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리아의 거듭된 무시와 도발에 육정아는 화한 사자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목에는 핏대까지 세웠다.그 순간 육정아는 명문가 아가씨의 이미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김리아의 긴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힘껏 아래로 끌어내렸다.김리아를 잡는 순간 그녀의 따뜻한 촉감을 느낀 후에야 육정아는 마침내 김리아가 정말 살아있다는 것을 확신했다.‘장호철, 빌어먹을 놈! 임무에 실패하고도 뻔뻔스럽게 돈을 두 배나 받아갔어?’막돼먹은 사람만이 싸울 때 상대방의 머리채를 잡아당긴다. 육정아가 공공장소에서 체면도 차리지 않고 이렇게 할 줄을 김리아는 생각지도 못했다. 육정아에게 잡혀 머리가 아파 났던 김리아는 반격하고 싶었지만 머리채가 잡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육정아는 막돼먹은 사람처럼 욕설을 퍼부었다.“나쁜 년! 감히 내 남자를 유혹하다니! 나와 우빈이 곧 결혼한다는 걸 몰라?”김리아를 향해 따귀를 때리려고 손을 번쩍 쳐들던 육정아의 손을 누군가에게 꽉 잡았다.“아, 아파.”손목뼈가 부서질 것 같아 육정아는 눈물을 흘리며 어쩔 수 없이 김리아의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무슨 오지랖이야!”육정아는 화를 내며 뒤를 돌아보다가 멍해졌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김리아도 의아하게 그 사람을 쳐다봤다.부드러운 분위기를 가진 이 남자는 완벽하게 잘생긴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질 것처럼 맑고 깨끗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마에는 잔머리가 흩어져 있었다. 단정한 양복 차림을 했지만 온몸에는 우아한 기품이 배어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김리아는 흠칫 놀랐다.‘어떻게 이분이?’성준, 지난번 헤어진 이후로 김리아는 이미 3년이나 그를 보지 못했다.‘왜 여기에 나타났을까? 왜 육정아를 제지하며 나를 도와주는거지?’김리아를 훑어보는 남자의 부드러운 눈빛에는 놀라움이 스쳤다.그는 봄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등에 난 상처는 나았어요?”김리아는 깜짝 놀랐다.‘내 등에 상처가 난 걸 어떻게 알았지? 설마...’강리아는 심장 박동이 갑자기
“참,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지 않았어요.”육성준은 부드럽게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계곡을 흐르는 물처럼 여전히 듣기 좋았다.“김리아라고 해요. 아름답다는 리, 맑을 아에요.”김리아는 고개를 숙이며 숨을 크게 들이쉰 후 말했다.‘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오늘 처음 만난 거로 하지 뭐.’“이름이 예쁘네요.”육성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더니 김리아의 유니폼에 달린 이름표를 보며 물었다.“여기서 일해요? 민성 그룹의 직원이세요?”“그런 셈이죠.”김리아는 얼버무리며 대답했다.육성준은 김리아가 바닥에 떨군 빵과 우유를 보더니 몸을 숙여 하나씩 주웠다.“죄송해요. 동생이 곱게 자라 리아 씨의 아침 식사를 바닥에 떨어뜨렸네요. 이건 더러워졌으니 버리세요. 어느 부서에서 일하는지 알려주면 제가 다시 사서 가져다드릴게요.”“그럴 필요 없어요. 가림산에서 저를 구해줘서 고마워요. 깨어나 보니 이미 떠났더군요. 그때 구해 준 사람이 누군지 몰라 고맙다고 인사도 해 주지 못할까 봐 걱정했어요.”육성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김리아는 계속해서 말했다.“옷과 돈을 남겨주셔서 고마워요. 제가 포장해서 돌려드릴 테니 주소를 주세요. 택배로 보내드릴게요.”육성준이 곁에 있어 감히 경솔하게 행동하지 못했던 육정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뭐지? 가림산에서 오빠가 김리아를 구했다니?’그제야 육정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김리아를 구한 사람이 바로 오빠라고? 그래서 장호철이 실패했어? 그런 거였네!’육정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오빠 때문에 일을 망칠 줄 생각지도 못했다.‘거의 성공할뻔했어! 천한년이 죽을 팔자가 아닌가 봐.’육성준은 김리아가 물건을 돌려주겠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리아 씨가 깨났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 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전화를 받고 급한 일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났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남겨준 물건들은 비상용이니 사양하지 마세요.”
