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민우가 혀를 차며 해명하려던 찰나 갑자기 휴대폰 벨이 울렸다.휴대폰에 걸려 온 전화를 살피던 그는 손연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가 콧방귀를 뀌며 뒤돌아 위층으로 향하자 노민우는 황급히 그녀를 다시 끌어당겼다.“내가 한 밥 안 먹을 거야?”“너나 먹어!”손연지가 씩씩거리며 그를 발로 찼다.“꺼져! 누가 그딴 거 먹고 싶대?”“이미 다 했는데.”손연지는 이를 갈았다.“노민우, 난 널 남자로 생각 안 해.”노민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이렇게 오랜 시간 애까지 만들었는데 아직도 내가 남자라는 걸 증명하지 못한 거야?”손연지가 비웃었다.“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냥 인간이 아닌 것 같다. 기다려, 내가 결혼할 때 너한테 주례를 부탁할 테니까.”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노민우를 밀어냈고 상대는 더 말하고 싶었지만 손연지에게 연달아 발길질당했다.“손연지!” 노민우는 화가 났다.“너 누구랑 결혼하는데?”“누구랑 결혼하든 내 마음이지. 나 따라다니는 사람도 없을 것 같아?”노민우가 눈을 부릅떴다.“진짜 결혼하려고?”손연지가 웃었다.“왜, 너는 약혼해도 되고 난 결혼하면 안 돼?”“난 엄마 달래려고 약혼한 거지 진짜로 결혼할 생각은 없어.”손연지는 그 말에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은 듯 차분하게 노민우를 바라보았다.그 말을 들었을 때 심장마저 한 박자 늦게 뛰었다는 건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내 그녀는 다시 이성을 되찾았다.‘왜 흔들려? 뭘 망설여? 전에 당한 굴욕으로 충분하지 않아? 하리처럼 엄마가 목숨까지 잃어야겠어?’게다가 엄마를 달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지금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그는 굴복하지 않았을 거다.고작 한심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삶을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고 싶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두 사람은 또다시 불쾌하게 등을 돌렸고 노민우는 식탁에 앉아 검게 탄 밥을 바라보며 조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이미 해명을 다 했는데 왜 아직 화가 나 있는 걸까.노민우는 정신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내 물건이니 당연히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거죠. 정안이나 에비뉴가 아니라 온 세상을 이 여자에게 줘도 부족해요. 다들 자신 있으면 제 손에서 빼앗아 가세요. 그게 아니면 제 아내 회사에 찾아와서 괜히 공기나 더럽히지 마시고요.”구민성과 구민수를 제외한 다른 친척들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움츠렸고 구민성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구승훈이 두 눈을 부릅뜨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거기 서서 뭐 하고 있어! 얼른 이 사람들 내보내지 않고!”준봉은 그 말에 급히 경호원을 불러들여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구민성의 목소리가 꼭대기 층에 계속 울려 퍼졌다.“구승훈, 이거 놔. 난 네 삼촌이야. 구승훈, 두고 봐. 구씨 가문이 네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줄게!”구민성의 목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구승훈은 구동근에게 전화를 걸었다.“시간 나면 B시에 오세요. 하리 어머니 산소에 가서 절이라도 하셔야 제가 결혼식을 올리죠.”구동근은 순식간에 발끈했다.“망할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구승훈은 웃었다.“못 알아들어요? 제가 다시 얘기할까요? 급하니까 일찍 오세요.”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빨리 강하리와 식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한 건 사실이었다.무슨 일이 있든 강하리를 명실상부 그의 아내로 만들어야 그가 이성을 잃어도, 구씨 가문에서 원하지 않더라도 강하리에게 준 재산을 빼앗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구승훈은 문득 자신이 무척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시간을 지체해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강하리가 자신을 포기할까 봐, 상황이 점점 악화하여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강하리를 포기해야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고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흔들릴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강하리가 회사로 달려갔을 때 그녀가 본 건 응접실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서 있는 구승훈의 뒷모습뿐이었다.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이 이 남자에게서 다시 한번 느껴져
