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뭐라고 그랬어요?”엄청난 비밀을 들은 것처럼 원영이 두 팔로 최민지를 흔들며 흥분해서 물었다.“JS 그룹의 그분, 여자한테 관심 없다고 하던데, 아니에요? 어떻게 여신이 있을 수가 있죠? 게다가 그 여신이 우리 회사에 곧 임명될 CEO란 말이에요?“최민지가 씩 웃으며 원영의 손을 툭툭 두드렸다.“저런, 정보가 그렇게 부족해서 어떻게 직장 생활을 하시겠어요? 재벌가에서 돌아가는 일에 무지하면 대표님 사무실에서 어떻게 일하시려고 그래요.”그러자 최민지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민지 언니가 한 수 가르쳐 주세요~”그제야 최민지가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고 말했다.“이 대표님이랑 우리 이사장님 따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 사이였대요. 찌라시긴 하지만, 5년 전에 이 대표님께서 청혼하셨는데 아씨가 학업 때문에 거절했대요. 그 일로 둘 사이에 문제가 약간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5년 동안 연락을 끊었대요. 하지만 아씨가 귀국하자마자 이 대표님께서 직접 공항으로 마중 나갔어요. 그럼 이 대표님께서 아씨를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하는지 이걸로 설명 끝 아닌가요?”원영은 과장된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고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세상에나! 완전 로맨스 드라마 같아요!”하지만 듣고 있던 서유는 가슴이 턱 막히며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이승하가 애인 계약을 앞당겨 끝냈던 이유는 그의 여신님께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면서 왜 5년 전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던 것일까?심지어 하룻밤 자고 나서는 애인 계약을 맺자고 강압적으로 나오기까지 했었다.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잘 믿기지 않았다. 최민지에게 어디에서 들은 소문이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대표님 전속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열렸다.이사장의 비서 허민과 몇 명의 고위층들이 먼저 내렸고 깍듯한 태도로 허리를 숙여 엘리베이터 안을 향해 말했다.“이 대표님, 연 대표님, 대표님 사무 구역에 도착했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말이 끝
간단한 소개와 인사말을 마친 연지유가 이승하의 팔짱을 끼고 허민과 함께 대표님 사무실로 걸어갔다.원영은 목을 길게 빼고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부러워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부임한 첫날부터 이 대표님께서 직접 데려다주시는 거 봐요. 설마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대표님의 사랑스러운 여자친구 뭐 그런 건가요?”최민지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혀를 끌끌 찼다.“이 속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지 모르시나 봐요? 귀국하자마자 대표님 자리부터 꿰찼으니 이온 인터내셔널의 주주들이 다들 옳다구나 하고 가만히 있겠어요? 선임 된 첫날부터 이 대표님께서 직접 데려다주시는 건 주주들에게 연 대표님 뒤엔 JS 그룹이 받쳐주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죠!”부러움이 한도치를 넘은 원영이 턱을 받치고 중얼거렸다.“이렇게나 빨리 여신님을 위해 앞날 걱정까지 다 해주시다니. 정말 로맨티시스트가 따로 없네요.”최민지도 부러움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이 사장님 딸만 아니었다면 서울에서 권력을 주름잡는 남자의 눈에 들기나 했겠어요?”하지만 원영은 동의하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연 대표님은 이미 아주 훌륭하세요. 학력도 높지 얼굴도 예쁘지… 그러고 보니까 얼굴이 약간…”원영이 서유를 바라봤다.“서유 씨랑 닮았는데요…?”최민지가 바싹 다가와 서유를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어머 웬일이래. 정말 닮은 거 같은데요? 하지만 저는 서유 씨가 더 예쁘다고 생각해요.”“장난 그만 쳐요.”창백한 얼굴로 한마디 하고 나서 서유는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곧 쓰러질 듯이 연약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원영이 물었다.“서유 씨 무슨 일 있는 걸까요?”최민지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아마도 연 대표님이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대표님의 운명을 가지지 못해서 질투 났나 봐요.”원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항상 앞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달랐던 최민지였으니 더는 얘기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화장실에서 서유는 빠르게 심장의 통증을 억제하는 약을 꺼내 물도 없이 삼켜버렸
