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조용히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 다시 물었다.“진심이야?”구승훈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몸을 숙이며 다가갔다.“이런 걸로 농담 안 해.”강하리의 눈은 촉촉했고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좋아.”구승훈은 몸을 숙여 강하리를 껴안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말끔히 사라졌다.강하리와의 결혼...그가 얼마나 바라온 일인지 모른다.하지만 지금은... 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머리카락에 입맞춤했다.앞으로도 계속 멀쩡하게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강하리를 놓아줄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주해찬을 껴안고 있는 그녀를 봤을 때 얼마나 주해찬을 죽이고 싶었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자신이 죽더라도 다른 남자가 강하리를 건드리는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그렇다면 차라리 함께 손을 잡고 헤쳐 나가리라.결과가 좋든 나쁘든 적어도 곁에 강하리가 있으니까.다다를 그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다시는 이 손 놓지 않을 거다.강하리와 구승훈이 위층에서 내려왔을 때 구승재는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다가 두 사람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휴대폰을 치웠다.“형, 하리 씨, 괜찮아요?”구승재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이내 자신의 걱정이 기우라는 것을 알았다.형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고 강하리의 희고 깨끗한 얼굴은 어렴풋이 홍조를 띠고 있었다.이런, 또 애정행각을 봐버렸다.“아직도 안 갔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고 구승재를 바라보았다.“... 알았어, 갈게.”떠나기 직전, 그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돌아봤다.“저기 하리 씨, 앞으로 계속 형수님이라고 불러도 돼요?”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세요.”구승재는 기쁜 마음으로 불렀다.“네, 형수님.”그러고는 힘찬 발걸음으로 떠나자 구승훈이 옆에서 혀를 찼다.“왜 나보다 쟤가 더 기뻐하는 것 같지?”강하리가 그를 흘겨봤다.“원래도 승재 씨가 당신보다 나한테 더 잘해줬어.”구승훈은 여자를
사실 그동안 주해찬이 달라졌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온화하고 따뜻했던 남자가 근래 왠지 모르게 강압적인 집착을 보였다.구승훈을 좋아하지 말라던 말도, 자기가 낫지 않으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냐고 물었던 것도...다만 강하리는 그를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리를 다쳐서 마음이 불안한 것이라고 여겼다.강하리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무슨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피식 웃은 구승훈이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나쁜 놈이란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그렇게 말한 후 그는 강하리를 밖으로 끌어당겼다.“어디 가?”“그 자식 만나러.”강하리가 걸음을 멈칫했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차에 태웠다.“가서 네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봐.”강하리는 심호흡하고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언젠간 주해찬을 만나러 가야 했으니까.가는 길에 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은 마음이 괴로웠다.고작 주해찬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할 가치가 있는 걸까.차가 경찰서 앞에 멈춰 선 뒤 구승훈이 갑자기 강하리를 끌어당기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왜 그래?”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이따가 꼭 왼손 보여줘.”“...”주해찬은 강하리만 기다린 것처럼 보였고 강하리는 유치장 문 앞에 서서 낮게 불렀다.“선배.”주해찬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하리야, 그래도 날 보러 와줘서 기쁘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주해찬을 바라보았고 가뜩이나 조용했던 공간에 적막이 감돌았다.문득 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손으로 향했다.구승훈의 말처럼 한심하게 일부러 왼손을 보여주려던 건 아니지만 손가락에 낀 반지는 여전히 주해찬의 눈에 들어왔다.그가 피식 웃었다.“그 사람이랑 결혼해?”강하리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왜 그랬어요?”주해찬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면서도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때 주해찬이 쓴웃음을 지으며 갑자기 입을 열
