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자 연정이가 강하리를 보고 손을 내밀었다.손연지는 강하리의 쇄골에 난 이빨 자국을 보고는 혀를 찼다.“구승훈은 역시 개다.”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나도 그렇게 생각해.’강하리가 연정이를 안을 때 손연지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머뭇거렸고 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왜 그래? 노민우가 연락했어?”손연지가 웃었다.“아니.”“지금까지 연락이 안 왔다고?”손연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보고 싶지 않아.”강하리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손연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내 일은 됐고 하리 너랑 주해찬은 어떻게 된 거야?”멈칫하던 강하리가 이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어제 구승훈의 휴대폰에서 봤던 동영상과 협박 문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무슨 소문이라도 났어? 아니면 동영상인가?”강하리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차가워졌고 손연지는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그런데 강하리가 직접 휴대폰을 꺼냈다.“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손연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강하리가 웃었다.“못 볼 것도 없어.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모함하는지 봐야지.”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휴대폰을 클릭한 뒤 보이는 조롱에 얼굴에 머금었던 웃음이 조금은 사라졌다.앞서 구승훈이 요란하게 프러포즈하기 바쁘게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있는 영상이 폭로되었고 인터넷에서는 온갖 험한 말들이 쏟아졌다.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린 강하리가 휴대폰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보지 마, 배고프지? 내가 밥해줄게.” 손연지가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으려던 찰나 구승훈의 전화가 걸려 왔고 그녀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이 오해하진 않겠지?”강하리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안 그래.”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는 구승훈의 전화를 받았다.“일어났어?”강하리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구승훈은 곧바로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픈 곳은 없는지, 밥은 먹었는지 물었다
휴대폰 화면에 주해찬의 이름이 뜨자 강하리는 바라보기만 하다가 끊기 직전에 받았다.“선배.”“축하해, 하리야.”주해찬의 목소리는 씁쓸했다.사실 그는 그동안 강하리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지만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그날 강하리는 그가 여전히 자신이 알던 선배였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마음속 죄책감 때문에 다시 연락하는 것이 부끄러웠다.그러다 오늘 온라인에서 영상을 보게 되었다.강하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고마워요.”주해찬은 사실 서먹한 강하리의 말투가 느껴졌지만 지금 그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만회할 생각뿐이었다.“이미 인터넷에 해명 글 올렸어. 미안해, 그때 영상까지 찍힌 줄 몰랐어.”강하리는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고마워요.”주해찬은 쓴웃음을 지었다.“나한테 그렇게까지 예의를 갖춰야 해?” 하지만 강하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선배, 다리는 괜찮아요?”주해찬은 화제를 돌리는 그녀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재활 중이야.”“잘됐네요.”몇 마디 뒤에 더 이상 말이 없자 주해찬은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걸었다.진시연은 주해찬의 전화를 받고도 놀라지 않았다.오늘 영상 속 주인공이었으니까.“해찬 오빠, 무슨 일이야?”“진시연, 당장 온라인에 올라온 동영상 삭제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가 네 실체를 들추기 전에.”진시연은 웃으며 더 이상 주해찬 앞에서 가식을 떨지도 않았다.“주해찬, 어디서 착한 척이야? 그때 네가 협조하지 않았으면 이런 영상도 못 만들었을 거야.”주해찬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이 영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누구보다 잘 알잖아. 하리가 날 구승훈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모두의 오해를 받게 했지. 진시연, 진씨 가문에서 널 지금까지 키워줬는데 이런 식으로 진씨 가문 딸을 대하는 거야?”말하지 않으면 모를까 그 말에 진시연은 어젯밤 매몰차게 굴던 진태형의 모습이 떠올라 분노와 증오가 뒤섞인 눈빛으로 휴대폰을 꽉 쥐고 있었다.강하리와 잘 지낼 수는 있어도 왜 혼자만
