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야, 넌 거짓말하면 귀가 빨개지더라.”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구승훈에게 베개를 집어 던졌다.“입든지 말든지!”구승훈이 어떻게 안 입을 수가 있나.강하리가 그의 옷을 사준 지 얼마 만인가.고작 잠옷인데 24시간 내내 입고 싶은 정도였다.구승훈이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자 강하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정이에게 분유를 타서 먹이고 아이를 달래서 재웠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연정이는 이미 잠든 뒤였다.밖으로 나오자 소파에 이불 세트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지만 구승훈은 곧장 침대로 걸어가 강하리가 반항하든 말든 이불을 들춰 그대로 누운 뒤 강하리를 품에 끌어안고 뽀뽀했다.“강 대표님, 내가 이부자리 따뜻하게 해줄게.”강하리는 이런 뻔뻔함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여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해준다는 핑계를 대는 뻔뻔함에 기가 막혔다.“남들은 구 대표님이 이런 사람인 거 알까?”구승훈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이런 모습은 강 대표님만 볼 수 있지.”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큰 손이 잠옷을 들치며 들어왔다.강하리의 몸이 흠칫하며 황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구승훈!”하지만 구승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탐스럽고 부드러운 살결을 어루만졌다.“만지기만 할게. 너무 그리웠어.”강하리는 온몸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특별한 시기라 남자의 손길에 곧바로 짜릿한 감각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그녀의 몸도, 주해찬의 상황도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그런데 구승훈이 곧장 몸을 뒤집어 덮쳐오더니 그대로 거친 키스를 퍼부었다.“하고 싶지?”구승훈은 강하리를 내려다봤고 강하리는 참지 못하고 그를 발로 찼다.구승훈이 나지막이 웃었다.“몸 괜찮아지면 해줄게.”강하리는 얼굴이 화끈거렸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귓불을 깨물며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강 대표님께서 날 안마기로 써도 되는데.”강하리는 그대로 구승훈을 옆으로 밀어냈다.“계속 그럴 거면 나가!”구승훈은 그녀가 짜증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힌 채 잠시 당황하다가 겨우 대답했다.“네, 금방 갈게요.”전화를 끊자마자 강하리는 이불을 걷어 올리고 서둘러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이 그녀에게 다가갔다.“같이 가자.”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서둘러 문을 나섰고 나오자마자 다른 방에서 나오던 백아영과 마주쳤다.“할머니, 우리 병원 가는 동안 연정이 좀 봐주세요.”백아영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갔고 가는 길에 강하리는 조금 불안했다.사실 주해찬이 깨어나기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막상 깨어나자 후유증은 없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구승훈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이제 깨어났다니까 걱정하지 마. 다른 건 문제 될 게 없어.”강하리는 짧게 대꾸하면서도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사가 주해찬의 진찰을 끝낸 뒤였다.주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중환자실 밖에 모여 있었고 강하리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구승훈을 돌아봤다.구승훈은 다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젠 깨어났는데 그래도 네 곁에 있으면 안 돼?”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조금만 더 기다려.”구승훈은 혀를 차더니 곧 강하리의 턱을 잡고 입맞춤했다.“보상의 의미로 하는 키스.”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뒤돌아 중환자실 쪽으로 걸어갔다.석미란은 강하리의 붉게 물든 입술을 보자마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망할 년은 역시 어쩔 수 없나 봐. 그새를 못 참았어?”강하리는 무시하고 의사 선생님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선생님, 해찬 선배 상태는 어때요?”의사의 얼굴이 그리 밝지 않자 강하리의 마음이 다소 무거워졌다.“주해찬 씨가 깨어났고 의식도 회복했는데 다리에 감각이 없어요.”강하리의 머리가 윙윙거렸다.“무슨 말씀이세요?”의사는 필름을 들고 설명해 주었다.“아직 울혈이 뭉쳐 신경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아요.”“그럼 회복할 수는 있나요?”“말씀드리기 어렵네요.”그 말
“구승훈,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선배가 괜찮아지면 노력해 보자고. 지금 선배가 괜찮지 않은데 내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당신이랑 만날 수가 없어.”“그 자식이 네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야? 하리야, 네가 책임질 사람은 나랑 연정이야.”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한참 후에야 나지막이 말했다.“미안해.”말을 마친 후 그녀는 구승훈을 떼어내고 뒤돌아 그대로 가버렸다.혼자 남겨진 구승훈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강하리, 너 정말 이기적이야.”자기 마음 편해지자고 다른 사람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강하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이기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주해찬을 무시할 수 없는 건 사실이었다.주해찬은 중환자실에서 하루를 더 보낸 후 일반 병동으로 옮겨졌고 강하리는 심호흡을 한 뒤 병동 문을 열고 들어갔다.강하리를 본 주해찬의 눈빛이 살짝 밝아졌다.“하리야, 왔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선배, 미안해요. 나 때문에 이렇게 됐네요.”주해찬은 잠시 침묵했다.“나 때문에 네가 힘들게 됐지.”깨어나서 정양철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그는 당시의 교통사고가 정양철이 자신을 입막음하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다만 강하리가 연루될 줄은 몰랐다.이미 주씨 가문 사람들에게 모든 상황을 이야기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강하리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주해찬은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느꼈다.“엄마가 그동안 심한 말을 많이 했지?”강하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을 돌렸다.“이미 의사 선생님께 치료 부탁했으니까 괜찮아질 거예요, 선배.”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하리야, 구승훈이랑 화해했어?”그가 지금 알고 싶은 건 강하리가 구승훈과 화해했는지 여부였다.만약 화해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도 기회가 남아있지 않을까?강하리가 시선을 바닥으로 보냈다.“아뇨. 선배, 저 내일 다시 보러 올게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가 병동에서 나오자 멀지 않은 곳
