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양철은 죽었지만 애초에 그가 강하리 어머니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이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정양철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나올 줄이야.“확실해요?”“물론이죠.”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심준호에게 연락했고 그와 대화를 마친 뒤 밖을 향해 말했다.“시작하지.”잠시 후 비서가 기자 10여 명을 데리고 구승훈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문빈이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자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SNS로 옮겨갔고 과거 여러 번 검색어에 오르며 욕을 먹었던 흑역사도 전부 밝혀졌다.SNS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사주했는지 갈수록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안예서는 점점 더 고조되는 SNS의 화제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처리하는 강하리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대표님, 이걸 제대로 밝힐 방법을 찾아야겠어요.”강하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욕하다 지치면 자연스레 그만두겠지.”안예서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설득하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안진 그룹 총괄팀장과 약속 잡아줘.”안예서는 다소 무력한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뒤에야 강하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손가락이 SNS 아이콘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클릭했다.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녀를 욕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안예서가 말했던 것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대신 라이브 방송 하나가 떠서 클릭해 본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었다.뒤에 비치는 장소는 그의 사무실 같았다.남자는 검은 셔츠를 입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엔 어느새 반지를 끼고 있었다.자세히 보면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델이지만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크지 않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낀 반지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각 왠지 모르게 인터넷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다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무슨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주해찬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주해찬은 정말 강하리에게 계속 사실을 숨길 생각도, 진시연을 도울 생각도 없었다.그냥... 강하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때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러면 강하리의 마음속 망가진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그런데 구승훈이 이토록 매몰차게 굴 줄은 몰랐다.아버지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패한 관리들처럼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고 할아버지도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둘 리 없었다.하지만 부패를 철저히 타도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작은 선물을 몇 개 받은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게다가 구승훈은 그 증거를 노골적으로 인터넷에 올렸고 관련 부서에 실명으로 가차 없이 신고했다.구승훈은 결코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가 원하는 건 주해찬의 타협과 강하리 앞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는 것이었다.사실 구승훈이 처음 병원에서 그를 떠봤을 때부터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다만 줄곧 비현실적인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주해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완전한 패배라는 걸.“미안해, 하리야.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인터넷에 너에 대한 루머를 유포한 것도 이모가 한 짓이야. 이모한테도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하리야, 내 다리...”주해찬은 말하며 심호흡하듯 잠시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의 다 나았어.”강하리는 당황했고 주해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주길 바라서, 구승훈이랑 다시 만나서 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내가...”“선배.” 강하리가 갑자기 주해찬의 말을 가로챘다.“고마워요.”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강하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예전에 여러 번 날 도와주고 날 이렇게 생각해 주고 지금도 날 위해 나서서 진실을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
