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마트까지 다녀와 한 상 가득 차렸는데 모두 구승훈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들이었다.구승훈은 다소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최후의 만찬은 아니지?”강하리가 눈을 흘겼다.“먹든 말든 맘대로 해.”가정부가 어쩔 수 없이 옆에서 해명했다.“사모님이 대표님께서 그동안 많이 야위었다고 영양 보충을 위해 특별히 만드신 거예요. 대표님 입맛을 잘 아니까 앞으로 자주 요리하겠다는 말씀까지 하셨어요.”구승훈은 주방에서 음식을 나르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채 다가갔고 어느 틈에 그의 품에 안긴 강하리의 귓가에 한 마디가 들렸다.“강 대표님이 이러면 난 밥 먹을 생각도 없어지는데.”말하며 남자가 뒤에서 두 번 허리 짓까지 해대자 강하는 저도 모르게 옆을 돌아보았고 가정부는 웃으며 연정이를 안은 채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강하리는 얼굴이 화끈거려 구승훈을 홱 노려보았다.“좀 점잖게 굴 수 없어?”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자잘한 입맞춤을 남겼다.“지금 충분히 점잖은 거야. 아주머니와 연정이가 없었으면 넌 지금 여기서 덮쳐졌어.”구승훈은 그 말을 하고 나면 강하리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강하리가 뒤돌아서서 그의 입술에 입맞춤했다.“조금만 참아. 오늘 밤엔 뭘 하든 다 들어줄게.”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문밖으로 걸어 나갔고 당황한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젠장, 이젠 정말 밥 생각이 사라졌다.손연지는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돌아왔고 밥을 먹으며 강하리에게 일 얘기를 했다.그러다 문득 말을 멈추고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왠지 모르게 자신이 더더욱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손연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어린이 의자에 앉아 밥을 집어 먹는 연정이를 바라보았다.“이모는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참 부럽다.”연정이가 숟가락을 들고 밥 한 숟가락을 떠서 손연지에게 건네며 입으로는 엄마라고 불렀다.손연지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
욕실에서 자정까지 구승훈에게 괴롭힘을 당한 강하리는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이 개자식을 유혹하는 게 아닌데.평소였다면 그래도 자제를 했을 텐데 오늘은 정말 한계까지 몰아붙여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지쳐 있었다.그녀의 몸 위를 덮치고 있는 구승훈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 모습이었다.강하리가 발로 차고 싶어도 다리를 들지 못하자 구승훈은 낮은 웃음을 내뱉었다.“다리 주물러줄까?”말하며 그의 커다란 손이 강하리의 종아리를 잡았고 발목의 이빨 자국이 그의 손가락에 눌려 살짝 붉어졌다.구승훈이 이빨 자국에 입을 맞추더니 그대로 종아리를 따라 연이어 입술을 갖다 대자 강하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구승훈!”구승훈은 부드럽게 웃으며 허벅지 안쪽에 또 다른 이빨 자국을 남겼다.“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준다며? 강 대표님은 약속 안 지킬 건가?”강하리는 화를 내며 그를 발로 찼고 구승훈은 웃으며 그녀를 품에 안더니 큰 손이 작은 배로 향했다.“그렇게 내걸 많이 먹었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납작해?”말하지 않으면 모를까, 그 말에 강하리는 또다시 밖으로 무언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이제부터 콘돔 써!”강하리가 손을 아래로 내렸다.“흘렀어? 내가 닦아줄게.”강하리는 그를 발로 차며 무시했지만 구승훈은 휴지를 뽑아 정말로 닦아주었다.다행히 닦아주는 것 말고는 다른 짓을 하지 않았고 다 닦은 뒤 화장실로 가서 손을 씻었다.그가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구승훈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해 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들어 확인했다.[미안해요. 앞으로는 사모님 만나지 않을게요. 하지만 정말 대표님을 위해서 그런 거였어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대표님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되니까 이런 일로 얼굴 붉힐 필요는 없어요.]메시지를 읽은 후 강하리는 졸음이 단번에 사라지는 느낌에 시간을 보니 새벽 2시가 넘은 뒤였다.구승훈의 휴대폰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강하리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었다.욕실에서 나온 구승훈은 침
강하리의 표정이 싸늘해지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알겠어요. 금방 갈게요.”전화를 끊은 강하리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차 안에서 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창백한 얼굴의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걱정하지 마, 할아버지 괜찮을 거야.”강하리는 낮게 대답했지만 증조할아버지의 연세가 적은 것도 아니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심문석은 이미 병동에 입원한 뒤였고 노인의 초췌한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강하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할아버지.”강하리가 달려가 그의 손을 잡자 심문석이 웃으며 답했다.“울지 마. 할아버지 멀쩡하잖아.”하지만 강하리는 눈시울이 시큰거렸다.진시연의 일은 결국 그녀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다.“죄송해요. 할아버지.”심문석은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네가 할아버지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사실 할아버지는 이미 오래 살았어. 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지. 