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연란의 말에 사람들이 표정이 확 바뀌었다.아무도 이런 가십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심씨 가문의 손녀, 진태형의 딸이 스폰을 받았다고?심씨 가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사람들은 믿지 못해도 저마다 좋지 않은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다들 봤다시피 강하리의 외모는 아름다웠고 누군가 돈을 주고 취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약간의 경멸이 그들의 눈에 보였다.돈 많은 사람일수록 원래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든다.예전 같았으면 이 사람들이 강하리처럼 배경도 없고 뒷배도 없는 여자에게 눈길조차 주지도 않았겠지만 갑자기 심씨 가문의 조카이자 진태형의 딸이 되니 당연히 수많은 사람의 질투를 불러왔다.이제 석연란의 말까지 더해지자 순식간에 사람들은 싸늘하게 조롱하기 시작했다.“심씨 가문의 손녀라고 해서 얼마나 고귀한가 했더니, 그런 물건이었어?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역겹네.”“어떻게 스폰까지 받지? 그러면 돈만 주면 아무 남자와 잔다는 말이잖아?”“모르지. 그러니까 이런 곳에서도 구 대표 몰래 남자를 찾은 거 아니겠어?”히죽거리는 사람들의 말 속엔 조롱만이 가득했고 석연란은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말에 의기양양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심씨 가문이 지켜준다고 해서 정말 머리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강하리를 철저히 망가뜨리겠다고 다짐했으니 반드시 해내리라.그때 누군가 석연란을 툭 쳤다.“또 어떤 정보가 있어요? 재밌는 일 있으면 공유 좀 하죠.”석연란이 콧방귀를 뀌며 말하려는 순간 뒤돌아보니 진태형의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순간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곧 다시 차갑게 웃었다. 어차피 다 사실만을 얘기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나.“태형 씨, 방금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강하리랑 우리 해찬이가 무슨 짓을 했길래 구 대표가 그렇게 가요?”적나라한 의도가 담긴 말이었다. 강하리가 주해찬과 낯 뜨거운 짓을 해서 구승훈이 화가 났다는 뜻이다.사람들
진시연은 진태형의 시선에 순간 마음에 찔렸지만 이내 다시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진태형의 곁으로 걸어갔다.“아빠, 화내지 마. 하리 씨 문제는 제대로 밝혀질 거야.”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석연란을 화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방금 내 동생에 대해 모함하는 말 전부 똑똑히 들었어요. 앞으로 다시 또 그런 말이 내 귀에 들리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석연란은 깜짝 놀랐다.“내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야. 스폰 받은 것 맞잖아!”“그 입 다물어요. 내 동생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정말 그랬다고 해도 사모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죠.”진시연의 말은 마치 강하리가 정말로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처럼 들렸다.사람들은 눈을 번뜩이며 어느 정도 추측에 확신을 더하는 모습이었다.진태형이 고개를 돌려 진시연을 바라보니 그녀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아빠, 걱정하지 마. 하리 씨 일은 우리 진씨 가문 일이잖아.”진태형은 그녀를 바라보다 돌아섰다.“이번 일은 철저히 조사해서 관련된 그 누구도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진시연은 저도 모르게 양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말아쥐면서도 이내 다시 진태형을 따라갔다.“아빠, 나 하리 씨 보러 갈래.”“그럴 필요 없어. 승훈이가 잘 돌봐줄 거야.”말을 마친 진태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진시연의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지만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저택에서 나와 곧장 경찰서로 향했고 주해찬은 이미 진술을 마치고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었다.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든 그는 상대가 구승훈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보냈다.구승훈이 다가와 휠체어에 앉은 주해찬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공범이 누구야?”주해찬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구승훈, 아직도 모르겠어? 넌 하리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 네 곁에만 있으면 빈번하게 일이 생기잖아!”구승훈은 차갑게 웃었다.“난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지만 너처럼 해치지는 않아!”주
진태형은 뒤에 있는 저택을 돌아보았다.“내가 알아낼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하리 잘 부탁해.”눈을 뜬 강하리는 아직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몸을 살짝만 움직였는데도 곳곳에 불편함이 느껴졌다.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얼굴의 핏기도 사라졌다.일이 벌어지기 전의 상황이 머릿속에 번뜩이자 이불을 걷어 올린 강하리는 자기 몸의 흔적을 내려다보며 이불을 꽉 움켜잡았다.지금 자신이 구승훈의 저택에 있다는 건 알지만 누가 자기 몸에 흔적을 남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찢어질 것 같은 통증에 다시 주저앉았다.마음속 불안감은 점점 더 커졌다.설마 구승훈이 그녀를 이렇게 다치게 했을까.그녀는 고통을 참으며 이불을 걷어내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무심코 옷 한 벌을 몸에 걸친 뒤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구승훈이 막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창백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는 강하리가 보였다.