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건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안시연도 덩달아 긴장한 듯 몸을 움츠렸고 결국 부승희가 먼저 정적을 깨면서 물었다.“왜 그러세요? 임신했어요?”그 순간, 안시연은 연정훈과 허공에서 시선을 마주쳤고 지난 한 달 동안 밤낮없이 사랑을 나눴던 것이 떠올라 머릿속이 하얘졌다.‘정훈 씨가 매번 피임을 한 걸로 기억하는데, 설마...’그녀는 오늘 밤 그의 과감했던 행동 때문이었는지 그동안의 위험했던 순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면서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그러나 연정훈은 괜한 걱정을 하는 안시연을 보면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오늘 밤을 제외하고는 위험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저렇게 걱정이 가득한 표정인 거야!’율건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뜸을 들였고 곧이어 이승우를 포함한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이때 참다못한 이승우가 율건을 재촉하기 시작했다.“율 박사님, 빨리 말해봐요!”율건은 가볍게 기침을 내뱉고는 천천히 말했다.“아가씨의 맥박이...”안시연은 긴장한 나머지 두 손을 꽉 쥐었다.“매우 건강합니다.”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시연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연정훈은 화를 참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으며, 이승우는 대뜸 언성을 높였다.“그럼, 왜 한숨을 내쉰 거죠?”“사실은 아까 승희 아가씨가 했던 말이 일리가 있는 말이거든요.”“그게 무슨 뜻이죠?”“시연 아가씨의 맥박을 체크해보니 확실히 보양을 많이 한 것 같네요.”아직도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안시연은 그의 한마디에 다급하게 손을 뺐다.“율 박사님, 전문가가 맞으세요?”이에 이승우가 그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왜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거죠? 우리 율 박사가 20년 동안 남녀 사이만 연구했다고요.”그러나 안시연은 아직 20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율건이 20년 동안 그 방면을 연구했다는 이승우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에이, 거짓말이요?”이때 부승희가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정훈 오빠가 시연 씨의 기를 보충해 주려다가 기절한 거
연정훈은 안시연이 율건과 대화하는 동안 계속 그녀를 주시했다.그녀는 계속 손을 등 뒤에 놓고 부자연스럽게 입술을 깨물면서 눈꺼풀까지 떨었다.연정훈은 율건이 안시연에게 친절함을 넘어 상냥한 태도를 보이자, 단번에 그가 그녀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이때, 심상치 않음을 느낀 부승원이 윤건을 잡아끌었고, 안시연은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약국에서 피임약을 배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사람들이 다 가자, 방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연정훈은 자기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는 안시연을 보면서 온순했던 첫 만남이 떠올라 화가 났지만, 다 큰 남자가 여자를 혼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다른 사람을 만나도록 내쫓는 건 더욱 말이 안 되었기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얼마 뒤, 현관문 벨 소리에 연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고 부승희가 주문한 음식과 의문의 약봉지를 보고는 곧장 문을 닫고 방 쪽을 응시했다.한편, 안시연은 기진맥진해서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잠이 들 뻔하다가 갑자기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곧이어 연정훈은 약을 그녀의 손 옆에 버리고 나갔다.그의 행동에 상처를 받은 안시연이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방 안에 있던 주전자에 물을 끓이면서 약봉지를 뜯었다.연정훈도 자기가 저지른 일에 그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현실에 거실을 나온 이후로 기분이 좋지 않았고 약봉지를 뜯는 소리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그녀는 약을 다 먹은 후, 오늘 밤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리다가 방을 정리하고 문 앞에 서서 연정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빨리 음식 먹어요. 당신이 또 쓰러지면 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연정훈이 아무 대답이 없자, 안시연은 또다시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다시는 연정훈 때문에 울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그녀였지만, 조용한 방 안에 누워 조금 전 일들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얼마나 지났을까, 연정훈이 방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뒤에서 감쌌고, 그녀는 눈물을