“민 대표님의 직원인가요?”육성준은 김리아를 가리키며 담담하게 웃었다.“어느 부서에서 근무하죠? 아까 제가 부주의로 부딪혀서 아침 식사를 바닥에 떨어뜨렸어요. 다시 아침을 사서 갖다 주려고요.”김리아는 육성준의 말주변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민우빈의 앞에서 육정아가 행패를 부렸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대답하지 않은 문제를 물어봤다.“아침 한 끼일 뿐이니 육 대표님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혹시 육 대표님은 민성 그룹의 직원 복지를 의심하는 거예요? 직원의 아침도 제공할 수 없을까 봐요?”육성준은 싱긋 웃었다.“민 대표님, 오해했어요. 저는 그런 뜻이 없었어요.”민우빈은 쌀쌀하게 김리아를 째려봤다.“시간관념이 없어? 출근 첫날부터 지각이야?”김리아는 어이없었다. 지각이라니? 하지만 결국 그녀는 다른 말을 삼켜버렸다.“죄송합니다. 민 대표님, 육 대표님, 저는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말을 마친 후 그녀는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떠났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김리아를 주시해 보는 육성준을 곁에서 지켜보던 민우빈은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방금은 제가 리아 씨 시간을 지체했으니 민 대표님께서 탓하지 말아 주세요.”육성준이 사과했다.김리아가 어느 부서에서 일한다고 민우빈이 대답하지 않자 그는 더는 묻지 않았다. 민우빈이 말하지 않으려는 게 분명했다.직감적으로 육성준은 두 사람의 사이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여동생도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때리지 않았을 것이다. 민우빈도 들어온 이후로 안색이 줄곧 어두웠고 말도 거칠게 했다.“저는 오늘 협력 건으로 왔어요. 잠시 얘기할까요?”육성준은 화제를 바꾸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맞아, 우빈아, 나도 이 일로 왔어. 이틀 전에 네가 아빠와 협력한다고 한 후 아빠가 기분이 좋으셔서 나더러 진행 상황을 확인해 보라고 했어.”솔직히 그녀는 프로젝트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민우빈과 가까이하고 싶어서 찾아왔다. 그리고 김리아가 죽었으니 민
깊은 밤 커튼은 닫혀 있었고 공기 중엔 야릇한 분위기가 감돌았다.김리아는 흐트러진 숨소리를 내며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집중할 수가 없었다.그에게서 낯선 다른 여자의 향수 냄새가 났으니까.그는 향수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데.문득 그녀의 예쁜 눈썹이 일그러지고 남자는 정신이 딴 데 팔려있는 그녀를 벌하듯 더 격하게 몰아붙였다.일을 마친 남자는 일어나서 샤워하러 욕실로 갔고 지친 김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린다.방금 그 남자는 그녀의 명목상 남편인 민우빈이었다.그녀의 감정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늘 자기 마음대로 그녀를 휘두르는 남자.결혼 3년 동안 민우빈은 집에만 오면 그녀와 그 짓을 해댔고 일을 마친 후에는 샤워하러 욕실에 갔다. 그렇게 씻고 나면 한마디 말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떠나곤 했다.그녀는 그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 같았다.김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민우빈의 셔츠를 주워 구겨지지 않게 걸어주려고 했다. 민우빈은 과묵하고 지나치게 깔끔하며 불같은 성미를 지녀 김리아는 늘 조심스럽게 그를 대했다.셔츠를 집어 들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멈칫했다.그녀의 시선이 셔츠 깃에 닿았을 때 립스틱이 얼룩덜룩하게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입술 자국...무의식적으로 셔츠를 코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자 아니나 다를까, 그의 체취와는 다른 향수 냄새가 났다.김리아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침대 가장자리에 다시 앉았다.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10분쯤 지나자 물소리가 멈추고 민우빈이 화장실에서 나왔다.하얀 타월을 배꼽 아래로 두른 모습이 무척 섹시했다.흠뻑 젖은 검은 머리카락에선 물방울이 계속 미끄러져 그의 섹시한 가슴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태생이 고고하고 우아한 남자의 싸늘한 눈동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같았고 특유의 진중함이 그의 서늘함을 더 돋보이게 했다.김리아는 눈을 피하며 립스틱에 관해 묻지 않았다. 그럴 자격이 없으니
