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풍의 매서운 눈빛과 엄정한 말투에 남자아이의 아빠는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아들이 맞은 걸 떠올리자 다시 기세등등하게 나섰다.“참 이상한 젊은이 다 보겠네. 아빠도 아니면서 왜 여기서 나서요? 얘가 내 아들을 때렸는데 무슨 근거로 이렇게 맞서는 거예요?”남자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건방진 모습을 보였다.“채 선생님, 내가 이렇게 비싼 돈을 써 가며 내 아들을 여기 보내는데 이렇게밖에 못 하는 거예요? 잘 돌봐줘야지, 안 그래요? 지금 내 아들이 이 쬐끄만 얘한테 맞았는데 제대로 안 할 거예요? 해고당해 봐야 정신 차릴 거냐구요? 예?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선생님까지도 고소할 거예요!”“뭐라구요? 누굴 보고 쬐끄만 애라는 거예요? 다시 한번 말해 보세요.”강자풍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의 눈은 한겨울 매서운 칼바람처럼 그 남자를 노려보았고 순간 남자는 당황했다.“채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해고당하실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교실에 CCTV 있죠? 지금 바로 확인해 보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을 거예요.”채수연은 남자아이의 아빠가 자신을 위협해 해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강자풍이 자신을 옹호하며 굳게 약속을 하는 모습에 마음이 적잖이 안정되었다.“네, CCTV 있어요. 바로 확인해 볼게요.”채수연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남자아이의 아빠는 이런 상황이 약간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CCTV라니? 아니 지금 눈앞에서 버젓이 그런 사실이 있었는데 무슨 확인이에요! 여기 있는 많은 아이들이 직접 보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거짓말하지 않아요.”그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서 있는 기여온을 가리키며 말했다.“얘! 넌 왜 아무 말도 안 하니? 사람을 때리고도 사과를 하지 않다니. 너 뭐 여자라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남자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구? 어서 빨리 내 아들한테 사과해. 사과하면 이 일은 더 따지지 않을 테
강자풍은 기여온의 곁으로 가서 손을 뻗어 작고 귀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여온아, 겁내지 마. 오빠가 있으니 아무도 여온이 괴롭히지 못할 거야.”강자풍이 곁에 있을 때 기여온은 두려운 게 하나도 없었다.그녀는 비록 아주 작고 여린 아이였지만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을 대할 때는 여태껏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처음에 강연이라는 여자를 마주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그 악마 같은 여자가 자신을 연못에 던졌을 때도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구걸한 적이 없었다.이 여린 마음에서 느껴지는 강인함은 소만리의 그것과 완전히 닮았다.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남자아이 아빠가 내뱉는 온간 비난에도 기여온은 침묵만 지키고 있을 뿐 눈도 깜짝하지 않은 것이다.채수연은 상황을 목격하고 얼른 강자풍에게 시선을 던졌다.“강 선생님, 왜 그러세...”“맞아요. 제가 사람을 때렸어요. 이 사람은 맞아야 해요.”강자풍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채수연의 얼굴에 시선을 떨어뜨렸다.“CCTV 확인해 보셨나요?”“네. 사무실로 들어가서 같이 보시면 될 것 같아요.”채수연은 바닥에서 허둥지둥 일어서는 남자를 보고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세요?”“괜찮냐구요? 괜찮아 보여요? 애도 손버릇이 나쁘더니 어른도 마찬가지네요. 당신들 똑똑히 두고 보세요. 내가 당신들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만들 테니까!’남자가 노발대발하며 위협했다.“CCTV는 무슨 CCTV예요! 보나 안 보나 뻔하지 뭐! 지금 당장 저 벙어리가 내 아들한테 사과해야 해요. 그리고 이 새파랗게 젊은...”“다른 쪽 얼굴도 맞고 싶어서 그래요? 얼른 CCTV나 보러 갑시다. 만약에 여온이가 당신 아들을 괴롭힌 게 사실이라면 당신 마음대로 처리해도 돼요. 하지만 당신 아들이 먼저 여온이를 건드렸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당신 그 남은 반쪽도 성치 않을 테니까 각오해요.”강자풍은 차갑게 내뱉고는 기여온을 안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남자는 화도 났지만 약간 위축되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
