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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6화

작가: 알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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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주진모는 택이의 부탁 때문에 그리고 마음이 가는 대로 기꺼이 택이로 살게 되었고 그녀가 진모라는 이름을 불러주기조차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 그는 택이가 되었고 택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완전히 택이가 되어버렸다. 가끔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자신이 택이인지 주진모인지 물어보곤 했었다.

몇 년 후, 두 아이를 낳고 살다가 그녀는 갑자기 그가 택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충격에 그를 떠나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택이인지 주진모인지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이 택이라고 기억을 잃었을 뿐이라고 제발 떠나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때의 육성아는 이미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어느새 주진모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까. 택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택이에게 미안했다. 평생 택이만 사랑하겠다고 다짐해놓고는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주진모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와 아이까지 낳게 되었다. 택이는 어떡하라고...

그녀는 고통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했다. 주진모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고 결국 그녀는 그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가 택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택이를 잊지 못하였다. 매년 기일이면 아이를 데리고 택이를 보러 갔었다. 아이를 데리고 간 이유는 택이한테 태어나지 못한 그 아이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 생은 택이와 먼저 떠난 아이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그다지 행복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택이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인생이 복잡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어찌 됐든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 부처님 앞에서 기도했다. 다음 생에는 택이를 꼭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다시 만나면 절대 택이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삶은 계속되었고 그녀는 여전히 주진모를 택이로 여겼다. 주진모도 그 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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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고 깨끗한 남자의 미소가 서유와 이승하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택이를 만날 생각에 들떠있던 마음도 그 웃음으로 인해 평온해졌다. 밖에서 아무거나 마시지 않던 이승하는 알록달록한 유리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은은한 차의 향기가 금세 입술 사이로 퍼져 나왔고 맛도 나름 괜찮았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가 다시 고개를 들고 주진모를 쳐다보았다.“두 사람이 많이 닮은 건 사실이지만 넌 택이가 아니야.”그 말은 이승하의 마음속에 택이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한테 택이는 유일한 존재였고 그 누구도 택이가 될 수 없었다. 아무리 닮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승하의 말에 주진모는 기쁘기도 했고 안심이 되었다.“대표님께서 저희를 구별할 수 있다는 건 택이가 대표님께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뜻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네요.”이승하는 눈을 내리며 쓸쓸한 마음을 감추었다.“네가 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널 본 순간 그게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후회로 가득 찬 남자의 얼굴을 보며 주진모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어 그를 위로했다. “절 택이로 생각해 주세요. 택이 대신 보스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힘들게 살아온 동생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혼자 가문의 덕을 보고 자라왔고 근심 걱정 없이 여태껏 살아왔다. 반면 택이는 비바람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니 불공평한 삶을 살아온 동생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평소 택이가 자신을 부르던 호칭- 보스. 그 말을 듣는데 떠났던 택이가 다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이 험난하고 생사의 고비를 넘길 만큼 어려운 여정이었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는 주진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방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찻잔을 내려놓고는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이승하를 향해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보스요.”예전에 택이도 그를 보스라고 부르는 것을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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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차갑게 그를 쳐다보았다.“왜요? 강중헌을 찾지 못하니 칩으로 절 통제하여 찾을 생각인가요?”강도윤의 말로는 그동안 상철수는 강중헌을 찾으려고 사방을 수소문했지만 강중헌은 이 세상에서 증발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상철수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를 찾아온 것이겠지.이승하의 의심에 상철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난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네. 자네한테 알려주고 싶은 게있어서 이리 찾아왔어. 이미 폭파 시스템을 파괴해 버렸으니 이제부터 칩의 통제를 받지 않을 걸세.”그 말에 이승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김해 3구역에서 돌아온 후에도 폭파 시스템을 파괴하려고 시도해 봤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칩을 직접 만든 자가 시스템을 직접 파괴했다는 말을 들으니 조금 충격받았다. “폭파 시스템은 파괴되었지만 그 칩은 바이러스가 있어. 칩을 꺼낸다면 감염되어 폭발할 수도 있어. 아마도 그 칩은 영원히 자네 머릿속에 있어야 할 것 같군.”이미 다 알고 있었던 이승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아마 자네의 수명에도 영향을 주겠지. 정확히 어떤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이 칩은 사람을 통제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었지만 사람의 몸에서 실험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이승하가 처음이었다. 결국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는 상철수도 예측할 수 없었다.여전히 말이 없는 이승하를 보고 그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먼 곳에서 상연훈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서유를 쳐다보았다.“서유가 아직까지 날 찾아와 따지지 않는 걸 보면 자네가 서유한테 칩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은 모양이군.”이승하가 서유에게 비밀로 한 것은 칩 때문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유가 자신을 걱정하는 게 싫어서 그녀한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남자답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서유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네 머릿속의 칩 바이러스는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어.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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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 쓰지 마요.” 서유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상연훈에게 말했다. “오빠 잘못이 아니잖아요. 오빠도 명령에 따랐을 뿐이고 오히려 나를 도와줬잖아요.” 상연훈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눈에 깃든 죄책감을 감추더니, 서유의 불룩한 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 이름은 정했어?” 서유는 그의 시선을 따라 배를 한번 내려다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요. 오빠, 좋은 이름 추천해 줄래요?” 상연훈의 시선이 서유를 기다리며 멀찍이 서 있는 남자를 향했다. “저분이 옆에 계신데 내가 어떻게 함부로 정해.” 서유도 고개를 들어 길쭉한 키와 단정한 외모, 그리고 고고한 기품을 가진 이승하를 바라봤다. “사실 저 사람은 겉으로만 차가워 보이는 거지 속은 참 따뜻해요. 오빠도 오래 지내다 보면 알게 될 거예요.” 이승하는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언제나 따뜻하게 대했다. 그래서 택이, 소수빈, 소지섭 같은 사람들이 평생토록 그를 따랐던 것이다. “이승하랑 오해 지낸다고?” 상연훈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앞으로 너랑 네 아이 보러 가는 게 전부일 거야. 그 사람과는 친해지기 어렵지 않을까 싶어. 어차피 우리 둘, 루드웰에서도 싸웠잖아.” 게다가 할아버지와 얽힌 일들 때문에 서로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할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끝내고 이승하가 원한다면, 서유를 위해 이전의 원한을 내려놓을 수도 있었다. “싸웠다고요?” 서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오빠, 그 사람 이길 수는 있었어요?” 서유의 의심에 상연훈은 소매를 걷어 단단한 팔뚝을 드러내며 턱을 치켜들었다. “네 오빠인 내가 이 팔 힘으로 그 사람한테 질 리가 있겠어?” 서유는 그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오빠, 의외로 대단한데요?” 상연훈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네가 네 남편을 너무 과대평가해서 그런 거지.” 서로 장난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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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30화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29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28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27화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26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25화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24화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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