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네가 나설 필요 있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부르다니 당연히 내가 직접 그들을 혼내줘야지.”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먼저 이승우의 집으로 가자고 지시했다.이승우는 온몸이 엉망이었고 더러워서 자꾸 의자에 기대는 것도 불편해하며 집까지 몸이 경직되어 갔다.두 사람은 같은 층에 살고 있었고 부승희도 이승우의 집에 함께 들어갔다.이승우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부승희가 전화를 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삼촌, 일 처리가 너무 미흡해요. 저 사람들 분명히 범죄 조직과 연관이 있어요. 잡을 생각은 없으신가요?”그는 부승희 앞에 다가가서 수건을 던지고 그녀에게 전화를 넘기라고 신호를 보냈다.부승희는 귀찮아했지만 기꺼이 전화를 넘겨주었고 막 전화를 건네려던 찰나 부승희는 이승우가 잠옷 바지만 입고 상반신을 벗고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았다.부승희는 그를 두 번 보고는 소파로 옮겨갔다.이승우는 전화를 한 뒤 몇 마디를 주고받고 전화를 끊고 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그들을 좀 혼내줘요. 너무 과하게 하진 말고.”“과하게 하지 말라니. 그 사람들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불렀어.”부승희가 끼어들었다.이승우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말했다.“알아서 하세요. 하지만 선을 지켜야 합니다.”그리고 전화를 끊었다.부승희는 소파에 기대면서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정말 어이없어.’부승희는 경인에서 제멋대로 하지는 못했고 이런 일을 당해본 적은 없었다. 원주에서 사기를 당하고 이제는 전주에서 몇 명의 깡패 같은 택시 기사들까지 쫓아왔다.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저 사람들이 확실히 범죄 조직과 연관된 것 같아. 아니면 어떻게 감히 우리한테 이런 일을 벌였겠어?”그녀는 자신과 이승우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말했다.“그들 뒤에는 누군가 있을지도 몰라.”이승우는 부승희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하며 그녀 옆에 앉아서 머리를 닦으며 말했다.“그들도 우리가 누구인지 잘 모
부승희는 반쯤 잠든 채 중학교 2학년 때의 운동회를 떠올렸다. 반의 여자아이들은 좀처럼 참가하려 하지 않았지만 최소 인원 규정 때문에 결국 제비를 뽑아야 했고 운 나쁘게도 반우희가 장거리 달리기에 걸리고 말았다.그때 그녀는 그렇게 날씬하지 않았고 뛰는 모습도 예쁘지 않았다. 반에서 한 남학생이 그녀를 좋아해서 온갖 방법으로 관심을 끌려고 했지만 부승희가 관심을 주지 않자 그는 점점 비난으로 태도를 바꿔갔다.“부승희, 너 요즘 살찐 거 알아? 뛰는데 다리가 출렁거리더라.”‘헛소리.’부승희는 원래 기가 센 성격이라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날 오후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들을 이끌고 학교 후문으로 갔다. 그리고 그 멍청이를 붙잡아 제대로 본때를 보여줬다.하지만 그 남자애의 말은 이상하게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그녀는 다리가 좀 두꺼운 편이라 달리기도 빠르지 않아서 아마 꼴찌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경인국중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건물은 연결되어 있었고 고등학교는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래서 중학교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면 고등학생들이 구경하러 오곤 했다.그때 부승희는 만약 이승우가 친구들을 데리고 구경 왔을 때 내가 통통한 몸으로 뒤에서 헉헉거리며 뛰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창피할까 하고 생각했다.그날 이후 그녀는 매일 방과 후 운동장에서 연습하며 다이어트를 시작했다.다만 대회가 임박했을 때도 그녀는 별로 살이 빠지지 않았고 달리기 속도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어느 날 밤 부승희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관중석에 혼자 앉아 있었고 헉헉 숨을 몰아쉬며 종아리 살을 꼬집어 보니 왠지 우울했다.부승희는 내일 이승우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의자가 톡톡 두드려졌고 고개를 돌려보니 위쪽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서 있는 사람이 보였는데 그것은 바로 이승우였다.그는 농구부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아마 방금 훈련을 마친 듯했다. 그는 웃으며 위에서 쪼그려 앉았고 여느 때처럼 가벼운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이게
