“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야?”“오빠가 과거를 직시하는 거요.”변여름은 옆에 내려둔 인형을 안아 들고 양혁수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시연 언니가 과거에 예뻤고 지금도 예쁘다고 하지만, 오빠는 아직도 시연 언니만 보면 마음이 불편하잖아요.”양혁수의 표정이 굳어갔다.“그게 왜 그렇겠어요.”양혁수가 대답이 없어도 변여름이 말을 이었다.“과거의 시연 언니가 50점이었다면 지금 더 완벽해진 시연 언니는 거의 80점에 달하겠죠. 하지만 오빠 마음속에 심어진 시연 언니는 추억 속에서 점점 미화가 되어 100점이 아니라 만
여섯 시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집으로 돌아왔다.주방에 있던 변여름은 인기척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그래서 주방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양혁수를 불렀다.외투를 벗던 양혁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이것도 변여름이 예상했던 시나리오이긴 했으나 이런 양혁수를 바라보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오빠, 빨리 와서 앉아요. 밥 다 됐어요.”양혁수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식탁 앞으로 걸어왔다.변여름은 부지런히 반찬 여섯 가지와 국 하나를 완성했다.“우리 두 사람뿐인데 이렇게 많이 할 필요없어.”“많지 않아요.”변여름이 양혁수의 밥 위로 반찬을 올려주며 말했다.“하루 종일 돌아다녔으니 기운이 빠졌을 거예요. 오빠는 양식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밖에서 뭘 사 먹지도 않았을 거잖아요.”그 말에 양혁수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누가 그래? 내가 양식 별로 안 좋아한다고?”“오빠잖아요.”변여름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전에 우리 오빠한테 여기 음식이 입에 맞지 않다고 엄청나게 투덜거렸으면서.”“뭐. 그렇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야.”양혁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갓 튀긴 돈가스를 한 점 입에 넣었다.집 안에는 향기로운 음식 향이 가득했고 두 사람의 도란도란 얘기 소리와 이따금 들리는 웃음소리가 집안을 따뜻하게 데웠다.양혁수는 배가 아주 고팠던 건지 밥을 평소보다도 많이 비웠다.낮에 밖에서 겪었던 쓸쓸함은 어느새 변여름의 온기에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샤워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변여름이 술잔을 세팅하고 있었다.“네가 산 거야?”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오후에 사람을 시켜서 가지고 오라고 했어요.”양혁수는 변여름이 만들어준 칵테일도 마셔봤기에 변여름의 솜씨를 인정했다.“네 마음대로 한잔 만들어줘.”변여름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양혁수는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화려한 손놀림의 변여름을 바라봤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오
얼떨결에 기차에 탄 양혁수는 왠지 뾰로통했다.이건 양혁수의 추억 여행이었으나 변여름이 양혁수보다도 에든베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기분이 들었으며 본인과 양시연 사이의 이야기도 속속히 꿰고 있는 것 같았다.역에 도착하자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양혁수는 추위에 절로 몸이 움츠러지고 옷매무새를 다시 여몄다.그러나 변여름은 그 옆에서 한껏 과장하여 감탄하고 있었다.“여기 너무 예쁜데요?”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에든베타의 눈밭은 양혁수가 다녔던 여행지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었다.그런데 변여름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그래서 오빠가 이곳에서 시연 언니를 좋아하게 됐나 봐요.”“나였어도 시연 언니한테 반했겠다.”“...”방금까지 센치하던 기분이 또 와장창 깨져버렸다.오늘 일정에도 마중을 온 사람이 있었고 변여름은 아예 지낼 곳을 양혁수와 양시연이 함께 지냈던 마을로 골랐다.“거긴 여행객이 많아서 남은 방이 많지 않을 거야.”양혁수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은 패드로 남은 방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요. 남은 방이 없긴 하지만 오빠가 그곳을 많이 그리워할 테니 기사더러 빙 둘러대려고 하려고요. 오빠 추억 여행 좀 하게요.”“...”양혁수가 싸늘한 표정으로 변여름을 바라봤다. 이젠 변여름이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는 게 확신이 들었다.용산 거리를 지나쳐 눈이 뒤덮인 에든베타 건축물을 보고 있자니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이 분위기에 알맞은 노래를 틀어 양혁수가 한껏 추억에 잠길 수 있도록 했다.그러나 익숙한 풍경을 보며 양혁수가 든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아, 추워 죽겠네.’그때, 양혁수와 양시연이 함께 지냈던 집을 지나치게 되었고 주변엔 온통 눈이 쌓여 있었으며 여행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양혁수는 눈을 반짝이며 그 풍경을 눈에 담으려 애썼고 왠지 이 집이 몇 년 전보다 많이 낡았고 정원도 생각보다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기억 속의 집은 늘 해가 잘 들고 넓은 곳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