준봉은 갑자기 강한 적을 마주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노진우가 어떻게 강하리 앞에서 빈틈을 드러내지 않고 버틸 수 있었는지 매우 궁금해졌다.강하리는 무심하게 준봉에게 걸어갔고 준봉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사모님, 안녕하세요.”“가져와요.” 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고 준봉은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휴대폰을 건넸다.상사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지만 사모님의 말씀은 더더욱 그러했다.휴대폰 화면에 뜨는 메시지를 보며 강하리의 속눈썹이 살짝 처졌다.“그쪽 대표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강하리는 불편한 느낌을 참으며 힘겹게 물었다.구승훈의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그녀만 모르고 있었다.준봉은 신경이 곤두서며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아 이마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강하리는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그쪽이 곁에 있는 게 싫다고 하면 그쪽 대표님이 어떻게 할 것 같아요?”“대표님은 어머님에 의해 약물을 투여받았습니다.”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툭 내뱉었고 말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이건... 그의 탓이 아니겠지?아무렴 우선 일자리를 지켜야 하는데...강하리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언제요? 무슨 약이요?”준봉은 강하리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표님이 혼자 버틸 필요는 없으니까.“아가씨를 구하러 갔을 때요. 정확히 어떤 약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노민준 씨 말로는 신경 약물이라고 했어요.강하리는 문득 구승훈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밤잠을 설치던 때가 떠올랐다.모든 것이 그 약 때문이었을까?그래서 그토록 오랫동안 홀로 고통을 견뎌냈던 건가?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요. 고마워요.”강하리가 떠난 후 준봉은 서둘러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사모님께 약물에 관해 말씀드렸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구승훈은 휴대폰의 메시지를 쳐다보다가 한참 후 준봉에게 답장을
강하리가 비웃었다.“그냥 뭐? 구승훈, 만약 내가 아프거나 몸에 이상이 생겼는데 당신에게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야?”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다가 그가 말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미안해, 자기야. 내가 정말 잘못했어.”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를 밀어냈다.“돌아가. 나 클라이언트 만나야 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뒤돌아 문밖으로 나갔고 구승훈이 그녀를 다시 끌어당기려 했지만 그녀는 피했다.응접실 문이 열리자 임명우가 문 앞에 서 있었고 남자는 여전히 반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강 대표님, 오랜만이네요.”말을 마친 그가 그제야 구승훈을 발견한 듯 반응했다.“구 대표님도 여기 계셨네요?”강하리 앞에서 불쌍하던 모습은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지고 구승훈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번지더니 앞으로 다가와 강하리의 어깨를 감싸며 소유욕을 드러냈다.강하리는 여전히 화가 났지만 그를 뿌리치진 않고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일하러 가. 퇴근하고 다시 얘기해.”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을 숨긴 채 시선을 내렸고 강하리의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저녁에 맛있는 거 해줄게.”그렇게 말한 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임명우를 바라봤다.“임명우 씨, 제 아내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 이렇게 끈질기게 매달릴 줄은 몰랐네요.”임명우도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강 대표님은 제가 항상 존경하는 분이니 당연히 매달릴 수밖에요.”구승훈의 눈에 싸늘한 기운이 번뜩였다.“그럼 일찍 포기하시라고 조언하고 싶네요.”임명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그건 구 대표님 뜻대로 안 될 것 같은데요.”말을 마친 그가 눈썹을 치켜올린 채 강하리를 돌아보았다.“강 대표님, 이제 시작해도 될까요?”강하리는 구승훈을 힐끗 쳐다보다가 뒤돌아 사무실로 향했고 임명우는 구승훈을 향해 미소를 짓고는 강하리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어두운 눈빛으로 임명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구승훈의 온몸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그 후 그는