“이제 심씨 가문도 다 연루됐는데 이래도 예전처럼 강하리만 싸고돌지 두고 보자고.”진시연이 비웃으며 말하려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인기 검색어 상단에 있던 영상이 갑자기 사라지고 그 자리엔 다른 게시물이 등장했다.먼저 공개된 녹음 파일엔 조금 전 그녀가 주해찬과 나눈 통화 내용이 있었고 이를 올린 사람은 다름 아닌 정안그룹 공식 계정이었다.진시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구승훈은 정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걸까?강하리를 위해 해명을 해준다고?하지만 이런 해명으로 정말 네티즌들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사람들은 주해찬도 믿지 않는데 고작 녹취록 따위를 믿을까.하지만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쯤 정안그룹 측에서 또 다른 게시물이 올라왔다.전부 그녀의 채팅 기록이었는데 주해찬과의 대화 내용뿐만 아니라 이전에 약을 구입한 거래 기록, 약의 효능까지 채팅 기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강하리를 욕하던 네티즌들은 게시물을 입을 다물었고 대화 내용이 주해찬 본인이 해명한 것과 일치하자 그제야 이 모든 게 진시연이 꾸민 음모라는 걸 알았다.전에 진시연이 약을 먹인 것까지 더해져 사건의 전말이 빠르게 밝혀졌고 원래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이 뒤돌아 진시연을 욕하기 시작했다.진시연은 화가 나서 이가 갈렸다.약을 팔았던 상대의 연락처까지 다 지웠는데 대체 어떻게 대화 내용을 손에 넣은 걸까.그런데 곧바로 정안그룹에서 또 다른 게시물을 올릴 줄이야.심연청이 검색어를 돈으로 매수하고 댓글 알바를 고용한 거래 명세뿐만 아니라 지난번 JM 홈페이지를 공격한 사람들까지 드러났다.이 정도로 깊게 파헤칠 줄 몰랐던 심연청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심씨 가문에서 셋째는 원래도 별 입지가 없었고 얼마 전 할아버지가 대놓고 엄마에게 등을 돌리기까지 했는데 지금 사람들에게 그녀가 부린 수작이라는 게 공개되면 심씨 가문에서 앞으로 그녀를 어떻게 대할까.심연청은 창백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시연아, 난 일이 있어서 먼저 돌아갈게.”그렇게 말한
온라인의 열기는 며칠 동안 계속되다가 멈췄고 손연지는 진시연이 피 터지게 욕먹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지며 강하리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너희 집 개자식이 능력은 있네. 근데 네 아빠 양딸이라는 여자 미친 거 아니야? 정말 너랑 구승훈 사이를 떼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강하리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지만 눈빛은 약간 차가워져 있었다.“네가 이런 영상을 봤으면 믿을 수 있겠어?”말문이 막힌 손연지는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렇다. 이런 영상이 공개되고 구승훈이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강하리는 해명할 방법이 없었다.“괜한 생각 마. 어차피 다 해결됐으니까.”강하리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지난 며칠 동안 이정숙은 심씨 가문에 찾아와 심준호에게 진시연을 풀어주라며 난동을 부렸고 진태형도 몇 번 갔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심준호는 특별히 전화를 걸어 당분간 심씨 가문에 오지 말라고 했지만 때론 그녀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강하리가 막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가정부가 갑자기 뛰어 들어왔다.연성에 있을 때 함께 지내던 가정부였다.손연지는 아직 몸조리 중이라고 강하리와 구승훈은 출근해야 하는데 연정이를 계속 손연지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게다가 강하리는 평소 그녀의 요리를 좋아했기에 구승훈은 가정부를 데리고 왔다.“사모님, 밖에 어떤 사람이 할머니라면서 찾아왔어요.”강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손연지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저 할망구한테 대체 누가 친손녀인지 제대로 물어봐야겠어.”강하리는 손연지를 끌어당겼다.“무시해. 말이 안 통해.”누가 친손녀인지 모르는 게 아니라 그저 강하리를 싫어하는 거다.처음엔 가식을 떨었어도 지난번 심미현을 욕한 이후로 이젠 연기조차 하지 않았다.강하리는 가정부를 바라봤다.“저 사람한테 꺼지라고 하고 별장 경비한테 앞으로 찾아오면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세요.”가정부가 서둘러
