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의 말을 듣는 순간 기모진의 눈빛이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그러나 곧 그의 눈빛은 냉정을 찾았다.“당신 기묵비의 아이를 지키려고 이러는 거 알아. 그렇지만 소만리, 이 수술은 꼭 필요해.”“기모진! 자꾸 나한테 수술하라고 강요하면 정말 평생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소만리는 감정이 점점 격해지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노려보며 말했다. “만약 내 뱃속의 아이를 해칠 거라면 나부터 죽여요.”소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만약 방금 그녀가 묻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아이는 지금 없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하고 무서웠다.하지만 소만리는 채 멀리 가지도 못하고 기모진에게 붙잡혔다. “놔요!”그녀가 발버둥 쳤다.“이 아이 수술해야 해.”기모진이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소만리의 허리를 붙잡아 끌어안으며 수술실 안으로 걸어갔다. 소만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모진, 이거 놔. 당신은 이 아이를 해치면 안 돼! 기모진!”그녀는 그의 옷깃을 꽉 잡아당겼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기모진! 이 아이 당신 핏줄이에요! 당신 정말 이러면 후회할 거라구요!”“만약 정말 내 아이라 해도 어쩔 수 없어!”남자는 소리를 질렀고 갑자기 목이 막히고 숨이 막혀 오는 듯했다.이 말을 듣고 소만리는 멍하니 눈시울을 붉혔다.“뭐라구요? 기모진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요?”남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 아이는 살 수 없어.”그는 단호하게 같은 말을 또 했다. 날카로운 칼이 소만리의 심장을 관통해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수술대 위에 앉은 그녀를 안은 채 소만리가 어리둥절해하는 틈을 타 의사에게 말했다.“마취주사 놓으세요.”소만리는 정신을 차리고 반항했지만 마취주사는 이미 그녀의 팔에 박혀 있었고 잘생기고 훤칠한 그가 수술실을 나가는 것을 보았다. 소만리는 절망과 분노에 찬 눈으로 절규했다.“기모진! 당신 후회할
”소만리, 내 말 먼저 들어 봐.”“꺼져.”소만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손도 계속 떨렸다. “나 지금 당신 보고 싶지 않아. 꺼져. 경도로 돌아가요.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녀는 그를 노려보며 매몰차게 말하면서도 두 뺨에는 눈물이 흘러넘쳤다.그녀는 다시 생각하기조차 싫었지만 기모진은 그들의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사람이었다.이건 예전에 그가 그녀에게 주었던 그 어떤 고통보다 더 아팠다.그녀가 이렇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기모진도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당신 먼저 진정하고 좀 쉬어.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을게.”기모진이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갔고 병실 문이 닫혔다. 작은 창 너머로 그는 그제야 한쪽으로 가서 앉아 있는 소만리를 보았다.그는 소만리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녀의 오해는 한편으로는 그럴 만도 한 것이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기모진은 소만리에게 점심을 사다 주려고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었고 특별히 간호사에게 소만리를 좀 봐 달라고 부탁했다. 기모진의 준수하고 훤칠한 용모에 간호사는 단번에 응했다.소만리는 속이 텅텅 빈 것 같은 육신으로 창밖을 내다보고는 목에 걸린 조개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기모진, 알고 있어요? 당신 스스로 당신 자식을 죽였다는 거. 하지만 당신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어도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어요?소만리는 더 이상 기모진 곁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의 몸에는 어둡고 차디찬 피가 흐르고 있는 것만 같아서 견딜 수 없었다.기모진이 점심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보니 병상은 텅텅 비어 있었고 소만리는 온데 간데 없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병실을 뛰쳐나와 간호사를 불렀다. 방금 그 간호사는 기모진의 기세에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전전긍긍하며 말했다.“방금 병실 입구에 가서 봤는데요. 아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예요...”기모진은 애타게 병실로 돌아와 소만리가 없
