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지금은 괜한 걱정인 것 같네요. 주해찬이 깨어나면 최대한 당신네 주씨 가문과 선을 그을 것 같아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어요.”주남호는 숨이 턱 막혔고 구승훈은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를 떠났다.두 사람이 차례로 병원을 빠져나간 뒤 구승훈은 다시 평소 뻔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그는 강하리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강하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며 구승훈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빼냈다.“나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구승훈이 웃었다.“왜, 책임지기 싫어?”슬쩍 그를 흘겨본 강하리는 이런 무의미한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삼촌이랑 친자 확인 검사했어?” 구승훈도 더 이상 장난을 치지 않았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지난번에 친자확인서 건드렸던 사람 찾았어?”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강하리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진시연은 어떤 사람이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었다.“나한테 묻는 거야? 내가 어떻게 알아.”강하리가 그를 흘겨봤다.“둘이 잘 아는 사이 아니야?”피식 웃는 구승훈의 눈에 어떠한 욕망이 비치는 듯했다.“내가 잘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르는 데가 없지.”강하리는 그를 노려보고 뒤돌아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개자식, 진지할 때가 없어.’하지만 밖으로 나온 그녀의 발걸음이 또다시 멈추었다.또다시 누군가 그녀와 진태형의 친자 확인 검사에 손댈까 봐 걱정됐다.구승훈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이렇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번엔 못 건드릴 거야.”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뭔가 생각이 있는 거야?”구승훈이 웃었다. “알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아니.”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곧바로 차에 탔고 구승훈은 입꼬리를 피식 올리고는 성큼성큼 차로 가서 바로 조수석에 올라탔다.“진시연과
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는 이 여자를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치고 싶었다.강하리의 숨소리가 순간 멈추더니 이내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구승훈이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해주길 바라지 않았다.사실 강하리는 그동안 구승훈과의 관계에 대해 여러 번 고민했다.처음에는 더 이상 그와 엮이지 않기를 바랐지만 지금까지 망설이는 동안 줄곧 그와 접점을 두고 있었다.지금의 망설임과 얽힘까지.갈수록 마음이 약해지는 게 스스로 느껴졌지만 여전히 거부감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었다.연정이에게 미안한 마음과 자신이 겪었던 고통이 뒤섞였다.할머니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정말 구승훈을 놓아줄 수 있어?’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러지 못한다는 걸 잘 알았다.연정이를 구하기 위해 본인의 목숨까지 걸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강하리는 마음이 혼란스럽기만 했다.그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여전히 그를 걱정했다.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불렀다.“구승훈.”조용한 그녀의 부름에 구승훈은 부드럽게 대답했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난 안정된 삶을 원해. 줄 수 있어?”구승훈의 검은 동공 속엔 온통 그녀로 가득했고 남자는 낮은 웃음을 내뱉었다.“안정된 삶은 어떤 거야? 3년에 애 둘 낳는 거?”여전히 망설이던 강하리의 마음은 순식간에 평온해졌다.“당신이 혼자 낳아!”그녀는 바로 구승훈의 손을 쳐냈다.“저리 가!”구승훈은 웃음을 터뜨렸다. “적어도 하나는 더 낳아야 하지 않나?”강하리는 곧장 주위에 잡히는 물건을 집어 던졌다.“낳기는 개뿔!”‘개자식, 진지한 구석이 하나도 없어!’“꺼져!”구승훈은 그녀가 던진 물건을 붙잡고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운전 조심해.”강하리는 생각했다.‘너만 화나게 하지 않으면 무사히 갈 수 있어.’구승훈은 아쉬운 듯 마지못해 강하리의 차에서 내렸지만 강하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가 차에서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곧장 차를 몰고 떠났다.구승훈은 떠나는 그녀
