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곧 도착했다.“보통 감기일 것 같아요. 여름에 온도 차가 심하니 감기 걸리기 쉽습니다.”부승희는 그 큰 웅덩이를 떠올리며 아마도 이승우가 병에 걸린 이유는 그 물 때문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둘 다 바쁘고 세 끼도 불규칙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아프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다.“그러면 일단 열 내릴 수 있도록 수액 놔주세요.”그녀가 말하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준비하고 이승우에게 수액을 놓아주었다.새벽 4시 이승우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부승희는 그의 안마의자에 기대어 졸며 지켜보고 있었다.“좀 어때?”“토할 것 같아.”“다 토했잖아? 아까 상황 보니까 이제 더 이상 토할 게 없을 것 같던데?”부승희가 앉은 자세로 물었다.이승우는 대답했다.“토할 게 없으니까 더 힘들어.”“좀 더 지나고 안 나아지지 않으면 병원에 데려다줄게.”부승희가 말했다.“응...”부승희는 다시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이승우는 물 한 병을 다 마시고 조금 기운을 차려서야 말할 힘이 생겼다.“우리 이렇게 보면 서로 의지하는 그런 느낌이네.”이승우는 또 말장난을 쳤다.“난 아니야. 난 전주에 온 뒤로 아픈 적 없잖아. 그런데 너는 두 번째 아니야?”부승희는 혀를 차며 말했다.“난 정말 두려워. 창업이 반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질까 봐.”“그건 안 되지. 아직 너와 결혼도 못 했는데.”부승희는 그의 말을 반박하려고 했지만 이승우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됐어.’“그러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네가 해줄 거야?”“내가 한 걸 너 먹을 수 있어?”“당연하지. 독약이라도 먹을 거야.”‘쳇.’부승희는 핸드폰을 꺼내며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너도 시켜줄게. 기다려.”시간이 너무 늦었고 경인에 있는 게 아니어서 주문해도 비싼 배달 음식만 가능했고 부승희는 메뉴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고르고 있었는데 맘에 드는 메뉴가 없었다.결국 그녀는
사골곰탕은 성산시를 대표하는 음식이었고 이승우의 어머니는 성산시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그녀의 주력 요리가 되었다.물론 어쩌면 그녀가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요리는 이것 하나뿐일지도 몰랐다.들리는 이야기로는 결혼은 하지 않겠다던 이승우의 아버지가 바로 이 요리에 마음과 입맛을 빼앗겼다고 한다.이승우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작은 뚝배기에 담긴 국물을 남김없이 비우고는 팔짱을 낀 채 여운을 곱씹었다.부승희는 그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얼른 눕기나 하라고 했고 그는 순순히 다시 누웠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만족스러운 표정이 남아 있었다.잠시 후 그는 몸을 돌려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옆에 앉아 있는 부승희를 바라봤다.“부승희, 너 이거 영상 보고 배운 거 아니지?”“...”“먹어보니까 알겠어. 꽤 잘 만들었더라.”“...그냥 타고난 거야.”“누구한테 배운 거야?”이승우가 갑자기 그렇게 묻자 부승희는 순간 멈칫했다.“내가 먹고 싶어서 배운 거야. 문제 있어?”“그럴 리가 없는데.”그가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몰고 갈 기세를 보이자 부승희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내가 진실을 말하면 너 충격받고 쓰러지지 않을 자신 있어?”이승우는 눈을 깜빡였다.“왜?”“정말 알고 싶어?”“말해 봐.”부승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해외에 있을 때 배웠어.”해외라는 단어가 나오자 이승우의 경계심이 최고조로 치솟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부승희는 무심한 얼굴로 그에게 잔인한 소식을 전했다.“모연준 씨, 할머니가 성산시 사람이야. 모연준 씨도 이 요리를 엄청 좋아했어. 그래서 우리가 연애할 때 내가 일부러 배워서 해줬지.”‘푹.’마치 가슴 한가운데 칼이 꽂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이승우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부승희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봤다.“이제 만족해?”‘굳이 물어보고는.’이승우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걸 참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부승희가 그의 어깨를 눌러