“일어났어?” 웃음기 섞인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강하리는 온몸을 감싸고 있던 차가운 기운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응, 일어났어. 어디 갔었어?”구승훈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일이 좀 있어서. 왜, 나 보고 싶었어?”강하리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고 불안했던 마음을 내려놓았지만 그래도 그에게 물었다.“구승훈, 당신 짓이야?”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약에 취한 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괜스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기억하지 못해서 다행이었다.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발그레해진 눈가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내가 아니면 누구이길 바라는데?”강하리는 그의 어깨를 잡더니 갑자기 그의 턱을 콱 깨물었다.“미친 거야? 너무 아프잖아!”구승훈의 몸이 굳어졌다가 이윽고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널 안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 많이 아파? 가자, 내가 확인해 볼게.”강하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줄곧 거실에 있던 구승재가 헛기침을
강하리는 조용히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 다시 물었다.“진심이야?”구승훈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몸을 숙이며 다가갔다.“이런 걸로 농담 안 해.”강하리의 눈은 촉촉했고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좋아.”구승훈은 몸을 숙여 강하리를 껴안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말끔히 사라졌다.강하리와의 결혼...그가 얼마나 바라온 일인지 모른다.하지만 지금은... 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머리카락에 입맞춤했다.앞으로도 계속 멀쩡하게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강하리를 놓아줄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주해찬을 껴안고 있는 그녀를 봤을 때 얼마나 주해찬을 죽이고 싶었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자신이 죽더라도 다른 남자가 강하리를 건드리는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그렇다면 차라리 함께 손을 잡고 헤쳐 나가리라.결과가 좋든 나쁘든 적어도 곁에 강하리가 있으니까.다다를 그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다시는 이 손 놓지 않을 거다.강하리와 구승훈이 위층에서 내려왔을 때 구승재는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다가 두 사람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휴대폰을 치웠다.“형, 하리 씨, 괜찮아요?”구승재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이내 자신의 걱정이 기우라는 것을 알았다.형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고 강하리의 희고 깨끗한 얼굴은 어렴풋이 홍조를 띠고 있었다.이런, 또 애정행각을 봐버렸다.“아직도 안 갔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고 구승재를 바라보았다.“... 알았어, 갈게.”떠나기 직전, 그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돌아봤다.“저기 하리 씨, 앞으로 계속 형수님이라고 불러도 돼요?”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세요.”구승재는 기쁜 마음으로 불렀다.“네, 형수님.”그러고는 힘찬 발걸음으로 떠나자 구승훈이 옆에서 혀를 찼다.“왜 나보다 쟤가 더 기뻐하는 것 같지?”강하리가 그를 흘겨봤다.“원래도 승재 씨가 당신보다 나한테 더 잘해줬어.”구승훈은 여자를
사실 그동안 주해찬이 달라졌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온화하고 따뜻했던 남자가 근래 왠지 모르게 강압적인 집착을 보였다.구승훈을 좋아하지 말라던 말도, 자기가 낫지 않으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냐고 물었던 것도...다만 강하리는 그를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리를 다쳐서 마음이 불안한 것이라고 여겼다.강하리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무슨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피식 웃은 구승훈이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나쁜 놈이란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그렇게 말한 후 그는 강하리를 밖으로 끌어당겼다.“어디 가?”“그 자식 만나러.”강하리가 걸음을 멈칫했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차에 태웠다.“가서 네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봐.”강하리는 심호흡하고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언젠간 주해찬을 만나러 가야 했으니까.가는 길에 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은 마음이 괴로웠다.고작 주해찬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할 가치가 있는 걸까.차가 경찰서 앞에 멈춰 선 뒤 구승훈이 갑자기 강하리를 끌어당기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왜 그래?”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이따가 꼭 왼손 보여줘.”“...”주해찬은 강하리만 기다린 것처럼 보였고 강하리는 유치장 문 앞에 서서 낮게 불렀다.“선배.”주해찬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하리야, 그래도 날 보러 와줘서 기쁘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주해찬을 바라보았고 가뜩이나 조용했던 공간에 적막이 감돌았다.문득 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손으로 향했다.구승훈의 말처럼 한심하게 일부러 왼손을 보여주려던 건 아니지만 손가락에 낀 반지는 여전히 주해찬의 눈에 들어왔다.그가 피식 웃었다.“그 사람이랑 결혼해?”강하리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왜 그랬어요?”주해찬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면서도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때 주해찬이 쓴웃음을 지으며 갑자기 입을 열
