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민지혜, 대학교 신입생이다.요즘 말 못 할 고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바로 모태 솔로이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모유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양이 어마어마했다.3시간마다 몰래 짜내지 않으면 유선에 염증이 생길지도 모른다.하지만 재미 삼아 신청한 병영 캠프에서 하도 뛰고 달리고 하다보니 투박한 군복에 가슴이 쓸려서 아플 지경이었다.결국 절망에 빠진 나머지 보건실의 남자 의사 선생님을 찾아갔는데...그날 점심시간을 이용해 샤워를 마친 나는 건물 3층에 유일하게 문이 열려 있는 보건실에 몰래 들어섰다.다행히 병영 캠프 장소와 멀리 떨어졌고, 교관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은 친구들은 쉬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전체 층이 텅 비어 있었다.나는 마스크를 벗고 긴장한 마음을 추스르며 문을 두드렸다.“네.”짧고 굵은 남자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이에 무의식적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가슴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 때문에 도저히 미룰 수가 없었다.결국 얼굴을 붉힌 채 문을 열고 들어가 고개를 숙이고 책상 맞은편에 묵묵히 앉았다.“무슨 일이지?”서늘하면서 다정한 목소리는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이 말을 듣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선생님, 안녕하세요. 병가를 내고 싶은데 진단서가 필요해서...”“조기 퇴소하려는 여학생들이 워낙 많아서 진짜 몸이 불편해야지 진단서를 발급해줄 수 있어. 어디가 안 좋은데?”“아... 가슴이요.”말을 마치고 나서 상대방이 과연 무슨 반응일지 궁금한 마음에 슬며시 올려다보았다.눈앞의 남자는 외모가 준수한 편이고 오뚝한 콧날에는 금테 안경이 걸쳐 있었다. 비록 글을 쓰느라 고개를 숙였지만 온몸으로 고귀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풍겼고 대학교에서 뭇 여학생의 마음을 훔치는 남신 같은 타입에 가까웠다.흰색 가운을 입은 덕분에 하얀 피부가 더욱 돋보였고, 가슴에 달린 ‘진성호’라는 명찰이 유독 눈에 띄었다.“진찰해줄 테니까 이리 와서 누워.”자리에서 일어난 진성호가 뒤에 있는 커튼을 걷어내자 좁다란 침대 하나가
“아파?”“아니요. 제가 너무 예민했나 봐요.”자칫 오해라도 할까 봐 나는 서둘러 변명했다. 그리고 벌게진 얼굴로 다시 눈을 감고 진성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하지만 분위기가 점차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분명 익숙한 몸이지만 왠지 모르게 낯선 느낌이 들었고 심지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서 손을 떼는 순간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왔다.진성호는 도구를 정리하며 진지하게 말했다.“아직 원인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유선이 막혀 있는 것보다 뚫어주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나중에 점점 더 심해질 테니까.”이는 내가 몰래 인터넷에서 검색한 결과랑 비슷했는데 마땅한 방법을 몰라서 막막했다.그래서 물어보려던 찰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깜짝 놀라 서둘러 옷을 내렸다.누군가 물건을 빌리러 온 것 같았다.나는 무의식중으로 숨을 참았고, 행여나 홀딱 벗고 누워 있는 모습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조금 전 진성호가 마구 주무르는 바람에 가슴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엉겁결에 옷을 잡아당기다가 여기저기 묻어서 얼룩이 졌다.곧이어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고 커튼이 다시 열렸다.“왜 그래?”그는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잘생긴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선생님, 혹시 잠깐 자리를 피해주면 안 돼요? 모유를 짜고 싶은데 아니면 이따가 훈련받을 때...”진성호는 난처한 얼굴로 말하는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커튼이 닫히는 순간 자세를 취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샤워하자마자 진단서를 신청하러 왔기에 금방 끝날 줄 알고 아무런 준비도 안 했기 때문이다.심지어 모유를 담을 만한 용기도 마땅치 않았고, 새것처럼 보이는 침대 시트를 더럽힐 수는 없었다.“선생님, 혹시 일회용 종이컵이 있나요?”결국 마지못해 진성호에게 도움을 청했다.곧이어 종이컵을 든 손이 안으로 쑥 들어왔다.그러나 내부를 확인할 수 없는 탓에 뼈마디가 선명한 손가락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훤히