“몰라도 돼.”민우빈의 눈빛에는 서늘함과 더불어 짜증스러움이 묻어났다.“돈은 부족하지 않게 줄게. 이 별장도 가져. 위자료로 200억 주는 것 외에도 매달...”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리아가 가로챘다.처음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러지도 않았고 감히 그럴 수도 없었을 텐데.“다른 건 다 필요 없어. 소희만 있으면 돼.”한 마디에 방 안의 분위기가 굳어버렸다.압박감에 숨이 막혔다.희미한 스탠드의 불빛마저 음산하게 번뜩이는 것 같았다.민소희, 두 살이 넘은 그들의 딸이다.당시 소희를 출산했을 때 출혈이 심하고 몸이 많이 상해서 의사 선생님은 앞으로 임신이 어려울 거라고 했다. 그래서 사실 피임약을 먹을 필요도 없는데 그는 조금의 빈틈도 주지 않았다.민우빈은 콧방귀를 뀌었다.“데려가서 키울 능력은 있고?”김리아가 피식 웃었다.“그건 내 일이니까 민 대표님께서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동의하면 바로 사인할게.”곧 이혼할 테니 호칭도 바뀌었다.그녀의 미소에 민우빈은 살짝 넋이 나갔다. 그녀의 맨얼굴은 무척 아름다웠다. 하얀 이와 그린 것 같은 눈썹, 도톰한 입술에 물기가 감도는 여린 피부, 한 손에 감겨오는 가냘픈 허리까지...순간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이 여자가 감히 이런 식으로 그에게 말하다니.김리아는 서랍에서 펜을 꺼내 계약서 맨 위에 알아서 조항을 추가하고 위자료 부분에 줄을 긋고는 망설임 없이 자기 이름을 사인했다.동시에 그녀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린 채 자리에서 곧게 일어나 그에게 걸어가서 합의서를 가볍게 넘겼다.“원하는 대로 해줄게. 사실 난 진작 당신과 이혼하고 싶었어.”김리아는 마음속 괴로움과 아픔을 참고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소희는 당신한테 아무런 가치가 없으니까 내가 데려갈게.”서류를 내려다보던 민우빈의 손끝이 살짝 멈칫하다가 고개를 들어 차가운 눈으로 김리아를 바라보았다.슬픈 기색이 조금도 없는 얼굴은 마치 이혼이 그녀에겐 해방이라고 말하는 듯했다.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무심하게 물었다.“진작 나와
김리아는 멍하니 바닥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러 갔다.계단을 내려가는데 도우미들의 불평이 들렸다.“방금 민 대표님이 굳은 표정으로 가던데.”“난 민씨 저택에서 일하고 싶어. 누가 위층에 있는 저 여자를 모시고 싶어 하겠어.”“그러니까. 딸도 장애인이라던데 봤어?”“아니, 태어난 이후로 병원 밖을 나간 적이 없는 아픈 아이라고 들었어. 저런 쓸모없는 모녀랑 엮이면 평생 불행할 거야. 내가 민 대표님이었다면 진작에 쫓아냈어.”“그래도 여자가 좀 불쌍해. 아들을 낳았으면 좀 괜찮았을 텐데.”“동정할 가치도 없어. 몰라?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아이를 배고 그걸 이용해 민씨 가문에 들어온 거잖아. 아니면 저런 신분으로 가당키나 해? 하느님도 그 수작을 알아보고 조산시켜 아들도 못 낳게 한 거지. 듣기론 그 딸도 아직 말을 못 한대.”“엇, 벙어리야? 아니면 저능아?”“잘 모르겠어. 어쨌든 민씨 가문에선 그 아이를 받아주지 않아. 쉿, 온다. 조용히 해.”“뭐가 무서워? 들어도 뭐 어쩌겠어. 일러바친다고 누가 믿어주기는 해?”김리아가 내려오는 소리를 들은 두 도우미는 얼굴에 경멸과 오만함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조금 전 그들의 대화를 김리아는 전부 듣고 있었다. 도우미마저 그녀를 무시한다.김리아가 덤덤하게 말했다.“내일부터 민씨 저택으로 가세요. 여긴 더 올 필요 없어요.”“허, 누가 오고 싶댔나.”도우미가 콧방귀를 뀌었다.“그러게, 안주인 행세라도 해요?”또 다른 도우미가 앞치마를 풀고 바닥에 던지며 홀연히 떠나버렸다.별장은 텅 비었고 김리아는 묵묵히 모든 짐을 챙겼다.평소 입던 간단한 옷 몇 벌을 제외하고는 민우빈이 사준 고가의 옷과 보석, 가방을 모두 중고 판매처에 보냈고 민우빈의 계좌를 남겼다. 물건 판 돈이 곧바로 민우빈의 계좌로 들어갈 거다.플래티넘 신용카드와 별장 열쇠를 봉투에 넣어 퀵으로 민우빈의 사무실에 보냈다.그에게 돌려줘야 할 건 전부 돌려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별장을 나섰다.이윽고 김리아는 택시를 타
