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석은 정민재가 사 온 음식을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병원 근처에 환자용으로 적당한 음식점이 많은데 진짜 가장 안 맞는 곳을 선택했네요. 대단하십니다!”정민재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참았는지 겨우 분노를 억누르고는 차갑게 말했다.“앞으로는 내가 직접 요리해서 가져올 테니까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시죠.”하지만 안태석도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못 믿겠는데요? 내가 잘 보살핀 덕에 빨리 퇴원할 수 있었는데 하루도 안 돼 유산했잖아요. 그쪽한테는 더 이상 신뢰가 없어요.”그러자 정민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지아는 내 아내입니다. 왜 당신이 오지랖이에요? 유부녀와 거리를 두는 법도 모르는 겁니까?”곧 나는 국자를 세게 내려놓으며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당신이 남을 나무랄 자격이 있어? 당신 정자로 다른 여자에게 시험관 시술을 하는 것보다 더 선을 넘은 게 어딨는데.”안태석은 깜짝 놀라며 정민재를 쳐다보았다.정민재는 얼굴이 빨개지며 목소리가 나올 듯 말 듯 억누르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벌써 문을 박차고 나갔겠지만 오늘 그는 참으며 조용히 앉아 안태석이 나갈 때까지 지켜보았다.다음 날 정민재는 정말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병원에 가져왔다. 하지만 병실에 도착했을 때 손혜리도 그곳에 있었다.정민재는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손혜리는 여전히 온화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말했다.“내가 특별히 너 좋아하는 요리를 몇 가지 만들어왔어. 지아 언니도 너랑 결혼한 지 오래됐으니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 다 좋아하겠지?”나는 음식을 힐끗 보았다. 확실히 정민재의 취향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정민재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이 음식들 너무 기름져서 지아한테는 안 맞아. 내 음식 먹는 게 낫겠다.”그가 곰국을 내 앞에 내밀자 손혜리는 입을 꾹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역시 병에 걸리면 사람 마음을 얻는 법이구나. 민재야, 너 예전에 나한테만 요리해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이제 지아 언니한테도
정민재의 뻔뻔한 질문을 듣고 더 이상 그와 말다툼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이혼 서류는 1분이면 100장을 인쇄할 수 있어. 도망쳐 봐야 소용없어.”정민재가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자 의자는 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졌다. 그는 마치 미친 듯이 방을 왔다 갔다 하며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여보, 정말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린다면 내가 보증서 써줄게. 유언장을 써도 좋아! 혜리 아이를 내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내 재산도 그 애한테 상속하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이 정도면 안심할 수 있겠지?”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재산은 종이에 적어 보증할 수는 있어도 감정은 그렇게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 정말 모르는 건가? 아이가 크다 보면 결국은 자기와 점점 닮아가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동할 수 있을 텐데...’내가 정민재를 다시 믿는다면 그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일이었다.“정민재, 당신이 누구를 지키든, 누구와 아이를 낳든, 누구에게 돈을 주든, 이제 난 상관없어.”“난 당신을 8년 동안 사랑했고 심지어 당신과 손혜리의 그 어정쩡한 관계도 참아가며 살았어. 당신 없이는 못 살 줄 알았거든. 그런데 이제 정신이 번쩍 들었어. 당신은 내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어.”“이혼의 이유는 딱 하나야. 내 마음이 식었고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됐어. 그게 다야. 이해됐어?”이 말을 할 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하고 이성적이었다.이전처럼 애원하거나 절망하며 울거나 질투심에 미쳐 날뛸 필요가 없었다.정민재도 그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완전히 당황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결국 정민재는 회사에 일이 있다고 둘러대며 허겁지겁 자리를 떠났다.나는 그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전에는 날 소중히 여기지 않더니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지? 그냥 이혼하고 손혜리랑 함께 사는 게 더 낫지 않나? 아니면 가정에서의 현명한 아내와 바깥에서의 첫사랑을 동시에 누리는 게 더