연정훈은 자기한테서 받은 위자료로 혼수 준비를 하겠다는 안시연의 한마디에 화가 치밀어 올라 밤잠을 설쳤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그는 텅 빈 침실에 앉아 있다가 탁자 위에 놓인 아침밥을 보고 내심 기뻐했지만, 어제 먹다 남은 음식을 데운 것임에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이때, 방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나더니 진수빈이 들어왔다.“진 비서가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지?”“아가씨께서 비밀번호를 알려주면서 대표님을 뵈러 올라가라고 하셨어요.”연정훈의 안색이 급격히 수그러들었다.“그녀가 진 비서한테 올라가라고 했다고?”“네! 조금 전 우연히 아가씨를 만났는데 출근 준비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대표님을 걱정하시더라고요.”진수빈은 계속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꺼냈다.“대표님, 오늘...”“금방 준비하고 내려갈 테니까 아래에서 기다려.”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면서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오늘 하루는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시연 아가씨도 점심에 돌아와서 밥을 차려주겠다고 하셨거든요.”연정훈은 어젯밤 자기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가 손수 점심을 차려주러 오겠다고 했다니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진수빈은 그의 마음이 조금 움직인 것을 눈치채고는 한마디 덧붙였다.“대표님께서 검토하실 자료들은 제가 서재에 놓을 테니 괜찮아지시면 보세요.”연정훈은 진수빈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고, 그녀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정인 과학기술.아침 일찍 도착한 양혁수는 안시연이 오기만을 기다렸고, 그녀는 어젯밤 일로 어색한 나머지 그를 보자마자 두피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이때, 양혁수가 그녀에게 다가오면서 한마디 했다.“장난 아니던데요?”안시연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진정시킨 후, 오는 길에 산 아침을 테이블 위에 놓으면서 물었다.“아침 먹었어요?”“날 주려고 산 거예요?”“많이 사서 나눠 먹어요.”“설마 이게 입막음 비용인 건가요?”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속으로 연정훈을 욕했고, 이내 컴퓨터를 켜면서 말했다.“빨리
안시연은 연정훈과의 일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양혁수와 얽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혁수 씨, 당신이 이 일에 정말 관심이 있어서 나랑 잘 지내려는 거면 몰라도, 다른 목적이라면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양혁수가 아무 대답이 없자, 그녀는 곧장 가방을 들고 벚꽃동으로 향했다.얼마 후,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집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서재에서 나지막하게 들리던 그의 목소리도 그녀가 거실로 들어가는 순간 멈췄다.안시연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만두를 만들 재료를 준비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40개가 넘는 만두를 빚었다.그녀가 찐만두를 식탁에 놓으려는 순간, 연정훈이 서재에서 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마주쳤다.곧이어 그가 식탁에 앉자, 안시연은 만두를 그의 앞에 놓았고 남은 만두들을 도시락통에 넣으면서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연정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결국 먼저 말을 건넸다.“넌 점심때 뭐 먹어?”안시연은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다가 답했다.“당신이랑 똑같이 만두를 먹어야죠.”그녀가 손수 만든 찐만두는 배가 고팠던 그의 식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안시연은 이내 도시락통을 챙겨 현관문 쪽으로 갔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나 저녁에 운전 연습을 해야 해서 늦게 돌아올 것 같아요.”연정훈은 고개를 숙여 신발 끈을 묶고 있는 그녀를 보고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냉담하게 말했다.“마음대로 해.”또다시 혼자 남겨진 연정훈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집안이 다시 차가워진 것도 모자라 앞에 놓인 만두마저도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그는 한꺼번에 만두 두 개를 집어서 입안에 쑤셔 넣었고, 몇 번의 젓가락질 만에 텅 비어버린 그릇을 보고는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서둘러 회사로 돌아온 안시연은 점심시간 때문인지 반쯤 비어 있는 사무실에 양혁수가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안혁수는 그녀가 태연하게 자기를