덕분에 오전 내내 시달렸던 고통이 한결 완화되었고, 방 안에 한동안 쩝쩝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그리고 10분이 지나서야 진성호는 나를 놓아주었다.가슴 통증은 이미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내가 모유를 짜내는 것보다 진성호가 빨아내는 게 더 효과적인 듯싶었다.아직도 정신이 몽롱한 탓에 옷을 주섬주섬 입는 손이 덜덜 떨렸다.이를 발견한 진성호는 내 손목을 붙잡아 소맷자락에 집어넣고 옷을 끌어 내린 다음 커튼을 열었다.“일단 훈련받으러 가. 무슨 약을 먹어야 하는지 알아보고 저녁에 가져다줄게.”그의 표정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고 말할 때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마치 방금 먼저 제안한 사람이 진성호가 아닌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리를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하지만 온몸이 나른해져 발목을 삐끗하는 바람에 남자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었다.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웃음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내 허둥지둥 똑바로 서자 진성호가 입을 열었다.“오후 6시 30분에 훈련이 끝나는 거지? 저녁 먹고 7시쯤에 다시 찾아와.”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쏜살같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쬐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방금 일어난 일은 이미 나의 상식을 뛰어넘었다.다행히 옷이 멀쩡해서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일은 없었다.결국 오후 훈련 내내 딴생각에 빠졌고, 일과를 마치고 무작정 보건실과 가까운 식당을 찾아갔다.줄을 서서 배식을 기다리는데 누군가 팔을 툭툭 건드렸다.룸메이트 정다겸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와 자연스럽게 내 앞에 섰다.뒤에서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두 신입생인지라 아무도 소란을 피우려 하지 않았다.정작 그녀는 관심 없는 듯 고개를 돌려 물었다.“점심에 어디 갔었어? 숙소에 안 보이던데?”보건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나는 빨개진 얼굴로 얼버무렸다.“몸이 안 좋아서 보건 선생님 찾으러 갔어.”정다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짝 다가왔다.“보건 선생
진성호는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난감한 얼굴로 미소를 살짝 지었다.“상관없어. 다만 시간을 정해야 할 것 같아. 아니면 들락이는 사람이 많아서 방해받을 수도 있어.”그가 동의하자 비로소 한시름 놓은 나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종이봉투를 품에 안고 기숙사에 도착하니 정다겸은 이미 돌아와 있었다.다들 아직 서먹서먹한지라 각자 씻고 침대에 누웠고, 정다겸만 책상에 앉아 게임을 하느라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마이크 너머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녀는 기분이 좋은 듯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이따가 소등하고 나서야 조용해질 것 같았다.휴대폰을 들고 침대에 기어 올라가자 진성호가 친구 추가했다.프사는 귀여운 웰시코기였고, 입에 공을 물고 풀밭을 신나게 뛰어다니며 보송보송한 털을 흩날리는 모습이 생동감이 넘쳤다.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딘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화창을 열었다.이때, 진성호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약 먹었어?]나는 빠르게 답장했다.[네, 감사합니다. 선생님.]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그냥 이름 불러도 돼.]