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여진은 깨진 유리 컵으로 손목을 그었다.깊게 파인 상처만큼 배여진은 삶의 미련이 없었다.마치 선기현을 위해 결혼식 당일 도망친 것처럼 배여진이 선기현을 향한 사랑은 나방이 불꽃을 날아드는 것처럼 무모했다.부승희는 많이 당황했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배여진의 심정이 많이 이해가 갔다.그리고 배여진이 했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승희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라고 하잖아. 그런데 그 마음이 변하는 걸 지켜보는 게 얼마나 지옥인지 알아?”이승우와 선기현도 빠르게 병원으로 움직였다. 의사는 배여진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수혈을 하고 있었다.부승희는 선기현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대신 주먹부터 날리려 했다.“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여진 언니 배신하면 천벌 받을 거라고 맹세했다면서! 그럼 천벌 받아!”선기현은 몰아치는 주먹에도 막아서지 않았고 잔뜩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부승희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자 이승우가 막아서며 말했다.“먼저 여진이부터 만나게 해줘.”“만나긴 뭘 만나? 여진 언니가 기현 오빠 만나고 더 흥분하면 어떡하라고.”부승희는 한참 생각하다가 선기현의 팔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더는 여진 언니 자극하지 마. 벌써 나이가 서른셋인데 책임져야 할 일은 책임져야 하지 않겠어? 언니 지금 아이도 임신 중인데!”선기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부승희는 병실 앞을 지켰고 안쪽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몰라도 수혈 중인 배여진이 선기현의 품에 안겨 엉엉 우는 게 보였다.만약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정말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면 배여진은 정말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다 버릴 것 같았다.부승희는 그 광경을 보며 점점 손발이 차가워졌고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몰랐다.이승우는 이런 부승희를 이끌고 복도에 있는 좌석에 앉혔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두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고 잘 지내보려고 해도, 배여진이 피를 흘리는 결과가
끝내 피를 보고 배여진은 점점 흥분을 가라앉혔다.의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와 이승우를 데리고 나갔다.부승희는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보며 머릿속이 텅 비었고 다급하게 의사의 뒤를 따랐다.불행 중 다행인 건, 칼날이 이승우의 왼쪽 볼을 스쳤고 피가 많이 흐르긴 했으나 눈이나 코가 다친 건 아니었으며 상처가 깊은 편도 아니었다.의사의 설명을 들으며 부승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몇 바늘 꿔매야 하나요? 회복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의사는 정확하게 대답을 하지 않고 더 검사를 받아봐야 알 것 같다고 답했다.부승희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그럼 빨리 검사부터 받게 해주세요.”주변에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모여 있었고 부승희는 이승우와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없었다.이승우가 잠시 말을 할 수 없는 것도 대화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잠시 밖에서 기다리니 간호사가 밖으로 나와 상처 봉합을 마쳤다고 말해줬다.“입원할 필요는 없을까요?”“네. 집으로 돌아가셔서 조심하시면 문제없을 거예요.”부승희는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부승희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승우가 먼저 밖으로 나왔고 깜짝 놀란 부승희가 말했다.“왜 벌써 나온 거야?”이승우의 왼쪽 얼굴엔 거즈로 덮여 있었다. 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였는데 거즈가 이승우의 미모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이승우가 입을 열려는데 부승희가 빠르게 말렸다.“말 하지 마. 상처가 땅겨지면 어떡해?”이승우는 부승희가 많이 놀란 걸 알아차렸고 말없이 부승희를 바라만 봤다.그리고 속으로 배여진 부부를 실컷 욕했으며 기분은 저기압으로 가라앉았다. 이승우는 본인이 가장 내세울 수 있는 걸로 얼굴을 꼽았고 그딴 사람들 때문에 얼굴을 망쳤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잡쳤다.그러나 잔뜩 긴장한 부승희를 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이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분위기를 띄워보려 입을 열었다.“저기...”“말하지 마라니까!”부승희는 혀를 쯧 하고 찼다.“안 아파?”“아파.”“아프면 조용히 있어!”“...