그래도 네 엄마 때처럼 네가 웨딩드레스 입은 걸 보고 싶었는데.”강하리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꼭 볼 수 있을 거예요.”심문석은 여전히 기운이 없었는지 몇 마디를 하고는 다시 잠이 들었고 강하리는 눈시울이 붉게 물든 채 병실에서 나왔다.백아영이 그녀를 토닥이며 구승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12월 초에 좋은 날이 있다니까 별문제 없으면 그때 식을 올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하리만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강하리도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백아영은 별다른 말 없이 곧장 병동으로 들어갔고 진시연도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달려온 모양이었다.“증조할아버지는 좀 어떠세요?”그녀가 말하며 문을 열고 심문석의 병실로 들어가려는데 문을 열기도 전에 강하리가 그녀를 끌어당겼다.“강하리, 뭐 하는 거야? 시연이 놔줘!” 이정숙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강하리는 시뻘게진 눈으로 기세등등
이정숙은 강하리의 갑작스러운 분노에 당황한 듯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강하리는 이미 의사 진료실로 걸어가고 있었다.진시연의 얼굴은 뺨을 맞아 두 개의 손자국이 남았고 창백한 얼굴에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강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에 담긴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강하리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저 협박이라는 건 알지만 괜스레 겁이 났다.이정숙과 진강석이 지켜주기에 그동안 선 넘는 짓을 수없이 했었다.진태형이 없어도 이정숙과 진강석은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줄 테니까.하지만 이 또한 그녀가 감옥에 가지 않게 하거나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게 하는 것뿐이며 강하리를 막을 순 없었다.지금의 강하리는 심씨 가문을 등에 업고 곁엔 구승훈이 지키고 있으니 만약 정말로 그녀에게 어떠한 고통을 선사하려고 들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그동안 강하리가 나서지 않고 반격하지 않은 건 전부 진태형 때문이란 걸 안다.하지만 지금은...강하리가 떠난 것을 확인한 이정숙이 병동으로 들어가 따지려고 하는데 진시연이 갑자기 그녀를 끌어당겼다.“할머니, 가지 마세요.”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일을 더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이정숙을 말린 진시연은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승훈 씨, 이걸로 나도 오늘 벌을 받은 거니까 강하리 씨한테 나 좀 내버려두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내가 강하리 씨와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거 알아요. 강하리 씨 곁엔 지켜주는 사람이 많고 난 할머니와 할아버지밖에 없는데...”“진시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이 가로챘다.“그쪽이랑 하리를 비교하지 마.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진시연의 얼굴이 또다시 하얗게 질리며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그리고 고작 뺨 두 대 맞은 걸로 벌을 받았다는 거야? 진시연,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어?”진시연의 입꼬리가 파들거렸다.“구승
강하리가 무심코 흘깃 쳐다보니 임희주였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거두며 심문석 쪽으로 다가갔다.구승훈이 슬쩍 강하리를 돌아보자 그녀는 이미 심문석 옆에 자리를 잡고 웨딩 촬영 계획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그는 시선을 내린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어젯밤 두 시 넘어서 임희주가 보낸 메시지도 그제야 눈앞에 나타났고 구승훈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메시지를 읽은 후 휴대폰을 도로 넣었다.강하리는 그의 행동을 못 본 척 심문석 옆에 앉아 애교를 부렸고 구승훈은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이 떠나서야 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고 백아영은 강하리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몇 번이나 그녀를 불러서야 강하리는 마침내 다시 정신을 차렸다.“할머니, 왜 그래요?”백아영은 눈가에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건 내가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강하리는 입술을 다물며 웃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하지만 백아영은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침묵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증조할아버지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그렇게 심각한 상태 아니야. 근데... 승훈이랑 싸웠니?”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단지 구승훈을 걱정하는 것뿐이었지만 그가 얘기하지 않는다면 그녀도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굳이 끝까지 파고들 필요가 없으니까.한편 병원 밖으로 나온 구승훈의 표정도 살짝 어두워졌고 준봉이 병원 앞에 차를 세우자 구승훈은 곧바로 차에 올랐다.“대표님, 회사로 갈까요?”“정신과로 가.”임희주는 구승훈을 보자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다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기분은 좀 어때요?”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선을 긋는 듯 차가운 아우라를 풍겼다.“사람이라도 보내 임 선생한테 적당한 거리가 뭔지 가르쳐 드려야 할까요?”임희주는 멈칫하다가 정신을 차렸다.“메시지 말하는 거예요? 죄송해요. 어젯밤 노민준 씨랑 두시까지 그쪽 병에 대해 연구