경찰서에서 나온 강하리는 구승훈이 차 옆에 서서 통화하는 모습을 보았다.남자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고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강하리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원래는 구승훈이 통화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가가려고 했는데 구승훈은 그녀의 시선을 감지한 듯 발걸음이 멈춤과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았다.남자의 몸에서 느껴지던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녹아내리는 듯했고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그는 상대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고 전화를 끊은 뒤 이쪽으로 걸어왔다.“어떻게 됐어?”입술을 달싹이던 강하리는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남자의 질문에 입가에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별것 없었어. 일단 돌아가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직도 마음이 불편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정말 괜찮았다.이젠 더 이상 주해찬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이 사건 이후로 그에게 빚진 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사실 이건 좋은 일이었다.적어도 더 이상 구승훈에게 미안할 행동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구승훈이 손가락으로 살며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그럼 앞으로 다른 남자 생각 그만해. 네 남편 질투해.”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앞으로 다른 여자 좀 그만 끌어들일래?”구승훈은 살짝 멈칫하다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질투해?”강하리는 손을 내밀어 문을 열고 차에 탔다.구승훈은 시선을 내린 채 웃다가 휴대폰의 통화 기록을 흘끗 훑어보고는 노민준의 이름을 삭제한 뒤 강하리를 따라 차에 탔다.그대로 차를 몰고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는데 들어가기 직전 누군가에 의해 앞이 가로막혔다.화려한 옷을 갈아입지 않은 이정숙이 굳어진 얼굴과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심씨 가문 입구에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진시연이 있었다.진시연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이정숙은 눈물을 계속 닦아주었다.두 사람을 본 구승훈의 표정도 굳어지며 위로하듯 강하리의 손을 꽉 잡
“여사님, 못 때린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아니면 지금쯤 구급차 부르셔야 했을 거예요. 제 주먹 맛보고 싶지는 않으시겠죠?”이정숙은 너무 화가 나서 눈이 뒤집혔다.“구승훈, 언제부터 네가 우리 진씨 가문 일에 참견했어?”구승훈은 혀를 차며 강하리의 손을 잡아당겨 이정숙 앞에 내밀었다.“보셨죠? 결혼반지. 강하리는 이제부터 제 약혼녀입니다.”구승훈의 말에 이정숙이 당황했고 옆에 있던 진시연은 우는 것도 잊은 채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이정숙은 구승훈에게 말이 통하지 않자 다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강하리, 난 네 할머니야!”강하리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나한테 약이나 먹이는 할머니 따위 둔 적 없어요.”이정숙은 깜짝 놀라며 진시연을 흘끗 쳐다보았고 진시연이 달려와서 이정숙의 앞을 막았다.“하리 씨, 어떻게 할머니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강하리가 비웃었다.“진시연 씨 대신 죄도 뒤집어쓰는데 나는 말도 한 마디 못 하나요?”진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하리 씨, 지금 나 의심하는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피식 웃었다.“아빠도 날 의심하고 하리 씨도 날 의심하네요. 두 사람은 진짜 부녀 사이고 전 그저 사랑하고 돌봐줄 사람이 없는 고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냥 나를 진씨 가문에서 쫓아내고 싶은 거죠? 내가 나갈게요.”이정숙은 그 말에 서둘러 진시연을 껴안았다.“시연아, 그런 말 하지 마.”강하리는 눈꼴신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을 지나쳐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누구든 가만 안 둬요.”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시연을 돌아보았다.“그리고 진시연 씨, 앞으로 내 남자한테서 떨어져요. 매번 남의 약혼자한테 들러붙는데 내연녀라도 되고 싶은 거예요?”진시연의 얼굴이 창백했다.“하리 씨, 아니에요. 난 그저 F대륙에서 힘든 시기를 같이 보낸 사람이라 구승훈 씨한테 고마울 뿐이에요. 하리 씨는 이 정도 일도 이해 못 해주는 건가요?”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미안한데 난
