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원진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빌어먹을 것!”“할아버지, 저 어떡해요? 저 구정우랑 결혼하기 싫어요.”문원진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오늘 일은 많은 사람들이 봤는데 결혼하지 않으면 앞으로 무슨 소리를 듣겠나.하지만 귀한 손녀를 구정우 같은 놈에게 시집보내는 건 정말 내키지 않았다.“조금만 기다려, 할아버지가 꼭 너 대신 복수해 줄게!”문원진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고 강하리는 안에서 나온 뒤 최하영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떠났다.한편 구승훈은 문원진의 부름을 받고 그곳으로 향한 뒤 웃으며 말했다.“어르신, 축하드려요. 손녀분 혼사가 이미 정해진 것 같은데 더 이상 아무한테나 들이밀지 않아도 되겠어요.”문원진은 그의 발언에 너무 화가 나서 숨이 멎을 뻔했다.“구승훈, 연진이는 네 약혼녀야! 걔가 지금 괴롭힘당했는데 그런 말이 나와?”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어르신은 나잇살이 전부 얼굴로 갔나요? 왜 이렇게 뻔뻔하실까.”문원진은 기가 막혀 쓰러지기 직전이었다.“구승훈!”구승훈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구정우를 바라보았다.“축하해, 동생.”구정우의 눈동자에 음침함이 번쩍였다.“형이 나한테 약 먹였어?”그의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구승훈이 약을 탄 거라고?구승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너한테 조력자 만들어 주겠다고 약을 먹여서 문연진이랑 자게 하겠어?”말을 마친 구승훈이 문원진을 돌아보았다.“어르신, 사실 오늘 밤 수혜자가 누구인지는 다른 누구보다 어르신께서 제일 잘 아실 테죠?”말을 마친 구승훈이 자리를 뜨자 문원진은 갑자기 구정우를 바라보았다.“짐승 같은 자식!”구정우는 억울하단 표정이었다.“어르신, 저 자식 말 듣지 마세요! 저도 당한 거라고요!”한편, 옆에 있던 구동근이 입을 열었다.“구승훈, 거기 서!”구승훈은 발걸음을 멈췄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고 구동근의 얼굴은 일그러진 채 구정우를 바라보았다.“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놈, 따라와!”이윽고 문원진을 바라보
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봤다.사무실 책상에 마주 앉아 있는 여자는 딱 붙는 니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몸매를 선명하게 부각했다.임신과 출산으로 몸매가 망가지는 대신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다.게다가... 전보다 살벌한 기운도 풍겼다.그녀는 진작 구씨 집안에 손을 쓸 준비를 마쳤고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구승훈 때문에 구씨 집안이 거의 빈털터리가 됐지만 뿌리 깊게 내린 큰 가문은 구동근이 버티고 있었기에 여전히 건드리기 어려웠다.그래서 구정우가 가주 자리에 오르는 날만 기다리며 노리고 있었던 거다.가주의 추악한 스캔들이 터져야 구씨 집안의 근간이 흔들릴 테니까.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그동안 최하영과 함께 일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생각해 드디어 얌전해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가끔 최하영과의 지나친 친밀함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선에서 그녀는 움직였다.아주 잠깐 방심한 사이 그녀는 또다시 큰 사고를 치고 말았다.구승훈이 앞으로 다가가 강하리의 손을 잡고 의자에서 끌어 올렸다.“강하리,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강하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없어, 구씨 집안과 문씨 집안이 무너지는 것 말고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늙은이가 계속 널 노리고 있는 건 알아? 죽고 싶어서 하필 지금 이때 구씨 가문을 건드리는 거야? 어머니라 아이를 생각해! 굳이 이런 모험을 해야겠어?”강하리 눈물이 예고 없이 떨어졌다.“그래, 해야겠어! 이것 말고 입찰도 그래. 내 회사를 제명하면 내가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 후보에 경빈 테크라고 있는지 한번 봐봐. 내가 얼마 전에 나문빈과 조용히 설립한 회사야. 구승훈 씨, 놀랍지 않아?”구승훈은 상심과 무기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하리야, 날 위해서라도 너 자신을 지킬 수는 없어?”강하리가 그의 손을 뿌리친 뒤 뒤돌아 창문을 바라보았다.“난 당