구승훈은 침대 위에서 얼굴이 변해가는 주해찬을 차갑게 바라보았다.주해찬은 심호흡을 하며 침착하려 애썼다.사실 엄마가 찾아가 다그치는 모습은 상상할 수 있었다.애초부터 강하리를 미워했고 이번엔 자신이 강하리를 보호하느라 혼수상태에 빠져 식물인간이 될 뻔했다.그 태도가 얼마나 무례했을지, 강하리에게 얼마나 듣기 싫은 말을 많이 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주해찬은 다소 쓴웃음을 지었다.강하리가 내심 그에게 더 거부감을 느끼진 않을까.조금 전 구승훈과 아직 화해하지 않았다는 강하리의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내심 들떠 있던 주해찬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고개를 돌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어쨌든 이건 다 나랑 하리 사이의 일이고 구 대표님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잖아요?”구승훈의 얼굴에는 여전히 차가운 미소가 가득했다.“그럼 주해찬 씨는 그 다리로 평생 하리를 붙잡아 둘 생각인가요?”주해찬은 한참을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하리가 동의했다는 건 받아들인다는 뜻 아니겠어요?”몸이 다친 걸로 강하리의 발목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애초에 강하리를 구해줬을 때도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강하리가 다시 구승훈에게 돌아가는 건 원하지 않았다.이 남자가 강하리에게 준 게 상처 말고 또 뭐가 있을까.구승훈과 함께하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남자를 찾길 바랐다.이젠 심씨 가문 아가씨인데 어떤 남자든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을 테니까.피식 웃은 주해찬은 약간의 이기심도 있었다.그녀가 계속 자신의 곁에 머물다 보면 언젠가 자신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구승훈은 그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한 표정이었다.“주해찬 씨, 정말 이대로 하리를 곁에 둘 수 있다고 생각해요?”말을 마친 그는 똑바로 서서 주해찬을 내려다보았다.“하리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 텐데요.”남자는 말을 마친 후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갔다.주해찬은 한참 동안 그의 뒷모
“구승훈, 나한테 시간을 좀 줘.”“얼마나? 1년? 2년? 아니면 평생? 하리야, 네 마음속엔 나랑 연정이가 네 선배보다 못하다는 거야?”하지만 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기만 했고 구승훈은 피식 웃었다.“그래, 알겠어.”그는 손수건을 꺼내 강하리의 눈물을 조금씩 닦아주었다.“울지 마, 마음 아프잖아.”강하리는 멈췄던 눈물이 다시 쏟아져나왔고 구승훈은 낮은 웃음을 지었다.“하리야, 앞으로 언젠가는 네가 나를 누구보다 먼저 생각해 주면 좋겠어.”말을 마친 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고 문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강하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눈물을 흘렸다.같은 시각 반대편에 있던 진시연도 이 모든 장면을 지켜봤다.병원에서 나온 구승훈은 다소 암울한 미소를 지으며 지친 듯 차 옆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진시연이 밖으로 나오자 고개를 숙인 채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옆모습이 보였다.“구승훈 씨.”구승훈은 조금의 감정도 없는 차가운 눈빛으로 시선을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고 진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구승훈 앞에 섰다.구승훈은 무심하게 연기를 내뿜었다.“진시연 씨, 할 말 있어요?”진시연은 그와 나란히 차 옆에 기대어 섰다.“방금 봤어요. 강하리 씨랑 싸웠어요?”구승훈은 콧방귀를 뀌었다.“진시연 씨는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요? 그렇게 한가하면 머리나 검사해 보지 그래요.”말을 마친 그가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타자 진시연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굳어버렸다.구승훈이 이토록 매몰차게 말할 줄이야.“구승훈 씨, 그쪽 기분이 안 좋은데 왜 저한테 화풀이에요?”하지만 구승훈은 곧바로 시동을 걸고 차를 몰았다.자동차 배기가스를 정통으로 맞은 진시연은 화가 나서 발을 쿵쿵 굴렀다.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강하리는 안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들어보니 진시연의 목소리였다.강하리가 방으로 들어가자 진시연이 연정이와 장난치는 게 보였다.연정이는 보기 드물게 웃지도 않은 채 보행기에 앉아 있다가 강하리가 다가오
진태형의 목소리를 듣고 강하리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저 집에 있어요. 진 장관님, 결과 나왔어요?”진태형이 짧게 대꾸하며 목소리가 점차 차분해졌다.“내가 거기로 갈게.”강하리는 결과가 어떻게 나왔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대답만 했다.“알겠어요.”그녀는 심호흡하고 뒤돌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진시연은 여전히 거실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걸 보니 참을성 있게 구승훈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연정이를 안고 주방으로 향했다.“강하리 씨, 왜 또 내려왔어요?” 진시연이 뒤에서 묻자 강하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내 집에서 내가 올라가든 내려가든 진시연와 무슨 상관이죠?”진시연이 웃었다.“강하리 씨,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요?”강하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니요.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전 할머니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백아영은 강하리의 목소리를 듣고 부엌에서 걸어 나왔다.“하리야, 무슨 일이야?”강하리는 거실에 있는 진시연을 슬쩍 보았다.“진 장관님께서 오신대요.”백아영의 눈이 반짝였다.“검사 결과 나온 거야?”