늙은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이렇게 물었다.“사모님, 여씨 가문의 조상 묘에 대해서...”휴대폰을 잡은 여초연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얼굴에 분노가 서린 듯했지만 잠시 후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내뱉었다.“걔가 서두르고 있다는 뜻 아니겠어?”집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초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향해 걸어갔다.추운 겨울날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깔끔한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고 집사가 그녀의 어깨에 숄을 둘러주자 여초연은 자연스럽게 숄로 몸을 감쌌다.나이를 지긋하게 먹었지만 여전히 40대처럼 보이는 그녀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테이블로 걸어갔고 테이블 위에는 매화로 만든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여초연이 가위를 들고 조심스럽게 다듬자 집사는 다소 초조한 듯 말했다.“그래도 조상님 묘를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여초연은 멈칫하다가 이내 차갑게 웃었다.“우리가 가서 구씨 가문의 조상 무덤도 같이 파면 되잖아.”그렇게 말하던 중 갑자기 가위를 꽉 쥐었다.“그리고 구동근 그 늙은이도 언젠가 가루로 만들어 버릴 거야.”...구동근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또 한 번 분노에 휩싸여 쓰러질 뻔했다.살면서 이렇게 화가 났던 적이 또 있을까.지난번엔 심문석의 체면 때문에 심씨 가문으로 갔고 당시 구승훈과는 물과 불같은 사이라 그와의 관계를 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찾아갔는데 백아영에게 뺨을 맞을 줄이야.그런데 이젠 심미현의 무덤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라니.아무리 그래도 그가 웃어른인데 자존심을 굽힌다고 한들 심미현이 그걸 받을 자격이 있을까.구동근은 기가 막혀 무슨 일이 있어도 B시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구승훈이 자신을 데리러 사람을 보낼 줄은 몰랐다.데리러 오는 것이라기엔 사실 납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경호원 몇 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구동근의 앞으로 다가와 순식간에 그를 둘러쌌고 그 순간 방 안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구동근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죽기 전까지 구씨 가문은 내 말에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뒤돌아 걸어 나갔고 구동근은 구승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씩씩거리느라 가슴에 찌릿한 통증까지 느껴졌지만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구동근은 가는 내내 아무 말이 없다가 비행기 탑승 직전에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너 대단한 놈이잖아. 네가 결혼하는데 내가 굳이 가야 할 필요가 있어?”구승훈은 창밖의 구름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난 하리가 구씨 가문의 당당한 안주인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 구승훈이 원해서 결혼하는 여자는 한명 뿐이라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고 구씨 가문에서 조금의 괴롭힘도 당하지 않게 할 거예요.”그가 곁에 없더라도 말이다.“그래서 B시에 도착하면 둘째 삼촌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러 오라고 연락하세요. 하리는 할아버지가 인정한 손자며느리라는 걸.”“너...”구동근은 문득 구승훈이 미쳤나 싶었다.그 여자한테 이렇게까지 미친 걸까.하지만 이제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자신은 이 망할 손자를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걸.구승훈은 연성에 다녀온다는 걸 강하리에게 말하지 않았고 당일 일정이라 강하리는 구승훈이 출근한 것으로만 생각했다.그런데 병원에서 돌아왔을 때 심씨 가문 저택 마당에서 구동근을 비롯한 구씨 가문 일가 10여 명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강하리의 표정이 확 바뀌며 저도 모르게 이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러 찾아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녀가 아무 말도 하기 전에 구승훈이 안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어떻게 된 거야? 이 사람들 소란 피우려고 찾아온 거야?”강하리가 깊은 목소리로 묻자 구승훈은 강하리에게 다가가 허리를 낚아챘다.“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는 없어?”강하리는 구씨 가문 사람들이 던지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눈빛을 보며 도저히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구씨 가문 사람들에 대해선 구승훈과 구승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좋게 보이지 않았다.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어머니 뵈러 가자.”강하리는 당황했고 구승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구씨 가문 사람들이 다시 심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구동근은 정말로 비틀거리고 있었다.토해낸 피에 모든 힘을 담은 듯 그의 얼굴은 늙고 초췌해 보였다.구승훈은 차에 오른 뒤 뒤따라오던 의사에게 구동근의 상태를 물어보았고 다행히 큰 문제 없이 홧김에 피를 토한 거다.구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구승훈을 무슨 악마를 보듯이 쳐다봤다.구승훈이 정말 노인을 이 지경까지 몰아붙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하지만 구승훈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냉정하고 차가운 성격이라는 것을 알았고 구씨 가문 전체에서 구승재를 다소 특별하게 대하는 것 말고는 친어머니한테도 살갑게 군 적이 없었다.