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남아서 같이 있어주겠다고 하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먼저 떠나셨다. 하늘은 어두웠다. 나는 엄마를 안고 싶었다. 엄마는 느끼지 못하실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위로해드리고 싶어서 말했다. “엄마, 슬퍼하지 마세요. 민준이 없다고 해도 엄마는 꼭 행복하게 지내셔야 해요.” “민준이가 어리고 겁도 많은데 그런 어두운 곳에서 혼자 자야 한다니...” “엄마가 잘못했어. 사랑받지 못한다면 억지로 붙잡아두지 말았어야 했어. 이혼할 결심을 했으면 너도 무사했을 텐데...” 엄마는 계속 말했다. 나는 엄마와 나란히 앉아 엄마한테 몸을 기댔다. 마치 그동안 나를 재우기 위해 이야기를 해주던 밤처럼. 조금 졸리던 참에 급한 발소리에 깨어났다. 엄마는 경계하듯 일어나셨다. 아빠였다. 아빠는 옷이 헝클어지고 얼굴이 창백했다. 특히 내 사진이 있는 묘비를 보고 나서 눈에 슬픔이 비쳤다. “내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을 못 보게 하는 이유가 뭐냐!” 아빠가 입을 열자마자 비난이 시작되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아빠에게 왜 누구도 잘못을 인정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엄마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네 핸드폰을 확인해 봐. 내가 전화를 몇 통 했는지, 다 거절당했어.” “그럴 리가 없어. 내 핸드폰에는 당신 번호 하나도 없어...” 말을 다 끝내지 못한 채 아빠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을 닫았다. 그날 아빠의 핸드폰은 유희만 움직였고, 왜 통화 기록이 없었는지...왜 엄마가 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몰랐는지...답은 명백했다. “그럼 나를 만나자마자 말했어야지. 아니면 나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잖아.” 엄마는 아빠를 무시했다. 아들의 유골을 버리겠다고 말할 수 있는 아빠가 알더라도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죄책감을 느낄 리 없다. 그냥 계속 비난할 뿐이다. 나는 엄마와 다른 세계에 있지만 우리 둘 다 그를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가 자신의 연기력을 다해 내 묘비를
엄마는 책방에서 책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을 찾으셨다.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엄마가 생활하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퇴근 시간이 빨라서 엄마가 매일 묘지에 가는 것도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엄마는 항상 꽃 한 송이를 들고 와서 거기에 앉아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셨다.때때로 작은 장난감을 가져와서 그 장난감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나에게 말해주셨다.그리고 그렇게 지낸 지 열흘쯤 지난 후, 큰아버지의 비서가 엄마를 찾아와서 큰아버지가 엄마에게 약속한 대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고 전해주었다.큰아버지는 유희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조사했다. 유희는 지도 교수와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여러 사람과 동시에 관계를 맺고 있었다.심지어 그녀의 딸조차도 누구의 딸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희는 자식 친자 확인서까지 위조해가며 다른 사람들에게 양육비와 입막음비를 요구했다.그리고 아빠는 그저 유희가 눈독 들인 영원한 호구일 뿐이었다.유희는 자신이 아빠의 ‘첫사랑’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 사이에 감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의 유일한 끈이었다.그래서 유희는 이전 본가의 가정부에게서 내가 체리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 그 사건을 계획했다.그리고 나는 사실 체리 주스를 실수로 삼킨 것이 아니었다. 그 케이크 반죽에 처음부터 체리 주스가 섞였던 것이다.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된 살인 사건이었다.큰아버지는 모든 증거를 모았다. 유희와 다른 남자들의 사진과 영상도 포함되어 있었다.큰아버지는 유희와 관련된 모든 남자의 아내들에게 그 증거를 나누어 주었고, 그 후에는 매체에 공개하여 유희의 추악한 모습을 전 세계에 퍼뜨렸다.유희는 이제 집밖에 나갈 수 없었다. 한 여성은 그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유희의 별장 앞에 사람이 오갈 때마다 썩은 계란과 상한 채소를 던졌다.또한 큰아버지는 유희한테서 피해를 받은 여성들에게 남편이 유희에게 준 돈을 되돌려받을 수 있도록 변호사를 고용하여 도와주었다. 얼마 안 되어 유희는 금방 빈털터
