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이 설립한 회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광고 회사는 그의 여러 부업 중 하나일 뿐이다. 그의 수많은 회사 중, 하필 이곳에서 그를 만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지금 내 목표는 대기업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고 커리어를 쌓는 것이다. 더 이상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었고 나의 꿈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나에게는 경력과 실력이 모두 있었기에 보통 회사라면 합격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지만, JS그룹만큼은 달랐다. JS그룹은 직원 복지도 뛰어났기에, 그만큼 입사 기준도 까다로웠다. 면접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면접을 마치고 회사를 나올 때까지도, 회사 규모에 압도되어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JS그룹은 수천 명의 직원이 일하는 어마어마한 대기업이었다. 곧 도준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아직 서른 즈음의 젊은 나이에 이렇게 많은 회사를 소유한 것도 모자라, 이 정도 규모의 회사는 그저 그의 여러 사업 중 하나라니. 도준은 내가 평생 본 사람 중 가장 젊은 데다가 돈이 많은 남자가 분명했다. 물론, 도준이 가진 것들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는 단지 JS그룹에 성공적으로 입사할 수만 있으면 된다. 나는 혼자 길을 걸으며 마음속으로 면접에 꼭 합격하길 간절히 기도했다. 한참이 지난 후, 갑자기 뒤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서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뒤에서 계속 경적을 울린다면 기분 나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윤슬!”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들리지 않는 척 무시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허민우는 더 이상 한 순간조차도 보고 싶지 않았다. “윤슬아, 거기 서!” 민우는 성큼성큼 다가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불만에 찬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허민우, 왜 길을 막고 그래?” 나는 그를 차갑게 올려다보며 냉담하게 말했다. “할 말이 있어.”
아마 내 태도가 민우를 화나게 만든 것인지, 그는 나를 노려보며 분노와 비난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허민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욕하는 거지? 이 쓰레기 자식아, 넌 어떻게 신혼집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랑 잘 생각을 했던 거지? 네가 한 짓은 모두 잊고 이제 와서 나를 욕하려는 거야? 그럼 너는 다른 여자와 몸을 섞었으면서 나는 다른 남자를 만나면 안되는 거야?” 나는 민우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이 듣든 말든 상관없었다. 내 외침에 민우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지는 게 똑똑히 보였다. “네가 나와 예주 사이의 일로 상처를 받은 건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도 아무 남자와 함부로 몸을 섞는 건 좀 아니잖아. 변도준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한 거야?” 민우의 목소리가 조금 온화해졌지만, 여전히 나를 나무라는 듯했다. “변도준이 어떤 사람인지 너한테서 설명들을 생각은 없어. 허민우, 우린 이미 끝났어. 내가 누구와 함께하든 이제 너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우린 앞으로 모르는 사이니까 더 이상 내 일에 간섭하려 들지 마. 그리고 두 사람 오래오래 행복하길 바래!” 나는 차가운 말투로 말하며,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고 민우를 피해 걸어갔다. 민우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그가 다시 그런 식으로 나를 비난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의 뺨을 때려줄 생각이었다. 그 정도는 민우가 충분히 자초한 일이다. 그러니 쫓아오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좋았던 기분이 허민우 때문에 모두 망쳐져 버렸다. 최근에 너무 기분이 저기압이었기에, 나는 오늘 밤 제대로 스트레스를 풀기로 결심했다. 나는 마트에서 맥주와 간식 한가득 사 들고 서강 대교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시정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술을 마셔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는 아직 야근 중이라 퇴근 후에야 올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내가 목격한 건, 서현이 울먹이며 도준의 품에 안기려는 장면이었다. 여자가 이렇게까지 애원하면 대부분의 남자는 마음이 약해질 법도 하지 않나? 게다가 서현은 엄청난 미모를 자랑하는 톱스타다. 그녀와 만나고 싶어하는 남자들은 아마 줄을 섰을 것이다. 그러니 도준도 이제 마음이 풀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그러나 상황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도준은 서현을 거의 무정하게 밀어냈고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운 빛을 띠고 있었다. “방금도 말했지만, 우리 관계는 이미 끝났어. 똑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게 하지 마.” 도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현을 바라보며 미소 하나 없이 냉정하게 말했다. ‘정말 매정한 남자네.’ 여자를 차버리는 데 전혀 주저하지도 않고,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대담한 태도였다. ‘역시 변도준이 좋은 사람일 리 없지.’ 나는 속으로 그를 나쁜 놈으로 여기며 도준에게도 민우와 같은 딱지를 붙여주었다. 생각해보면 민우 같은 작은 부서의 팀장조차도 바람을 피우는데, 하물며 돈과 권력을 모두 가진 도준 같은 남자라곤 뭐가 다르겠는가? 