나는 안태석이 이 회사의 대표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곰곰이 생각해보니 젊은 나이에 혼자 대형 아파트에서 살고 대학 시절부터 이미 개인 아파트를 갖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집안이 상당히 유복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안태석이 회사 대표의 아들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마침 안태석이 나를 부르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중요한 보고를 해야 한다는 걸 떠올렸다.안태석네 회사는 고급 골동품과 보석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데 그는 따로 현대 미술품 사업을 확장해서 운영하고 있었다.비록 새로운 예술 작품과 현대 주얼리 사업은 고급 라인처럼 큰 거래는 아니지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재미있게도 손혜리의 여러 그림들이 그 사업에서 경매에 올라 있었고 그 가격은 2000만 원대에 이르렀다.하지만 나는 그녀의 그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의 작품은 여러 신진 화가들의 작품을 표절하고 융합한 것이었는데 기존에는 감정팀에서 이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으나 내가 데이터 분석을 통해 이를 밝혀냈다.“안 팀장님, 이런 작품들이 다른 전문가들에게 발각되면 회사의 전문성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내려야 합니다.”안태석은 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곧바로 기술팀을 불러 철저하게 재감정하도록 지시했다.“지아 씨 말이 맞다면 단순히 작품을 내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화가에게 위약금을 청구할 겁니다. 이런 은폐 행위는 계약 위반이니까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후속 처리는 더 이상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일이 끝나고 나서 안태석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 이름 부르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왜 자꾸 안 팀장님이라고 불러요? 어색하단 말이에요.”나는 회사에서 그럴 수 없다고 말하며 장난스럽게 그에게 물었다.“팀장님이라고 안 부르면 대체 뭐라고 불러요? 혹시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잠시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이제야 안태석도 내가 그의 정체를 알았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정민재가 오늘도 회사 건물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손혜리를 목격한 것 같았다.그는 분명 나의 남편임을 밝히고 들어왔을 것이다.정민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손혜리도 놀란 눈치였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손혜리는 더욱 화가 난 듯 내가 그녀를 괴롭혔다는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지아 언니는 항상 네가 나한테 잘해주는 걸 질투했잖아. 분명 이번 기회에 나한테 복수하려고 한 거야!”주변의 수많은 시선이 나를 향하자 정민재는 당황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이런 일이 어떻게 작은 직원 한 명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겠어?”손혜리는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뜨며 정민재를 바라보며 물었다.“너 어떻게 언니 편을 들어? 나를 믿지 않는 거야?”나는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솔직히 나도 조금 놀랐다. 예전 같으면 정민재는 무조건 손혜리의 편을 들었을 텐데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혜리야, 이렇게 예민하게 굴지 말고 문제가 있으면 차분히 대화로 풀어야지. 이렇게 회사에 와서 소란을 피우는 건 마치 시장에서 싸우는 사람처럼 보이잖아! 정말 창피하게 굴지 마.”그 말을 듣고 나는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정민재가 예전에 나를 항상 비난할 때 했던 말들이었다. 예민하다고 생각이 많다고 질투가 많다고 너무 유치하게 군다고 말이다.손혜리는 충격을 받았는지 몸을 휘청였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여기서 지금 누가 소란을 피우는 겁니까? 경찰에 신고했습니다.”목소리의 주인은 안태석이었다. 그는 곧장 내 옆에 서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나는 그가 평소 나에게 항상 밝게 웃던 모습과 달리 이렇게 무거운 분위기를 풍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손혜리는 안태석을 잠시 쳐다보다가 갑자기 뭔가 알아챈 듯 말했다.“지아 언니를 병원에 데려갔던 사람 아니에요? 아하, 그래서 지아 언니가 이 회사에서 그렇게 당당했던 거구나! 남자친구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으
그날 정민재와 손혜리는 안태석이 불러온 보안요원들에게 쫓겨나고 나서 몇 달간 잠잠했다.처음엔 두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조용할 수 있을까 의아해했다. 나는 긴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그러다 들은 소식에 따르면 정민재의 회사에 문제가 생겨서 그가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아 보였고 어느 날 손혜리가 나에게 미친 듯이 메시지를 보내며 욕설을 퍼부었다.그녀는 내가 정민재에게 무슨 말을 해서 그가 예전에 자신에게 준 화실을 다시 회수했느냐고 따져 물었다.나는 답장하지 않고 바로 그 대화를 캡처해 SNS에 올렸다.[손혜리 화가가 자랑하던 독립 작업실이 사실 내 남편이 사준 거였고? 나한테 화풀이할 시간에 정민재한테 이혼 서류에 빨리 서명하라고 독촉이나 해.]손혜리와 나는 여러 명의 공통 친구가 있었는데 예전에 그녀가 일부러 그 사람들과 나를 친구로 만들었던 것이다. 목적은 나를 더 괴롭히기 위해서였다.이제 내가 SNS에 글을 올리면 그녀를 떠받들던 사람들도 다 보게 될 것이다.이번엔 그녀가 실컷 화나서 분노할 차례였다.SNS에 글을 올리고 나서 나는 바로 핸드폰을 넣고 퇴근했다.오늘은 내 생일이라 안태석이 레스토랑을 예약해 나를 축하해주기로 했다.건물을 나서자 몇 달 만에 마주친 정민재가 보였다.