“늘 이런 식으로 혼자 참고 살았어?”목이 멘 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죄송해요.”진태형의 목소리는 드물게 다정했다. “내려와, 아래층에서 한참 기다리고 있어.” 그 목소리가 강하리의 씁쓸한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아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네.”두 사람은 카페에 마주 앉았고 진태형의 시선이 강하리에게로 향했다.예쁘고 밝게 빛나는 강하리는 심미현보다 더 공격적이었다.그런데 방금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이 그의 마음속에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최악의 환경에서 성장하다 보니 늘 억울하게 참고 받아들여야 했다.진태형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강하리가 정말 자기 딸이라면 앞으로는 더 이상 고통받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하리야, 전에 시연이가 했던 일들 내가 대신 사과할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미소를 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진 장관님.”사과는 해도 본인이 하는 게 맞다.진태형은 고개를 저었다.“일단 내 말 들어봐. 시연이가 그동안 선 넘는 짓을 많이 한 건 내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교육에 소홀해서 그래. 내 할 일을 다하지 못해서 사과하는 거지 다른 뜻은 없어.”강하리는 입을 벙긋할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진태형이 미소를 지었다.“나는 일이 바빠서 시연이는 집에 있는 어르신들 손에서 컸어. 그래서 고집이 셀 때도 있는데 앞으로 널 존중하지 않거나 일부러 난처하게 굴면 나한테 말해도 돼. 내가 해결해 줄게.”강하리는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하지만 난 진짜 장관님 딸이 아닐지도 몰라요.”“친딸이든 아니든 똑같아.”진태형은 그렇게 대답했다.사무실로 돌아온 강하리는 다소 넋이 나가 있었다.진태형은 진시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왔다기보다는 그녀를 위로해 주러 온 것이었다.그는 그녀의 서글픈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기에 기꺼이 그녀를 감싸주려 했다.강하리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아빠가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아빠...’강하리는 심호흡하고 의자에 뒤로 기대어 앉으며 연정이에게
전화기를 쥔 강하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긍정도 부정의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묵묵히 가만히 있었다.구승훈도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전화기 양쪽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남았다.강하리가 먼저 전화를 끊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전화를 끊은 후에도 강하리의 심장은 여전히 요란하게 쿵쾅거렸다.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연정이에게 온전한 가정을 선물하는 거라고 했지만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을까.오후에 외교부와의 협력 계약을 체결하느라 안예서도 B시로 왔다.두 사람이 외교부에서 나올 때 안예서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했다.“대표님, 진 장관님을 실제로 만나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강하리가 웃었다.“앞으로 또 만날 수 있을 거야.”안예서는 너무 신이 나서 시종일관 외교부와의 협업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대표님, 그런데 진 장관님께서 대표님 쳐다보는 시선이 좀 이상하던데요?”멈칫한 강하리가 이내 웃었다.“뭐가 이상한데?”안예서는 잠시 생각했다.“우리 아빠가 나 1등 했을 때 보던 눈빛 같았어요.”강하리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그녀의 감각이 제법 정확했다.“그럼 나문빈이 너 보는 시선이 이상하다는 것도 느꼈어?”안예서는 깜짝 놀라며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요즘 나문빈이 이상하긴 했다. 출퇴근할 때마다 데려다주고 아침까지 챙겨주니 왠지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외모도, 능력도 별 볼 일 없는 자기 모습에 차마 괜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대표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강하리가 웃었다.“알았어, 헛소리 안 할게.”그녀의 감정사도 엉망인데 누굴 도와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두 사람이 웃고 떠들며 회사로 돌아오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강하리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강하리 씨!”뒤를 돌아본 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진시연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자신감 넘치고 예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진시연 씨.”강하리는 고개를 끄
서류를 쥐고 있는 강하리의 손이 살짝 조여졌다.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고 안예서와 회사 일을 논의하기 시작했다.“참, 대표님. 최근에 우리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임명우라는 사람이 있어요.”강하리의 미간이 순식간에 찡그려졌다.임명우.잊고 있었던 이름이 갑자기 또 튀어나왔다.몇 번 거절을 당한 후 임명우는 사라진 듯했고 그녀도 그 이후로는 남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그런데 그가 또 안예서를 찾아간 건가?“그 남자가 무슨 말이라도 했어?”안예서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만 보여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지금은 대답하지 말고 그냥 놔둬.”강하리는 사무실로 돌아온 후 손연지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은 손연지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세상에, 난 네가 날 잊은 줄 알았어!”강하리가 웃었다.“미안해, 그동안 너무 바빴어.”손연지가 혀를 찼다.“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왜 해. 정 미안하면 연정이 사진이나 몇 장 보내든가.”연정이 얘기가 나오자 손연지는 우울함이 밀려왔다.