이승우는 어이없다는 듯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부승희는 두 팔을 가슴 앞에서 꼬고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이제 불만 없지?”이승우는 힘없이 대답했다.“없어. 얌전히 있을게.”부승희가 콧방귀를 뀌며 문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느긋하게 말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 잘 자.”이승우도 그녀가 피곤하다는 걸 알기에 더 붙잡지 않고 조용히 바라봤다.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온 듯했고 부승희는 두어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왜 그래?”“용 박사가 그러는데 두 시간 후에 네 체온을 다시 재야 한대.”“너 그냥 가. 내가 알아서 잴게.”‘됐어.’이승우의 무심한 말투를 들어보니 스스로 체온을 잴 가능성은 없었다.부승희는 얼굴을 한 번 문지르며 한숨을 쉬더니 거실로 나가 담요를 집어 들었고 그런 다음 다시 방으로 돌아와 그의 침대 옆 안마의자에 몸을 묻었다.“사람을 돕기로 했으면 끝까지 도와야지. 아무튼 네가 완전히 나으면 내게 보답하는 거 잊지 마.”이승우는 옆으로 돌아누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너 그냥 옆방 가서 자. 의자에서 자면 불편할 거야.”“시끄러워. 잔소리 그만해.”부승희는 자세를 조금 조정한 후 안마의자를 뒤로 젖혔다.“이거 꽤 편하네. 침대보다 더 편한 것 같기도 하고.”이승우는 입을 열려다 부승희가 눈을 감는 걸 보고는 말을 삼켰고 주변이 조용해지자 그는 옆으로 누운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1초 2초... 많은 시간이 흘렀다.부승희는 중간에 눈을 떴다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방금 만든 사골곰탕이 떠오르며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고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날카롭게 말했다.“뭘 봐? 안 자고?”“이제 잘 거야.”“안 자면 뒤돌아. 나 쳐다보지 마.”그녀가 말하자마자 이승우는 바로 눈을 감았다.‘쯧.’부승희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다시 눈을 감았지만 눈을 감자마자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여름의 해는 일찍 떠올랐고 다섯 시가 넘으면 창밖에서 이미 밝은 빛이 비쳤다.이승우는 조심스럽게 커튼을 닫고 부승희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다시 한번 그녀를 엿보게 되었다.그 해 그녀를 만나러 갔던 일이 떠올랐다.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희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대방은 괜찮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 부승원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마치 지난 세월의 일처럼 느껴졌고 그때는 오늘 같은 일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제 부승희는 이승우의 곁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다.전주로 온 지 반년이 넘었고 부승희는 항상 일을 성실히 하며 고생을 많이 했다. 미팅이 없으면 정성스럽게 화장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그녀의 일에 대한 열정과 의지는 어린 시절의 ‘거침없음'과 닮아서 그는 그녀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느꼈다.사실 부승희는 거의 서른이 되었고 이승우도 이미 서른을 넘었다.기억 속에서 반짝이던 그 시절이 이제는 10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이승우가 어렸을 때 부승희에 대한 첫인상은 친구 집의 말 안 듣는 어린 동생이었고 조금 더 커서는 둥글둥글하게 생긴 성깔이 있는 소녀였다.부승희가 이승우에게 몰래 입맞춤했을 때 그는 비로소 그녀를 제대로 신경 쓰게 되었다.그때 이승우는 매우 당황했으며 함께 농구나 수영할 때를 빌미로 부승원에게 그녀를 좀 타일러 달라고 간접적으로 물어봤지만 부승원은 태연하게 말했다.“너는 그냥 평범하고 인품도 평범하고 부승희는 아직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야. 시간이 지나고 나면 너한테 관심을 두지 않게 될 거니 너무 생각하지 마.”‘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부승원은 이승우보다 두세 살 많았고 이전에는 함께 어울리기도 했지만 부승원은 연정훈처럼 공부에 몰두한 타입으로 일찍 대학에 진학했다.그래서 부승희의 초등학교 시절은 친오빠가 돌보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처음에는 친구 집의 동생을 돌보는 정도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부승희가 자신에게 관