강하리는 시선을 내린 채 한참이 지난 후 답했다.“알았어.”구승훈이 한숨을 쉬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집어 들고 확인한 그의 눈이 미세하게 번뜩였다.노진우다.강하리는 그의 휴대폰을 슬쩍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고 구승훈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강하리는 그를 바라보았다.“노진우 씨 아직도 돌아오고 싶어 해?”구승훈은 짧게 대답할 뿐 더 말이 없었다.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구승훈 씨, 노진우 씨 아기 봤어?”구승훈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남의 자식한테 관심 없어.” 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구승훈 같은 사람이 남의 아기에게 흥미를 보이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다만 휴대폰에 남은 아이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다른 사람 아이는 조산해도 살아남았는데 그녀의 아이만 그렇게 떠났다.구승훈은 그녀의 어두운 눈빛에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아기는 앞으로도 가질 수 있어.”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책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나 회의 있으니까 이만 가봐.”구승훈이 웃었다.“강 대표님, 강을 건너지도 않았는데 다리를 부수려고?”강하리가 그를 올려다보았다.“당신이 직접 지은 다리니까 내가 쓰는 게 싫으면 그냥 치워.”구승훈의 입꼬리가 들썩이다가 그대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다만 지나가면서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보고 걸음이 멈췄다.“내가 보낸 꽃은 왜 안 받아?”강하리가 그를 바라보았다.“받을 이유가 없으니까.”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럼 이건 받을 이유가 있고? 주해찬이야, 임정원이야? 아니면 최하영 그 늙은이야?”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한참을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내가 산 거야.”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대체 이런 건 누구한테 배운 거야?”강하리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내가 신경 쓰는 것들을 이용해 날 통제하는 거, 그거 당신이 예전에 쓰던 수법 아닌가?”“...”구승훈이 나지막이
노민우는 의아했다.“거기 가서 뭐 하려고요?”“지인 아이가 있는데 거긴 면회가 안 된다고 해서요.”노민우가 대답했다.“면회가 안 되는 건 맞아요. 제가 한번 얘기해 볼게요.”강하리는 전화를 끊고 쓴웃음을 지었다.왠지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그녀는 미간을 꾹 누르더니 바로 일을 시작했고 노민우는 퇴근할 때가 되어서야 연락이 왔다.“강하리 씨, 가도 돼요. 근데 누구 아이 보러 가요, 노진우?”“맞아요.” 강하리도 부인하지 않았다.“노진우 아이는 퇴원했는데요.”강하리가 당황했다.“벌써 퇴원했어요?”“네, 아이 상태가 나쁘지 않아서요. 입원한 지 한 달이 넘었고 달 수도 찼어요. 형도 연구소에 오래 머무는 건 아이 성장에 좋지 않다고 말했어요.”강하리는 막연하게 물어봤을 뿐인데도 노민우의 말에 조금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네, 고마워요.”노민우는 웃으며 물었다.“강하리 씨, 손연지는 요즘 잘 지내요?”강하리는 눈을 깜빡였다.“별일 없어요. 매일 제때 출퇴근하고 이상한 낌새는 안 보이던데요. 왜요, 요즘 연락 안 해요?”“저를 무시하고 있어요.”“또 싸웠어요?”“네.”노민우는 다소 우울한 표정이었고 뭐라 설명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누군가 그를 불렀다.“전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노민우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고 강하리는 전화기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반대편에서 민우 오빠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그녀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구정우에 대한 소식은 곧 인터넷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주식 시장이 열리자마자 SH그룹의 주가는 무섭게 하락하기 시작했다.강하리는 나문빈에게 전화를 걸었고 나문빈 쪽에서는 이미 SH그룹의 느슨해진 지분을 조금씩 삼키기 시작했다.원래는 SH그룹의 주가가 급락하더라도 SH그룹을 삼키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구승훈과 손을 잡고 최하영까지 가세하니 이번엔 구씨 집안을 뒤흔드는 게 아예 불가능해 보이진 않았다.“구씨 집안에서 반드시 보복할 테니 한동안
“신경 쓰지 마, 내가 얘기할게.”노진우는 문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 강하리 씨 아직도 의심하고 계시죠?”구승훈은 얼굴을 찡그렸다.그도 강하리가 의심하는 건지 아닌지 궁금했다.노진우의 여자 친구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고 연구소 동영상까지 해킹했는데 그에게는 물어보지 않았다.“아직 내려놓지 못한 거겠지.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야.”노진우가 서둘러 대답했고 전화를 끊은 구승훈은 옆에 있던 기사에게 말했다.“구씨 저택으로 가.”구씨 저택에서는 구동근이 무릎을 꿇고 있는 구정우의 뺨을 거듭 내리치고 있었다.“개자식, 너 진짜 구씨 집안 망하게 하려는 거야?”구정우는 무표정하게 얼굴을 문질렀다.“할아버지, 제가 해결할게요!”콧방귀를 뀌는 구동근은 눈동자에 살기가 번뜩였다.