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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작가: 약함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1-25 13:44:13
“왜 나를 말리는 거야? 내가 한 말은 사실이잖아. 나는 확신해, 고윤슬은 아직도 너를 사랑하고 있을 거야. 그래서 그냥 아무 남자나 데려와서 남자친구 행세를 한 거라고!”

“진예주! 그만하라고!”

예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민우가 화난 목소리로 그녀를 막아섰다.

“허민우, 왜 나한테 소리를 질러? 설마 네 마음속에 아직도 윤슬이 남아 있는 거야?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예주는 금세 눈물을 글썽이며 마치 상처라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예주의 그 가엾은 표정을 보자 나는 입가에 비웃음을 띄웠다. 예주는 늘 자신을 불쌍하게 보이도록 꾸며내는 데 능숙했다. 아마 민우도 그런 모습에 넘어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남자들은 대부분 연약해 보이는 여자를 좋아하지만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허 팀장, 여자 보는 안목을 좀 높여야 할 것 같네.”

도준은 내 허리에서 손을 떼고 민우에게 다가가 예주를 힐끗 쳐다보더니 조소 어린 말투로 말했다.

과묵해 보이는 도준이 이렇게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말을 하다니.

민우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그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자 나는 마음이 통쾌해졌다.

“변 대표님,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민우는 예주의 무례한 행동이 얼굴에 먹칠이 된 듯 급히 도준에게 인사를 건넨 뒤, 예주의 팔을 잡아채며 자리를 떠났다.

“봤지? 우리 윤슬이가 아무 남자나 데려와도 저 바람둥이보다 나아!”

그들이 떠날 때, 시정은 마지막 한마디로 민우를 비난했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더는 미소를 유지할 수 없었다. 미소는 점점 사라졌고, 나는 도준을 힐끗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요.”

“할 말이 좀 있으니까 친구 먼저 돌려보내.”

도준은 시정을 잠깐 쳐다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향해 말했다.

“저희 사이에 할 얘기는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어쩐지 나는 도준의 깊고 차가운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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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정은 자신이 괜한 말을 해서 내 상처를 건드렸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나는 이미 마음을 정리한 상태다. 더는 민우 같은 쓰레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않을 거고 그럴 가치도 없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열심히 일해서 부모님께 효도를 하는 것이다.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다. 나의 부모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가며 나를 대학까지 보냈다. 아빠는 나이도 많고 심장도 좋지 않아서 평소에 약을 많이 드셔야 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는 오직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은 돈을 벌어 부모님께 효도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JS그룹에 입사한 후 바쁘게 일하며 내 생활은 다시 평온을 찾은 듯했다. 그러나 그 평온함도 오래가지 않았다.내가 민우와의 결혼을 갑자기 취소한 이후 아빠의 심장병이 더욱 악화됐다.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약을 복용해야 했고, 의사는 심장 스텐트 시술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하지만 심장 스텐트 시술을 하는 건 최소 4,000만 원이라는 거액이 필요했다. 시술 이후의 비용까지 고려하면 우리 집 형편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엄청난 금액이었다. 아빠는 내가 걱정할까 봐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의사로부터 상태가 악화돼 약만으로는 더 이상 오래 버티기 힘들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심장 스텐트 시술만이 아빠의 생명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었다.나를 부모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눈앞에서 아빠가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절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수술비를 모으기로 결심했다.그러나 하늘은 나에게 돈을 마련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어느 날 일하던 중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 너머의 엄마는 울먹이며 아빠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며칠 내로 수술을 하지 않으면 위험해질 거라고 말했다. 그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렸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이 결정적인 순간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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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훈 씨, 내가 데려다줄게. 그냥 보내기엔 너무 걱정돼서 그래.” 시정은 세훈의 팔에 기대어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아까 내가 했던 말도 있고 해서 세훈이 이번마저 거절한다면 오히려 의심만 더 살 게 뻔했다. 그래서 세훈은 더는 거절하지 않고, 시정이가 자기를 데려다주는 것을 동의했다.그들이 떠난 후 나는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섰다. 나는 택시를 타고 시정의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내일 출근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내일은 첫 출근이니, 아침부터 허둥대지 않도록 준비를 철저히 하고 싶었다.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밤 9시였다. 시정이 아마도 조금 늦게 돌아얼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일찍 방으로 들어가 쉴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시정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시정이 빨리 돌아온 걸 보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시정아,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야? 남자친구랑 좀 더 있지 그랬어?” 나는 시정의 어깨를 감싸며 장난스럽게 물었다.“세훈 씨사 피곤하대. 아파트 앞까지 가자마자 바로 돌아가라고 하더라고. 윤슬아, 내가 뭘 잘못했나? 오늘 세훈 씨 태도가 뭔가 이상한 것 같아.” 시정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세훈이 피곤하다고 말한 건 다 핑계일 것이다. 아마 자신의 행동을 들킨 게 마음에 걸려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시정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게 아닌가 자책하고 있었다. ‘이 바보 같은 계집애, 잘못한 건 바람 핀 그놈인데 왜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속의 분노를 억눌렀다. 오늘 세훈에게 경고는 했지만, 만약 그가 바뀌지 않고 시정의 마음을 계속 가지고 논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시정아, 그게 무슨 말이야! 너처럼 착하고 이해심 깊은 여자친구가 어디 흔한 줄 알아? 양세훈 씨는 너랑 사귀게 된 걸 정말 행운이라