다행히도 난 민우와 결혼 전까지 관계를 맺지 않기로 했었기에 조금이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반면 도준에게 여자란 옷을 갈아입듯이 쉽게 바꿀 수 있는 상대일 것이다.“변도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어?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네 곁에 있었는데... 정말 이렇게 매정하게 날 버리려는 거야? 최소한 이유라도 말해줘야 할 거 아냐.” 서현은 마침내 눈물을 터뜨리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보아도 그 모습이 매우 애처로웠다. 하물며 상대가 남자라면 서현의 눈물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정말 이유를 말해줘야 이해하겠어? 문서현, 난 네 체면을 조금이라도 지켜주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야.” 도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현을 쳐다보며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서현은 그의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
도준은 확고하게 서현을 내치려는 듯했다. 하긴, 도준 같이 돈도 권력도 있는 남자가 바람핀 여자를 받아줄 리가 없었다. 나는 이제야 도준이 왜 그렇게 매정하게 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 나도 나를 배신한 사람은 다시 곁에 둘 수 없었다. 민우가 나를 배신한 순간, 아무리 가슴이 아프더라도 나는 그와의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도준 같은 남자라면 그 마음은 오죽할까.“도준아, 정말 나를 용서해줄 수 없는 거야?” 서현의 얼굴에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애절한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지만, 방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나는 이제 서현에게 조금의 동정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그녀가 자초한 일이라는 생각만 들었다.“꺼져!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사라지는 게 좋을 거야!” 도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거친 말투로 냉혹하게 내뱉었다. 그의 그 한마디에 서현의 온몸이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계속 설명하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지만, 도준의 말에 더 이상 용기가 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서현은 결국 울며 돌아섰다. 그녀가 떠나자 그제야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행동했다. 나는 도준이 곧 자리를 떠날 거라 생각했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내가 은밀히 숨어 있었던 게 엄청 티가 났던 것이다. “아까부터 재밌게 구경했을 텐데, 이제 구경 끝났이니 할 말 없어?” 도준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주변엔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나름 잘 숨었다고 생각했지만, 도준은 이미 내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도준을 너무 쉽게 분게 분명했다.내가 고개를 돌리자 도준은 어두운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고, 눈빛 속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도준을 쳐다보았다. 사실 몰래 엿듣는 건 칭찬받을 일이 아니기에 조금 민망한 기분이
“그게... 문서현 씨 같은 미녀를 그렇게 내치는 건 좀 아쉽지 않아요? 만약 조금이라도 미련이 남았다면 한 번쯤 용서해줘도 되지 않을까요?” 보통 사람들은 싸움을 말릴지언정 갈라서라고는 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절대 내 남자의 배신을 용납할 수 없겠지만, 도준의 행동이 옳다고 말하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괜히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게 나았다.그래서 나는 용서해주는 게 나을 거라고 말했다.“넌 내가 바람 핀 여자를 용서할 거라고 생각해?”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도준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지며 그의 시선에 노기가 서렸다. 나도 애써 미소 지으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속으론 이렇게 생각했다. ‘자기 연애사를 왜 나한테까지 묻는 거야? 나는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 들은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날 곤란하게 해야겠어?’“그리고 나와 문서현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냐. 우리는 서로 필요한 걸 얻기 위해 시작한 관계였을 뿐이야. 문서현이 원하는 건 명예와 돈이었고, 내가 원하는 건 그저 욕구를 해결하는 것뿐이야.” 도준은 차가운 시선으로 날 잠깐 쳐다보더니, 무미건조하게 말했다.‘그저 욕구를 해결하는 것뿐이라니...’ ‘이 남자, 정말 직설적이다 못해 너무 대놓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잖아.’“저기, 문서현 씨와의 관계를 저한테 굳이 설명하실 필요는 없어요. 이 일은 비밀로 할 테니 절대 어디 가서 함부로 말하지 않을게요.” 난 도준이가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설명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쨌든 이번은 고작 그와의 세 번째 대화였다. 나와 변도준은 그저 하룻밤을 함께한 낯선 사이일 뿐이다.내 말에 도준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뭔가 불쾌한 기색이 감돌았다. ‘내가 또 뭘 잘못 말한 걸까?’하지만 직감적으로 이 남자가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어색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나는 도준이 옆에 있는 동안 내내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기분이 언짢았기에 화가 난 듯이 도준을 노려보았다. ‘이 남자는 대체 뭘 하려는 걸까? 