내가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기다란 문장이 곧장 나타났다.[부작용이 좀 있을 수 있는데 가끔 메스껍거나 구토, 혹은 두통에 시달릴 거야. 하지만 정상적인 반응이니까 걱정하지 마. 만약 너무 심하다 싶으면 나한테 와서 진단서 가져가. 요 며칠은 훈련 빠지고 쉬어. ]나는 별안간 마음이 훈훈해졌다.갑작스럽게 생긴 병 때문에 보름 넘게 골머리를 썩이며 어떻게든 혼자 처리하려고 애를 썼고, 설령 힘들고 아플지언정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그런 와중에 진성호의 등장은 마치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다.이내 감사하다고 빠르게 타이핑했다가 너무 형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을 열심히 검색해서 웰시코기로 된 이모티콘을 보내고는 진지하게 답장까지 해주었다.진성호가 다시 문자했다.[잠든 줄 알았네. 얼른 자. 훈련은 빠질 수
“아~”정다겸은 일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곧이어 의자를 끌어당기는 소리가 들려왔고 아예 자리를 잡은 듯싶었다.“보건실 쪽으로 걸어가는 민지혜를 봤는데 몸이 안 좋은 줄 알았어요. 참, 선생님. 저 요즘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심장이 좀 이상해요. 진찰 한 번 해주시면 안 돼요?”어젯밤 남학생들과 게임을 할 때 들었던 목소리와 전혀 다른 애교 섞인 말투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진성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를 위해 검사를 해주고 있는 듯 몇 분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멀쩡해. 혹시 별일 없으면 얼른 돌아가서 쉬어.”무심한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정다겸도 그가 심기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안도하는 척 말했다.“그럼 다행이고. 요즘 동아리 홍보 활동이 많아서 피곤한 탓에 어디 아픈 줄 알았어요. 선생님, 혹시 친구 추가해도 되나요? 나중에 다른 증상이 있으면 언제든지 상담하게.”유축기가 너무 무거운 탓에 팔이 점점 떨려왔고 속으로는 차라리 빨리 친구 추가하고 그녀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진성호는 딱 잘라 거절했다.“아니야. 몸이 안 좋으면 보건실에 찾아와. 당직 서는 사람이 있으니까 24시간 진료 가능하거든.”왠지 모르지만 그가 거절하는 순간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이내 엉뚱한 생각을 지우고 문이 닫히자마자 손에 든 기계를 내려놓았다.묵직한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진성호가 물었다.“네 친구야?”그는 커튼을 여는 대신 밖에 서 있었고, 목소리도 한결 다정해졌다.“글쎄요... 그냥 룸메이트?”나는 고민 끝에 사실대로 말했다.“그렇구나.”진성호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만약 다른 사람한테 들키는 게 걱정된다면 식당 뒤편으로 돌아서 와. 직원증 줄 테니까 이거로 문 열어.”말을 마치고 나서 커튼을 열고 건네주려다가 다시 멈칫했다.“책상에 올려둘게. 이따 갈 때 가져가.”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그럼 성호 씨는 어떡해요?”진성호의 웃음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나는 서둘러 해명했다.“훔친 게 아니라...”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불쑥 끼어들었다.“무려 보건실 직원증 아니야? 보건 선생님만 소지하고 있을 텐데 훔치지 않고 설마 거기 취직이라도 했니?”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정다겸과 같이 서 있는 학생회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하나같이 구경거리라도 기대하는 표정이었다.이때, 서은비가 직원증을 홱 낚아채며 말했다.“기숙사 점검이 필요하면 확인만 하지 남의 물건은 왜 함부로 만져?”목소리가 워낙 커서 의기양양하던 정다겸도 기세가 한풀 꺾였다.나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서은비가 건네준 직원증을 받아들고 무의식적으로 정다겸을 바라보았다.체면이 깎인 탓에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진 그녀는 반박하고 싶어도 그럴듯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나를 노려보며 쏘아붙이기 시작했다.“대답해. 어디서 훔쳤냐고.”서은비가 버럭 화를 내려는 찰나 나한테 제지당했다.