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진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걸 알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말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소만리,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심각한 건 아냐. 단지...”“단지 뭐예요?”“당신 몸에 재발한 흔적이 보여.”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기모진은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재발?소만리는 순간 기란군을 임신했을 때 앓았던 병을 떠올렸다.그때의 그 아픔을 그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가볍게 배를 어루만지며 마침내 기모진이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그녀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소만리,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는 마. 의사선생님이 빨리 수술만 하면 괜찮을 거라고 했어. 완치율도 거의 100%에 가깝대.”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안타까워했지만 잘생긴 얼굴을 들어 애써 웃음 지어 보였다.“소만리, 실은 나한테는 기란군 하나로도 충분해. 다시는 당신이 고통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의사선생님은 당신 체질 때문에 재발되었을 수도 있다고 했어. 당신 앞으로 임신하지 않으면 이런 문제는 절대로 다시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괜찮아.”소만리는 기모진의 이 말을 듣고 그를 올려다보았다.“사실은 당신 이 아이 원하고 있죠?”기모진의 눈빛이 굳어졌고 말투는 거칠어졌다.“난 당신만 건강하면 돼.”“알겠어요. 약속할게요. 나 아프지 않을 거예요.”소만리는 그의 눈을 마주 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소만리,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얼른 수술 날짜 잡아.”“네.”소만리는 짧게 대답했다. 소만리가 명쾌하게 대답하자 기모진은 안심이 되었지만 일말의 의심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소만리가 단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흔쾌히 승낙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소만리는 그를 속이지 않았고 실제로 수술대에 올랐다.강자풍의 방해로 기묵비는 소만리가 수술한다는 일을 알지 못했다.소만리는 다시 수술대에 누웠고 그녀는 약간 부른 아랫배를 만지며 기모진의 눈에 비친 은근한 기대를 떠올렸
그때 그녀가 기란군을 임신했을 때 지금보다 더 건강 상태가 나빴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녀는 몇 번이나 자신의 아이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 자신도 감옥에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소군연이 약을 보내줬는데 그 약을 먹고 무사히 기란군을 낳을 수 있었다.게다가 그 몸으로 한동안 목숨을 연명했었다.그런데 그녀가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기모진이 왜 남사택을 떠올렸을까 하는 것이다.이때 초요가 돌아왔다. 그녀는 남사택에게서 받은 약을 건넸다.아주 작은 투명한 병에 알약이 몇 개 들어 있었다.소만리는 이 약병을 보고 한눈에 알아보았다.“이 약은...”“난 당신이 절대 수술에 동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지난번에 남사택에게 연락했었어.”기모진의 대답이 소만리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때 내가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이 남사택의 약 덕분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기모진은 웃으며 자책하는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비록 뒤늦게 깨달았지만 소만리에 관한 일은 나중에 다 알게 되었지.”소만리는 이제야 모든 것을 알았다. 그녀가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기모진이 그녀가 최종적으로 무슨 결정을 할지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이제 보니 그는 그녀를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초요, 나와 기모진을 위해서 다녀와 줘서 고마워.”소만리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렇지만 지금 초요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파왔다.비록 이 얼굴도 이렇게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도무지 그때의 청초하고 사랑스런 미소에는 미치지 못한다. 기모진은 소만리의 말을 듣고 병원에 계속 남아서 상처를 치료했고 초요가 소만리를 배웅하고 난 얼마 뒤 기묵비가 왔다.초요에게 한때는 그녀가 밤낮으로 그리워하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악몽처럼 피하고 싶은 얼굴이 되었다.기묵비는 멀찌감치 초요가 그를 보고 돌아서는 것을 알아채고 일순간 그의 안색이 나빠졌다.그는 발걸음을