난 정말 우연히 듣게 된 것뿐인데, 날 이렇게 겁줄 필요가 있나?’ “널 원해.” 나는 화가 난 마음에 그를 쏘아보았지만, 도준은 전혀 화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얼굴에 묘한 웃음기를 띠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도준은 원래 잘생긴 데다가 차가운 인상이었는데, 이렇게 미소까지 짓고 있으니 나는 넋을 놓고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나는 한 번도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감탄한 적 없었다. 그런데 도준은 달랐다. 그가 가진 압도적인 외모와 기품은 본능적으로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도준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순간, 갑자기 그는 손을 내밀어 내 가슴을 만지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 미쳤어요? 당장 이거 놔요! 안 그럼 소리 지를 거예요!” 나는 화를 내며 그를 노려봤다. 그의 행동은 정말 선을 넘었기에 나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본래 보수적인 성향이 있는 편이라 그의 행동이 나를 불쾌하게 했다. “이미 한 번 잤으면서 이제 와서 새침한 척이라니. 고윤슬, 너 이러는 거 전혀 재미없어.” 도준은 내가 필사적으로 반항하는 모습을 보자 화가 난 건지, 눈빛이 조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달려들려고 안달이 났던 탓에, 도준은 나도 마찬가지로 그와의 잠자리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달랐다. 난 도준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날 밤 일은 단지 술에 취해 잠시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에 불과했다.“난 당신한테 관심 없어요! 변도준 씨, 당장 놔요! 전 집에 갈 겁니다.” 나는 도준을 노려보며 저항을 멈췄다. 난 그가 적어도 밖에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데려다줄게.” 도준은 말을 내뱉고는 내가 반항을 하기도 전에 바로 내 손목을 잡아채 그의 차 쪽으로 이끌었다. 순간 나는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고 본능적으로 벗어나고
도준의 진지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난 더욱더 도망치고 싶었다. 그날 밤 술에 취해 허민우라는 쓰레기에게 복수할 생각에 잠깐 도준에게 몸을 맡겼을 뿐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니 더 이상 도준과 몸을 섞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조건을 바꾸면 안 될까요? 그 일 말고는 뭐든 다 할게요...”내 입가엔 어색한 미소가 걸렸고,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도준과의 거리를 두려 했다. 내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남자, 나를 정말 통째로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너한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해? 고윤슬, 내가 원하는 걸 거절할 수 있는 여자는 없어.”도준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점점 나에게 다가왔다. 그 압도적인 태도에 기분이 나빠지려던 참이었다. ‘돈도 많고, 외모도 준수한 건 알겠지만, 이렇게까지 자만해도 되는 건가?’ ‘세상 모든 여자가 다 자기를 좋아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건가?’나는 한 걸음씩 뒷걸음질쳤다. 혹시라도 지금 이 자리를 뛰쳐나가면 무사히 도망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생각이 들었다.“그날 나한테 거기도 크고 테크닉도 만족스러웠다고 했잖아. 오늘 밤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줄게.”도준은 어느새 내 옆에 와 있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욕망으로 번뜩이는 눈빛에, 난 마치 사냥감이 된 듯 옴짝달싹 못 하고 말았다.“제발 좀 용서해 주세요. 그때 일은 사과할 테니 한 번만 봐줘요. 대인군자답게 한 번 넘어가주면 안 될까요?”난 간절한 표정으로 도준을 바라봤다. 나는 남자들은 보통 약하고 애처로운 모습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마음에도 없는 나약한 모습을 연기해보았다.“고윤슬, 말 좀 똑바로 해.”내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자 도준의 잘생긴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듯 나를 쳐다봤다. 남자들이라면 모두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나 싶었는데, 도준은 확실히 예외인 듯했다. 오히려 지금 내 태도가
“이제 와서 부끄러운 거야? 고윤슬, 그날 밤에는 꽤나 대담했었는데. 솔직히 난 그때의 네가 더 마음에 들거든.”도준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오르며, 그는 내 귀에 바짝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뜨겁게 내 귓가를 스치며 자극적인 기분이 들었다. 나는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에 끌려들어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치며 욕하려는 순간, 도준은 갑자기 몸을 굽히더니 내 몸을 탐했다.시간이 한참이 흘렀고, 나는 힘이 모두 빠져있었지만, 도준은 여전히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내 몸을 탐했다. 마침내, 도준이 저음으로 거친 숨을 내쉬더니 동작을 멈추었다.도준은 내 몸에 기대어 숨을 들이마셨고, 격렬한 몸짓 탓에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나에게 전해졌다. 도준은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옷을 입었지만, 나는 움직일 기운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그대로 누워 있었다. 도준은 나를 바라보다가 그의 재킷을 벗어 내 위에 덮어주었다. “어디 사는지 알려줘. 데려다줄게.” 