그는 많이 수척해졌고 눈 밑에 깊은 다크서클이 생겨 있었다. 얼마나 잠을 못 잔 것인지 짐작이 갔다.내가 냉랭한 얼굴로 못 본 척하려 해도 정민재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오늘 당신 생일이라 선물을 준비했어. 같이 식사할 수 있을까?”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 택시에서 내려오는 손혜리와 시어머니를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근데 저 사람들이 너랑 당신이랑 같이 밥 먹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은데?”정민재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이마엔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신경질적이었지만 피곤한 게 더 크게 느껴졌다.“손혜리, 너 하루라도 조용히 지낼 수 없어? 게다가 엄마까지 데려와서 뭐 하려
차가 급히 떠나는 것을 바라보자마자 내 가슴에 쌓여 있던 답답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아마도 이젠 드디어 이 엉망인 사람들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하늘이 내게 준 최고의 생일 선물이야.’역시나 손혜리는 조산으로 아들을 낳았다.하지만 다행히 아이는 건강해서 큰 문제는 없었다.정민재가 마침내 이혼 합의서에 서명을 했다.구청에서 나올 때 정민재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의 얼굴엔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었다.“박지아, 당신 안태석이랑 오래전부터 바람피웠던 거지? 그래서 이혼을 강요한 거 아니야?”나는 그에게 말했다. 새로운 이웃이 이사 온 건 일찍 알았지만 내가 유산 조짐이 있어 병원에 갔던 날이 안태석과 처음 제대로 대화를 나눈 날이라고.나는 떳떳하니까 누가 와서 물어도 답은 똑같을 거라고 했다.“정민재, 당신은 어때? 손혜리와 정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안 넘었다고 자신할 수 있어?”그러자 정민재가 뭐라 변명하려 했지만 내가 말을 끊었다.“답하지 않아도 돼. 난 이미 알고 있어. 당신도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지 마.”손혜리는 고수다. 예전에는 정민재를 그저 오래된 ‘백업’으로만 여기다가 그가 창업에 성공하자마자 다시 돌아왔다.하지만 그녀는 정민재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는 않고 그에게 언제나 독립적이고 고고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그 수법은 정말 뛰어났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손혜리의 작품이 표절로 전시가 취소되고 작업실이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손혜리도 초조해졌다.그녀가 정민재를 더 잡으려고 할수록 정민재는 그녀를 덜 소중히 여겼다.마치 그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정민재, 난 당신에게 아무 빚진 게 없어.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떳떳하지 못해.”그렇게 말한 후, 나는 손을 흔들어 안태석에게 차를 세우라고 했다.정민재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차의 백미러에서 그가 서서히 사라졌다. 내 세상에서도 완전히 사라졌다.1년 후, 나는 임신을 하게 되어 병원에 산전 검사를 받으러 갔다.그런데 그
전화를 끊고 나는 정성스럽게 차려놓은 음식과 6주년 기념 케이크 사진을 찍어 남편에게 보냈다.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오늘 당신 생일이야?][오늘은 못 돌아가니까 당신이 혼자 알아서 보내.]나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던졌다.내 생일도, 우리의 결혼기념일도 정민재는 절대 기억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는 손혜리와 관련된 일들은 작은 수첩에까지 꼼꼼히 적어뒀다.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빠짐없이 말이다.테이블 위의 임신 확인서는 다시 조심스럽게 넣어두었다.원래 오늘 저녁에 정민재에게 선물처럼 전하려고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결혼 6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나는 세 번이나 시험관 시술을 했고 그 과정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모두 실패했기에 이번에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임신이 된 것이다.하지만 기뻐할 새도 없이 손혜리의 SNS를 보게 되었다.어쩌면 그녀도 같은 날 남편의 정자로 시험관 시술을 했을지도 모른다.나만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속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음식을 내 앞으로 당겨 왔다. 비록 입맛이 없었지만 아이를 위해서라도 몇 입은 먹어야 했다.하지만 생선과 고기의 냄새를 맡는 순간 갑자기 심하게 구역질이 나서 허리를 구부리며 토하기 시작했다.토하고 난 뒤에는 아랫배에 점점 심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아래쪽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바로 확인해보니 바지에 붉은 핏자국이 번지고 있었다.순간 두려움이 몰려왔다.‘유산의 징조인가?’정민재에게 실망스러웠어도 이 아이만은 힘들게 얻은 아이이기에 잃을 수 없었다.급하게 핸드폰을 챙겨 차를 몰고 병원에 가려고 했지만 문을 여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며 벽에 기대 천천히 미끄러져 내렸다.오늘 아침에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서 검사를 받느라 하루 종일 바빴다.집에 돌아온 뒤엔 정민재가 분명 집에 돌아와 함께 결혼기념일을 축하할 것이라 생각하며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아마 저혈당인 것 같았다.