구씨 집안에선 곧바로 대처했고 구정우는 특별 기자간담회까지 열어 당시 미성년자였던 소녀의 부모님까지 초대했다.해당 부모는 기자회견에서 구정우의 행동을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구승훈이 경찰을 대동하게 기자회견에 나타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경찰관은 그해 경찰에 신고한 학부모의 기록을 직접 들춰냈고 이어 구승훈은 최근 부모의 계좌에 거액의 돈이 입금된 기록을 보여줬다.구정우는 구승훈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고 기자회견이 끝나고 내려오면서 매서운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형은 구씨 집안이 잘되는 꼴을 못 보겠나 봐?”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구씨 집안이 잘되든 못 되든 나랑 무슨 상관이지?”“구승훈!”말하자마자 구동근의 외침이 들렸고 구승훈이 뒤를 돌아보니 경호원 몇 명과 함께 이쪽으로 걸어오는 구동근이 보였다.구승훈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며 구동근이 다가올 틈도 없이 주위에 있던 그의 경호원들이 상대를 제지했다.양측 경호원들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와중에 구동근은 눈에서 불꽃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구승훈, 구씨 집안에서 너한테 못 해준 거라도 있어?”구승훈이 웃었다.“나한테는 없어도 내 아내와 아이에겐 못 할 짓을 했죠.”“걔들이 무슨
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렸다.“구승훈 씨, 전에 노진우 씨가 내 옆에 있을 때는 당신 질투하는 걸 못 봤는데.”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노진우는 예전에 여자 친구가 있었고 내 부하니까 감히 너한테 딴마음 못 품었겠지만 지금은 다르지.”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구승훈 씨,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구승훈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미간을 찌푸렸다.“노진우는 아이 키우느라 수시로 널 지켜볼 수가 없어. 게다가 아이가 있다는 건 약점이 있다는 건데 언젠가 아이를 이용해 협박하는 사람이 생기면 너한테 무슨 짓을 할까 봐 걱정돼. 이게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데려오지 않는 이유야.”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경호원이 필요하면 다른 사람 보낼게. 노진우는 관둬. 지금은 일 시킬 수 없어.”강하리가 그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됐어, 경호원이 필요해도 내가 알아서 구해.”말을 마친 그녀가 문을 열고 내렸고 구승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거짓말이 아니었다.아이는 그들의 약점이자 희망인데 지금 두 사람 주변에는 사방이 위험했다.아이에겐 조금의 모험도 허락할 수가 없으니 지금은 강하리에게 미안할 행동을 해야만 했다.강하리가 집에 돌아오니 손연지가 식사 준비를 마쳐놓고 있었다.“왔어? 제때 왔네. 밥 먹자.”대답을 한 강하리가 손을 씻고 식탁 앞에 앉았지만 수저를 집어 들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구승훈의 말이 맞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 말에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의심할 이유가 없어졌다.한숨을 쉬며 마음을 추스르고 밥을 먹으려는 순간 손연지가 갑자기 손을 잡았다.“너랑 구승훈 다시 사귀는 거야?”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왜 그렇게 물어봐?” 손연지가 그녀를 바라보았다.“너한테서 구승훈 그 개자식 냄새가 나.”강하리는 고개를 숙여 킁킁거리다가 놀란 눈으로 손연지를 바라보았다.“너 개코야?”손연지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어때, 나름 자부하는 거라고.”강하리는
이윽고 피식 웃은 그가 담배를 끄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그런데 동네를 막 빠져나올 무렵 갑자기 차가 그의 옆을 들이받았고 구승훈은 핸들을 홱 돌렸다.하지만 뒤에 있던 차는 방향을 틀어 다시 이쪽으로 달려왔다.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곧바로 액셀을 밟고 달려 나갔다.다만 이번에는 그 차를 따돌릴 생각이 없었다.대신 그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래서 따라잡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거리를 유지했다.바깥 풍경은 점점 더 한적해지고 어느 순간, 이미 도시 외곽에 와 있었다.놀랍게도 구승훈은 이런 순간에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구승재에게 위치를 전송했다.[와서 사고 처리해.]문득 차가 갑자기 오르막을 오르다가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자 구승훈의 뒤를 밟고 있던 차에 탄 사람의 눈동자가 움츠러들었다.가파른 경사면 바로 아래에는 벽이 있었다!그는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차가 너무 빠르게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어 멈출 수 없었다.