그래도 겉으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는데 이젠...구승훈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강하리의 허리를 팔로 감싸며 조용히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그는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기껏해야 무례하고 자비 없는 냉혈한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사건을 이용해 그를 또다시 곤경에 빠뜨릴 궁리나 하겠지.그런데 조금 전 소리 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와서 머리를 조아리라는 그의 말이 먹혔는지, 아니면 어르신에게 강요하는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다들 화가 나지만 아무 말도 못 하는 모습이었다.강하리는 그런 사람들의 생각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묘지에 도착하는 순간 진씨 가문 사람들이 다시 심씨 가문으로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았다.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는 집안 분위기가 생각만큼 살벌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고 거실에는 백아영이 침울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고 그 옆에서 심준호가 차분하게 차를 끓이고 있었다.진시연은 눈이 충혈된 채 거실에 서 있었고 이정숙도 평소처럼 건방지게 굴지 않았다.이 모습은...강하리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데 옆에서 남자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남자의 얼굴엔 싸늘함이 사라지지 않은 채 조롱까지 섞여 있었다.“무슨 짓을 한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
요양원 주차장.심준호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진태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저도 잘못이 있어요... 계속 하리가 구승훈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까지 바보 같을 줄은 몰랐어요...”진태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우리 딸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심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다시 입을 뗐다.“요즘은 조시욱이 꽤 신경 써주더라고요.”진태형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 옛날 자신이 어떤 희망도 없이 심미현과의 약혼을 지키며 버텼던 것처럼, 강하리도 그렇게 쉽게 마음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만큼은 절대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오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진태형이 병실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구연정을 안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구연정은 강하리의 이마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후하고 불었다.“엄마, 아프지마...”강하리는 살며시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엄마 안 아파, 우리 연정이 걱정하지 마.”구연정은 백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할머니 울었어.”강하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할머니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백아영은 단호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연정이는 어쩔 뻔했니?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강하리는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백아영은 한숨을 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구연정이 환히 웃으며 진태형에게 달려갔다.진태형은 아이를 안고 병실을 둘러보다, 딸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가가 붉어졌다.“아빠, 나 괜찮아요.”“이게 괜찮은 거
손연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마침 행사 중이더라고. 쿠팡 연말 세일에서 로열 프리미엄 네덜란드 분유 있거든? 영양 흡수도 잘 되고 우리 소아과 아기들도 다 그거 먹어.”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손연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쳐다봤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병원 응급실에서는 생체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급히 달려온 구승재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핸드폰 화면엔 강하리의 연락처가 떠 있었지만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 매번 손이 닿았다가도 다시 멈췄다.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준봉과 노진우도 속만 태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그제야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왔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이 다시 의식을 찾은 건 해 질 무렵이었고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그는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강하리에겐... 알리지 마.”구승재는 목이 막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어. 형수한테는 말 안 할게.”그제야 구승훈은 안도한 듯 눈을 감았지만 구승재는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눈가가 뜨거워졌다.