며칠간 나는 병원에 입원해서 상태를 안정시켜야 했다.나를 병원까지 데려다준 이웃인 안태석은 정말 친절하게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입원 수속을 도와줬다.“남편한테 전화 안 해요?”물을 마시던 내 손이 잠시 멈칫했다.“굳이 알릴 필요 없어요. 저 그 사람이랑 이혼할 거거든요.” 그러자 안태석은 놀라서 짧게 ‘아’하고 소리를 내더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그의 반응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말했다.“미안해요. 태석 씨한테 이런 얘기 하는 게 아니었는데.”안태석은 환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손을 흔들었다.그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정민재가 떠올랐다.정민재는 요즘 나에게 밝은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대화를 할 때마다 항상 짜증 섞인 얼굴로 날 쳐다보거나 이마를 찌푸리고 눈을 부라렸다.내가 몇 마디만 더 해도 자신을 귀찮게 한다는 표정이었고 내가 자기를 의심하는 것 같아 화가 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그때, 핸드폰 알림이 울리며 내 생각을 끊었다.정민재가 보낸 건 볼품없는 스카프 한 장이었다.[생일 선물 샀어. 이제 됐지?]스카프에 찍힌 브랜드 로고를 본 나는 손혜리의 SNS를 찾아 들어갔다.역시나 새 에르메스 가방 하나가 자랑하듯 SNS에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임신 때문에 힘들었는데 가방 하나로 다 풀리는 기분이야! 고마워, 민재야!]나는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정민재가 나에게 보내온 스카프는 명품 가방에 딸려온 사은품일 뿐이었다.손혜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리려던 것을 정민재가 내게 선물로 준 게 분명했다.[필요 없어. 그거 손혜리 가방이나 닦게 줘.]내 답장은 곧바로 정민재의 화를 불러일으켰다.그는 바로 전화를 걸어와 나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왜 이렇게 유치하게 질투질이야? 나랑 혜리는 영혼의 동반자일 뿐이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저급한 관계가 아니라고!”“진짜로 혜리랑 뭔가 있었다면 네가 나랑 결혼해서 지금 호강할 수 있었겠어?”‘호강’이라는 단어가 나를 순간 아득하게 만들었다.내가 정민재와 사귄 건 대학교 2학년
차가 급히 떠나는 것을 바라보자마자 내 가슴에 쌓여 있던 답답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아마도 이젠 드디어 이 엉망인 사람들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하늘이 내게 준 최고의 생일 선물이야.’역시나 손혜리는 조산으로 아들을 낳았다.하지만 다행히 아이는 건강해서 큰 문제는 없었다.정민재가 마침내 이혼 합의서에 서명을 했다.구청에서 나올 때 정민재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의 얼굴엔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었다.“박지아, 당신 안태석이랑 오래전부터 바람피웠던 거지? 그래서 이혼을 강요한 거 아니야?”나는 그에게 말했다. 새로운 이웃이 이사 온 건 일찍 알았지만 내가 유산 조짐이 있어 병원에 갔던 날이 안태석과 처음 제대로 대화를 나눈 날이라고.나는 떳떳하니까 누가 와서 물어도 답은 똑같을 거라고 했다.“정민재, 당신은 어때? 손혜리와 정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안 넘었다고 자신할 수 있어?”그러자 정민재가 뭐라 변명하려 했지만 내가 말을 끊었다.“답하지 않아도 돼. 난 이미 알고 있어. 당신도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지 마.”손혜리는 고수다. 예전에는 정민재를 그저 오래된 ‘백업’으로만 여기다가 그가 창업에 성공하자마자 다시 돌아왔다.하지만 그녀는 정민재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는 않고 그에게 언제나 독립적이고 고고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그 수법은 정말 뛰어났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손혜리의 작품이 표절로 전시가 취소되고 작업실이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손혜리도 초조해졌다.그녀가 정민재를 더 잡으려고 할수록 정민재는 그녀를 덜 소중히 여겼다.마치 그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정민재, 난 당신에게 아무 빚진 게 없어.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떳떳하지 못해.”그렇게 말한 후, 나는 손을 흔들어 안태석에게 차를 세우라고 했다.정민재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차의 백미러에서 그가 서서히 사라졌다. 내 세상에서도 완전히 사라졌다.1년 후, 나는 임신을 하게 되어 병원에 산전 검사를 받으러 갔다.그런데 그