학생 시절 이승우는 누구보다도 인기가 많았다. 그보다 몇 년 선배인 연정훈과 부승원도 인기 있는 인물이었지만 이승우를 압도할 수 없었다.가문이 좋고 외모도 뛰어나며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그였기에 어디서든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당시 경인국중에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 여학생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이승우가 누구와 사귀고 누구와 헤어졌는지 모두가 빠르게 큰 화제가 되었다.하지만 그 해 운동회 이후 학교 내에서 매우 비정상적이고 중2병 같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부승희가 이승우의 진정한 사랑이며 두 집안은 이미 결혼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승우는 반항적이라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결국 마음속에서는 부승희가 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해 부승희는 1등은커녕 완주조차 가까스로 할 뻔했다.그때 그녀를 비웃던 그 남자아이는 화를 삼키지 못하고 관중석에서 그녀의 비참한 모습을 보기 위해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부승희의 리듬이 깨졌고 마지막 한 바퀴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부승희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끝났어. 큰 망신이야. 이승우가 치어리더를 데리고 곡 올 텐데.’이승우는 곧 치어리더를 데리고 올 줄 알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허풍을 떨었다고 생각한 듯 치어리더도 친구들도 없이 혼자만 왔다.마지막 한 바퀴는 그가 그녀와 함께 달려줬다.장거리 달리기는 본래 인기가 없는 종목이었지만 마지막 한 바퀴에서 그들 둘만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의 가장 큰 화제가 되었다.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학교 웹사이트에서 그들이 함께 찍힌 사진을 본 순간이었다. 물론 다양한 추측들이 터무니없고 바보 같았지만 그날 밤 그녀는 계속 그 사이트를 들여다보며 심지어 다른 계정을 만들어 그 열기를 즐기려 했다.숨이 가쁘고 죽을 것 같았을 때 그는 여유롭게 그녀의 옆에서 달리며 리듬에 맞춰 숨을 쉬고 괜찮다고 달리지 못해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10월의 오후는 그다지 시원하지 않았다.운동장도 덥
의사는 곧 도착했다.“보통 감기일 것 같아요. 여름에 온도 차가 심하니 감기 걸리기 쉽습니다.”부승희는 그 큰 웅덩이를 떠올리며 아마도 이승우가 병에 걸린 이유는 그 물 때문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둘 다 바쁘고 세 끼도 불규칙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아프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다.“그러면 일단 열 내릴 수 있도록 수액 놔주세요.”그녀가 말하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준비하고 이승우에게 수액을 놓아주었다.새벽 4시 이승우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부승희는 그의 안마의자에 기대어 졸며 지켜보고 있었다.“좀 어때?”“토할 것 같아.”“다 토했잖아? 아까 상황 보니까 이제 더 이상 토할 게 없을 것 같던데?”부승희가 앉은 자세로 물었다.이승우는 대답했다.“토할 게 없으니까 더 힘들어.”“좀 더 지나고 안 나아지지 않으면 병원에 데려다줄게.”부승희가 말했다.“응...”부승희는 다시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이승우는 물 한 병을 다 마시고 조금 기운을 차려서야 말할 힘이 생겼다.“우리 이렇게 보면 서로 의지하는 그런 느낌이네.”이승우는 또 말장난을 쳤다.“난 아니야. 난 전주에 온 뒤로 아픈 적 없잖아. 그런데 너는 두 번째 아니야?”부승희는 혀를 차며 말했다.“난 정말 두려워. 창업이 반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질까 봐.”“그건 안 되지. 아직 너와 결혼도 못 했는데.”부승희는 그의 말을 반박하려고 했지만 이승우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됐어.’“그러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네가 해줄 거야?”“내가 한 걸 너 먹을 수 있어?”“당연하지. 독약이라도 먹을 거야.”‘쳇.’부승희는 핸드폰을 꺼내며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너도 시켜줄게. 기다려.”시간이 너무 늦었고 경인에 있는 게 아니어서 주문해도 비싼 배달 음식만 가능했고 부승희는 메뉴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고르고 있었는데 맘에 드는 메뉴가 없었다.결국 그녀는