  •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그 잔향   제28화

    나는 조건을 제시한 뒤 세훈의 표정을 살펴보았다.세훈은 내가 제시한 조건을 듣고는 눈을 반짝이며 거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아요, 윤슬 씨. 앞으로 시정이에게만 잘할게요. 절대 다른 여자와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나는 차갑게 세훈을 쳐다보며 말했다.“오늘 한 말, 꼭 지키세요. 만약 당신이 시정을 배신하게 된다면, 그땐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나는 세훈에게 마지막 경고를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 자리로 돌아왔다. 남자들의 약속이란 대부분 허울일 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였다면 절대 기회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정이가 세훈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가 바람 핀 걸 직접적으로 증명할 증거가 없었기에 괜히 시정이에게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그리고 내심 세훈이가 내 말을 듣고 진심으로 시정에게 전념하길 바랐고, 시정이가 정말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바랐기에 더 이상 세훈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내가 자리로 돌아온 지 몇 분 후에야 세훈이 천천히 자리로 돌아왔다. 그가 일부러 시간을 맞추어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세훈 씨, 화장실 갔다 오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세훈이 돌아오자 시정은 반갑게 그의 팔을 붙잡으며 투덜거렸다. 평소 털털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소녀처럼 그의 곁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미안해, 배가 좀 아파서 오래 걸렸어. 오래 기다렸어?” 세훈은 나를 의식하며 대충 둘러대듯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마음이 놓인 듯 표정이 밝아졌다.“배가 아프다고? 괜찮은 거야? 아프면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세훈이가 아프다고 하자, 시정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세훈을 살펴보았다.“괜찮아, 집에 가서 약 먹으면 나아질 거야.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세훈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속으로는 그의 뻔뻔함에 혀를 찼다. 다른 여자와 통화해놓고

  •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그 잔향   제27화

    전화를 끊은 세훈의 얼굴에는 한결 편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를 발견한 순간, 그 미소는 금세 굳어버렸다.“윤슬 씨,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거예요?”세훈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시선을 회피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그가 분명 뭔가 숨기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방금 통화 내용, 다 들었어요.”나는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난 세훈에게 더 이상 조금의 호감도 남지 않았다. 양세훈 역시 진심으로 시정을 대하지 않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내 말을 들은 세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눈동자에는 불안감이 서렸다.“그게, 윤슬 씨, 그건...” 세훈은 무언가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를 제지했다.“양세훈 씨, 여기 좀 불편하니까 저쪽에서 얘기하죠. 여기서 말하면 사람들이 들을지도 모르잖아요.”나는 복도 끝 창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훈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망설이다가 내 말을 따라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방금 다른 여자와 통화하고 계셨던 거죠? 그리고 그 여자랑은 평범한 관계가 아닌 듯하던데, 제 말이 틀렸나요?”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세훈을 노려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시정이가 그와 진심으로 사귀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의 선넘은 행동에 더욱 화가 났다. 시정은 내 가장 소중한 친구다. 그래서 그녀가 나처럼 배신당하는 고통을 겪게 놔둘 수는 없었다.“맞아요...” 세훈은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알아버린 이상 변명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솔직하게 인정했다.“윤슬 씨, 방금 통화한 건 제발 시정 씨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세훈은 다급하게 부탁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내가 묻는 것에 솔직히 답해봐요. 당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방금 전화 속의 여자예요, 아니면 시정이에요? 시정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건드리지 말았어야죠.”민우에게서 상처를 입은 후로, 나는 세훈 같은 부류의 남자들에게는 더 이상 관용을 베풀고