“고수가 얼마나 맛있는데요!”사실 양씨 가문에서는 양혁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고수를 좋아했다.“세상에서 제일 징그러운 채소가 고수예요!”“에이, 난 전 세계에서 고수를 심어야 한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멈추었고, 양혁수는 자기를 밀어내려는 안시연의 마음도 모른 채 또다시 말을 걸었다.“점심때 정훈 씨를 만나러 갔어요?”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투덜대기 시작했다.“시연 씨는 자존심도 없어요? 그 사람한테 팔려 간 것도 아닌데 점심시간까지 짬 내서 보고 오고, 피곤하지도 않나 보네요.”그러나 곧장 그녀의 허탈한 표정을 보고 혀를 내두르더니 말을 바꿨다.“그한테 팔렸다고 가정해도 약속을 어기는 것도 안 되는 거예요?”“혁수 씨, 계약을 위반하면 위약금이란 걸 내야 해요.”“내가 대신 내줄게요!”“그러면 내가 혁수 씨한테 팔려 가는 거잖아요?”“전 정훈 씨와 달리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라서 당신만 원한다면 평생 지켜줄 자신이 있어요”안시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됐어요, 뭐니 뭐니 해도 나 자신한테 의지하는 것이 제일 믿음직한 것 같네요. 내가 능력이 생기는 날이면, 무조건 나 자신부터 되찾을 거예요!”그녀는 자기가 연정훈에게 빼앗긴 건 단지 일 년의 시간만이 아니라 자존감과 자신감도 포함되었다고 생각했기에 하루빨리 모든 걸 되찾을 거라고 다짐했다.양혁수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왜 이렇게 고집이 세요, 난 정말 정훈 씨랑은 완전 다르다니까요!”“난 그 누구의 소유물이 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따라다닌다는 단어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난단 말이에요!”“설마 정훈 씨가 당신과 결혼하길 바라는 건가요?”안시연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그럼, 나랑 결혼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요?”양혁수가 조심스럽게 건넨 물음에 그녀가 잠시 멍하니 있더니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별로예요.”사실 양혁수도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그녀를 보면 볼수록 왠지 모르게 친분이 있는
차는 미리 연습장에 빼놓았다.안시연이 차에서 내리고 연정훈도 따라 내렸다.안시연이 연정훈을 살짝 곁눈질하자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운전해 봐. 얼마나 연습했는지 내가 봐줄 테니까.”안시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요즘 들어 연정훈에게 맞짱 뜰 정도의 배짱이 생기긴 했으나 학생이 시험을 두려워하는 건 뼛속 깊이 새겨진 흔적 같았다.“아직 한 번밖에 연습해 보지 못했는데요.”“그럼 그 한 번의 연습 결과를 볼게.”연정훈이 먼저 연습장 안으로 들어섰다.이 부근은 종합 서킷장이었는데 운전 연습하는 곳은 그저 부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추가 구역 같았다.저녁이 되어도 연습장은 대낮처럼 밝았다.연정훈을 발견한 코치는 바람처럼 사라지며 조수석을 연정훈에게 양보했다.안시연은 이를 악물며 차에 올라탔다.바로 시동을 걸려는데 연정훈이 물끄러미 안시연을 쳐다봤다.그 시선에 안시연은 멈칫했다.‘왜, 왜 그러지?’“안전벨트.”“아, 맞다!”코치라는 허울을 쓴 연정훈 앞에서 안시연은 순한 양이 되었다.안전벨트를 얌전히 착용하고 안시연은 또 연정훈의 눈치를 살폈다.다른 실수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운전대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안시연은 이어질 지시를 기다렸다.그러나 연정훈은 차 시동이 걸어지기를 가만히 기다렸고 안시연도 마찬가지였다.한참 정면을 직시하던 안시연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말 안 해요?”???안시연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시작, 이라고 말해야 해요.”“...”연정훈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시작.”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긴 한숨을 내뱉은 뒤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시동이 걸리고 다이얼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0위로 수치가 올라간 걸 확인하고 안심을 했다.조작을 마치고 안시연은 한참 머리를 굴리며 양혁수가 저번 시간에 알려준 걸 뒤집었다.‘아 맞다 기어!’‘기어 먼저 바꿔야 해.’안시연이 손을 뻗자 연정훈은 가만히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고개를 돌린 안시연이 조심스러운 눈길로 연정훈의 눈치를 살폈다.