엄마가 전화 손목시계의 위치 추적으로 나를 찾았을 때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드러난 피부는 온통 붉은 두드러기로 가득했다.아빠는 옆에서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네 아들이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쓰레기통에 버리면 될 걸 왜 식탁에다 토하냐고? 남의 호의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그 점은 너랑 똑같아!”엄마는 폭발하듯 아빠의 뺨을 때리고, 나를 번쩍 안아 병원으로 달려갔다.나는 공중에 둥둥 떠 있으면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아빠, 정말 싫다.나랑 엄마에게는 관심도 없으니까.맞다, 나는 죽었다.‘이게 죽음이라는 건가?’‘작년에 옆집에 살던 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렇게 공중에 떠 있었던 걸까?’‘그때 할아버지를 못 봤으니 아마 지금 아빠랑 엄마도 날 못 보겠지?’하지만 나는 그들을 볼 수 있었다.엄마가 나를 안고 오열하며 길가에서 구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의사 아저씨에게 간절히 나를 살려달라고 부탁했다.의사 아저씨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화면에는 평평하게 이어진 세 개의 선이 떠 있었다. 아무런 기복도 없었다.엄마는 혼자 바쁘게 움직였고, 나는 내가 한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이윽고 한 아저씨가 엄마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엄마는 그 상자를 품에 안고 길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차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침대에 누운 엄마는 이따금 담요를 껴안고 흐느끼거나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곤 했다.나는 살며시 엄마 옆에 누웠다. 예전처럼 엄마가 나를 재워줄 때처럼 살며시 그녀를 토닥여주고 싶었다.그런데 내 손이 엄마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버렸다.그 모습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엄마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엄마는 움직임 없이 누워 있었다. 나는 심심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엄마와 완성하지 못한 블록 앞에 다가갔다.이어 블록을 다시 맞추려 했지만 내 손은 블록을 통과하기만 할 뿐 집을 수가 없었다.애니메이션을 보려고
아빠는 엄마가 대꾸하지 않자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내가 말하고 있잖아! 귀먹었어?”“내 앞에서 뺨을 때리면 내가 얼마나 창피한지 알긴 해?”“네 아들이라는 놈, 그 버릇없는 짓거리가 다 너 닮은 거야! 남자가 돼가지고 온갖 응석을 받아주니까, 온전치 못한 놈이 됐잖아. 따지고 보면 민준이는 유희 딸만도 못해!”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앞으로 아들 내가 직접 키운다. 네가 계속 키웠다가는 그냥 망가져버릴 게 뻔해!”엄마는 아빠를 막아섰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민준이가 네 아들이라는 건 기억하고 있었네? 맨날 내 아들, 내 아들 하고 다니길래 나 혼자 키운 줄 알았잖아. 뭐, 상관없어. 우리 이혼하자.”아빠는 엄마가 건넨 이혼서류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정신 나갔냐? 이 결혼은 네가 울며 매달려서 얻어낸 거잖아. 네가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있을 거 같아?”엄마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너무 지친 모습이었다.“맞아, 내가 울며 불며 매달려서 얻게 된 결혼이었지. 하지만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것도, 민준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고 있어. 우리 이제 서로 그만 괴롭히자. 