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민우가 혀를 차며 해명하려던 찰나 갑자기 휴대폰 벨이 울렸다.휴대폰에 걸려 온 전화를 살피던 그는 손연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가 콧방귀를 뀌며 뒤돌아 위층으로 향하자 노민우는 황급히 그녀를 다시 끌어당겼다.“내가 한 밥 안 먹을 거야?”“너나 먹어!”손연지가 씩씩거리며 그를 발로 찼다.“꺼져! 누가 그딴 거 먹고 싶대?”“이미 다 했는데.”손연지는 이를 갈았다.“노민우, 난 널 남자로 생각 안 해.”노민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이렇게 오랜 시간 애까지 만들었는데 아직도 내가 남자라는 걸 증명하지 못한 거야?”손연지가 비웃었다.“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냥 인간이 아닌 것 같다. 기다려, 내가 결혼할 때 너한테 주례를 부탁할 테니까.”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노민우를 밀어냈고 상대는 더 말하고 싶었지만 손연지에게 연달아 발길질당했다.“손연지!” 노민우는 화가 났다.“너 누구랑 결혼하는데?”“누구랑 결혼하든 내 마음이지. 나 따라다니는 사람도 없을 것 같아?”노민우가 눈을 부릅떴다.“진짜 결혼하려고?”손연지가 웃었다.“왜, 너는 약혼해도 되고 난 결혼하면 안 돼?”“난 엄마 달래려고 약혼한 거지 진짜로 결혼할 생각은 없어.”손연지는 그 말에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은 듯 차분하게 노민우를 바라보았다.그 말을 들었을 때 심장마저 한 박자 늦게 뛰었다는 건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내 그녀는 다시 이성을 되찾았다.‘왜 흔들려? 뭘 망설여? 전에 당한 굴욕으로 충분하지 않아? 하리처럼 엄마가 목숨까지 잃어야겠어?’게다가 엄마를 달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지금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그는 굴복하지 않았을 거다.고작 한심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삶을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고 싶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두 사람은 또다시 불쾌하게 등을 돌렸고 노민우는 식탁에 앉아 검게 탄 밥을 바라보며 조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이미 해명을 다 했는데 왜 아직 화가 나 있는 걸까.노민우는 정신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내 물건이니 당연히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거죠. 정안이나 에비뉴가 아니라 온 세상을 이 여자에게 줘도 부족해요. 다들 자신 있으면 제 손에서 빼앗아 가세요. 그게 아니면 제 아내 회사에 찾아와서 괜히 공기나 더럽히지 마시고요.”구민성과 구민수를 제외한 다른 친척들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움츠렸고 구민성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구승훈이 두 눈을 부릅뜨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거기 서서 뭐 하고 있어! 얼른 이 사람들 내보내지 않고!”준봉은 그 말에 급히 경호원을 불러들여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구민성의 목소리가 꼭대기 층에 계속 울려 퍼졌다.“구승훈, 이거 놔. 난 네 삼촌이야. 구승훈, 두고 봐. 구씨 가문이 네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줄게!”구민성의 목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구승훈은 구동근에게 전화를 걸었다.“시간 나면 B시에 오세요. 하리 어머니 산소에 가서 절이라도 하셔야 제가 결혼식을 올리죠.”구동근은 순식간에 발끈했다.“망할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구승훈은 웃었다.“못 알아들어요? 제가 다시 얘기할까요? 급하니까 일찍 오세요.”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빨리 강하리와 식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한 건 사실이었다.무슨 일이 있든 강하리를 명실상부 그의 아내로 만들어야 그가 이성을 잃어도, 구씨 가문에서 원하지 않더라도 강하리에게 준 재산을 빼앗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구승훈은 문득 자신이 무척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시간을 지체해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강하리가 자신을 포기할까 봐, 상황이 점점 악화하여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강하리를 포기해야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고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흔들릴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강하리가 회사로 달려갔을 때 그녀가 본 건 응접실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서 있는 구승훈의 뒷모습뿐이었다.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이 이 남자에게서 다시 한번 느껴져
준봉은 갑자기 강한 적을 마주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노진우가 어떻게 강하리 앞에서 빈틈을 드러내지 않고 버틸 수 있었는지 매우 궁금해졌다.강하리는 무심하게 준봉에게 걸어갔고 준봉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사모님, 안녕하세요.”“가져와요.” 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고 준봉은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휴대폰을 건넸다.상사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지만 사모님의 말씀은 더더욱 그러했다.휴대폰 화면에 뜨는 메시지를 보며 강하리의 속눈썹이 살짝 처졌다.“그쪽 대표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강하리는 불편한 느낌을 참으며 힘겹게 물었다.구승훈의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그녀만 모르고 있었다.