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어떻게 됐어?”“진 장관님께서 말씀 안 하셨어요.”백아영이 웃었다.“빙빙 돌리긴. 분명 좋은 소식일 거야.”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시연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좋은 소식일 리가 없다.뭐라고 해도 절대 그럴 리 없다.백아영은 강하리에게 몇 마디 위로를 건네고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고 강하리는 연정이와 함께 식탁에서 놀고 있었다.잠시 후 진시연도 그곳으로 들어왔다.“우리 아빠가 온대요?”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시연은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우리 아빠도 참. 초조해할 걸 알면서 전화로 말씀하지 않으시네요.”강하리는 옅은 웃음만 내뱉고 진시연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연정이와 노는 데만 집중했다.진시연이 입술을 달싹였다.“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억울한 게 있어도 말하지 않는 것 같아 진태형은 가슴이 아팠다.불만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는데 여전히 숨기는 데 익숙한 강하리였다.아버지로서 딸이 마음 편히 의지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한 거다.“하리야, 이리 와봐.”진태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강하리는 잠시 진태형을 바라보다가 연정이를 안고 걸어갔다.강하리의 품에서 연정이를 건네받은 남자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고 그는 연정이를 바라보더니 잠시 후 나지막이 말했다.“연정아, 할아버지야.”진시연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강하리도 멍한 표정으로 진태형을 바라봤다.입술이 움찔하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진 장관님.”맑고 촉촉한 목소리는 긴장으로 인해 살짝 떨리고 있었다.진태형은 상대를 품에 끌어안았다.“하리야, 내가 아빠야.”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진태형에게 안겨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나지막이 불렀다.“아빠?”이 순간만큼은 남자인 진태형도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다.그는 강하리를 꼭 껴안았다.“미안해, 하리야. 아빠가 오랫동안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강하리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경직된 손을 들어 올려 진태형을 껴안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른다.“아빠...”진태형은 서둘러 대답하며 모녀를 다시 품에 꼭 껴안았다.부엌에서 나온 백아영은 이제야 만난 부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덩달아 눈시울을 붉혔다.그렇다면 심미현은 실종 당시 이미 임신 중이었고 자신이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백아영은 심호흡을 하고 그들에게 걸어갔다.그런데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그녀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시연아, 왜 그래?”그제야 강하리와 진태형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진시연을 바라보았다.눈물을 머금고 있던 진시연의 얼굴이 지금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백아영이 부르자 그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아빠, 강하리 씨 진짜 아빠 딸이야?”진태형은 얼굴을 찡그렸다.“그래.”진시연의 입술마저 창백해졌다.아니, 이럴 리가 없다. 이래선 안 되는데.대체 뭐가 잘못됐을
강하리는 숨을 고르고 구승훈의 손을 떼어낸 뒤 대답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친자 확인 검사 어떻게 된 거야?”방금 전 아래층에서 진시연의 행동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구승훈이 웃었다.“궁금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궁금하다고 말하면 이 남자가 분명 조건을 내걸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순간 입가에 차오른 말을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구승훈은 애써 입을 열지 않으려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이런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는 건가.구승훈은 입안의 씁쓸함을 털어내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너랑 삼촌이 피를 뽑고 나서 내가 샘플을 연성으로 보냈어. 연성에서 친자 확인 검사를 했고 이곳 병원에 있는 건 두 사람 피가 아니야.”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이렇게 말했다.“고마워.”구승훈은 고맙다는 그녀의 말에 오히려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그는 눈을 내리깔고 강하리를 바라보며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난 그냥 네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강하리는 숨이 턱 막혀서 한참 후에야 말을 꺼냈다.“내려가서 연정이랑 놀고 있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가 돌아서서 문을 닫으려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들어와 그녀를 문에 밀쳤다.“구승훈, 뭐 하는 거야?”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그대로 입맞춤을 했다.강압적이면서도 애증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강하리가 몸부림쳤지만 구승훈은 더 단단히 옭아맬 뿐이었다.남녀의 힘의 차이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강하리는 화가 나서 그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지만 구승훈은 부드럽게 웃으며 더 깊게 입을 맞췄다.강하리가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때쯤 구승훈은 마침내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하며 구승훈의 잠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나 보고 연성으로 돌아가라고 했지? 갈게.”강하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구승훈이 깊은 눈빛을 보냈다.“한 달 줄게, 하리야. 한 달 안에 주해찬이 회복하면 나도 별말 하