도장 찍으면 네 첫사랑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을 텐데, 좋지 않아?”아빠는 엄마의 손을 거칠게 밀쳐냈고, 그 충격에 엄마는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넌 진짜 미쳤어! 네가 멋대로 남의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갔던 건 기억 안 나? 유희가 너랑 시비 안 붙어준 게 어디야. 안 그랬으면 불법 침입이야. 네 아들놈이 네 버릇을 그대로 배워서 예의도 모르고, 내가 밖에 서 있으라고 했더니 생떼를 부리다 못해 죽을 둥 살 둥 쇼를 했잖아!”“그런 걸 다 받아주고 나랑 이혼하자고 떠들어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데?”엄마는 화가 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뭘 생각했냐고? 내가 너한테 묻고 싶어! 민준이가 체리 알레르기가 있다는 거 너 알고는 있기는 해?”“어릴 때 처음 먹고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목이 부어 숨도 못
나는 엄마가 걱정하실까 봐 평소 엄마가 하시던 대로 옷을 세탁기에 돌리고 바닥도 깨끗이 닦았다.엄마가 돌아오시더니 옷은 왜 갈아입었냐고 물으셨다.나는 얼굴을 붉히며 일부러 부끄러운 척했다.“바지에 오줌 쌌어요.”그 말에 엄마는 며칠 동안 나를 놀리셨다.아빠가 내 방에서 나를 찾을 리 없었다. 이미 나는 작은 상자 안에 들어가 있었으니까.아빠는 화난 얼굴로 엄마를 쏘아보며 말했다.“서지아, 너 진짜 대단하네. 이혼하자고 말 꺼내기 전에 애부터 숨겨놓았어?”“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집안 배경도 없으면서, 너도 이혼하면 내가 널 이길 수밖에 없다는 거 알잖아.”“그래서 민준 앞세워서 나 붙잡으려고? 나한테 돈 뜯으려고 작정했지? 너 정말 머리 하나는 잘 굴리네.”“내가 딱 한 마디만 할게. 이혼은 해줄게. 돈 조금 줄 수도 있어. 하지만 민준은 절대 못 줘!”아빠의 독설을 듣고도 엄마는 아무 말없이 가만히 계셨다.그리고는 준비해 두었던 짐과 내 유골을 들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아빠는 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소리쳤다.“꺼져! 아주 멀리 꺼져 버려! 내가 우리 부모님 때문에 결혼했지, 너 같은 애랑은 죽어도 결혼 안 해! 다시는 찾아오지도 마!”아빠가 내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난 아빠랑 있지 않을 거야! 엄마랑 있을 거야! 아빠 싫어!”그리고 엄마를 따라 싫어했던 그 집을 떠났다.엄마는 가끔 잠들기 전 내게 자신과 아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그 이야기를 내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셨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그 이야기를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다.엄마와 아빠는 소꿉친구였고, 두 집안은 친척처럼 가까운 사이였다.어릴 때부터 약혼이 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엄마의 집안이 망하면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충격으로 돌아가셨다.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중학생이었던 엄마를 데려다 키우셨고, 약혼을 그대로 지키기로 하셨다.둘은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며 별생각 없이 잘 어울렸다.하지만 대
엄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빠를 쳐다보며 말했다.“맹준오, 민준이가 알레르기 때문에 체리를 뱉은 걸로 뭐 이렇게까지 난리를 쳐. 민준이 네 아들이야!”아빠가 손을 휘두르며 소리쳤다.“나는 이런 아들 둔 적 없어! 어린 게 사람 목숨까지 해치려 들어? 잡기만 해봐 가만두지 않겠어!”나는 소리쳤다.“나 아니야!”어리지만 나도 안다. 사람을 해치는 건 나쁜 짓이고, 나는 나쁜 아이가 아니다.하지만 아빠는 내 말이 안 들렸다.엄마는 화가 나서 앞으로 나가며 아빠에게 말했다.“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민준이가 아직 어린데 어떻게 사람을 해쳐?”엄마의 말에 아빠는 엄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맞아! 유희한테 황산을 뿌린 악랄한 짓도 네가 사주했겠지! 아니었으면 민준이 같은 애가 대체 황산을 어디서 구했겠어?”엄마는 화가 나서 문 옆에 있던 장식용 꽃병을 들었다.“황산? 그게 언제 어디서 일어났는데? 증거 있어? 내 아들을 모함했다간 너랑 같이 끝장을 볼 줄 알아!”