강하리는 사실 자신이 꽤 한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거듭되는 상처에도 수없이 용서했다.마치 구승훈이 없으면 모든 게 그대로 멈춰버릴 듯이.구승훈이 사라져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지만 구승훈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그건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또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당해도 싸.”강하리는 손연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손연지는 다가와 강하리를 껴안았다.“구승훈 이 개자식이 전생에 우주라도 구한 거야?”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연지의 어깨에 기대었다.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위로에 가까웠다.“그러는 넌, 대체 무슨 일인데?”자기 일을 언급하자 손연지는 순식간에 흥미가 사라진 표정이었다.“별건 아니야. 사실... 하리야, 나 임신했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다.“뭐?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아기는?”손연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노민우는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있었어. 노민우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고 사실 아이도 남길 생각 없었어. 노씨 가문이나 노민우에겐 관심 없어. 40일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술하려고 했는데 그날 밤 내가 당직일 때 노민우 약혼녀가 병원에 찾아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난동을 부렸어. 병원에서도 노씨 가문에 밉보일 수 없어서 날 해고했어.”강하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그러고 나서?”손연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그리고 다음 날 아이를 지웠는데 노민우가 어떻게 알았는지 낙태한 걸 알고는 나한테 화를 냈어.”강하리의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다.노민우가 약혼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 손연지에게 연락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멀쩡했었다.고작 얼마나 됐다고 노민우 그 개자식이 손연지를 이렇게 힘들게 한 건지!“왜 나한테 말 안 했어?”손연지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말해도 달라질 게 뭐가 있어. 그래도 노민우를 그냥 두지는 않았어. 자기가 뭐라고 나한테 화를 내? 약혼까지 했는데 내가 아이를 낳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노씨 가문에 찾아가서 업무에
“그동안 누가 임희주를 지원했는지 조사해 봐.”준봉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그러나 사무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구승훈이 다시 한마디 했다.“임희주와 여초연 씨의 관계를 확인해 줘.”...결혼식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심문석은 병원에 며칠 입원했다가 퇴원했고 결혼식의 모든 과정과 세부 사항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다.강하리는 처음에는 노인의 건강이 걱정되었지만 심문석이 바빠지자 오히려 더 건강해 보였고 그녀는 그가 바쁘게 지내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이 시기 구승훈은 유난히 바빠 보였다.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고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피곤함을 숨기지 못했지만 강하리는 그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시곗바늘은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강하리는 옆에 빈 침대에 잠시 눈을 두고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방에서 우유 한 잔을 데웠다.서재의 불빛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강하리는 서재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문을 열고 들어간 강하리는 우유를 책상 위에 놓았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휴대폰 화면을 끄고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나에게 주는 거야?”구승훈이 그렇게 물었을 때 강하리는 그를 꾸짖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그냥 ‘응’하고 대답한 후 그의 옆에 앉았다.“내가 도와줄 일이 있어?”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도와줄 거야?”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 부하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러 온 거야.”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이제는 에비뉴와 정안 모두 강 부장이 최대 주주라서 그런 것들이 다 중요하겠지.”강하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의자 하나를 가져다 앉아 책상 위의 서류를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그녀는 금세 서류에 몰입했고 구승훈은 그녀 옆에 앉아 있는데도 자꾸만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서재의 불빛은 따뜻하지 않았지만 강하리가 앉자 공간 곳곳이
차 안은 숨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구승훈은 팔꿈치를 팔걸이에 올린 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준봉은 그가 곧 움직일 거라 예상했다.심지어 M국으로 떠날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30분이 흘러도 구승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준봉이 막 입을 떼려던 순간 구승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노진우에게 사람을 데리고 곧장 그 장소로 가라고 해. 그가 출발하면 구승재에게 연락해 조용히 그쪽으로 가게 해. 노진우가 움직이는 순간 구승재는 바깥을 봉쇄하도록 해.”준봉은 잠시 말을 잃었다.“대표님, 혹시 함정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몸을 기댄 구승훈은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그는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다.여초연은 복수를 위해서라면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그가 아는 여초연이라면 일부러 그를 또 다른 함정으로 유인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쉽게 자신의 흔적을 드러낼 리 없었다.