“왜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은 거야?”“브레이크 안 밟았어요.”“그럼 차는 왜 갑자기 멈췄을까?”안시연의 얼굴은 빨갛게 익었고 급하게 숨을 내몰았으며 미간도 한껏 찌푸렸다.연정훈은 사람을 가르치던 그 포스가 돌아왔는지 아주 엄격하게 굴었다.“다시.”안시연은 차에 오른 뒤로 긴장해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는데 옆에 앉은 사람이 코치가 아닌 연정훈이다 보니 더더욱 손에 땀을 쥐었다.안시연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오늘 안 바빠요?”“운전이나 해.”“서킷 경기 곧 시작한대요.”“오늘 운전하다가 서킷장까지 돌진하지 말고.”안시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연정훈 앞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안시연이 말했다.“이만 볼일 보러 가요. 코치한테서 배우면 돼요.”연정훈의 시선에 안시연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코치님이 더 잘 가르치기도 하고요.”“액셀을 브레이크로 밟는 네가 내 실력을 논하는 거야?”“...”안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이렇게 말했다.“양혁수가 가르쳐줬을 땐 운전 잘했단 말이에요.”연정훈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으며 잘못 들은 게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양혁수와 함께 있었다는 걸 신경 쓸 게 뻔했으므로 일부러 자극해 연정훈을 떠나게 하려는 계획이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예상대로 확실히 화가 나긴 했다.평소의 그는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았지만 안시연은 손쉽게 그의 기분을 좌지우지했다.차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찾아왔다.연정훈은 머리가 찢어질 것처럼 지끈거렸는데 고개를 돌리자, 운전대를 잡고 있는 안시연이 아까보다 더 긴장 해하는 게 느껴졌다.연정훈은 심호흡을 길게 했고 안시연이 짜놓은 함정에서 빠져나왔다.“운전 시작.”안시연은 깜짝 놀랐다.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는 얼굴에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너와 양혁수 사이 있었던 일은 그 후에 다시 말해.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어도 코스를 완주해야 할 거야!”연정훈이 명령을 내렸다.안시연의 멋대로 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이에
“안시연 씨도 같이 가는 거예요?”양민아가 물었다.어젯밤 그 일로 안시연의 이름을 언급하는 양민아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안시연은 눈치껏 연정훈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은 절대 그 손을 놓지 않았다.“부승희가 널 꼭 데려오라고 했어.”“나한텐 연락이 없었어요.”“나한테 했다니까?”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찐친 모임”에 왜 “가짜 여친”을 굳이 데려가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더구나 미래 아내 후보도 이 자리에 함께이지 않는가?안시연은 다시 손을 빼내려고 시도했지만, 연정훈은 그녀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양민아는 안색 한번 변하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이 세 사람의 조합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별석으로 이동하는 길 내내 사람들의 의아한 눈초리가 그들을 향했다.안시연은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부승희의 시선마저 자신과 양민아 사이를 오가는 게 느껴졌다.자리에 앉자마자 부승희가 어깨에 팔을 걸어왔다.“양민아가 괴롭혔어요?”“오는 길에 우연히 만난 거예요.”안시연이 덤덤하게 말했다.부승희가 쯧 하고 소리를 내더니 안시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쭉 밀었다.“바보예요? 그런 우연이 어디 있어요.”안시연은 그 뜻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입을 삐죽였다.“우연이 아니더라도 양민아 씨의 표적은 제가 아니었어요.”부승희가 입을 매만졌다.“하긴, 그렇긴 하죠.”부승희는 소파에 등을 기댔고 시선은 한우빈과 부승원 옆자리를 향했다. 양민아는 연정훈에게 꼭 붙어 무언가 속닥이고 있었다.“하여간 조심 좀 해요. 언젠간 크게 다치는 수가 있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시던 안시연이 멈칫했다.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부승희의 말은 연정훈의 결혼을 의미했다.그리고 부승희가 안시연의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양민아 삼촌 양석진이 승진하는 건 기정사실로 된 거래요. 그 아래 사람들은 대부분 연정훈 할아버지의 후배들이고요.”안시연은 이러한 일에 문외한이었으므로 눈만 껌벅였다.“그러니까 두 가문이 서로 공유한다는