어떻게 심장이 터져나갈 듯이 아플 수가 있을까?가까스로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을 손으로 꾹 누르며 서유는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한시라도 빨리 떠나야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는 것에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이 견디지 못할까 봐, 참지 못하고 이승하에게 달려가 왜 자신을 대체품으로 사용했는지 따져 물을까 두려웠다.사직서를 작성하고 나서 그녀는 대표님 사무실의 책임자인 허민에게 가서 심사를 부탁했다.애초에 서유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허민은 몇 마디 부질없는 말을 내뱉곤 곧장 허락했다.퇴사 절차는 한 달이 걸렸다. 즉시 떠날 수 없게 되자 서유는 15일의 연차를 사용했다.그녀가 이온에서 일한 지 5년째였고 그간 연차를 모아두기만 했던 덕분에 마침 15일이 남아있었다. 퇴사하기 전에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허민은 이토록 다급해 보이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을 흘겼다.“물론 연차를 쓸 수는 있어요. 하지만 휴가가 끝나면 바로 돌아와 인수인계 잘하세요.”“네.”서유는 짤막한 대답을 남기고 가방을 챙겨 이온 인터내셔널을 빠져나왔다.다급한 걸음으로 회사를 빠져나올 때, 맞은 편에서 태안 그룹의 대표 임태진을 마주치게 되었다.업계에서 소문이 난 변태였는데 여자와 잠자리를 가지는 방식이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하다고 했다.그가 웃으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서유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에 뒤돌아서서 도망가려고 했다.하지만 임태진이 잽싸게 달려와 그녀의 팔을 낚아채며 품에 와락 안더니 물었다.“어디가?”그는 일부러 고개를 숙여 서유의 귓가에 가볍게 숨을 불어넣었고 서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안간힘을 써서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으나 그는 허리를 꽉 누르며 그녀를 제압했다.“몸에서 좋은 향기가 나네…”서유는 그의 손을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이러지 마세요.”“내가 뭘 하고 있는데?”임태진은 그녀의 귓불을 깨물며 껄렁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었으나 내뱉은 말은 혐오스러웠다.이
이승하의 뒷모습이 점차 멀어질 때야 이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아챈 임태진은 얼른 서유를 놓아주고 그에게 인사를 하러 달려갔다.하지만 이승하는 곧바로 차에 올라타 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열 몇 대의 호화스러운 차들이 그의 출발과 함께 떠났다. 허탕을 쳤으니 다시 서유나 찾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임태진이 뒤돌아서 보니 그녀는 이미 고객용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도망가고 없었다.그는 조금 전 서유의 볼에 키스했던 입술을 어루만지며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흥분으로 눈을 번뜩였다.“임구, 서유의 집 주소를 알아 와.”그의 뒤를 따라오던 임구가 바로 ‘네.’하고 대답했다.집에 돌아온 서유는 손에 든 가방을 내려놓고 약간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니 그곳에 찍힌 번호가 그녀를 인상 쓰게 만들었다.‘소수빈이 왜 내게 전화를 걸지?’잠시 의아했지만 이내 잠금화면을 풀고 전화를 받았다.“수빈 씨, 무슨 일이죠?‘격식을 차린 소수빈의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서유 씨, 조금 전 아파트를 청소할 때 남겨두신 물건을 발견했어요. 시간이 날 때 와서 가져가실래요?”서유는 이승하가 그녀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남긴 물건 때문이었다니. 심장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냥 버려주세요.”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리고 깔끔하게 소수빈과 이승하의 연락처를 모조리 삭제해버렸다.그녀는 어쩌면 이승하가 자신에게 먼저 연락할 거라는 망상을 어제까지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락처를 아까워서 지우지도 못했다.하지만 이제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완전히 마음이 죽어버린 것 같았다.그녀는 핸드폰을 끄고 소파에 새우처럼 웅크려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얼마나 잤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나게 되었다.요즘 가혜는 늦게까지 야근을 하는 일이 잦아 아예 열쇠를 그녀에게 준