‘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병원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병원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를 아는 터라, 강하리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빠져야만 했다.그날 밤, 노민준이 직접 차를 몰고 구승훈을 요양원으로 데려갔다.“네가 또 도망치면... 그땐 나도 강하리한테 전부 말할 수밖에 없어.”구승훈은 창밖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안 그럴 거야.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됐어.”노민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그 한마디에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푹 쉬어.”병실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구승훈의 머릿속엔 강하리가 조시욱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
청소 아주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강 대표님, 아까 구 대표님이랑 병실 안에 계시던 남자분이랑 여기서 싸웠어요. 아마... 그중 누가 코피를 흘린 것 같더라고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에게 병실 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조용히 말했다.병실 안에 들어서자, 조시욱이 전화를 받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통화를 마쳤다.“오늘 일은, 미안해.”그는 웃으며 말하다가 다시 강하리에게 다가가 침대로 옮겨주려 했지만 강하리가 재빨리 손을 들어 막았다.“잠시 후에 또 검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이대로 있을게요.”“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다 줄까?”그 말에 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조시욱 씨. 선배가 뭐라고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누굴 다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안 돼 있고요. 그러니까 굳이 매일 오시거나 이렇게 곁에 계실 필요 없어요.”조시욱은 사실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처음 만난 그날 밤부터 이미 느꼈다.하지만 그날,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그녀를 두 눈으로 본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각오로 그렇게 뛰어내렸는지 그게 궁금해졌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알고 싶어졌다.설령 그게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이라 해도,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내가 좀 성급했으면 미안. 진짜로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선배 부탁이라서 온 것도 맞지만... 난 그냥, 친구로서 너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어릴 때부터 정 회장님이랑 우리 할아버지 사이도 꽤 각별하셨잖아. 집안끼리도 인연이 깊고.”조시욱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지금은, 네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게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과거 놓고 새로운 시작도 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아?”잠시 정적이 흘렀고 강하리는 조용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방금... 뭐라고 불렀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어쩐지 너무나 낯설었다.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애써 눌러왔던 감정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심장이 바늘로 찔린 것처럼 저릿했고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임희주가... 이렇게 이 사람을 돌본 건가? 그렇다면 지금쯤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더 이상 마음을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전 이제 검사를 받아야 해요. 구 대표님, 손 좀 놓아주세요.”“같이 가줄게.”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갈라지고 낮았다.“괜찮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그 말과 함께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휠체어 좀 부탁드릴게요.”간호사는 그제야 얼떨결에 제자리를 찾은 듯 다가와 그녀의 휠체어를 받았다.조시욱은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 손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구 대표님, 강 대표님 검사 예약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간호사의 말이 이어지자, 구승훈은 천천히, 마치 억지로 손을 떼듯 그녀를 놓았다.강하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지던 기침이 터졌다. 거칠고 깊은 기침 소리, 그리고 피비린 냄새에 조시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너, 다쳤냐?”구승훈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그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지금 따라가서 뭐 하려고?”조시욱은 다급히 앞을 막아섰다.“넌 지금 상태부터 회복해야 해. 이러다 정말 쓰러진다고.”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그를 벽에 밀쳤다. 그러나 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고 그의 입가엔 다시 피가 번졌다.조시욱은 그를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이렇게 약해 빠져선... 넌 내 상대도 안 돼.”