임명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JM을 빠져나왔다.강하리가 그런 이유를 대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그는 계약 해지를 거부했고 강하리가 계약을 해지하려면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진행 과정이 최소 반년은 걸린다.그리고 반년 동안 강하리는 어쩔 수 없이 임명우와 같이 일해야 했다.강하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임명우를 배웅했고 그가 사라지자 곧장 표정이 굳어졌다.나문빈은 남미에서 힘들게 돌아와 위층에 도착하자마자 안예서가 방금 일어난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강하리의 사무실로 향하던 발걸음이 멈칫하며 뒤로 물러섰다.“난 일단 돌아가서 쉬고 다시 올게요.”말을 마친 그가 도망치려는데 그 순간 강하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요!”나문빈은 몸이 경직된 채 심호흡을 한 뒤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강하리의 사무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 그동안 고생 많았는데 휴가 좀 줄까요?”강하리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임명우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자세히 말해줘요.”전에 임명우를 조사한 적이 있긴 해도 알아본 결과가 과거 정양철 때와 마찬가지로 너무 깨끗했다.이에 강하리는 다소 불안해했다.과거 정양철은 무방비 상태로 대했지만 지금의 임명우는 가까이 다가오는 게 싫었다.하지만 그녀가 원하지 않아도 어쩔 방법이 없어 보였다.나문빈은 강하리가 따지려고 부른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나랑 임명우는 해외에서 만났는데 학업 성적은 별로여도 인간관계가 좋았어요. 우리 반에서 나름 좋은 사람이었죠.”그제야 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나문빈을 바라보았다.좋은 사람?우연의 일치일까, 과거 정양철도 누군가 그렇게 말했었다.“그리고요?”“임명우에게 해외에서 만난 여자 친구가 있는데 의학 전공을 한다지만 우린 본 적이 없어요.”“여자 친구요?”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의대생이요?”나문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옆에서 리시안셔스 하나를 꺼냈고 강하리가 곧장 그것을 낚아
노민준은 잠시 침묵했다.“많이 신경 써줘요. 사실... 힘들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누구라도 친엄마한테 그런 일을 당하면 괴로울 거예요. 강하리 씨는 지금 승훈이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강하리 씨만 무사하면 승훈이도 괜찮을 거예요.”휴대폰을 든 강하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한참 후 그녀가 답했다.“알겠어요.”전화를 끊고 나서야 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뒤돌아 정안 건물을 바라보았다.구승훈에게 화가 나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조금 전 노민준의 말을 듣고 난 뒤 독하게 마음을 먹지 못했다.그래, 누구라도 친엄마에게 그런 식으로 당하면 괴로울 거다.구승훈에게서 보이는 쓸쓸함이 그의 모친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구승훈은 어린 시절 어떤 일을 겪었을까?왜... 그의 어머니는 그를 그렇게 미워하는 걸까.처음엔 연정이를 납치하고 그다음엔 구승훈에게 약을 주사했다.그렇게 그가 잘 지내는 게 싫었던 걸까.강하리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다가 휴대폰을 들고 드디어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녁에 갈비찜 먹고 싶어.]구승훈의 마음속 무거웠던 돌덩이가 마침내 안착했다.[맡겨만 줘. 강 대표님, 아직도 화났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응.]문자를 보낸 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물건을 챙겨 외교부로 향했다.내일 외교부 회의가 있어 미리 가서 준비해야 하는데 그곳에서 주해찬을 만날 줄은 몰랐다.주해찬은 마치 추모하듯, 경의를 표하듯 외교부 입구에 홀로 서 있었고 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가갔다.발소리가 들리자 문득 몸을 돌린 주해찬은 강하리를 본 순간 마치 자신이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음의 어둠 속으로 깊게 가라앉아 더 이상 소생의 기회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래도 주해찬의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다.보경대학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따스하고 맑고 깨끗한 눈빛이었다.“안녕, 난 주해찬이라고 해. 네 직속 선배니까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모르