사골곰탕은 성산시를 대표하는 음식이었고 이승우의 어머니는 성산시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그녀의 주력 요리가 되었다.물론 어쩌면 그녀가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요리는 이것 하나뿐일지도 몰랐다.들리는 이야기로는 결혼은 하지 않겠다던 이승우의 아버지가 바로 이 요리에 마음과 입맛을 빼앗겼다고 한다.이승우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작은 뚝배기에 담긴 국물을 남김없이 비우고는 팔짱을 낀 채 여운을 곱씹었다.부승희는 그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얼른 눕기나 하라고 했고 그는 순순히 다시 누웠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만족스러운 표정이 남아 있었다.잠시 후 그는 몸을 돌려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옆에 앉아 있는 부승희를 바라봤다.“부승희, 너 이거 영상 보고 배운 거 아니지?”“...”“먹어보니까 알겠어. 꽤 잘 만들었더라.”“...그냥 타고난 거야.”“누구한테 배운 거야?”이승우가 갑자기 그렇게 묻자 부승희는 순간 멈칫했다.“내가 먹고 싶어서 배운 거야. 문제 있어?”“그럴 리가 없는데.”그가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몰고 갈 기세를 보이자 부승희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내가 진실을 말하면 너 충격받고 쓰러지지 않을 자신 있어?”이승우는 눈을 깜빡였다.“왜?”“정말 알고 싶어?”“말해 봐.”부승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해외에 있을 때 배웠어.”해외라는 단어가 나오자 이승우의 경계심이 최고조로 치솟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부승희는 무심한 얼굴로 그에게 잔인한 소식을 전했다.“모연준 씨, 할머니가 성산시 사람이야. 모연준 씨도 이 요리를 엄청 좋아했어. 그래서 우리가 연애할 때 내가 일부러 배워서 해줬지.”‘푹.’마치 가슴 한가운데 칼이 꽂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이승우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부승희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봤다.“이제 만족해?”‘굳이 물어보고는.’이승우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걸 참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부승희가 그의 어깨를 눌러
이승우는 어이없다는 듯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부승희는 두 팔을 가슴 앞에서 꼬고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이제 불만 없지?”이승우는 힘없이 대답했다.“없어. 얌전히 있을게.”부승희가 콧방귀를 뀌며 문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느긋하게 말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 잘 자.”이승우도 그녀가 피곤하다는 걸 알기에 더 붙잡지 않고 조용히 바라봤다.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온 듯했고 부승희는 두어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왜 그래?”“용 박사가 그러는데 두 시간 후에 네 체온을 다시 재야 한대.”“너 그냥 가. 내가 알아서 잴게.”‘됐어.’이승우의 무심한 말투를 들어보니 스스로 체온을 잴 가능성은 없었다.부승희는 얼굴을 한 번 문지르며 한숨을 쉬더니 거실로 나가 담요를 집어 들었고 그런 다음 다시 방으로 돌아와 그의 침대 옆 안마의자에 몸을 묻었다.“사람을 돕기로 했으면 끝까지 도와야지. 아무튼 네가 완전히 나으면 내게 보답하는 거 잊지 마.”이승우는 옆으로 돌아누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너 그냥 옆방 가서 자. 의자에서 자면 불편할 거야.”“시끄러워. 잔소리 그만해.”부승희는 자세를 조금 조정한 후 안마의자를 뒤로 젖혔다.“이거 꽤 편하네. 침대보다 더 편한 것 같기도 하고.”이승우는 입을 열려다 부승희가 눈을 감는 걸 보고는 말을 삼켰고 주변이 조용해지자 그는 옆으로 누운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1초 2초... 많은 시간이 흘렀다.부승희는 중간에 눈을 떴다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방금 만든 사골곰탕이 떠오르며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고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날카롭게 말했다.“뭘 봐? 안 자고?”“이제 잘 거야.”“안 자면 뒤돌아. 나 쳐다보지 마.”그녀가 말하자마자 이승우는 바로 눈을 감았다.‘쯧.’