최하영의 말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강하리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앞자리에서 운전하던 노민우가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깃 보며 가볍게 기침했다.“방금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구승훈한테 전화가 와서 하리 씨 도착했는지 묻더라고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민우는 혀를 차며 무언가 더 말하려다 강하리가 화제를 돌렸다.“최 대표님, 요즘 많이 바쁘세요?”최하영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천천히 굴리다 말고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왜요? 저랑 데이트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제가 그런 영광을 누려도 될까요?”최하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다른 사람이라면 힘들겠지만, 하리 씨라면 언제든지 가능하죠.”“좋아요.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거예요. 일 끝나면 연락할게요.”강하리는 최씨 가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천아름에게서 영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다.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는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비쳤다.“예쁘지?”배경에서 손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 예뻐.”“기분 좋아졌어?”“응.”손연지는 웃으며 덧붙였다.“그래, 행복해야 해. 쓸데없는 사람과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친구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곁에 있을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고 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때 천아름이 나직하게 말했다.“오늘 연지가 구승훈을 봤대. 병원 앞에서 그 여자랑 말다툼하고 있었대.”강하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좀 조심할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에 글쎄 구승훈이 그 여자 데리고 파티에 가고는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올랐어. 흥!”강하리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래? 둘 사이가 꽤 좋은가 보네.”“흥! 진짜 좋았다면 그 여자 욕먹게 그렇게 내버려뒀겠어? 난 구승훈이 뭔가 큰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친구야,
“말도 안 돼요.”노민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인수 건의 다음 단계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고 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듣고 있었다.“요즘 기명 제약 주식을 누군가가 계속 사들이고 있더라고요. 처음엔 하리 씨가 시킨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강하리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조사 안 해 봤어요?”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하리 씨가 한 줄 알았으니까 굳이 조사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강하리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뭔가 말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마치 질기게 달라붙는 벌레처럼 그 혐오스러운 감각이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강하리를 따라다녔다.“안 대표님도 누구 데리러 오셨습니까?”노민우가 먼저 나서며 강하리 앞으로 살짝 몸을 움직여 그녀를 가렸다.하지만 안현우의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하리 씨, 오랜만이네요. 이제 인사도 안 해줘요? 아 깜빡했네요. 이제 심씨 가문의 아가씨죠?”그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일부러 한 마디 덧붙였다.“심씨 가문의 아가씨면 뭐 해요? 결국엔 남자한테 버려진 신세가 됐는데.”그 말을 들은 노민우의 얼굴빛이 변했다.“안현우, 그만둬!”하지만 안현우는 조롱 섞인 눈빛으로 비웃으며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왜? 아직도 이 여자랑 자고 싶어?”순간, 노민우는 안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안현우는 비틀거리며 손가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맞췄지? 아니면 둘이 이미 잤나? 어땠어, 좋았어?”눈이 뒤집힌 안현우는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였다.“너 이 새끼, 미쳤어?”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뭘 그렇게 흥분해? 우리 중에 그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기나 해?”노민우가 이를 악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그냥 가요. 저딴 놈이랑 말 섞을 필요 없어요.”강하리가 급히 차 문
병원을 나오자마자, 강하리는 주차장 한편에서 오토바이에서 내린 천아름을 발견했다.천아름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강하리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괜찮아. 그런데 넌 여긴 왜 왔어?”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손연지 데리고 드라이브 가려고. 산에 올라가서 야경 보면 예쁠 것 같아서. 같이 갈래?”강하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다 웃으며 천아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니야. 나 비행기 타러 가야 돼. 먼저 갈게. 너희끼리 재밌게 놀고, 나중에 보자.”그녀가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천아름이 손목을 붙잡았다.“힘든 일 있었어?”솔직히 너무 힘들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천아름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너 돌아오면 내가 남자 소개해 줄게. 잘생긴 댕댕남이야.”바로 문을 열고 나오려던 구승훈이 발걸음을 멈췄고 천아름을 향해 분노의 눈빛을 던졌다.천아름은 그 시선을 느끼며 일부러 구승훈 옆에 선 임희주를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 이렇게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거예요?”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무슨 뜻이에요?”천아름은 입꼬리를 한쪽 올리고 강하리를 힐끔 보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봤지? 본인 얘기하는 건 아나 봐.”그녀는 장난스럽게 강하리의 턱을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됐어. 가. 돌아와서 소개팅은 꼭 해.”강하리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섰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그 후에야, 천아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천아름 씨, 남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천아름은 비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은 이렇게 여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하리는 왜 안 돼요?”그러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희주를 훑어보며 말했다.