그때 노연정을 납치했던 일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이 몇 년 간 여초연은 분명 자신의 세력을 키워왔을 것이다.그는 여초연을 항상 감시할 사람을 배치해 두었지만 그녀가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여초연은 별다른 은폐 없이 M국으로 갔고 유일하게 예상하지 못한 점은 나문빈이 너무 빨리 그녀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사실이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가장 큰 손실은 단지 노연정을 곁에 두는 시간이 짧았고 그 사이 구승훈과 강하리는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그녀가 계획한 대로 그 약물이 그의 몸에 투여되었다.여초연의 계획은 모든 것이 치밀하게 짜여 있었고 그랬다면 지금 이 순간 구승훈과 강하리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여초연이 이렇게 허술한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다.게다가...구동근이 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구승훈은 구동근과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지만 여초연보다는 그를 조금 더 신뢰하는 편이었다.한편 M국에서 여초연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집사에게서 휴대폰을 건네
손연지는 강하리와 천아름의 손을 잡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이런 사람들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진짜 역겹다니까요.”천아름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손연지를 따라가며 뒤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던졌다.“여씨 가문의 두 분 내 가게에서 당장 꺼져요.”여명희는 순간 얼어붙었다.“천아름 씨, 미쳤어요? 이런 천한 년 하나 때문에 우리를 쫓아내겠다고요?”천아름은 걸음을 멈추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쫓아내는 게 아니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거죠.”그러고는 매장 직원을 향해 손짓하며 덧붙였다.“앞으로 이 두 사람 내 모든 매장 출입 금지야. 알아들었지?”그러자 강하리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두 분은 심 씨 가문 명의로 된 모든 장소에 출입할 수 없어요.”그렇게 단호하게 선언한 후 더 이상 그녀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손연지와 함께 매장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온 뒤 손연지는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통유리 창에 몸을 기댄 채 안쪽을 몰래 들여다봤다.“하하. 저렇게 분노에 차서 발악하는 꼴을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요.”그러더니 갑자기 강하리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하리야, 정말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이 울분을 풀지도 못했을 거야. 너 모를 거야 그때 직장에서 쫓겨났을 때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이쁜이 정말 고마워...”그러자 천아름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말을 끊었다.“저기...나한테는 고맙다는 말 없어요?”손연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고마워요!”천아름은 손연지에게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웃었다.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래요? 결혼할래요? 내가 말인데 나랑 같이 지내면 앞으로 주얼리랑 옷은 내가 다 사줄게요.”“콜!”옆에서 듣고 있던 강하리는 입을 삐죽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손연지의 해맑은 웃음을 보자 결국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천아름 씨, 고마워요.”강하리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천아름은 손을 휘휘 저으며 시큰둥하게 답했다.“우리 사이에 무슨 고맙다는 말을 해요? 진짜로 고맙다면 당신 남편
여명주가 반박하려는 순간 강하리 뒤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 작업실의 주인인 천아름이었다.천아름은 짙은 눈동자와 붉은 입술 크고 우아한 웨이브 헤어 거기에 하이힐까지 착용하고 있었다.강하리 옆에 멈춰 선 천아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 오랜만이에요.”강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사실 두 사람이 마주한 건 단 한 번뿐이었다.그때 경매장에서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에비뉴를 인수하고 나서야 강하리는 그 두 개의 약혼반지가 사실 천아름의 작품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에비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을 뿐이었다.천아름은 조용히 강하리의 손목을 바라보다가 반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여전히 마음에 드세요?”강하리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감사합니다.”천아름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려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반지가 예쁜 게 아니라 사실은 당신의 손이 예쁜 거예요. 구승훈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그 순간 손연지가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구승훈 씨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예요. 아니면 어떻게 하리를 사로잡을 수 있었겠어요?”천아름은 손연지를 향해 윙크하며 장난스레 말했다.“역시 미녀끼리는 생각도 비슷하네요.”셋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여명주는 그들 사이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채 서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이건 대놓고 날 무시하는 거잖아.’“천아름 씨, 이게 무슨 뜻이죠?”천아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아직도 못 알아들었어요? 여명주 씨 B시에서는 당신네 가문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정말 그렇게 대단하다면 노민우 씨를 붙잡아다 가문 재정을 끊고 강제로 결혼이라도 시키시지 그러세요? 그런데 왜...”천아름은 옆에 있던 손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쁜 아가씨,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소연지입니다.”“아. 맞아요. 소연지