구승훈은 걸음을 멈칫하며 뒤돌아 밖을 내다보았다.밖에서는 여전히 이정숙이 진시연의 눈물을 닦아주며 화가 잔뜩 난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승훈은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그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가상의 번호로 전송된 사진은 다름 아닌 강하리와 주해찬이 방에서 포옹하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사진 한 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전화를 걸었다.“나문빈 씨, 가상 번호 위치 좀 확인해 줘요.”나문빈은 혀를 찼다.“둘이 날 노예처럼 부려 먹기로 작정한 겁니까?”얼마 전 임명우와의 계약 때문에 화가 난 강하리는 그를 남미로 발령 보내 시장 개척에 앞장서도록 했고 며칠 동안 그는 바빠서 피를 토할 지경인데 이젠 구승훈까지 못살게 굴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내 아내를 화나게 했습니까?”나문빈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임명우가 특별히 강하리와 만나야한다는 조건을 걸었으니 분명 딴마음이 있다는 건데 이걸 구승훈이 알게 되면 그에게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흠, 그 번호 보내요. 이런 작은 일은 구 대표님께서 직접 연락할 필요 없이 앞으로 비서 통해서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그렇게 말한 뒤 나문빈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나문빈과의 통화를 마친 뒤 고개를 들어 진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마침 고개를 돌린 진시연의 두 눈엔 억울함이 가득 차 있었고 구승훈의 눈빛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진시연이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얼굴에 남아있던 서글픈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누구나 소유욕이 있다.특히 구승훈 같은 남자는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껴안고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지금은 드러내지 않더라도 이 일은 그의 마음속 가시로 박히게 될 것이고 진시연은 이 가시가 뿌리를 내리고 썩기만을 기다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씨 가문 생일 잔치에서 벌어진 소동은 B시 전역에 퍼졌다.심씨 가문 사람들도 자연
“그동안 누가 임희주를 지원했는지 조사해 봐.”준봉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그러나 사무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구승훈이 다시 한마디 했다.“임희주와 여초연 씨의 관계를 확인해 줘.”...결혼식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심문석은 병원에 며칠 입원했다가 퇴원했고 결혼식의 모든 과정과 세부 사항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다.강하리는 처음에는 노인의 건강이 걱정되었지만 심문석이 바빠지자 오히려 더 건강해 보였고 그녀는 그가 바쁘게 지내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이 시기 구승훈은 유난히 바빠 보였다.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고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피곤함을 숨기지 못했지만 강하리는 그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시곗바늘은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강하리는 옆에 빈 침대에 잠시 눈을 두고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방에서 우유 한 잔을 데웠다.서재의 불빛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강하리는 서재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문을 열고 들어간 강하리는 우유를 책상 위에 놓았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휴대폰 화면을 끄고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나에게 주는 거야?”구승훈이 그렇게 물었을 때 강하리는 그를 꾸짖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그냥 ‘응’하고 대답한 후 그의 옆에 앉았다.“내가 도와줄 일이 있어?”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도와줄 거야?”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 부하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러 온 거야.”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이제는 에비뉴와 정안 모두 강 부장이 최대 주주라서 그런 것들이 다 중요하겠지.”강하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의자 하나를 가져다 앉아 책상 위의 서류를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그녀는 금세 서류에 몰입했고 구승훈은 그녀 옆에 앉아 있는데도 자꾸만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서재의 불빛은 따뜻하지 않았지만 강하리가 앉자 공간 곳곳이
차 안은 숨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구승훈은 팔꿈치를 팔걸이에 올린 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준봉은 그가 곧 움직일 거라 예상했다.심지어 M국으로 떠날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30분이 흘러도 구승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준봉이 막 입을 떼려던 순간 구승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노진우에게 사람을 데리고 곧장 그 장소로 가라고 해. 그가 출발하면 구승재에게 연락해 조용히 그쪽으로 가게 해. 노진우가 움직이는 순간 구승재는 바깥을 봉쇄하도록 해.”준봉은 잠시 말을 잃었다.“대표님, 혹시 함정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몸을 기댄 구승훈은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그는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다.여초연은 복수를 위해서라면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그가 아는 여초연이라면 일부러 그를 또 다른 함정으로 유인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쉽게 자신의 흔적을 드러낼 리 없었다.그때 노연정을 납치했던 일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이 몇 년 간 여초연은 분명 자신의 세력을 키워왔을 것이다.그는 여초연을 항상 감시할 사람을 배치해 두었지만 그녀가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여초연은 별다른 은폐 없이 M국으로 갔고 유일하게 예상하지 못한 점은 나문빈이 너무 빨리 그녀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사실이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가장 큰 손실은 단지 노연정을 곁에 두는 시간이 짧았고 그 사이 구승훈과 강하리는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그녀가 계획한 대로 그 약물이 그의 몸에 투여되었다.여초연의 계획은 모든 것이 치밀하게 짜여 있었고 그랬다면 지금 이 순간 구승훈과 강하리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여초연이 이렇게 허술한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다.게다가...구동근이 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구승훈은 구동근과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지만 여초연보다는 그를 조금 더 신뢰하는 편이었다.한편 M국에서 여초연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집사에게서 휴대폰을 건네