“하리야, 내가 그래도 연정이 양엄마인데 이렇게 크는 동안 한 번도 못 봤다는 게 말이 돼?”“며칠 뒤에 연정이 데리고 너 보러 갈게.”“그래야지. 참, 너랑 구승훈... 어떻게 됐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한 번 더 노력해 보고 싶어.”말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나 무척 한심하지?”손연지가 답했다.“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이도 있는데 헤어질 수는 없잖아. 괜한 생각하지 마. 서로 좋아하는 건 운명이지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말하는 손연지의 목소리에는 우울함이 묻어나자 강하리는 곧바로 멈칫했다.“연지야, 무슨 일 있었어? 노민우랑 어떻게 됐어?”손연지가 헛웃음을 지었다.“노민우 약혼해.”강하리는 단번에 미간을 찌푸렸다.노민우가 약혼한다고?강하리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오히려 손연지는 대수롭지 않은 어투였다.“괜찮아, 나 곧 연수 가니까 내 걱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구승훈에게 이끌려간 강하리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그러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상대가 입술을 막았다.익숙한 향기가 순식간에 그녀를 감쌌다.강하리는 힘껏 그의 어깨를 두 번이나 주먹으로 때렸지만 구승훈은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옭아매며 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강하리는 주해찬이 깨어나면 다시 노력해 보자고 했지만 구승훈은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 전에는 강하리가 원하지 않아서 그렇다 쳐도 이젠 그녀의 마음을 확실히 알았으니 더 이상 아내를 앞에 두고 가만히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불꽃이 튀듯 두 입술이 뜨겁게 맞닿았다.구승훈의 숨소리가 가빠지며 어둠이 깔린 공간에서 그의 다소 거칠게 헐떡이는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큰 손은 어느 틈엔가 옷 속을 파고들었고 마지막엔 시험하듯 그녀의 가녀린 허리로 향했다.강하리는 바짝 붙은 구승훈의 몸에 나타난 변화를 이미 감지하고 살짝 짜증이 났다.여긴 그의 회사고 퇴근하는 직원들이 수시로 지나다닐 수 있는데 이 개자식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발정이 난다.“구승훈, 이거 놔!”강하리가 다급하게 그를 밀어냈지만 구승훈이 그 순간 그녀의 목 언저리 여린 살점을 깨물었다.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고 구승훈은 낮게 웃었다.“하고 싶어?”‘하고 싶기는 무슨! 널 때리고 싶다, 이 자식아!’“아무 때나 발정 나지 마!”구승훈이 그녀의 어깨에 비비적거렸다.“자기야, 여보, 드디어 날 돌아봐 주네.”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며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밀어냈다.“누가 당신 여보야!”그녀는 잠시 멈칫했다.“아직 선배도...”“분명 깨어날 거야.”구승훈이 바로 그녀의 말을 가로채자 강하리는 그를 바라봤다.그녀는 주해찬이 깨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희망을 품어도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정말 영영 깨어나지 못하거나 당분간 의식을 찾지 못하면 나 기다리지 않아도 돼.”강하리는 여전히 고집을 부렸고 구승훈은 피식 웃음을
“걱정하지 마.”아마도 주씨 가문에서 애원하러 왔을 거다.강하리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지만 결국 구승훈의 손을 떨쳐냈다.구승훈은 텅 빈 손을 바라보며 낮은 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괜히 몰래 비밀연애를 하는 느낌이었는데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강하리가 자신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그는 비밀 연인이 되어도 만족스러웠다.구승훈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언제부터 이렇게 한심한 인간이 된 걸까.주씨 가문 사람들은 선처를 호소하러 왔고 심지어 주호준까지 자리에 있었다.석미란이 한 짓에 대해 고소하긴 했어도 결국 벌금으로 마무리될 거다.하지만 주씨 가문 체면이 달린 일인데 손자가 식물인간이 된 후 며느리가 고소당해 법정에 서는 것까지 지켜볼 수가 없었다.거실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다.심씨 가문의 세 어르신과 그 맞은편에는 주호준과 석미란, 석연란까지 있었다.심씨 가문 세 어르신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강하리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곧장 걸어갔다.“우리 집안 어르신들 힘들게 할 필요 없어요. 내 일에 대해선 이분들도 어쩌지 못하니까요. 아니면 주씨 가문과 했던 약속도 없던 일로 할 거예요. 이번 일에 대한 제 결정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이만 돌아가세요.”강하리는 말을 마친 후 뒤돌아 위층으로 올라갔다.주호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B시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꼽히던 그가 어린 후배에게 이런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석미란은 창백한 얼굴로 강하리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강하리!”그녀가 포효하듯 강하리에게 소리치자 강하리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석미란을 바라봤다.“여사님, 할 말 있으세요?”“꼭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야겠어?”강하리가 비웃었다.“제가 매정해요? 여사님에 비하면 전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요.”“너...”석미란은 분노했다.그저 어딘가에서 튀어나와 핏줄도 모르는 잡것이 아닌가.정양철의 자식이 아니면 심미현이 밖에서 놀아난 외간 남자의 씨겠지.결국은 사생아에 불과한데 자기를 무척 대단하게 여