큰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고 연씨 가문의 본가에서 표세연이 전화를 받았다.“좋아. 알았어.”양시연은 2층에 서서 표세연의 기쁜 목소리를 들으며 대충 짐작했지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표세연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괜찮아. 연정훈의 아버지가 다 해결했어.”‘아이고.’“맞아. 오늘 양석진 씨께서 모습을 보이셨대.”표세연이 덧붙였다.양시연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었음을 실감했다.그녀는 연정훈을 보고 싶었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보니 아마도 후속 처리할 일이 남아 있는 듯했다.집에서 기다릴까 했지만 마침 반우희가 세 아이를 데리고 가려 하자 그녀도 차라리 반우희를 태우고 연정훈을 데리러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너무 서두르지 마. 연정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표세연이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양시연은 신경 쓰지 않고 배를 살짝 받치며 계단을 내려갔다.“마침 답답했는데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요.”“알았어. 네가 답답해할 줄 알았어.”표세연은 결국 운전사를 불러 그들을 밖으로 데려가 바람을 쐬게 했다.주차장에서는 세 아이가 여러 차를 구경하고 있었고 반우희가 좋아하는 마이바흐는 승주도 탐을 내는 차였다.“아니면 우리 이 차를 타고 나갈까요?”양시연이 제안했다.“그래도 돼요?”반우희와 승주가 동시에 묻자 양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아싸.”탁승호는 없었고 표세연이 정해준 운전사는 오랫동안 일해온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안전을 위해 희주와 동준은 다른 차에 태웠다.반우희는 마이바흐의 조수석에 앉았고 승주는 양시연과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나도 이제 출세했네요. 마이바흐를 타보다니.”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운전사에게 차를 출발하라고 지시했다.출발!...단 15분만에 양원 그룹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누구도 그 전화의 내용을 직접 듣진 못했지만 위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결과는
“괜찮아요. 반우희 씨는 그냥 한 번 올라가서 볼 거예요. 탁승호 씨는 차 시동 켜고 조수석에 앉아요. 우희 씨가 잠깐이나마 만족할 수 있도록 해줘요."양시연이 웃으면서 말했다.탁승호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네.”반우희는 기분 좋게 차에 올라탔고 양시연은 차 밖에서 앉아 있었으며 실내는 시원하게 느껴졌다.탁승호는 계속해서 옆에서 지켜보았고 반우희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그의 눈빛이 다소 불친절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마음대로 만지지 않았다.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양시연은 웃으면서 물었다.“마음에 들어요?”“네. 마음에 들어요.”“사법시험 끝나면 부승원 씨에게 차 한 대 사달라고 해요.”반우희는 진지하게 한숨을 쉬었다.“시연 언니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물어보길래 차 한 대 선물해 줄 생각인 줄 알았어요.”양시연이 일어나서 반우희 코를 살짝 쥐었다.“욕심쟁이네요.”반우희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그때 또 한 번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렸고 반우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이제 곧 폭우가 올 것 같아요.”“그럴 것 같네요.”...양원 그룹 회의실에서 6시가 다 되어가지만 사람들은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회의라지만 사실 중요한 사항은 이미 끝났고 남은 건 윗사람들의 연설뿐이었다.회의는 이 회장이 직접 참석했고 그의 말 속에는 일부 얌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5분 전 누군가가 또다시 창고에서 발생한 사고를 언급했다.“지금까지 사망자 가족은 아직 보상안을 받지 못했습니다.”이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책임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데 보상안이 나올 수 있나요?”“우리는 어쨌든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누군가 말했다.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죠. 사람들의 입이 무섭죠.”정 회장은 표원정의 의견을 지지했고 그는 이미 조재민과 얽히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이 회장과 연정훈과 대립 중이었다.이 회장은 그를 한 번 쳐다본 후 웃을 듯한 표정으
양시연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양혁수는 그녀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마음 한구석이 살짝 쓰렸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하다니 다행이었다.“이제 곧 출산인데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어. 요즘 같은 때는 한 발짝 덜 움직이는 게 안전한 법이야.”양혁수가 걱정스레 말했다.“어쩜 정훈 씨랑 하는 말이 똑같아?”“연정훈 씨랑 나를 비교하지 마. 난 그 사람이랑 상종도 안 해.”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화 너머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변여름이야?”“응. 변백호가 볼일 있어서 왔는데 변여름도 같이 따라왔어. 한강시에 한 번도 안 와봤다길래 데리고 놀러 왔지.”“잘됐네.”“혹시 처리할 일 있으면 말해. 너희가 직접 움직이기 어려운 건 내가 대신 해줄게.”전화를 끊기 전 양혁수가 덧붙였고 양시연은 그의 배려가 고마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저녁 무렵 반우희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세 아이를 데리고 복숭아를 따러 갔다가 양시연에게도 좀 가져다주고 싶다고 했다.