손연지는 강하리와 천아름의 손을 잡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이런 사람들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진짜 역겹다니까요.”천아름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손연지를 따라가며 뒤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던졌다.“여씨 가문의 두 분 내 가게에서 당장 꺼져요.”여명희는 순간 얼어붙었다.“천아름 씨, 미쳤어요? 이런 천한 년 하나 때문에 우리를 쫓아내겠다고요?”천아름은 걸음을 멈추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쫓아내는 게 아니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거죠.”그러고는 매장 직원을 향해 손짓하며 덧붙였다.“앞으로 이 두 사람 내 모든 매장 출입 금지야. 알아들었지?”그러자 강하리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두 분은 심 씨 가문 명의로 된 모든 장소에 출입할 수 없어요.”그렇게 단호하게 선언한 후 더 이상 그녀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손연지와 함께 매장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온 뒤 손연지는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통유리 창에 몸을 기댄 채 안쪽을 몰래 들여다봤다.“하하. 저렇게 분노에 차서 발악하는 꼴을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요.”그러더니 갑자기 강하리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하리야, 정말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이 울분을 풀지도 못했을 거야. 너 모를 거야 그때 직장에서 쫓겨났을 때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이쁜이 정말 고마워...”그러자 천아름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말을 끊었다.“저기...나한테는 고맙다는 말 없어요?”손연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고마워요!”천아름은 손연지에게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웃었다.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래요? 결혼할래요? 내가 말인데 나랑 같이 지내면 앞으로 주얼리랑 옷은 내가 다 사줄게요.”“콜!”옆에서 듣고 있던 강하리는 입을 삐죽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손연지의 해맑은 웃음을 보자 결국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천아름 씨, 고마워요.”강하리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천아름은 손을 휘휘 저으며 시큰둥하게 답했다.“우리 사이에 무슨 고맙다는 말을 해요? 진짜로 고맙다면 당신 남편
여명주가 반박하려는 순간 강하리 뒤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 작업실의 주인인 천아름이었다.천아름은 짙은 눈동자와 붉은 입술 크고 우아한 웨이브 헤어 거기에 하이힐까지 착용하고 있었다.강하리 옆에 멈춰 선 천아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 오랜만이에요.”강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사실 두 사람이 마주한 건 단 한 번뿐이었다.그때 경매장에서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에비뉴를 인수하고 나서야 강하리는 그 두 개의 약혼반지가 사실 천아름의 작품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에비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을 뿐이었다.천아름은 조용히 강하리의 손목을 바라보다가 반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여전히 마음에 드세요?”강하리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감사합니다.”천아름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려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반지가 예쁜 게 아니라 사실은 당신의 손이 예쁜 거예요. 구승훈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그 순간 손연지가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구승훈 씨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예요. 아니면 어떻게 하리를 사로잡을 수 있었겠어요?”천아름은 손연지를 향해 윙크하며 장난스레 말했다.“역시 미녀끼리는 생각도 비슷하네요.”셋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여명주는 그들 사이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채 서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이건 대놓고 날 무시하는 거잖아.’“천아름 씨, 이게 무슨 뜻이죠?”천아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아직도 못 알아들었어요? 여명주 씨 B시에서는 당신네 가문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정말 그렇게 대단하다면 노민우 씨를 붙잡아다 가문 재정을 끊고 강제로 결혼이라도 시키시지 그러세요? 그런데 왜...”천아름은 옆에 있던 손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쁜 아가씨,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소연지입니다.”“아. 맞아요. 소연지