그날 정민재와 손혜리는 안태석이 불러온 보안요원들에게 쫓겨나고 나서 몇 달간 잠잠했다.처음엔 두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조용할 수 있을까 의아해했다. 나는 긴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그러다 들은 소식에 따르면 정민재의 회사에 문제가 생겨서 그가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아 보였고 어느 날 손혜리가 나에게 미친 듯이 메시지를 보내며 욕설을 퍼부었다.그녀는 내가 정민재에게 무슨 말을 해서 그가 예전에 자신에게 준 화실을 다시 회수했느냐고 따져 물었다.나는 답장하지 않고 바로 그 대화를 캡처해 SNS에 올렸다.[손혜리 화가가 자랑하던 독립 작업실이 사실 내 남편이 사준 거였고? 나한테 화풀이할 시간에 정민재한테 이혼 서류에 빨리 서명하라고 독촉이나 해.]손혜리와 나는 여러 명의 공통 친구가 있었는데 예전에 그녀가 일부러 그 사람들과 나를 친구로 만들었던 것이다. 목적은 나를 더 괴롭히기 위해서였다.이제 내가 SNS에 글을 올리면 그녀를 떠받들던 사람들도 다 보게 될 것이다.이번엔 그녀가 실컷 화나서 분노할 차례였다.SNS에 글을 올리고 나서 나는 바로 핸드폰을 넣고 퇴근했다.오늘은 내 생일이라 안태석이 레스토랑을 예약해 나를 축하해주기로 했다.건물을 나서자 몇 달 만에 마주친 정민재가 보였다.그는 많이 수척해졌고 눈 밑에 깊은 다크서클이 생겨 있었다. 얼마나 잠을 못 잔 것인지 짐작이 갔다.내가 냉랭한 얼굴로 못 본 척하려 해도 정민재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오늘 당신 생일이라 선물을 준비했어. 같이 식사할 수 있을까?”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 택시에서 내려오는 손혜리와 시어머니를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근데 저 사람들이 너랑 당신이랑 같이 밥 먹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은데?”정민재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이마엔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신경질적이었지만 피곤한 게 더 크게 느껴졌다.“손혜리, 너 하루라도 조용히 지낼 수 없어? 게다가 엄마까지 데려와서 뭐 하려
정민재가 오늘도 회사 건물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손혜리를 목격한 것 같았다.그는 분명 나의 남편임을 밝히고 들어왔을 것이다.정민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손혜리도 놀란 눈치였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손혜리는 더욱 화가 난 듯 내가 그녀를 괴롭혔다는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지아 언니는 항상 네가 나한테 잘해주는 걸 질투했잖아. 분명 이번 기회에 나한테 복수하려고 한 거야!”주변의 수많은 시선이 나를 향하자 정민재는 당황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이런 일이 어떻게 작은 직원 한 명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겠어?”손혜리는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뜨며 정민재를 바라보며 물었다.“너 어떻게 언니 편을 들어? 나를 믿지 않는 거야?”나는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솔직히 나도 조금 놀랐다. 예전 같으면 정민재는 무조건 손혜리의 편을 들었을 텐데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혜리야, 이렇게 예민하게 굴지 말고 문제가 있으면 차분히 대화로 풀어야지. 이렇게 회사에 와서 소란을 피우는 건 마치 시장에서 싸우는 사람처럼 보이잖아! 정말 창피하게 굴지 마.”그 말을 듣고 나는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정민재가 예전에 나를 항상 비난할 때 했던 말들이었다. 예민하다고 생각이 많다고 질투가 많다고 너무 유치하게 군다고 말이다.손혜리는 충격을 받았는지 몸을 휘청였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여기서 지금 누가 소란을 피우는 겁니까? 경찰에 신고했습니다.”목소리의 주인은 안태석이었다. 그는 곧장 내 옆에 서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나는 그가 평소 나에게 항상 밝게 웃던 모습과 달리 이렇게 무거운 분위기를 풍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손혜리는 안태석을 잠시 쳐다보다가 갑자기 뭔가 알아챈 듯 말했다.“지아 언니를 병원에 데려갔던 사람 아니에요? 아하, 그래서 지아 언니가 이 회사에서 그렇게 당당했던 거구나! 남자친구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으