한편 민성그룹 최고층 사무실.경인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건물로 네 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건물은 하늘 아래 우뚝 솟았고 민우빈은 그곳에 등을 돌린 채 곧게 서 있었다.비서 조태경이 업무 보고를 하며 김리아가 보낸 신용카드와 열쇠를 돌려주었다.동시에 민우빈의 휴대폰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는데 중고상에서 옷과 장신구를 팔아 10억 넘는 금액을 보낸 거다.민우빈의 눈동자가 움츠러들더니 손에 들린 신용카드를 툭 부러뜨렸다.“이미 갔나?”조태경이 머뭇거렸다.,“민 대표님, 직접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민우빈은 얼굴을 찡그렸다.가기 싫었다. 그 여자가 가면 가는 거지, 뭐 볼 게 있다고...하지만 결국엔 홀린 듯이 별장으로 돌아왔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다가오는 싸늘함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별장은 모델 하우스였던 모습으로 돌아간 뒤였다.결혼 후 그가 김리아를 이곳에 혼자 뒀던 3년 동안 김리아는 조금씩 집을 꾸몄다. 커튼은 따뜻한 색감으로 바꾸고 열심히 고른 그림과 아기자기한 장식품이 곳곳에 보였다. 유리병에 꽃까지 꽂은 걸 보아 무척 정성을 들인 게 분명했다.그런데 떠나면서 과거 이곳에서 지냈던 흔적을 모두 지우고 모델 하우로 되돌릴 줄이야.마치 3년 동안 이곳에서 지낸 적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시위하는 건가, 그의 돈은 한 푼도 필요 없고 그와 철저히 연을 끊고 싶다고?어떻게 감히!민우빈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꽉 다물며 암울한 눈빛에 한기가 스며들었다.그의 뒤를 따라가던 조태경은 그런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대표님, 별장 어떻게 할까요?”“너 가져.”민우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정하게 돌아서서 별장을 떠났다.조태경은 어안이 벙벙한 채 입을 벙긋했다.수백억에 달하는 도심의 별장을 그에게 준다고? 대체 어떻게... 줘도 차마 받을 수 없는데!조태경은 별장을 돌아보며 김리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민우빈 곁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그의 성격을 잘 알았다. 통제적이고 소유욕이
김리아는 민씨 가문을 떠난 후 곧바로 투자회사 상무로 첫 직장을 구했다.대학에서 수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그녀는 직장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집을 빌려 임시로 가정부를 고용해 민소희를 돌보게 하고 자신은 낮에 일하러 나갔다.새 회사의 위치가 집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소희가 집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빠르게 돌아올 수 있었다.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여러 명의 직원이 회사 공용 공간에 있는 대형 스크린을 둘러싸고 수군거리는데 그녀는 지나가면서 몇 마디 말을 들었다.“기사 봤어요? 경인 재벌 민우빈의 여신이 이틀 전에 천조국에서 돌아왔다면서요?”“아, 그 육씨 가문 아가씨이자 경인 제일 여신인 육정아?”“네, 너무 부럽네요. 파파라치가 두 사람이 고급 호텔에 드나드는 모습을 찍었는데 민 대표님이 그 아가씨 손을 다정하게 잡고 있었어요.”“너무 부럽네요. 육정아는 예쁘고 착한데 학력도 높고 육씨 가문은 경인에서 재력과 권력으로 내로라하는 가문이잖아요. 어린 나이에 벌써 유명한 화가가 됐어요. 모든 걸 가진 엄친딸이 따로 없어서 줄곧 독신이었던 민 대표님도 결국 넘어갔잖아요.”김리아가 그들의 시선을 따라 화면을 바라보니 최고급 갤러리의 오프닝 행사였다. 카메라 속 육정아는 온화하고도 대범하며 재벌가 아가씨로서 고귀함과 우아함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그날 밤 민우빈의 셔츠 위에 묻은 빨간 립스틱과 향수 냄새를 떠올랐다.저 아가씨가 남긴 거겠지.줄곧 독신이었다고? 김리아는 웃었다. 사람들은 민우빈이 결혼했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그녀는 항상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어쩐지 민우빈이 서둘러 이혼 얘기를 꺼내더라니. 여신님이 돌아와 그녀에게 자리를 넘겨줘야 했던 거다.사람들은 여전히 수군거렸다.“민 대표님께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데 여자들 마음은 찢어지겠네.”“결혼 날짜도 다 정해졌다고 들었어요.”“재벌가 집안의 선남선녀잖아. 아주 잘 어울려.”“그러게요. 다들 이만 가요. 우리 같은 평민들은 그저 구경이나 해야죠.”묵묵히 돌아선 김