바로 그때, 앞에 있던 구승훈이 홱 차를 돌려 앞자리를 양보했고 운전자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벽에 부딪혔다.차 앞쪽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서둘러 달려온 구승재가 이 모습을 발견했다.“형!”구승훈은 차에 탄 남자만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처리하고 사람은 구씨 저택으로 보내.”구승재는 깜짝 놀랐다.“확인 안 해?”구승훈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확인할 필요 없어. 누구인지 알아.”구승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큰아버지야?”구승훈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늘 그는 기자회견에서 구정우의 체면을 박살 냈고 구정우는 당시 사건으로 인해 경찰 수사에 협조해야 했다.아버지인 작자가 어지간히도 마음이 아팠나 보다.구승훈은 웃으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천천히 숨을 뱉었다.참...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지.구승재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팠다.큰아버지란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이 없었다. 다만 과거 가주 자리에서
전화기를 붙든 강하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구승훈 씨, 당신... 정말 별일 없는 거야?”구승훈이 웃었다.“네 동정 받고 싶었는데 효과가 있었나?”강하리가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구승훈이 웃었다.“일찍 자.”말을 마친 그가 잠시 멈칫했다.“수면제는 가능하면 먹지 말고.”“지금 어디야?”강하리가 문득 이렇게 묻자 구승훈은 당황하다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별장을 바라보았다.“밖에서 바람 쐬고 있어.”“한겨울에 바람을 쐰다고?”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강 대표님께서 나 걱정해 주는 건가?”강하리가 코웃음 쳤다.“실컷 바람이나 쐐.”구승훈이 서둘러 답했다.“일이 있어서 밖에 나왔다가 다 처리하고 네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구승훈 씨, 손잡기로 했으면 앞으로는 나한테 아무것도 숨기지 마.”구승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응, 안 숨길게.”강하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수면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잠시 후 수면제를 집어 몇 알을 꺼내 물과 함께 삼켰다.그 시각 구씨 저택에서는 부상으로 인사불성이 되어 돌아온 경호원을 보자 구명진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버렸다.그가 아직 손을 쓰기도 전에 구동근이 밖에서 들어왔고 눈빛이 번뜩이며 곧바로 그의 뺨을 내리쳤다.“승훈이 건드리지 말랬지, 내 말 못 알아들어? 못 알아듣겠으면 당장 네 애새끼 데리고 구씨 집안에서 나가!”구명진은 얼굴이 옆으로 기울어질 정도로 세게 뺨을 맞았다.“아버지, 제가 한 게 아니에요...”구동근이 또다시 뺨을 때렸다.“한마디만 더 해보지 그래?”구명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그의 눈에는 증오만 점점 더 뚜렷해졌다.“승훈이는 우리 구씨 집안의 희망이고 미래야. 감히 걔를 건드리면 나도 너 가만 안 둘 거다!”구명진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웃었다.“그럼 정우는요? 경찰에 끌려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거예요? 문씨 집안에는 또 뭐라고 하고요!”그들
“말도 안 돼. 우리 시연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시연이는...”“주해찬 씨로부터 이미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습니다.”말을 마친 기자는 두 어르신을 향해 입술을 삐죽이며 자리를 떠났고 노부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무슨 말이야? 당신들 이 영상을 어디에 내보내려는 거야? 당신들...”이정숙이 기자를 따라잡기도 전에 기자와 카메라맨은 함께 차를 몰고 떠났다.이정숙은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 만약 이 일이 알려지거나 인터넷에 영상이 공개되면 이시연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나.“태형이한테 전화해. 이 일이 알려지면 태형이도 망신당할 거야.”진강석이 서둘러 말하자 이정숙은 망설이지 않고 서둘러 진태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진태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전화를 받은 강하리가 서둘러 회사로 달려가는데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기자들이 먼저 와 있었고 기자 앞에서 말문이 막힌 진강석 내외를 보며 한참 후 그녀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누가 시킨 건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구승훈 말고는 이렇게 할 사람이 있을까.