준봉은 신경이 곤두서며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아 이마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강하리는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그쪽이 곁에 있는 게 싫다고 하면 그쪽 대표님이 어떻게 할 것 같아요?”“대표님은 어머님에 의해 약물을 투여받았습니다.”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툭 내뱉었고 말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이건... 그의 탓이 아니겠지?아무렴 우선 일자리를 지켜야 하는데...강하리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언제요? 무슨 약이요?”준봉은 강하리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표님이 혼자 버틸 필요는 없으니까.“아가씨를 구하러 갔을 때요. 정확히 어떤 약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노민준 씨 말로는 신경 약물이라고 했어요.강하리는 문득 구승훈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밤잠을 설치던 때가 떠올랐다.모든 것이 그 약 때문이었을까?그래서 그토록 오랫동안 홀로 고통을 견뎌냈던 건가?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요. 고마워요.”강하리가 떠난 후 준봉은 서둘러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사모님께 약물에 관해 말씀드렸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구승훈은 휴대폰의 메시지를 쳐다보다가 한참 후 준봉에게 답장을
강하리가 비웃었다.“그냥 뭐? 구승훈, 만약 내가 아프거나 몸에 이상이 생겼는데 당신에게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야?”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다가 그가 말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미안해, 자기야. 내가 정말 잘못했어.”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를 밀어냈다.“돌아가. 나 클라이언트 만나야 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뒤돌아 문밖으로 나갔고 구승훈이 그녀를 다시 끌어당기려 했지만 그녀는 피했다.응접실 문이 열리자 임명우가 문 앞에 서 있었고 남자는 여전히 반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강 대표님, 오랜만이네요.”말을 마친 그가 그제야 구승훈을 발견한 듯 반응했다.“구 대표님도 여기 계셨네요?”강하리 앞에서 불쌍하던 모습은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지고 구승훈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번지더니 앞으로 다가와 강하리의 어깨를 감싸며 소유욕을 드러냈다.강하리는 여전히 화가 났지만 그를 뿌리치진 않고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일하러 가. 퇴근하고 다시 얘기해.”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을 숨긴 채 시선을 내렸고 강하리의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저녁에 맛있는 거 해줄게.”그렇게 말한 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임명우를 바라봤다.“임명우 씨, 제 아내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 이렇게 끈질기게 매달릴 줄은 몰랐네요.”임명우도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강 대표님은 제가 항상 존경하는 분이니 당연히 매달릴 수밖에요.”구승훈의 눈에 싸늘한 기운이 번뜩였다.“그럼 일찍 포기하시라고 조언하고 싶네요.”임명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그건 구 대표님 뜻대로 안 될 것 같은데요.”말을 마친 그가 눈썹을 치켜올린 채 강하리를 돌아보았다.“강 대표님, 이제 시작해도 될까요?”강하리는 구승훈을 힐끗 쳐다보다가 뒤돌아 사무실로 향했고 임명우는 구승훈을 향해 미소를 짓고는 강하리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어두운 눈빛으로 임명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구승훈의 온몸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그 후 그는
임명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JM을 빠져나왔다.강하리가 그런 이유를 대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그는 계약 해지를 거부했고 강하리가 계약을 해지하려면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진행 과정이 최소 반년은 걸린다.그리고 반년 동안 강하리는 어쩔 수 없이 임명우와 같이 일해야 했다.강하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임명우를 배웅했고 그가 사라지자 곧장 표정이 굳어졌다.나문빈은 남미에서 힘들게 돌아와 위층에 도착하자마자 안예서가 방금 일어난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강하리의 사무실로 향하던 발걸음이 멈칫하며 뒤로 물러섰다.“난 일단 돌아가서 쉬고 다시 올게요.”말을 마친 그가 도망치려는데 그 순간 강하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요!”나문빈은 몸이 경직된 채 심호흡을 한 뒤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강하리의 사무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 그동안 고생 많았는데 휴가 좀 줄까요?”강하리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임명우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자세히 말해줘요.”전에 임명우를 조사한 적이 있긴 해도 알아본 결과가 과거 정양철 때와 마찬가지로 너무 깨끗했다.이에 강하리는 다소 불안해했다.과거 정양철은 무방비 상태로 대했지만 지금의 임명우는 가까이 다가오는 게 싫었다.하지만 그녀가 원하지 않아도 어쩔 방법이 없어 보였다.나문빈은 강하리가 따지려고 부른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나랑 임명우는 해외에서 만났는데 학업 성적은 별로여도 인간관계가 좋았어요. 우리 반에서 나름 좋은 사람이었죠.”그제야 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나문빈을 바라보았다.좋은 사람?우연의 일치일까, 과거 정양철도 누군가 그렇게 말했었다.“그리고요?”“임명우에게 해외에서 만난 여자 친구가 있는데 의학 전공을 한다지만 우린 본 적이 없어요.”“여자 친구요?”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의대생이요?”나문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옆에서 리시안셔스 하나를 꺼냈고 강하리가 곧장 그것을 낚아