서유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임태진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그가 그녀의 잠옷을 단숨에 벗겨버리고 더럽고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등을 어루만질 때, 서유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임태진!”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마구 주무르던 임태진의 손이 멈칫했다.죽여도 시원치 않을 듯한 눈빛으로 서유가 그를 노려봤다.“임태진, 오늘 함부로 날 대하면 내일 법원에 가서 널 고소할 거야.”마치 세상 재밌는 농담을 듣기라도 한 듯, 피식 웃으며 임태진이 답했다.“경찰도 무섭지 않은 내가 법원에 고소한다고 두려워할 것 같아?”서유는 주먹을 꽉 쥐고 힘주어 말했다.“당신 집안에 권력이 높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그럼 뭐?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어. 권력으로 더러운 짓을 덮으려 하면 내가 언론에 실명으로 널 고소할 거야.”임태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뭐, 그래. 언론에 나 폭로해봐. 실검에 안 오른 지 너무 오래됐나.”그의 말에서 가소롭다는 뜻이 뚜렷하게 전해지자 서유는 절망과 무력감에 휩싸였다. 왜 하필 일반인이 아닌, 재벌가 권력이 높은 집안의 변태 아들에게 찍힌 걸까? 그는 손쉽게 뉴스를 잠재울 수 있었고 그녀가 강하게 나온다 한들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서유는 점차 이성을 되찾으려 애썼다. 임태진 같은 사람을 마주할 때 강하게 나오는 건 소용이 없다. 그를 힘으로 이길 수도, 백으로 이길 수도 없었다. 자신을 구하려면 가식적으로 그에게 순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그녀는 결심한 듯,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이내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임 대표님, 일부러 고소하려고 하는 것도, 언론 얘기로 위협하려는 것도 아니에요. 도저히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이에서 잠자리를 가질 수 없었을 뿐이에요.”그녀의 말에 임태진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먹잇감을 놓아줄 리는 없었다. 그는 머리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깊이 빨아들이더니 말했다.“그렇지만 난 꼭 너랑 자고 싶은 걸 어떡해?”너무 역겨웠지
삼 개월 뒤면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임태진에게 삼 개월이라 했다.그때가 되면 그녀와 자고 싶어도 뼛가루만 남아있을 테니까.하지만 시간이 사흘로 줄어드니 못 견디게 괴로웠다.뭔가 더 말하려고 했으나 임태진이 갑자기 그녀를 확 놓아주었다. 드디어 숨을 고를 기회를 얻게 된 서유는 하려던 말을 삼켜버렸다.일단 오늘 밤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다.“자기야.”임태진은 허리를 숙여 그녀의 볼에 키스했다.“그럼 오늘은 일단 돌아갈게. 사흘 후, 내가 다시 너 데리러 올 거야.”서유는 그가 키스한 볼을 부여잡았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임태진 앞이므로 꾹 참고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르는 모습을 보고 임태진은 마음이 약간 놓인 듯 피식 웃더니 문 쪽으로 걸어갔다.문을 열기 전, 그가 걸음을 갑자기 우뚝 멈췄다.“아.”그가 고개를 돌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유를 바라보며 물었다.“자기야, 친구 이름이 정가혜지?"애써 괜찮은 척하던 서유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임태진이 정가혜를 알고 있는 걸 보니 이미 그녀의 뒷조사를 철저하게 해놓은 듯했다.누군가에게 샅샅이 들여다 보인 것 같은 기분은 너무 불쾌했다.“왜요?”그녀가 차갑게 묻자 임태진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아니, 그냥 알려주려고. 집에서 얌전히 날 기다리고 있으라고. 어디 쏘다니지 말고.”아무렇지 않은 듯한 내용이지만 그것이 위협임을 서유는 너무 잘 알았다.서유가 감히 도망간다면 그는 정가혜를 찾아 보복할 것이란 뜻이었다.우리 안에 갇혀 버린 듯한 꽉 막힌 느낌이 다시 그녀를 엄습했다. “가혜는 건드리지 마세요. 어디 가지 않고 기다릴 테니까.”무표정한 얼굴로 서유가 말했다.그제야 기분 좋은 듯 키스를 날리며 임태진이 말했다.“착하지.”’역겨워!‘서유는 힘껏 문을 닫고 안에서 걸어 잠근 후, 욕실로 달려갔다. 물을 틀고 욕조에 들어가 임태진이 키스하고 만졌던 곳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피부가 빨갛게 달아오르고 벗겨질 때까지 닦아도 여전히 더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임태진이 비서 임구를 보내 그녀를 데리러 왔다.