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진이 손을 놓던 찰나, 소만리는 두 손이 차가워졌고, 그녀의 마음은 한순간에 얼어붙어 깊은 물 속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그녀가 기모진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기모진이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밀어냈을 때, 그녀는 둔탁한 무엇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몰랐지만, 기모진이 상처를 입은 것 같다는 생각이 어슴푸레 들었다..소만리가 나무상자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자, 그녀는 괴로워서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삔 발목을 무시하고, 즉시 일어서서 나무상자에 막힌 문으로 달려갔다."기모진, 기모진 당신 들려요? 빨리 대답해줘요!" 라고 그녀는 불안으로 가득 차, 초조해하며 기모진을 불렀지만, 타오르는 불 소리 외에는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순간적으로 시야가 흐려진 소만리는 나무상자를 밀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눈앞의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마치 그녀의 호흡과 심장박동을 삼킨 듯 눈앞을 휘몰아쳤다. 눈 앞의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절망에 넋이 나간 듯 눈물로 가득 찬 소만리의 눈동자에 비슷한 광경이 아른거렸다. 그 광경 역시 큰 불에, 짙은 연기가 내 뿜고 있었다. 한 뚱뚱한 여자가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마치 악마에 빠진 것처럼 그녀를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 “소만리 네 이년, 내가 보기에 너는 이번엔 죽을 것 같아!"그 여자는 미친 듯이 휘발유를 뿌리고 다녔고, 아주 무능해 보이는 남자가 옆에 녹초가 되어 있었다.불길이 번지자 기모진은 갇힌 기란군을 창문 밖으로 옮겼다.그리고 그 미친 여자는 그 틈을 타 과도로 기모진의 팔에 칼을 세게 꽂았다.피가 줄줄 흘렀지만, 기모진은 기란군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때 그의 눈빛에 담긴 굳은 결심과 근심은 너무나 간절해 보였다.소만리는 갑자기 생각을 떨쳐버리고 온몸이 타는 듯한 열기로 둘러싸인 것을 느꼈지만 온몸이 차가웠다."기모진..."그녀는 넋을 잃고 그의 이름을 외치자 눈
소만리는 사화정의 손을 잡고 너무 급해 어찌할 바를 모르며 "기모진 어딨어요? 정말로, 정말 이미 죽었어요?"라고 물었다.놀라 허둥지둥하는 소만리의 얼굴과, 눈물이 가득한 눈을 보고 사화정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천리, 악몽 꿨어?" 사화정은 위로하며 "기모진은 조금 심하게 다쳤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라고 다독였다.사화정의 이 대답에 소만리는 갑자기 심장 박동을 회복했다."모진이 죽지 않았어요?""안 죽었어." 사화정은 "하지만 다리와 손을 다쳤고, 천리처럼 연기를 많이 흡입해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어."그것은 단지 악몽이었다.알고 보니 그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소만리는 가슴이 더이상 긴장되지 않는 듯하더니, 그녀를 숨막히게 했던 송곳으로 심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한순간에 말끔히 쓸어버렸다.사화정은 소만리의 표정의 변화를 관찰하며 묵묵히 이해했다.원래 천리가 그렇게 기모진을 신경 썼다.마음이 가라앉자 소만리는 담담하게 "엄마, 기모진은 어느 병실에 있어요?"라고 물었다.사화정은 이 소리를 듣고 유달리 기뻐하며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모진은 바로 너의 옆 병실에 있어."바로 옆이라니?소만리는 몸을 돌려 움직이자 비로소 염좌 된 발목 부위에 큰 통증을 느꼈다.그녀가 조심스럽게 움직여 기모진 병실 앞으로 걸어가려 할 때, 기묵비가 앞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소만리는 다가온 기묵비에게 의해 기모진 병동으로 가는 발길이 막혔다.기묵비는 얼굴에 근심 어린 빛을 띠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손에 아름답고 감동적인 꽃다발이 들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천리, 당신 깼어요? 왜 여이게 서있어요? 어서 병실로 돌아가요."그는 소만리의 어깨를 꼭 껴안고 그녀를 안고 돌아갔다.소만리는 곁눈질로 기모진이 있는 병실 앞을 바라보며 스쳐 지나가자 설명할 수 없는 쓸쓸함이 저절로 떠올랐다."당신과 기모진이 이혼증명서를 받으러 가면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중간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어요."