그녀와 전혀 무관한 일이며 아까는 오로지 내 편을 들여주려고 도와줬기에 괜히 정다겸의 미움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크게 심호흡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보건 선생님이 주신 거야.”정다겸의 얼굴에 의심이 가득했다.“진성호 선생님이?”이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장난해? 학생과 친구 추가도 안 하는 사람이 너한테 직원증을 줄 리 있어?”도무지 그녀를 납득시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진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 연결음이 울리기도 전에 휴대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유유히 울려 퍼졌다.“여보세요?”나는 왠지 모르게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어렸을 때 괴롭힘을 당하면 엄마가 찾아와서 기를 북돋아 주던 느낌이었다.씁쓸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선생님, 저번에 주신 직원증이 아직 저한테 있는데 언제 돌려드려야 할까요?”평소에 진성호와 단둘이 지낼 때는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다.내 말을 듣자마자 그는 낌새를 눈치챈 듯 정중하게 말했다.“진료
정다겸과 직원증 문제로 언쟁을 벌인 뒤 학교 게시판에 곧바로 내 이름이 등장했다.심지어 서은비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워낙 게임을 좋아해서 단톡방에 많이 가입했는데 어느 날 나를 주제로 한 게시물을 올린 사람이 있다고 했다.그때만 해도 단지 내가 꼬리를 치고 다닌다는 루머에 불과했다. 매일같이 보건실에 진성호를 만나러 가고 옷까지 야하게 입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사실 군복을 벗고 나서 병영 캠프에 참가했던 신입생들은 경쟁이라도 하는 듯 치장하고 다녔고, 다들 그동안의 흑역사를 만회하려고 안달이 났다.반면, 허구한 날 긴 치마나 반팔에 긴바지를 입고 다니는 나보다 더 수수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어쨌든 진성호의 말을 떠올리며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하루에도 수백 건의 내용이 게시판에 등록되는지라 대부분 누군가를 욕하거나 애인을 찾는다는 공고이기에 나에 대한 게시물도 금방 묻힐 거로 생각했다.그러나 며칠 후 서은비는 더 황당한 내용을 발견했다.이내 씩씩거리며 휴대폰을 눈앞에서 내동댕이쳤다.“어쩜 이리 뻔뻔스러울 수 있지? 아무 말이나 지어내다니! 아주 널 괴롭히려고 작정했나 본데?”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았고 그제야 게시판에 올라온 ‘민지혜 임신’에 관한 내용을 확인하게 되었다.게시물을 작성한 사람은 나를 잘 알고 있는 듯싶었다. 무슨 약을 먹는지 공개했을뿐더러 일과, 그리고 기숙사에 드나드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게시했다.그리고 댓글을 훑어보니 내용이 점점 더 가관이었다.[말도 안 돼. 요즘 신입생들은 엄청 화끈한가 보네? 3년째 싱글인 선배가, 그리고 나랑 사귈 사람 급구!][모유 분비를 억제하는 약 아니야? 우리 집에서 약국을 운영하는데 임산부들이 자주 사러 오거든.][정답! 나도 검색해 봤어. 완전 신세계가 따로 없더라고.][내용이 조작 같아. 민지혜를 직접 본 적이 있지만 남학생과 말도 섞지 않았어.][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허구한 날 보건실에 찾아간 이유도 어쩌면 늙다리 보건 선생과... 하하하!]서은비는
게시판 내용에는 진성호에 대한 언급이 꽤 많았다. 어떤 사람은 우리 둘이 사귀는 건 아니냐고 의심했고, 어떤 사람은 주제를 벗어나 그의 외모를 칭찬하기도 했다.아마도 이소정이 아빠한테 얘기해줘서 진성호를 불러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엄마의 품에 안긴 나는 일어서려고 버둥거렸지만 제지당했다. “아빠 건드리지 마. 학교에 오는 내내 화를 냈어.”이내 머리가 띵한 나머지 큰 소리로 외쳤다.“내가 병에 걸렸는데 그게 선생님이랑 무슨 상관이죠?!”반항하는 나를 보자 아빠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고 두 눈을 부라리며 호통쳤다.“그럼 남의 직원증은 왜 갖고 있어? 매일 보건실에 들락이는 이유는 뭔데? 무슨 병인데 보름씩이나 앓아?”내가 묵묵부답하자 아빠는 냉소를 지었다.“훈련에서 빠지고 싶으면 솔직하게 얘기하면 되지. 너 같은 사람을 한 두 명 본 줄 알아?”어려서부터 아빠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다.1등을 못 하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탓이고, 어쩌다 한 번 감기에 걸리면 매일 밖에 놀러 다녀서 옮았다고 여겼다. 