아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확신에 찬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들어 말했다.“어제 오전, 유희가 쇼핑몰에서 황산을 맞았다. 그 황산을 뿌린 아이의 키며 모습, 심지어 입고 있던 옷까지 민준이가 그날 파티에서 입었던 거랑 똑같아. 쇼핑몰 CCTV에 다 찍혔다고!”아빠는 핸드폰에서 영상을 재생시켜 엄마에게 던졌다.나는 엄마와 함께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내밀어 영상을 봤다. 영상 속 내용은 아빠 말대로였다.그런데 나는 이미 죽었는데 황산을 뿌릴 수가 없었다. 아빠는 엄마가 말이 없자 영상 속 아이가 나라는 것을 인정한 줄 알았다.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시혜를 베푸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맞지? 민준이도 내 아들인데 내가 그걸 몰라보겠어? 얼른 민준을 데리고 와. 내가 데리고 가서 유희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게 할 테니까. 유희랑 나 사이를 생각하면 유희도 민준이를 용서할 거야. 이렇게 하면 경찰서도 일찍 사건을 끝마칠 테고. 아니면 경찰이 오면 얘기는 달라질
엄마는 책방에서 책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을 찾으셨다.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엄마가 생활하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퇴근 시간이 빨라서 엄마가 매일 묘지에 가는 것도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엄마는 항상 꽃 한 송이를 들고 와서 거기에 앉아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셨다.때때로 작은 장난감을 가져와서 그 장난감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나에게 말해주셨다.그리고 그렇게 지낸 지 열흘쯤 지난 후, 큰아버지의 비서가 엄마를 찾아와서 큰아버지가 엄마에게 약속한 대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고 전해주었다.큰아버지는 유희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조사했다. 유희는 지도 교수와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여러 사람과 동시에 관계를 맺고 있었다.심지어 그녀의 딸조차도 누구의 딸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희는 자식 친자 확인서까지 위조해가며 다른 사람들에게 양육비와 입막음비를 요구했다.그리고 아빠는 그저 유희가 눈독 들인 영원한 호구일 뿐이었다.유희는 자신이 아빠의 ‘첫사랑’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 사이에 감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의 유일한 끈이었다.그래서 유희는 이전 본가의 가정부에게서 내가 체리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 그 사건을 계획했다.그리고 나는 사실 체리 주스를 실수로 삼킨 것이 아니었다. 그 케이크 반죽에 처음부터 체리 주스가 섞였던 것이다.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된 살인 사건이었다.큰아버지는 모든 증거를 모았다. 유희와 다른 남자들의 사진과 영상도 포함되어 있었다.큰아버지는 유희와 관련된 모든 남자의 아내들에게 그 증거를 나누어 주었고, 그 후에는 매체에 공개하여 유희의 추악한 모습을 전 세계에 퍼뜨렸다.유희는 이제 집밖에 나갈 수 없었다. 한 여성은 그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유희의 별장 앞에 사람이 오갈 때마다 썩은 계란과 상한 채소를 던졌다.또한 큰아버지는 유희한테서 피해를 받은 여성들에게 남편이 유희에게 준 돈을 되돌려받을 수 있도록 변호사를 고용하여 도와주었다. 얼마 안 되어 유희는 금방 빈털터
엄마는 남아서 같이 있어주겠다고 하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먼저 떠나셨다. 하늘은 어두웠다. 나는 엄마를 안고 싶었다. 엄마는 느끼지 못하실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위로해드리고 싶어서 말했다. “엄마, 슬퍼하지 마세요. 민준이 없다고 해도 엄마는 꼭 행복하게 지내셔야 해요.” “민준이가 어리고 겁도 많은데 그런 어두운 곳에서 혼자 자야 한다니...” “엄마가 잘못했어. 사랑받지 못한다면 억지로 붙잡아두지 말았어야 했어. 이혼할 결심을 했으면 너도 무사했을 텐데...” 엄마는 계속 말했다. 나는 엄마와 나란히 앉아 엄마한테 몸을 기댔다. 마치 그동안 나를 재우기 위해 이야기를 해주던 밤처럼. 조금 졸리던 참에 급한 발소리에 깨어났다. 엄마는 경계하듯 일어나셨다. 아빠였다. 아빠는 옷이 헝클어지고 얼굴이 창백했다. 