노민준은 잠시 침묵했다.“많이 신경 써줘요. 사실... 힘들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누구라도 친엄마한테 그런 일을 당하면 괴로울 거예요. 강하리 씨는 지금 승훈이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강하리 씨만 무사하면 승훈이도 괜찮을 거예요.”휴대폰을 든 강하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한참 후 그녀가 답했다.“알겠어요.”전화를 끊고 나서야 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뒤돌아 정안 건물을 바라보았다.구승훈에게 화가 나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조금 전 노민준의 말을 듣고 난 뒤 독하게 마음을 먹지 못했다.그래, 누구라도 친엄마에게 그런 식으로 당하면 괴로울 거다.구승훈에게서 보이는 쓸쓸함이 그의 모친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구승훈은 어린 시절 어떤 일을 겪었을까?왜... 그의 어머니는 그를 그렇게 미워하는 걸까.처음엔 연정이를 납치하고 그다음엔 구승훈에게 약을 주사했다.그렇게 그가 잘 지내는 게 싫었던 걸까.강하리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다가 휴대폰을 들고 드디어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녁에 갈비찜 먹고 싶어.]구승훈의 마음속 무거웠던 돌덩이가 마침내 안착했다.[맡겨만 줘. 강 대표님, 아직도 화났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응.]문자를 보낸 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물건을 챙겨 외교부로 향했다.내일 외교부 회의가 있어 미리 가서 준비해야 하는데 그곳에서 주해찬을 만날 줄은 몰랐다.주해찬은 마치 추모하듯, 경의를 표하듯 외교부 입구에 홀로 서 있었고 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가갔다.발소리가 들리자 문득 몸을 돌린 주해찬은 강하리를 본 순간 마치 자신이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음의 어둠 속으로 깊게 가라앉아 더 이상 소생의 기회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래도 주해찬의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다.보경대학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따스하고 맑고 깨끗한 눈빛이었다.“안녕, 난 주해찬이라고 해. 네 직속 선배니까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모르
해가 서산에서 지는 가운데 외교부 앞에서 한 명은 고개를 숙인 채 웃고, 한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연인 같았다.강하리는 주해찬이 떠난 후 외교부로 들어갔고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느꼈다.그녀와 주해찬의 영상이 온라인에 퍼진 후 강하리는 온갖 이상한 소문이 쏟아질 것을 알고 있었다.나중에 해명했어도 꼭 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있었고, 게다가 외교부에서 주해찬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떠들어대니 그게 사실처럼 여겨졌다.강하리는 이상한 시선을 마주한 채 통역실로 들어섰고 들어서자마자 한 여자의 차가운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통역실 안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강하리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못 본 척 조용히 책상으로 걸어갔다.“주해찬도 참 눈이 멀었지. 고작 여자 때문에 앞날을 포기하다니.”“저렇게 예쁜 걸 어떡해? 부러워도 소용없어.”“예쁜 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여기저기 엮이는 사람은 처음 봐. 인터넷에 올라온 해명이 거짓말인지 누가 알아? 시연 씨도 재수가 없지. 저 여자가 결백을 증명하는 도구로 됐잖아.”“어휴, 진 장관 딸이잖아. 그만해. 이따가 징계받을 수도 있어.”“그래, 진 장관님은 이제 시연 씨도 버렸는데. 보통 고단수가 아니야.”수군거리는 말이라기엔 너무 거침없이 내뱉었다.사실 그들은 강하리와 나쁘지 않게 지낸 사람들이지만 아무래도 진 장관의 딸은 진시연이라는 인식이 깊게 박혀 있었고 그녀는 갑자기 튀어나 진시연의 아버지를 빼앗은 사람이 되었다.게다가 그녀가 낙하산으로 통역실 주임을 맡았을 때도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 다시 외교부로 돌아오니 그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강하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귀를 닫았다.어쨌든 여긴 외교부고 진태형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반대로 그럴수록 성가신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이제 막 번역본을 펼쳤을 때 갑자기