구승훈이 목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의 뒤편에서 임희주가 다가왔다.“구 대표님 아내분도 계셨네요?”문 앞에 선 임희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하리에게 인사했다.하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구승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다 끝났어요? 끝났으면 가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대답했다.“곧 끝나니까 기다려요.”임희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멍든 복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천연덕스럽게 눌러보았다.그 순간, 구승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임희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피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러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임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임 선생님,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임희주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하리는 바로 준봉에게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님 모시고 나가 주세요.”준봉은 즉시 대답하고는 임희주에게 공손히 말했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구승훈을 한 번 노려보았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간호사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이제 진료실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옆에 놓인 소독 거즈를 집어 들고 임희주가 손을 댔던 자리부터 강하게 닦기 시작했다.그러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강하리는 몇 번 뿌리쳤지만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강하리의 눈은 벌써 붉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으며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낮게 말했다.“뭐 하자는 거지?”강하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구승훈, 지금 뭐 하자는 거야?”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고는 아무렇지
택시는 천천히 달렸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자기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다.구승훈은 확실하게 말했었다. 이제 강하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구승훈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를 잊기 위한 행동일 지도 모른다.퇴근 시간의 정체 속에서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고 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깊은숨을 들이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응급실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구승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미 떠난 걸까? 강하리는 응급실을 둘러보며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마 방금 엑스레이 찍었을 거야. 에휴, 너는 그 녀석을...”심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심준호의 맞은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심예진이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하리가 전화 끊어버렸어?”심준호는 휴대폰을 무심히 치우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를 심예진 앞으로 옮겼다.“이번에 한국에 얼마나 있을 거야?”심예진은 포크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했다.“설 지나고 갈게. 하리 일 때문에 아빠랑 할아버지가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준호는 짧게 대꾸했다.“그래. 그 사람과는 헤어져.”심예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빠, 무슨 소리야? 왜 그래?”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빠와 할아버지가 우리 결혼 재촉하는 거 알잖아. 그래서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예진은 조급한 듯 말했다.“하지만 오빠, 우리는 그냥 연기하는 거라고 했잖아. 부모님 기분 맞춰드리려고 한 거라면서.”심준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심예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결혼도 연기야. 네 사업에 영향 주지 않을 거야. 다만 네 남자 친구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헤어지는 게 좋겠어. 안 그러면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심예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가에 눈물이