“민 대표님의 직원인가요?”육성준은 김리아를 가리키며 담담하게 웃었다.“어느 부서에서 근무하죠? 아까 제가 부주의로 부딪혀서 아침 식사를 바닥에 떨어뜨렸어요. 다시 아침을 사서 갖다 주려고요.”김리아는 육성준의 말주변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민우빈의 앞에서 육정아가 행패를 부렸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대답하지 않은 문제를 물어봤다.“아침 한 끼일 뿐이니 육 대표님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혹시 육 대표님은 민성 그룹의 직원 복지를 의심하는 거예요? 직원의 아침도 제공할 수 없을까 봐요?”육성준은 싱긋 웃었다.“민 대표님, 오해했어요. 저는 그런 뜻이 없었어요.”민우빈은 쌀쌀하게 김리아를 째려봤다.“시간관념이 없어? 출근 첫날부터 지각이야?”김리아는 어이없었다. 지각이라니? 하지만 결국 그녀는 다른 말을 삼켜버렸다.“죄송합니다. 민 대표님, 육 대표님, 저는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말을 마친 후 그녀는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떠났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김리아를 주시해 보는 육성준을 곁에서 지켜보던 민우빈은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방금은 제가 리아 씨 시간을 지체했으니 민 대표님께서 탓하지 말아 주세요.”육성준이 사과했다.김리아가 어느 부서에서 일한다고 민우빈이 대답하지 않자 그는 더는 묻지 않았다. 민우빈이 말하지 않으려는 게 분명했다.직감적으로 육성준은 두 사람의 사이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여동생도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때리지 않았을 것이다. 민우빈도 들어온 이후로 안색이 줄곧 어두웠고 말도 거칠게 했다.“저는 오늘 협력 건으로 왔어요. 잠시 얘기할까요?”육성준은 화제를 바꾸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맞아, 우빈아, 나도 이 일로 왔어. 이틀 전에 네가 아빠와 협력한다고 한 후 아빠가 기분이 좋으셔서 나더러 진행 상황을 확인해 보라고 했어.”솔직히 그녀는 프로젝트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민우빈과 가까이하고 싶어서 찾아왔다. 그리고 김리아가 죽었으니 민
“참,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지 않았어요.”육성준은 부드럽게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계곡을 흐르는 물처럼 여전히 듣기 좋았다.“김리아라고 해요. 아름답다는 리, 맑을 아에요.”김리아는 고개를 숙이며 숨을 크게 들이쉰 후 말했다.‘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오늘 처음 만난 거로 하지 뭐.’“이름이 예쁘네요.”육성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더니 김리아의 유니폼에 달린 이름표를 보며 물었다.“여기서 일해요? 민성 그룹의 직원이세요?”“그런 셈이죠.”김리아는 얼버무리며 대답했다.육성준은 김리아가 바닥에 떨군 빵과 우유를 보더니 몸을 숙여 하나씩 주웠다.“죄송해요. 동생이 곱게 자라 리아 씨의 아침 식사를 바닥에 떨어뜨렸네요. 이건 더러워졌으니 버리세요. 어느 부서에서 일하는지 알려주면 제가 다시 사서 가져다드릴게요.”“그럴 필요 없어요. 가림산에서 저를 구해줘서 고마워요. 깨어나 보니 이미 떠났더군요. 그때 구해 준 사람이 누군지 몰라 고맙다고 인사도 해 주지 못할까 봐 걱정했어요.”육성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김리아는 계속해서 말했다.“옷과 돈을 남겨주셔서 고마워요. 제가 포장해서 돌려드릴 테니 주소를 주세요. 택배로 보내드릴게요.”육성준이 곁에 있어 감히 경솔하게 행동하지 못했던 육정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뭐지? 가림산에서 오빠가 김리아를 구했다니?’그제야 육정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김리아를 구한 사람이 바로 오빠라고? 그래서 장호철이 실패했어? 그런 거였네!’육정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오빠 때문에 일을 망칠 줄 생각지도 못했다.‘거의 성공할뻔했어! 천한년이 죽을 팔자가 아닌가 봐.’육성준은 김리아가 물건을 돌려주겠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리아 씨가 깨났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 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전화를 받고 급한 일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났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남겨준 물건들은 비상용이니 사양하지 마세요.”