“우리 층에 누가 임신했나 봐요!”“어떻게 알았어요?”“화장실 쓰레기통에 글쎄 임신 테스트기가 있더라니까요!”강하리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동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수군대는 두 명의 인턴을 바라봤다.그녀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인턴들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곧장 일하러 갔다. 그래서 그녀도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핸드폰은 오늘따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임신 테스트기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벌써 퍼지고 있었다. 회사는 이런 가십거리가 가장 환영받는 곳이기 때문이다.점점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것을 보고 강하리는 머리가 찌릿찌릿 아팠다.‘내가 소홀했어. 적어도 종이에 잘 싸서 버려야 하는 건데. 만약 구승훈 대표님이 알게 된다면...’끔찍한 상상에 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때 구승훈의 비서가 사무실에 노크하고 들어왔다.“부장님, 대표님께서 찾으세요.”강하리는 책상 아래에 있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강 부장님?”“네, 들었어요.”...대표이사실 앞에 멈춰 서서 강하리는 크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끝내기도 전에 구승훈의 전담 비서 신도윤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대표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하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알겠어요.”대표이사실에는 우드 향 향초를 태우고 있었다. 점심부터 협력사 임원과 술 한 잔 마신 듯한 구승훈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반듯한 검은색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유난히 방탕해 보였다. 지그시 감은 눈도, 여유롭게 힘 풀린 몸도, 마치 정성껏 만든 조각상과 같았다.강하리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이러니까 주변에 여자가 끊기지 않지. 어느 여자가 이토록 완벽한 남자를 거절할 수 있겠어?’구승훈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얼굴도, 몸매도, 능력도... 적어도 겉으로는 흠이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오직 강하리만 그
강하리는 허리가 뻣뻣해져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몸을 돌릴 때는 꽤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제가 맞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구승훈의 눈빛은 아주 어두웠다. 조금 전 열정이 넘치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듯이 안팎으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어떡하긴, 병원에 가야지.”강하리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다. 두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구승훈은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강하리, 우리가 정한 룰은 기억하지?”강하리는 몸을 흠칫 떨었다.‘그래... 룰... 우리 사이는 애초에 게임일 뿐이었어. 대표님이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강하리는 아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반대로 구승훈은 구씨 가문의 장손이자, SH그룹의 후계자이다.강하리가 구승훈과 만나게 된 것은 100% 우연이었다.3년 전, 어머니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강하리는 급하게 돈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친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빌리려고 했다.하지만 화려한 별장 밖에 꼬박 하루 무릎 꿇고 있다가 기절까지 했는데도, 땡전 한 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구승훈이 길고양이 줍듯이 그녀를 주운 것이었다.병원에서 눈을 뜬 그녀에게 구승훈은 ‘게임’을 제안했다. 마음 없이 몸만 쓰는 그런 게임 말이다.그때 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보수는 있어요?”구승훈은 그녀의 속물 같은 모습도 전혀 개의치 않은 듯 피식 웃으며 오히려 칭찬했었다.“똑똑하네.”그렇게 두 사람은 게임을 시작했다.강하리는 꽤 일찍 룰을 파괴했다.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녀는 게임 파트너를 짝사랑했다.가슴 속에서 퍼져가는 아픔을 애써 무시하고 강하리는 미소를 짜냈다.“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구승훈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강 부장은 똑똑해서 참 좋아.”강하리는 꾸벅 인사하고 그가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대표이사실을 벗어났다. 부하직원 안예서는 벌써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릇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으면서 여자는 더욱 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힐끗 보기만 하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강하리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기만 할 뿐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동생 구승재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구승훈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강 부장도 술 마시러 왔어요?”