나는 안태석이 이 회사의 대표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곰곰이 생각해보니 젊은 나이에 혼자 대형 아파트에서 살고 대학 시절부터 이미 개인 아파트를 갖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집안이 상당히 유복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안태석이 회사 대표의 아들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마침 안태석이 나를 부르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중요한 보고를 해야 한다는 걸 떠올렸다.안태석네 회사는 고급 골동품과 보석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데 그는 따로 현대 미술품 사업을 확장해서 운영하고 있었다.비록 새로운 예술 작품과 현대 주얼리 사업은 고급 라인처럼 큰 거래는 아니지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재미있게도 손혜리의 여러 그림들이 그 사업에서 경매에 올라 있었고 그 가격은 2000만 원대에 이르렀다.하지만 나는 그녀의 그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의 작품은 여러 신진 화가들의 작품을 표절하고 융합한 것이었는데 기존에는 감정팀에서 이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으나 내가 데이터 분석을 통해 이를 밝혀냈다.“안 팀장님, 이런 작품들이 다른 전문가들에게 발각되면 회사의 전문성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내려야 합니다.”안태석은 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곧바로 기술팀을 불러 철저하게 재감정하도록 지시했다.“지아 씨 말이 맞다면 단순히 작품을 내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화가에게 위약금을 청구할 겁니다. 이런 은폐 행위는 계약 위반이니까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후속 처리는 더 이상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일이 끝나고 나서 안태석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 이름 부르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왜 자꾸 안 팀장님이라고 불러요? 어색하단 말이에요.”나는 회사에서 그럴 수 없다고 말하며 장난스럽게 그에게 물었다.“팀장님이라고 안 부르면 대체 뭐라고 불러요? 혹시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잠시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이제야 안태석도 내가 그의 정체를 알았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정민재의 뻔뻔한 질문을 듣고 더 이상 그와 말다툼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이혼 서류는 1분이면 100장을 인쇄할 수 있어. 도망쳐 봐야 소용없어.”정민재가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자 의자는 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졌다. 그는 마치 미친 듯이 방을 왔다 갔다 하며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여보, 정말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린다면 내가 보증서 써줄게. 유언장을 써도 좋아! 혜리 아이를 내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내 재산도 그 애한테 상속하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이 정도면 안심할 수 있겠지?”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재산은 종이에 적어 보증할 수는 있어도 감정은 그렇게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 정말 모르는 건가? 아이가 크다 보면 결국은 자기와 점점 닮아가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동할 수 있을 텐데...’내가 정민재를 다시 믿는다면 그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일이었다.“정민재, 당신이 누구를 지키든, 누구와 아이를 낳든, 누구에게 돈을 주든, 이제 난 상관없어.”“난 당신을 8년 동안 사랑했고 심지어 당신과 손혜리의 그 어정쩡한 관계도 참아가며 살았어. 당신 없이는 못 살 줄 알았거든. 그런데 이제 정신이 번쩍 들었어. 당신은 내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어.”“이혼의 이유는 딱 하나야. 내 마음이 식었고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됐어. 그게 다야. 이해됐어?”이 말을 할 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하고 이성적이었다.이전처럼 애원하거나 절망하며 울거나 질투심에 미쳐 날뛸 필요가 없었다.정민재도 그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완전히 당황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결국 정민재는 회사에 일이 있다고 둘러대며 허겁지겁 자리를 떠났다.나는 그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전에는 날 소중히 여기지 않더니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지? 그냥 이혼하고 손혜리랑 함께 사는 게 더 낫지 않나? 아니면 가정에서의 현명한 아내와 바깥에서의 첫사랑을 동시에 누리는 게 더