이것은 기종영의 목소리였다.소만리는 황급히 옆으로 몸을 돌려, 벽 뒤에 섰다.그녀는 눈을 낮추고 옆에 있는 기란군이 큰 눈을 반짝이며 의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고 소만리는 순간 자신이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느낀 듯 그녀의 뺨이 약간 뜨거워졌다.“엄마, 뭐하는 거예요? 왜 아빠 보러 안 들어가세요?" 꼬마가 순진무구하게 물었다.소만리 하얗고 깨끗한 두 뺨이 불그스름해졌다. "네 아버지가 이미 깨어나셨으니, 엄마는 들어가지 않을게.”"왜요?" 기란군은 이해가 가지 않는듯 유리구슬처럼 큰 눈을 깜박거렸다.소만리는 몸을 구부려 기란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군군, 너는 아직 어려서 여러가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아. 엄마가 조금 힘들어서 다시 자고 싶은데, 너는 아빠를 보러 들어가도 돼. 그런데 아빠에게 엄마가 왔었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아줘.”꼬마는 더 어리둥절하고 곤혹스러우면서도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소만리는 병실로 돌아와 조용히 드러누워 있었다.기모진이 불에 갇혀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때를 회상하면서 그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기모진이 깨어나니, 목구멍이 뻑뻑하고 눈앞이 어두워서 손을 내밀어보았지만, 손바닥의 윤곽조차 잡을 수 없었다.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기종영은 즉시 의사를 부르러 갔지만, 기모진이 입을 열고 말한 첫 마디는 소만리의 상황을 묻는 것이었다."천리는 어때요? 그녀는 괜찮아요?" 그의 깊은 목소리는 힘이 없고 좀 더 쉰 목소리의 느낌이 들었다.”"만리는 괜찮아, 안심해.”기모진은 말없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입가에는 편안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지만…….그는 다시 왼손을 들어 매혹적이고 그윽한 눈동자로 한참을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는 대단히 차분하게 스스로를 비웃었다.의사가 곧 와서 기모진의 상태를 한 번 살펴보았다.기모진은 자신의 시력이 침침해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리 다친 거 아니에요? 이렇게 빨리 퇴원할 수 있을까요? 소만리는 앞서 기모진이 손과 다리를 다쳤다고 말한 것을 기억했다.사화정은 소만리의 눈을 피해 그녀를 부축하며 천천히 말했다. "의사가 퇴원할 수 있다고 했어. 내 생각엔, 별일 없을 것 같아.”"그 사람이 괜찮으면 다행이에요, 전 더 이상 그에게 빚지고 싶지 않아요." 소만리는 담담하게 말하면서, 기모진과 관계를 분명히 하고 싶다는 결심을 내비쳤던 것이다.사화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감히 소만리에게 알리지 못했다. 사실 기모진의 부상은 매우 심각했다.그는 종아리에 근골을 다쳐서 지금은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눈은 더더욱 빛을 잃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기묵비는 병원에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부하들에게 소만리가 납치된 일을 조사하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소만리가 납치된 궤적을 따라 경찰보다 한 발 빨리 아파트 건물에 숨어 있는 육정을 찾아냈고, 동시에 육정과 소만리의 갈등을 이해했다.육정은 교외의 기묵비의 별장으로 끌려가면서 몸부림을 쳤다.해가 지고 저녁노을이 무척 아름다웠다.기묵비는 정원의 화단 옆에 우아하게 앉아 한가롭게 홍차를 음미하고 있었다.“당신 누구야? 왜 나를 잡았어? 빨리 놓아줘!” 육정의 고함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이윽고 기묵비의 부하들은 허둥대는 육정을 기묵비 앞으로 밀어냈다.육정이 기묵비 앞에서 비틀거리며 넘어지자, 그는 갑자기 눈을 들어, 눈앞의 모습이 범상치 않고 기품이 우아한 남자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당, 당신, 누구세요? 왜 사람을 시켜 저를 잡으셨어요?"기묵비는 반쯤 웃으며, 입꼬리를 올리며 나른한 말투로 "자신이 뭘 했는지 몰라?"라고 물었다.육정은 몸서리를 쳤다. 설마 고리대금 빚 독촉인가?막 생각하고 있을 때 기묵비가 일어서니, 훤칠한 몸매에 사악한 기운에 압도되었다."만리를 기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은, 이 생에서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을 것이야."