“네, 안 대표님과 계약을 성사한 기념으로요.”강하리는 그들 속에 끼어들지 않고 구석 자리를 골라 앉았다.“왜 그렇게 멀리 앉았어요? 가까이 와 봐요!”구승재는 겁도 없이 강하리를 부추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구승훈과 그녀의 관계를 알았기 때문이다.구승훈은 누가 봐도 곁에 있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강하리가 들어온 후로부터 그 여자를 대하는 태도도 더욱 차가워졌다.강하리는 아주 예쁘게 생겼다. 분명히 청순한 인상이지만 묘하게 매혹적인 것이, 고리타분한 정장에 비즈니스적인 미소만 지어도 사람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역시 우리 형님 안목이란.’강하리와 같은 여자가 연예계에 진출한다면 거물들과 술자리 몇 번 가지는 것으로 톱스타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강하리는 구승재의 말을 듣고서도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룸 안의 사람들 속에 섞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구승훈 곁에는 다른 여자가 있으니, 그녀가 다가갈 필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안현우는 어느샌가 술 한잔 들고 강하리의 곁에 가서 물었다.“강 부장, 한잔할까요?”“아뇨, 저는 몸이 불편해서 물로 대신할게요.”술잔을 받지 않는 강하리에 안현우는 기분이 상했다. 힘들게 만든 자리에서 그녀가 술 한 잔 마셔주지 않으니 말이다.안현우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가 취한 틈을 타 무언가 해보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크하게 한 모금도 마셔주지 않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구 대표님, 우리 강 부장 참 시크하죠? 이런 자리에서도 술 한 잔 안 마셔주네요.”구승훈은 천
강하리는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구승훈의 뜻은 명확했다. 만약 그녀가 머리를 끄덕인다면 그는 절대 말리지 않을 것이다.‘이제는 내가 떠나도 상관없구나.’강하리는 안현우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단호한 말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이제는 변할 때가 되었다. 배 속에 아이도 생겼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를 이용해 구승훈을 협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는 애초부터 게임일 뿐이었으니, 책임을 운운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승훈은 그녀가 협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이번에 생긴 아이는 병원에 가서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처음이 있으면 다음도 있기 마련이기에 문제였다.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구승훈은 평소에 꽤 신중하게 피임했다. 번마다 꼭 콘돔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달 하도 거칠게 한 탓에 콘돔이 찢어진 적이 있었다. 비록 제때 피임약을 먹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지킬 수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계속 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도 소중한 청춘과 건강을 이렇게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정서원의 병원비라면 이미 꽤 모였다. 구승훈의 냉정함에도 실망할 대로 실망했다.그녀는 더 이상 구승훈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결심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더욱 명확해졌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되물었다.“저 진짜 떠나도 돼요?”“그렇게 묻는다는 건 너도 안 대표의 제안에 관심 있다는 건가?”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강하리는 피식 웃으면서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했다.“안 대표님의 조건을 들어보고 생각해 볼 의향은 있어요.”쨍그랑!테이블 끝에 놓여 있던 술잔은 구승훈의 다리에 걸리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룸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휩싸였다.구승훈의
겁먹은 여자는 이제야 슬슬 뒤로 물러났다.“죄, 죄송합니다.”여자가 떠난 다음 룸에 있던 다른 여자들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구승재는 조금 전 장난이 지나쳤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예전에 같은 장난을 쳤을 때 강하리가 하도 잘 받아줘서 방심한 탓이었다.예전의 그녀는 떠나기는커녕 SH그룹에 뼈까지 묻을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달라져 있었다.“형, 강 부장을 다시 데려와서 그냥 장난이었다고 하는 게 낫지 않아? 강 부장 일 잘하잖아. 갑자기 사직한다는 게 말이 돼? 오늘도 야근한 모양인데, 너무 피곤해서 말이 헛나왔을 거야.”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회사에 부장 자리 하나 대신할 사람이 없을까 봐? 간다는 사람을 잡아서 뭐 하게.”