기묵비는 매우 놀랐다. 그는 기운 없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뒤늦게 입을 열었다.“기모진이 당신을 풀어주던가?”소만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가 날 풀어줬어요. 그가 당신의 일을 절대로 누설하지 않겠다고 저에게 약속했어요. 그 대신 조건이 있어요. 당신은 꼭 그 사람을 경도로 무사히 돌려보내야 해요.”기묵비는 조용히 듣고 난 뒤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소만리, 이게 당신의 생각이야? 아니면 기모진의 생각이야?”“누구의 생각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도 이제 사람을 시켜 기모진을 뒤쫓는 일은 그만하세요.”소만리의 태도는 결연했고 그 의지는 눈빛에서 강렬하게 뿜어 나왔다. “만약 당신이 사람을 시켜 그 사람을 계속 쫓는다면 내 뱃속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것이란 기대는 버리는 게 좋을 거예요.”소만리의 말이 떨어지자 기묵비의 웃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기묵비에게 이 말을 하는 동안 소만리의 심장은 날카로운 칼로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몇 시간 전 그녀는 강제로 유산을 당했다. 아이는 이미 없어져 버렸다.그러나 그녀는 기묵비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을 것이다. 임신한 아이가 기모진의 아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알려서는 안 된다.소만리의 이런 요구에 기묵비는 분명 내키지는 않았지만 응하기로 했다.“그래, 약속하지. 기모진을 경도로 보내주지.”기묵비가 소만리에게 다가서며 말했다.“소만리, 가서 좀 쉬어. 난 지금 가서 아랫사람들에게 기모진에 대한 수색을 중단하라고 일러 두지.”그는 옅은 웃음을 띠며 말하고는 핸드폰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그는 기분이 한껏 처져있는 소만리를 돌아보고 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지금 모두 국제공항으로 가. 기모진이 분명히 거기에 있을 거야. 그에게 동영상을 건네받기 전까진 살려 둬.”소만리는 기묵비가 아랫사람들에게 뭘 건네받으라는 것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지금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져 눈앞이 캄캄해져 오는 것을
”당신을 믿었고 당신을 믿으라고 한 그 말을 믿었는데. 뭐, 소만리, 잊었어? 직접 나한테 말했잖아. 뱃속의 아이가 기묵비의 아이라고!”“...”소만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문득 기모진이 한 말을 떠올렸다.“이 아이는 당신 뱃속에 있으면 안 돼.”“퍽.”소만리는 다시 기모진의 얼굴에 뺨을 한 대 때렸다.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던 경호원 두 명이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듣고 지하실 쪽으로 다가왔다.“아래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설마?”“내려가서 보자고.”“같이 가요.”그 두 경호원은 지하실 문으로 가서 문을 밀어 가장자리에 있는 스위치를 켰다.힐끗 보니 지하실 안은 텅텅 비어 있었고, 사람은커녕 쥐 한 마리도 없었다.“잘못 들은 거야. 빨리 담배나 피우고 문 앞에 가서 지키고 있자고. 만약 사장님이 갑자기 돌아와서 우리가 없는 걸 보고 게으름 피우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우린 끝장이야.”두 경호원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지하실 불을 끄고 다시 문을 닫았다.문이 닫히고 나서야 문 뒤에서 있던 기모진은 저항하던 소만리의 입술에서 그의 얇은 입술을 떼었다.입술을 떼자마자 소만리는 기모진에게 다시 뺨을 때렸다.그는 어둠 속에서 지금 그녀의 모습을 잘 볼 수 없었지만 자신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느낄 수 있었다.그는 얼굴을 옆으로 기울였다. 몇 대를 맞은 것인지 기억나지 않았다.평생 그의 뺨을 때린 여인은 오직 한 사람 소만리 뿐이다.“꺼져. 당장 꺼지라구.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구요!”소만리는 목소리를 낮추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나는 보고 싶지 않지만 기묵비는 보고 싶은가 봐?”남자는 비웃으며 질투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몸도 좋지 않으면서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여기로 왔고 말이야. 그를 찾아와서 위로라도 받고 싶었던 거야?”“그래요! 난 당신 보고 싶지 않아요.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은 오직 기묵비 뿐이라고요. 이제 됐어요? 그럼 꺼지세요!”“난 안 가.”그가 갑자기