사화정은 위청재와 다투기 귀찮아하며 기모진의 예쁘지만 초점거리가 없는 눈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모진, 내가 물을게요, 당신은 내 딸을 사랑합니까?"이 질문은 기모진을 약간 놀라게 했다."대답해 보세요. 당신은 정말 천리를 사랑합니까?” 사화정이 물어보는 말투가 상당히 급박했다.기모진은 "당연히 사랑합니다."라고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자, 당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알려줄게요. 천리는 내일 기묵비 함께 F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아마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기모진의 눈이 먼 눈빛속에 조금 외로움과 절망이 조금 더해졌다."알겠습니다.”"이게 다예요?" 사화정은 이렇게 침착하게 반응하는 남자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기모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미소 지었다. "방해하지 않고, 귀찮게 하지 않는 게 내가 천리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에요." 사화정은 그 말을 듣고 매우 의외라고 생각했다.기모진이 난간을 만지며 위층으로 올라간 것을 보고,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내일 아침 10시 30분 비행기, 갈지 안 갈지 당신 스스로 결정하세요."이 마지막 말을 마치고 사화정은 가버렸다.기모진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앞으로 갔다.위청재는 기모진의 뒤를 따라 연거푸 "모진, 너 절대 가지 마, 너는 소만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라고 강조했다."모진, 엄마의 권유를 들어라, 이 세상에 소만리보다 더 좋은 여자가 많으니 더 이상 그녀를 생각할 필요 없어.""모진, 모진..."그러나 위청재가 뭐라고 하든 기모진은 그녀를 외면했다.그는 한때 소만리와 결혼했던 침실로 한 걸음 한 걸음 돌아갔다.그러나 그녀의 오래된 향기는 사라지고 외로움과 쓸쓸함만 남아 있었다.그가 어둠 속을 더듬어 그 해의 웨딩 사진첩을 찾아, 사진의 무늬를 살살 어루만지자 기모진의 손끝은 차가웠고, 이 서늘함은 마음속으로 직행했다.천리, 당신이 행복하기만 하면 난 행복
다른 이유?기모진은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소만리의 모습이 떠올랐다.천리, 석 달이 지났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이때, 갑자기 누군가가 기모진 곁을 황급히 지나갔고, 그 사람은 그의 어깨와 부딪혀,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진료기록카드와 검사 보고서 모두를 땅에 떨어뜨렸다. "미안해요, 제가 급합니다."그 사람은 사과하고 바로 도망갔다.기모진은 갑자기 생각이 중단된 것에 불만을 품은 기모진은 쪼그려 앉아 떨어뜨린 물건을 주웠다."선생님, 이것들은 당신의 물건이에요."눈앞에서 여인의 온유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기모진이 떨어뜨린 진료기록카드를 건네 주었다.기모진은 긴 눈을 치켜들고 감사 인사를 하려는데, 앞에 있던 여자가 갑자기 그의 팔을 잡고 뒤로 당겼다.“조심해요, 차가 있어요.” 그녀는 호의로 일깨워 주었다.기모진은 똑바로 서자마자 "감사합니다"라며 즉시 팔을 뒤로 뺐다."천만에요." 여자는 말투가 우호적이었고, 아름다운 눈으로 기모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선생님, 눈이 안 보이시죠?"기모진이 대답하지 않자 여인은 황급히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다만 저는 악의는 없었어요."기종영은 이때 차를 몰고 지나가다가 한 여자가 기모진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 "이 아가씨는…"그는 말을 반쯤 하다가 문득 여인의 얼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어안이 벙벙했다.여자는 웃으며 친근하게 명함 한 장을 건네 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 명함입니다."기종영은, 시선을 떼고 명함을 들고 한 번 바라보며 "만비비, 정신과 의사?""당신은 정신과 의사입니까?" 기모진은 살짝 곁눈질했다."네, 저는 정신과 의사예요. 제 삼촌이 여기서 일해요. 오늘은 주말이라 잠깐 그를 보러 들렸어요. 그럼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섰다.기모진은 볼 수 없었지만 기종영은 이상한점을 알아차렸다."왜요? 이 여자한테 무슨 문제가 있어요?"