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무슨 일 있어?”피식 웃는 구승훈의 눈가에 서늘함이 밀려왔다.“그냥 헛소리일 뿐이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내 출생에 관한 거야?”구승훈은 어두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신경 쓰지 마.”강하리는 심호흡했다.“난 괜찮아.”정양철에 관해서 줄곧 마음이 불편했지만 뭐가 됐든 그녀가 바꿀 수 없는 일이었다.자신이 정말 정양철의 딸이라도 자신의 운명에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손에서 벗어난 강하리는 나지막이 말을 전했다.“고마워.”이젠 다 상관없지만 조금 전 곁에 있어 준다는 구승훈의 한 마디에 마음속에서 작은 파문이 일었다.구승훈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우면 오늘 밤에 네 방에서 자게 해주던지.”강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구승훈, 정신 차려!”이제 막 선을 긋겠다고 했는데 이 개자식은 뻔뻔하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구승훈의 눈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이젠 선 못 그어. 석미란이 아까 내가 널 안고 있는 걸 봤잖아. 또 약속해도 이젠 널 안 믿을걸. 그리고...”강하리의 출생 때문에 석미란이 어떻게든 강하리와 선을 그으려 들지도 몰랐다.구승훈이 뒷말을 뱉지는 않았지만 강하리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어.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중환자실을 향해 걸어갔다.구승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가 곧바로 뒤를 따랐다.중환자실 앞에서 석미란은 누군가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강하리를 본 일행은 순식간에 대화를 멈췄지만 강하리는 이상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심호흡한 뒤 마음속으로 신경 쓰지 말자고 몇 번이나 되뇌고 나서야 그쪽으로 계속 걸어갔다.그녀를 보고 차갑게 웃는 석미란의 미소 속엔 조롱이 담겨 있었다.“나쁜 년은 영원히
“그런 식으로 함부로 모함했다가 아니면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리면서 사과라도 하실 건가요?”구승훈이 그럴듯하게 말하자 석미란은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채 노려보기만 하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병원에 소문 다 퍼졌는데 가짜일 수가 있어?”구승훈의 눈에는 조롱이 가득했다.“전에 병원에 주해찬이 죽을 거라는 소문도 돌던데요.”석미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구승훈 너...”구승훈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제가 의사를 불러온 이유는 하리가 주해찬 때문에 계속 죄책감에 시달리는 게 싫어서였어요. 하지만 여사님이 이런 태도라면 언제든 그 의사를 돌려보낼 수 있어요.”석미란은 깜짝 놀랐다.“그게 무슨 말이야? 저 의사 네가 부른 거야?”구승훈은 차갑게 비웃었다.“그러면 여사님은 누가 데려왔다고 생각하시는데요?”석미란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하게 변했다.그녀는 진시연이 데려온 줄 알았다.석미란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본 구승훈도 그녀와 말을 섞기 싫었다.하지만 잠시 후 뒤돌아 가면서 석미란에게 이렇게 말했다.“참, 앞으로 하리 건드리지 마세요. 그쪽 아들에겐 하리가 과분하니까.”석미란은 피를 토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조금 전 구승훈의 협박에 이젠 대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런 세계 최고의 의사는 환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구승훈이 그를 데려왔어도 주씨 가문에겐 그럴 능력이 없었다.하지만 이대로 넘어가기엔 내키지 않아 석미란은 구승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휴대전화를 꺼내 재벌가 사모님들로 가득 찬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병원에서 나올 땐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강하리는 문 앞 계단에 서서 구승훈에게 또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구승훈은 피식 웃었다.“저녁에 네 방에서 잘 거야.”그렇게 말한 뒤 그는 곧장 돌아서서 차에 탔다.강하리가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구승훈, 가기만 해!”하지만 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강하리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다가 결국 짜증
강하리가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멀지 않은 테이블에서 갑자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백아영은 연정이를 안은 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심금천 역시 보기 드문 미소를 짓고 있었다.강하리는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이 화기애애한 장면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입술을 다물었다.그녀는 심호흡하고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누가 보면 정안그룹이 망한 줄 알겠어.”말하던 그녀가 갑자기 경직된 표정을 짓더니 곧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이제야 정안그룹 이름의 뜻을 알아차렸다.구승훈은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정안그룹과 에비뉴, 내 평생의 모든 건 전부 너희 두 사람 거야.”강하리는 목에 무언가 막힌 듯 괴로웠고 호흡마저 흐트러졌다.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불타오르는 것 같은 그의 눈동자를 외면했다.가만히 숨을 들이마시며 강하리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연정이 보낼 때 상황이 좋지 않았지?”구승훈은 침묵하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짧게 대꾸했다.연정이를 보낼 때 좋지 않은 상황이었던 건 맞다.특히 처음 한 달 동안 노진우는 거의 발도 떼지 못하고 아이 곁을 지켰다.노민준에게 보내지지 않았다면 연정이는 정말 버티지 못했을지도 몰랐다.고개를 돌려 저쪽에 활기차고 건강한 연정이를 바라보던 강하리의 코끝이 찡해졌고 이윽고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고마워.”구승훈은 두 눈에 미소를 머금었다.“정말 고마워?”강하리는 그가 원하던 바를 떠올리자 순식간에 마음속에 있던 감동이 사라졌다.“안 고마워.”그녀는 한 마디만 남기고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구승훈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그 뒤를 바짝 따라갔다.백아영과 심금천은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젊은 사람들 감정사에 개입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뭐가 됐든 강하리에게 행복한 가정이 생기길 바랐다.어젯밤 두 사람 사이에 큰 벽이 생겼다는 걸 모두가 안다.밤새 뒤척이느라 잠도 못 잔