“저 사람 내쫓고 앞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요.”경비원은 서둘러 답했다.“네, 강 대표님.”새로운 주인 앞에서 경비원들은 그의 말을 어길 수 없었고 이정숙이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젊고 힘센 경비원 몇 명을 이길 수는 없었다.이정숙의 모습과 목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손연지는 입을 삐죽거렸다.“진 장관님께 어떻게 저런 엄마가 있을 수 있지?”강하리는 웃으며 “진 장관님은 어떻게 저런 엄마를 얻었어?”강하리가 웃으며 화내지 말라고 달래다가 손연지의 표정이 확 바뀌는 것을 보았다.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한 여자가 빙그레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노민우 곁을 따라다녔던 여자라 강하리는 순식간에 알아차렸다.이 여자가 바로 노민우가 약혼한 여자라는 것을.순간 강하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노민우 개자식은 손연지에게 제대로 설명한다고 해놓고 며칠이 지나도 설명이 아니라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더니 이젠 약혼녀가 문 앞까지 찾아오게 했다.강하리가 손연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몇 걸음도 못 가 뒤에 있던 여자가 불렀다.“강 대표님, 손연지 씨와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강하리는 뒤를 돌아보며 뒤따라오는 여자를 흘끗 쳐다보았다.“제가 안 된다고 하면요?”여성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지만 곧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강 대표님, 뭐가 무서워요? 내가 손연지 씨를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혹시 강 대표님도 친구가 내연녀라고 생각해 마음이 불편한가요?”“말 가려서 해.”강하리의 얼굴이 싸늘해지고 여자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B시든 인터넷에서든 강하리의 명성은 자자했고 심씨 가문에서도 어젯밤 대부분 사업체를 강하리 명의로 이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거기에 정안그룹, 에비뉴, 그리고 강하리 본인이 세운 JM까지 있어 도저히 그녀에게 밉보일 수 없었기에 손연지를 돌아보았다.“손연지 씨, 시간 나면 나랑 얘기 좀 해요. 모든 일이 피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
거실에서 구승훈은 잔뜩 어두운 눈빛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던 노민우를 바라보았다.노민우는 초라한 행색이었는데 머리는 다소 헝클어져 있었고 입고 있던 셔츠는 약간 구겨진 채로 마치 구걸하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우리 집에 왜 왔어?” 구승훈은 못마땅한 표정이었고 노민우는 다소 억울했다.“승훈아, 그래도 우리가 같이 자란 사이인데 그렇게 매정하게 굴면 안 되지. 내가 B시에 지낼 곳이 없어서 그러는데 며칠만 재워주면 안 돼?”“안 돼.” 구승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손연지는 강하리가 데려왔기에 뭐라 말하지 못하지만 절대 집안에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는 걸 허락할 수 없었다.“승훈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구승훈이 그를 바라보았다.“집도 못 사서 남의 집에서 살아야 해?”“못 사는 게 아니라 엄마가 카드 정지시켰어.”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승훈아, 난 그냥 강하리 씨한테 나 만나보지 않겠냐고 말한 것뿐이고 강하리 씨도 거절했잖아. 왜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거야?”그렇게 말하던 노민우는 다시 2층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손연지 여기 있어?”“응.”“손연지도 있는데 나는 왜 안 돼?”구승훈이 비웃었다.“모르겠어? 이 집에선 내가 결정할 수 없어.”“...”한편 강하리는 노민우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손연지의 방으로 갔다.“정말 안 만날 거야?” 강하리가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그 자식 오기만 해봐, 죽여버릴 거야!”입꼬리가 움찔하던 강하리는 문득 손연지가 수술받고 난 뒤 노민우가 그녀를 찾아갔을 때 그가 손연지에게 함부로 한 건지, 손연지가 노민우를 혼내준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뭐가 됐든 그녀는 손연지의 선택을 존중했지만 방을 나서기 전 이렇게 덧붙였다.“연지야, 노민우가 찾아온 이상 그렇게 쉽게 떠나지 않을 거야. 난 그래도 얘기는 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해명이라도 듣게.”강하리는 말을 마친 후 손연지를 바라보았고 손연지는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노민우가 약혼했을 때 손연지는 둘 사이에 조금의 희망도 남기고 싶지 않아 아이를 지우고 홀연히 돌아섰다.마음속에 노민우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확고했다.그런데 노민우의 약혼녀도, 노민우의 어머니도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줄이야.강하리가 한숨을 쉬며 다가가서 칼을 뺏으려는 순간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밖으로 끌고 갔다.“구승훈, 뭐 하는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멀리 해. 우리 부부 사이 방해하지 않게.”강하리는 다소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떼어내고 가정부에게서 연정이를 건네받았다.“두 사람 싸우지 않게 잘 지켜봐. 난 연정이 씻기고 올 테니까.”구승훈은 피식 웃었다.노민우가 정말 손연지와 싸울 생각이라면 굳이 살아서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거실에서 노민우는 한동안 눈에 띄게 살이 빠진 손연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로 표현 못할 감정을 느꼈다.