안태석은 정민재가 사 온 음식을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병원 근처에 환자용으로 적당한 음식점이 많은데 진짜 가장 안 맞는 곳을 선택했네요. 대단하십니다!”정민재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참았는지 겨우 분노를 억누르고는 차갑게 말했다.“앞으로는 내가 직접 요리해서 가져올 테니까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시죠.”하지만 안태석도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못 믿겠는데요? 내가 잘 보살핀 덕에 빨리 퇴원할 수 있었는데 하루도 안 돼 유산했잖아요. 그쪽한테는 더 이상 신뢰가 없어요.”그러자 정민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지아는 내 아내입니다. 왜 당신이 오지랖이에요? 유부녀와 거리를 두는 법도 모르는 겁니까?”곧 나는 국자를 세게 내려놓으며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당신이 남을 나무랄 자격이 있어? 당신 정자로 다른 여자에게 시험관 시술을 하는 것보다 더 선을 넘은 게 어딨는데.”안태석은 깜짝 놀라며 정민재를 쳐다보았다.정민재는 얼굴이 빨개지며 목소리가 나올 듯 말 듯 억누르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벌써 문을 박차고 나갔겠지만 오늘 그는 참으며 조용히 앉아 안태석이 나갈 때까지 지켜보았다.다음 날 정민재는 정말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병원에 가져왔다. 하지만 병실에 도착했을 때 손혜리도 그곳에 있었다.정민재는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손혜리는 여전히 온화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말했다.“내가 특별히 너 좋아하는 요리를 몇 가지 만들어왔어. 지아 언니도 너랑 결혼한 지 오래됐으니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 다 좋아하겠지?”나는 음식을 힐끗 보았다. 확실히 정민재의 취향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정민재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이 음식들 너무 기름져서 지아한테는 안 맞아. 내 음식 먹는 게 낫겠다.”그가 곰국을 내 앞에 내밀자 손혜리는 입을 꾹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역시 병에 걸리면 사람 마음을 얻는 법이구나. 민재야, 너 예전에 나한테만 요리해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이제 지아 언니한테도
정민재는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다가와 나를 안았다.“그냥 넘어졌는데 왜 피가 나지?”일어서려고 시도했지만 나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빨리 119에 전화해!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야 해!”그러자 손혜리가 사람들을 밀치며 다가왔다.“뭐 그렇게 호들갑이야? 그냥 생리 시작한 거 아냐?”그녀는 내가 너무 과장된 행동을 한다며 불편하면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정민재의 얼굴에는 실망이 가득했다.“역시 또 임신은 아닌 거네.”변명하려 했지만 갑작스러운 격렬한 통증이 아랫배를 휘감으며 나를 완전히 주저앉게 만들었다.정민재는 결국 나를 일으켜 세우면서도 손혜리와 함께 있어야 한다며 택시를 불러 집에 가라고 했다.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안태석과 마주쳤다.“어? 지아 씨도 여기서 술 마시고 있었어요?”하지만 곧 그는 내 바지에 점점 더 번지는 피를 보고 표정이 크게 달라졌다.“또 출혈이에요? 의사 선생님이 안정적으로 태아를 보호하라고 신신당부했잖아요!”다급한 나머지 안태석은 큰소리로 외쳤고 정민재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두 얼어붙었다.정민재는 혼란스러운 듯한 얼굴로 말했다.“당신, 당신 임신한 거야? 이거 다 거짓말 아니야?”안태석은 한걸음에 나를 부축하며 화난 눈빛으로 말했다.“남편 맞아요? 어떻게 자기 아내가 임신한 것도 모르냐고요!”정민재는 당황하며 내가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변명했다.안태석은 소리쳤다.“뭘 멍하니 서 있어요? 빨리 차 몰고 병원 데려가야 할 거 아니에요!”곧 혼란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미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의사가 아이를 잃었다고 말하자 내 눈에서는 미친 듯이 눈물이 쏟아졌다.정민재는 정신이 나간 듯 의사에게 그럴리가 없다고 소리쳤다. 다시 검사해 달라며 아이를 구해달라고 애원했다.“세 번이나 시험관 시술을 해서 겨우 임신한 건데!”그러자 의사는 화를 억누른 채 말했다.“그렇게 어렵게 생긴 아이면 왜 조심하지 않았습