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할머니, 저 배 안 고파요.”백아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배가 안 고픈 거야, 아니면 승훈이가 만든 거라서 싫은 거야?”강하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솔직히 마음이 약해질까 봐 두려웠다.도저히 구승훈 앞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으니까.“할머니, 그 사람하고 저는...”백아영은 웃으며 그녀를 토닥였다.“네가 뭘 걱정하는지, 전에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 알아. 할머니도 마음이 아파. 하지만 하리야, 정말 걔를 놓을 수 있어? 만약 할머니가 맞선 상대를 주선해 주면 만날 생각은 있어?”말문이 막힌 강하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이성과의 만남에서 강하리는 대충이 없었다.그게 아니었다면 구승훈과 이처럼 오랫동안 엮이지도 않았겠지.과거 충동적으로 주해찬의 마음을 받아준 것도 지금까지 마음의 빚으로 남았다.“할머니, 심씨 가문에서 저 하나 못 먹여 살리는 것도 아니잖아요.”강하리가 백아영의 어깨에 기대었다.“그래도 네가 계속 이렇게 살길 바라는 사람은 없어. 애 생각도 해야지. 주씨 가문 쪽에서 깨어날 희망이 보인다고 했다며?”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그러면 선배가 깨어나고 다시 얘기해요.”백아영은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주해찬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이겠지. 그녀도 뭐라 할 수 없었다.백아영이 나간 후 강하리는 연정이를 달래서 재웠다.연정이가 막 잠이 들었을 때 강하리는 발코니에서 인기척을 들었다.순간 놀라서 그쪽으로 가보니 구승훈이 어느새 발코니로 뛰어내린 뒤였다.“당신 미쳤어?” 강하리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긴 3층이다!구승훈은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연정이 구하러 갔을 땐 38층에서도 뛰었어.”강하리는 깜짝 놀라 손끝이 떨렸다.연정이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그런 상황은 도저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38층에서 어떻게 감히?“구승훈!”강하리는 억눌린 목소리로 그를 향해 소리쳤다.“당신 진짜 미쳤어?”목소리를 억누르고 있었지만
구승훈은 강하리가 밀어내지 않는 것을 보고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강하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금 전에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것을 문득 후회했다.이제 다시 그를 쫓아내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는 이미 닫힌 욕실 문을 바라보다가 결국 타협을 했다.그리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묻고 싶기도 했다.침실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고 강하리는 잠깐 바라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그런데 그녀가 침대로 돌아가기도 전에 욕실 문이 열리며 구승훈이 타월을 허리에 감은 채 상반신을 드러내놓고 있었다.머리엔 여전히 물이 뚝뚝 흘렀고 그가 큰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강하리와 눈을 맞췄다.“나 멋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가 고개를 돌리며 구승훈에게 담요를 던졌다.“써.”하지만 구승훈은 받지 않았다.“네가 둘러줘.”강하리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이 남자의 뻔뻔함에 더욱 후회했다.그녀는 씩씩거리며 담요를 그의 몸에 홱 던졌고 구승훈은 웃으며 담요를 몸에 둘렀다. 더는 차마 장난을 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힘들게 하룻밤 머물게 됐는데 정말로 화나게 하면 당장 쫓겨날지도 몰랐다.강하리는 이불을 소파에 던졌다.“당신은 소파에서 자.”구승훈도 그녀가 침대를 내주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다.다만 소파에 누워 침대에 있는 실루엣을 바라보며 그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깨달았다.조금 전까지 자신을 걱정하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며 구승훈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강하리의 몸은 굳어졌고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그냥 안고만 있을게.”목 언저리에 따뜻한 입김이 닿자 강하리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다른 짓하면 죽어.”구승훈이 웃었다.“응, 알아. 강 대표님 진짜 무섭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방은 조용해졌다.침대에 두 사람이 누워있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구승훈.”강하리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무슨 일 있어? 아니
“하리 출생의 비밀이 B시 상류층에 퍼졌어.”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눈가에 서늘한 냉기가 번뜩이더니 곧 콧방귀를 뀌었다.“석미란이야?”짧게 대꾸한 심준호도 피식 웃었다.심씨 가문에서는 주해찬이 강하리를 구해준 걸 생각해 주씨 가문이 찾아와 억지를 부려도, 심지어 백아영의 생일 파티에서 큰 난리를 부렸어도 그냥 넘어갔다.그런데 점점 도를 넘는 주씨 가문의 행동에 도저히 옛정으로 봐줄 수가 없었다.하지만 구승훈은 다른 생각을 했다.“내가 궁금한 건 그 소식을 어떻게 알았냐는 거야. 그 사진도 어쩌다 그 여자 손에 들어간 걸까?”심준호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날이 밝으면 병원 카메라 돌려봐.”구승훈은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막 전화를 끊자마자 심준호가 메시지를 보냈는데 타지역으로 보낸 샘플 검사 결과였다.강하리는 정양철의 딸이 아니었다.구승훈의 시선이 번뜩이며 눈빛의 냉기가 더욱 짙어졌다.강하리가 침대에서 일어나 보니 구승훈이 담배를 피우며 발코니에 서 있었다.“무슨 일 있어?”구승훈은 눈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준호가 친자확인 검사 결과를 보냈는데 넌 정양철이랑 아무 상관 없어.”강하리가 두 눈을 반짝였다.“정말이야?”구승훈이 휴대폰을 건넸다.“내가 거짓말하겠어?”“그러면 전에 검사했던 건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손을 쓴 건가?”구승훈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누군가 네가 삼촌의 딸이 되길 바라지 않는 거겠지.”강하리는 침묵했다.사실 정양철의 딸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 대충 짐작은 했지만 결국엔 증거가 없는 추측뿐이었다.구승훈이 그녀를 품에 끌어당겼다.“괜한 생각 마. 언제든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강하리가 그를 바라보았다.“고마워.”그런데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를 안아 침실로 들어가서 침대에 눕혔다.“고맙다는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주지 그래?”강하리는 초조한 마음에 연정이가 깰까 봐 힘껏 그의 다리를 발로 차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하지만 구승훈의 손