강하리는 문득 이제 정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걸 느꼈다.여전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모든 안정감은 이 남자로부터 온다는 것을.마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 앞에 굳건히 버티고 서 있어 줄 것 같았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한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강하리는 운전대를 꽉 움켜쥐고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강 대표님, 시키실 일이라도 있나?”시선을 떨군 강하리가 결심한 듯 말했다.“구승훈, 혼인신고 하러 가자.”전화기 너머 구승훈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그래.”그가 웃으며 답했다.“내가 데리러 갈 테니 기다려.”강하리는 구승훈과 통화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문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하리야, SNS 봐!”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왜 그래? 또 무
JM회사 아래층에서 늘 정교하게 치장하던 석미란은 지금 전혀 화장하지 않은 상태였다.창백한 안색에 피곤함을 감추기 어려웠지만 눈빛에는 증오가 가득했다.불과 며칠 만에 아들은 유치장에 들어갔고 남편은 해당 부문에서 조사받고 있다.멀쩡하던 가정이 여자 하나 때문에 파괴되었는데 이젠 그 여자에게 사과까지 해야 한다.석미란은 내키지 않았고 여전히 강하리가 미웠다.어디선가 튀어나온 잡종이 어느새 그녀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석미란의 뒤에 서 있던 석연란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석미란과 석연란 외에도 진씨 가문 어르신 내외가 경호원 몇 명까지 대동하고 찾아와 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함께 JM회사 입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왜 아직도 안 와?”이정숙이 다소 짜증스럽게 물었다.원래는 곧장 심씨 가문으로 가서 강하리를 만나고 싶었지만 놀랍게도 강하리가 심씨 가문에 없어서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회사까지 찾아왔다.하지만 한 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여전히 강하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정숙의 말애 석씨 자매의 표정도 한층 더 일그러졌다.누가 봐도 강하리가 일부러 나타나지 않는 게 분명했다.“누구 앞에서 텃세를 부리는 거야!”이정숙의 얼굴이 차가워지면서 당장이라도 화를 낼 기세였고 진강석이 막 말을 하려는 순간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다들 강하리가 오는 줄 알았지만 차에서 내린 사람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다가올 줄이야.그들의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기자가 일행의 앞으로 다가왔다.“여러분들은 인터넷에서 강하리 씨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 여기 계신 건가요?”그 말에 석미란의 표정이 확 바뀌었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기자가 다시 물었다.“게다가 얼마 전에 강하리 씨 출신에 대한 루머를 퍼뜨려서 고소당해 법원까지 갔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석미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무, 무슨 헛소리에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망할...”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석연란이 옆에서 끌어당겼고 석미란
다시 입을 연 구승훈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있었다.“자기야, 한 번만 더 불러봐. 응?”강하리의 표정이 어색함으로 물들었다.조금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야 얼굴에 열기가 치솟는 게 느껴졌다.“내 남편이라고.”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고 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네 남편은 나잖아?”강하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누가 나랑 결혼하면 그 사람이 내 남편이지.”구승훈은 홧김에 그녀를 콱 끌어안았다.“우리 강 대표님이 주방에서 하고 싶나 봐?”남자가 말하며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뻗자 놀란 강하리가 순간적으로 몸부림을 쳤다.두 사람은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손연지가 내려와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그녀는 부엌에 있는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며 말로 표현 못할 감정을 느꼈다.부러움?아마도 부러운 거겠지.