서유는 가방을 꽉 붙잡고 마이바흐 한 대에 올라탔다.임구가 그녀를 바로 임태진의 집에 데려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쇼핑몰에 도착했다.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몇 명이 그녀를 에워싸고 허리까지 드리워진 긴 웨이브 머리를 정교하게 묶었고 연예인 뺨치는 메이크업까지 해주었다.어마어마한 가격의 이브닝드레스 한 세트는 마치 맞춤 제작한 듯 그녀의 몸에 꼭 맞았는데 모든 것이 완벽했다.게다가 목에 수십억을 호가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까지 거니 그녀의 고귀함과 우아함을 한껏 돋보여 인간이 아니라 여신 같다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그녀는 거울 속의 화려한 자신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아닌 듯 낯설었는데 오히려 연지아의 모습을 더 닮아있었다.만약 이승하가 지금의 그녀를 보게 된다면 일부러 연지아를 따라 하고 있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스타일을 완전히 변화시킨 후, 임구는 그녀를 나이트 레일로 데려갔다. 그곳은 서울의 가장 큰 돈세탁 소굴, 유명인이나 재벌가들만 드나드는 장소였다.고객의 프라이버시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감시 카메라 따윈 없었다. 있다고 해도 데이터를 손에 넣는 건 거의 불가능이었다.많은 재벌가 자제들이 이곳에서 더럽고 추악한 일을 벌이길 좋아했다. 임태진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아마도 십중팔구 그녀를 짓밟기 위해서였다.곧 그에게 처참히 범해지리라 생각하니 심장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층수를 따라 점점 빠르게, 불안하게 요동쳤다.꼭대기 층에 거의 도착할 때쯤에야 겨우 정신을 다잡고 손에 들린 가방을 꽉 잡았다.그녀는 임구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룸 입구까지 오게 되었다.임구가 VIP 귀빈 카드를 꺼내 긁자 화려하고 웅장한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야릇한 분위기의 조명이 쏟아졌고 느긋한 외국 음악이 낮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꽤 의외였다.그녀는 임태진의 품위가 클럽 같은 분위기를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곳은
“이 대표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긴 제 여자 친구 서유라고 합니다.”임태진의 당당한 소개에 서유는 멈칫했다.서유는 한때 자기가 그렇게 바라던 호칭을 변태 임태진에게서 들을 줄은 몰랐다.그녀가 원하는 남자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와인잔을 높이 들어 올릴 뿐이었다.마치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와 아무 관계도 없다는 듯이 무관심한 표정이었다.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이는 이승하에 임태진은 재빨리 서유의 턱을 들어 올렸다.“이 대표님, 여기 좀 봐주세요. 연지유 씨와 닮지 않았나요?”그는 오늘 동아 그룹과의 프로젝트 미팅에서 서유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연지유를 만났다.알아보니 그 여자는 얼마 전 귀국한 이승하의 여자 연지유였다.그는 급히 JS 그룹에 찾아가서 서유와 연지유의 닮은 얼굴을 빌어 이승하와 가까워졌다. 덕분에 오늘 이승하를 성공적으로 초대했다.임태진은 이승하가 자존심을 굽히고 초대에 응했으니 이 기회를 잡아 서부 개발 프로젝트를 모두 따낼 생각이었다.임태진의 말에 이승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도화살이 짙은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그는 잠시 살펴본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지유와 비교하지 마세요.”그 말은 칼날처럼 서유의 심장을 찔러 피를 흘리게 했다.“물론입니다. 어떻게 연지유 아씨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임태진은 그녀의 턱을 잡은 채 싸구려 물건을 보는 듯한 경멸스러운 눈빛을 하고서는 말했다.“이 여자는 고아입니다. 아무런 권력도 집안 배경도 없죠. 연지유 아씨는 동아 그룹의 외동딸에, 좋은 머리로 명문 대학까지 나오셨는데 어떻게 이런 여자가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그래, 그녀가 어떻게 비교 상대가 될까?이승하의 눈에 그녀는 그저 대체품일 뿐인데 진짜 주인과 비교할 수 있을까?서유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장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임태진이 서유를 비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