특히 내 사진이 있는 묘비를 보고 나서 눈에 슬픔이 비쳤다. “내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을 못 보게 하는 이유가 뭐냐!” 아빠가 입을 열자마자 비난이 시작되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아빠에게 왜 누구도 잘못을 인정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엄마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네 핸드폰을 확인해 봐. 내가 전화를 몇 통 했는지, 다 거절당했어.” “그럴 리가 없어. 내 핸드폰에는 당신 번호 하나도 없어...” 말을 다 끝내지 못한 채 아빠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을 닫았다. 그날 아빠의 핸드폰은 유희만 움직였고, 왜 통화 기록이 없었는지...왜 엄마가 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몰랐는지...답은 명백했다. “그럼 나를 만나자마자 말했어야지. 아니면 나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잖아.” 엄마는 아빠를 무시했다. 아들의 유골을 버리겠다고 말할 수 있는 아빠가 알더라도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죄책감을 느낄 리 없다. 그냥 계속 비난할 뿐이다. 나는 엄마와 다른 세계에 있지만 우리 둘 다 그를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가 자신의 연기력을 다해 내 묘비를
경찰이 금방 도착했다. 그들은 상황을 파악한 뒤 엄마에게 물었다. “아이를 만날 수 있을까요?” 아빠가 옆에서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경찰을 부른 거야. 영상 증거도 있고, 나는 애 아빠야. 내가 왜 애한테 누명을 씌우겠어? 어서 그 망나니를 데리고 나와 유희한테 사과하게 해!” 엄마의 눈에 복수심이 스쳤다. “저를 따라오세요.” 검은 천이 조금씩 들리자 나를 담은 작은 상자가 드러났다. 상자 위에는 나의 환하게 웃는 흑백 사진이 놓여 있었다. 엄마가 처음으로 나를 놀이공원에 데리고 갔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이건...” 경찰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 엄마의 눈엔 차가운 증오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아빠를 똑바로 쳐다보며 한 마디씩 끊어 말했다. “제 아들은 3일 전에 이미 사망해서 화장되었습니다. 유골은 여기 있습니다. 제 손엔 사망 진단서와 화장 증명서도 있어요. 그렇다면...이 남자분께 묻고 싶네요. 제 아들이 어떻게 어제 쇼핑몰에 나타나 유희 씨에게 황산을 뿌릴 수 있었을까요?” “이건 모함하는 게 아니고 뭡니까?” 엄마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눈 속엔 깊은 고통이 서려 있었다. 경찰들조차 그 모습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가 세상을 떠난 지 3일이 지났는데, 아빠라는 사람은 이를 알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기 아이를 모함하고 있었다.아빠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굳었다. 나는 아빠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빠는 이내 다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서지아, 너 정말 역겨워! 네 아들을 감싸려고 죽었다고까지 말하다니. 네가 무슨 자격으로 엄마라고 할 수 있어?” “그깟 상자 안에 대체 뭐가 들어 있나 보자!” 그는 손을 뻗어 상자를 바닥에 쳐내렸다. 상자가 떨어지는 순간 나는 엄마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경찰들도 그가 이런 행동을 할 줄 몰랐는지 잠시 멍해 있다가 재빨리 아빠를 붙잡았다. 그런데도 아빠는 발로 바닥
엄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빠를 쳐다보며 말했다.“맹준오, 민준이가 알레르기 때문에 체리를 뱉은 걸로 뭐 이렇게까지 난리를 쳐. 민준이 네 아들이야!”아빠가 손을 휘두르며 소리쳤다.“나는 이런 아들 둔 적 없어! 어린 게 사람 목숨까지 해치려 들어? 잡기만 해봐 가만두지 않겠어!”나는 소리쳤다.“나 아니야!”어리지만 나도 안다. 사람을 해치는 건 나쁜 짓이고, 나는 나쁜 아이가 아니다.하지만 아빠는 내 말이 안 들렸다.엄마는 화가 나서 앞으로 나가며 아빠에게 말했다.“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민준이가 아직 어린데 어떻게 사람을 해쳐?”엄마의 말에 아빠는 엄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맞아! 