김리아의 거듭된 무시와 도발에 육정아는 화한 사자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목에는 핏대까지 세웠다.그 순간 육정아는 명문가 아가씨의 이미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김리아의 긴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힘껏 아래로 끌어내렸다.김리아를 잡는 순간 그녀의 따뜻한 촉감을 느낀 후에야 육정아는 마침내 김리아가 정말 살아있다는 것을 확신했다.‘장호철, 빌어먹을 놈! 임무에 실패하고도 뻔뻔스럽게 돈을 두 배나 받아갔어?’막돼먹은 사람만이 싸울 때 상대방의 머리채를 잡아당긴다. 육정아가 공공장소에서 체면도 차리지 않고 이렇게 할 줄을 김리아는 생각지도 못했다. 육정아에게 잡혀 머리가 아파 났던 김리아는 반격하고 싶었지만 머리채가 잡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육정아는 막돼먹은 사람처럼 욕설을 퍼부었다.“나쁜 년! 감히 내 남자를 유혹하다니! 나와 우빈이 곧 결혼한다는 걸 몰라?”김리아를 향해 따귀를 때리려고 손을 번쩍 쳐들던 육정아의 손을 누군가에게 꽉 잡았다.“아, 아파.”손목뼈가 부서질 것 같아 육정아는 눈물을 흘리며 어쩔 수 없이 김리아의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무슨 오지랖이야!”육정아는 화를 내며 뒤를 돌아보다가 멍해졌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김리아도 의아하게 그 사람을 쳐다봤다.부드러운 분위기를 가진 이 남자는 완벽하게 잘생긴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질 것처럼 맑고 깨끗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마에는 잔머리가 흩어져 있었다. 단정한 양복 차림을 했지만 온몸에는 우아한 기품이 배어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김리아는 흠칫 놀랐다.‘어떻게 이분이?’성준, 지난번 헤어진 이후로 김리아는 이미 3년이나 그를 보지 못했다.‘왜 여기에 나타났을까? 왜 육정아를 제지하며 나를 도와주는거지?’김리아를 훑어보는 남자의 부드러운 눈빛에는 놀라움이 스쳤다.그는 봄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등에 난 상처는 나았어요?”김리아는 깜짝 놀랐다.‘내 등에 상처가 난 걸 어떻게 알았지? 설마...’강리아는 심장 박동이 갑자기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김리아는 세수를 하고는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어제 조태경이 왔을 때 휴대폰과 전화카드 외에 민성 그룹의 작업복도 한 벌 가져왔다. 심플한 흰색 셔츠, 검은색 양복과 치마, 검은색 구두는 민성 그룹의 사무직 직원의 유니폼이다.민성 그룹에 도착한 김리아는 시계를 보았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아직 아침을 먹지 않아 먼저 옆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단팥빵과 우유를 사서 주머니에 들고 민성 그룹 아래층으로 돌아왔다.이미지를 위해 문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김리아는 조용한 휴식실을 찾아 아침을 먹으려고 홀에 들어섰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육정아와 마주쳤다.민우빈이 거듭 그녀에게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던 사람이다.오늘따라 육정아는 유난히 환하게 차려입었다. 호수처럼 잔잔한 파란색 롱 드레스를 입고 어깨에는 얇은 캐시미어로 된 세련된 망토를 걸쳤으며 같은 색으로 된 커다란 모자를 썼다. 입술에 빨간색 립스틱을 정교하게 발랐고 아이섀도까지 환하게 마무리한 그녀는 도도하게 고개를 쳐들고 걷고 있었다.김리아는 육정아를 만나기 싫었지만 왠지 계속 마주쳤다.육정아는 김리아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귀신을 본 것처럼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갑작스러운 비명에 출근하려고 지나가던 직원들도 모두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쳐다봤다.김리아도 발걸음을 멈추고 멍해졌다.‘육정아가 귀신을 봤나? 왜 나를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짓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김리아는 얼떨결에 자신의 얼굴을 만져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육정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리아를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김리아가 죽지 않았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대낮에 나타날 수 있지? 귀신이라도 만난 건가?’육정아는 두려워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또 주변을 둘러다 봤다. 오가던 사람들도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육정아는 손으로 김리아를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너, 너는 왜 귀신이 되어도 날