석연란은 흠칫하며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뒤돌아보았다.“아버님, 하실 말씀 있으세요?”심문석은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승훈아, 방금 그 말 무슨 뜻이냐?”구승훈의 차가운 눈빛이 석연란을 노려보았다.“어르신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하리가 임신했을 때 사고를 당한 이유가 여사님이 문씨 가문에 알려줬기 때문이에요.”석연란이 증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구승훈을 노려보았지만 구승훈은 그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심문석의 분노는 순식간에 최고조에 달했다.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하리를 해친 사람 중에 심씨 가문 사람까지 있을 줄이야!그는 너무 화가 나서 곧바로 지팡이를 휘둘렀고 석연란이 비명을 질렀다.“아버님, 저보다 외부인인 저 사람 말을 더 믿으세요?”구승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문연진 진술서 가져올까요?”석연란은 순식간에 말을 바꾸었다.“아버님, 그때는 정말 강하리가 우리 심씨 가문 사람이 될 줄 몰랐어요.”하지만 그 한마디로 심문석의 화가 풀릴 리 없었다.심씨 가문 사람이 아니면 마음대로 죽여도 된단 말인가.문씨 가문은 애초에 좋은 사람들이 아닌데 그들에게 소식을 알렸다는 건 강하리와 아이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너, 당장 심씨 가문에서 꺼져. 이제부터 우리 심씨 가문에 너 같은 사람은 없어!”석연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정말 심씨 가문에서 쫓겨난다면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나.“아버님,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모를 사생아 때문에 절 심씨 가문에서 쫓아낸다고요? 전 심씨 가문 며느리예요!”화가 난 심문석은 단번에 그녀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어디 한 번 더 지껄여봐!”석연란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속으로 불만이 가득했다.‘강하리는 사생아가 맞잖아.’심미현이 그렇게 오래 밖을 떠돌았는데 외간 남자와 가진 아이일 수도 있지 않나!백아영은 옆에 있던 도우미를 힐끗 쳐다보았다.“손님 배웅해요. 앞으로 석씨 가문 사람들이 오면 바로 쫓아내요.”석연란이 뭐라고 더 말하려는데 도우미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
여초연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시커먼 총구가 그대로 그녀의 이마를 겨눴다.순간, 구승훈이 미소를 띠고 그녀 앞에 나타났다.차가운 바닷바람은 비릿한 바다 내음을 가득 실어 나르고 있었고 여초연의 머리카락도 바람에 휘날렸다.구승훈도 이렇게 초라한 여초연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언제나 고운 치마를 입고 마치 우아하고 오만한 백조처럼 머리를 높이 묶어 올리고 다니던 그녀였으니 말이다.구승훈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오랜만이네.”그 말들 들은 여초연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사랑하는 내 아들 승훈아, 약물에 조종당하는 기분은 어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기분은 또 어떻고? 맞다, 아직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적 없지? 걱정 마. 머지않아 내가 꼭...”구승훈이 방아쇠를 당겼다.“내 사람한테 손 대면 가만 안 둘 거야.”여초연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녀의 눈동자는 증오로 가득 찼다.“왜? 너희 구씨 가문 놈들은 마음대로 날 짓밟아도 되고 난 안 된다고? 난 당해도 싸다는 거야?”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웃었다.“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당신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정말이야. 날 이용하면서도 항상 날 괴롭혔잖아. 난 그런 취급을 당해도 된다는 거야?”여초연은 허망한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나라고 너를 낳고 싶었을까?’“해독제가 갖고 싶어? 내가 줄 것 같아?”구승훈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응. 당신은 항복하게 될 거거든.”여초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구승훈이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오기 직전에 삼촌한테 똑같은 약을 놔줬거든. 그것도 두 배 용량으로. 과연 삼촌 몸이 버텨줄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여초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말도 안 돼! 네가 어떻게 그런 짓을...”“당신은 몰랐겠지만 네 며느리이자 내 아내가 전문가들을 여러 명 붙여줬거든. 당신 손에 있는 그 약? 복제하는 데 몇 분도 안 걸렸어.”여초연은 멍하니 구승훈을 바라보았다