강하리는 안에서 밖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구승훈은 그 모습을 보며 저절로 입꼬리를 올렸다.“떠나기 아쉽네.”그가 나지막이 말했다.노민준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지만 구승훈이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정 안 되겠으면 강하리 씨에게 솔직하게 말해. 그러면 강하리 씨도 기꺼이 너와 함께 돌아갈 거야. 그리고 계속 숨기기만 하면 강하리 씨도 불편할 거잖아?”구승훈은 잠시 침묵한 뒤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그는 작업실 안에서 웃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았다.노민준은 더 할 말이 없었고 그때 서야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승훈, 손연지 씨 지금 어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궁금해?”노민우는 급히 두 번 응답했다.“그러면 직접 와서 보면 되잖아?”“손연지 씨는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구승훈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그때 내가 나가라고 했을 때는 왜 안 나갔어?”노민우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그것도 그렇네.”구승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준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희주를 철저히 조사해 줘.]강하리는 마침내 손연지에게 어울리는 주얼리를 골랐다.손연지는 몸에 맞춰보며 환하게 웃었지만 강하리는 그 웃음이 예전처럼 맑고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꼈다.감정의 상처는 결국 스스로 치유해야 했고 강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연지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주얼리를 고른 뒤 강하리는 손연지와 함께 의류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곧 결혼식인데 다른 건 안 고를 거야?”손연지가 물었다.강하리는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구승훈이 몇 벌 주문해 놨고 또 에비뉴에서 우리 결혼식에 맞는 주얼리 세트를 준비해 줬어.”손연지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놈의 자본주의.”강하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두 사람은 웃으며 의류
구승훈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왜 갑자기 왔어?”강하리는 구승훈을 째려보며 말했다.“안 오면 당신이 예쁜 여자랑 데이트하는 거 못 볼 거 아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질투나?”“아니.”그렇다고 말은 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에는 질투의 냄새를 숨길 수 없었다.그녀는 실제로 구승훈과 임희주 사이에 아무 일이 있을 거로 의심하지는 않았다.그저... 다른 여자가 어떤 면에서 그녀의 남편을 더 잘 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잡고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에 남은 자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어쩌지? 오늘 밤 당신이 나를 침대에 묶어 두는 건 어때? 복수의 기회를 줄게.”강하리는 질색을 하며 손을 빼냈다.“염치를 좀 챙겨.”구승훈은 웃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휴대폰이 옷 속에서 가볍게 진동했지만 그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그저 눈빛이 깊어졌다.마침내 강하리는 차를 개인 작업실 앞에 세웠고 구승훈이 주문한 주얼리를 오늘 착용해 보려고 했다.마침 이틀 후 손연지의 생일이었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휴식 중인 틈을 타 그녀를 불러냈다.강하리가 차에서 내리자 손연지는 작업실의 큰 창문 앞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녀는 강하리를 보고서야 마치 살아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손연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손연지 씨, 이렇게 한가해요?”손연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강하리를 따라 들어가자 직원이 다가왔다.“구승훈 씨, 주문하신 주얼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구승훈은 대답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고 그는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나서 직원에게 말했다.“주얼리는 내 아내에게 전달하세요.”그러고는 강하리를 향해 말했다.“전화 받고 올게. 주얼리 먼저 착용해 보고 안 맞으면 다시 수정해 달라고 하면 돼.”강하리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흘끗 보았는데 화면에 나타난 이름은 노민준이었다.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손
‘심리 의사들은 원래 이렇게 강한 심장을 가진 걸까 아니면 이 임 선생이 유독 뻔뻔한 걸까? 만약 이 사람이 노민준 씨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대표님은 진작 화를 냈을지도 몰라.’하지만 임희주는 분위기를 살피고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바로 다른 치료 방안을 구승훈에게 설명했다.“간단히 말하면 이전 치료 방안은 증상을 억제하는 방식이었어요. 예를 들어 노민준 씨가 처방한 약들도 증상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죠. 하지만 이런 억제는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해 약효가 떨어지면 증상이 더 심해질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억제보다는 근본적인 해소를 목표로 하는 방향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약효를 완전히 끌어낸 뒤 점차 증상을 약화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물론 한 번에 모든 약효를 없애는 건 아니고 몸과 신경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이 방법은 다소 위험할 수도 있어요. 