그녀가 걸어가서 들고 자세히 보려고 할 때 서재의 문이 열렸다.기묵비가 걸어 들어왔다.제시간에 나타난 초요를 보고 그는 매우 흡족한 듯 입꼬리를 잡아당겼다.그의 옅은 미소와 온화한 모습에 초요는 잠시 얼떨떨해졌다. 그녀의 뱃속에서 흘러가버린 두 아이를 생각하니 그녀의 마음이 한없이 차가워졌다.“보아하니 넌 지금 기모진을 위해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군.”기묵비가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초요에게 다가왔다.초요가 싫다는 기색을 비추며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모진은 내 약혼녀예요. 그를 위해 당연히 무엇이든 할 거예요.”기묵비의 웃음기는 순식간에 깡그리 사라졌고 그는 초요의 입에서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신경을 쓰고 있다는 말을 조금도 듣고 싶지 않았다.“이미 당신이 그렇게 그를 신경 쓴다고 하니 이제부턴 나를 좀 기쁘게 해 줘. 그렇지 않으면 기모진이 살아서 F국을 떠난다는 건 꿈도 꾸지 마.”위협하는 말이 초요의 귓가에 떨어지자 악마의 속삭임처럼 다시 한 번 그녀의 마음을 짓밟았다.어둠이 짙게 깔린 가운데 초요는 지은 죄를 벌하듯 무자비한 기묵비의 약탈을 오롯이 견뎌내고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깨어나 보니 곁에 아무도 없었고 욕실에서 샤워하는 물소리만이 들려왔다.그녀가 옆으로 얼굴을 돌리자 그녀의 숨결 속에 기묵비의 옅은 향기가 남아 있는 것을 느꼈다. 한때는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숨결이었다.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다.그녀는 일어나서 옷을 다 입은 후 배달을 시켰다.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기묵비는 시종일관 눈썹을 깊게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목적으로 초요에게 이런 짓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은 거들떠도 보지 않으면서 기모진을 신경 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한때는 마음속에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여자가 지금은 다른 남자 때문에 자신을 배신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는 손목에 맨 젖은 머리끈을 걷어내고 욕실 가운을 걸치고
초요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당신을 위해 아이를 가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 같은 남자 때문에 세 번이나 유산할 정도로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했어요? 기묵비, 난 당신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다구요!”“당신에 대한 사랑과 집착은 두 아이가 내 몸에서 조금씩 흘러내릴 때 함께 사라졌어요.”초요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때 당신 같은 남자에게 첫눈에 반한 걸 정말 후회해요.”기묵비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후회는 이미 끝났어. 초요. 넌 평생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어. 넌 영원히 내꺼야.”소유욕으로 가득 찬 그의 눈빛이 뒤집히며 초요의 저항 가득한 두 눈을 완전히 덮어버렸다....다음날 기모진의 상처는 많이 나아졌지만 완쾌되려면 아직 멀었다.며칠 동안 소만리가 와서 같이 밥도 먹고 약도 먹였다.기모진은 이 기간 동안 기묵비가 다시 와서 그를 귀찮게도 하지 않았고 경호원들도 계속 문 앞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했다.소만리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기묵비가 이대로 기모진을 놓아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그 안에 뭔가 숨겨진 사정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초요는 옆에서 들으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요즘 그녀는 매일 밤 기묵비의 뜻에 따라 그의 앞에 나타나서 그와 함께 밤을 보내고 그가 요구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가 다음날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병원으로 돌아왔다.