  •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그 잔향   제26화

    그러나 시정은 원래 털털한 성격이라 세훈을 의심할 리가 없을 것이다.사실 나도 세훈을 의심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내 소중한 친구가 나처럼 남자의 배신으로 고통받는 일만큼은 피하게 하고 싶었다. 그 가슴 저미는 고통을 다시 누군가에게서 보게 되는 건 끔찍했다.세훈은 여전히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계속해서 타자를 하고 있었다. 시정은 나를 축하해주며 웃음꽃을 피우느라 세훈의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그가 보이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식사 중간쯤, 세훈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화장실 쪽으로 향하는 그의 표정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이 사람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순진한 남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한편 시정은 별 생각 없이 여전히 맛있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시정아, 네 남자친구 평소에 너한테 잘해줘? 남자친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나는 조심스럽게 시정에게 물었다.“세훈 씨는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야. 나처럼 회사에서 일하는데 다른 부서에서 일하고 있어.”시정은 나의 질문에 전혀 경계하지 않고 답해줬다.“그럼 항상 잘해주는 거야? 자주 만나서 시간도 같이 보내고?”내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자 시정은 놀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윤슬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은 거야? 네가 내 남자친구한테 이렇게 관심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너 혹시 세훈 씨한테 관심 있는 거야?”나는 평소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성격이라 시정이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충 둘러대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세훈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화장실에 오래 있어도 이 정도 시간이면 돌아올 법했기에, 그에 대한 의심이 점점 커져갔다.“시정아, 나도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 여기서 기다려.”나는 아무렇게나 핑계를 대고 핸드폰을 챙겨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그 잔향   제25화

    시정은 나를 꽉 안아주며 나보다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내일부터 출근하니까 오늘 저녁은 내가 쏠게.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내일부터 JS그룹에서 일하게 되니 오늘은 특별히 한턱내기로 했다. 시정이 그동안 나를 많이 챙겨줬으니 고마운 마음도 전할 겸, 마음껏 대접하고 싶었다.“좋아, 오늘 저녁 장소는 내가 정할게!”내가 한턱낸다고 하자 시정은 더없이 신 났다.“참, 네 남자친구도 같이 부르자! 지난번에 한번 만나기로 했었잖아. 오늘이 딱 좋은 기회인 것 같아.”나는 지난번에 시정의 남자친구를 만나기로 했던 걸 떠올리고, 오늘 만나자고 제안했다.시정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곧바로 내 제안에 곧바로 동의하며 핸드폰을 꺼내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우리는 택시를 타고 먼저 시정이 예약한 식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약 30분 후, 시정의 남자친구인 양세훈이 도착했다.그를 위아래로 살펴보니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안경을 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세훈 씨, 왜 이렇게 늦었어? 우리 기다린 지 한참 됐어.” 세훈이 나타나자마자 시정은 그의 팔짱을 끼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 털털한 모습과는 달리 아주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의 모습이었다.나는 시정의 그런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모습의 시정은 나도 처음이었다. 세훈이 그녀의 평소 모습도 알고 있을까 궁금해졌다.“차가 좀 막혔어요. 미안해요.” 세훈은 미안한 표정을 지은 채 사과하며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괜찮아요. 어차피 저희도 시간은 넉넉하거든요.”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속으로는 의아했다. 이미 퇴근 시간도 지났고, 이 식당은 번화가에 있지 않았기에 차가 막힐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정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괜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의문을 마음속에 묻어두었다.비록 내가 한턱낸다고 했지만, 시정은 비싼 메뉴를 고르지 않았다. 아마도 내 돈을 아껴주려는 것이었다. 내가 최근에 겨우 취업에 성공했고, 그전에는 결혼 준비로 돈을

  •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그 잔향   제24화

    사실 나도 시정이가 만나고 있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평소 털털한 시정이 그 사람과 통화할 때는 갑자기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변하는 걸 보면, 그 남자가 꽤 특별한 사람일 것 같았다.“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 나 오늘 좀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서 쉴게.”도준의 차 안에서 있었던 일로 몸이 불편해진 상태라, 당장이라도 샤워를 하고 싶었다. 나는 그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나는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오늘 하루에만도 많은 일이 벌어졌고, 온몸이 피곤해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그렇게 며칠 동안 나는 시정의 집에서 지냈다. 요즘 시정은 회사 일로 바쁘고, 나 역시 아직 할 일이 없어서 시정의 임시 가사 도우미 역할을 했다. 집안 청소를 하고 간단히 요리도 해주면서, 시정이 나를 재워주는 것에 대한 보답을 하고 있었다. 시정이가 이미 나를 받아줬으니, 나도 바쁜 그녀를 위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했다.어느 날 청소기를 돌리며 열심히 집안을 정리하고 있던 중, 낯선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살짝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뜻밖에도 JS그룹의 합격 통보였다.합격 소식을 듣는 순간, 믿기지 않아 한동안 멍해졌다.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없길래 불합격한 줄 알았다. 나는 며칠만 더 기다려보고 다른 회사에 지원하려고 했는데, 드디어 합격 통보를 받게 된 거다.전화를 끊은 후에도 기쁨이 가라앉지 않아 나는 거실에서 혼자 환호성을 질렀다. 통화한 사람이 내일 회사로 출근하라고 말했기에, 나는 마음이 들뜨면서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좋은 기분 덕에 청소할 힘도 솟아났다. 나는 한나절 만에 시정의 집을 구석구석 반짝이게 청소하고, 그녀가 며칠 동안 쌓아 둔 빨랫감도 모두 세탁했다.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온 시정은 깨끗해진 집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윤슬아, 너 복권이라도 당첨됐어? 오늘 왜 이렇게 부지런 떨면서 집안일을 다 한 거야?”시정은 거실을 한 바퀴 돌