마침 무료하던 참이라 양시연은 주소를 알려주며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아이들이 도착하자 집안 분위기가 한층 활기차졌다.표세연은 특히 동준이가 작은 몸집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마치 만화 캐릭터 같다며 귀여워했다.양시연과 반우희는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반우희는 대게를 한입 베어 물며 무심히 말했다.“요즘 다들 너무 바쁜 것 같아요. 벌써 이틀이나 부승원 씨 얼굴을 못 봤네요.”“내가 없으니 많이 힘들겠죠.”양시연이 말하자 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게 아니라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바쁘진 않았는데 요즘은 뭔가 이상해요.”양시연은 부승원이 왜 바쁜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반우희를 달래며 더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오늘 부승원 씨의 생일이에요. 이따가 그
이전에는 민수희가 있었기 때문에 표세연은 민씨 가문의 기생충 같은 사람들을 참을 수 있었지만 민수희가 떠나고 나서는 이제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게다가 요즘 마음도 편치 않아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은 참이었다.그때 민지연이 버릇없이 덜컹거리며 들어오는 것을 본 표세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뺨을 한 대 때렸다.‘팍!’양시연은 위층에 있었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동 소리를 듣고 급히 문을 열였다. 그곳에서는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방미선은 아마도 체면이 상했는지 표세연에게 기어이 몇 마디 반박하며 말했다.“혹시 갱년기 아니야?”“갱년기? 너야말로 갱년기야!”“나는 곧 손자를 볼 거야. 갱년기는 이미 다 지나갔다고.”민지연과 방미선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표세연은 화가 나서 말이 거칠어졌다.“앞으로 너희는 이 집에 다시 발 들이지 마. 어머님도 돌아가셨고 이제 이 집엔 민씨는 없어. 정인은 이미 내 며느리와 함께 성을 바꿔서 양씨가 되었어. 만약 돈을 원하고 손자 행세를 하려면 양씨 가문에 가서 해.”“사모님.”가정부들은 놀라서 표세연에게 말을 그만하라고 했지만 표세연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덧붙였다.“내가 하나만 말해줄게. 우리 사부인 성격이 나보다 더 안 좋아. 가서 손자 행세하고 싶으면 절이라도 소리 크게 내서 해.”방미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당장이라도 화병이 날 듯했고 얼굴이 붉어진 채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고 욕을 하려 했지만 자신이 남의 집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이빨을 꽉 깨물며 참았다. 그런 다음 표세연에게 정신과 약을 먹으라고 권한 후 떨리는 손으로 민지연을 끌고 나갔다.가정부 중 한 명은 원래 표세연을 말리려 했지만 방미선의 말을 듣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저희 사모님은 건강하세요. 오히려 당신이나 민지연 씨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표세연은 한바탕 화풀이를 끝내고
10시가 지나서야 양시연은 집으로 돌아온 연정훈을 맞이했다.“안 죽었어요?”양시연이 의아해하자 연정훈은 외투를 벗으며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아직 숨은 붙어 있지만 의식이 없어. 그래서 임성원에게 사람을 옮기라고 했어.”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요. 사람들은 책임자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정훈 씨와 연관 짓는 데 집중할 테니까요.”소현주의 사건처럼 연정훈도 사망 원인을 깊이 파헤치지 않았고 심지어 소현주의 시신도 따로 보관하지 않았다.“하지만...”양시연은 말을 잠시 멈추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조재민 씨 일당이 먼저 움직여서 이번 사건을 더 크게 키워 아버님께 압박을 가하려는 건 아닐까요?”“그럴 가능성은 적어. 설령 조재민이 그런 속셈을 품었더라도 직접 나설 인물은 없을 거야. 이런 일들은 보통 결정타를 날릴 만큼 치명적이지 않고 최대한 상대의 발목을 잡는 수준에서 이용될 뿐이지.”양시연은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그쪽 사람들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아버님께서 불리한 처지에 놓이면 그때 서야 일제히 공격할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침대 머리맡에 앉히며 물었다.“소식 들었을 때 많이 놀랐어?”양시연은 살짝 한숨을 쉬며 연정훈의 품에 기대 조용히 말했다.“놀라진 않았어요. 다만 당신이 걱정돼서 자꾸 이것저것 생각하게 돼요.”“아. 참.”양시연은 고개를 들고 연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러면 아버님 쪽은 언제쯤 소식이 올까요?” “이번 주 안에는 결론이 날 거야. 하지만 임명까지는 아직 이르고 최종 결정은 위에서 내려야 해.”결정이 내려진다는 건 곧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양시연은 그제야 양석진이 종적을 감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아빠는 지금 한강시에 계실 거예요. 이번 일은 결국 서운에서 벌어지는 정치 싸움이겠죠?”“맞아.”“이번 일을 계기로 양원에서는 당신의 직위를 어떻게 조정하려고 해요?”“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양시연은 약간 놀라며 물었다.“휴직 안 해요?”