나문빈이 옆에서 턱을 치켜들었다.“이건 증거로 쓸 수 없어요.”구승훈이 무심하게 대꾸했다.누가 그랬는지만 알면 증거가 되든 안 되든 상관없었다.구승훈은 차갑게 비웃었다.한두 번도 아니고 적당히 해야지, 정말 그들을 만만하게 보는 건가?한편 석미란은 원망 섞인 어투로 진시연에게 따져 물었다.“시연아, 아줌마한테 제대로 말해. 강하리 일 어떻게 된 거야?”진시연은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아주머니, 저도 병원에서 들은 얘기였어요.”석미란은 순간 불안해하며 다그쳤다.“그러면 너도 확실한 정보가 아니었단 말이야?”진시연은 또 한 번 사과를 건넸고 석미란은 너무 화가 나서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이게 무슨 일인가.분명 진시연 입에서 나온 정보인데 고소를 당해 법정에 서는 건 그녀였다.석미란은 불안한 마음에 방안을 몇 바퀴나 돌아다니다가 결국 어르신의 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강하리는 아침 식사 직후 진태형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그녀의 친자 확인 결과를 확인하기 바쁘게 연락한 거다.“하리 양, 지금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 바로 검사하러 가요.”“좋아요.”진태형이 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차에서 내리자마자 그의 시선이 가장 먼저 강하리에게로 향했다.전에는 확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강하리는 그의 딸이 맞다.순간 진태형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반평생 기다린 심미현이 돌아오진 못했지만 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위안이 되었다.늘 진중하고 침착하던 남자가 지금 이 순간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진 장관님.” 강하리가 다가가 그를 낮게 부르자 그제야 진태형은 정신을 차렸다.그는 표정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가요.”백아영은 강하리를 배웅하러 나왔다가 진태형에게 다가가 살며시 토닥였다.“조심해서 다녀와요.”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리를 데리고 떠났다.가는 내내 조용했고 두 사람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창문에 기대어 생각에 잠겨 있었다.병원에 거의 도착할 때쯤
말을 마친 강하리는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진태형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진시연이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아빠, 나 방금 연구 프로젝트 하나 성사됐는데 축하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진태형이 시선을 낮춰 옆에 있는 딸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축하해.”그렇게 말한 후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시연아, 그럴 필요 없어.”진시연의 미소가 굳어지며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진태형을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야, 아빠? 내가 뭘?”진태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하리에게 생긴 일 너랑 상관있는 거야?”진시연은 당황했다.“무슨 일?”진태형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더니 카톡에 전송된 동영상을 클릭했다.중환자실 문 앞 CCTV 영상인데 영상 속에서는 진시연이 중환자실에서 나와 자리에 멈춰서서 석미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바로 오늘 아침 구승훈이 보낸 영상이었다.진시연이 석미란과 대화를 마친 뒤 석미란의 얼굴이 흉측하게 변하고 이어서 여러 사람과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그리고 통화 기록도 있었다.석미란이 고소장을 받고 제일 먼저 연락한 상대도 진시연인데 아무리 봐도 그녀가 이번 사건과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진시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갔다.“아빠, 아주머니가 어느 의사한테서 강하리 씨 얘기를 듣고 와서는 저한테 확인하시길래 제가 들은 내용을 말했을 뿐이에요.”진태형은 감정의 기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진시연은 그 시선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그녀는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아빠, 나도 아주머니가 여기저기 말하고 다닐 줄은 몰랐어요.”진태형은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친딸이 생겼다고 널 버릴 거란 걱정은 안 해도 돼. 내가 하리에게 더 마음을 쓸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어. 넌 내가 키운 딸이고 앞으로도 예전 그대로 널 대할 거야. 하지만 네가 굳이 이런 수작을 부리겠다면 내