어머니가 손연지를 찾으러 갔고 노씨 가문으로 손연지를 데려와 모욕을 줬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손연지 어머니가 화가 나서 쓰러졌다는 것도.노민우는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손연지가 수술한 걸 알았을 때 왜 그녀에게 화를 냈을까.“미안해.”노민우는 이 세 글자를 끄집어내는 데 한참을 고민했다.“필요 없어.” 손연지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정말 미안하면 돈이나 줘. 그쪽 어머니 방법이 나쁘지 않아. 돈으로 해결하는 데 굳이 감정 낭비할 필요 없지. 애초에 날 먹여 살리겠다며? 한 달에 2억으로 계산해서 이따가 24억 줘. 그리고, 앞으로 네 약혼녀가 날 찾아올 때마다 2억씩 보상금을 받을 거야. 이자는 됐어.”“손연지, 우리 사이에 남은 게 돈밖에 없는 거야?”손연지는 마음이 씁쓸했다.“그게 아니면? 애초에 그냥 잠만 자는 사이였잖아.”아무리 거짓된 모습을 보이려고 해도 마음이 괴로웠다.“내가 아니라고 하면?”노민우가 갑자기 앞으로 다가왔고 손연지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내 그에게 허리를 잡혔다.“손 놔.”노
노민우는 손연지가 갑자기 문을 닫을 줄은 몰랐기에 코가 부딪혔고 순간 고통이 머리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문을 닫은 손연지는 노민우의 비명을 들었지만 다시 문을 열지 않았다.개자식, 더 열을 받지 않게 꺼졌으면 좋겠다.구승훈이 뒤를 따라가 보니 노민우가 손연지의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쭈그리고 앉아 우는 게 무슨 소용이야? 난 무릎 꿇고 울었어.”노민우는 멈칫했다.“정말이야?”구승훈은 태연하게 피식 웃었다.“당연하지. 아니면 내 아내를 어떻게 얻었겠어?”“승훈아, 네 아내는 네가 하도 매달려서 돌아온 거잖아.”“웃겨, 내 진심에 감동한 거지.”구승훈의 말이 끝나자 강하리가 방문을 열었다.“오늘 연정이랑 같이 자.”구승훈은 깜짝 놀랐다.“그럼 넌?”“난 손연지랑 잘 거야.”강하리는 말을 마치고 손연지의 방으로 향했다.“...”노민우가 슬쩍 물었다.“강하리 씨, 나는요?”“나가서 자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두 남자를 무시하고 뒤돌아 손연지의 방으로 들어갔다.복도에서 구승훈은 어두운 얼굴로 노민우를 바라보았고 노민우는 다소 억울하단 표정이었다.“나 때문은 아니잖아.”구승훈은 비웃으며 뒤돌아 방으로 들어갔고 노민우가 서둘러 따라갔다.“승훈아, 우리 친구 맞아?”“아니.”구승훈은 망설임 없이 문을 닫았다.손연지는 여전히 화가 난 채로 씩씩거리며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대체 저 노민우 개자식이 뭐라고!일부러 그녀를 화나게 하려고 온 게 틀림없었다.강하리가 막 들어왔을 때 손연지가 노민우를 혼잣말로 욕하는 소리가 들려 잠시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얘기 잘했어?”손연지가 피식 웃었다.“잘했다고 봐야지. 내가 칼로 그 자식 몸을 잘라버리진 않았으니까.”말을 마친 손연지가 웃음을 터뜨렸다.“하리야, 내가 대체 왜 저런 놈을 좋아한 걸까?”그 말을 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고 강하리는 안쓰러운 마음에 서둘러 다가가 손연지를 안았다.손연지가
요양원 주차장.심준호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진태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저도 잘못이 있어요... 계속 하리가 구승훈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까지 바보 같을 줄은 몰랐어요...”진태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우리 딸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심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다시 입을 뗐다.“요즘은 조시욱이 꽤 신경 써주더라고요.”진태형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 옛날 자신이 어떤 희망도 없이 심미현과의 약혼을 지키며 버텼던 것처럼, 강하리도 그렇게 쉽게 마음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만큼은 절대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오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진태형이 병실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구연정을 안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구연정은 강하리의 이마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후하고 불었다.“엄마, 아프지마...”강하리는 살며시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엄마 안 아파, 우리 연정이 걱정하지 마.”구연정은 백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할머니 울었어.”강하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할머니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백아영은 단호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연정이는 어쩔 뻔했니?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강하리는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백아영은 한숨을 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구연정이 환히 웃으며 진태형에게 달려갔다.진태형은 아이를 안고 병실을 둘러보다, 딸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가가 붉어졌다.“아빠, 나 괜찮아요.”“이게 괜찮은 거