구승훈은 오늘 여기서 조시욱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다.조시욱이든, 주해찬이든 상관없었다. 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분명 그의 아내였으니까.“내가 자리를 피할까?”조시욱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그제야 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아니요, 그냥 하던 얘기 마저 하시죠.”조시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강하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네 지목했던 그 여자, 국정원을 통해서 확인해 봤는데... 국제 쪽에서 활동하는 킬러였어. 주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움직이던 인물인데 이번에 국내에 들어왔다는 건 좀 의외더라.”강하리는 놀란 눈으로 조시욱을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그 여자가 진짜 직업 킬러였다니.“안현우가 고용한 건가요? 아니면... 임희주 쪽?”“아직 확실하진 않아. 근데 지금까지 조사로는 둘 다 그 여자랑 직접 연결된 흔적은 없어. 오히려 둘 다 접촉한 적이 없다는 쪽이 유력해.”조시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네 생각엔, 그 외에 또 누가 너를 죽이려 들었을 것 같아?”‘죽이려 든다’는 말에 강하리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사실 그날 자신을 진짜로 죽이려 했다면 안현우에게 넘기기 전에 이미 끝냈을 터였다.그렇다면 그 여자의 목적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조용히 말했다.“전, 적이 꽤 많아요. 임희주, 안현우는 물론이고... 심씨 집안, 여씨 자매, 진시연... 어쩌면 문씨나 구씨 가문에서도 누군가는 원하고 있었겠죠.”조시욱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래서 내가 네 주변에 사람 몇 명 붙여놨어. 걱정하지 마. 사생활 간섭 같은 건 없을 테니까. 혹시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 바로 다 뺄게.”“감사합니다.” 강하리는 짧게 대답했고 조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근데 혹시 그거 알고 있어? 우리 할아버지랑 네 외할아버지, 전우였던 거?”강하리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자주 저희 집
노민준이 떠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좀 나아졌어?]하지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화면엔 전송 실패 알림이 떴다.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고 가슴 속 깊은 통증이 일며 피를 토했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구승재가 황급히 달려왔다.“형!”구승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등으로 피를 닦고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냐. 그리고... 여초천 병세 위중하다는 소문 퍼뜨려.”“형, 제발 이러다 진짜 형수님도 못 돌려놓고 큰어머님까지 막을 수 없게 될 거야!”“됐어. 내가 괜찮다는데 못 알아들어?”구승훈은 지친 얼굴로 키를 집어 들고 병실을 나섰고 구승재는 분노와 답답함이 뒤섞인 얼굴로 뒤를 쫓았다.“형!”하지만 그가 병원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구승훈의 차는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노민준도 뒤늦게 병실에서 뛰쳐나왔고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내버려둬. 저렇게 살다가 죽겠다는데 어쩌겠냐.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해.”구승재는 그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편, 강하리는 구승재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분명히, 충분히 명확하게 말한 줄 알았다.“받아. 안 받으면 그 꼬맹이 울지도 몰라.”천아름은 옆에서 거울을 보며 입술을 정리하더니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내쉰 뒤, 전화를 받았고 구승재의 목소리는 확실히 맥이 빠져 있었다.“하리 누나.”이번엔 ‘형수님’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강하리는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해졌지만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으세요?”“형이... 또 병원 쪽으로 가면 한 번만 말 좀 해주면 안 될까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 이제 구승훈 씨랑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 사람이 올 일도 없고 와도... 저는 안 볼 거예요. 제게 부탁하지 마시고 차라리 임희주 씨에게 부탁하세요.”“형수님...”구승재는
사실 그 남자는 임희주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입이 단단히 막힌 그녀의 눈엔 점점 절망이 차오르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눈물이 뚝 떨어진 그 순간, 남자의 입가에서 다시 비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배신할 때부터 알았어야지. 이런 꼴 당할 줄. 임희주, 감히 누굴 믿고 사모님을 배신했냐? 응?”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며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임희주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말하고 싶었다.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한 번만 기회만 더 달라고.하지만 남자는 그 비참한 눈빛조차 즐기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너 생각엔, 구승훈이 너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면 어떻게 할 거 같냐?”그 말에 임희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한순간의 정적. 이어지는 건, 저항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차가운 분위기에 날카로운 바늘이 살을 찢고 서늘한 약물이 천천히 몸속에 스며들었다.몸부림치던 동작은 어느새 멈췄고 그의 눈빛을 따라 움직이던 임희주의 시선도 점점 흐려졌다.