하지만 강하리는 한 번도 상대하지 않았다.애초에 민감한 신분이고 만약 반격하면 진태형에게 성가신 일이 생길 테니까.그래서 오늘도 강하리가 예전처럼 행동할 거라 생각했는데 감히 그녀에게 물을 붓다니.여명희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씨, 감히 나한테 물을 뿌려요?”강하리가 비웃었다.“못 할 것 있나요? 아니면 나는 그쪽이 물을 뿌려도 반격도 못 한 채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요?”여명희는 너무 화가 나서 원래 하얗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아, 그러면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원래도 구승훈의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데 어깨가 너무 아프고 자료도 다 젖어 여기서 시간 낭비할 기분이 아니었다.그런데 두 발짝도 떼기 전에 여명희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붙잡았다.“강하리 씨,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혀요? 진 장관님 딸이라고 멋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강하리가 여명희의 손을 뿌리쳤다.“내가 괴롭히는 건지 아닌지 그쪽이 더 잘 알지 않나요? 여명희 씨, 아무리 진시연을 도와준다고 하지만 날 만만하게 보지는 마요.”그렇게 말한 후 강하리는 여명희의 손을 뿌리친 뒤 뒤돌아 가버렸고 여명희가 계속해서 그녀를 붙잡으려는데 누군가 말렸다.“명희 씨, 그만해요. 괜히 건드리지 마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밖으로 걸어 나갔다.통역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가끔은 진태형과 부녀 사이인 것을 인정한 게 잘못된 것인지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그게 아니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겠나.강하리는 홀로 병원으로 가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이제 막 차가 멈춰 서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진태형이었다.강하리는 심호흡하고 전화를 받았다.“아빠.”“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아빠한테 얘기 안 해?”강하리는 문득 참아왔던 서글픔이 속절없이 치밀어 올랐다.분명 그녀의 친아빠인데 왜 사람들은 진시연에
요양원 주차장.심준호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진태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저도 잘못이 있어요... 계속 하리가 구승훈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까지 바보 같을 줄은 몰랐어요...”진태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우리 딸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심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다시 입을 뗐다.“요즘은 조시욱이 꽤 신경 써주더라고요.”진태형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 옛날 자신이 어떤 희망도 없이 심미현과의 약혼을 지키며 버텼던 것처럼, 강하리도 그렇게 쉽게 마음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만큼은 절대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오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진태형이 병실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구연정을 안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구연정은 강하리의 이마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후하고 불었다.“엄마, 아프지마...”강하리는 살며시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엄마 안 아파, 우리 연정이 걱정하지 마.”구연정은 백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할머니 울었어.”강하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할머니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백아영은 단호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연정이는 어쩔 뻔했니?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강하리는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백아영은 한숨을 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구연정이 환히 웃으며 진태형에게 달려갔다.진태형은 아이를 안고 병실을 둘러보다, 딸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가가 붉어졌다.“아빠, 나 괜찮아요.”“이게 괜찮은 거
손연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마침 행사 중이더라고. 쿠팡 연말 세일에서 로열 프리미엄 네덜란드 분유 있거든? 영양 흡수도 잘 되고 우리 소아과 아기들도 다 그거 먹어.”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손연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쳐다봤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병원 응급실에서는 생체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급히 달려온 구승재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핸드폰 화면엔 강하리의 연락처가 떠 있었지만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 매번 손이 닿았다가도 다시 멈췄다.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준봉과 노진우도 속만 태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그제야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왔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이 다시 의식을 찾은 건 해 질 무렵이었고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그는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강하리에겐... 알리지 마.”구승재는 목이 막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어. 형수한테는 말 안 할게.”그제야 구승훈은 안도한 듯 눈을 감았지만 구승재는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눈가가 뜨거워졌다.