소만리는 얼른 옆으로 얼굴을 피했고 기모진은 얼음처럼 차가운 그녀의 옆얼굴과 마주하게 되었다.“기묵비가 곧 들이닥칠 거에요. 당신이 지금 가지 않으면 영원히 떠날 수 없을 지도 몰라요.”소만리는 냉정한 목소리로 일깨워주었다.“나한테 관심 있어? 알고 보니 내 전처가 아직도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기모진은 비웃음을 가득 담아 말했다.그의 서늘한 손가락이 소만리의 턱을 움켜쥐고 그녀의 얼굴을 그의 얼굴과 마주 보게 했다. 그녀의 붉게 물든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니 기모진의 마음도 찢어졌다.“소만리, 당신 마음속엔 내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 거야? 당신을 믿어 달라고 했었지? 당신은 나 믿은 적 있어? 그의 말이 그녀의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이때 아래층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기묵비가 돌아온 것이다.기모진은 창가로 가서 아래를 힐끗 보았지만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았다.“나 당분간 아무 데도 안 갈 테니 여기 잠시 있어.”“기모진, 당신 미쳤어요?”“나 미쳤어.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순간 난 이미 모든 이성을 잃었어.”“...”소만리는 그 말을 듣고 울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웃고 싶었다.“당신 그렇게 날 사랑했다면 내 뱃속의 아이를 그리 모질게 죽이진 않았을 거예요!”기모진도 소만리가 자신을 비난하며 원망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견딜 수가 없었다.이때 소만리는 몰랐겠지만 그녀가 그에게 안겨 수술대에 올랐을 때 마취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후회했고 수술을 번복했다.그래서 수술실로 뛰어 들어가 의식을 잃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자신이 이렇게 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지만 지금 들어가서 막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잃고서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를 아프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은 정말이지 그의 본심은 더더욱 아니었다.소만리는 너무나 슬프고 상심한 나머지 그녀의 안위 따윈 신경 쓰지도 않았다. 여전히
기모진의 눈앞에서 그녀는 윗옷과 바지를 벗은 후 샤워가운을 걸치고 방금 목욕을 끝낸 것처럼 꾸몄다.소만리의 목에 걸려 있는 조개 모양 펜던트를 보니 기모진의 마음이 들끓었다.소만리가 샤워기를 끄고 나가려 하자 기모진은 그녀를 안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를 그녀에게 경고했다.“기묵비가 당신을 절대 건드리지 못하게 해.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밤은 무사하지 못할 거야.”소만리는 기모진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품에서 그녀를 놓자 그녀는 화장실 문을 닫고 나갔다.기묵비는 소만리가 나오는 소리를 듣고 핸드폰 화면을 끄고 돌아서서 소만리를 바라보았다.“방금 당신 목소리가 별로 안 좋아 보이던데, 무슨 일 있어?”그의 목소리는 다정했고, 눈빛은 부드럽고 따뜻했다.“아무 일 없어요. 괜찮아요.”소만리가 대답했다. 기묵비는 손을 뻗어 살며시 소만리의 배에 얹으려고 했다.“우리 아이가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건 아니지? 우리 아이가 장난이 심한가.”그의 행동이 좀 갑작스러워서 소만리는 당황하여 급히 피했다.본능적인 거부감과 반발심 때문인지 소만리는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녀는 무의식 적으로 배를 만졌고 익숙한 입덧이 위에서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소만리는 입을 막고 화장실로 들어가려고 돌아섰을 때 화장실 안에 숨어 있는 기모진을 생각하며 걸음을 멈춰 섰다.기묵비는 갑자기 멈칫하는 소만리의 행동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다가 한편으로는 그와 소만리의 발자국이 아닌 듯한 흔적들을 바닥에서 보았다.“소만리, 토할 것 같아? 내가 화장실로 부축해 주지.”기묵비가 소만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고 했다.소만리가 기묵비의 손을 가로막자 기묵비는 뭔가 확신을 하고 직접 화장실로 향했고 문을 벌컥 열었다.기묵비의 행동에 소만리는 놀라서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화장실은 텅 비어 있었고 기모진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소만리는 여전히 곤혹스러웠고 입덧이 다시 찾아와서 토할 것 같았다.그녀는 화장