부승희는 조금 다친 ‘경호원’을 옆에 끼고 배여진을 찾아갔다. 병실 밖엔 잔뜩 피곤해 보이는 선기현이 먼저 보였고 배여진은 선기현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쓰레기 같은 사람.’배여진은 부승희를 보고 한참 침묵하더니 눈을 붉히며 사과를 했다.“아니야. 승우 오빠 멀쩡하니까 언니 몸이나 잘 챙겨. 그리고 언니, 내가 오지랖이라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세상엔 본인 목숨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어. 그리고 언니 지금 상태가 조금 안 좋아 보이는데 제대로 검사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배여진은 이불 끝을 꽉 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부승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두 사람 병실에 붙여둘 테니까 입원해서 몸 잘 추스르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퇴근하면 언니 보러 올게.”그 말에 배여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친구로서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병실을 나서고 배여진은 선기현을 지나쳐 이승우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배여진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이승우를 집에 바래다주고 보니 밥때를 놓친 게 생각났다.이승우는 소파에 앉아 메시지를 보냈다.[혹시 밥도 챙겨주나?]“입을 벌릴 수는 있겠어? 안 아파?”[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잖아.]“...”부승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하룻밤 굶는 건 큰일 아니잖아. 상처가 좀 아물려면 내일 아침 먹는 게 좋겠어.”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조용히 부승희를 바라봤다.‘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부승희는 웃음을 꾹 참다가 말했다.“죽 끓여주면 빨대로 먹을래?”[고깃국, 계란찜, 각종 죽 다 먹을 수 있어.]부승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먹고 싶은 것도 많네.”이승우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문자를 보냈다.[여진이는 네 친구잖아.]‘그러니까 네가 책임져.’“선기현 그 개자식은 오빠 친구잖아!”이승우는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지난번에 벌써 절교했어. 이번엔 네가 부탁해서 만난 거라고.]그 말인즉슨 부승희가 책임을 돌릴 수 없
부승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어쩌면 부처님이 정말 오빠 천벌 주시려다가 한번 봐주신 걸 수도 있어. 그러니까 몸 좀 사리는 게 좋을 거야. 이게 마지막 경고일지도 몰라.”이승우는 마음이 급해 입을 열었다.“그건 안돼.”그리고 상처가 땅겨져 또 앓는 소리를 냈고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향해 손을 뻗었다.다행히 부승희가 재빠르게 이승우의 손을 낚아채 상처에 닿지 못하게 했다.이승우는 고개를 들어 부승희와 눈을 마주했다.부승희는 바로 이승우에게 뺨을 날리려 했으나 지금 얼굴 어딜 건드려도 위험할 거라는 생각에 허공에서 멈칫하다가 오른쪽 귀를 잡아당겼다.“아직 덜 아픈 거지?”이승우는 감히 크게 움직이지 못하고 조심스레 부승희의 옆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그리고 입술을 최소한도로 열어 말했으며 목소리도 아주 낮았다.“아파. 엄청 아파.”부승희는 이승우의 작은 숨결이 입가 주변에 떨어지는 게 느껴졌고 이승우에게서 병원 소독수 향이 느껴지자 손의 힘이 점점 줄어들었다.“아프면 가만히 좀 있어. 다 먹었으면 빨리 잠이나 자든지. 나랑 실랑이를 벌이는 걸 보면 아직도 힘이 넘치는 것 같아.”이승우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부승희의 옆으로 조금 더 붙었다.‘너랑 좀 더 있고 싶어서 그러지.’“...”부승희는 이승우의 오른쪽 귀를 더 세게 잡아당기려 했으나 힘을 주기도 전에 이승우는 상처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척 보아도 연기인 게 보여 부승희는 이를 악물고 귀를 꽉 잡아당기며 등이라도 내리치려 했다.이승우는 본능에 따라 몸을 작게 말았다.‘뭐야. 진짜 때리게?’부승희는 겁에 질린 이승우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다시 꾀병 부리기만 해봐? 오빠 나이가 서른이 넘어. 아직도 어린 아이인 줄 알아?”‘세상에. 나이 공격이라니.’이승우는 문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두 눈을 질끈 감고 손을 휘휘 저었다.‘그만해.’부승희는 입꼬리를 올렸다.“이건 듣고 싶지 않아? 그럼 빨리 얌전히 침대로 가.”‘가라고 하면 못 갈 줄 알고?’