새벽이 되어서야 양시연은 사건의 전말을 들었고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표세연처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일곱 명 모두 구조되었고 여섯 명은 이미 의식을 되찾아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러나 팀장을 맡은 이가 가장 위독한 상태였으며 아직도 응급 치료 중이라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다.임성원이 보고했다.“깨어난 사람들 모두 책임자가 오후에 연 대표를 만나 서명을 받은 승인 문서를 들고 창고에 들어갔다고 증언했습니다.”“그럼 그 승인 문서는 어디 있나요?”“없습니다. 모두 봤다고는 하지만 문서는 책임자가 보관하고 있었고 현재 그가 응급실에 있어 찾을 수 없습니다.”양시연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승인 문서도 없이 그냥 입 맞추고 연정훈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겠다는 거죠?”“그 사람들의 말이 일관되게 똑같아서 거짓말 같지는 않습니다.”“당연히 거짓말이 아니겠죠. 그 책임자는 그냥 가짜 승인 문서를 직원들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됐을 테니까요. 그러면 직원들은 실제로 봤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증언할 테고. 하지만 승인 문서가 진짜라는 걸 누가 증명하죠?”‘한심하다. 이렇게 조잡한 수작을 부리다니.’이 사람들은 연재혁이 패배할 거로 생각하고 양시연의 아버지가 위중하다고 생각하니 막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그 책임자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임성원은 사실대로 말했다.“병원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상태가 위독했습니다.”양시연은 욕이 나올 뻔했다.세상이 참 잔혹하다. 해당 라인의 최고 책임자는 연정훈이었고 규칙에 따라 사고가 발생하면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책임을 져야 했으며 그 책임의 경중이 다를 뿐이었다.그런데 이 사람들은 승인 문서도 없이 증거도 없이 오직 입을 맞추고 연정훈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표세연은 냉정하게 말했다.“그 책임자가 살아 있기만 하면 조사를 통해 연정훈과의 연관성이 크지 않다는 걸 밝힐 수 있어.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죽으면 비록 연정훈이 주범이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억울한 오명을 쓸 가능성이
옛집에 도착하자 표세연은 서둘러 양시연을 맞이하여 앉히고 다양한 간식들을 차려주며 소파를 정리해 편안하게 앉게 했다.“이쁜 얘기야, 한 달 넘으면 할머니랑 만날 수 있겠네.”표세연은 양시연의 배를 보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옆에서 아주머니가 나와 간식을 놓으면서 말했다.“도련님, 요즘은 사모님과 함께 집에서 지내시면 좋겠어요. 도련님께서 오시면 사모님께서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몰라요.”양시연은 표세연의 얼굴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챘고 표세연이 불면증에 걸린 것 같다고 느꼈다.표세연은 아줌마를 보내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별일 아니야. 아주머니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연정훈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말했다.“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수많은 풍파를 겪으셨는데 어머니께서는 아직 심리적으로 훈련이 덜 된 거 같네요.”표세연이 연정훈을 가볍게 째려보았다.“그 전과는 달라. 예전엔 할아버지가 도와주셨지만 지금은 여기서 할아버지도 손을 쓸 수 없어.”양시연은 위로하며 말했다.“사실 더 승진하지 않더라도 다른 기회는 있을 거예요.”표세연은 고개를 저었다.“이기지 않으면 지는 거지. 무승부는 없어.”양시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대화의 주제를 아기의 이름으로 전환했다.표세연은 확실히 기뻐하며 말했다.“성씨는 네가 선택할 권리를 줬으니 이름을 지을 때는 아이의 할아버지 의견도 좀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좋아요. 이름은 아버님께서 정하게 하세요.”양시연은 여유 있게 말했다.표세연은 다시 양시연의 배를 만졌고 거실은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연정훈은 전화를 받고 회사에 가야 했다.“주말인데 전혀 시간이 없네.”표세연은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양시연은 신경 쓰지 않으며 연정훈에게 차 조심히 운전하고 저녁에는 최대한 일찍 돌아오라고 말했다.“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이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자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그들의 사이가 좋아 보이자 표세연도 기뻐했다.연정훈이 떠난 후 양시연