여초연 곁에서 오래 지낸 그녀는, 지금 이 약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완전히 무너지진 않지만 식물인간처럼 의식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 그 약은, 그렇게 사람을 파괴했다.바늘을 뽑아낸 남자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딱 좋아. 테스트 겸 써보기엔 안성맞춤이지. 덕분에 새 약 연구도 진도 좀 나가겠네. 너한텐 마지막 명예다, 그렇게 알아.”병실 문이 다시 열렸고 하얀 가운에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그 남자는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꺼져 있던 복도 CCTV가 하나둘 다시 켜졌고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두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가볍게 경례하듯 인사를 건넸다.그 화면을 지켜보던 구승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이게, 대놓고 도발 아니고 뭐야.”구승훈도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승훈 씨, 어젯밤 그 시간대에 이상한 소리가 났고 창가 쪽으로 그림자가 스쳤습니다. 저희가 곧바로
“말하면 고통 없이 죽게 해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입 다물고 버틴다면 당신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방법은 차고 넘치거든.”차갑게 말을 내뱉은 구승훈은 그대로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임희주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외쳤다.“구 대표님, 저... 저 당신 좋아했어요. 그거 알아요?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했어요...”하지만 그녀의 고백은 그저 허공을 맴돌 뿐, 아무도 듣지 않았다.강하리는 구승재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가 곧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몇 초도 안 돼 다시 전화가 울렸고 계속해서 울려대는 진동에 결국 그녀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형수님.”구승재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반가움이 섞여 있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담담하고 차분했다.“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저 지금 좀 피곤하거든요. 쉬고 싶어요. 그러니까...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구승재는 멍하니 전화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한 줄의 메시지를 남겼다.[형수님, 생일 축하드립니다.]하지만 그 메시지조차, 아무런 응답 없이 그대로 묻혀버렸다.구승훈의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담배 냄새에 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렸다.구승훈은 그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안 됐냐?”대답 대신, 구승재는 말없이 다가가 그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눌러 껐고 재떨이를 들고 방을 나섰다.잠시 후, 노민준이 급히 병실로 들어왔다.“담배 끊든가 안정제 맞든가. 선택해.”구승훈은 그를 빤히 보더니 침대 위로 몸을 기댔고 노민준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너, 강하리가 유엔 인맥까지 써서 약리학자 세 명 데려온 거 알고는 있어? 그것도 세계 최고 수준. 그 사람들 상담료가 어느 정도인 줄 알아? 분 단위도 아니고 초 단위로 계산된다. 다 너 살리려고 이 난리인데 넌 진심으로 그 노력을 다 무시하고 싶은 거냐?”그 말에 구승훈은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약리
요양원 아래 주차장.구승재는 허겁지겁 달려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직 차에 다다르기도 전에, 멀리서 한 대의 차량이 조용히 들어오는 게 보였고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그는 서둘러 그 차 앞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고 동시에 코끝을 찌르는 담배 냄새가 훅 들어왔다.“형, 또 담배 폈어?”구승훈은 차에서 내려 차 문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고 몸을 가누는 모습이 눈에 띄게 힘겨워 보였다.무슨 말을 하려던 구승재는 그보다 먼저 들려온 거친 기침 소리에 놀라 멈칫했다.거친 기침 소리 끝에 피비린내가 섞였고 구승훈은 겨우 참으며 목까지 차오른 피를 억지로 삼켰고 구승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담배 피지 말랬잖아. 막 돌아다니지도 말라고 했고! 형, 제발 말 좀 들어라.”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손끝을 닦고는, 조용히 밤하늘 아래 그걸 쓰레기통에 던졌다.“승재야.”“나 진짜 걱정돼서 그런 거야.”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죽진 않아.”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임희주 그쪽은?”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리며 방금 구승훈이 던진 손수건이 들어간 쓰레기통을 힐끔 보았다가, 이내 형의 뒤를 따라붙었다.“오늘 또 준봉이 신문했는데 여전히 같은 말만 해. 형 얼굴 한 번 보면 그때야 입 열겠다고.”구승훈은 고개만 끄덕이며 요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구승재는 그 뒤를 따르며 말했다.“근데 진짜로 누워서 쉬어야 해. 안 그러면 죽는다잖아.”구승훈은 짧게 웃었다.“폐색전증 온다고 했잖아! 이건 웃을 일이 아니라고!”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반응이었고 결국 구승재는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비켜섰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밤의 요양원은 유독 조용했고 그만큼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병실 문이 열리는 순간, 임희주는 갑작스럽게 눈을 떴고 눈가엔 놀람과 함께 복잡한 감정이 비쳤다.구승훈은 창가에 서 있었다.“하고 싶은 말 남았어요?”임희주는 눈가가 붉어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