안현우는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쯤이면 그도 구승훈과 강하리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아냈다.“저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어요. 구 대표님 직원을 제가 어떻게 함부로 데려가겠어요.”안현우의 말에도 구승훈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래,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릴 어리석은 인간은 없겠지. 하지만 그 여자 마음이 떠난걸, 남이 뭐 어쩌겠어?’... 클럽에서 나간 강하리는 택시를 타고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3년 전, 정서원이 입원한 후로 처음 돌아가는 것이었다.그녀의 계부 강찬수는 성격이 더러운 데다가 술까지 좋아했다. 그래서 쩍하면 모녀에게 손을 대고는 했다.그녀는 수도 없이 정서원을 설득해서 두 사람을 이혼시키려고 했었다. 하지만 마음이 약한 정서원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만취 상태인 강찬수를 데리러 간 어느 날 밤 길가에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정서원이 입원한 다음 강찬수는 술을 점점 더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대부분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온다고 해도 제정신인 적이 없었다.강하리는 오늘 밤도 집이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도착해보니, 그가 집에 있었을 뿐
욕을 내뱉자 손연지는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그제야 가장 중요한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애는 지울 거지? 내일 검사 끝나고 바로 시술 예약해 줘?”강하리는 아랫배를 만지작대다가 욱신대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고 짧게 대답했다.“응.”대답을 마친 동시에 눈물 한 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환영받지 못한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그녀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다.그녀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평범한 여자이다. 아이는 태어나봤자 평생 아빠 없이 손가락질만 받고 살 것이다. 그리고 구승훈은 아이에게 마땅한 명분도,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다.사랑, 결혼, 아이... 구승훈에게서는 절대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강하리는 눈을 꼭 감더니 눈물을 단호하게 닦아냈다....저녁에 강하리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어느 순간, 그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어린 시절 강하리는 어머니 정서원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보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 강가의 어촌 마을이었다. 그 자그마한 마을은 그녀가 구승훈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어린 구승훈은 지금처럼 음침하지 않았다. 태생부터 잘생겼던 그는 마치 곱게 빚은 도자기 인형과 같았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이름 모를 병에 걸려 한적한 마을에서 요양 중이었다.요양 생활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는지 그는 강가에서 혼자 눈물을 훔치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강하리는 그를 발견할 때마다 사탕 한 알을 들고 가서 위로해 주곤 했다.처음에 그는 강하리를 보는 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친해진 다음에는 종종 대문 앞에 찾아와서 “하양아!”하고 큰 소리로 불러주고는 했다.얼마 후 그의 병이 다 나았는지 한 무리의 사람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는 무조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강하리와 약속을 나눴다.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10년 후의 재회는 거의 사고와 마찬가지였다. 강하
사실 그동안 주해찬이 달라졌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온화하고 따뜻했던 남자가 근래 왠지 모르게 강압적인 집착을 보였다.구승훈을 좋아하지 말라던 말도, 자기가 낫지 않으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냐고 물었던 것도...다만 강하리는 그를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리를 다쳐서 마음이 불안한 것이라고 여겼다.강하리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무슨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피식 웃은 구승훈이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나쁜 놈이란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그렇게 말한 후 그는 강하리를 밖으로 끌어당겼다.“어디 가?”“그 자식 만나러.”강하리가 걸음을 멈칫했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차에 태웠다.“가서 네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봐.”강하리는 심호흡하고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언젠간 주해찬을 만나러 가야 했으니까.