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혼만 남게 된다면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9

9 챕터

제1화

병원에서 암 말기로 죽은 날, 내 영혼은 도시 상공을 떠돌아다녔다.의사는 나의 시신을 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가망이 없어. 가족들에게 알려.”착잡한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곧이어 통화가 연결됐다.“임지유 씨 가족분 되시죠? 임지유 씨가 암 말기로 사망하셨습니다. 병원에 오셔서 시신 인수하길 부탁드립니다.”전화기 너머로 한참 침묵이 흐른 후 차가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전화 잘못 거셨어요. 앞으로 저한테 연락하지 마세요.”이때 의사 옆의 간호사가 의료 차트를 펼치고 날짜를 재차 확인했다.“그럴 리 없는데... 이 번호로 적어도 세 번은 등기했거든요...”전화가 끊긴 후 의사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사기 전화라고 오해했을 수도 있지.”그들은 여전히 날 위로하려 했지만 아쉽게도 침대에 누워있는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박약한 의지에 따라, 나의 신념에 따라 어느 호텔 방 앞에 도착하자 슬립 잠옷을 입은 여자가 이제 막 전화를 끊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그년 끝내 죽었네.”이때 나의 남편 이도진이 달랑 타올 한 장만 두른 채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뭐해, 자기야?”여자는 일부러 홀가분한 척하며 답했다.“귀신 같은 당신 와이프 전화를 받았어. 내가 대신 받았다고 원망하는 건 아니지?”“지유한테서 전화가 왔다고?”이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 여자가 가출한 지 한참 됐는데 갑자기 웬 전화야?’다만 그는 눈앞의 아름답고 유혹적인 여자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의 의문을 꾹 짓누른 채 그녀에게 덮쳐들었다.그도 그럴 것이 다 늙은 아줌마랑 세련된 커리어 우먼이랑 비교할 바가 안 되니까.하지만 이도진이 정작 잊고 있었던 게 한 가지 있는데 애초에 그가 내게 전업주부가 되어달라고 애원했었다.“지유야, 은찬이는 지금 한창 엄마가 필요할 때니 집에서 애만 키워. 약속할게. 너랑 은찬이 평생 책임지고 보살펴줄 거야 내가.”그토록 진지한 얼굴로 맹세를 해대니 우리 엄마마저 마음이 흔들려서 사위 대신 나를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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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병상에 누운 내가 고통으로 몸부림칠 때 이도진은 몇십만 원 하는 PCIA를 내게 써줄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한라희가 간호사의 시선을 피해 그에게 고개를 내젓자 이도진은 끝내 나의 고통을 무시한 채 단돈 몇십만 원을 아끼려 들었다.나는 점점 의식이 흐릿해지고 온몸의 세포가 외쳐대는 것만 같았다.PCIA 달라고, 나 혼자 그 돈 낼 수 있다고 말이다.하지만 온몸의 기운이 쫙 빠진 채 무기력하게 이도진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나와 함께 분만실에 들어오는 걸 포기했다.내 아이는 배 속에 있었고, 남편이란 자는 분만실 밖에, 친정엄마는 병원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아파트에 있었다.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도 나의 사활에 관심이 없었다.친정엄마마저 우리 오빠네 아이를 돌봐준다면서 날 보러 오지 않았다.내가 아이를 낳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한 달 내내 엄마는 단 한 번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한편 식사 자리에서 내연녀는 아예 젓가락을 들지도 않았다.이도진이 정성껏 음식을 집어주자 열성적으로 반겨주는 척하던 한라희도 끝내 본심을 드러냈다.“이서야, 들어와서 나랑 함께 설거지해.”“싫어요, 나 안 할래요.”한라희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유이서를 쳐다봤다.이에 유이서는 흐뭇해하며 이도진의 어깨에 기댄 채 거들먹거리면서 웃었다.“아줌마, 나 임신했잖아요. 만에 하나 손에 물이 닿았다가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아줌마가 책임질래요?”한라희는 어이가 없어 얼굴이 다 벌게졌다.“임신이 뭐 벼슬이야? 설거지 안 하는 며느리가 어디 있다고 그래?”