부승희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다시 눈을 감았지만 눈을 감자마자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여름의 해는 일찍 떠올랐고 다섯 시가 넘으면 창밖에서 이미 밝은 빛이 비쳤다.이승우는 조심스럽게 커튼을 닫고 부승희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다시 한번 그녀를 엿보게 되었다.그 해 그녀를 만나러 갔던 일이 떠올랐다.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희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대방은 괜찮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 부승원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마치 지난 세월의 일처럼 느껴졌고 그때는 오늘 같은 일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제 부승희는 이승우의 곁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다.전주로 온 지 반년이 넘었고 부승희는 항상 일을 성실히 하며 고생을 많이 했다. 미팅이 없으면 정성스럽게 화장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그녀의 일에 대한 열정과 의지는 어린 시절의 ‘거침없음'과 닮아서 그는 그녀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느꼈다.사실 부승희는 거의 서른이 되었고 이승우도 이미 서른을 넘었다.기억 속에서 반짝이던 그 시절이 이제는 10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이승우가 어렸을 때 부승희에 대한 첫인상은 친구 집의 말 안 듣는 어린 동생이었고 조금 더 커서는 둥글둥글하게 생긴 성깔이 있는 소녀였다.부승희가 이승우에게 몰래 입맞춤했을 때 그는 비로소 그녀를 제대로 신경 쓰게 되었다.그때 이승우는 매우 당황했으며 함께 농구나 수영할 때를 빌미로 부승원에게 그녀를 좀 타일러 달라고 간접적으로 물어봤지만 부승원은 태연하게 말했다.“너는 그냥 평범하고 인품도 평범하고 부승희는 아직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야. 시간이 지나고 나면 너한테 관심을 두지 않게 될 거니 너무 생각하지 마.”‘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부승원은 이승우보다 두세 살 많았고 이전에는 함께 어울리기도 했지만 부승원은 연정훈처럼 공부에 몰두한 타입으로 일찍 대학에 진학했다.그래서 부승희의 초등학교 시절은 친오빠가 돌보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처음에는 친구 집의 동생을 돌보는 정도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부승희가 자신에게 관
부승희가 술에 취했을 때 꼭 해변에 가서 조개를 줍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부승원은 무심한 오빠답게 그녀를 데려가서 재우기로 결심했지만 조개를 주러 가자는 제안에는 절대로 응할 생각이 없었다.“됐어. 내가 데려갈게.”그는 습관적으로 말을 꺼냈고 그동안 몇 년간 부승희의 엄마처럼 엉망이 된 상황을 얼마나 처리했는지 모른다.하지만 해변에 도착한 후 부승희는 두 개만 줍고 나서 그만 돌아가자며 이승우에게 업혀 가자고 했다.부승희가 해변에 앉으려 하자 금방 입은 새 옷이 망가질 것 같아 이승우는 머리가 아픈 듯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알았어. 업어줄게. 정말 넌 대단하다.”부승희는 기뻐하며 이승우에게 등을 돌리라고 한 후 그의 등에 올라탔다.“그만 얌전히 있어.”이승우는 그녀가 술에 취해 얌전히 있지 않는 걸 알기에 그런 말을 하며 허리를 굽혀 등을 두드렸다.“조심히 엎어. 너무 세게 움직이면 내가 바다에 던져버릴 수도 있어.”부승희는 몇 번 찡얼대며 결국 조심스럽게 그의 등에 올라탔고 그사이에 계속해서 그가 버틸 수 있을지 물었다.“나 좀 뚱뚱한데...”‘뚱뚱하다니? 어디가?’부승희는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엎으니 생각보다 가벼워서 놀랐다.“부승희 집에서 학대당해?”“응. 맞아.”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오빠에 관한 일상적인 악성 소문을 퍼뜨렸다.“우리 오빠는 밥도 안 주고 항상 나를 학대해.”이승우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냐?”“응. 진짜 힘들어.”“나중에 네 오빠한테 말할게. 집에서 못 살겠다며 우리 집으로 와. 우리 엄마도 딸을 원하고 계셔. 우리 집에서는 절대 너한테 그런 일 없을 거야.”그는 말을 이어갔지만 부승희는 갑자기 조용해졌다.“부승희? 잠들었어? 자지 마. 집에 가서 자야지 감기 걸린다.”“안 자.”부승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이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안 자면 됐어.”그는 그녀가 피곤한 걸 알기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한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