가는 길에 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은 마음이 괴로웠다.고작 주해찬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할 가치가 있는 걸까.차가 경찰서 앞에 멈춰 선 뒤 구승훈이 갑자기 강하리를 끌어당기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왜 그래?”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이따가 꼭 왼손 보여줘.”“...”주해찬은 강하리만 기다린 것처럼 보였고 강하리는 유치장 문 앞에 서서 낮게 불렀다.“선배.”주해찬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하리야, 그래도 날 보러 와줘서 기쁘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주해찬을 바라보았고 가뜩이나 조용했던 공간에 적막이 감돌았다.문득 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손으로 향했다.구승훈의 말처럼 한심하게 일부러 왼손을 보여주려던 건 아니지만 손가락에 낀 반지는 여전히 주해찬의 눈에 들어왔다.그가 피식 웃었다.“그 사람이랑 결혼해?”강하리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왜 그랬어요?”주해찬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면서도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때 주해찬이 쓴웃음을 지으며 갑자기 입을 열
강하리는 조용히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 다시 물었다.“진심이야?”구승훈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몸을 숙이며 다가갔다.“이런 걸로 농담 안 해.”강하리의 눈은 촉촉했고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좋아.”구승훈은 몸을 숙여 강하리를 껴안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말끔히 사라졌다.강하리와의 결혼...그가 얼마나 바라온 일인지 모른다.하지만 지금은... 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머리카락에 입맞춤했다.앞으로도 계속 멀쩡하게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강하리를 놓아줄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주해찬을 껴안고 있는 그녀를 봤을 때 얼마나 주해찬을 죽이고 싶었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자신이 죽더라도 다른 남자가 강하리를 건드리는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그렇다면 차라리 함께 손을 잡고 헤쳐 나가리라.결과가 좋든 나쁘든 적어도 곁에 강하리가 있으니까.다다를 그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다시는 이 손 놓지 않을 거다.강하리와 구승훈이 위층에서 내려왔을 때 구승재는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다가 두 사람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휴대폰을 치웠다.“형, 하리 씨, 괜찮아요?”구승재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이내 자신의 걱정이 기우라는 것을 알았다.형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고 강하리의 희고 깨끗한 얼굴은 어렴풋이 홍조를 띠고 있었다.이런, 또 애정행각을 봐버렸다.“아직도 안 갔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고 구승재를 바라보았다.“... 알았어, 갈게.”떠나기 직전, 그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돌아봤다.“저기 하리 씨, 앞으로 계속 형수님이라고 불러도 돼요?”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세요.”구승재는 기쁜 마음으로 불렀다.“네, 형수님.”그러고는 힘찬 발걸음으로 떠나자 구승훈이 옆에서 혀를 찼다.“왜 나보다 쟤가 더 기뻐하는 것 같지?”강하리가 그를 흘겨봤다.“원래도 승재 씨가 당신보다 나한테 더 잘해줬어.”구승훈은 여자를
진태형은 뒤에 있는 저택을 돌아보았다.“내가 알아낼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하리 잘 부탁해.”눈을 뜬 강하리는 아직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몸을 살짝만 움직였는데도 곳곳에 불편함이 느껴졌다.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얼굴의 핏기도 사라졌다.일이 벌어지기 전의 상황이 머릿속에 번뜩이자 이불을 걷어 올린 강하리는 자기 몸의 흔적을 내려다보며 이불을 꽉 움켜잡았다.지금 자신이 구승훈의 저택에 있다는 건 알지만 누가 자기 몸에 흔적을 남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찢어질 것 같은 통증에 다시 주저앉았다.마음속 불안감은 점점 더 커졌다.설마 구승훈이 그녀를 이렇게 다치게 했을까.그녀는 고통을 참으며 이불을 걷어내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무심코 옷 한 벌을 몸에 걸친 뒤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구승훈이 막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창백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는 강하리가 보였다.“일어났어?” 웃음기 섞인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강하리는 온몸을 감싸고 있던 차가운 기운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응, 일어났어. 어디 갔었어?”구승훈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일이 좀 있어서. 왜, 나 보고 싶었어?”