”저...”강자풍의 매서운 눈빛을 보며 남자는 오금이 저렸다.“이놈아! 다 네가 저지른 일이잖아. 어서 사과해!”남자는 옆에 있는 아들에게 호통을 치며 기여온에게 밀어붙였다.“빨리 사과해!”남자가 이렇게 겁에 질렸으니 남자의 아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아, 미, 미안해, 여온아.”남자아이는 전전긍긍하며 사과했고 기여온을 감히 똑바로 쳐다볼 용기도 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러자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셨죠. 지금 내 아들이 사과했잖아요. 이제 됐죠?”강자풍은 차갑게 눈을 치켜떴다.“그냥 그 정도면 됐다 싶어요? 당신은요? 당신은 아무 잘못 없어요?”“그...”“부모는 자녀의 가장 가깝고 친근한 선생님이에요. 아들이 이런 행동을 보인 데는 아빠로서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어요.”“... 네, 아, 네네.”남자는 연신 대답하며 강자풍에게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하다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당신 말이 맞아요. 아빠로서 책임이 큽니다. 커요.”그는 면목 없는 얼굴로 순순히 기여온에게 사과했다.“꼬마야, 아저씨가 잘못했어. 아저씨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기분 나쁘게 했다면 미안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미안해. 꼬마야.”사과의 말을 듣고 있던 강자풍의 눈빛이 차갑게 남자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다시 따뜻한 눈빛으로 돌아와 기여온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여온아, 어떻게 생각해? 사과 받아줄 수 있겠어?”강자풍은 남자에게 말할 때와는 딴판으로 상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물었다.채수연의 눈에는 선망의 빛으로 가득했다.그녀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남자의 눈빛이 저렇게 극진하고 사랑스러운 걸 본 적이 없었다.이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강자풍의 예상대로 기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그들의 사과를 받아들였다.기여온은 지금까지 온순하고 얌전한 아이였다. 함부로 경거망동하는 아이가 아니었다.만약 다른 사람이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작은 우주가 폭발할 수
채수연은 유치원을 나서는 강자풍을 배웅해 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강 선생님, 방금 절 위해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웠어요.”강자풍은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 채수연이 고맙다는 말을 하자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그냥 통상적인 일을 한 것뿐이에요. 특별히 선생님한테 감사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평소에 여온이 잘 돌봐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여온이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알려주세요.”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강 선생님,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여온이를 더 주의 깊게 살펴볼게요.”“고맙습니다.”강자풍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는데 방금 자신에게 한 대 맞은 남자가 경찰 두 명을 데리고 씩씩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강자풍이 떠나려는 듯하자 남자는 서둘러 걸어오며 옆에 있던 경찰에게 강자풍을 가리켰다.“경찰관님, 얼굴 하얀 저 사람이에요! 저 사람이 방금 내 얼굴을 때렸어요. 이것 좀 보세요. 내 얼굴이 부었잖아요! 꼭 저 사람 좀 잡아주세요!”강자풍은 그 남자의 언행이 가소로운 듯 입꼬리를 살짝 잡아당겼다가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채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방금 그들에게 싹싹 빌던 남자가 경찰에 신고를 할 줄은 몰랐다.CCTV 확인 후 모든 것이 남자아이의 잘못으로 판명 났지만 강자풍이 이 남자를 때린 건 사실이었으니 이리저리 난감한 일이 되어 버렸다.여기까지 생각하자 채수연은 강자풍이 걱정되기 시작했다.두 경찰관은 강자풍에게 다가가 진지한 어투로 물었다.“방금 이 사람 때린 게 맞습니까?”강자풍은 눈을 희미하게 뜨고 남자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맞아요. 제가 방금 이 남자를 때렸어요.”강자풍이 순순히 인정하자 남자는 갑자기 기고만장한 얼굴로 말했다.“경찰관님, 방금 들으셨죠? 바로 인정하잖아요! 날 때린 게 확실하다구요. 그러니 어서 빨리 잡아넣으세요!”남자는 입가에 불순한 미소를 한가득 품고는