도준은 시동을 걸며 나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약국에 가야겠어요.” 나는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도준의 행동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치 상황을 이용하는 것 같아 분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이 남자에게 또 모든 걸 내주게 되다니, 그것도 별 이유 없이. 속으로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차라리 개한테 물린 거라 생각하자.'도준이가 원하는 걸 얻었으니 앞으로 날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나는 앞으로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말할 생각이었다.하지만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도준이 말했던 ‘공평'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결국 도준은 나를 갖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니까. “약국은 왜? 어디 아파?” 도준이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말투에 약간의 걱정이 담긴 듯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착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쨌든 우리는 이제
시정은 자신이 괜한 말을 해서 내 상처를 건드렸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나는 이미 마음을 정리한 상태다. 더는 민우 같은 쓰레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않을 거고 그럴 가치도 없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열심히 일해서 부모님께 효도를 하는 것이다.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다. 나의 부모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가며 나를 대학까지 보냈다. 아빠는 나이도 많고 심장도 좋지 않아서 평소에 약을 많이 드셔야 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는 오직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은 돈을 벌어 부모님께 효도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JS그룹에 입사한 후 바쁘게 일하며 내 생활은 다시 평온을 찾은 듯했다. 그러나 그 평온함도 오래가지 않았다.내가 민우와의 결혼을 갑자기 취소한 이후 아빠의 심장병이 더욱 악화됐다.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약을 복용해야 했고, 의사는 심장 스텐트 시술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하지만 심장 스텐트 시술을 하는 건 최소 4,000만 원이라는 거액이 필요했다. 시술 이후의 비용까지 고려하면 우리 집 형편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엄청난 금액이었다. 아빠는 내가 걱정할까 봐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의사로부터 상태가 악화돼 약만으로는 더 이상 오래 버티기 힘들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심장 스텐트 시술만이 아빠의 생명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었다.나를 부모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눈앞에서 아빠가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절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수술비를 모으기로 결심했다.그러나 하늘은 나에게 돈을 마련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어느 날 일하던 중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 너머의 엄마는 울먹이며 아빠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며칠 내로 수술을 하지 않으면 위험해질 거라고 말했다. 그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렸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이 결정적인 순간에 내
“세훈 씨, 내가 데려다줄게. 그냥 보내기엔 너무 걱정돼서 그래.” 시정은 세훈의 팔에 기대어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아까 내가 했던 말도 있고 해서 세훈이 이번마저 거절한다면 오히려 의심만 더 살 게 뻔했다. 그래서 세훈은 더는 거절하지 않고, 시정이가 자기를 데려다주는 것을 동의했다.그들이 떠난 후 나는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섰다. 나는 택시를 타고 시정의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내일 출근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내일은 첫 출근이니, 아침부터 허둥대지 않도록 준비를 철저히 하고 싶었다.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밤 9시였다. 시정이 아마도 조금 늦게 돌아얼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일찍 방으로 들어가 쉴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시정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시정이 빨리 돌아온 걸 보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시정아,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야? 남자친구랑 좀 더 있지 그랬어?” 나는 시정의 어깨를 감싸며 장난스럽게 물었다.“세훈 씨사 피곤하대. 아파트 앞까지 가자마자 바로 돌아가라고 하더라고. 윤슬아, 내가 뭘 잘못했나? 오늘 세훈 씨 태도가 뭔가 이상한 것 같아.” 시정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세훈이 피곤하다고 말한 건 다 핑계일 것이다. 아마 자신의 행동을 들킨 게 마음에 걸려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시정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게 아닌가 자책하고 있었다. ‘이 바보 같은 계집애, 잘못한 건 바람 핀 그놈인데 왜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속의 분노를 억눌렀다. 오늘 세훈에게 경고는 했지만, 만약 그가 바뀌지 않고 시정의 마음을 계속 가지고 논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시정아, 그게 무슨 말이야! 너처럼 착하고 이해심 깊은 여자친구가 어디 흔한 줄 알아? 양세훈 씨는 너랑 사귀게 된 걸 정말 행운이라