고3 때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 머리가 어지럽다고 하면 쉬고 싶어서 게으름 피운다고 생각했다.제멋대로 나를 최악으로 취급하더니 명문대에 합격하는 순간 마치 본인이 교육을 잘한 덕분인 것처럼 뻔뻔하게 자랑하고 다녔다.분명 아무것도 기여한 게 없는데 말이다.눈물이 앞을 가리자 고개를 숙였고 매번 꾸중을 들을 때처럼 침묵을 지켰다.이때, 교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헐레벌떡 뛰어오는 진성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나를 힐끔거리더니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곧이어 이소정과 오빠를 바라보았다.“선생님, 아저씨, 안녕하세요.”아버지의 표정이 갑자기 누그러지더니 말투도 한결 상냥해졌다.“진성호?”경악을 금치 못하는 나를 보자 엄마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진영수 아저씨네 아들이잖아. 너랑 같은 학교에 다니고 2살 많은 그 오빠.”고등학교 때 공부에만 매진했기에 진성호라는 선배가 있
정다겸과 직원증 문제로 언쟁을 벌인 뒤 학교 게시판에 곧바로 내 이름이 등장했다.심지어 서은비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워낙 게임을 좋아해서 단톡방에 많이 가입했는데 어느 날 나를 주제로 한 게시물을 올린 사람이 있다고 했다.그때만 해도 단지 내가 꼬리를 치고 다닌다는 루머에 불과했다. 매일같이 보건실에 진성호를 만나러 가고 옷까지 야하게 입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사실 군복을 벗고 나서 병영 캠프에 참가했던 신입생들은 경쟁이라도 하는 듯 치장하고 다녔고, 다들 그동안의 흑역사를 만회하려고 안달이 났다.반면, 허구한 날 긴 치마나 반팔에 긴바지를 입고 다니는 나보다 더 수수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어쨌든 진성호의 말을 떠올리며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하루에도 수백 건의 내용이 게시판에 등록되는지라 대부분 누군가를 욕하거나 애인을 찾는다는 공고이기에 나에 대한 게시물도 금방 묻힐 거로 생각했다.그러나 며칠 후 서은비는 더 황당한 내용을 발견했다.이내 씩씩거리며 휴대폰을 눈앞에서 내동댕이쳤다.“어쩜 이리 뻔뻔스러울 수 있지? 아무 말이나 지어내다니! 아주 널 괴롭히려고 작정했나 본데?”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았고 그제야 게시판에 올라온 ‘민지혜 임신’에 관한 내용을 확인하게 되었다.게시물을 작성한 사람은 나를 잘 알고 있는 듯싶었다. 무슨 약을 먹는지 공개했을뿐더러 일과, 그리고 기숙사에 드나드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게시했다.그리고 댓글을 훑어보니 내용이 점점 더 가관이었다.[말도 안 돼. 요즘 신입생들은 엄청 화끈한가 보네? 3년째 싱글인 선배가, 그리고 나랑 사귈 사람 급구!][모유 분비를 억제하는 약 아니야? 우리 집에서 약국을 운영하는데 임산부들이 자주 사러 오거든.][정답! 나도 검색해 봤어. 완전 신세계가 따로 없더라고.][내용이 조작 같아. 민지혜를 직접 본 적이 있지만 남학생과 말도 섞지 않았어.][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허구한 날 보건실에 찾아간 이유도 어쩌면 늙다리 보건 선생과... 하하하!]서은비는
나는 서둘러 해명했다.“훔친 게 아니라...”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불쑥 끼어들었다.“무려 보건실 직원증 아니야? 보건 선생님만 소지하고 있을 텐데 훔치지 않고 설마 거기 취직이라도 했니?”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정다겸과 같이 서 있는 학생회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하나같이 구경거리라도 기대하는 표정이었다.이때, 서은비가 직원증을 홱 낚아채며 말했다.“기숙사 점검이 필요하면 확인만 하지 남의 물건은 왜 함부로 만져?”목소리가 워낙 커서 의기양양하던 정다겸도 기세가 한풀 꺾였다.나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서은비가 건네준 직원증을 받아들고 무의식적으로 정다겸을 바라보았다.체면이 깎인 탓에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진 그녀는 반박하고 싶어도 그럴듯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나를 노려보며 쏘아붙이기 시작했다.“대답해. 어디서 훔쳤냐고.”서은비가 버럭 화를 내려는 찰나 나한테 제지당했다.그녀와 전혀 무관한 일이며 아까는 오로지 내 편을 들여주려고 도와줬기에 괜히 정다겸의 미움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크게 심호흡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보건 선생님이 주신 거야.”