최하영의 말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강하리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앞자리에서 운전하던 노민우가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깃 보며 가볍게 기침했다.“방금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구승훈한테 전화가 와서 하리 씨 도착했는지 묻더라고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민우는 혀를 차며 무언가 더 말하려다 강하리가 화제를 돌렸다.“최 대표님, 요즘 많이 바쁘세요?”최하영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천천히 굴리다 말고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왜요? 저랑 데이트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제가 그런 영광을 누려도 될까요?”최하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다른 사람이라면 힘들겠지만, 하리 씨라면 언제든지 가능하죠.”“좋아요.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거예요. 일 끝나면 연락할게요.”강하리는 최씨 가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천아름에게서 영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다.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는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비쳤다.“예쁘지?”배경에서 손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 예뻐.”“기분 좋아졌어?”“응.”손연지는 웃으며 덧붙였다.“그래, 행복해야 해. 쓸데없는 사람과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친구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곁에 있을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고 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때 천아름이 나직하게 말했다.“오늘 연지가 구승훈을 봤대. 병원 앞에서 그 여자랑 말다툼하고 있었대.”강하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좀 조심할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에 글쎄 구승훈이 그 여자 데리고 파티에 가고는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올랐어. 흥!”강하리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래? 둘 사이가 꽤 좋은가 보네.”“흥! 진짜 좋았다면 그 여자 욕먹게 그렇게 내버려뒀겠어? 난 구승훈이 뭔가 큰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친구야,
“말도 안 돼요.”노민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인수 건의 다음 단계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고 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듣고 있었다.“요즘 기명 제약 주식을 누군가가 계속 사들이고 있더라고요. 처음엔 하리 씨가 시킨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강하리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조사 안 해 봤어요?”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하리 씨가 한 줄 알았으니까 굳이 조사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강하리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뭔가 말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마치 질기게 달라붙는 벌레처럼 그 혐오스러운 감각이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강하리를 따라다녔다.“안 대표님도 누구 데리러 오셨습니까?”노민우가 먼저 나서며 강하리 앞으로 살짝 몸을 움직여 그녀를 가렸다.하지만 안현우의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하리 씨, 오랜만이네요. 이제 인사도 안 해줘요? 아 깜빡했네요. 이제 심씨 가문의 아가씨죠?”그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일부러 한 마디 덧붙였다.“심씨 가문의 아가씨면 뭐 해요? 결국엔 남자한테 버려진 신세가 됐는데.”그 말을 들은 노민우의 얼굴빛이 변했다.“안현우, 그만둬!”하지만 안현우는 조롱 섞인 눈빛으로 비웃으며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왜? 아직도 이 여자랑 자고 싶어?”순간, 노민우는 안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안현우는 비틀거리며 손가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맞췄지? 아니면 둘이 이미 잤나? 어땠어, 좋았어?”눈이 뒤집힌 안현우는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였다.“너 이 새끼, 미쳤어?”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뭘 그렇게 흥분해? 우리 중에 그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기나 해?”노민우가 이를 악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그냥 가요. 저딴 놈이랑 말 섞을 필요 없어요.”강하리가 급히 차 문
병원을 나오자마자, 강하리는 주차장 한편에서 오토바이에서 내린 천아름을 발견했다.천아름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강하리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괜찮아. 그런데 넌 여긴 왜 왔어?”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손연지 데리고 드라이브 가려고. 산에 올라가서 야경 보면 예쁠 것 같아서. 같이 갈래?”강하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다 웃으며 천아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니야. 나 비행기 타러 가야 돼. 먼저 갈게. 너희끼리 재밌게 놀고, 나중에 보자.”그녀가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천아름이 손목을 붙잡았다.“힘든 일 있었어?”솔직히 너무 힘들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천아름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너 돌아오면 내가 남자 소개해 줄게. 잘생긴 댕댕남이야.”바로 문을 열고 나오려던 구승훈이 발걸음을 멈췄고 천아름을 향해 분노의 눈빛을 던졌다.천아름은 그 시선을 느끼며 일부러 구승훈 옆에 선 임희주를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 이렇게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거예요?”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무슨 뜻이에요?”천아름은 입꼬리를 한쪽 올리고 강하리를 힐끔 보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봤지? 본인 얘기하는 건 아나 봐.”그녀는 장난스럽게 강하리의 턱을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됐어. 가. 돌아와서 소개팅은 꼭 해.”강하리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섰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그 후에야, 천아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천아름 씨, 남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천아름은 비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은 이렇게 여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하리는 왜 안 돼요?”그러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희주를 훑어보며 말했다.