부승희가 술에 취했을 때 꼭 해변에 가서 조개를 줍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부승원은 무심한 오빠답게 그녀를 데려가서 재우기로 결심했지만 조개를 주러 가자는 제안에는 절대로 응할 생각이 없었다.“됐어. 내가 데려갈게.”그는 습관적으로 말을 꺼냈고 그동안 몇 년간 부승희의 엄마처럼 엉망이 된 상황을 얼마나 처리했는지 모른다.하지만 해변에 도착한 후 부승희는 두 개만 줍고 나서 그만 돌아가자며 이승우에게 업혀 가자고 했다.부승희가 해변에 앉으려 하자 금방 입은 새 옷이 망가질 것 같아 이승우는 머리가 아픈 듯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알았어. 업어줄게. 정말 넌 대단하다.”부승희는 기뻐하며 이승우에게 등을 돌리라고 한 후 그의 등에 올라탔다.“그만 얌전히 있어.”이승우는 그녀가 술에 취해 얌전히 있지 않는 걸 알기에 그런 말을 하며 허리를 굽혀 등을 두드렸다.“조심히 엎어. 너무 세게 움직이면 내가 바다에 던져버릴 수도 있어.”부승희는 몇 번 찡얼대며 결국 조심스럽게 그의 등에 올라탔고 그사이에 계속해서 그가 버틸 수 있을지 물었다.“나 좀 뚱뚱한데...”‘뚱뚱하다니? 어디가?’부승희는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엎으니 생각보다 가벼워서 놀랐다.“부승희 집에서 학대당해?”“응. 맞아.”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오빠에 관한 일상적인 악성 소문을 퍼뜨렸다.“우리 오빠는 밥도 안 주고 항상 나를 학대해.”이승우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냐?”“응. 진짜 힘들어.”“나중에 네 오빠한테 말할게. 집에서 못 살겠다며 우리 집으로 와. 우리 엄마도 딸을 원하고 계셔. 우리 집에서는 절대 너한테 그런 일 없을 거야.”그는 말을 이어갔지만 부승희는 갑자기 조용해졌다.“부승희? 잠들었어? 자지 마. 집에 가서 자야지 감기 걸린다.”“안 자.”부승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이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안 자면 됐어.”그는 그녀가 피곤한 걸 알기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한
“너의 여동생이 나를 좋아한다고.”그는 다시 한번 부승원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부승원은 무엇이든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내가 이 말을 듣는 이유는 나를 시험해 보려는 거야? 혹시 나중에 너희가 헤어지면 내가 너랑 사이가 나빠질까 봐 확인하려는 거야?”“이승우 미리 말해둘게. 나는 분명히 너랑 사이가 틀어질 거야. 난 여동생 하나밖에 없어. 네가 부승희를 다치게 하면 친구로서도 끝이야. 두 집안은 다시는 엮이지 않게 될 거야.”‘이거 봐. 얼마나 독하냐.’이승우는 마음속에서 피어오른 감정을 즉시 진정시켰다.그녀는 다름 아닌 부승희였고 그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승희에게 만큼은 상처를 줄 수 없었다.‘넘겨버리자. 어린 소녀의 마음은 언젠가 변할 수도 있어.’부승희가 이승우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 감정이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그는 이런 이유로 자신을 안심시키며 긴장을 풀려고 했지만 그런데도 아쉬움이 밀려왔다. 왜냐하면 혹시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면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이승우는 부승원의 말을 듣고 그 시점부터 부승희와 거리를 두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마음을 과소평가했다. 그녀는 그가 멀리해도 결국 자신에게 다가오는 방법을 찾았다. 조금씩 조금씩 그들 사이의 거리는 좁혀졌다.그는 계속해서 심리적인 방어를 하고 선을 넘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부승희에게 끌려 점점 그 궤도에서 벗어났다.언제부터였을까 부승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승우가 제일 먼저 알아챘고 그녀를 위해 하늘의 별이라도 따서 그녀의 집 앞에 걸어놓고 싶었다.시간이 지나면서 그도 점점 혼란스러워졌지만 부승희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들만의 비밀로 남게 되었다.그녀의 사랑은 뜨겁고 마치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하늘로 올라가며 떨어질 때조차 빛을 발하고 있었다.이승우는 점점 혼란스러워지며 갈등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녀의 좋은 짝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미 깊이 빠져들었다는 것을
비 오는 날, 검은색 벤틀리 뒷좌석에서.차 안의 어두운 불빛 때문에 남자의 허리춤을 휘감고 있는 여자의 희고 부드러운 다리가 어렴풋이 보였다.간지럽고 야릇한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안시연의 초점 잃은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허리를 튕기면서 눈앞의 사람이 빨리 끝내길 바랐다.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읍!”안시연이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고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남자가 몸짓을 멈추었다.“처음이야?”안시연은 몸을 불태우던 열기가 조금 식은 것 같았다. 잇따라 허전한 기분이 들더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다리를 더 단단히 감아 들었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연정훈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그는 여자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긴장 풀어.”차 안의 온도가 급상승했다.정신은 흐릿했지만 이상하게 감각은 예민했다.