‘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병원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병원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를 아는 터라, 강하리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빠져야만 했다.그날 밤, 노민준이 직접 차를 몰고 구승훈을 요양원으로 데려갔다.“네가 또 도망치면... 그땐 나도 강하리한테 전부 말할 수밖에 없어.”구승훈은 창밖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안 그럴 거야.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됐어.”노민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그 한마디에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푹 쉬어.”병실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구승훈의 머릿속엔 강하리가 조시욱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
청소 아주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강 대표님, 아까 구 대표님이랑 병실 안에 계시던 남자분이랑 여기서 싸웠어요. 아마... 그중 누가 코피를 흘린 것 같더라고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에게 병실 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조용히 말했다.병실 안에 들어서자, 조시욱이 전화를 받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통화를 마쳤다.“오늘 일은, 미안해.”그는 웃으며 말하다가 다시 강하리에게 다가가 침대로 옮겨주려 했지만 강하리가 재빨리 손을 들어 막았다.“잠시 후에 또 검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이대로 있을게요.”“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다 줄까?”그 말에 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조시욱 씨. 선배가 뭐라고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누굴 다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안 돼 있고요. 그러니까 굳이 매일 오시거나 이렇게 곁에 계실 필요 없어요.”조시욱은 사실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처음 만난 그날 밤부터 이미 느꼈다.하지만 그날,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그녀를 두 눈으로 본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각오로 그렇게 뛰어내렸는지 그게 궁금해졌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알고 싶어졌다.설령 그게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이라 해도,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내가 좀 성급했으면 미안. 진짜로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선배 부탁이라서 온 것도 맞지만... 난 그냥, 친구로서 너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어릴 때부터 정 회장님이랑 우리 할아버지 사이도 꽤 각별하셨잖아. 집안끼리도 인연이 깊고.”조시욱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지금은, 네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게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과거 놓고 새로운 시작도 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아?”잠시 정적이 흘렀고 강하리는 조용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방금... 뭐라고 불렀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어쩐지 너무나 낯설었다.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애써 눌러왔던 감정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심장이 바늘로 찔린 것처럼 저릿했고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임희주가... 이렇게 이 사람을 돌본 건가? 그렇다면 지금쯤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더 이상 마음을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전 이제 검사를 받아야 해요. 구 대표님, 손 좀 놓아주세요.”“같이 가줄게.”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갈라지고 낮았다.“괜찮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그 말과 함께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휠체어 좀 부탁드릴게요.”간호사는 그제야 얼떨결에 제자리를 찾은 듯 다가와 그녀의 휠체어를 받았다.조시욱은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 손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구 대표님, 강 대표님 검사 예약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간호사의 말이 이어지자, 구승훈은 천천히, 마치 억지로 손을 떼듯 그녀를 놓았다.강하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지던 기침이 터졌다. 거칠고 깊은 기침 소리, 그리고 피비린 냄새에 조시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너, 다쳤냐?”구승훈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그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지금 따라가서 뭐 하려고?”조시욱은 다급히 앞을 막아섰다.“넌 지금 상태부터 회복해야 해. 이러다 정말 쓰러진다고.”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그를 벽에 밀쳤다. 그러나 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고 그의 입가엔 다시 피가 번졌다.조시욱은 그를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이렇게 약해 빠져선... 넌 내 상대도 안 돼.”