구승훈이 목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의 뒤편에서 임희주가 다가왔다.“구 대표님 아내분도 계셨네요?”문 앞에 선 임희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하리에게 인사했다.하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구승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다 끝났어요? 끝났으면 가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대답했다.“곧 끝나니까 기다려요.”임희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멍든 복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천연덕스럽게 눌러보았다.그 순간, 구승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임희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피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러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임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임 선생님,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임희주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하리는 바로 준봉에게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님 모시고 나가 주세요.”준봉은 즉시 대답하고는 임희주에게 공손히 말했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구승훈을 한 번 노려보았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간호사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이제 진료실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옆에 놓인 소독 거즈를 집어 들고 임희주가 손을 댔던 자리부터 강하게 닦기 시작했다.그러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강하리는 몇 번 뿌리쳤지만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강하리의 눈은 벌써 붉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으며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낮게 말했다.“뭐 하자는 거지?”강하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구승훈, 지금 뭐 하자는 거야?”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고는 아무렇지
택시는 천천히 달렸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자기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다.구승훈은 확실하게 말했었다. 이제 강하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구승훈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를 잊기 위한 행동일 지도 모른다.퇴근 시간의 정체 속에서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고 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깊은숨을 들이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응급실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구승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미 떠난 걸까? 강하리는 응급실을 둘러보며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마 방금 엑스레이 찍었을 거야. 에휴, 너는 그 녀석을...”심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심준호의 맞은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심예진이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하리가 전화 끊어버렸어?”심준호는 휴대폰을 무심히 치우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를 심예진 앞으로 옮겼다.“이번에 한국에 얼마나 있을 거야?”심예진은 포크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했다.“설 지나고 갈게. 하리 일 때문에 아빠랑 할아버지가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준호는 짧게 대꾸했다.“그래. 그 사람과는 헤어져.”심예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빠, 무슨 소리야? 왜 그래?”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빠와 할아버지가 우리 결혼 재촉하는 거 알잖아. 그래서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예진은 조급한 듯 말했다.“하지만 오빠, 우리는 그냥 연기하는 거라고 했잖아. 부모님 기분 맞춰드리려고 한 거라면서.”심준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심예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결혼도 연기야. 네 사업에 영향 주지 않을 거야. 다만 네 남자 친구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헤어지는 게 좋겠어. 안 그러면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심예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가에 눈물이