항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매서운 바닷바람이 몰아쳐도 항구의 활기는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조용히 항구에 발을 내디딘 여초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가자.”그녀의 뒤를 따르던 선원 복장의 남자 몇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에워쌌다.한 손으로 선글라스를 가볍게 올려 쓰고 막 걸음을 옮기려던 여초연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거의 동시에 그녀는 앞에 있던 경호원을 확 잡아당겨 자신의 방패로 삼았다.경호원은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가슴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그의 앞을 지나던 남자가 갑자기 발길을 휘둘러 그의 가슴을 세게 걷어찼다.소매 속에서 날카로운 칼날 하나가 날아오더니 여초연의 앞을 막고 선 경호원을 지나쳐 곧장 그녀의 얼굴을 향해 돌진했다.그러나 칼이 여초연에게 닿기도 전에 곁에 있던 또 다른 경호원이 순식간에 반응했다.동시에 항구에서 화물을 나르던 선원들도 모두 이쪽으로 몰려오며 항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준봉은 몇몇 경호원들에게 막혀 여초연을 눈앞에서 놓쳐야만 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둘렀다.여초연은 이 혼란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숨기며 도망쳤고 몇 명의 경호원이 그녀를 호위하며 후퇴했다.이번 귀국을 위해 미리 준비해둔 덕분에 무사했다.만약 배에 있던 사람들로 위장하지 않았더라면 여초연은 지금쯤 이미 구승훈에게 붙잡혔을 것이다.항구에는 컨테이너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여초연은 경호원들의 호위하에 비틀거리며 한 컨테이너 안으로 몸을 숨겼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자신을 끝까지 지키던 남자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쓸모없는 놈.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구승훈의 부하들은 전부 공항에 있다며?”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마디 내뱉었다.“죄송합니다,사모님.”여초연이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우리 쪽 사람들한테 연락해서 당장 날 구하러 오라고 해.”“네.”대답을 마친 경호원은 전화를 걸기 위해 급히 자리를 떴다.소란은 오래지 않아 조용히 가라앉았
준봉은 뭐라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구승훈이 먼저 입을 뗐다.“내가 준비하라고 했던 건 어떻게 됐어?”“준비 끝났습니다. 진 장관님 쪽에서도 사람을 보내놨고요. 비행기만 도착하면 됩니다.”준봉은 그렇게 말하며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대표님, 공항에 저 정도 인원만 배치해도 정말 괜찮을까요?”준봉은 원래 구승훈이 대부분의 인력을 공항에 집중시킬 거라 예상했다.M 국에서 여초연이 비행기로 귀국 중이라는 정보가 들어왔으니 말이다.하지만 의외로 구승훈은 공항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배치하지 않았다.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은 많았지만 임시로 고용된 게 대부분이었다.구승훈 쪽 사람들은 대부분 보경시 한 항구 근처에 흩어져서 배치되어 있었다....항구라서 그런지 바람은 훨씬 거셌다.구승훈은 항구 근처의 전망대에 서 있었고 속절없이 불어오는 찬 바람 때문에 그의 외투가 펄럭거리며 나부꼈다.멀리 바다 수평선 너머로 화물선 한 척이 항구로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구승훈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드디어 돌아왔구나.’한편, 화물선의 갑판 위.여초연은 숄을 두른 채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그녀는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구승훈이 여초천을 데려간 이후로 그녀의 모든 계획은 철저히 엉망이 됐다.여초천은 항상 자기 손바닥 안에 있다고 생각해 오던 그녀였으니 말이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손아귀에서 벗어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여초천이 고문당한 사진들을 떠올린 여초연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을 괴롭히는 것으로 원한이 조금이나마 해소된다면 기어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데다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여초천의 모습이 상상되자 그 분노와 원한은 두 배로 커져 버렸다.여초연의 목적은 단순히 구승훈을 괴롭히는 게 아니었다.구승훈으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만들고 자기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존재로 만들려 했다. 그러면 구씨 가문의 모든 자산을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하리 얼굴에 약간 어색함이 스쳤다. 하지만 백아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들어와 그녀의 옷을 갈아입혀 주며 넌지시 말할 뿐이었다.“너희 할아버지 말이야. 이렇게 즐거워하신 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역시 저 양반을 웃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시욱이 뿐인가봐.”강하리는 자연스럽게 백아영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할머니, 전 에비뉴 주얼리와 JM 그룹을 잘 운영하고 싶어요. 그리고 연정이도 잘 키우고 싶고요.”고요한 방 안이라서 그런지 강하리의 목소리는 유난히 담담하게 들렸다.창밖에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봤을 때, 마음 한편이 여전히 아파져 오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그에게 어떤 이유가 있었든,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강하리는 그때와 같은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아래층 거실은 여전히 왁자지껄했고 설날이 다가오며 곳곳에 명절 분위기가 감돌았다.심씨 가문은 정말 오랜만에 모두 함께 모여서 화목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한편, 심준호는 팔짱을 끼고 별장 밖에 서서 그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난 네가 다시는 안 올 줄 알았어.”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담배를 피울 뿐이었다.