강하리는 안에서 밖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구승훈은 그 모습을 보며 저절로 입꼬리를 올렸다.“떠나기 아쉽네.”그가 나지막이 말했다.노민준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지만 구승훈이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정 안 되겠으면 강하리 씨에게 솔직하게 말해. 그러면 강하리 씨도 기꺼이 너와 함께 돌아갈 거야. 그리고 계속 숨기기만 하면 강하리 씨도 불편할 거잖아?”구승훈은 잠시 침묵한 뒤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그는 작업실 안에서 웃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았다.노민준은 더 할 말이 없었고 그때 서야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승훈, 손연지 씨 지금 어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궁금해?”노민우는 급히 두 번 응답했다.“그러면 직접 와서 보면 되잖아?”“손연지 씨는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구승훈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그때 내가 나가라고 했을 때는 왜 안 나갔어?”노민우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그것도 그렇네.”구승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준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희주를 철저히 조사해 줘.]강하리는 마침내 손연지에게 어울리는 주얼리를 골랐다.손연지는 몸에 맞춰보며 환하게 웃었지만 강하리는 그 웃음이 예전처럼 맑고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꼈다.감정의 상처는 결국 스스로 치유해야 했고 강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연지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주얼리를 고른 뒤 강하리는 손연지와 함께 의류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곧 결혼식인데 다른 건 안 고를 거야?”손연지가 물었다.강하리는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구승훈이 몇 벌 주문해 놨고 또 에비뉴에서 우리 결혼식에 맞는 주얼리 세트를 준비해 줬어.”손연지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놈의 자본주의.”강하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두 사람은 웃으며 의류
구승훈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왜 갑자기 왔어?”강하리는 구승훈을 째려보며 말했다.“안 오면 당신이 예쁜 여자랑 데이트하는 거 못 볼 거 아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질투나?”“아니.”그렇다고 말은 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에는 질투의 냄새를 숨길 수 없었다.그녀는 실제로 구승훈과 임희주 사이에 아무 일이 있을 거로 의심하지는 않았다.그저... 다른 여자가 어떤 면에서 그녀의 남편을 더 잘 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잡고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에 남은 자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어쩌지? 오늘 밤 당신이 나를 침대에 묶어 두는 건 어때? 복수의 기회를 줄게.”강하리는 질색을 하며 손을 빼냈다.“염치를 좀 챙겨.”구승훈은 웃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휴대폰이 옷 속에서 가볍게 진동했지만 그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그저 눈빛이 깊어졌다.마침내 강하리는 차를 개인 작업실 앞에 세웠고 구승훈이 주문한 주얼리를 오늘 착용해 보려고 했다.마침 이틀 후 손연지의 생일이었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휴식 중인 틈을 타 그녀를 불러냈다.강하리가 차에서 내리자 손연지는 작업실의 큰 창문 앞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녀는 강하리를 보고서야 마치 살아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손연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손연지 씨, 이렇게 한가해요?”손연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강하리를 따라 들어가자 직원이 다가왔다.“구승훈 씨, 주문하신 주얼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구승훈은 대답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고 그는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나서 직원에게 말했다.“주얼리는 내 아내에게 전달하세요.”그러고는 강하리를 향해 말했다.“전화 받고 올게. 주얼리 먼저 착용해 보고 안 맞으면 다시 수정해 달라고 하면 돼.”강하리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흘끗 보았는데 화면에 나타난 이름은 노민준이었다.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손
‘심리 의사들은 원래 이렇게 강한 심장을 가진 걸까 아니면 이 임 선생이 유독 뻔뻔한 걸까? 만약 이 사람이 노민준 씨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대표님은 진작 화를 냈을지도 몰라.’하지만 임희주는 분위기를 살피고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바로 다른 치료 방안을 구승훈에게 설명했다.“간단히 말하면 이전 치료 방안은 증상을 억제하는 방식이었어요. 예를 들어 노민준 씨가 처방한 약들도 증상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죠. 하지만 이런 억제는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해 약효가 떨어지면 증상이 더 심해질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억제보다는 근본적인 해소를 목표로 하는 방향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약효를 완전히 끌어낸 뒤 점차 증상을 약화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물론 한 번에 모든 약효를 없애는 건 아니고 몸과 신경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이 방법은 다소 위험할 수도 있어요. 