해가 서산에서 지는 가운데 외교부 앞에서 한 명은 고개를 숙인 채 웃고, 한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연인 같았다.강하리는 주해찬이 떠난 후 외교부로 들어갔고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느꼈다.그녀와 주해찬의 영상이 온라인에 퍼진 후 강하리는 온갖 이상한 소문이 쏟아질 것을 알고 있었다.나중에 해명했어도 꼭 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있었고, 게다가 외교부에서 주해찬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떠들어대니 그게 사실처럼 여겨졌다.강하리는 이상한 시선을 마주한 채 통역실로 들어섰고 들어서자마자 한 여자의 차가운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통역실 안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강하리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못 본 척 조용히 책상으로 걸어갔다.“주해찬도 참 눈이 멀었지. 고작 여자 때문에 앞날을 포기하다니.”“저렇게 예쁜 걸 어떡해? 부러워도 소용없어.”“예쁜 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여기저기 엮이는 사람은 처음 봐. 인터넷에 올라온 해명이 거짓말인지 누가 알아? 시연 씨도 재수가 없지. 저 여자가 결백을 증명하는 도구로 됐잖아.”“어휴, 진 장관 딸이잖아. 그만해. 이따가 징계받을 수도 있어.”“그래, 진 장관님은 이제 시연 씨도 버렸는데. 보통 고단수가 아니야.”수군거리는 말이라기엔 너무 거침없이 내뱉었다.사실 그들은 강하리와 나쁘지 않게 지낸 사람들이지만 아무래도 진 장관의 딸은 진시연이라는 인식이 깊게 박혀 있었고 그녀는 갑자기 튀어나 진시연의 아버지를 빼앗은 사람이 되었다.게다가 그녀가 낙하산으로 통역실 주임을 맡았을 때도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 다시 외교부로 돌아오니 그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강하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귀를 닫았다.어쨌든 여긴 외교부고 진태형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반대로 그럴수록 성가신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이제 막 번역본을 펼쳤을 때 갑자기
하지만 강하리는 한 번도 상대하지 않았다.애초에 민감한 신분이고 만약 반격하면 진태형에게 성가신 일이 생길 테니까.그래서 오늘도 강하리가 예전처럼 행동할 거라 생각했는데 감히 그녀에게 물을 붓다니.여명희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씨, 감히 나한테 물을 뿌려요?”강하리가 비웃었다.“못 할 것 있나요? 아니면 나는 그쪽이 물을 뿌려도 반격도 못 한 채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요?”여명희는 너무 화가 나서 원래 하얗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아, 그러면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원래도 구승훈의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데 어깨가 너무 아프고 자료도 다 젖어 여기서 시간 낭비할 기분이 아니었다.그런데 두 발짝도 떼기 전에 여명희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붙잡았다.“강하리 씨,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혀요? 진 장관님 딸이라고 멋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강하리가 여명희의 손을 뿌리쳤다.“내가 괴롭히는 건지 아닌지 그쪽이 더 잘 알지 않나요? 여명희 씨, 아무리 진시연을 도와준다고 하지만 날 만만하게 보지는 마요.”그렇게 말한 후 강하리는 여명희의 손을 뿌리친 뒤 뒤돌아 가버렸고 여명희가 계속해서 그녀를 붙잡으려는데 누군가 말렸다.“명희 씨, 그만해요. 괜히 건드리지 마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밖으로 걸어 나갔다.통역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가끔은 진태형과 부녀 사이인 것을 인정한 게 잘못된 것인지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그게 아니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겠나.강하리는 홀로 병원으로 가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이제 막 차가 멈춰 서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진태형이었다.강하리는 심호흡하고 전화를 받았다.“아빠.”“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아빠한테 얘기 안 해?”강하리는 문득 참아왔던 서글픔이 속절없이 치밀어 올랐다.분명 그녀의 친아빠인데 왜 사람들은 진시연에
하지만 강하리는 한 번도 상대하지 않았다.애초에 민감한 신분이고 만약 반격하면 진태형에게 성가신 일이 생길 테니까.그래서 오늘도 강하리가 예전처럼 행동할 거라 생각했는데 감히 그녀에게 물을 붓다니.여명희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씨, 감히 나한테 물을 뿌려요?”강하리가 비웃었다.“못 할 것 있나요? 아니면 나는 그쪽이 물을 뿌려도 반격도 못 한 채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요?”여명희는 너무 화가 나서 원래 하얗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아, 그러면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원래도 구승훈의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데 어깨가 너무 아프고 자료도 다 젖어 여기서 시간 낭비할 기분이 아니었다.그런데 두 발짝도 떼기 전에 여명희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붙잡았다.“강하리 씨,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혀요? 진 장관님 딸이라고 멋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강하리가 여명희의 손을 뿌리쳤다.