강하리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표면적인 평온함은 결국 깨져 버렸고 그녀는 심준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삼촌은 알고 있죠?”심준호는 룸미러를 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승훈이가 내 사무실에 와서 유언장을 작성했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유언장을 쓰겠어?”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어찌 됐든 너에게 숨긴 거잖아. 죽어도 싸. 안 그래?”강하리는 심준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차가 JM 건물 앞에 멈추자 심준호는 강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출근해. 쓸데없는 놈 때문에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삼촌이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하지만 강하리는 바로 회사로 향하지 않았고 뒤돌아 정안 빌딩을 바라보았다.“삼촌도 구승훈이 왜 그런 건지 모르는 거예요?”심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어쨌든 나는 승훈이에겐 남이니까.”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JM 건물로 향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분명 서로 마음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는 걸까?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기명 제약 인수 건은 이미 시작되었고 강하리는 신중하게 모든 단계를 꼼꼼히 살폈다. 이것은 결국 손연지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었기에 어떠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강하리는 회의실에서 나와 안예서에게 말했다.“오늘 저녁 연성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줘.”안예서는 대답하며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그 순간, 강하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역시 심준호였다.[아, 맞다. 깜빡했네. 그 녀석, 다친 것 같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눈앞에 있는 차는 그녀에게 익숙했다.얼마 전 심준호 생일에 그녀가 직접 선물했던 차였다.심준호는 차에서 내려 석연란과 심연청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두 사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특히 심연청은 더욱 그랬다.심씨 가문 사람 중에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사촌 오빠, 심준호였다.“오빠...”심연청은 매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조금 전까지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석연란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준호야, 무슨 일로 왔어?”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 조카 데리러 왔어요.”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아, 방금 구승훈이 나를 찾아왔는데,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더라.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석연란과 심연청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들은 드디어 집안에서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결혼식 날 강하리가 혼자 남겨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던 그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구승훈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니?“준호는 참 자기 사람한테 잘해준다니까. 하지만 이 결혼을 후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승훈 당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래서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죠.”석연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심준호는 이미 강하리를 데리고 차로 향하고 있었다.“삼촌이 그랬잖아. 이런 인간들 만나면 말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그냥 바로 한 대 갈기면 되는 일을 뭐 하러 목 아프게 말다툼해?”심준호는 말하면서 강하리를 차에 태운 후, 자신도 옆자리에 올라타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석연란은 심준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엄마, 오빠 말이 진짜야? 구승훈, 후회하는 거야?”석연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말도 안 돼. 구승훈이 뭐가 아까워서 강하리 같은 여자한테 매달리겠어? 그냥 한때의 감정이지. 곧 다른 여자 찾을 거야. 두고 봐.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그녀의 눈빛이
만약 진짜로 아직 희망이 있었다면 이혼하고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다시 그녀를 되찾으면 되는 거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한참 후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여초연과의 문제는 해결책을 찾고는 있지만 해결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초연은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행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게다가,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갑작스레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그는 유언장을 쓰고 싶었다.그가 줬던 것들을 강하리는 모두 되돌려줬다. 하지만 유언장에 적힌 것이라면 돌려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심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절차에 따라 유언장을 작성해 주었다.일을 마치고 나서야 심준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네 가족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구승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삼촌.”심준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흥!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나 받아. 피 냄새가 진동하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심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하리 쪽은 내가 설득해 보겠지만, 하리 성격을 너도 알잖아. 만약 하리가 계속 이혼을 고집한다면 나도 굳이 강요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가정 법원 앞에서 강하리는 계단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에서 조용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구승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실망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