경찰은 점잖게 말했다.강자풍은 조금 전까지 거들먹거리며 의기양양하던 남자를 힐끔 보다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죠.”그는 담담하게 대답했고 옆에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채수연을 바라보았다.“선생님은 그만 교실로 돌아가세요. 여온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마음속으로 걱정이 되어서 무슨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자신이 여기서 끼어들 주제가 아닌 것 같아 고개만 끄덕였다.“강 선생님, 걱정 마세요. 저희 반 모든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강자풍은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겼고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두 경찰관은 강자풍의 뒤를 따르며 남자를 불렀다.“류 선생님도 경찰서에 함께 가 주시죠.”남자는 겁에 질린 눈으로 강자풍의 우뚝 솟은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기가 꺾여 뒷걸음질쳤다.“저, 저기 이 일은 그냥 여기서 그만두죠.”남자는 왠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물러서고 싶었다.강자풍과 경찰은 남자의 말을 듣고 동시에 걸음을 멈춰 세웠다.“류 선생님, 그만두라는 게 무슨 뜻이죠?”경찰이 물었다.남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붉어진 뺨을 만졌고 겁에 질린 얼굴로 강자풍을 쳐다보았다.“고소하지 않을게요. 그냥 오늘 내가 재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말래요. 지금 바로 회사로 가 봐야 해서 그럼 저 먼저 가 볼게요.”남자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망치듯 돌아섰다.“잠깐만요! 류 선생님!”경찰관이 남자를 불러 세우고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류 선생님, 방금 경찰에 신고하셨잖아요? 우린 이미 사건을 등록했어요. 이렇게 그냥 가 버리며 됐다고 하면 그냥 되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되면 우리 경찰의 일을 방해하고 가짜 사건을 신고한 혐의로 경찰 쪽에서 당신을 고소할 수도 있어요. 정말 그러길 원하시는 거예요?”경찰의 말을 듣자 남자는 갑자기 태세를 전환해 비굴한 자세로 돌변했다.“그, 그럼 같이 경
경찰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그러세요? 강자풍이 당신 아들을 때리기라도 할까 봐요?”“그, 그게, 내 아들을 때리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구요!”남자는 자신이 하는 말이 과장이 아니란 걸 강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두 경찰관은 서로를 쳐다보았고 이 일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잠시 후 강자풍을 심문하던 경찰이 무거운 얼굴로 취조실에서 나왔다.그 류 씨 성은 가진 남자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제일 먼저 달려갔다.“경찰관님, 어떻습니까? 이제 저 강자풍을 잡아넣는 거예요?”“강자풍은 처음부터 당신을 때렸다는 것을 선뜻 인정했어요. 그것에 대해서는 해명할 의사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남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렇지만 뭐예요?”“류 선생님, 강자풍이 지금 당신과 당신 아들을 고소하려고 합니다.”“...뭐라구요? 나랑 내 아들을 고소한다고요?”“네.”경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게다가 강자풍은 그의 변호사를 불렀어요. 아마 곧 도착할 거예요.”“...”“류 선생님, 아드님이 기여온이라는 아이를 괴롭혔고 류 선생님도 그 아이에게 언어 폭력을 행사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그, 그게...”남자는 우물쭈물하며 눈알을 굴렸다.“아니에요. 아니라구요! 어떻게 어른이 어린아이한테 그럴 수 있겠어요? 아니에요. 그 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헛소리하는 거예요. 그 사람 가족이 다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그 사람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뻔해요. 경찰관님, 절대 강씨 성 가진 그놈한테 속으시면 안 돼요. 난 여자아이를 괴롭힌 적이 없어요...”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찰서 문 앞에서 누군가 후다닥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경찰관님.”채수연이 사건을 맡은 경찰에게 곧장 다가가서 자기소개를 했고 손에 든 USB를 건넸다.“경찰관님, 수사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지고 왔어요.”경찰은 채수연이 건넨 USB를 받아 다른 동료에게 전달해서 내용을