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무디게 하고 싶었고 자신이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은 단지 기모진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자신을 속이고 싶었다.하지만 매번 기묵비가 키스하고 그녀에게 다가갈 때마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두근거리고 설레었다.그녀는 자신이 매우 가소롭고 슬프고 더욱이 동정 받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남자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니.기묵비는 요즘 초요에게 모든 신경을 쏟았고 소만리와 강자풍이 함께 있다는 것조차 잊었다.주말 사업 리셉션에서 기묵비는 강자풍과 함께 나타난 소만
소만리는 당당하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그래요. 나와 기모진의 아이예요.”기묵비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고 정황을 정확히 알고 싶었기 때문에 소만리의 정곡을 찌르는 듯한 말을 계속 듣고 있었다.“기묵비, 내 뱃속의 아이는 처음부터 당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심지어 당신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던 날 밤도 내가 당신을 위해 특별히 제작 주문한 향 때문에 생긴 당신의 환각일 뿐이었어요.”“당신은 꿈을 꾸었을 뿐이고 당신의 환상이 만든 광경일 뿐이었어요.”기묵비는 소만리의 조향 능력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풍자적이고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이렇게 오랫동안 그는 소만리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줄 알았고 그녀를 이미 다 가진 줄 알았는데 그날 밤의 일은 단지 꿈이었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그는 더욱 가소롭게 여겨졌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날 밤 그는 확실히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와 온화하고 아름답게 서로에게 사로잡혀 얽혀 있던 여인은 초요였다.“기묵비, 이제부터 다시는 당신의 위협을 받지 않을 거예요. 기모진을 다치게 한다면 내가 직접 동영상을 경찰에 보낼 거예요. 당신이 오랫동안 세운 사업, 내가 뿌리 뽑아 버릴 거예요. 당신 지위도 명예도 다 잃게 만들 거라구요.”소만리의 날카로운 눈빛은 그녀의 각오와 기세를 드러내기에 충분했다.기묵비는 이 날카롭고 가시 돋친 아름다운 눈을 바라보며 불같이 화를 내며 돌아섰다.강자풍은 이때 다시 소만리의 곁을 돌아보며 말했다.“미녀 누나 완전 멋진데. 난 기묵비가 여자한테 치욕 당하는 거 처음 봐.”그러나 소만리는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당신 사람들 갔어요, 안 갔어요?”“걱정 마요. 내가 전부 다 배치했으니까. 누나 딸은 무사히 돌아올 거에요.”강자풍은 가볍게 와인잔을 흔들며 말했다.“그런데 나 갑자기 누나랑 조건 바꾸고 싶어.”강자풍은 소만리에게 다가가 속삭였다.“돈은 필요 없어.
이 대답을 듣고 기묵비는 이내 깨달았다.소만리, 이것이 네가 강자풍 편에 선 이유였군.당신은 역시 아름다운 외모와 지혜를 다 갖춘 여자군.그러나 네가 이렇게 하면 가족이 다 함께 모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좀 순진한 생각인데.아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진정으로 알게 될 때가 올 거야....병원.초요는 시간을 보고 기묵비의 지시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별장으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녀가 막 돌아서려는 순간 기묵비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그의 얼굴빛은 차가웠고 온몸에 한기를 뿜어내며 심기가 아주 불편해 보였다.초요는 기묵비가 기모진을 귀찮게 하려고 방문한 것임을 느꼈고 즉시 문밖에서 기묵비를 막았다.“당신 뭐 하러 여기 왔어요? 당신이 말했잖아요. 내가 매일 밤 제시간에 별장에 나타나면 여기 기모진을 귀찮게 하러 오지 않겠다구요.”초요가 병실 안에 있는 기모진이 들을까 봐 낮은 목소리로 상기시켜주었다.기묵비는 못마땅한 듯 경멸하고 비웃으며 말했다.“넌 아무래도 너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아. 초요. 네가 이렇게 하면 정말 기모진이 무탈할 거라 생각했어?”그는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초요를 인정사정없이 밀쳤다.“기묵비!”초요는 그를 덥석 끌어당겼다. 초요의 눈은 그에게 남은 한 가닥 미련조차도 실망으로 뒤덮여 있었다.“기묵비, 내가 당신을 무시하게 만들지 마세요.”그러나 기묵비는 시큰둥하게 말했다.“당신이 날 어떻게 보든 말든 내가 신경이나 쓸 것 같아? 초요, 난 여태껏 신경 쓴 적 없어. 당신이 나 때문에 자살하러 갔을 때에도 난 신경 쓰지 않았어. 너를 위해 조금이라도 마음 아파하고 신경 쓴 적이 없다니까. 내가 신경 쓴 건 오직 소만리 뿐이었다고.”그의 입에서 토해 내는 말들은 마치 유리 파편 같았다.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잔인하게 초요의 마음을 도륙 내고 있었다.초요는 넋이 나간 듯 힘없이 기묵비에게 밀쳐졌고 그녀의 발걸음이 갈피를