손연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마침 행사 중이더라고. 쿠팡 연말 세일에서 로열 프리미엄 네덜란드 분유 있거든? 영양 흡수도 잘 되고 우리 소아과 아기들도 다 그거 먹어.”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손연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쳐다봤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병원 응급실에서는 생체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급히 달려온 구승재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핸드폰 화면엔 강하리의 연락처가 떠 있었지만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 매번 손이 닿았다가도 다시 멈췄다.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준봉과 노진우도 속만 태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그제야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왔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이 다시 의식을 찾은 건 해 질 무렵이었고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그는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강하리에겐... 알리지 마.”구승재는 목이 막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어. 형수한테는 말 안 할게.”그제야 구승훈은 안도한 듯 눈을 감았지만 구승재는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눈가가 뜨거워졌다.‘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병원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병원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를 아는 터라, 강하리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빠져야만 했다.그날 밤, 노민준이 직접 차를 몰고 구승훈을 요양원으로 데려갔다.“네가 또 도망치면... 그땐 나도 강하리한테 전부 말할 수밖에 없어.”구승훈은 창밖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안 그럴 거야.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됐어.”노민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그 한마디에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푹 쉬어.”병실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구승훈의 머릿속엔 강하리가 조시욱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
청소 아주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강 대표님, 아까 구 대표님이랑 병실 안에 계시던 남자분이랑 여기서 싸웠어요. 아마... 그중 누가 코피를 흘린 것 같더라고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에게 병실 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조용히 말했다.병실 안에 들어서자, 조시욱이 전화를 받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통화를 마쳤다.“오늘 일은, 미안해.”그는 웃으며 말하다가 다시 강하리에게 다가가 침대로 옮겨주려 했지만 강하리가 재빨리 손을 들어 막았다.“잠시 후에 또 검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이대로 있을게요.”“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다 줄까?”그 말에 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조시욱 씨. 선배가 뭐라고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누굴 다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안 돼 있고요. 그러니까 굳이 매일 오시거나 이렇게 곁에 계실 필요 없어요.”조시욱은 사실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처음 만난 그날 밤부터 이미 느꼈다.하지만 그날,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그녀를 두 눈으로 본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각오로 그렇게 뛰어내렸는지 그게 궁금해졌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알고 싶어졌다.설령 그게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이라 해도,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내가 좀 성급했으면 미안. 진짜로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선배 부탁이라서 온 것도 맞지만... 난 그냥, 친구로서 너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어릴 때부터 정 회장님이랑 우리 할아버지 사이도 꽤 각별하셨잖아. 