정다겸의 얼굴에 의심이 가득했다.“진성호 선생님이?”이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장난해? 학생과 친구 추가도 안 하는 사람이 너한테 직원증을 줄 리 있어?”도무지 그녀를 납득시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진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 연결음이 울리기도 전에 휴대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유유히 울려 퍼졌다.“여보세요?”나는 왠지 모르게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어렸을 때 괴롭힘을 당하면 엄마가 찾아와서 기를 북돋아 주던 느낌이었다.씁쓸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선생님, 저번에 주신 직원증이 아직 저한테 있는데 언제 돌려드려야 할까요?”평소에 진성호와 단둘이 지낼 때는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다.내 말을 듣자마자 그는 낌새를 눈치챈 듯 정중하게 말했다.“진료
“아~”정다겸은 일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곧이어 의자를 끌어당기는 소리가 들려왔고 아예 자리를 잡은 듯싶었다.“보건실 쪽으로 걸어가는 민지혜를 봤는데 몸이 안 좋은 줄 알았어요. 참, 선생님. 저 요즘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심장이 좀 이상해요. 진찰 한 번 해주시면 안 돼요?”어젯밤 남학생들과 게임을 할 때 들었던 목소리와 전혀 다른 애교 섞인 말투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진성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를 위해 검사를 해주고 있는 듯 몇 분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멀쩡해. 혹시 별일 없으면 얼른 돌아가서 쉬어.”무심한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정다겸도 그가 심기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안도하는 척 말했다.“그럼 다행이고. 요즘 동아리 홍보 활동이 많아서 피곤한 탓에 어디 아픈 줄 알았어요. 선생님, 혹시 친구 추가해도 되나요? 나중에 다른 증상이 있으면 언제든지 상담하게.”유축기가 너무 무거운 탓에 팔이 점점 떨려왔고 속으로는 차라리 빨리 친구 추가하고 그녀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진성호는 딱 잘라 거절했다.“아니야. 몸이 안 좋으면 보건실에 찾아와. 당직 서는 사람이 있으니까 24시간 진료 가능하거든.”왠지 모르지만 그가 거절하는 순간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이내 엉뚱한 생각을 지우고 문이 닫히자마자 손에 든 기계를 내려놓았다.묵직한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진성호가 물었다.“네 친구야?”그는 커튼을 여는 대신 밖에 서 있었고, 목소리도 한결 다정해졌다.“글쎄요... 그냥 룸메이트?”나는 고민 끝에 사실대로 말했다.“그렇구나.”진성호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만약 다른 사람한테 들키는 게 걱정된다면 식당 뒤편으로 돌아서 와. 직원증 줄 테니까 이거로 문 열어.”말을 마치고 나서 커튼을 열고 건네주려다가 다시 멈칫했다.“책상에 올려둘게. 이따 갈 때 가져가.”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그럼 성호 씨는 어떡해요?”진성호의 웃음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진성호는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난감한 얼굴로 미소를 살짝 지었다.“상관없어. 다만 시간을 정해야 할 것 같아. 아니면 들락이는 사람이 많아서 방해받을 수도 있어.”그가 동의하자 비로소 한시름 놓은 나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종이봉투를 품에 안고 기숙사에 도착하니 정다겸은 이미 돌아와 있었다.다들 아직 서먹서먹한지라 각자 씻고 침대에 누웠고, 정다겸만 책상에 앉아 게임을 하느라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마이크 너머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녀는 기분이 좋은 듯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이따가 소등하고 나서야 조용해질 것 같았다.휴대폰을 들고 침대에 기어 올라가자 진성호가 친구 추가했다.프사는 귀여운 웰시코기였고, 입에 공을 물고 풀밭을 신나게 뛰어다니며 보송보송한 털을 흩날리는 모습이 생동감이 넘쳤다.