이 말을 듣고 김리아는 고개를 들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결국 참고는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알았어.”소희를 보고 싶었던 김리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민우빈은 오늘따라 말을 잘 듣는 김리아를 보며 그녀가 자신의 말을 정말 알아들었는지 의심했다. 그는 몸을 쪼그리고 앉아 김리아의 턱을 잡고 그녀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육정아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했는데 알아들었어? 그 결과는 네가 감당할 수 없을 거야!”건드려서는 안 되는 일이 있고 매우 위험한 사람이 있다.턱이 잡힌 김리아는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자신을 꼭 끌어안으며 입술을 거의 하얘질 때까지 꽉 깨물었다.김리아는 당연히 그 결과를 알고 있다.‘이미 이 결과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어? 거듭 강조할 필요가 있는거야? 너의 수단이 얼마나 잔인한지는 잘 알고 있으니 반복하지 않아도 돼.’민우빈은 김리아의 목숨을 원했지만 지금은 자비를 베풀어 그녀를 놓아주었다. 김리아가 순순히 말을 듣고 그의 여신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녀의 목숨을 살려둘 것이다.소희를 위해 김리아는 일단 살아야 했다.“알아들었어. 충고해줘서 고마워. 내가 꼭 기억할게.”김리아는 씁쓸하게 웃었다.만족스러운 답안이었지만 민우빈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그는 손을 털며 일어섰다.“조태경이 잠시 후 휴대폰을 가져올 거야. 새 번호로 내 카톡에 친구 신청해. 일 있으면 전화하고.”민우빈은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떠날 준비를 했다.김리아가 갑자기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방금 그 합의서, 나는...”김리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호텔에 계속 머물 수 있어?”민우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현재 상황으로 보면 호텔에 있는 것도 좋은 편이야. 이곳은 내 회사와도 가깝고 호텔에는 항상 손님이 있고 감시 카메라도 많아서 행적을 찾을 수 있어.’그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그래.”김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추가 계약을 거두며 민우빈은 김리아의 면전에서 조태경에게 전화했다.“당장 휴대전화를 새것으로 사와. 그리고 새로운 번호도 만들어서 함께 가져와.”전화를 끊은 후 민우빈은 김리아를 쳐다봤다.‘어느 남자가 선물한 옷일까?’그도 그럴것이 김리아는 여태껏 이런 물건을 사지 않았다. 결혼한 지 3년이 되지만 그는 김리아가 자발적으로 명품 옷을 사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이런 물건들은 모두 그가 사주거나 김리아가 노점에서 티셔츠를 사서 입곤 했다.오늘 김리아의 몸에 걸친 옷은 여태껏 보지도 못한 것인데 이것은 그가 사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별장을 떠날 때 옷을 한 견지도 가져가지 않았으니 그럼 이 옷은 누가 선물한 것일까?민우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김리아의 몸에 걸친 옷을 보았는데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갑자기 그는 한 걸음 다가오며 냉랭하게 말했다.“벗어!”김리아는 갑자기 높아진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왜 옷을 벗으라고 하지? 무엇을 하려는 거야?’김리아가 움직이지 않자 민우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예 그녀의 옷을 직접 벗겨버렸다.민우빈의 손가락이 김리아의 어깨에 닿았을 때 그녀는 도깨비라도 본 것처럼 놀라 연신 물러섰다.그녀의 눈에서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보게 된 민우빈은 눈썹을 찌푸렸다.‘젠장, 왜 나를 두려워해?’화가 치밀어 오른 민우빈은 긴 다리를 뻗어 한걸음에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김리아를 벽에 밀어붙인 그는 한 팔로 그녀를 구석에 단단히 가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옷을 모두 벗겨버렸다. 김리아가 떨고 있는 것을 느꼈어도 민우빈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눈에 거슬리는 옷을 쓰레기통에 버린 후에야 그는 비로소 마음이 후련해졌다.거의 알몸뚱이가 된 김리아는 간신히 두 팔로 가슴을 안으며 몸을 가렸다. 김리아는 등을 벽에 바짝 붙였고 그녀의 몸에 난 상처는 모두 등에 있었기에 등을 보지 못한 민우빈은 자연히 상처를 보지 못했다.지금 그녀는 몸을 덜덜 떨고 있었는데 마치 죽임을 당할 어린 양과 같아 남자의 욕망을
병원에서 하룻밤을 보낸 김리아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뇌 CT를 찍은 뒤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병원을 떠났다.택시를 타고 경인시로 돌아가려고 차에 탄 그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속 고민했다.자신의 물건과 서류가 전부 호텔에 있으니 우선 자신이 묵었던 그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택시가 호텔 아래층에 도착하자 김리아는 계산을 마치고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방 안에 뜻밖에도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그녀를 등지고 있어도 그 뒷모습은 너무 익숙한 민우빈이었다.김리아는 놀라서 한 발짝 물러서며 본능적으로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지만 실수로 그만 문을 닫아버렸다.‘우빈 씨가 왜 여기에 있지? 내가 죽지 않은 걸 아는 걸까? 그래서 직접 나를 해결하려는 거야?’등 뒤에서 인기척을 들은 민우빈은 일어나서 한 발 한 발 김리아로 향했다.그의 키는 압박감이 강했는데 옷 단추가 몇 개 풀려 있어 날카로운 카리스마로 김리아를 노려보고 있었다.김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보는 눈빛이 낯설다는 것을 본 민우빈은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왜? 