하지만 사실 그녀는 강하리의 결단이 더 부러웠다.구승훈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강하리는 망설임이 없었다.매번 노민우와 깨끗이 손절하려고 마음먹었어도 몇 번이나 다시 엮이고 타협하는 자신과 달리.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거다.손연지는 마음이 답답했다. 사실 누구도 탓할 수가 없었고 탓하려면 결단력이 부족했던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심호흡한 뒤 마음을 추스르며 아래로 내려갔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구승훈에게서 떨어졌다.“연지야, 아침 뭐 먹을래?”손연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애정 행각에 이미 배가 불러.”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밥 먹고 연정이 데리러 갈 거야.”손연지의 눈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좋아. 내가 연정이 선물도 챙겨왔어.”하지만 그다음 순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 머금은 미소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강하리는 그걸 분명히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때론 본인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지금 손연지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손연지를 돌봐주는 것뿐이고 손연지가 몸을 추스르고 나면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구승훈은 강하리가 보낸 메시지를 보며 세 식구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다가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좋아.]그의 의견을 묻다니, 어떻게 감히 싫다고 하겠나.답장을 마친 구승훈은 욕실로 들어갔고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쉬지 않고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전화가 끊어지려고 할 때쯤 통화 버튼을 눌렀다.전화기 너머에서 구동근의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안그룹과 에비뉴를 강하리한테 다 넘겼어?”구승훈은 비웃었다.“네, 왜요? 불만 있으세요, 어르신?”구동근은 그의 말에 피를 토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구승훈, 그건 다 우리 구씨 가문 재산이야! 네가 뭔데 그 여자한테 줘!”강하리가 심씨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을 안 후 구동근은 더 이상 구승훈과 강하리의 만남을 반대하지 않았고 심지어 몸을 굽혀 심씨 가문에게 사죄할 수도 있었지만 구씨 가문의 재산이 그렇게 쉽게 넘어갔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게 다 구씨 가문의 재산이었는데!이 망할 자식이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다니!구승훈은 여전히 나른한 목소리로 가볍게 웃었다.“왜요? 벌써 잊으셨어요? 구씨 가문 재산은 어르신 귀한 손주가 다 망쳐버렸어요.”“너!” 말을 꺼내지 않으면 모를까, 그 말을 하자 구동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차갑고 냉정한 손자가 한 여자 때문에 자기 가족을 내팽개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구승훈은 웃음을 터뜨리며 목소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다시는 나랑 강하리 사이 방해하지 마세요. 저한테도 할아버지가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구승훈이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자 저쪽에서 구동근은 너무 화가 나서 전화기를 부술 뻔했다.전화를 끊자 옆에 서 있던 구씨 가문의 둘째가 다소 불안한 듯 물었다.“아버지, 어떻게 됐어요? 정말 그 두 회사를 강하리한테 다 줬대요?”구씨 가문의 둘째는 노인의 표정을 보고 순간적으로 불안해졌다.“그놈이 무슨 권리로 두 회사를 망할 년에게 넘겨줘요? 거기
거칠게 원하던 구승훈이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 순간 강하리는 비틀거렸고 구승훈이 단숨에 그녀를 품에 낚아챘다.“너무 좋아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겠어?”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그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좋기는 개뿔!”구승훈은 웃으며 강하리를 안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응, 나도 좋았어.”“...”개자식과 더 실랑이를 벌일 기운도 없었다. 뻔뻔한 걸로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씻겨주고 그녀를 안아 침대로 돌아왔다.강하리는 손가락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옷을 끌어당겨 입었고 구승훈은 그녀의 움직임을 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어디 가?”