집안끼리도 인연이 깊고.”조시욱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지금은, 네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게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과거 놓고 새로운 시작도 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아?”잠시 정적이 흘렀고 강하리는 조용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방금... 뭐라고 불렀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어쩐지 너무나 낯설었다.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애써 눌러왔던 감정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심장이 바늘로 찔린 것처럼 저릿했고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임희주가... 이렇게 이 사람을 돌본 건가? 그렇다면 지금쯤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더 이상 마음을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전 이제 검사를 받아야 해요. 구 대표님, 손 좀 놓아주세요.”“같이 가줄게.”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갈라지고 낮았다.“괜찮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그 말과 함께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휠체어 좀 부탁드릴게요.”간호사는 그제야 얼떨결에 제자리를 찾은 듯 다가와 그녀의 휠체어를 받았다.조시욱은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 손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구 대표님, 강 대표님 검사 예약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간호사의 말이 이어지자, 구승훈은 천천히, 마치 억지로 손을 떼듯 그녀를 놓았다.강하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지던 기침이 터졌다. 거칠고 깊은 기침 소리, 그리고 피비린 냄새에 조시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너, 다쳤냐?”구승훈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그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지금 따라가서 뭐 하려고?”조시욱은 다급히 앞을 막아섰다.“넌 지금 상태부터 회복해야 해. 이러다 정말 쓰러진다고.”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그를 벽에 밀쳤다. 그러나 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고 그의 입가엔 다시 피가 번졌다.조시욱은 그를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이렇게 약해 빠져선... 넌 내 상대도 안 돼.”
구승훈은 오늘 여기서 조시욱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다.조시욱이든, 주해찬이든 상관없었다. 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분명 그의 아내였으니까.“내가 자리를 피할까?”조시욱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그제야 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아니요, 그냥 하던 얘기 마저 하시죠.”조시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강하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네 지목했던 그 여자, 국정원을 통해서 확인해 봤는데... 국제 쪽에서 활동하는 킬러였어. 주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움직이던 인물인데 이번에 국내에 들어왔다는 건 좀 의외더라.”강하리는 놀란 눈으로 조시욱을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그 여자가 진짜 직업 킬러였다니.“안현우가 고용한 건가요? 아니면... 임희주 쪽?”“아직 확실하진 않아. 근데 지금까지 조사로는 둘 다 그 여자랑 직접 연결된 흔적은 없어. 오히려 둘 다 접촉한 적이 없다는 쪽이 유력해.”조시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네 생각엔, 그 외에 또 누가 너를 죽이려 들었을 것 같아?”‘죽이려 든다’는 말에 강하리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사실 그날 자신을 진짜로 죽이려 했다면 안현우에게 넘기기 전에 이미 끝냈을 터였다.그렇다면 그 여자의 목적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조용히 말했다.“전, 적이 꽤 많아요. 임희주, 안현우는 물론이고... 심씨 집안, 여씨 자매, 진시연... 어쩌면 문씨나 구씨 가문에서도 누군가는 원하고 있었겠죠.”조시욱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래서 내가 네 주변에 사람 몇 명 붙여놨어. 걱정하지 마. 사생활 간섭 같은 건 없을 테니까. 혹시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 바로 다 뺄게.”“감사합니다.” 강하리는 짧게 대답했고 조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근데 혹시 그거 알고 있어? 우리 할아버지랑 네 외할아버지, 전우였던 거?”강하리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자주 저희 집