이하준은 그 순간, 이승하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마치 성인처럼 빛나는 그 모습에 그는 아버지가 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한순간에 완전히 압도당한 이하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이승하의 품에서 낮게 말했다.“아버지가 알고 있는 걸 전부 가르쳐 주신다면, 그때는 진심으로 인정할게요.”작은 아이를 상대로 주도권을 쥔 이승하는 이하준이 자신의 능력을 배우고 나중에 자신을 압도하려는 속셈임을 눈치챘다.하지만 미안하지만 이미 그가 아들을 길들이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하준이 다시는 반격할 수 없을 것이다.이승하는 이하준을 내려놓고 그의 눈앞에서 컴퓨터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프로그램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지능 문제가 모여 있어. 이 모든 문제를 풀어낸다면, 그때 가서 다른 걸 가르쳐 줄게.”그 말을 남기고 이승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섰다. 이하준은 뒤따라가며 물었다.“근데 아버지는 문제 푸는 것 말고도 다른 걸 할 줄 아세요?”이승하는 걸음을 멈추고, 작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하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너도 곧 알게 될 거야.”그 당시 이하준은 아버지가 무엇을 더 할 줄 아는지 몰랐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이승하의 도박 실력, 사격과 검술, 컴퓨터 및 AI 개발, 그리고 탁월한 경영 능력을 직접 목격한 후에야 그는 아버지의 진짜 능력을 깨달았다.지금의 이하준은 오직 하나의 목표만 가지고 있었다. 바로 프로그램 속의 모든 난제를 풀어내고 아버지를 압도한 뒤, 주도권을 되찾는 것이다.그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문제를 풀고 있는 동안, 이승하는 욕실 문 앞에 기대 서 있었다. 서유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서유는 깜짝 놀라 물었다.“저녁 먹으러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이승하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몸을 들어 올리며 가슴에 밀착시켰다.“고픈 건... 배가 아니야.”머리카락이 축축한 서유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만해요. 하준이가
‘저 멍청이한테 사과하라니, 이건 내 지능에 대한 모욕이야.’하지만 영구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도, 이하준은 결국 입을 열었다.“미안.”오뚝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손가락 사이로 살짝 눈을 뜨고 떠나가는 이하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형, 귀신 들린 거야?”이하준은 눈을 굴리며 대꾸도 하지 않고 거실로 돌아와서 이승하 앞에 섰다.“이미 사과했어요. 문제는요?”이승하는 우아하게 물 한 모금을 마시고는 일어섰다.“서재로 따라와.”이하준은 투덜대며 따라갔다. 아버지는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책상에 앉아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의자 가져와.”화를 꾹 참고 이하준은 하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의자 등을 붙잡고 있는 힘껏 끌었다. 그리고 힘겹게 의자를 책상 앞으로 옮기고 자리에 앉았다.그제야 이승하는 컴퓨터를 켜고 몇 가지 문제를 불러온 후, 화면을 이하준 쪽으로 돌렸다.“총 여섯 문제야. 수학, 컴퓨터, 천문학, 반중력, 철학, AI 각각 한 문제씩.”이하준은 이게 어린애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말했다.“반중력이 뭔지도 모르는데...”이승하는 냉정하게 대꾸했다.“그렇게 잘난 척했으면서 반중력이 뭔지도 몰라?”궁지에 몰린 이하준은 이를 악물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승하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한 시간 줄게. 못 풀면 깨끗이 인정해.”이하준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지만, 자존심 때문에 아버지와 한판 승부를 벌이기로 마음먹었다.아이는 손을 뻗어 컴퓨터를 받아 들고 작은 얼굴을 들고는 화면에 떠 있는 문제를 응시했다.이승하는 문제마다 프로그램을 설정해 두었다. 하나를 풀어야 다음 문제로 넘어갈 수 있었다. 첫 번째 문제부터 막힌 이하준은 점점 초조해졌다.책을 읽고 있던 이승하는 아이가 초조해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미소를 살짝 지었다.“못 풀겠으면 그냥 포기해.”이하준은 질 수 없다는 듯이, 이리저리 공식을 떠올리며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역시 천재답게, 즉석에서 배운 것도 금세 활용했다.하지만 이건 세계