“애까지 뱄으면서 우리 도진이한테 시집 안 오면 대체 누가 널 데려가겠니?”이 말을 들은 유이서가 피식 웃었다.“아이는 내 마음먹기 나름이죠. 싫으면 언제든지 떼버릴 수 있잖아요.”“근데 도진 씨, 진짜 날 사랑하긴 하는 거야? 당신 엄마가 이렇게 날 괴롭히는데 계속 지켜보기만 하겠어?”이도진은 순간 안쓰러운 표정으로 유이서를 품에 와락 안았다.“엄마, 말이 너무 지나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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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이도진과 유이서는 계단에서부터 집 문 앞까지 딥키스에 푹 빠져버렸다. 이도진이 성급하게 문을 열고 진도를 내빼려 할 때 마침 이은찬이 물컵을 들고 거실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이도진은 뻘쭘해서 유이서를 놓아줬다. 이에 유이서는 그의 가슴팍을 내리쳤고 남자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한 손으로 그녀의 주먹을 감싸 쥐었다.“애인 단속 잘해요. 엄마 돌아오면 또 미쳐 발광할라.”외도 현장을 들키고도 뻔뻔스러운 두 사람을 지켜보며 이은찬이 담담하게 야유를 날렸다.이도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돈으로 해결될 문제라고 여기면서 휴대폰을 꺼내 아들에게 계좌 이체했다.“할머니 당분간 고향에 내려가 계실 테니 요 며칠 푹 쉬어. 돈 문제는 걱정 말고.”입금 확인한 이은찬은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방으로 들어갔다. 뒤에 있던 유이서가 이 모습을 보더니 불만조로 말했다.“은찬이 너무 감싸고 도는 거 아니야?”이때 이은찬이 대뜸 걸음을 멈췄다.“유 쌤, 경고하는데 입단속 잘해요.”“나 아니면 쌤도 우리 아빠 만날 일 없었잖아요. 안 그래요?”‘아들아, 너도 네 문제인 걸 알긴 해?’나는 영혼이 이탈되어 아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귀싸대기를 날리려고 했지만 손이 닿는 순간 그대로 흩어지고 말았다.이때 이은찬이 나지막이 물었다.“엄마 어디 갔어요?”한창 애인을 달래주던 이도진은 그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뭐라고? 방금 제대로 못 들었어.”아이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닫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아무것도.”[우리 엄마 여행 갔더니 아빠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연녀를 집에 데려오는 거 있지? 진짜 웃기지 않냐?]그가 리아라는 여자아이한테 메시지를 보내자 곧장 답장이 도착했다.[쌤통이야. 그러게 누가 너희 엄마더러 우릴 반대하래? 벌 받은 거지 뭐.][하긴, 엄마는 내 모든 걸 통제하려고 들어. 이렇게 나가 있는 동안 조용하게 지낼 수 있어서 좋아.]이은찬은 메시지를 작성한 후 전송하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끝내 다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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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때 전화기 너머로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실례지만 이도진 씨 맞으세요? 여기 병원 영안실인데 임지유 씨 시신을 정말 인수하지 않을 생각인가요?”분노가 극에 달했던 이도진은 순간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뭐라고요?”“병원에 오셔서 임지유 씨 시신 인수 부탁드립니다. 일주일 전에 이미 연락드렸거든요. 시간 되시면 요 이틀에 얼른 이쪽으로 와주세요.”한라희가 옆에서 이도진의 팔을 잡아당겼다.“지유 이년 지금 어디래?”이에 이도진이 그녀의 팔을 확 내팽개쳤다.“시끄러워!”이 광경을 본 유이서는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초조한 척하며 이도진에게 다가가 제법 너그러운 사람인 양 그를 타일렀다.“오늘은 은찬이를 축하해주는 자리야. 무슨 일 있으면 이따가 집에 가서 다시 얘기해.”이때 이도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다들 입 닥쳐! 지유가 죽었대!”정신이 번쩍 든 이은찬이 아빠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뭐라 더 말하길 기다렸지만 이도진은 어느덧 넋이 나간 채 휴대폰 화면만 멍하니 쳐다봤다.그는 떨리는 손으로 우리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장모님, 지유가 병원에서 죽었대요. 의사가 방금 시신 인수하러 오라고 전화 왔어요...”“우리 엄마가 왜 죽어? 