복도는 적당히 어둡고 분위기도 완벽했다.부승원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반우희에게 입을 맞췄다.처음엔 가볍게 입을 맞췄지만 반우희가 발끝을 들자 부승원은 그녀의 머리 뒤로 손을 돌려 깊게 키스했다.반우희의 몸에서 오래 스며든 듯한 강한 딸기 향이 났고 부승원은 그 향이 가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반우희는 식사 후 화장실에서 거의 반병을 썼고 혹시 음료처럼 한 통을 다 마신 게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입술이 떨어지자 두 사람의 숨결이 얽혔고 쉽사리 떼어낼 수 없었다.반우희는 자기 입술을 핥으며 부승원의 입술도 스치듯 지나갔다.두 사람의 코끝이 부딪히자 반우희는 살짝 부끄러워졌는지 더욱 세게 끌어안고 얼굴을 부승원의 가슴에 묻었다.“이제 가야 해. 승주가 널 찾을 거야.”부승원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반우희는 가볍게 대답하고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불빛은 어두웠지만 부승원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된 걸 느낄 수 있었다.‘정말 좋다.’반우희는 부승원을 마주 보며 뒷걸음치자 부승원이 말했다.“넘어지지 말고 조심히 걸어.”“네.”반우희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두 걸음 더 뒤로 걸어가며 기분 좋게 계단을 올랐다.부승원은 그녀의 발소리를 들으며 기분이 좋아졌고 입안의 딸기 향이 한층 더 고급스럽게 느껴졌다.발소리가 계단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가 갑자기 멈추자 부승원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부승원 씨.”그녀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고 마치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살짝 몸을 숨겼다.부승원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뭐 하는 거야?”반우희는 두 손을 입가에 모아 확성기처럼 만들고 아래를 향해 외쳤다.“오늘 밤에 문제집 다 풀 거예요.”부승원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적당히 해. 문제집이 너한테 질려서 도망가겠어.”반우희는 키득키득 웃으며 계단을 올라갔고 부승원은 그녀가 집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차로 향했다.차에 다가가자 그는 잠
두 사람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운전사는 이미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대기하고 있었다.부승원은 반우희를 건물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그녀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려 했지만 반우희는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반우희는 부승원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말없이 매달렸다.부승원은 마음이 약해져 반우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집에 가기 싫으면 한 바퀴 더 돌면서 간식이라도 사줄까?"“싫어요.”반우희는 부승원을 더욱 꼭 안았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옆얼굴에 살짝 입을 맞췄다.반우희는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재빠르게 그의 턱에 가벼운 키스로 응답했다.주변은 어두컴컴했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부승원의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으며 평소의 차가운 기운은 사라지고 따스한 너그러움만이 남아 있었다.“마라 새우를 많이 먹으면 원래 이렇게 집착하게 되나?”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새우 탓이 아니라 달이 문제에요.”“달이 뭘 잘못했는데?”“나는 인정해 이건 전부 달 때문인 것을.”반우희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부승원은 그녀의 엉뚱한 행동에 미소를 지었다.조용한 밤의 고요 속에서 그녀는 한 구절을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불렀고 그 음성은 살랑이는 바람에 실려 그의 마음을 간질였다.‘달빛이 너무 아름다웠고 너는 너무 다정했어. 그 순간 오직 너와 함께 영원을 약속하고 싶어.’가사가 꽤 마음에 들었고 부승원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이 정도면 달이 욕을 좀 먹어도 억울하지 않겠네.’“부승원 씨.”반우희가 그의 품 안에서 부르자 부승원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반우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흔들리지 마세요. 부모님께 휘둘리지 말고 날 외국으로 유학 보내지 마요. 난 당신과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부승원은 반응 없이 달콤한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져 그녀를 놀리고 싶어졌다.“아닌데? 너 승주한테 돈만 많이 주면 나랑 헤어지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