강하리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고 불안했던 마음을 내려놓았지만 그래도 그에게 물었다.“구승훈, 당신 짓이야?”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약에 취한 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괜스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기억하지 못해서 다행이었다.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발그레해진 눈가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내가 아니면 누구이길 바라는데?”강하리는 그의 어깨를 잡더니 갑자기 그의 턱을 콱 깨물었다.“미친 거야? 너무 아프잖아!”구승훈의 몸이 굳어졌다가 이윽고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널 안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 많이 아파? 가자, 내가 확인해 볼게.”강하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줄곧 거실에 있던 구승재가 헛기침을
진시연은 진태형의 시선에 순간 마음에 찔렸지만 이내 다시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진태형의 곁으로 걸어갔다.“아빠, 화내지 마. 하리 씨 문제는 제대로 밝혀질 거야.”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석연란을 화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방금 내 동생에 대해 모함하는 말 전부 똑똑히 들었어요. 앞으로 다시 또 그런 말이 내 귀에 들리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석연란은 깜짝 놀랐다.“내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야. 스폰 받은 것 맞잖아!”“그 입 다물어요. 내 동생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정말 그랬다고 해도 사모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죠.”진시연의 말은 마치 강하리가 정말로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처럼 들렸다.사람들은 눈을 번뜩이며 어느 정도 추측에 확신을 더하는 모습이었다.진태형이 고개를 돌려 진시연을 바라보니 그녀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아빠, 걱정하지 마. 하리 씨 일은 우리 진씨 가문 일이잖아.”진태형은 그녀를 바라보다 돌아섰다.“이번 일은 철저히 조사해서 관련된 그 누구도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진시연은 저도 모르게 양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말아쥐면서도 이내 다시 진태형을 따라갔다.“아빠, 나 하리 씨 보러 갈래.”“그럴 필요 없어. 승훈이가 잘 돌봐줄 거야.”말을 마친 진태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진시연의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지만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저택에서 나와 곧장 경찰서로 향했고 주해찬은 이미 진술을 마치고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었다.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든 그는 상대가 구승훈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보냈다.구승훈이 다가와 휠체어에 앉은 주해찬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공범이 누구야?”주해찬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구승훈, 아직도 모르겠어? 넌 하리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 네 곁에만 있으면 빈번하게 일이 생기잖아!”구승훈은 차갑게 웃었다.“난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지만 너처럼 해치지는 않아!”주
석연란의 말에 사람들이 표정이 확 바뀌었다.아무도 이런 가십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심씨 가문의 손녀, 진태형의 딸이 스폰을 받았다고?심씨 가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사람들은 믿지 못해도 저마다 좋지 않은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다들 봤다시피 강하리의 외모는 아름다웠고 누군가 돈을 주고 취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약간의 경멸이 그들의 눈에 보였다.돈 많은 사람일수록 원래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든다.예전 같았으면 이 사람들이 강하리처럼 배경도 없고 뒷배도 없는 여자에게 눈길조차 주지도 않았겠지만 갑자기 심씨 가문의 조카이자 진태형의 딸이 되니 당연히 수많은 사람의 질투를 불러왔다.이제 석연란의 말까지 더해지자 순식간에 사람들은 싸늘하게 조롱하기 시작했다.“심씨 가문의 손녀라고 해서 얼마나 고귀한가 했더니, 그런 물건이었어?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역겹네.”“어떻게 스폰까지 받지? 그러면 돈만 주면 아무 남자와 잔다는 말이잖아?”“모르지. 그러니까 이런 곳에서도 구 대표 몰래 남자를 찾은 거 아니겠어?”히죽거리는 사람들의 말 속엔 조롱만이 가득했고 석연란은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말에 의기양양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심씨 가문이 지켜준다고 해서 정말 머리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강하리를 철저히 망가뜨리겠다고 다짐했으니 반드시 해내리라.그때 누군가 석연란을 툭 쳤다.“또 어떤 정보가 있어요? 재밌는 일 있으면 공유 좀 하죠.”석연란이 콧방귀를 뀌며 말하려는 순간 뒤돌아보니 진태형의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순간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곧 다시 차갑게 웃었다. 어차피 다 사실만을 얘기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나.“태형 씨, 방금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강하리랑 우리 해찬이가 무슨 짓을 했길래 구 대표가 그렇게 가요?”적나라한 의도가 담긴 말이었다. 강하리가 주해찬과 낯 뜨거운 짓을 해서 구승훈이 화가 났다는 뜻이다.사람들