노민준이 떠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좀 나아졌어?]하지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화면엔 전송 실패 알림이 떴다.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고 가슴 속 깊은 통증이 일며 피를 토했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구승재가 황급히 달려왔다.“형!”구승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등으로 피를 닦고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냐. 그리고... 여초천 병세 위중하다는 소문 퍼뜨려.”“형, 제발 이러다 진짜 형수님도 못 돌려놓고 큰어머님까지 막을 수 없게 될 거야!”“됐어. 내가 괜찮다는데 못 알아들어?”구승훈은 지친 얼굴로 키를 집어 들고 병실을 나섰고 구승재는 분노와 답답함이 뒤섞인 얼굴로 뒤를 쫓았다.“형!”하지만 그가 병원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구승훈의 차는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노민준도 뒤늦게 병실에서 뛰쳐나왔고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내버려둬. 저렇게 살다가 죽겠다는데 어쩌겠냐.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해.”구승재는 그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편, 강하리는 구승재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분명히, 충분히 명확하게 말한 줄 알았다.“받아. 안 받으면 그 꼬맹이 울지도 몰라.”천아름은 옆에서 거울을 보며 입술을 정리하더니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내쉰 뒤, 전화를 받았고 구승재의 목소리는 확실히 맥이 빠져 있었다.“하리 누나.”이번엔 ‘형수님’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강하리는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해졌지만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으세요?”“형이... 또 병원 쪽으로 가면 한 번만 말 좀 해주면 안 될까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 이제 구승훈 씨랑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 사람이 올 일도 없고 와도... 저는 안 볼 거예요. 제게 부탁하지 마시고 차라리 임희주 씨에게 부탁하세요.”“형수님...”구승재는
사실 그 남자는 임희주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입이 단단히 막힌 그녀의 눈엔 점점 절망이 차오르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눈물이 뚝 떨어진 그 순간, 남자의 입가에서 다시 비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배신할 때부터 알았어야지. 이런 꼴 당할 줄. 임희주, 감히 누굴 믿고 사모님을 배신했냐? 응?”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며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임희주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말하고 싶었다.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한 번만 기회만 더 달라고.하지만 남자는 그 비참한 눈빛조차 즐기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너 생각엔, 구승훈이 너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면 어떻게 할 거 같냐?”그 말에 임희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한순간의 정적. 이어지는 건, 저항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차가운 분위기에 날카로운 바늘이 살을 찢고 서늘한 약물이 천천히 몸속에 스며들었다.몸부림치던 동작은 어느새 멈췄고 그의 눈빛을 따라 움직이던 임희주의 시선도 점점 흐려졌다.여초연 곁에서 오래 지낸 그녀는, 지금 이 약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완전히 무너지진 않지만 식물인간처럼 의식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 그 약은, 그렇게 사람을 파괴했다.바늘을 뽑아낸 남자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딱 좋아. 테스트 겸 써보기엔 안성맞춤이지. 덕분에 새 약 연구도 진도 좀 나가겠네. 너한텐 마지막 명예다, 그렇게 알아.”병실 문이 다시 열렸고 하얀 가운에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그 남자는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꺼져 있던 복도 CCTV가 하나둘 다시 켜졌고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두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가볍게 경례하듯 인사를 건넸다.그 화면을 지켜보던 구승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이게, 대놓고 도발 아니고 뭐야.”구승훈도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승훈 씨, 어젯밤 그 시간대에 이상한 소리가 났고 창가 쪽으로 그림자가 스쳤습니다. 저희가 곧바로