멀쩡한 사람이 왜 죽냐고?”이은찬은 이도진의 옷을 꽉 잡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아빠가 내연녀랑 함께 집에서 그 짓거리를 하는 걸 지켜봐야만 했는데 오늘은 나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됐으니 이 아이도 놀랄 만했다.이도진도 아들에게 휘둘리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바닥을 내리치는 시늉을 하더니 끝내 아주 가볍게 내리칠 따름이었다.이은찬은 아빠의 눈물이 닿은 손등을 바라보며 역겨움이 차올랐다.“어떻게 죽어? 멀쩡한 사람이... 왜 죽냐고...”이도진은 쉴 새 없이 구시렁댈 뿐이었다.한편 병원에 도착한 엄마는 이도진을 보자마자 가차 없이 뺨을 내리쳤다.“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내 딸 죽였어!”수년간 집안일만 해오며 살아오던 평범한 엄마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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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사람은 죽으면 분말이 되어 네모난 작은 상자에 담긴다고 하는데 나도 난생처음 체험해보게 되었다.나의 육체는 뜨거운 불씨에 활활 타올랐지만 영혼은 마치 세례를 받는 것만 같았다.이은찬은 나의 유골함을 부둥켜안고 대성통곡했다. 이도진이 등을 토닥여주려고 손을 올렸지만 아이는 매정하게 뿌리치며 충혈된 두 눈으로 그를 째려봤다.‘하지만 은찬아, 너야말로 내가 네 인생에 간섭하는 걸 제일 싫어했잖아...’‘그토록 내가 죽길 바라다가 정작 소원을 이뤘는데 왜 또 이 지경이 된 거야?’그 시각 한라희는 옆에 앉아 죄책감에 휩싸인 표정으로 말했다.“나도 몰랐어... 이 병이 이렇게 쉽게 죽어버릴 줄은 몰랐다고...”고요한 정적이 흐르던 방 안, 누군가가 다짜고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넋이 나가 있던 이도진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문 앞을 바라보았는데 유이서가 일꾼들을 지휘하며 TV를 집안으로 옮기는 것이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새집 장만하잖아. 우리 곧 결혼하는데 이전처럼 똑같이 지낼 순 없지.”너무나도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이도진은 끝내 분노가 폭발하여 귀싸대기를 날렸다.“누가 너랑 결혼한대? 지유가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기어들어 오려고 해?”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통화 목록을 유이서의 얼굴에 들이댔다.“그날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 네가 받았지?”다만 이런 일로 기가 죽을 유이서가 아니었다. 모든 사실이 들통나자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팔짱을 끼고 이도진을 쳐다봤다.“와이프 살아있을 땐 나랑 바람피우느라 정신없더니 이제 와서 다 죽으니까 애틋한 척이야?”“솔직히 말할게. 도진 씨가 날 꼬실 때부터 난 이미 당신 와이프를 찾아갔어.”“당신 와이프가 내 말을 들었을 때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누르께한 얼굴에 온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그 꼴을 말이야. 진짜 웃겨 죽겠더라.”그녀의 말을 들은 이도진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어느 날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비굴하게 그의 마음을 떠보았다. 여기까지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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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사실 난 암에 걸린 사실을 잘 숨기지도 못했다.어느 날 집안일을 하다가 기절해버렸는데 무려 3시간이나 지나고 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벽을 짚고 문밖을 나섰을 때 한라희가 한창 휴대폰을 끌어안고 숏츠나 보면서 신나게 웃고 있었다.“아까 제 방의 인기척 소리 못 들으셨어요?”“들었지 당연히. 쓰러졌으면 스스로 일어날 것이지 꼭 내가 부축해줘야 해?”한라희는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는 마지못해 물건을 챙기고 병원으로 출발했다.하지만 외출하려는 나를 본 한라희가 혀를 끌끌 차기 시작했다.“팔자 좋네. 틈만 나면 나가서 놀 생각이야?”