이승우는 배여진이 하루빨리 경인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지금 배여진의 상태를 보아 앞으로 또 언제 미친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배씨 가문과 선씨 가문 부모님께서 전주를 찾았다. 선기혁의 마음을 돌려세우고 배여진을 위로하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였다. 두 가문 모두 배여진을 재촉하는 대신 전주의 병원에서 배여진의 옆을 지켰다.그 소식에 이승우는 어이가 없어졌다.“전주가 뭐가 좋다고 여기 죽치고 있는 거래?”이승우는 부승희에게 투덜거렸다.부승희는 문서를 뒤척이며 고개도 들지 않고 비꼬듯 말했다.“오빠 구사일생의 아홉 번 채워야 하잖아. 두 사람이 옆에 있으면 기회도 많아지고 얼마나 좋아. 기회가 없어지면 오빤 손톱 작게 갈라진 것도 한 번으로 쳐달라고 하며 어영부영 넘어갈 사람이야.”이승우의 논리대로면 며칠 안으로 아홉 번을 다 채울 기세였다.이승우는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말했다.“그거 약지 손톱이었어.”“오빠 동맥은 약지 손톱에 있나 봐?”“우리 앞으로 결혼하면 결혼반지 약지에 껴야 하는 건데 손톱이 갈라지는 건 큰일이잖아.”“...”‘멍청하긴.’두 사람은 별 같지도 않은 일로 한참 티격태격했고, 그러다가 요즘 거래 유도 중인 업체에서 연락이 와 빠르게 회의실로 향했다.열심히 일하는 이승우의 모습은 꽤 봐줄 만 했다.점심 기간이 되고 부승희는 아래층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부승희의 테이블을 작게 두드렸다.“부승희 씨?”여자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고 부승희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하얗고 청순하게 생긴 그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부승희는 그제야 누구인지 알아봤다.‘아, 하루빨리 씨네.’바로 지은설이었다.“무슨 일이시죠?”지은설은 부승희의 맞은 편 자리를 살펴보더니 예의를 차려 물었다.“자리에 좀 앉아도 될까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부승희는 지은설이 자신을 찾아온 의도가 뭔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지만, 이마에 땀이 맺힌 지은설을 보며 며칠 전 이승우가 지은설의 아이가
지은설이 말했다.“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전에 전화를 걸었을 때 급하게 끊는 걸 보며 나와 엮이는 게 곤란한 상황인 걸 눈치챘어요. 아마도... 두 사람은 아직 만나는 건 아닌가 보네요.”“그게 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신경이 쓰인다면 그냥 제가 넋두리한다고 생각하고 들어주세요.”부승희는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지은설은 향 주머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건 아마도 승희 씨가 승우 씨에게 선물한 거겠죠? 그때 제가 처음 운전을 시작하고 승우 씨 차량을 우연히 운전하게 됐는데 장식된 구슬이 너무 특이해 보여 손에 쥐고 보다가 실수로 구슬을 다 떨어뜨리게 됐어요.”“그 안에 든 구슬을 확인하고 너무 마음이 불편해서 제가 따로 가져가 버렸죠.”“그리고 승우 씨한테 차량을 돌려줬는데 승우 씨는 한참이 지나서 나한테 차량 장식품을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물어보더라고요.”“그래서 그냥 세차하던 직원이 실수로 망가뜨렸고 버렸다고 말했었죠.”여기까지 말하던 지은설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승우 씨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안 좋은 게 느껴졌어요.”부승희는 기분이 착잡해졌다.“승우 오빠가 은설 씨한테는 많이 너그러운 사람이었나 보네요.”지은설은 부승희의 말에 아차 싶은 표정을 짓더니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그게 아니라...”지은설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때의 승우 씨는 늘 기분이 저기압이었어요. 나와 대화하는 것조차 지쳐 했죠.”부승희는 묵묵히 얘기를 들었다.상황인 부승희가 화를 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말을 계속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한테 헤어짐을 고했어요.”‘그렇게 빨리?’부승희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상황인 쓴웃음을 지었다.“사실, 승우 씨는 소문처럼 저를 많이 좋아했던 게 아니에요.”“결혼까지 생각했었는데 좋아한 게 아니라니요.”“결혼하고 싶다는 말만 했지, 결혼한 것도 아니잖아요.”상황인 말을 고쳤다.부승희는 입