강하리는 구승훈에게 안긴 채 올라가 샤워를 한 뒤 깊은 잠에 빠졌다.구승훈은 조용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에는 복잡하게 억눌린 감정이 가득했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약을 챙겨 그녀의 몸에 난 잇자국에 조금씩 발라주었다.하는 내내 구승훈의 움직임은 부드러웠지만 이마에 툭 튀어나온 핏줄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약을 다 바른 뒤 그는 침대 옆 탁자 서랍에서 벨벳 상자를 꺼냈다.상자 안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사실 지난번에 강하리를 데려왔을 때 준비했던 반지인데 한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니 이젠 감히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구승훈은 반지를 꺼내 강하리의 왼손 약지에 끼워주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가락에 입맞춤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미안해.”그러고는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서둘러 도착한 구승재가 노민준에게 받은 진정 효과가 있는 주사를 구승훈에게 건넸고 구승훈은 망설임 없이 주사를 자기 팔에 꽂았다.구승재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형...”구승훈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구승재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형, 우리 해외로 가자. 해외 연구소에 가자, 응?”입꼬리를 올리는 구승훈의 눈에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그럴 필요 없어. 민준이 형도 어쩔 수 없다면 해외로 가도 마찬가지야.”약을 다 밀어 넣은 그는 조심스레 주사기를 종이로 감쌋다.“여기서 잘 지켜보고 있다가 강하리가 깨어나면 같이 말동무나 해줘. 근데 해서는 안 될 말은 하지 마, 알았지?”그렇게 말한 뒤 그는 밖으로 나가서 주사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진씨 가문의 생일 파티에서 강하리와 함께 떠나는 구승훈을 많은 사람이 목격했고 석미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더욱 시선을 끌었다.구승훈에게 맞은 주해찬은 얼굴과 입술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모든 과정을 보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진태형은 사람을 시켜 현장을 정리하고 지켜보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 방으로 들어갔다.무거운
걸음을 멈춘 구승훈이 뒤돌아 주해찬에게 주먹을 날렸고 참을 수 없다는 듯 주해찬에게 주먹을 연달아 내리꽂았다.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석미란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 들어왔다.“구승훈! 뭐 하는 거야! 감히 해찬이를 때려? 경찰 부를 거야, 신고할 거야!”구승훈이 비아냥거렸다.“그래요, 신고하세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곧장 강하리를 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방을 나갔다.석미란이 화가 나서 뭐라고 말하려는데 주해찬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그는 휠체어에 멍하니 앉아 강하리를 안고 떠나는 구승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사실 그는 오늘 강하리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 번만 기회를 얻고 싶었다.주먹질에 맞아도 싸다.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하리에게 빚을 졌다.이정숙에게 잡혀 발을 뺄 수 없었던 진태형이 서둘러 도착했을 땐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두 눈에 감출 수 없는 살기에 진태형이 구승훈의 팔을 붙잡았다.이대로 강하리를 해칠까 봐 두려웠는데 걸음을 멈춘 구승훈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저 하리 다치게 하지 않아요.”진태형은 잠시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손을 놓았고 구승훈의 차는 빠르게 달려 거의 순식간에 별장으로 돌아왔다.강하리는 조수석에서 이미 잠들어 있었고 구승훈은 차를 세우고 문을 쾅 닫은 뒤 조수석에서 강하리를 안고 내려왔다.그녀를 안는 힘이 너무 셌던 탓인지 강하리가 갑자기 몸부림을 쳤고 구승훈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차 위로 밀어붙인 채 키스를 했다.거칠고 난폭했다.키스라고 하기엔 물고 뜯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깊은 욕망과 살기가 뒤섞인 눈빛은 당장이라도 여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았다.그가 아프게 깨물자 강하리는 밀어내기 시작했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포박한 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나 말고 주해찬이랑 키스하려고?”남자의 목소리가 싸늘했고 흐릿한 눈을 뜬 강하리는 구승훈의 분노로 가