그때 심준호가 갑자기 다가와 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너 대체 뭐 하는 짓이야?”그동안 심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화를 꾹꾹 참고 있었다.구승훈을 믿고 강하리를 맡겼는데 돌아온 건 이런 결과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는 지금까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라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심준호도 그를 감싸주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은 그저 가만히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난 하리가 갑자기 뛰어내릴 줄 몰랐어.”그는 원래 조금만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노진우가 여초천을 손에 넣기만 하면 임희주가 죽든 말든 그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만약 노진우가 실패한다면
진태형은 병원에서 강하리 곁을 밤새 지켰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마자 그는 꽃다발을 안은 채 이쪽으로 걸어오는 임명우와 마주치게 되었다.임명우는 진태형을 보고 살짝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었다.“진 장관님, 오랜만입니다.”진태형은 눈빛을 가라앉힌 채 임명우를 바라봤다.“하리를 보러 온 건가요?”임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강 대표님과는 업무적으로 조금 얽힌 부분이 있어서요. 입원하셨다는 말 듣고 병문안 왔습니다.”진태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렇군요. 하지만 임 대표님, 하리한테 마음을 두진 마셨으면 좋겠어요.”임명우는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진 장관님, 너무 깊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랑 강 대표님은 정말 업무적인 관계예요. 그리고 시연 씨랑도 몇 년 전에 헤어졌고요. 제가 정말 강 대표님을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잖아요?”진태형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하리한테 마음 두지 마세요. 충고가 아니라 경고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하리한테 손을 대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미소를 짓고 있던 임명우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누구든 진태형 앞에서는 결국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장관님.”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임명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시연 씨 말이 맞았어요. 진 장관님은 시연 씨한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거 말이에요. 당신은 강하리 씨랑 비교도 안 되는 존재라는 거죠. 그러니까 저도 이제 시연 씨 따위 필요 없어요.]문자를 보낸 그는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M 국에 있는 진시연은 그 문자를 보자마자 분노에 휩싸여 핸드폰을 그대로 던져버렸다.구승훈과 강하리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당장 귀국하려 했었다. 하지만 떠나기 직전에 여초연이 그녀의 길을 막았다.하지만 진시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임명우의 문자를 받고 당황한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
요양원 주차장.심준호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진태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저도 잘못이 있어요... 계속 하리가 구승훈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까지 바보 같을 줄은 몰랐어요...”진태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우리 딸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심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다시 입을 뗐다.“요즘은 조시욱이 꽤 신경 써주더라고요.”진태형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 옛날 자신이 어떤 희망도 없이 심미현과의 약혼을 지키며 버텼던 것처럼, 강하리도 그렇게 쉽게 마음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만큼은 절대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오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진태형이 병실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구연정을 안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구연정은 강하리의 이마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후하고 불었다.“엄마, 아프지마...”강하리는 살며시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엄마 안 아파, 우리 연정이 걱정하지 마.”구연정은 백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할머니 울었어.”강하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할머니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백아영은 단호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연정이는 어쩔 뻔했니?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강하리는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백아영은 한숨을 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구연정이 환히 웃으며 진태형에게 달려갔다.진태형은 아이를 안고 병실을 둘러보다, 딸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가가 붉어졌다.“아빠, 나 괜찮아요.”“이게 괜찮은 거