나는 조건을 제시한 뒤 세훈의 표정을 살펴보았다.세훈은 내가 제시한 조건을 듣고는 눈을 반짝이며 거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아요, 윤슬 씨. 앞으로 시정이에게만 잘할게요. 절대 다른 여자와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나는 차갑게 세훈을 쳐다보며 말했다.“오늘 한 말, 꼭 지키세요. 만약 당신이 시정을 배신하게 된다면, 그땐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나는 세훈에게 마지막 경고를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 자리로 돌아왔다. 남자들의 약속이란 대부분 허울일 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였다면 절대 기회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정이가 세훈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가 바람 핀 걸 직접적으로 증명할 증거가 없었기에 괜히 시정이에게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그리고 내심 세훈이가 내 말을 듣고 진심으로 시정에게 전념하길 바랐고, 시정이가 정말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바랐기에 더 이상 세훈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내가 자리로 돌아온 지 몇 분 후에야 세훈이 천천히 자리로 돌아왔다. 그가 일부러 시간을 맞추어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세훈 씨, 화장실 갔다 오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세훈이 돌아오자 시정은 반갑게 그의 팔을 붙잡으며 투덜거렸다. 평소 털털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소녀처럼 그의 곁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미안해, 배가 좀 아파서 오래 걸렸어. 오래 기다렸어?” 세훈은 나를 의식하며 대충 둘러대듯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마음이 놓인 듯 표정이 밝아졌다.“배가 아프다고? 괜찮은 거야? 아프면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세훈이가 아프다고 하자, 시정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세훈을 살펴보았다.“괜찮아, 집에 가서 약 먹으면 나아질 거야.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세훈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속으로는 그의 뻔뻔함에 혀를 찼다. 다른 여자와 통화해놓고
전화를 끊은 세훈의 얼굴에는 한결 편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를 발견한 순간, 그 미소는 금세 굳어버렸다.“윤슬 씨,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거예요?”세훈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시선을 회피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그가 분명 뭔가 숨기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방금 통화 내용, 다 들었어요.”나는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난 세훈에게 더 이상 조금의 호감도 남지 않았다. 양세훈 역시 진심으로 시정을 대하지 않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내 말을 들은 세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눈동자에는 불안감이 서렸다.“그게, 윤슬 씨, 그건...” 세훈은 무언가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를 제지했다.“양세훈 씨, 여기 좀 불편하니까 저쪽에서 얘기하죠. 여기서 말하면 사람들이 들을지도 모르잖아요.”나는 복도 끝 창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훈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망설이다가 내 말을 따라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방금 다른 여자와 통화하고 계셨던 거죠? 그리고 그 여자랑은 평범한 관계가 아닌 듯하던데, 제 말이 틀렸나요?”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세훈을 노려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시정이가 그와 진심으로 사귀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의 선넘은 행동에 더욱 화가 났다. 시정은 내 가장 소중한 친구다. 그래서 그녀가 나처럼 배신당하는 고통을 겪게 놔둘 수는 없었다.“맞아요...” 세훈은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알아버린 이상 변명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솔직하게 인정했다.“윤슬 씨, 방금 통화한 건 제발 시정 씨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세훈은 다급하게 부탁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내가 묻는 것에 솔직히 답해봐요. 당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방금 전화 속의 여자예요, 아니면 시정이에요? 시정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건드리지 말았어야죠.”민우에게서 상처를 입은 후로, 나는 세훈 같은 부류의 남자들에게는 더 이상 관용을 베풀고