화장실 문 앞에 도착한 구승훈은 강하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옆 벽에 기대어 기다렸다.하지만 10분이 지나도 강하리가 인기척을 보이지 않자 심장이 철렁하며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상대의 휴대폰이 꺼졌다는 음성에 남자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지며 곧장 발을 뻗어 화장실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안에선 강하리의 모습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강하리는 머릿속이 어지럽고 몸에서 주체할 수 없이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누군가 자신을 안는 느낌이 들었지만 뿌리칠 수 없었고 곧바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힘겹게 눈을 뜨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구승훈의 얼굴이 보였다.“구승훈...”강하리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갑자기 눈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다.“왜 나랑 결혼하지 않는 거야? 나랑 결혼한다고 했잖아, 연정이한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구승훈, 한 달의 시간을 줄게. 나랑 결혼해 줘, 알았지?”그녀의 첫마디를 듣자마자 주해찬의 눈이 번쩍 뜨였지만 강하리의 입에서 구승훈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는 차가운 얼음 동굴에 빠진 것 같았다.그랬구나.진시연은 강하리가 기꺼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할 방법이 있다고 했다.그게 그를 구승훈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일 줄이야.그는 쓴웃음을 내뱉으며 휠체어 팔걸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하리야, 넌 내가 그렇게 싫어?”강하리는 눈가에 눈물을 머금었지만 입가엔 웃음이 흘러나왔다.“내가 충분히 보여주지 않았어? 구승훈, 얼마나 좋아해야 날 전적으로 믿어줄 거야?”웃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난 사실 당신이 항상 날 믿지 않는 게 무척 괴로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둘이 같이 짊어지고 싶은데 항상 날 빼놓잖아. 구승훈, 어떻게 해야 나한테 온전히 마음을 열어줄 건데?”주해찬의 손가락이 살짝 떨리며 앞으로 다가가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하리야, 구승훈 사랑하지 마, 응?”강하리는 웃으며 그를 밀쳐냈다.그녀도 더 이상 구승훈을 사랑하고 싶지
그런데 갑자기 진태형에게 친딸이 하나 더 생기고 그게 심씨 가문의 손녀일 줄 누가 알았겠나.이제 진시연의 처지가 어색해진 건 당연했고 사람들은 진시연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흩어졌다.진시연은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사람들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못 본 척 걸음을 옮겨 구승훈에게 다가갔다.“구승훈 씨, 오랜만이네요.”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와인 잔을 들고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대답하지도 않았고 그녀와 대화를 나눌 생각도 없어 보이자 진시연은 그의 옆에 서서 우울한 표정으로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 씨, 내가 F 대륙에서 야생동물에게 공격당했을 때 날 구해주고 밤새 업고 병원으로 가 치료받게 해준 거 기억나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땐 개나 소나 다 구해줬을 겁니다.”진시연의 얼굴이 다소 일그러졌다.그녀는 오랜 세월 기억하고 있던 것이 구승훈의 입에서 개나 소나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우울한 눈빛을 감춘 채 말을 이어갔다.“그래도 저한텐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에요. 구승훈 씨,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 네? 전 정말 그쪽이랑 잘 지내고 싶어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진시연 씨, 진심으로 살려줘서 고마우면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요. 내 아내가 날 오해하는 건 싫으니까.”진시연은 당황했다.“아내요? 두 사람 결혼해요?”구승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진시연 씨, 멀리하라고요. 못 알아들어요?”구승훈이 그렇게 말한 뒤 걸음을 옮겨 강하리에게 다가가는데 진시연이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그의 뒤에서 소리쳤다.“구승훈 씨, 강하리가 정말 좋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쪽 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주해찬이랑 알콩달콩 지내는데 정말 하나도 신경 안 쓰여요?”구승훈은 걸음을 멈추고 얼음같이 싸늘한 얼굴로 돌아보았다.“진시연 씨, 멀쩡히 진씨 가문에 남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요. 아니면 심씨 가문도, 나도 그쪽 무사히 B시에 남겨두지 않을 테니까.”진시연의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