구승훈 씨가 신중히 고민한 후 결정하시면 좋겠습니다.”임희주가 말을 마치자 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준봉이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이 방법을 선택하면 어떤 위험이 따를까요?”임희주는 커피를 천천히 저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약효를 모두 끌어낼 경우 증상이 얼마나 심각해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요. 그렇기에 위험이 따를 가능성이 큽니다.”준봉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반면 구승훈은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구승훈이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방안을 만든 사람이 누구죠? 노민준인가요?”임희주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제가 만든 방안이지만 노민준 씨와도 논의했습니다. 그는 이 방법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어요.”구승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생각해 보겠습니다.”임희주는 한 발짝 다가서며 덧붙였다.“빠른 답변 부탁드려요.”구승훈은 대답 없이 조용히 카페
구동근은 방에서 밤새 소란을 피운 끝에 다음 날 아침 병원으로 실려 갔다.그는 병원에 가면 좀 나아질 줄 알았지만 도착한 후에도 구승훈의 철저한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휴대폰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그가 난동을 부린 탓에 병실은 엉망이었지만 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직도 부수고 있네요? 그럼 내가 잠깐 밖에서 기다렸다 들어올까요?”구동근은 화가 나서 거의 기절할 뻔했다.“이미 말했잖아. 여초연 씨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구승훈은 대꾸하지 않은 채 보온병에서 밥을 퍼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건가요?”구동근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확실히 몰라. 여초연 씨가 떠날 때 난 보내주기로 약속했고 그 이후로 여초연 씨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어. 물론 나중에 행방을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얻은 단서는 거의 없었고 여초연 씨는 아마도 M국에 있을 거야. 그 팔찌는 어제 아침 하인이 집 앞에서 발견한 거야. 안에는 쪽지가 한 장 들어 있었고 여초연 씨의 필체로 ‘너희 부인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라고 적혀 있었어.”말을 마친 구동근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여초연 씨가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결국 내가 여초연 씨에게 휘둘리고 있었더라고. 만약 그때 여초연 씨가 너에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넌 여전히 나를 미워하고 있었을까?”구동근은 말을 마친 뒤 묵묵히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때 너희가 여초연 씨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여초연 씨가 나에게 그렇게 했을까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구동근을 내려다보았다.“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죠. 결국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구승훈은 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밖으로 나온 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 속에는 조롱이 가득했다.그가 조롱하는 대상이 다른 사
강하리는 구승훈이 그 팔찌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아마 그 감정 속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을 것이다.이 시점에서 여초연이 팔찌를 보내는 것은 분명 도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구승훈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느꼈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내가 안아줄까?”구승훈은 억지로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그럼 강 부장님은 어떻게 나를 위로할 생각이에요?”강하리의 눈에 미소가 번졌다.“키스해 주고 안아주고 오빠라고 불러주면서 달래주면 되지 않을까?”구승훈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고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그는 빗속을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그때 그는 매우 슬펐고 심지어… 죽고 싶다고 느꼈다.구승훈이 강가에 서서 몸을 던지려는 순간 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구승훈 오빠.”그가 돌아보자 한 어린 소녀가 비를 맞으며 구승훈에게 달려와 작은 분홍색 우산을 그의 손에 건네며 말했다.“구승훈 오빠, 슬퍼하지 말아요.”그 말이 끝나자 그녀는 젖은 옷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어 비가 내리는 중에 힘겹게 사탕 포장을 뜯고 그에게 사탕을 건네주었다.“달콤한 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빗속에서 소녀는 반달처럼 꺾인 눈으로 웃으며 물었다.“달콤해요?”구승훈은 그때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저 그 장면이 떠오르자 가슴속에 있던 서글픈 감정이 점차 따뜻하게 변해갔다.그의 어린 시절은 아마도 온통 계산과 속임수로 가득했을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의 마음에 조금의 사랑도 주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잊힌 구석에서 어린 시절의 달콤함을 맛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그것은 구승훈의 삶에 존재한 빛과 같았고 아주 달콤했다.강하리는 구승훈이 말하지 않자 여전히 그가 마음속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그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