“내가 괴롭히는 건지 아닌지 그쪽이 더 잘 알지 않나요? 여명희 씨, 아무리 진시연을 도와준다고 하지만 날 만만하게 보지는 마요.”그렇게 말한 후 강하리는 여명희의 손을 뿌리친 뒤 뒤돌아 가버렸고 여명희가 계속해서 그녀를 붙잡으려는데 누군가 말렸다.“명희 씨, 그만해요. 괜히 건드리지 마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밖으로 걸어 나갔다.통역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가끔은 진태형과 부녀 사이인 것을 인정한 게 잘못된 것인지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그게 아니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겠나.강하리는 홀로 병원으로 가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이제 막 차가 멈춰 서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진태형이었다.강하리는 심호흡하고 전화를 받았다.“아빠.”“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아빠한테 얘기 안 해?”강하리는 문득 참아왔던 서글픔이 속절없이 치밀어 올랐다.분명 그녀의 친아빠인데 왜 사람들은 진시연에
해가 서산에서 지는 가운데 외교부 앞에서 한 명은 고개를 숙인 채 웃고, 한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연인 같았다.강하리는 주해찬이 떠난 후 외교부로 들어갔고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느꼈다.그녀와 주해찬의 영상이 온라인에 퍼진 후 강하리는 온갖 이상한 소문이 쏟아질 것을 알고 있었다.나중에 해명했어도 꼭 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있었고, 게다가 외교부에서 주해찬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떠들어대니 그게 사실처럼 여겨졌다.강하리는 이상한 시선을 마주한 채 통역실로 들어섰고 들어서자마자 한 여자의 차가운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통역실 안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강하리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못 본 척 조용히 책상으로 걸어갔다.“주해찬도 참 눈이 멀었지. 고작 여자 때문에 앞날을 포기하다니.”“저렇게 예쁜 걸 어떡해? 부러워도 소용없어.”“예쁜 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여기저기 엮이는 사람은 처음 봐. 인터넷에 올라온 해명이 거짓말인지 누가 알아? 시연 씨도 재수가 없지. 저 여자가 결백을 증명하는 도구로 됐잖아.”“어휴, 진 장관 딸이잖아. 그만해. 이따가 징계받을 수도 있어.”“그래, 진 장관님은 이제 시연 씨도 버렸는데. 보통 고단수가 아니야.”수군거리는 말이라기엔 너무 거침없이 내뱉었다.사실 그들은 강하리와 나쁘지 않게 지낸 사람들이지만 아무래도 진 장관의 딸은 진시연이라는 인식이 깊게 박혀 있었고 그녀는 갑자기 튀어나 진시연의 아버지를 빼앗은 사람이 되었다.게다가 그녀가 낙하산으로 통역실 주임을 맡았을 때도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 다시 외교부로 돌아오니 그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강하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귀를 닫았다.어쨌든 여긴 외교부고 진태형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반대로 그럴수록 성가신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이제 막 번역본을 펼쳤을 때 갑자기
노민준은 잠시 침묵했다.“많이 신경 써줘요. 사실... 힘들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누구라도 친엄마한테 그런 일을 당하면 괴로울 거예요. 강하리 씨는 지금 승훈이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강하리 씨만 무사하면 승훈이도 괜찮을 거예요.”휴대폰을 든 강하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한참 후 그녀가 답했다.“알겠어요.”전화를 끊고 나서야 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뒤돌아 정안 건물을 바라보았다.구승훈에게 화가 나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조금 전 노민준의 말을 듣고 난 뒤 독하게 마음을 먹지 못했다.그래, 누구라도 친엄마에게 그런 식으로 당하면 괴로울 거다.구승훈에게서 보이는 쓸쓸함이 그의 모친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구승훈은 어린 시절 어떤 일을 겪었을까?왜... 그의 어머니는 그를 그렇게 미워하는 걸까.처음엔 연정이를 납치하고 그다음엔 구승훈에게 약을 주사했다.그렇게 그가 잘 지내는 게 싫었던 걸까.강하리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다가 휴대폰을 들고 드디어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녁에 갈비찜 먹고 싶어.]구승훈의 마음속 무거웠던 돌덩이가 마침내 안착했다.[맡겨만 줘. 강 대표님, 아직도 화났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응.]문자를 보낸 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물건을 챙겨 외교부로 향했다.내일 외교부 회의가 있어 미리 가서 준비해야 하는데 그곳에서 주해찬을 만날 줄은 몰랐다.주해찬은 마치 추모하듯, 경의를 표하듯 외교부 입구에 홀로 서 있었고 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가갔다.발소리가 들리자 문득 몸을 돌린 주해찬은 강하리를 본 순간 마치 자신이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음의 어둠 속으로 깊게 가라앉아 더 이상 소생의 기회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래도 주해찬의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다.보경대학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따스하고 맑고 깨끗한 눈빛이었다.“안녕, 난 주해찬이라고 해. 네 직속 선배니까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모르