안시연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더니 어금니를 깨물고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그녀는 이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지기만 했다.두 달 전, 그녀는 주지혁의 팔짱을 끼고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석했었다. 연정훈은 성진대학교의 우수 졸업자 겸 학부 특임 교수로서 그 동문 모임에 참석했는데 두 사람에게 선남선녀라며 칭찬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주지혁은 바람을 피워 곧 명문 가문 아가씨와 결혼한다.그리고 그녀는 연정훈의 아래에 누워 그가 순결을 앗아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경인시에서의 연씨 가문은 권력이 대단했다.연정훈은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었지만 몇 년 전에 갑자기 교수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정인 그룹을 맡았다.그리고 지금의 그는 경인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사람들 앞에서는 번듯해 보이더니 이런 일을 할 때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안시연을 사정없이 괴롭혔다.안시연은 하마터면 그의 차에서 숨이 멎을 뻔해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일이 끝난 후, 그녀는 옷을 꼭 껴안고는 힘이 풀린 채
안시연은 경찰서에 세 시간의 취조를 받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는데, 이때 주지혁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녀는 어금니를 깨물다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지혁 씨,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요. 굳이 내 인생을 망칠 생각인가요?”그 8억은 분명 그가 그녀에게 직접 전화해 빼내라고 한 것이다.주지혁은 그녀의 분노를 예상했는지 덤덤하게 말했다.“시연 씨,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면 안 되었어요.”“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안 꺼내면 당신이 어떻게 조이현 씨를 안을 수 있겠어요?”안시연이 비꼬며 말했다.주지혁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이 뻔뻔스럽게 말했다.“나 다음 달에 이현이와 약혼해요. 하지만 난 이현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시연 씨, 3년만 기다려요. 3년 뒤면 내가 이혼하고 꼭 시연 씨와 결혼할게요.”안시연은 헛웃음이 나왔다.“그럼 3년 동안 나는 어떡하라고요.”“외국으로 유학 보내줄게요.”뻔뻔스럽네!명문 가문 출신인 조이현과 결혼은 해야겠고, 또 그 돈으로 안시연을 ‘내연녀’로 만들게 하다니, 어떻게 이런 염치없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안시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하지만 난 이미 다른 남자와 잤어요.”주지혁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농담은 하지 마요. 나 화나게 만들면 시연 씨에게 좋을 것 없어요.”안시연이 심호흡하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도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나 찾으러 와요. 내가 시연 씨 외국 보내줄게요.”“꿈 깨요!”주지혁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시연 씨, 만약 내가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시연 씨는 돈의 행방을 모두 찾아내는 것으로 결백을 증명해야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나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8억이면 시연 씨 감옥에서 10년 갇히고도 더 남아요. 시연 씨가 감옥에 들어가면 누가 외할머니를 돌보겠어요?”안시연에게 힘이 남아돌았다면 진작 그에게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내가 정말
“너의 여동생이 나를 좋아한다고.”그는 다시 한번 부승원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부승원은 무엇이든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내가 이 말을 듣는 이유는 나를 시험해 보려는 거야? 혹시 나중에 너희가 헤어지면 내가 너랑 사이가 나빠질까 봐 확인하려는 거야?”“이승우 미리 말해둘게. 나는 분명히 너랑 사이가 틀어질 거야. 난 여동생 하나밖에 없어. 네가 부승희를 다치게 하면 친구로서도 끝이야. 두 집안은 다시는 엮이지 않게 될 거야.”‘이거 봐. 얼마나 독하냐.’이승우는 마음속에서 피어오른 감정을 즉시 진정시켰다.그녀는 다름 아닌 부승희였고 그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승희에게 만큼은 상처를 줄 수 없었다.‘넘겨버리자. 어린 소녀의 마음은 언젠가 변할 수도 있어.’부승희가 이승우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 감정이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그는 이런 이유로 자신을 안심시키며 긴장을 풀려고 했지만 그런데도 아쉬움이 밀려왔다. 