병원에 도착한 나는 반나절이나 헤매고 나서야 검진을 마쳤는데 다음날 또 일부 검진이 남아 있다는 통보를 들었다.“임지유 씨, 내일 꼭 제때 검진받으러 오셔야 합니다.”의사가 너무 진지한 얼굴로 당부하니 나는 저도 몰래 의심이 들었다.“저 혹시 무슨 심각한 병이라도 걸렸나요?”“초기 진단으로 췌장암일 가능성이 큰데 구체적인 건 아직 확정되지 않았어요. 치료에 대한 희망은 포기하지 마세요.”넋이 나간 채로 집에 돌아온 나는 그 와중에 또 설거지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빨지 않은 옷들이 한가득 있다는 게 떠올랐다.평상시에는 전부 내 몫이었지만 그날은 처음 반항심이 생겨났다.집안을 가득 채운 악취에 남편이 코를 막고 잔소리를 해댔다.“왜 이렇게 게을러졌어? 이까짓 집안일도 다 못하고 대체 집에서 하는 게 뭐야? 내가 너무 감싸고 돌았지 감싸고 돌았어!”나는 차분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이게 왜 다 내가 할 일이야? 당신은 왜 안 하는 건데?”이에 남편이 곧장 반박했다.“난 밖에서 힘들게 돈 벌잖아. 자잘한 집안일까지 내가 하면 넌 대체 하는 게 뭔데?”옆에 있던 한라희도 맞장구를 쳐주었다.“남자가 밖에서 돈 버느라 바쁜데 여자가 돼서 내조나 잘할 것이지, 쯧쯧...”“바빠?”나는 실소를 터트렸다.“밖에서 딴 여자랑 붙어 다니느라고 바쁜 건 아니고?”이도진은 귀찮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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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장례식에서 엄마가 첫 줄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전에 나의 상사였던 분이 엄마 곁으로 다가왔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엄마는 눈물을 쓱 닦고 어두운 표정으로 상사를 쳐다봤다.“와주셔서 고마워요.”상사는 흑백으로 된 나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십여 년 사이에 지유가 이런 고통을 겪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회사에서 줄곧 친절한 성격에 표현이 좋고 업무 효율도 높아서 동료들이나 대표님까지 다들 너무 좋아해 주셨어요. 매니저 한 분이 이직할 때 대표님은 그 자리를 지유 씨한테 남겨주겠다고 다 결정하셨죠.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바로 성사할 수 있었는데...”상사의 눈가에 눈물이 맴돌았다.“구정이 지나고 돌아오더니 대뜸 사직하겠다고 할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임신했다고 해서 대표님이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다고 했는데 지유 씨는 한사코 가족들이 사직을 강요한다면서 눈물로 호소했어요. 대표님은 결국 지유 씨 고집을 못 꺾고 사표 처리를 했고요.”상사가 엄마를 계속 위로했다.“시집을 잘못 간 건 절대 지유 잘못이 아니에요. 어머님도 이제 그만 노여움 푸세요.”한편 엄마는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그해 내게 사직을 강요한 사람 중 엄마도 한몫을 했으니까.즐겁게 구정을 보내고 다음 날 이도진이 우리 집까지 인사하러 찾아왔었다.내가 주방에서 바삐 돌아칠 때 이도진은 엄마를 붙잡고 몰래 속삭였다.“어머님, 지유 임신했어요. 저는 이제 지유가 사직하고 집에서 애나 봤으면 좋겠는데 기어코 싫대요. 어머님이 대신 좀 설득해주실 수 있나요?”엄마는 조금 망설여졌다.“지유 지금 하는 일 엄청 좋아해. 네가 갑자기 사직하라고 하니 당연히 거부하겠지.”하지만 이도진이 누구인가? 그는 우리 엄마를 너무 잘 안다. 대뜸 옷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더니 엄마의 손에 쥐여주며 아양을 떠는 것이었다.“어머님, 여기 2천만 원 들어있어요. 저랑 지유가 1년 동안 모은 돈이에요. 형님께서 요즘 좀 힘드시다고 들었는데 매부가 돼서 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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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상사와 인사를 마친 후 엄마는 또 내 고등학교 친구들을 보게 됐다.내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비록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아줌마, 저 그때 명문대 가게 된 거 진짜 지유 덕분이에요.”“수능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는데 지유가 종일 저를 데리고 영어 문제집도 풀고 그랬거든요. 희망이 있는 한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했어요. 