갓 거실에 들어선 이승하는 이하율의 울음소리를 듣고 넥타이 매듭을 풀던 손을 잠시 멈췄다. 차가운 시선이 곧장 주방 문가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작은 실루엣으로 향했다.“이하준.”이승하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하준은 몸이 순간 굳었다. 눈에 띄던 웃음기를 싹 지우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이제 막 재킷을 벗어 집사에게 건네는 남자와 마주했다.“이리 와.”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묘하게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평소 안하무인이고 건방진 이하준도 그 미묘한 압박감에 발걸음을 옮겨 얌전히 다가갔다.이승하는 넥타이를 풀어 집사에게 건넨 후, 짙은 속눈썹을 내리며 자신 앞에 무표정으로 서 있는 이하준을 바라보았다.“하율이에게 사과해.”스스로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한 이하준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여전히 이승하에게 말 한마디 없이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행동으로 자신의 반항심을 드러내고 있었다.“문지기가 되고 싶다면 계속 서 있어. 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곧바로 하율이에게 사과해야 해.”이승하의 차가운 한마디는 이하준을 진퇴양난의 상황에 몰아넣었다. 짙은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이승하를 노려보았지만, 키 크고 외모가 빼어난 이 남자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신발을 갈아 신고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그 모습에 이하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작은 주먹을 꽉 쥐고는 억울함에 이를 악물었다.한편, 울며 엄마를 찾고 있던 이하율은 이하준이 벌서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을 그쳤다. 소매로 얼굴에 잔뜩 묻은 치즈를 닦고는 이하준 앞으로 뛰어가 통통한 코를 손으로 눌러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메롱~!”이하준은 이런 이하율을 멍청이라고 하는 것조차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하준은 어리석은 자와 논쟁할 필요 없다고 판단해 눈을 감고 이하율을 무시하기로 했다.정가혜가 있기에 이승하는 후원에 있는 서유를 찾지 않고 샤워를 마친 후, 서유가 보낸 IQ 테스트 결과를 확인했다. 한동안 꼼꼼히 살펴보다가 문
서유의 하소연을 듣고, 정가혜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눈썹을 찡그렸다.“아주버님은 꽤 똑똑해 보이던데. 머리도 좋을 테니 그분이 아이를 이끌면 되잖아.”그 말에 서유는 어쩐지 쑥스러워 고개를 숙였다.“그이야 회의 끝나면 돌아와서 신경 쓰겠다고는 했지만, 몇 년째 마음을 아이에게 쏟은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아마 크게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아.”정가혜는 서유의 셔츠 아래로 드러난 목과 어깨에 남은 짙은 흔적들을 보고 굳이 묻지 않아도 이승하의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참 대단하다. 하루하루 어떻게 그렇게 정력이 넘치지?”정가혜가 최근 이연석과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이런 농담을 서슴없이 하게 된 덕에, 서유는 더더욱 얼굴이 붉어졌다.“나만 붙잡고 있는 건 아니야. 회사 일도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어.”정가혜는 그녀를 힐끔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결정이 어려운 일이나 재무 회의 같은 걸 제외하고는 거의 집에만 있던데?”서유는 얼굴의 절반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아 가혜야, 넌 나를 도우러 온 거야? 아니면 날 놀리러 온 거야? 제발 다른 이야기 좀 하자.”정가혜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난 너를 도울 방법이 없어. 내 머리로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간신히 상대할 정도지, 네 천재 아들은 도저히 감당이 안 돼.”정가혜가 숙모로서 이하준의 신임을 얻은 건 그가 어릴 적 그녀의 모유를 먹은 적이 있어서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격 까칠한 이하준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그래도 걱정하지 마. 이 대표가 있잖아. 하준이가 잘못된 길로 갈 리 없을 거야.”사실 이승하가 아이에게 무심했던 건, 머릿속에 심어진 칩 때문에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온 신경을 서유에게 쏟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서유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그이가 아이를 가르친다 해도 선생님 몇 명을 붙여서 공부만 시키고 끝나버려. 정작 아이와 소통은 전혀 하지 않아.”정가혜는 웃음을 터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