나 몰라? 한 마디도 못 해?”민우빈은 한걸음에 김리아의 앞에 다가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안색이 약간 창백한 것 외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그녀의 슈트와 신발이 모두 일반 시중에서 살 수 없는 한정판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김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내가 무슨 말을 하길 바라는 거야? 내가 살아 있다니 실망이 크겠네?”그녀는 지금까지 그의 앞에서 이렇게 차가운 표정을 드러낸 적이 없는데 이런 표정에 민우빈은 불편함을 느끼며 안색이 극도로 나빠졌다.그날 저녁, 민우반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는 받지 못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전화를 다시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는 접대를 마친 후, 여러 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끝내 받지 않았고 결국 전화기도 꺼버
“아니, 좀 더 쉬어야 하는데... 오늘 퇴원할 수 없으니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관찰해야 해요.”간호사가 앞으로 나가 김리아를 붙잡았다.“알아요. 잠깐 나갔다 올게요.”말하는 동안 김리아는 이미 병실 문 앞까지 뛰쳐나갔다. 그녀는 이 병원에 익숙하지 않아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프런트를 찾았다.김리아는 급히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물었다.“저를 병원에 데려온 남자가 어느 방향으로 갔어요?”프런트 데스크 아가씨는 김리아가 어제 한밤중에 온 여자라는 것을 알아보고 동쪽을 가리켰다.“한발 늦게 왔네요. 이미 떠났을 거예요.”김리아는 망설임 없이 쫓아갔다.동쪽.그녀는 표지판을 따라 곧장 주차장으로 달려갔다.도착했을 때 그녀는 값비싼 마이바흐 한 대가 떠나가는 것만 보았다.주차장에 가로등이 있지만 빛이 그리 밝지 않아 운전하던 남자의 옆모습을 미처 볼 수 없었고 잘 보이지도 않았다.번호판도 기억하지 못하고 ‘경’자로 시작하는 것으로 경인시의 부잣집 자제라 판단했다.김리아는 깨어나자마자 뛰어다니다 보니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졌다.그녀는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 호흡을 조절했다.아까는 그 남자를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은 김리아는 병원으로 돌아와 프런트 간호사에게 물었다.“방금 떠난 남자가 혹시 이름 남겼어요?”프런트 데스크의 간호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요.”“병원비를 계산해 줬는데 어떤 방식으로 냈어요? 신용카드면 이름 조회되지 않을까요?”김리아가 또 물었다.“아, 그분이 현금을 주셨어요.”프런트 간호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번호판은요? 그분이 여기에 주차했으니 차량 번호는 찾을 수 있을 거잖아요.”김리아는 프런트 데스크 간호사 앞에 있는 컴퓨터를 가리키며 말했다.“블랙 마이바흐였어요.”“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프런트 데스크의 간호사는 컴퓨터를 켜고 한참 찾아보고 나서 말했다.“안 나오네요. 주차장 부근 길
아팠다! 몸에 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뼛속까지 찢어지는 아픔에 김리아는 견디기 힘들었다. 머릿속이 흐려지고 이따금 심한 통증과 함께 혼수상태에 빠지고 싶다가 또 정신을 차렸다.혼수상태와 깨어남을 오가며 억지로 눈을 뜬 그녀의 머리 위로는 순백의 천장과 함께 두 줄의 밝은 LED 랜턴이 보였다.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했다.‘죽었어? 여기가 천국인가?’문득 자신이 벼랑에서 떨어진 그 순간을 떠올리며 뼛속까지 섬뜩함이 피어올랐다. 절벽에서 떨어질 때의 어둠에 삼켜진 듯한 절망감과 무중력의 공포가 다시 솟아올라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모든 것을 떠올렸다.민우빈, 그가 사람을 보내 그녀를 죽였다! 그는 그녀가 죽기를 원한다.빈사 상태의 질식감에 가슴을 움켜쥐고 필사적으로 숨을 몰아쉬던 김리아는 극도의 공포에서 가까스로 회복해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공기 중에 소독수 냄새가 가득한 걸 보아 죽지 않은 것 같았고 주위 환경은 틀림없이 병원이었다.그녀는 구조되었다. ‘누가 나를 병원으로 데려왔을까?’그녀는 뜻밖에도 죽지 않고 아직 살아 있다는 생가에 마음에 슬픔이 일었다.‘민우빈이 실망하겠지?’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그녀는 애써 참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으므로 그런 남자를 위해 눈물 한 방울 더 흘리지 않으려 했다.그때 간호사 한 명이 문을 밀고 들어오다가그녀가 일어나 앉는 것을 고 깜짝 놀라고 말했다.“일어났어요? 당장 의사를 불러올게요.”몇 분 뒤 젊은 의사가 들어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드디어 깼군요. 더 깨어나지 않으면 다시 뇌 CT를 찍으러 가려 했어요. 어때요? 제가 잘 보여요? 어지럽고 메스껍고 토하고 싶은 느낌은 없어요?”김리아는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잘 보이고 그런 증상이 다 없어요. 다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실례지만 의사 선생님, 제가 얼마나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어요?”그러자 의사가 대답했다. “1박 2일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