손연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마침 행사 중이더라고. 쿠팡 연말 세일에서 로열 프리미엄 네덜란드 분유 있거든? 영양 흡수도 잘 되고 우리 소아과 아기들도 다 그거 먹어.”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손연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쳐다봤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병원 응급실에서는 생체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급히 달려온 구승재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핸드폰 화면엔 강하리의 연락처가 떠 있었지만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 매번 손이 닿았다가도 다시 멈췄다.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준봉과 노진우도 속만 태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그제야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왔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이 다시 의식을 찾은 건 해 질 무렵이었고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그는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강하리에겐... 알리지 마.”구승재는 목이 막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어. 형수한테는 말 안 할게.”그제야 구승훈은 안도한 듯 눈을 감았지만 구승재는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눈가가 뜨거워졌다.‘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병원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병원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를 아는 터라, 강하리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빠져야만 했다.그날 밤, 노민준이 직접 차를 몰고 구승훈을 요양원으로 데려갔다.“네가 또 도망치면... 그땐 나도 강하리한테 전부 말할 수밖에 없어.”구승훈은 창밖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안 그럴 거야.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됐어.”노민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그 한마디에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푹 쉬어.”병실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구승훈의 머릿속엔 강하리가 조시욱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
청소 아주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강 대표님, 아까 구 대표님이랑 병실 안에 계시던 남자분이랑 여기서 싸웠어요. 아마... 그중 누가 코피를 흘린 것 같더라고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에게 병실 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조용히 말했다.병실 안에 들어서자, 조시욱이 전화를 받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통화를 마쳤다.“오늘 일은, 미안해.”그는 웃으며 말하다가 다시 강하리에게 다가가 침대로 옮겨주려 했지만 강하리가 재빨리 손을 들어 막았다.“잠시 후에 또 검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이대로 있을게요.”“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다 줄까?”그 말에 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조시욱 씨. 선배가 뭐라고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누굴 다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안 돼 있고요. 그러니까 굳이 매일 오시거나 이렇게 곁에 계실 필요 없어요.”조시욱은 사실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처음 만난 그날 밤부터 이미 느꼈다.하지만 그날,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그녀를 두 눈으로 본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각오로 그렇게 뛰어내렸는지 그게 궁금해졌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알고 싶어졌다.설령 그게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이라 해도,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내가 좀 성급했으면 미안. 진짜로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선배 부탁이라서 온 것도 맞지만... 난 그냥, 친구로서 너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어릴 때부터 정 회장님이랑 우리 할아버지 사이도 꽤 각별하셨잖아. 집안끼리도 인연이 깊고.”조시욱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지금은, 네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게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과거 놓고 새로운 시작도 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아?”잠시 정적이 흘렀고 강하리는 조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