  •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그 잔향   제23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나는 더 이상 도준과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아서, 이 말을 남기고 조수석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내 말에 도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가속 페달을 밟아 나를 뒤로 한 채 차를 몰고 사라졌다.나는 살짝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정말 매너 없네. 어차피 오늘부로 변도준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가 된 거니까, 어떻게 행동하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앞으로는 만나도 모르는 사이처럼 행동하야지.’몇 걸음 걸은 후, 택시를 잡아 시정이 사는 곳으로 향했다. 나는 택시에 오른 후에야 도준의 재킷이 아직도 내 어깨에 걸쳐져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원래 돌려주려고 했지만, 그의 연락처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기회 되면 돌려줘야겠어.’ ‘대기업의 대표라면 재킷 하나쯤 없어도 괜찮겠지.’시정의 집에 도착하자, 그녀도 방금 집에 도착한 상태였다. 시정은 내 옷이 어딘가 흐트러져 있고, 도준의 재킷을 걸치고 있는 걸 보더니, 뭔가를 눈치챘는지 나를 한쪽으로 불러섰다.“윤슬아, 솔직하게 말해.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 오늘 밤 또 누구랑 그런 일이 있었던 거야?” 시정의 시선은 내 목 위의 키스마크에 고정되었고, 곧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시정이가 나의 절친이라곤 해도, 나는 원래 꽤 보수적인 성격이라 이런 질문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아니야, 그런 일 없었어. 네가 오해한 거야.” “네 목에 남아 있는 자국만 봐도 알 수 있어. 빨리 말해, 누구야? 설마 또 변도준과 잔 거야?”시정의 호기심에 불이 붙었다. 내 입에서 사실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 놓아주지 않을 기세였다.결국 그녀의 집요한 질문에 나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역시 변도준일 줄 알았어. 안 그래도 그 남자가 너한테 관심 있어 보였는데, 오늘 또...”시정은 말을 끝까지 이어가진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

  •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그 잔향   제22화

    “이제 와서 부끄러운 거야? 고윤슬, 그날 밤에는 꽤나 대담했었는데. 솔직히 난 그때의 네가 더 마음에 들거든.”도준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오르며, 그는 내 귀에 바짝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뜨겁게 내 귓가를 스치며 자극적인 기분이 들었다. 나는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에 끌려들어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치며 욕하려는 순간, 도준은 갑자기 몸을 굽히더니 내 몸을 탐했다.시간이 한참이 흘렀고, 나는 힘이 모두 빠져있었지만, 도준은 여전히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내 몸을 탐했다. 마침내, 도준이 저음으로 거친 숨을 내쉬더니 동작을 멈추었다.도준은 내 몸에 기대어 숨을 들이마셨고, 격렬한 몸짓 탓에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나에게 전해졌다. 도준은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옷을 입었지만, 나는 움직일 기운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그대로 누워 있었다. 도준은 나를 바라보다가 그의 재킷을 벗어 내 위에 덮어주었다. “어디 사는지 알려줘. 데려다줄게.” 도준은 시동을 걸며 나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약국에 가야겠어요.” 나는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도준의 행동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치 상황을 이용하는 것 같아 분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이 남자에게 또 모든 걸 내주게 되다니, 그것도 별 이유 없이. 속으로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차라리 개한테 물린 거라 생각하자.'도준이가 원하는 걸 얻었으니 앞으로 날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나는 앞으로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말할 생각이었다.하지만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도준이 말했던 ‘공평'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결국 도준은 나를 갖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니까. “약국은 왜? 어디 아파?” 도준이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말투에 약간의 걱정이 담긴 듯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착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쨌든 우리는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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