구승훈은 오늘 여기서 조시욱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다.조시욱이든, 주해찬이든 상관없었다. 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분명 그의 아내였으니까.“내가 자리를 피할까?”조시욱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그제야 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아니요, 그냥 하던 얘기 마저 하시죠.”조시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강하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네 지목했던 그 여자, 국정원을 통해서 확인해 봤는데... 국제 쪽에서 활동하는 킬러였어. 주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움직이던 인물인데 이번에 국내에 들어왔다는 건 좀 의외더라.”강하리는 놀란 눈으로 조시욱을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그 여자가 진짜 직업 킬러였다니.“안현우가 고용한 건가요? 아니면... 임희주 쪽?”“아직 확실하진 않아. 근데 지금까지 조사로는 둘 다 그 여자랑 직접 연결된 흔적은 없어. 오히려 둘 다 접촉한 적이 없다는 쪽이 유력해.”조시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네 생각엔, 그 외에 또 누가 너를 죽이려 들었을 것 같아?”‘죽이려 든다’는 말에 강하리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사실 그날 자신을 진짜로 죽이려 했다면 안현우에게 넘기기 전에 이미 끝냈을 터였다.그렇다면 그 여자의 목적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조용히 말했다.“전, 적이 꽤 많아요. 임희주, 안현우는 물론이고... 심씨 집안, 여씨 자매, 진시연... 어쩌면 문씨나 구씨 가문에서도 누군가는 원하고 있었겠죠.”조시욱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래서 내가 네 주변에 사람 몇 명 붙여놨어. 걱정하지 마. 사생활 간섭 같은 건 없을 테니까. 혹시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 바로 다 뺄게.”“감사합니다.” 강하리는 짧게 대답했고 조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근데 혹시 그거 알고 있어? 우리 할아버지랑 네 외할아버지, 전우였던 거?”강하리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자주 저희 집
노민준이 떠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좀 나아졌어?]하지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화면엔 전송 실패 알림이 떴다.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고 가슴 속 깊은 통증이 일며 피를 토했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구승재가 황급히 달려왔다.“형!”구승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등으로 피를 닦고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냐. 그리고... 여초천 병세 위중하다는 소문 퍼뜨려.”“형, 제발 이러다 진짜 형수님도 못 돌려놓고 큰어머님까지 막을 수 없게 될 거야!”“됐어. 내가 괜찮다는데 못 알아들어?”구승훈은 지친 얼굴로 키를 집어 들고 병실을 나섰고 구승재는 분노와 답답함이 뒤섞인 얼굴로 뒤를 쫓았다.“형!”하지만 그가 병원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구승훈의 차는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노민준도 뒤늦게 병실에서 뛰쳐나왔고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내버려둬. 저렇게 살다가 죽겠다는데 어쩌겠냐.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해.”구승재는 그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편, 강하리는 구승재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분명히, 충분히 명확하게 말한 줄 알았다.“받아. 안 받으면 그 꼬맹이 울지도 몰라.”천아름은 옆에서 거울을 보며 입술을 정리하더니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내쉰 뒤, 전화를 받았고 구승재의 목소리는 확실히 맥이 빠져 있었다.“하리 누나.”이번엔 ‘형수님’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강하리는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해졌지만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으세요?”“형이... 또 병원 쪽으로 가면 한 번만 말 좀 해주면 안 될까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 이제 구승훈 씨랑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 사람이 올 일도 없고 와도... 저는 안 볼 거예요. 제게 부탁하지 마시고 차라리 임희주 씨에게 부탁하세요.”“형수님...”구승재는
사실 그 남자는 임희주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입이 단단히 막힌 그녀의 눈엔 점점 절망이 차오르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눈물이 뚝 떨어진 그 순간, 남자의 입가에서 다시 비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배신할 때부터 알았어야지. 이런 꼴 당할 줄. 임희주, 감히 누굴 믿고 사모님을 배신했냐? 응?”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며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임희주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말하고 싶었다.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한 번만 기회만 더 달라고.하지만 남자는 그 비참한 눈빛조차 즐기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너 생각엔, 구승훈이 너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면 어떻게 할 거 같냐?”그 말에 임희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한순간의 정적. 이어지는 건, 저항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차가운 분위기에 날카로운 바늘이 살을 찢고 서늘한 약물이 천천히 몸속에 스며들었다.몸부림치던 동작은 어느새 멈췄고 그의 눈빛을 따라 움직이던 임희주의 시선도 점점 흐려졌다.