왜냐하면 혹시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면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이승우는 부승원의 말을 듣고 그 시점부터 부승희와 거리를 두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마음을 과소평가했다. 그녀는 그가 멀리해도 결국 자신에게 다가오는 방법을 찾았다. 조금씩 조금씩 그들 사이의 거리는 좁혀졌다.그는 계속해서 심리적인 방어를 하고 선을 넘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부승희에게 끌려 점점 그 궤도에서 벗어났다.언제부터였을까 부승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승우가 제일 먼저 알아챘고 그녀를 위해 하늘의 별이라도 따서 그녀의 집 앞에 걸어놓고 싶었다.시간이 지나면서 그도 점점 혼란스러워졌지만 부승희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들만의 비밀로 남게 되었다.그녀의 사랑은 뜨겁고 마치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하늘로 올라가며 떨어질 때조차 빛을 발하고 있었다.이승우는 점점 혼란스러워지며 갈등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녀의 좋은 짝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미 깊이 빠져들었다는 것을
부승희가 술에 취했을 때 꼭 해변에 가서 조개를 줍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부승원은 무심한 오빠답게 그녀를 데려가서 재우기로 결심했지만 조개를 주러 가자는 제안에는 절대로 응할 생각이 없었다.“됐어. 내가 데려갈게.”그는 습관적으로 말을 꺼냈고 그동안 몇 년간 부승희의 엄마처럼 엉망이 된 상황을 얼마나 처리했는지 모른다.하지만 해변에 도착한 후 부승희는 두 개만 줍고 나서 그만 돌아가자며 이승우에게 업혀 가자고 했다.부승희가 해변에 앉으려 하자 금방 입은 새 옷이 망가질 것 같아 이승우는 머리가 아픈 듯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알았어. 업어줄게. 정말 넌 대단하다.”부승희는 기뻐하며 이승우에게 등을 돌리라고 한 후 그의 등에 올라탔다.“그만 얌전히 있어.”이승우는 그녀가 술에 취해 얌전히 있지 않는 걸 알기에 그런 말을 하며 허리를 굽혀 등을 두드렸다.“조심히 엎어. 너무 세게 움직이면 내가 바다에 던져버릴 수도 있어.”부승희는 몇 번 찡얼대며 결국 조심스럽게 그의 등에 올라탔고 그사이에 계속해서 그가 버틸 수 있을지 물었다.“나 좀 뚱뚱한데...”‘뚱뚱하다니? 어디가?’부승희는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엎으니 생각보다 가벼워서 놀랐다.“부승희 집에서 학대당해?”“응. 맞아.”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오빠에 관한 일상적인 악성 소문을 퍼뜨렸다.“우리 오빠는 밥도 안 주고 항상 나를 학대해.”이승우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냐?”“응. 진짜 힘들어.”“나중에 네 오빠한테 말할게. 집에서 못 살겠다며 우리 집으로 와. 우리 엄마도 딸을 원하고 계셔. 우리 집에서는 절대 너한테 그런 일 없을 거야.”그는 말을 이어갔지만 부승희는 갑자기 조용해졌다.“부승희? 잠들었어? 자지 마. 집에 가서 자야지 감기 걸린다.”“안 자.”부승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이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안 자면 됐어.”그는 그녀가 피곤한 걸 알기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한
여름의 해는 일찍 떠올랐고 다섯 시가 넘으면 창밖에서 이미 밝은 빛이 비쳤다.이승우는 조심스럽게 커튼을 닫고 부승희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다시 한번 그녀를 엿보게 되었다.그 해 그녀를 만나러 갔던 일이 떠올랐다.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희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대방은 괜찮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 부승원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마치 지난 세월의 일처럼 느껴졌고 그때는 오늘 같은 일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제 부승희는 이승우의 곁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다.전주로 온 지 반년이 넘었고 부승희는 항상 일을 성실히 하며 고생을 많이 했다. 미팅이 없으면 정성스럽게 화장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그녀의 일에 대한 열정과 의지는 어린 시절의 ‘거침없음'과 닮아서 그는 그녀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느꼈다.사실 부승희는 거의 서른이 되었고 이승우도 이미 서른을 넘었다.기억 속에서 반짝이던 그 시절이 이제는 10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이승우가 어렸을 때 부승희에 대한 첫인상은 친구 집의 말 안 듣는 어린 동생이었고 조금 더 커서는 둥글둥글하게 생긴 성깔이 있는 소녀였다.부승희가 이승우에게 몰래 입맞춤했을 때 그는 비로소 그녀를 제대로 신경 쓰게 되었다.