임명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JM을 빠져나왔다.강하리가 그런 이유를 대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그는 계약 해지를 거부했고 강하리가 계약을 해지하려면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진행 과정이 최소 반년은 걸린다.그리고 반년 동안 강하리는 어쩔 수 없이 임명우와 같이 일해야 했다.강하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임명우를 배웅했고 그가 사라지자 곧장 표정이 굳어졌다.나문빈은 남미에서 힘들게 돌아와 위층에 도착하자마자 안예서가 방금 일어난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강하리의 사무실로 향하던 발걸음이 멈칫하며 뒤로 물러섰다.“난 일단 돌아가서 쉬고 다시 올게요.”말을 마친 그가 도망치려는데 그 순간 강하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요!”나문빈은 몸이 경직된 채 심호흡을 한 뒤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강하리의 사무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 그동안 고생 많았는데 휴가 좀 줄까요?”강하리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임명우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자세히 말해줘요.”전에 임명우를 조사한 적이 있긴 해도 알아본 결과가 과거 정양철 때와 마찬가지로 너무 깨끗했다.이에 강하리는 다소 불안해했다.과거 정양철은 무방비 상태로 대했지만 지금의 임명우는 가까이 다가오는 게 싫었다.하지만 그녀가 원하지 않아도 어쩔 방법이 없어 보였다.나문빈은 강하리가 따지려고 부른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나랑 임명우는 해외에서 만났는데 학업 성적은 별로여도 인간관계가 좋았어요. 우리 반에서 나름 좋은 사람이었죠.”그제야 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나문빈을 바라보았다.좋은 사람?우연의 일치일까, 과거 정양철도 누군가 그렇게 말했었다.“그리고요?”“임명우에게 해외에서 만난 여자 친구가 있는데 의학 전공을 한다지만 우린 본 적이 없어요.”“여자 친구요?”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의대생이요?”나문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옆에서 리시안셔스 하나를 꺼냈고 강하리가 곧장 그것을 낚아
강하리가 비웃었다.“그냥 뭐? 구승훈, 만약 내가 아프거나 몸에 이상이 생겼는데 당신에게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야?”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다가 그가 말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미안해, 자기야. 내가 정말 잘못했어.”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를 밀어냈다.“돌아가. 나 클라이언트 만나야 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뒤돌아 문밖으로 나갔고 구승훈이 그녀를 다시 끌어당기려 했지만 그녀는 피했다.응접실 문이 열리자 임명우가 문 앞에 서 있었고 남자는 여전히 반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강 대표님, 오랜만이네요.”말을 마친 그가 그제야 구승훈을 발견한 듯 반응했다.“구 대표님도 여기 계셨네요?”강하리 앞에서 불쌍하던 모습은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지고 구승훈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번지더니 앞으로 다가와 강하리의 어깨를 감싸며 소유욕을 드러냈다.강하리는 여전히 화가 났지만 그를 뿌리치진 않고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일하러 가. 퇴근하고 다시 얘기해.”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을 숨긴 채 시선을 내렸고 강하리의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저녁에 맛있는 거 해줄게.”그렇게 말한 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임명우를 바라봤다.“임명우 씨, 제 아내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 이렇게 끈질기게 매달릴 줄은 몰랐네요.”임명우도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강 대표님은 제가 항상 존경하는 분이니 당연히 매달릴 수밖에요.”구승훈의 눈에 싸늘한 기운이 번뜩였다.“그럼 일찍 포기하시라고 조언하고 싶네요.”임명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그건 구 대표님 뜻대로 안 될 것 같은데요.”말을 마친 그가 눈썹을 치켜올린 채 강하리를 돌아보았다.“강 대표님, 이제 시작해도 될까요?”강하리는 구승훈을 힐끗 쳐다보다가 뒤돌아 사무실로 향했고 임명우는 구승훈을 향해 미소를 짓고는 강하리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어두운 눈빛으로 임명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구승훈의 온몸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그 후 그는