소만리는 놀라서 기모진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눈앞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니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지고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그녀는 황급히 손으로 기무진의 상처를 눌렀으나 그것은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하얀 손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고 그녀의 두 눈은 가시에 찔리는 듯 고통스럽게 시려웠다.“기모진, 기모진.”소만리는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고 그녀는 피로 물든 두 손으로 기모진의 아름다운 얼굴을 받쳐 들었다. 눈물이 강을 이루듯 눈앞을 가렸다. 기모진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총상이 주는 찢어지는 아픔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눈물로 얼룩진 소만리의 뺨을 만지며 말했다.“소만리, 울지 마. 나 같은 놈 때문에 눈물 흘려선 안 돼.”그의 마음은 찢어졌고 가느다랗게 뜬 눈에는 애틋한 사랑을 가득 담고 있었다. “당신의 마음을 돌려놓기 전에는 절대 죽을 수 없어.”그는 매우 힘없이 말을 이었지만 그의 눈은 조금도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았다.기묵비는 총을 거두고 천천히 기모진의 뒤로 가서 말했다.“동영상 어디 있어?”그는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기모진은 기묵비를 흘겨보며 입꼬리를 비꼬며 말했다.“만약 내게 일이 생기면 동영상은 자동으로 인터넷에 공개될 텐데. 기묵비 모험 한 번 해 보시려나?”기묵비는 매우 불쾌하다는 듯 언짢게 눈썹을 한 번 찡그렸다. 그는 누군가에게 위협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소만리가 가슴 아파하며 기모진을 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기묵비는 다시 총을 들었다.그러나 이 모습을 본 소만리는 갑자기 기묵비에게 달려들어 기묵비가 들고 있던 총을 빼앗았다.갑자기 일어난 일에 기묵비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그가 정신을 차리고 대응하려고 했을 때 소만리는 이미 기세등등하게 총을 들고 그를 겨누고 있었다.“당장 사람을 불러 기모진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그녀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하고 있었다. 붉게 젖은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서슬 퍼렇게 기묵비
소만리가 한 말에 기묵비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혼미해졌다.그의 머릿속이 갑자기 멍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손목에 지니고 있던 머리끈을 만지작거렸다.초요...밤은 이미 깊어졌다.기모진의 수술이 얼마나 진행이 되었을까. 소만리는 아직도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잠시 후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왔고 기모진이 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하자 그제야 그녀의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이 조금 가라앉기 시작했다.기모진이 자신을 보호하려고 온몸으로 총알을 받았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이 남자는 요 며칠 줄곧 냉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대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누구보다 그녀를 아끼고 있었다.생각해 보니 기모진이 언초와 약혼한 것은 단지 그녀에게 화풀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언초, 그 여자는 왜 그렇게 낯이 익을 걸까.소만리는 수술실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문득 놀라 잠에서 깨어보니 이미 날이 밝아 있었고 그녀의 몸에는 담요가 덮여 있었다. 아직 그녀 곁에는 경호원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기모진은요?”“사장님께서 이미 기모진에 대해 수속을 다 마치고 잘 처리하셨으니 부인은 걱정하지 마시고 먼저 별장으로 돌아가 쉬시면 됩니다.”소만리는 기묵비가 기모진을 위해 일을 잘 처리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기묵비가 기모진을 어디로 데려갔어요? 말하세요!”“부인은 별장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장님이 직접 말씀드릴 겁니다.”소만리는 이 경호원들을 더 추궁해 봐도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을 알고 바로 별장으로 돌아갔다.기묵비는 서재에서 책상 위에 있는 자료를 느긋하게 검토하고 있었다.“기모진은 어디 있어요?”소만리는 곧장 들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기묵비는 들고 있던 펜을 잠시 멈추며 말했다.“당신이 그렇게 그에게 관심을 가지면 내가 또 기모진을 위험한 상황에 빠트릴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