“연지 보러 갈 거야. 오늘 밤엔 연지랑 잘 거야.”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강하리, 넌 내 아내야.”강하리가 그를 슬쩍 보았다.“아직 결혼 안 했잖아.”구승훈이 그녀를 껴안았다.“그러면 내일 혼인신고 하러 갈래?”강하리의 몸이 경직되며 문득 지난번에 구승훈이 혼인신고 하자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그러다 그녀에게 돌아온 건 심미현의 죽음과 오지 않는 구승훈이었다.강하리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지자 구승훈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지난번 같은 일은 없어.”강하리가 그를 돌아보았다.“만약 또 그런 일이 생기면...”구승훈의 짙고 검은 눈동자에 밝은 빛이 비쳤다.“또 그런 일이 생기면 난 고자가 될 테지만 걱정하지 마, 강 대표님. 내가 손으로도 잘 모실 수 있으니까.”“... 닥쳐!”말을 마친 그녀가 잠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다가 두 걸음도 못 가서 갑자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또 콘돔 안 썼어?”강하리는 말하며 지난번에도 구승훈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구승훈, 미쳤어? 난 지금...”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걱정하지 마, 임신 안 해.”강하리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는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봤고 구승훈은 손으로 강하리의 턱을 어루만지기만 했다.“나 묶었어.”
손연지는 식사를 마치고 잠을 청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아직 몸조리가 필요한 그녀는 도저히 찾아갈 데가 없어 결국 강하리를 찾으러 B시까지 왔다.강하리는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손연지는 자신이 겪은 일을 몇 마디로 설명했지만 강하리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구승재도 별말 없이 바로 손연지에 대해 알아본 사실을 강하리에게 전했고 대충 손연지가 말한 내용과 거의 같았지만 몇 가지 세부적인 내용이 빠져 있었다.손연지가 병원에서 손가락질받고 있었다는 것, 노민우의 약혼녀라는 사람이 손연지를 머물 곳도 없게 궁지로 내몰았다는 것 등등...손연지는 노민우를 그냥 두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노민우의 어머니가 노민우 몰래 손연지를 노씨 가문으로 데려와 심한 모욕을 준 것뿐이었다.그래도 손연지가 고분고분 말을 듣는 성격은 아니라 노씨 가문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고 상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손연지에게 수표를 던지며 연성을 떠나라고 했다.손연지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고 노민우의 결혼을 파탄 낼 생각도 없었기에 처음엔 연성을 떠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노민우의 어머니가 그녀의 부모님까지 찾아갔다.강하리는 죄책감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손연지에게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하리를 뒤에서 껴안았다.“나를 이렇게 걱정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어떻게 같아?”구승훈은 납득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뭐가 다른데?”강하리는 시선을 떨구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녀를 정말로 기쁘게 만드는 건 별로 없었다.어릴 적 강찬수의 가정 폭력부터 나중에 구승훈에게 받은 상처까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손연지가 곁에 있었고 그녀에게 손연지는 가족이었다.강하리는 대답이 없었고 구승훈도 더 묻지 않아 거실은 무척 조용했다.하지만 조용한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고 구승훈이 귓불을 깨물며 그녀의 몸을 달구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조금 긴장한
구승훈은 강하리를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결국 순순히 입을 다물었고 손연지는 구승훈을 보고 웃었다.구승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가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강하리를 한 손으로 잡아당긴 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오늘 밤에 보상해 줄 거야?”강하리는 순간 조금 전 당황스러운 장면이 떠올랐고 손연지가 지금 슬픈 상황에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 않았다.“가만히 있어.”구승훈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그러면 손으로만 하는 건?”