유희한테 황산을 뿌린 악랄한 짓도 네가 사주했겠지! 아니었으면 민준이 같은 애가 대체 황산을 어디서 구했겠어?”엄마는 화가 나서 문 옆에 있던 장식용 꽃병을 들었다.“황산? 그게 언제 어디서 일어났는데? 증거 있어? 내 아들을 모함했다간 너랑 같이 끝장을 볼 줄 알아!”아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확신에 찬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들어 말했다.“어제 오전, 유희가 쇼핑몰에서 황산을 맞았다. 그 황산을 뿌린 아이의 키며 모습, 심지어 입고 있던 옷까지 민준이가 그날 파티에서 입었던 거랑 똑같아. 쇼핑몰 CCTV에 다 찍혔다고!”아빠는 핸드폰에서 영상을 재생시켜 엄마에게 던졌다.나는 엄마와 함께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내밀어 영상을 봤다. 영상 속 내용은 아빠 말대로였다.그런데 나는 이미 죽었는데 황산을 뿌릴 수가 없었다. 아빠는 엄마가 말이 없자 영상 속 아이가 나라는 것을 인정한 줄 알았다.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시혜를 베푸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맞지? 민준이도 내 아들인데 내가 그걸 몰라보겠어? 얼른 민준을 데리고 와. 내가 데리고 가서 유희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게 할 테니까. 유희랑 나 사이를 생각하면 유희도 민준이를 용서할 거야. 이렇게 하면 경찰서도 일찍 사건을 끝마칠 테고. 아니면 경찰이 오면 얘기는 달라질
나는 엄마가 걱정하실까 봐 평소 엄마가 하시던 대로 옷을 세탁기에 돌리고 바닥도 깨끗이 닦았다.엄마가 돌아오시더니 옷은 왜 갈아입었냐고 물으셨다.나는 얼굴을 붉히며 일부러 부끄러운 척했다.“바지에 오줌 쌌어요.”그 말에 엄마는 며칠 동안 나를 놀리셨다.아빠가 내 방에서 나를 찾을 리 없었다. 이미 나는 작은 상자 안에 들어가 있었으니까.아빠는 화난 얼굴로 엄마를 쏘아보며 말했다.“서지아, 너 진짜 대단하네. 이혼하자고 말 꺼내기 전에 애부터 숨겨놓았어?”“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집안 배경도 없으면서, 너도 이혼하면 내가 널 이길 수밖에 없다는 거 알잖아.”“그래서 민준 앞세워서 나 붙잡으려고? 나한테 돈 뜯으려고 작정했지? 너 정말 머리 하나는 잘 굴리네.”“내가 딱 한 마디만 할게. 이혼은 해줄게. 돈 조금 줄 수도 있어. 하지만 민준은 절대 못 줘!”아빠의 독설을 듣고도 엄마는 아무 말없이 가만히 계셨다.그리고는 준비해 두었던 짐과 내 유골을 들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아빠는 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소리쳤다.“꺼져! 아주 멀리 꺼져 버려! 내가 우리 부모님 때문에 결혼했지, 너 같은 애랑은 죽어도 결혼 안 해! 다시는 찾아오지도 마!”아빠가 내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난 아빠랑 있지 않을 거야! 엄마랑 있을 거야! 아빠 싫어!”그리고 엄마를 따라 싫어했던 그 집을 떠났다.엄마는 가끔 잠들기 전 내게 자신과 아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그 이야기를 내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셨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그 이야기를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다.엄마와 아빠는 소꿉친구였고, 두 집안은 친척처럼 가까운 사이였다.어릴 때부터 약혼이 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엄마의 집안이 망하면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충격으로 돌아가셨다.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중학생이었던 엄마를 데려다 키우셨고, 약혼을 그대로 지키기로 하셨다.둘은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며 별생각 없이 잘 어울렸다.하지만 대
아빠는 엄마가 대꾸하지 않자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내가 말하고 있잖아! 귀먹었어?”“내 앞에서 뺨을 때리면 내가 얼마나 창피한지 알긴 해?”“네 아들이라는 놈, 그 버릇없는 짓거리가 다 너 닮은 거야! 남자가 돼가지고 온갖 응석을 받아주니까, 온전치 못한 놈이 됐잖아. 따지고 보면 민준이는 유희 딸만도 못해!”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앞으로 아들 내가 직접 키운다. 네가 계속 키웠다가는 그냥 망가져버릴 게 뻔해!”엄마는 아빠를 막아섰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민준이가 네 아들이라는 건 기억하고 있었네? 