그때 이승우는 매우 당황했으며 함께 농구나 수영할 때를 빌미로 부승원에게 그녀를 좀 타일러 달라고 간접적으로 물어봤지만 부승원은 태연하게 말했다.“너는 그냥 평범하고 인품도 평범하고 부승희는 아직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야. 시간이 지나고 나면 너한테 관심을 두지 않게 될 거니 너무 생각하지 마.”‘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부승원은 이승우보다 두세 살 많았고 이전에는 함께 어울리기도 했지만 부승원은 연정훈처럼 공부에 몰두한 타입으로 일찍 대학에 진학했다.그래서 부승희의 초등학교 시절은 친오빠가 돌보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처음에는 친구 집의 동생을 돌보는 정도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부승희가 자신에게 관
이승우는 어이없다는 듯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부승희는 두 팔을 가슴 앞에서 꼬고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이제 불만 없지?”이승우는 힘없이 대답했다.“없어. 얌전히 있을게.”부승희가 콧방귀를 뀌며 문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느긋하게 말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 잘 자.”이승우도 그녀가 피곤하다는 걸 알기에 더 붙잡지 않고 조용히 바라봤다.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온 듯했고 부승희는 두어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왜 그래?”“용 박사가 그러는데 두 시간 후에 네 체온을 다시 재야 한대.”“너 그냥 가. 내가 알아서 잴게.”‘됐어.’이승우의 무심한 말투를 들어보니 스스로 체온을 잴 가능성은 없었다.부승희는 얼굴을 한 번 문지르며 한숨을 쉬더니 거실로 나가 담요를 집어 들었고 그런 다음 다시 방으로 돌아와 그의 침대 옆 안마의자에 몸을 묻었다.“사람을 돕기로 했으면 끝까지 도와야지. 아무튼 네가 완전히 나으면 내게 보답하는 거 잊지 마.”이승우는 옆으로 돌아누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너 그냥 옆방 가서 자. 의자에서 자면 불편할 거야.”“시끄러워. 잔소리 그만해.”부승희는 자세를 조금 조정한 후 안마의자를 뒤로 젖혔다.“이거 꽤 편하네. 침대보다 더 편한 것 같기도 하고.”이승우는 입을 열려다 부승희가 눈을 감는 걸 보고는 말을 삼켰고 주변이 조용해지자 그는 옆으로 누운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1초 2초... 많은 시간이 흘렀다.부승희는 중간에 눈을 떴다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방금 만든 사골곰탕이 떠오르며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고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날카롭게 말했다.“뭘 봐? 안 자고?”“이제 잘 거야.”“안 자면 뒤돌아. 나 쳐다보지 마.”그녀가 말하자마자 이승우는 바로 눈을 감았다.‘쯧.’부승희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다시 눈을 감았지만 눈을 감자마자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사골곰탕은 성산시를 대표하는 음식이었고 이승우의 어머니는 성산시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그녀의 주력 요리가 되었다.물론 어쩌면 그녀가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요리는 이것 하나뿐일지도 몰랐다.들리는 이야기로는 결혼은 하지 않겠다던 이승우의 아버지가 바로 이 요리에 마음과 입맛을 빼앗겼다고 한다.이승우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작은 뚝배기에 담긴 국물을 남김없이 비우고는 팔짱을 낀 채 여운을 곱씹었다.부승희는 그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얼른 눕기나 하라고 했고 그는 순순히 다시 누웠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만족스러운 표정이 남아 있었다.잠시 후 그는 몸을 돌려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옆에 앉아 있는 부승희를 바라봤다.“부승희, 너 이거 영상 보고 배운 거 아니지?”“...”“먹어보니까 알겠어. 꽤 잘 만들었더라.”“...그냥 타고난 거야.”“누구한테 배운 거야?”이승우가 갑자기 그렇게 묻자 부승희는 순간 멈칫했다.“내가 먹고 싶어서 배운 거야. 문제 있어?”“그럴 리가 없는데.”그가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몰고 갈 기세를 보이자 부승희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내가 진실을 말하면 너 충격받고 쓰러지지 않을 자신 있어?”이승우는 눈을 깜빡였다.“왜?”“정말 알고 싶어?”“말해 봐.”부승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해외에 있을 때 배웠어.”해외라는 단어가 나오자 이승우의 경계심이 최고조로 치솟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부승희는 무심한 얼굴로 그에게 잔인한 소식을 전했다.“모연준 씨, 할머니가 성산시 사람이야. 모연준 씨도 이 요리를 엄청 좋아했어. 그래서 우리가 연애할 때 내가 일부러 배워서 해줬지.”‘푹.’마치 가슴 한가운데 칼이 꽂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이승우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부승희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봤다.“이제 만족해?”‘굳이 물어보고는.’이승우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걸 참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부승희가 그의 어깨를 눌러