구승훈 씨가 신중히 고민한 후 결정하시면 좋겠습니다.”임희주가 말을 마치자 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준봉이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이 방법을 선택하면 어떤 위험이 따를까요?”임희주는 커피를 천천히 저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약효를 모두 끌어낼 경우 증상이 얼마나 심각해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요. 그렇기에 위험이 따를 가능성이 큽니다.”준봉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반면 구승훈은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구승훈이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방안을 만든 사람이 누구죠? 노민준인가요?”임희주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제가 만든 방안이지만 노민준 씨와도 논의했습니다. 그는 이 방법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어요.”구승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생각해 보겠습니다.”임희주는 한 발짝 다가서며 덧붙였다.“빠른 답변 부탁드려요.”구승훈은 대답 없이 조용히 카페
구동근은 방에서 밤새 소란을 피운 끝에 다음 날 아침 병원으로 실려 갔다.그는 병원에 가면 좀 나아질 줄 알았지만 도착한 후에도 구승훈의 철저한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휴대폰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그가 난동을 부린 탓에 병실은 엉망이었지만 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직도 부수고 있네요? 그럼 내가 잠깐 밖에서 기다렸다 들어올까요?”구동근은 화가 나서 거의 기절할 뻔했다.“이미 말했잖아. 여초연 씨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구승훈은 대꾸하지 않은 채 보온병에서 밥을 퍼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건가요?”구동근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확실히 몰라. 여초연 씨가 떠날 때 난 보내주기로 약속했고 그 이후로 여초연 씨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어. 물론 나중에 행방을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얻은 단서는 거의 없었고 여초연 씨는 아마도 M국에 있을 거야. 그 팔찌는 어제 아침 하인이 집 앞에서 발견한 거야. 안에는 쪽지가 한 장 들어 있었고 여초연 씨의 필체로 ‘너희 부인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라고 적혀 있었어.”말을 마친 구동근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여초연 씨가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결국 내가 여초연 씨에게 휘둘리고 있었더라고. 만약 그때 여초연 씨가 너에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넌 여전히 나를 미워하고 있었을까?”구동근은 말을 마친 뒤 묵묵히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때 너희가 여초연 씨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여초연 씨가 나에게 그렇게 했을까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구동근을 내려다보았다.“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죠. 결국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구승훈은 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밖으로 나온 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 속에는 조롱이 가득했다.그가 조롱하는 대상이 다른 사
강하리는 구승훈이 그 팔찌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아마 그 감정 속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을 것이다.이 시점에서 여초연이 팔찌를 보내는 것은 분명 도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구승훈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느꼈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내가 안아줄까?”구승훈은 억지로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그럼 강 부장님은 어떻게 나를 위로할 생각이에요?”강하리의 눈에 미소가 번졌다.“키스해 주고 안아주고 오빠라고 불러주면서 달래주면 되지 않을까?”구승훈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고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그는 빗속을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그때 그는 매우 슬펐고 심지어… 죽고 싶다고 느꼈다.구승훈이 강가에 서서 몸을 던지려는 순간 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구승훈 오빠.”그가 돌아보자 한 어린 소녀가 비를 맞으며 구승훈에게 달려와 작은 분홍색 우산을 그의 손에 건네며 말했다.“구승훈 오빠, 슬퍼하지 말아요.”그 말이 끝나자 그녀는 젖은 옷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어 비가 내리는 중에 힘겹게 사탕 포장을 뜯고 그에게 사탕을 건네주었다.“달콤한 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빗속에서 소녀는 반달처럼 꺾인 눈으로 웃으며 물었다.“달콤해요?”구승훈은 그때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저 그 장면이 떠오르자 가슴속에 있던 서글픈 감정이 점차 따뜻하게 변해갔다.그의 어린 시절은 아마도 온통 계산과 속임수로 가득했을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의 마음에 조금의 사랑도 주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잊힌 구석에서 어린 시절의 달콤함을 맛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그것은 구승훈의 삶에 존재한 빛과 같았고 아주 달콤했다.강하리는 구승훈이 말하지 않자 여전히 그가 마음속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그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