그러나 시정은 원래 털털한 성격이라 세훈을 의심할 리가 없을 것이다.사실 나도 세훈을 의심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내 소중한 친구가 나처럼 남자의 배신으로 고통받는 일만큼은 피하게 하고 싶었다. 그 가슴 저미는 고통을 다시 누군가에게서 보게 되는 건 끔찍했다.세훈은 여전히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계속해서 타자를 하고 있었다. 시정은 나를 축하해주며 웃음꽃을 피우느라 세훈의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그가 보이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식사 중간쯤, 세훈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화장실 쪽으로 향하는 그의 표정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이 사람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순진한 남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한편 시정은 별 생각 없이 여전히 맛있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시정아, 네 남자친구 평소에 너한테 잘해줘? 남자친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나는 조심스럽게 시정에게 물었다.“세훈 씨는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야. 나처럼 회사에서 일하는데 다른 부서에서 일하고 있어.”시정은 나의 질문에 전혀 경계하지 않고 답해줬다.“그럼 항상 잘해주는 거야? 자주 만나서 시간도 같이 보내고?”내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자 시정은 놀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윤슬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은 거야? 네가 내 남자친구한테 이렇게 관심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너 혹시 세훈 씨한테 관심 있는 거야?”나는 평소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성격이라 시정이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충 둘러대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세훈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화장실에 오래 있어도 이 정도 시간이면 돌아올 법했기에, 그에 대한 의심이 점점 커져갔다.“시정아, 나도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 여기서 기다려.”나는 아무렇게나 핑계를 대고 핸드폰을 챙겨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시정은 나를 꽉 안아주며 나보다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내일부터 출근하니까 오늘 저녁은 내가 쏠게.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내일부터 JS그룹에서 일하게 되니 오늘은 특별히 한턱내기로 했다. 시정이 그동안 나를 많이 챙겨줬으니 고마운 마음도 전할 겸, 마음껏 대접하고 싶었다.“좋아, 오늘 저녁 장소는 내가 정할게!”내가 한턱낸다고 하자 시정은 더없이 신 났다.“참, 네 남자친구도 같이 부르자! 지난번에 한번 만나기로 했었잖아. 오늘이 딱 좋은 기회인 것 같아.”나는 지난번에 시정의 남자친구를 만나기로 했던 걸 떠올리고, 오늘 만나자고 제안했다.시정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곧바로 내 제안에 곧바로 동의하며 핸드폰을 꺼내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우리는 택시를 타고 먼저 시정이 예약한 식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약 30분 후, 시정의 남자친구인 양세훈이 도착했다.그를 위아래로 살펴보니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안경을 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세훈 씨, 왜 이렇게 늦었어? 우리 기다린 지 한참 됐어.” 세훈이 나타나자마자 시정은 그의 팔짱을 끼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 털털한 모습과는 달리 아주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의 모습이었다.나는 시정의 그런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모습의 시정은 나도 처음이었다. 세훈이 그녀의 평소 모습도 알고 있을까 궁금해졌다.“차가 좀 막혔어요. 미안해요.” 세훈은 미안한 표정을 지은 채 사과하며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괜찮아요. 어차피 저희도 시간은 넉넉하거든요.”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속으로는 의아했다. 이미 퇴근 시간도 지났고, 이 식당은 번화가에 있지 않았기에 차가 막힐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정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괜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의문을 마음속에 묻어두었다.비록 내가 한턱낸다고 했지만, 시정은 비싼 메뉴를 고르지 않았다. 아마도 내 돈을 아껴주려는 것이었다. 내가 최근에 겨우 취업에 성공했고, 그전에는 결혼 준비로 돈을
사실 나도 시정이가 만나고 있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평소 털털한 시정이 그 사람과 통화할 때는 갑자기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변하는 걸 보면, 그 남자가 꽤 특별한 사람일 것 같았다.“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 나 오늘 좀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서 쉴게.”도준의 차 안에서 있었던 일로 몸이 불편해진 상태라, 당장이라도 샤워를 하고 싶었다. 나는 그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나는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오늘 하루에만도 많은 일이 벌어졌고, 온몸이 피곤해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그렇게 며칠 동안 나는 시정의 집에서 지냈다. 요즘 시정은 회사 일로 바쁘고, 나 역시 아직 할 일이 없어서 시정의 임시 가사 도우미 역할을 했다. 집안 청소를 하고 간단히 요리도 해주면서, 시정이 나를 재워주는 것에 대한 보답을 하고 있었다. 시정이가 이미 나를 받아줬으니, 나도 바쁜 그녀를 위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했다.어느 날 청소기를 돌리며 열심히 집안을 정리하고 있던 중, 낯선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살짝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뜻밖에도 JS그룹의 합격 통보였다.