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딘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화창을 열었다.이때, 진성호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약 먹었어?]나는 빠르게 답장했다.[네, 감사합니다. 선생님.]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그냥 이름 불러도 돼.]내가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기다란 문장이 곧장 나타났다.[부작용이 좀 있을 수 있는데 가끔 메스껍거나 구토, 혹은 두통에 시달릴 거야. 하지만 정상적인 반응이니까 걱정하지 마. 만약 너무 심하다 싶으면 나한테 와서 진단서 가져가. 요 며칠은 훈련 빠지고 쉬어. ]나는 별안간 마음이 훈훈해졌다.갑작스럽게 생긴 병 때문에 보름 넘게 골머리를 썩이며 어떻게든 혼자 처리하려고 애를 썼고, 설령 힘들고 아플지언정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그런 와중에 진성호의 등장은 마치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다.이내 감사하다고 빠르게 타이핑했다가 너무 형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을 열심히 검색해서 웰시코기로 된 이모티콘을 보내고는 진지하게 답장까지 해주었다.진성호가 다시 문자했다.[잠든 줄 알았네. 얼른 자. 훈련은 빠질 수
덕분에 오전 내내 시달렸던 고통이 한결 완화되었고, 방 안에 한동안 쩝쩝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그리고 10분이 지나서야 진성호는 나를 놓아주었다.가슴 통증은 이미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내가 모유를 짜내는 것보다 진성호가 빨아내는 게 더 효과적인 듯싶었다.아직도 정신이 몽롱한 탓에 옷을 주섬주섬 입는 손이 덜덜 떨렸다.이를 발견한 진성호는 내 손목을 붙잡아 소맷자락에 집어넣고 옷을 끌어 내린 다음 커튼을 열었다.“일단 훈련받으러 가. 무슨 약을 먹어야 하는지 알아보고 저녁에 가져다줄게.”그의 표정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고 말할 때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마치 방금 먼저 제안한 사람이 진성호가 아닌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리를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하지만 온몸이 나른해져 발목을 삐끗하는 바람에 남자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었다.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웃음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내 허둥지둥 똑바로 서자 진성호가 입을 열었다.“오후 6시 30분에 훈련이 끝나는 거지? 저녁 먹고 7시쯤에 다시 찾아와.”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쏜살같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쬐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방금 일어난 일은 이미 나의 상식을 뛰어넘었다.다행히 옷이 멀쩡해서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일은 없었다.결국 오후 훈련 내내 딴생각에 빠졌고, 일과를 마치고 무작정 보건실과 가까운 식당을 찾아갔다.줄을 서서 배식을 기다리는데 누군가 팔을 툭툭 건드렸다.룸메이트 정다겸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와 자연스럽게 내 앞에 섰다.뒤에서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두 신입생인지라 아무도 소란을 피우려 하지 않았다.정작 그녀는 관심 없는 듯 고개를 돌려 물었다.“점심에 어디 갔었어? 숙소에 안 보이던데?”보건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나는 빨개진 얼굴로 얼버무렸다.“몸이 안 좋아서 보건 선생님 찾으러 갔어.”정다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짝 다가왔다.“보건 선생