의사는 곧 도착했다.“보통 감기일 것 같아요. 여름에 온도 차가 심하니 감기 걸리기 쉽습니다.”부승희는 그 큰 웅덩이를 떠올리며 아마도 이승우가 병에 걸린 이유는 그 물 때문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둘 다 바쁘고 세 끼도 불규칙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아프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다.“그러면 일단 열 내릴 수 있도록 수액 놔주세요.”그녀가 말하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준비하고 이승우에게 수액을 놓아주었다.새벽 4시 이승우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부승희는 그의 안마의자에 기대어 졸며 지켜보고 있었다.“좀 어때?”“토할 것 같아.”“다 토했잖아? 아까 상황 보니까 이제 더 이상 토할 게 없을 것 같던데?”부승희가 앉은 자세로 물었다.이승우는 대답했다.“토할 게 없으니까 더 힘들어.”“좀 더 지나고 안 나아지지 않으면 병원에 데려다줄게.”부승희가 말했다.“응...”부승희는 다시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이승우는 물 한 병을 다 마시고 조금 기운을 차려서야 말할 힘이 생겼다.“우리 이렇게 보면 서로 의지하는 그런 느낌이네.”이승우는 또 말장난을 쳤다.“난 아니야. 난 전주에 온 뒤로 아픈 적 없잖아. 그런데 너는 두 번째 아니야?”부승희는 혀를 차며 말했다.“난 정말 두려워. 창업이 반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질까 봐.”“그건 안 되지. 아직 너와 결혼도 못 했는데.”부승희는 그의 말을 반박하려고 했지만 이승우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됐어.’“그러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네가 해줄 거야?”“내가 한 걸 너 먹을 수 있어?”“당연하지. 독약이라도 먹을 거야.”‘쳇.’부승희는 핸드폰을 꺼내며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너도 시켜줄게. 기다려.”시간이 너무 늦었고 경인에 있는 게 아니어서 주문해도 비싼 배달 음식만 가능했고 부승희는 메뉴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고르고 있었는데 맘에 드는 메뉴가 없었다.결국 그녀는
학생 시절 이승우는 누구보다도 인기가 많았다. 그보다 몇 년 선배인 연정훈과 부승원도 인기 있는 인물이었지만 이승우를 압도할 수 없었다.가문이 좋고 외모도 뛰어나며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그였기에 어디서든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당시 경인국중에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 여학생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이승우가 누구와 사귀고 누구와 헤어졌는지 모두가 빠르게 큰 화제가 되었다.하지만 그 해 운동회 이후 학교 내에서 매우 비정상적이고 중2병 같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부승희가 이승우의 진정한 사랑이며 두 집안은 이미 결혼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승우는 반항적이라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결국 마음속에서는 부승희가 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해 부승희는 1등은커녕 완주조차 가까스로 할 뻔했다.그때 그녀를 비웃던 그 남자아이는 화를 삼키지 못하고 관중석에서 그녀의 비참한 모습을 보기 위해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부승희의 리듬이 깨졌고 마지막 한 바퀴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부승희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끝났어. 큰 망신이야. 이승우가 치어리더를 데리고 곡 올 텐데.’이승우는 곧 치어리더를 데리고 올 줄 알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허풍을 떨었다고 생각한 듯 치어리더도 친구들도 없이 혼자만 왔다.마지막 한 바퀴는 그가 그녀와 함께 달려줬다.장거리 달리기는 본래 인기가 없는 종목이었지만 마지막 한 바퀴에서 그들 둘만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의 가장 큰 화제가 되었다.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학교 웹사이트에서 그들이 함께 찍힌 사진을 본 순간이었다. 물론 다양한 추측들이 터무니없고 바보 같았지만 그날 밤 그녀는 계속 그 사이트를 들여다보며 심지어 다른 계정을 만들어 그 열기를 즐기려 했다.숨이 가쁘고 죽을 것 같았을 때 그는 여유롭게 그녀의 옆에서 달리며 리듬에 맞춰 숨을 쉬고 괜찮다고 달리지 못해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10월의 오후는 그다지 시원하지 않았다.운동장도 덥