지은설은 잠시 고민하다가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건... 좋은 일을 베풀면 그만큼의 보답을 받는다고 하잖아요.”부승희는 본인도 이승우에게 같은 말을 했던 게 떠올라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나 생각할수록 왠지 분하고 불공평하게 느껴졌다.이승우는 대체 전생에 얼마나 큰 공을 세웠기에 주변에 이렇게 많은 좋은 사람이 있는 걸까?이곳저곳 마음을 준 바람둥이를 위해 전 애인이 이런 말을 해줄 사람이 몇 있겠는가?무엇보다도 지은설은 이승우가 보낸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찾아온 게 분명했다.아이가 아픈데도 이렇게 찾아올 정도면 이승우를 많이 소중하게 여긴다는 게 느껴졌다.부승희는 지은설을 슬쩍 보다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다고 남편이 뭐라고 하지 않던가요?”지은설은 미소를 지었다.“돌려줄 물건이 있고, 앞으로 다시 승우 씨한테 부탁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니 직접 이곳까지 바래다줬어요.”남편 얘기를 꺼낸 지은설은 방금까지 이승우 얘기를 하며 쓸쓸한 표정을 짓던 것과는 딴판이었다.부승희가 말했다.“남편분이 참 좋은 사람인가 봐요.”“네. 착하고 온순한 사람이에요.”부승희와 지은설은 처음부터 친구가 아니었고 이승우 때문에 엮기에 된 사이다 보니 더는 할 얘기가 없었다.지은설은 자신이 제대로 말을 전하게 맞는지 고민이 되었지만 어떤 일은 설명을 한다고 해서 다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다.이승우가 부승희를 향한 마음은 아마 본인도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겨우 방관자에 불과한 지은설은 이 정도밖에 말을 꺼낼 수 없었다.“승희 씨, 제가 괜한 소리를 건넨 건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부승희는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지은설은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가방을 챙겨 떠났다.부승희는 한참 그 자리에서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향했다.그런데 회의실 입구에서 바로 이승우를 마주쳐 버렸다.부승희는 이승우를 무시하고 걸었고 이
자신을 찾은 부승희에 양시연은 바로 눈치를 챘다.[지금 승우 씨가 너무 좋아서 나더러 대신 설득해 달라는 거죠?][난 시연 씨를 오답 노트처럼 쓰려고 찾아온 건데요!][그래요?]양시연은 바보 같은 표정의 이모티콘을 보내며 말했다.[내가 좀 오답 노트 같긴 하죠. 사랑에 눈이 멀어 정훈 씨가 조금 잘해주니 바로 덥석 결혼해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승희 씨는 절대 나처럼 쉽게 승우 씨를 허락해주지 마요.]부승희는 어이가 없다는 이모티콘을 전송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은 장난꾸러기 같은 이모티콘으로 답장했다.‘어휴. 말을 말자.’아무런 조언도 얻지 못한 부승희가 대화창을 나가려는데 양시연이 문자를 보내왔다.[사람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봐야 해요.]그 문자에 부승희는 한참 침묵했다.[곁에 있으면 좋고 멀어지면 서운하니 그냥 곁에 두면 되는 거죠.]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부승희는 자신이 미로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찾아도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일주일 뒤, 배여진은 퇴원을 할 수 있었고 부승희와 이승우도 병원을 찾았다.선기현은 며칠 전보다 많이 진중해진 것 같았고 퇴원 절차를 밟기 위해 이곳저곳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도 함께하고 있었으니 분위기는 꽤 화기애애했다.그러나 부승희의 눈엔 배여진과 선기현 두 사람이 일부러 대화를 피하는 게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엔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았다.눈치를 보던 부승희가 이승우에게 문자로 물었다.[기현 오빠 정말 믿어도 돼? 두 사람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기현이 말로는 이혼은 물 건너갔대. 여진이가 정말 잘못되면 두 가문이 철천지원수가 되는 거니까.]부승희는 문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배여진의 각도에 서서 생각하니 이게 더 마음이 아팠다. 옆에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고작 가문 때문에 자신의 곁을 지키는 것이었다.부승희는 핸드폰을 내려두고 배여진의 어머니와 함께 배여진을 부축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언니,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