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그의 제안에 내심 놀랐지만 곁으로는 여전히 온화하고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오늘 저녁 시간 괜찮아요. 하지만 그러면 제가 너무 방해되지 않을까요?”“아닙니다. 선생님만 괜찮으시다면 아무 문제없어요.”“네, 그럼 알겠습니다.”채수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마음속으로는 강자풍의 집에 갈 때 무슨 선물을 들고 갈까 생각하고 있었다.드디어 유치원 마칠 시간이 되었다.강자풍은 제시간에 유치원 정문에 나타났고 채수연은 기여온의 손을 잡고 강자풍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강 선생님, 제가 일이 아직 조금 남아서요. 우선 여온이 데리고 먼저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일 보세요.”강자풍도 별말 없이 기여온을 데리고 돌아섰다.채수연은 약간 실망한 눈빛으로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았다.그러나 계속 그렇게 멍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그녀는 질서정연하게 유치원 아이들을 학부모들의 손에 넘겨주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남아 있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일이 거의 다 끝날 때쯤 하늘도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그녀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강자풍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살짝 실망해하고 있던 순간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이 전화한 줄 알고 화들짝 놀라 쳐다보았으나 집에서 온 전화였다.채수연은 가방을 들고 집에서 온 전화를 받으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엄마, 오늘 저녁은 집에서 안 먹을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그녀는 전화를 끊으며 유치원 정문으로 걸어갔다.날은 이미 어두워졌다.그러나 잠시 후 강자풍의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을 생각을 하니 그녀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녀는 택시를 잡으려고 정문 밖으로 걸어갔는데 갑자기 검은색 승용차가 한 대 다가와 그녀 앞에 멈춰 섰다.채수연이 의아한 눈으로 자세히 보니 잘생기고 온화한 강자풍의 얼굴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채 선생님, 타세요.”
강자풍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채수연도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차가 멈췄을 때 채수연은 말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침묵이 가득한 차 안에서 그녀는 정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차에서 내린 채수연은 기여온을 안으려고 했지만 강자풍이 그녀보다 한 발 더 빨랐다.“제가 할게요.”강자풍은 단호하게 앞으로 나와 기여온을 품에 조심스럽게 안고 갔다.“채 선생님, 이쪽으로 오세요.”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채수연은 강자풍을 따라 들어갔다.그녀는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강자풍이 사는 집이 특별히 호화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보통 사람들이 이렇게 큰 집에 쉽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집안 배경을 떠올렸다.그의 친형 강어는 한때 F국을 주름잡던 거물이었다.나중에 강어가 하는 사업이 불법적인 거래와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긴 했지만 한때 누구도 무시 못 할 거물이긴 했다.강자풍은 그의 친동생이다.그러나 오늘날까지 그가 F국에서 자신의 사업을 번창시키며 사는 이상 그의 시업은 강어가 했던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채수연은 마음 놓고 그와 왕래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채수연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혹을 나름의 논리로 정리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얼굴에 웃음꽃을 피울 수 있었다.현관에 들어서자 강자풍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모두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도련님과 선생님 오셨네요. 아, 채 선생님 맞으시죠? 어서 들어오세요.”채수연은 강자풍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나와서 극진히 대접해 줄 줄은 몰랐다.뭔가 대우받는 느낌이 들어 그녀는 마음이 몹시 흡족했다.“고맙습니다.”채수연이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강자풍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왔다.“어, 강자풍 이제 왔어요? 오늘 밤 귀한 손님이 오신다던데 내가 괜히 온 건 아닌지 몰라.”익살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농담을 던지며 다가오는 남자를 보고 채수연은 발걸음을 멈칫했다.그녀는 고개를 들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