합격 소식을 듣는 순간, 믿기지 않아 한동안 멍해졌다.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없길래 불합격한 줄 알았다. 나는 며칠만 더 기다려보고 다른 회사에 지원하려고 했는데, 드디어 합격 통보를 받게 된 거다.전화를 끊은 후에도 기쁨이 가라앉지 않아 나는 거실에서 혼자 환호성을 질렀다. 통화한 사람이 내일 회사로 출근하라고 말했기에, 나는 마음이 들뜨면서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좋은 기분 덕에 청소할 힘도 솟아났다. 나는 한나절 만에 시정의 집을 구석구석 반짝이게 청소하고, 그녀가 며칠 동안 쌓아 둔 빨랫감도 모두 세탁했다.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온 시정은 깨끗해진 집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윤슬아, 너 복권이라도 당첨됐어? 오늘 왜 이렇게 부지런 떨면서 집안일을 다 한 거야?”시정은 거실을 한 바퀴 돌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나는 더 이상 도준과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아서, 이 말을 남기고 조수석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내 말에 도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가속 페달을 밟아 나를 뒤로 한 채 차를 몰고 사라졌다.나는 살짝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정말 매너 없네. 어차피 오늘부로 변도준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가 된 거니까, 어떻게 행동하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앞으로는 만나도 모르는 사이처럼 행동하야지.’몇 걸음 걸은 후, 택시를 잡아 시정이 사는 곳으로 향했다. 나는 택시에 오른 후에야 도준의 재킷이 아직도 내 어깨에 걸쳐져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원래 돌려주려고 했지만, 그의 연락처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기회 되면 돌려줘야겠어.’ ‘대기업의 대표라면 재킷 하나쯤 없어도 괜찮겠지.’시정의 집에 도착하자, 그녀도 방금 집에 도착한 상태였다. 시정은 내 옷이 어딘가 흐트러져 있고, 도준의 재킷을 걸치고 있는 걸 보더니, 뭔가를 눈치챘는지 나를 한쪽으로 불러섰다.“윤슬아, 솔직하게 말해.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 오늘 밤 또 누구랑 그런 일이 있었던 거야?” 시정의 시선은 내 목 위의 키스마크에 고정되었고, 곧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시정이가 나의 절친이라곤 해도, 나는 원래 꽤 보수적인 성격이라 이런 질문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아니야, 그런 일 없었어. 네가 오해한 거야.” “네 목에 남아 있는 자국만 봐도 알 수 있어. 빨리 말해, 누구야? 설마 또 변도준과 잔 거야?”시정의 호기심에 불이 붙었다. 내 입에서 사실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 놓아주지 않을 기세였다.결국 그녀의 집요한 질문에 나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역시 변도준일 줄 알았어. 안 그래도 그 남자가 너한테 관심 있어 보였는데, 오늘 또...”시정은 말을 끝까지 이어가진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
“이제 와서 부끄러운 거야? 고윤슬, 그날 밤에는 꽤나 대담했었는데. 솔직히 난 그때의 네가 더 마음에 들거든.”도준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오르며, 그는 내 귀에 바짝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뜨겁게 내 귓가를 스치며 자극적인 기분이 들었다. 나는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에 끌려들어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치며 욕하려는 순간, 도준은 갑자기 몸을 굽히더니 내 몸을 탐했다.시간이 한참이 흘렀고, 나는 힘이 모두 빠져있었지만, 도준은 여전히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내 몸을 탐했다. 마침내, 도준이 저음으로 거친 숨을 내쉬더니 동작을 멈추었다.도준은 내 몸에 기대어 숨을 들이마셨고, 격렬한 몸짓 탓에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나에게 전해졌다. 도준은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옷을 입었지만, 나는 움직일 기운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그대로 누워 있었다. 도준은 나를 바라보다가 그의 재킷을 벗어 내 위에 덮어주었다. “어디 사는지 알려줘. 데려다줄게.” 도준은 시동을 걸며 나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약국에 가야겠어요.” 나는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도준의 행동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치 상황을 이용하는 것 같아 분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이 남자에게 또 모든 걸 내주게 되다니, 그것도 별 이유 없이. 속으로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차라리 개한테 물린 거라 생각하자.'도준이가 원하는 걸 얻었으니 앞으로 날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나는 앞으로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말할 생각이었다.하지만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도준이 말했던 ‘공평'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결국 도준은 나를 갖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니까. “약국은 왜? 어디 아파?” 도준이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말투에 약간의 걱정이 담긴 듯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착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쨌든 우리는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