“아파?”“아니요. 제가 너무 예민했나 봐요.”자칫 오해라도 할까 봐 나는 서둘러 변명했다. 그리고 벌게진 얼굴로 다시 눈을 감고 진성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하지만 분위기가 점차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분명 익숙한 몸이지만 왠지 모르게 낯선 느낌이 들었고 심지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서 손을 떼는 순간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왔다.진성호는 도구를 정리하며 진지하게 말했다.“아직 원인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유선이 막혀 있는 것보다 뚫어주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나중에 점점 더 심해질 테니까.”이는 내가 몰래 인터넷에서 검색한 결과랑 비슷했는데 마땅한 방법을 몰라서 막막했다.그래서 물어보려던 찰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깜짝 놀라 서둘러 옷을 내렸다.누군가 물건을 빌리러 온 것 같았다.나는 무의식중으로 숨을 참았고, 행여나 홀딱 벗고 누워 있는 모습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조금 전 진성호가 마구 주무르는 바람에 가슴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엉겁결에 옷을 잡아당기다가 여기저기 묻어서 얼룩이 졌다.곧이어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고 커튼이 다시 열렸다.“왜 그래?”그는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잘생긴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선생님, 혹시 잠깐 자리를 피해주면 안 돼요? 모유를 짜고 싶은데 아니면 이따가 훈련받을 때...”진성호는 난처한 얼굴로 말하는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커튼이 닫히는 순간 자세를 취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샤워하자마자 진단서를 신청하러 왔기에 금방 끝날 줄 알고 아무런 준비도 안 했기 때문이다.심지어 모유를 담을 만한 용기도 마땅치 않았고, 새것처럼 보이는 침대 시트를 더럽힐 수는 없었다.“선생님, 혹시 일회용 종이컵이 있나요?”결국 마지못해 진성호에게 도움을 청했다.곧이어 종이컵을 든 손이 안으로 쑥 들어왔다.그러나 내부를 확인할 수 없는 탓에 뼈마디가 선명한 손가락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훤히
내 이름은 민지혜, 대학교 신입생이다.요즘 말 못 할 고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바로 모태 솔로이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모유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양이 어마어마했다.3시간마다 몰래 짜내지 않으면 유선에 염증이 생길지도 모른다.하지만 재미 삼아 신청한 병영 캠프에서 하도 뛰고 달리고 하다보니 투박한 군복에 가슴이 쓸려서 아플 지경이었다.결국 절망에 빠진 나머지 보건실의 남자 의사 선생님을 찾아갔는데...그날 점심시간을 이용해 샤워를 마친 나는 건물 3층에 유일하게 문이 열려 있는 보건실에 몰래 들어섰다.다행히 병영 캠프 장소와 멀리 떨어졌고, 교관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은 친구들은 쉬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전체 층이 텅 비어 있었다.나는 마스크를 벗고 긴장한 마음을 추스르며 문을 두드렸다.“네.”짧고 굵은 남자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이에 무의식적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가슴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 때문에 도저히 미룰 수가 없었다.결국 얼굴을 붉힌 채 문을 열고 들어가 고개를 숙이고 책상 맞은편에 묵묵히 앉았다.“무슨 일이지?”서늘하면서 다정한 목소리는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이 말을 듣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선생님, 안녕하세요. 병가를 내고 싶은데 진단서가 필요해서...”“조기 퇴소하려는 여학생들이 워낙 많아서 진짜 몸이 불편해야지 진단서를 발급해줄 수 있어. 어디가 안 좋은데?”“아... 가슴이요.”말을 마치고 나서 상대방이 과연 무슨 반응일지 궁금한 마음에 슬며시 올려다보았다.눈앞의 남자는 외모가 준수한 편이고 오뚝한 콧날에는 금테 안경이 걸쳐 있었다. 비록 글을 쓰느라 고개를 숙였지만 온몸으로 고귀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풍겼고 대학교에서 뭇 여학생의 마음을 훔치는 남신 같은 타입에 가까웠다.흰색 가운을 입은 덕분에 하얀 피부가 더욱 돋보였고, 가슴에 달린 ‘진성호’라는 명찰이 유독 눈에 띄었다.“진찰해줄 테니까 이리 와서 누워.”자리에서 일어난 진성호가 뒤에 있는 커튼을 걷어내자 좁다란 침대 하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