준봉은 갑자기 강한 적을 마주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노진우가 어떻게 강하리 앞에서 빈틈을 드러내지 않고 버틸 수 있었는지 매우 궁금해졌다.강하리는 무심하게 준봉에게 걸어갔고 준봉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사모님, 안녕하세요.”“가져와요.” 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고 준봉은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휴대폰을 건넸다.상사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지만 사모님의 말씀은 더더욱 그러했다.휴대폰 화면에 뜨는 메시지를 보며 강하리의 속눈썹이 살짝 처졌다.“그쪽 대표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강하리는 불편한 느낌을 참으며 힘겹게 물었다.구승훈의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그녀만 모르고 있었다.준봉은 신경이 곤두서며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아 이마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강하리는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그쪽이 곁에 있는 게 싫다고 하면 그쪽 대표님이 어떻게 할 것 같아요?”“대표님은 어머님에 의해 약물을 투여받았습니다.”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툭 내뱉었고 말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이건... 그의 탓이 아니겠지?아무렴 우선 일자리를 지켜야 하는데...강하리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언제요? 무슨 약이요?”준봉은 강하리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표님이 혼자 버틸 필요는 없으니까.“아가씨를 구하러 갔을 때요. 정확히 어떤 약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노민준 씨 말로는 신경 약물이라고 했어요.강하리는 문득 구승훈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밤잠을 설치던 때가 떠올랐다.모든 것이 그 약 때문이었을까?그래서 그토록 오랫동안 홀로 고통을 견뎌냈던 건가?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요. 고마워요.”강하리가 떠난 후 준봉은 서둘러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사모님께 약물에 관해 말씀드렸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구승훈은 휴대폰의 메시지를 쳐다보다가 한참 후 준봉에게 답장을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내 물건이니 당연히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거죠. 정안이나 에비뉴가 아니라 온 세상을 이 여자에게 줘도 부족해요. 다들 자신 있으면 제 손에서 빼앗아 가세요. 그게 아니면 제 아내 회사에 찾아와서 괜히 공기나 더럽히지 마시고요.”구민성과 구민수를 제외한 다른 친척들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움츠렸고 구민성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구승훈이 두 눈을 부릅뜨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거기 서서 뭐 하고 있어! 얼른 이 사람들 내보내지 않고!”준봉은 그 말에 급히 경호원을 불러들여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구민성의 목소리가 꼭대기 층에 계속 울려 퍼졌다.“구승훈, 이거 놔. 난 네 삼촌이야. 구승훈, 두고 봐. 구씨 가문이 네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줄게!”구민성의 목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구승훈은 구동근에게 전화를 걸었다.“시간 나면 B시에 오세요. 하리 어머니 산소에 가서 절이라도 하셔야 제가 결혼식을 올리죠.”구동근은 순식간에 발끈했다.“망할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구승훈은 웃었다.“못 알아들어요? 제가 다시 얘기할까요? 급하니까 일찍 오세요.”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빨리 강하리와 식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한 건 사실이었다.무슨 일이 있든 강하리를 명실상부 그의 아내로 만들어야 그가 이성을 잃어도, 구씨 가문에서 원하지 않더라도 강하리에게 준 재산을 빼앗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구승훈은 문득 자신이 무척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시간을 지체해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강하리가 자신을 포기할까 봐, 상황이 점점 악화하여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강하리를 포기해야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고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흔들릴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강하리가 회사로 달려갔을 때 그녀가 본 건 응접실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서 있는 구승훈의 뒷모습뿐이었다.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이 이 남자에게서 다시 한번 느껴져