지유도 좋은 대학 붙어서 아줌마를 친척들 앞에서 어깨가 으쓱해지게 해드리고 싶다고 했는데...”내 친구는 국화꽃을 엄마의 발 옆에 내려놓았다.“나중에 다른 친구한테 들었는데 지유가 분명 TOP2에 드는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 기어코 집 근처의 평범한 대학으로 선택했다면서요? 그때 얼마나 애석하던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지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결혼 뒤엔 왜 또 전업주부로 된 거죠?”그녀는 두 손을 맞잡고 말을 이어갔다.“어쩌면 모든 게 다 주어진 운명이겠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엄마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애초에 엄마가 제멋대로 나의 대학 지망을 고쳤으니까...나는 입학통지서를 받은 날에야 이 결과를 알게 됐다.멘탈이 무너지고 이성을 잃은 채 산더미처럼 쌓인 학습자료들을 바닥에 내팽개쳤고 문제집들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아 대체 왜 나한테 이러냐고 미친 듯이 엄마에게 포효했다.그때 엄마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없었다.나중에 알게 됐는데 오빠가 전문대 출신이라 취직이 힘들어서 엄마에게 계속 생활비를 받아 써야 하는 처지가 됐으니 엄마는 그런 오빠에게 부담을 덜기 위해 나에게 노후를 의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야심이 생겨서 집에 돌아오지 않을까 봐 지독하게도 제멋대로 내 운명을 바꿔놓은 것이다.장례식에 수많은 문상객들이 찾아왔다. 친척들을 제외하고도 내가 생전에 고향에 다녀오면서 만났던 분들도 종종 있었다.그들은 나에 대한 인상, 나의 능력, 내가 본인들을 도와준 매한가지 일들을 엄마에게 전해드리며 얘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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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이도진은 결국 유이서와 결혼했다. 내연녀에서 새엄마로 등극한 그녀는 이은찬에게 줄곧 무시를 당했다. 유이서는 남편에게 쉴 새 없이 푸념했지만 그는 듣는 척도 않았다. 이도진이 미련을 가진 건 단지 유이서 배 속의 아이 뿐이다.한편 이은찬은 대학에 다닌 후 등록금과 생활비를 요구할 때 말곤 거의 집에 연락이 없었다.이도진과 유이서는 하루가 멀다 하게 부부싸움을 해댔고 한라희가 되레 싸움을 말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사소한 일에서 유이서는 트집을 잡기가 일쑤였고 이에 시달리던 한라희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나의 친정엄마는 계속 오빠네 집에서 지냈다. 새언니의 싸늘한 태도를 겪으면서, 나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렇게 아들 집에 들러붙어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보냈다.나는 그저 그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변질되지 않은 것에 정말 감사할 따름이었다.석양 속 황홀한 구름이 겹쳐질 때, 내 눈앞에도 한 송이 구름이 나타나더니 영혼이 정화되고 온 마음이 마치 산속의 안개처럼 가벼워지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그때 어렴풋이 신명의 질문이 들렸다.“인간 세상에서 겪은 모든 것들, 아직도 원망하나요?”“아니요. 허심탄회하게 말해서 저도 상대방도 다 잘못이 있는걸요.”“상대방의 잘못이라면 무엇이죠?”“저를 이해하지 못하고 강요만 하고 갖은 계략으로 저를 음해하려 한 것이요.”“그럼 그대의 잘못은 무엇인가요?”“그들이 강압적으로 나올 때 끝까지 반항해야 했는데 줄곧 타협하고 한발 물러서기만 했어요. 저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해 마음이 약해진 것, 그게 가장 멍청한 짓인 것 같아요.”“착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심성이랍니다. 다음 생이 있다면 어떻게 지내고 싶나요?”“그 어떤 미련도 걱정도 없이 단순하고 자유롭게 진정으로 삶을 만끽하고 싶어요.”신명이 가볍게 말을 이어갔다.“다음 생이 있다면 좀 더 이기적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곧이어 지나간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의 인생은 주마등처럼 짧게 한번 재생되었고 그 뒤로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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