맨날 내 아들, 내 아들 하고 다니길래 나 혼자 키운 줄 알았잖아. 뭐, 상관없어. 우리 이혼하자.”아빠는 엄마가 건넨 이혼서류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정신 나갔냐? 이 결혼은 네가 울며 매달려서 얻어낸 거잖아. 네가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있을 거 같아?”엄마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너무 지친 모습이었다.“맞아, 내가 울며 불며 매달려서 얻게 된 결혼이었지. 하지만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것도, 민준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고 있어. 우리 이제 서로 그만 괴롭히자. 도장 찍으면 네 첫사랑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을 텐데, 좋지 않아?”아빠는 엄마의 손을 거칠게 밀쳐냈고, 그 충격에 엄마는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넌 진짜 미쳤어! 네가 멋대로 남의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갔던 건 기억 안 나? 유희가 너랑 시비 안 붙어준 게 어디야. 안 그랬으면 불법 침입이야. 네 아들놈이 네 버릇을 그대로 배워서 예의도 모르고, 내가 밖에 서 있으라고 했더니 생떼를 부리다 못해 죽을 둥 살 둥 쇼를 했잖아!”“그런 걸 다 받아주고 나랑 이혼하자고 떠들어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데?”엄마는 화가 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뭘 생각했냐고? 내가 너한테 묻고 싶어! 민준이가 체리 알레르기가 있다는 거 너 알고는 있기는 해?”“어릴 때 처음 먹고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목이 부어 숨도 못
엄마가 전화 손목시계의 위치 추적으로 나를 찾았을 때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드러난 피부는 온통 붉은 두드러기로 가득했다.아빠는 옆에서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네 아들이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쓰레기통에 버리면 될 걸 왜 식탁에다 토하냐고? 남의 호의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그 점은 너랑 똑같아!”엄마는 폭발하듯 아빠의 뺨을 때리고, 나를 번쩍 안아 병원으로 달려갔다.나는 공중에 둥둥 떠 있으면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아빠, 정말 싫다.나랑 엄마에게는 관심도 없으니까.맞다, 나는 죽었다.‘이게 죽음이라는 건가?’‘작년에 옆집에 살던 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렇게 공중에 떠 있었던 걸까?’‘그때 할아버지를 못 봤으니 아마 지금 아빠랑 엄마도 날 못 보겠지?’하지만 나는 그들을 볼 수 있었다.엄마가 나를 안고 오열하며 길가에서 구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의사 아저씨에게 간절히 나를 살려달라고 부탁했다.의사 아저씨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화면에는 평평하게 이어진 세 개의 선이 떠 있었다. 아무런 기복도 없었다.엄마는 혼자 바쁘게 움직였고, 나는 내가 한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이윽고 한 아저씨가 엄마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엄마는 그 상자를 품에 안고 길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차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침대에 누운 엄마는 이따금 담요를 껴안고 흐느끼거나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곤 했다.나는 살며시 엄마 옆에 누웠다. 예전처럼 엄마가 나를 재워줄 때처럼 살며시 그녀를 토닥여주고 싶었다.그런데 내 손이 엄마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버렸다.그 모습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엄마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엄마는 움직임 없이 누워 있었다. 나는 심심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엄마와 완성하지 못한 블록 앞에 다가갔다.이어 블록을 다시 맞추려 했지만 내 손은 블록을 통과하기만 할 뿐 집을 수가 없었다.애니메이션을 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