노민우가 혀를 차며 해명하려던 찰나 갑자기 휴대폰 벨이 울렸다.휴대폰에 걸려 온 전화를 살피던 그는 손연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가 콧방귀를 뀌며 뒤돌아 위층으로 향하자 노민우는 황급히 그녀를 다시 끌어당겼다.“내가 한 밥 안 먹을 거야?”“너나 먹어!”손연지가 씩씩거리며 그를 발로 찼다.“꺼져! 누가 그딴 거 먹고 싶대?”“이미 다 했는데.”손연지는 이를 갈았다.“노민우, 난 널 남자로 생각 안 해.”노민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이렇게 오랜 시간 애까지 만들었는데 아직도 내가 남자라는 걸 증명하지 못한 거야?”손연지가 비웃었다.“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냥 인간이 아닌 것 같다. 기다려, 내가 결혼할 때 너한테 주례를 부탁할 테니까.”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노민우를 밀어냈고 상대는 더 말하고 싶었지만 손연지에게 연달아 발길질당했다.“손연지!” 노민우는 화가 났다.“너 누구랑 결혼하는데?”“누구랑 결혼하든 내 마음이지. 나 따라다니는 사람도 없을 것 같아?”노민우가 눈을 부릅떴다.“진짜 결혼하려고?”손연지가 웃었다.“왜, 너는 약혼해도 되고 난 결혼하면 안 돼?”“난 엄마 달래려고 약혼한 거지 진짜로 결혼할 생각은 없어.”손연지는 그 말에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은 듯 차분하게 노민우를 바라보았다.그 말을 들었을 때 심장마저 한 박자 늦게 뛰었다는 건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내 그녀는 다시 이성을 되찾았다.‘왜 흔들려? 뭘 망설여? 전에 당한 굴욕으로 충분하지 않아? 하리처럼 엄마가 목숨까지 잃어야겠어?’게다가 엄마를 달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지금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그는 굴복하지 않았을 거다.고작 한심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삶을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고 싶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두 사람은 또다시 불쾌하게 등을 돌렸고 노민우는 식탁에 앉아 검게 탄 밥을 바라보며 조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이미 해명을 다 했는데 왜 아직 화가 나 있는 걸까.노민우는 정신
기세등등하게 강하리를 찾아와 정안그룹과 에비뉴를 내놓으라고 따지려던 참인데 강하리가 그들을 만나러 오지도 않을 줄이야.그들이 오자마자 응접실로 안내하고 좋은 차와 물을 대접했지만 강하리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강하리가 전화를 끊자 손연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아? 정 안 되면 회사로 가. 걱정하지 마, 내가 죽이진 않을 테니까.”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일그러지며 고개를 돌려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노민우를 바라보았다.이번엔 접시를 깨고 그다음엔 그릇을 떨구자 강하리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구씨 가문 사람들보다 어젯밤 소파에서 잔 노민우가 복수심에 주방을 망쳐버릴까 봐서 걱정이었다.“그릇 하나만 더 깨뜨리면 경비 불러서 쫓아내게 할 거예요!”그릇을 들고 있던 노민우의 움직임이 갑자기 조심스러워졌고 가정부는 연정이를 안은 채 눈 뜨고 못 봐주겠다는 표정으로 부엌을 바라보았다.“사모님, 제가 하게 해주세요.”강하리는 한숨을 쉬었다.“됐어요. 고생 좀 하라고 해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가 연정이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자 가정부는 손연지와 노민우를 번갈아 보았다.“저기, 일들 보세요. 난 좀 치우고 있을게요.”손연지는 사람들이 떠난 뒤에야 부엌으로 향했고 멈칫하던 노민우는 고개를 돌려 손연지를 바라보았다.“어젯밤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손연지는 부엌문 앞에 서서 심호흡하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돌아가, 노민우. 여기서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노민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이게 어떻게 시간 낭비야? 손연지, 난 특별히 사과하러 온 거야. 화 풀고 나랑 같이 가. 내가 일자리도 다시 마련해 줄게, 응?”손연지가 갑자기 비웃었다.“시간 낭비가 아니면 뭔데? 노민우, 난 다른 사람 결혼 망칠 생각 없어. 예전엔 네가 싱글이라 기꺼이 만났지만 이젠 약혼녀도 있으면 그 사람이나 소중히 여겨.”노민우의 손에 들린 칼에 손가락을 베일 뻔하며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 여자를 소중히 여기라고?”손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