“말하면 고통 없이 죽게 해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입 다물고 버틴다면 당신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방법은 차고 넘치거든.”차갑게 말을 내뱉은 구승훈은 그대로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임희주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외쳤다.“구 대표님, 저... 저 당신 좋아했어요. 그거 알아요?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했어요...”하지만 그녀의 고백은 그저 허공을 맴돌 뿐, 아무도 듣지 않았다.강하리는 구승재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가 곧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몇 초도 안 돼 다시 전화가 울렸고 계속해서 울려대는 진동에 결국 그녀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형수님.”구승재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반가움이 섞여 있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담담하고 차분했다.“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저 지금 좀 피곤하거든요. 쉬고 싶어요. 그러니까...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구승재는 멍하니 전화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한 줄의 메시지를 남겼다.[형수님, 생일 축하드립니다.]하지만 그 메시지조차, 아무런 응답 없이 그대로 묻혀버렸다.구승훈의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담배 냄새에 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렸다.구승훈은 그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안 됐냐?”대답 대신, 구승재는 말없이 다가가 그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눌러 껐고 재떨이를 들고 방을 나섰다.잠시 후, 노민준이 급히 병실로 들어왔다.“담배 끊든가 안정제 맞든가. 선택해.”구승훈은 그를 빤히 보더니 침대 위로 몸을 기댔고 노민준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너, 강하리가 유엔 인맥까지 써서 약리학자 세 명 데려온 거 알고는 있어? 그것도 세계 최고 수준. 그 사람들 상담료가 어느 정도인 줄 알아? 분 단위도 아니고 초 단위로 계산된다. 다 너 살리려고 이 난리인데 넌 진심으로 그 노력을 다 무시하고 싶은 거냐?”그 말에 구승훈은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약리
요양원 아래 주차장.구승재는 허겁지겁 달려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직 차에 다다르기도 전에, 멀리서 한 대의 차량이 조용히 들어오는 게 보였고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그는 서둘러 그 차 앞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고 동시에 코끝을 찌르는 담배 냄새가 훅 들어왔다.“형, 또 담배 폈어?”구승훈은 차에서 내려 차 문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고 몸을 가누는 모습이 눈에 띄게 힘겨워 보였다.무슨 말을 하려던 구승재는 그보다 먼저 들려온 거친 기침 소리에 놀라 멈칫했다.거친 기침 소리 끝에 피비린내가 섞였고 구승훈은 겨우 참으며 목까지 차오른 피를 억지로 삼켰고 구승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담배 피지 말랬잖아. 막 돌아다니지도 말라고 했고! 형, 제발 말 좀 들어라.”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손끝을 닦고는, 조용히 밤하늘 아래 그걸 쓰레기통에 던졌다.“승재야.”“나 진짜 걱정돼서 그런 거야.”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죽진 않아.”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임희주 그쪽은?”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리며 방금 구승훈이 던진 손수건이 들어간 쓰레기통을 힐끔 보았다가, 이내 형의 뒤를 따라붙었다.“오늘 또 준봉이 신문했는데 여전히 같은 말만 해. 형 얼굴 한 번 보면 그때야 입 열겠다고.”구승훈은 고개만 끄덕이며 요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구승재는 그 뒤를 따르며 말했다.“근데 진짜로 누워서 쉬어야 해. 안 그러면 죽는다잖아.”구승훈은 짧게 웃었다.“폐색전증 온다고 했잖아! 이건 웃을 일이 아니라고!”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반응이었고 결국 구승재는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비켜섰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밤의 요양원은 유독 조용했고 그만큼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병실 문이 열리는 순간, 임희주는 갑작스럽게 눈을 떴고 눈가엔 놀람과 함께 복잡한 감정이 비쳤다.구승훈은 창가에 서 있었다.“하고 싶은 말 남았어요?”임희주는 눈가가 붉어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