기종영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기모진은 찾는 동작을 갑자기 멈췄다.그는 놀라며, 빛도, 색도 구분할 수 없는 그 눈동자를 살며시 들어 올렸다. "당신이에요? 경도에 언제 돌아왔어요?"“어제.”이 대답을 들은 후, 기모진의 암담한 눈동자 속에 갑자기 빛이 들어섰다.그는 천천히 일어나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와 마주했다. "천리도 당신과 함께 돌아왔어요?"기묵비는 두 눈을 실명한 기모진을 쳐다보고, 또 방금 주운 이 결혼반지를 내려다보며, 흥미진진하게 손끝으로 장난을 치고 있다가 살짝 입술을 열었다."맞아. 천리도 같이 돌아왔어."말을 꺼내는 동시에, 기묵비는 기모진의 눈에서 기쁨을 보았다.그는 입꼬리를 구부리고 웃었다. "나와 천리는 이번에 경도에 돌아와서 군군을 데리고 F국으로 돌아갈 거야."그의 대답은 기모진 즐거운 표정을 과감히 깨뜨렸다. "천리는 너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아 해. 당신도 천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게 좋겠어. 특히 지금 당신 같은 모습으로….""나의 지금 이런 모습?" 기모진은 낮은 소리로 웃었다. "눈먼 장님이 당신으로부터 천리를 데려올까 봐 두려운가요?"기묵비는 불쾌한듯 인상을 찌푸렸다. “기모진, 너는 전에 자격을 갖춘 남편이 아니었어. 이제는 자격을 갖춘 전 남편이 되길 바래. 자격을 갖춘 전 남편은 죽은 듯이 있어야지.” 기모진의 눈빛이 짙어지더니, 기묵비의 말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재빠르게 손바닥을 내밀며 "반지 돌려줘요"라고 말했다."반지는 너에게 돌려줄 수 있지만 네가 한 말을 기억하는 게 좋겠어. 천리를 그만 괴롭혀.""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기모진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 “내놔요.”"일주일 뒤 천리와 나는 F국으로 돌아갈 거야. 그때 사람을 시켜 네 앞에 반지를 놓을게."이 뜻을 들으니, 기묵비는 지금 이 반지를 돌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기모진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막 손을 뻗어 기묵비의 멱살을
"엄마, 이따가 진짜 군군 오빠를 만날 수 있어요?" 기여온의 앳된 목소리는 계곡의 맑은 샘처럼 감미로웠다.소만리는 "엄마가 어떻게 염염을 속일 수 있겠어, 잠시 후에 군군 오빠를 만날 수 있어요."라며 빙그레 웃었다."좋아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막대사탕을 군군 오빠에게 줄 거예요." 염염은 귀여운 손으로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손뼉을 치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자, 마치 가슴팍에 박힌 박자기처럼, 보는 것 같았는데, 한 번 한 번 칠때마다, 기모진의 마음이 은근히 아파왔다.그는 분명히 소만리가 웃음꽃을 피우며 1미터도 채 되지 않은 거리에서 자신을 지나쳤다는 것을 느꼈다.그는 지금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고, 현모양처였을 때의 온유하고 다정했던 모습을 상상하며, 매일 밤 그녀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푹 잘 것이라고 상상하니, 기모진의 눈시울이 거의 바람결과 함께 붉어졌다.그는 소리 없이 돌아서서, 소만리의 반대쪽으로 점점 멀어져갔다…….기여온이 기란군을 처음 만났을 때, 두 꼬마는 유난히 서로에게 무척 친절했다.이제 와서 상대방이 자신의 친남매임을 알게 되어 매우 기뻐했다.비록 혈육이라는 이 두 글자가 어린 이들에게 아직은 생소하지만, 그 기쁨은 진실이었다.모현과 사화정은 일찌감치 기여온에게 큰 돈봉투를 준비해 두었는데, 이렇게 생기발랄하고 귀여운 인형 같은 여자 아이를 보고 두 부부는 기쁨에 겨워 두 눈을 붉혔다.두 아이는 이복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좋았다..소만리는 신나게 놀고 있는 두 남매를 보며 머릿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기모진을 떠올렸다.기묵비가 전화하는 것을 보고, 소만리는 사화정 옆에 앉았다. "엄마, 기모진 전에 다리를 다쳤나요?"사화정은 그 두 아이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만리가 이렇게 물으니 좀 의외였다.소만리는 부랴부랴 "그는 나를 구하다가 다쳤는데, 만약 그가 괜찮다면 다행이에요"라고 해명했다.사화정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발 부상은 다 나았지만,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