여초연 곁에서 오래 지낸 그녀는, 지금 이 약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완전히 무너지진 않지만 식물인간처럼 의식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 그 약은, 그렇게 사람을 파괴했다.바늘을 뽑아낸 남자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딱 좋아. 테스트 겸 써보기엔 안성맞춤이지. 덕분에 새 약 연구도 진도 좀 나가겠네. 너한텐 마지막 명예다, 그렇게 알아.”병실 문이 다시 열렸고 하얀 가운에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그 남자는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꺼져 있던 복도 CCTV가 하나둘 다시 켜졌고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두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가볍게 경례하듯 인사를 건넸다.그 화면을 지켜보던 구승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이게, 대놓고 도발 아니고 뭐야.”구승훈도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승훈 씨, 어젯밤 그 시간대에 이상한 소리가 났고 창가 쪽으로 그림자가 스쳤습니다. 저희가 곧바로
“말하면 고통 없이 죽게 해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입 다물고 버틴다면 당신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방법은 차고 넘치거든.”차갑게 말을 내뱉은 구승훈은 그대로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임희주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외쳤다.“구 대표님, 저... 저 당신 좋아했어요. 그거 알아요?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했어요...”하지만 그녀의 고백은 그저 허공을 맴돌 뿐, 아무도 듣지 않았다.강하리는 구승재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가 곧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몇 초도 안 돼 다시 전화가 울렸고 계속해서 울려대는 진동에 결국 그녀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형수님.”구승재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반가움이 섞여 있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담담하고 차분했다.“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저 지금 좀 피곤하거든요. 쉬고 싶어요. 그러니까...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구승재는 멍하니 전화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한 줄의 메시지를 남겼다.[형수님, 생일 축하드립니다.]하지만 그 메시지조차, 아무런 응답 없이 그대로 묻혀버렸다.구승훈의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담배 냄새에 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렸다.구승훈은 그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안 됐냐?”대답 대신, 구승재는 말없이 다가가 그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눌러 껐고 재떨이를 들고 방을 나섰다.잠시 후, 노민준이 급히 병실로 들어왔다.“담배 끊든가 안정제 맞든가. 선택해.”구승훈은 그를 빤히 보더니 침대 위로 몸을 기댔고 노민준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너, 강하리가 유엔 인맥까지 써서 약리학자 세 명 데려온 거 알고는 있어? 그것도 세계 최고 수준. 그 사람들 상담료가 어느 정도인 줄 알아? 분 단위도 아니고 초 단위로 계산된다. 다 너 살리려고 이 난리인데 넌 진심으로 그 노력을 다 무시하고 싶은 거냐?”그 말에 구승훈은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약리
요양원 아래 주차장.구승재는 허겁지겁 달려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직 차에 다다르기도 전에, 멀리서 한 대의 차량이 조용히 들어오는 게 보였고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그는 서둘러 그 차 앞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고 동시에 코끝을 찌르는 담배 냄새가 훅 들어왔다.“형, 또 담배 폈어?”구승훈은 차에서 내려 차 문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고 몸을 가누는 모습이 눈에 띄게 힘겨워 보였다.무슨 말을 하려던 구승재는 그보다 먼저 들려온 거친 기침 소리에 놀라 멈칫했다.거친 기침 소리 끝에 피비린내가 섞였고 구승훈은 겨우 참으며 목까지 차오른 피를 억지로 삼켰고 구승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담배 피지 말랬잖아. 막 돌아다니지도 말라고 했고! 형, 제발 말 좀 들어라.”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손끝을 닦고는, 조용히 밤하늘 아래 그걸 쓰레기통에 던졌다.“승재야.”“나 진짜 걱정돼서 그런 거야.”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죽진 않아.”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임희주 그쪽은?”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리며 방금 구승훈이 던진 손수건이 들어간 쓰레기통을 힐끔 보았다가, 이내 형의 뒤를 따라붙었다.“오늘 또 준봉이 신문했는데 여전히 같은 말만 해. 형 얼굴 한 번 보면 그때야 입 열겠다고.”구승훈은 고개만 끄덕이며 요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구승재는 그 뒤를 따르며 말했다.“근데 진짜로 누워서 쉬어야 해. 안 그러면 죽는다잖아.”구승훈은 짧게 웃었다.“폐색전증 온다고 했잖아! 이건 웃을 일이 아니라고!”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반응이었고 결국 구승재는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비켜섰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밤의 요양원은 유독 조용했고 그만큼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병실 문이 열리는 순간, 임희주는 갑작스럽게 눈을 떴고 눈가엔 놀람과 함께 복잡한 감정이 비쳤다.구승훈은 창가에 서 있었다.“하고 싶은 말 남았어요?”임희주는 눈가가 붉어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