“오늘 밤 혜리가 친구들 불러서 파티를 열어. 임신 축하 파티.”내가 거절할 새도 없이 정민재는 미리 내 길을 막았다.“혜리가 당신 신경 많이 써주더라. 당신도 와서 좋은 기운 좀 받아가. 이제 그만 까칠하게 굴어.”나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래.” 어차피 마음은 이미 식었고 나는 이혼 변호사에게도 연락을 해둔 상태였다. 그러니 이제 더는 손혜리의 얄팍한 수작에 상처받을 일은 없었다.파티룸에 들어가자 화려하게 차려입은 손혜리가 느지막이 나타났다.나는 며칠간 병원에 입원하느라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해 초라한 몰골이었다.그와 달리 손혜리는 마치 꽃처럼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사람들은 입에 발린 말로 손혜리를 치켜세웠다.“미녀 화가는 역시 하는 생각도 진보적이라니까? 그렇게 많은 구애자들을 다 거절하고 싱글맘을 자처하다니.”“혜리는 돈도 많고 시간도 많잖아. 혼자서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지. 남편한테 돈 타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주변의 시선은 은근히 나를 향해 있었다. 모두들 비웃는 눈빛이었다.손혜리는 웃으며 술을 여러 병 주문하고는 오늘은 자기가 쏘겠다고 했다.곧 사람들이 분위기를 띄우자며 진실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게임 룰은 진실을 말할 용기가 있는 사람은 진실 카드를 선택하면 되고 말할 용기가 없는 사람은 모험 카드를 선택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 다 못할 경우 벌칙을 받으면 된다.첫 번째로 술병이 손혜리에게 돌아갔고 그녀는 입을 내밀며 애교를 부렸다.“그럼 난 진실로 할래.”그러자 그녀의 친구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혜리야, 시험관으로 아이를 가졌는데 나중에 아이가 아빠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정민재라고 대답할 거야?”이 물음에 손혜리는 배를 쓰다듬으며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지아 언니, 언니가 신경 쓰는 거 알아요. 그래서 요즘 민재랑도 티격태격하고 있잖아요. 근데 걱정 마요. 난 절대 두 사람 사이를 망치려고 하지 않을 거니까. 솔직히 내가 민재랑 결혼하려 했다면 애초에 언니가 지금의 자리에 앉지도 못
며칠간 나는 병원에 입원해서 상태를 안정시켜야 했다.나를 병원까지 데려다준 이웃인 안태석은 정말 친절하게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입원 수속을 도와줬다.“남편한테 전화 안 해요?”물을 마시던 내 손이 잠시 멈칫했다.“굳이 알릴 필요 없어요. 저 그 사람이랑 이혼할 거거든요.” 그러자 안태석은 놀라서 짧게 ‘아’하고 소리를 내더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그의 반응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말했다.“미안해요. 태석 씨한테 이런 얘기 하는 게 아니었는데.”안태석은 환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손을 흔들었다.그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정민재가 떠올랐다.정민재는 요즘 나에게 밝은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대화를 할 때마다 항상 짜증 섞인 얼굴로 날 쳐다보거나 이마를 찌푸리고 눈을 부라렸다.내가 몇 마디만 더 해도 자신을 귀찮게 한다는 표정이었고 내가 자기를 의심하는 것 같아 화가 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그때, 핸드폰 알림이 울리며 내 생각을 끊었다.정민재가 보낸 건 볼품없는 스카프 한 장이었다.[생일 선물 샀어. 이제 됐지?]스카프에 찍힌 브랜드 로고를 본 나는 손혜리의 SNS를 찾아 들어갔다.역시나 새 에르메스 가방 하나가 자랑하듯 SNS에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임신 때문에 힘들었는데 가방 하나로 다 풀리는 기분이야! 고마워, 민재야!]나는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정민재가 나에게 보내온 스카프는 명품 가방에 딸려온 사은품일 뿐이었다.손혜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리려던 것을 정민재가 내게 선물로 준 게 분명했다.[필요 없어. 그거 손혜리 가방이나 닦게 줘.]내 답장은 곧바로 정민재의 화를 불러일으켰다.그는 바로 전화를 걸어와 나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왜 이렇게 유치하게 질투질이야? 나랑 혜리는 영혼의 동반자일 뿐이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저급한 관계가 아니라고!”“진짜로 혜리랑 뭔가 있었다면 네가 나랑 결혼해서 지금 호강할 수 있었겠어?”‘호강’이라는 단어가 나를 순간 아득하게 만들었다.내가 정민재와 사귄 건 대학교 2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