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가로질러 그녀가 승낙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꽉 감싸자 강하리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이따가 내려가선 얌전히 있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내 말은 들어야지.”손연지는 식사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식사가 끝날 무렵 강하리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노민우였다.강하리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바로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는 못 본 척했지만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하지만 잠시 후 구승훈의 휴대폰도 울렸고 그는 눈썹을 치켜들며 전화를 집어 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바깥에 도착하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노민우가 아닌 노민준의 전화였고 그는 뒤를 돌아보고는 전화를 받았다.“그 주사 효과가 어때?”구승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괜찮아. 지난 이틀 동안 상태가 전보다 훨씬 안정됐어.”거짓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은 노민준이 건넨 주사를 맞고 나서부터 지난 이틀 동안 단 한 번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이 그가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이유였다.노민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짧게 대꾸한 구승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말을 마친 노민준이 잠시 멈칫했다.“참, 내 동생이 할 말이 있대.”곧이어 저쪽에서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훈아, 손연지는 지금 어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여자를 왜 나한테 물어봐?”“승훈아, 나도 네가 강하리 씨
강하리는 사실 자신이 꽤 한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거듭되는 상처에도 수없이 용서했다.마치 구승훈이 없으면 모든 게 그대로 멈춰버릴 듯이.구승훈이 사라져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지만 구승훈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그건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또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당해도 싸.”강하리는 손연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손연지는 다가와 강하리를 껴안았다.“구승훈 이 개자식이 전생에 우주라도 구한 거야?”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연지의 어깨에 기대었다.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위로에 가까웠다.“그러는 넌, 대체 무슨 일인데?”자기 일을 언급하자 손연지는 순식간에 흥미가 사라진 표정이었다.“별건 아니야. 사실... 하리야, 나 임신했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다.“뭐?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아기는?”손연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노민우는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있었어. 노민우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고 사실 아이도 남길 생각 없었어. 노씨 가문이나 노민우에겐 관심 없어. 40일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술하려고 했는데 그날 밤 내가 당직일 때 노민우 약혼녀가 병원에 찾아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난동을 부렸어. 병원에서도 노씨 가문에 밉보일 수 없어서 날 해고했어.”강하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그러고 나서?”손연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그리고 다음 날 아이를 지웠는데 노민우가 어떻게 알았는지 낙태한 걸 알고는 나한테 화를 냈어.”강하리의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다.노민우가 약혼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 손연지에게 연락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멀쩡했었다.고작 얼마나 됐다고 노민우 그 개자식이 손연지를 이렇게 힘들게 한 건지!“왜 나한테 말 안 했어?”손연지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말해도 달라질 게 뭐가 있어. 그래도 노민우를 그냥 두지는 않았어. 자기가 뭐라고 나한테 화를 내? 약혼까지 했는데 내가 아이를 낳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노씨 가문에 찾아가서 업무에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