부승희는 반쯤 잠든 채 중학교 2학년 때의 운동회를 떠올렸다. 반의 여자아이들은 좀처럼 참가하려 하지 않았지만 최소 인원 규정 때문에 결국 제비를 뽑아야 했고 운 나쁘게도 반우희가 장거리 달리기에 걸리고 말았다.그때 그녀는 그렇게 날씬하지 않았고 뛰는 모습도 예쁘지 않았다. 반에서 한 남학생이 그녀를 좋아해서 온갖 방법으로 관심을 끌려고 했지만 부승희가 관심을 주지 않자 그는 점점 비난으로 태도를 바꿔갔다.“부승희, 너 요즘 살찐 거 알아? 뛰는데 다리가 출렁거리더라.”‘헛소리.’부승희는 원래 기가 센 성격이라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날 오후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들을 이끌고 학교 후문으로 갔다. 그리고 그 멍청이를 붙잡아 제대로 본때를 보여줬다.하지만 그 남자애의 말은 이상하게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그녀는 다리가 좀 두꺼운 편이라 달리기도 빠르지 않아서 아마 꼴찌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경인국중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건물은 연결되어 있었고 고등학교는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래서 중학교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면 고등학생들이 구경하러 오곤 했다.그때 부승희는 만약 이승우가 친구들을 데리고 구경 왔을 때 내가 통통한 몸으로 뒤에서 헉헉거리며 뛰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창피할까 하고 생각했다.그날 이후 그녀는 매일 방과 후 운동장에서 연습하며 다이어트를 시작했다.다만 대회가 임박했을 때도 그녀는 별로 살이 빠지지 않았고 달리기 속도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어느 날 밤 부승희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관중석에 혼자 앉아 있었고 헉헉 숨을 몰아쉬며 종아리 살을 꼬집어 보니 왠지 우울했다.부승희는 내일 이승우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의자가 톡톡 두드려졌고 고개를 돌려보니 위쪽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서 있는 사람이 보였는데 그것은 바로 이승우였다.그는 농구부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아마 방금 훈련을 마친 듯했다. 그는 웃으며 위에서 쪼그려 앉았고 여느 때처럼 가벼운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이게
부승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네가 나설 필요 있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부르다니 당연히 내가 직접 그들을 혼내줘야지.”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먼저 이승우의 집으로 가자고 지시했다.이승우는 온몸이 엉망이었고 더러워서 자꾸 의자에 기대는 것도 불편해하며 집까지 몸이 경직되어 갔다.두 사람은 같은 층에 살고 있었고 부승희도 이승우의 집에 함께 들어갔다.이승우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부승희가 전화를 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삼촌, 일 처리가 너무 미흡해요. 저 사람들 분명히 범죄 조직과 연관이 있어요. 잡을 생각은 없으신가요?”그는 부승희 앞에 다가가서 수건을 던지고 그녀에게 전화를 넘기라고 신호를 보냈다.부승희는 귀찮아했지만 기꺼이 전화를 넘겨주었고 막 전화를 건네려던 찰나 부승희는 이승우가 잠옷 바지만 입고 상반신을 벗고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았다.부승희는 그를 두 번 보고는 소파로 옮겨갔다.이승우는 전화를 한 뒤 몇 마디를 주고받고 전화를 끊고 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그들을 좀 혼내줘요. 너무 과하게 하진 말고.”“과하게 하지 말라니. 그 사람들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불렀어.”부승희가 끼어들었다.이승우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말했다.“알아서 하세요. 하지만 선을 지켜야 합니다.”그리고 전화를 끊었다.부승희는 소파에 기대면서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정말 어이없어.’부승희는 경인에서 제멋대로 하지는 못했고 이런 일을 당해본 적은 없었다. 원주에서 사기를 당하고 이제는 전주에서 몇 명의 깡패 같은 택시 기사들까지 쫓아왔다.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저 사람들이 확실히 범죄 조직과 연관된 것 같아. 아니면 어떻게 감히 우리한테 이런 일을 벌였겠어?”그녀는 자신과 이승우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말했다.“그들 뒤에는 누군가 있을지도 몰라.”이승우는 부승희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하며 그녀 옆에 앉아서 머리를 닦으며 말했다.“그들도 우리가 누구인지 잘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