기모진은 자신이 본 화면을 믿을 수 없어 기묵비의 핸드폰을 한 손에 빼앗았다.한 번 자세히 본 후 기모진은 이 동영상이 조작된 것이 아님을 발견했다.화면 상단에 표시된 날짜도 진짜였다.“어때? 이 선물이 놀랍지 않아?”기묵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기모진의 얼굴빛이 변해가는 걸 바라보며 말했다.“죽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지?”기모진은 기묵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시선을 동영상 속 귀여운 그림자에 고정했다.그는 손을 뻗어 화면 속에 천진난만하게 웃는 귀여운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가가 뜨거워졌다.“여온.”“자기 딸이 아직 무사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걸 보니 너무 기쁘지?”기묵비는 비꼬며 말했고 눈빛은 한층 더 거만해졌다.“그때 내가 소만리를 죽은 것처럼 꾸며서 너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한 후 F국으로 데려온 것과 같은 방법으로 난 여온이를 죽은 것처럼 꾸몄지.”기모진은 핸드폰을 움켜쥐고 날카롭고 차가운 눈초리를 치켜세우며 말했다.“기묵비, 이렇게 어린 아이까지도 가만두지 않다니.”“얘 친아빠가 너인걸 어떡하니?”기묵비는 책임을 기모진에게 돌리며 말했다.“만약 여온이가 3년 동안 나를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난 아예 인정사정없이 대했을 거야.”“기묵비.”“흥.”기묵비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화도 나고 질투도 많이 나지? 너의 친딸이 나를 아빠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나를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지아빠로 생각해.”“당신한테 질투 나냐고?”기모진은 마치 우스갯소리를 들은 듯 어이없다는 말투로 말했다.“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날 사랑하고 있고, 그런 우리에겐 사랑스런 딸이 있어. 또 곧 태어날 아이까지 있어. 내가 당신을 질투할 것 같아?”기묵비의 얼굴에 승리의 웃음이 일순간 사라졌다.그는 기모진이 가지고 있는 것이 더욱 그를 질투하게 만든다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기모진도 마침내 소만리가 입을 다물고 말하지 못하는 고충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기여온이 기묵비의 손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하다.그 아이는 기모진의 친혈육이다. 어떻게 자신의 혈육이 다른 사람에 의해 다치는 걸 가만두고 볼 수 있을까.그러나 알고 보면 또 모든 아버지들이 다 그렇게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초요는 자조 섞인 웃음이 피식 났다. 기묵비에게 죽임을 당한 두 아이를 생각하니 그녀는 가슴이 미어질것만 같았다.기묵비는 느릿느릿 병실에서 걸어 나오다가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 초요를 보며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날 따라와.”그가 명령했다. 그러나 초요가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눈빛을 보내자 멈칫하며 물었다.“왜? 기모진이 가서 돌아오지 못할까 봐 걱정돼? 흑강당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잖아. 그래 맞아, 내가 기모진이 돌아오지 못하게 한 거야.”“야비해.”초요는 경멸의 눈빛을 가득 담아 말했다.기묵비는 초요를 앞에 두고 그의 윤곽이 분명하고 준수한 얼굴에 한기를 실어 말했다.“이건 기 씨 집안사람들이 나한테 진 빚이야.”“기 할아버지가 정말 잘못했다고 해도 그걸 기모진한테 분풀이해서는 안되는 거잖아요. 당신은 늘 기 씨 집안사람들이 당신에게 빚을 졌기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제 보니 당신은 단지 기모진을 질투했던 거뿐이예요. 모든 면에서 당신보다 나은 기모진이라서 말이에요!”“입 다물어!”기묵비는 큰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초요를 강제로 별장으로 데려갔다.임신 중이라 움직임이 불편한 소만리는 술집에서 강자풍의 소식을 잠자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우리 여온이, 무사할 거야.곧 엄마 아빠 곁으로 돌아올 거야. 그리고 네가 가장 좋아하는 기란군 오빠랑 넷이서, 앞으로 우리 식구 모두 함께 잘 살아갈 거야.강자풍은 부하의 전화를 받고 막 처리하러 가던 참이었다.강자풍은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들보들하고 귀여운 아이를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멋진 오빠, 나 데리고 어디 가려고요?”기여온은 너무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