강하리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표면적인 평온함은 결국 깨져 버렸고 그녀는 심준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삼촌은 알고 있죠?”심준호는 룸미러를 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승훈이가 내 사무실에 와서 유언장을 작성했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유언장을 쓰겠어?”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어찌 됐든 너에게 숨긴 거잖아. 죽어도 싸. 안 그래?”강하리는 심준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차가 JM 건물 앞에 멈추자 심준호는 강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출근해. 쓸데없는 놈 때문에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삼촌이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하지만 강하리는 바로 회사로 향하지 않았고 뒤돌아 정안 빌딩을 바라보았다.“삼촌도 구승훈이 왜 그런 건지 모르는 거예요?”심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어쨌든 나는 승훈이에겐 남이니까.”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JM 건물로 향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분명 서로 마음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는 걸까?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기명 제약 인수 건은 이미 시작되었고 강하리는 신중하게 모든 단계를 꼼꼼히 살폈다. 이것은 결국 손연지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었기에 어떠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강하리는 회의실에서 나와 안예서에게 말했다.“오늘 저녁 연성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줘.”안예서는 대답하며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그 순간, 강하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역시 심준호였다.[아, 맞다. 깜빡했네. 그 녀석, 다친 것 같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눈앞에 있는 차는 그녀에게 익숙했다.얼마 전 심준호 생일에 그녀가 직접 선물했던 차였다.심준호는 차에서 내려 석연란과 심연청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두 사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특히 심연청은 더욱 그랬다.심씨 가문 사람 중에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사촌 오빠, 심준호였다.“오빠...”심연청은 매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조금 전까지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석연란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준호야, 무슨 일로 왔어?”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 조카 데리러 왔어요.”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아, 방금 구승훈이 나를 찾아왔는데,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더라.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석연란과 심연청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들은 드디어 집안에서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결혼식 날 강하리가 혼자 남겨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던 그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구승훈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니?“준호는 참 자기 사람한테 잘해준다니까. 하지만 이 결혼을 후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승훈 당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래서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죠.”석연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심준호는 이미 강하리를 데리고 차로 향하고 있었다.“삼촌이 그랬잖아. 이런 인간들 만나면 말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그냥 바로 한 대 갈기면 되는 일을 뭐 하러 목 아프게 말다툼해?”심준호는 말하면서 강하리를 차에 태운 후, 자신도 옆자리에 올라타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석연란은 심준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엄마, 오빠 말이 진짜야? 구승훈, 후회하는 거야?”석연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말도 안 돼. 구승훈이 뭐가 아까워서 강하리 같은 여자한테 매달리겠어? 그냥 한때의 감정이지. 곧 다른 여자 찾을 거야. 두고 봐.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그녀의 눈빛이
만약 진짜로 아직 희망이 있었다면 이혼하고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다시 그녀를 되찾으면 되는 거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한참 후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여초연과의 문제는 해결책을 찾고는 있지만 해결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초연은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행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게다가,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갑작스레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그는 유언장을 쓰고 싶었다.그가 줬던 것들을 강하리는 모두 되돌려줬다. 하지만 유언장에 적힌 것이라면 돌려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심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절차에 따라 유언장을 작성해 주었다.일을 마치고 나서야 심준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네 가족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구승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삼촌.”심준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흥!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나 받아. 피 냄새가 진동하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심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하리 쪽은 내가 설득해 보겠지만, 하리 성격을 너도 알잖아. 만약 하리가 계속 이혼을 고집한다면 나도 굳이 강요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가정 법원 앞에서 강하리는 계단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에서 조용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구승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실망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